3월 1일 임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 유생(儒生)을 친시(親試)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음악을 정지하도록 한 하교(下敎)를 환수(還收)할 것을 극력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내 하교하기를,
"오늘 전정(殿庭)에서 시사(試士)한 의도는 또한 깊다. 아! 수많은 선비들이 모름지기 내가 동쪽 월대(月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공묵합(恭默閤)에서 조용히 조섭할 때와 같다고 여길 것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많은 인재에 비하면 마음이 비록 부끄럽기는 하지만 나라를 위하여 현명한 이를 얻으려는 것이 바로 나의 고심(苦心)이다. 아! 선비들이여, 천박하고 화려한 것을 물리치고 성실함에 힘써서 응제(應製)하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대내(大內)로 돌아와 과거 합격자의 석차를 매기게 하고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홍사묵(洪思默)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3월 2일 계묘
삼일제(三日製)에서 뽑힌 유생(儒生) 등을 소견하였다.
3월 3일 갑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하교하기를,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늘그막에 그 마음이 해이해지는 듯하여 근년에는 친경(親耕)하고 친잠(親蠶)하여 바로 백성들에게 우러러 보도록 하였으니, 내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선농단(先農壇)의 향을 받는데도 이미 지영하였으며, 선잠단(先蠶壇)에도 역시 지영하니, 뜻이 대체로 깊다. 임금은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 짓고 누에 치는 것에 의지하니, 그 중대한 것을 우선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령 칠사(守令七事)068) 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신칙하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지평 송취행(宋聚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과장(科場)에 대하여 신칙한 전후(前後)의 성교(聖敎)는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지난번 정시(庭試)에서 급제한 박사기(朴思機)는 탁명(坼名)069) 한 뒤에 끝내 찾을 수 없어 즉시 방방(放榜)에 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친림(親臨)한 시사(試士)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도 박사기가 당초에 과장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제술(製述)하여 적은 것을 빌렸다는 말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었으니, 그것이 과장을 엄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사건이 지나간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방(榜)에서 빼버리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언민(兪彦民)은 이미 〈부임(赴任)을〉 재촉한 명이 없었는데, 약원(藥院)에서 잇달아 아뢰는 등 온 조정이 초조하게 허둥대는 때에 갑자기 사폐(辭陛)070) 하였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 놀랄 만합니다. 청컨대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유언민에 대한 일은 놀랍게 여길 만하다만, 박사기의 일은 이러한 시기에 이런 종류의 글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응답하겠는가? 그 글을 돌려주고 그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을사
임금이 대궐로 돌아왔다.
3월 5일 병오
형조[秋曹]에 명하여 거짓으로 복제(服制)를 핑계대는 자를 조사해 내도록 하고, 진시(陳試)071) 하는 자는 특별히 청금록(靑衿錄)에서 빼버리고 자신에 한(限)하여 과거 응시를 정지하게 하였다. 당시 글을 할 줄 모르면서 우연히 초해(初解)072) 에 참방(參榜)하고는 거짓으로 복제를 핑계대며 진시하는 폐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의 선래 군관(先來軍官)으로 분상(奔喪)073) 한 자에 대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돌보고 도와 주게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그것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제도 병사(諸道兵使)의 습진(習陣)과 조련(操鍊)에 대한 장계(狀啓)를 열람하였는데, 그 가운데 수령이 직접 통솔하거나 영부(領付)하지 않음이 많으므로 하교(下敎)하여 엄중히 신칙하고 이내 잡아다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3월 6일 정미
윤득양(尹得養)을 도승지로 삼았다.
3월 7일 무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전 장연 부사(長淵府使) 홍화보(洪和輔)가 보고한 것으로써 장연에다 방어사를 둔 병영(兵營)을 설치하여 해로(海路)를 중하게 여기기를 청하니, 임금이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논열(論列)해서 장문(狀聞)하도록 한 뒤에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당초에 홍화보가 장연에서 체임되어 돌아와 김치인에게 말하기를 ‘장산곶(長山串)은 바닷길이 아주 험악하므로 황해도에 조련(操鍊)하러 나가는 군사가 매번 이곳에서 뒤집어지거나 빠지며, 황당선(荒唐船)이 출몰(出沒)하는 첫길이 바로 장연 앞 바다이니, 진실로 깊은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장산곶의 북쪽에다 별도로 한 군영(軍營)을 설치하여 더러는 수사(水使)로 하여금 나누어 조련하게 하고, 더러는 해당 병영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여 그 조련을 주관하도록 한다면 군사들이 빠져 죽는 근심은 없어질 것이며, 황당선 또한 감히 멋대로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으므로 김치인이 이를 아뢰었는데,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이런 명령이 있었으며 뒤에 다시 남북(南北)에서 나누어 조련하도록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본 사건은 생각이 두루 미치지 못해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하고, 자신을 신칙하며 그를 석방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박사기(朴思機)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문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공술(供述)을 받은 뒤에 풍문(風聞)이 착오된 것이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3월 10일 신해
황경원(黃景源)을 대사헌으로,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판윤으로, 김응순(金應淳)을 호조 참판으로, 김효대(金孝大)를 병조 참판으로, 엄인(嚴璘)을 형조 참판으로, 이기경(李基敬)을 좌윤으로, 정방(鄭枋)을 집의로, 이시정(李蓍廷)을 사간으로, 한종제(韓宗濟)·유훈(柳薰)을 장령으로, 채정하(蔡挺夏)를 지평으로, 홍상간(洪相簡)을 헌납으로, 송낙(宋樂)·임희간(任希簡)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부응교로, 김보순(金普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병조(兵曹)는 본래 문신(文臣)의 관직이기 때문에 비록 2품에 초선(抄選)되었다 하더라도 전례(前例)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김효대는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가까운 친척이 된다는 이유로 임금이 격식을 깨뜨리고 특별히 임명하였었다. 그 뒤로 전관(銓官)이 마침내 잘못된 인사 행정의 격식을 답습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관기(官紀)가 어긋나게 되었다.
임금이 남경(南京)의 표류(漂海)한 사람이 장차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듣고 쇠못[鐵釘]을 만들어 주도록 명하였다.
3월 11일 임자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식년 전시(式年殿試)에 친림(親臨)하여 남강로(南絳老) 등 74인(人)을 뽑았다. 그 중 신수채(辛受采)는 관서(關西) 사람으로 이때 나이가 85세로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인견(引見)하고 옥관자(玉貫子)·도포(道袍) 모자 등 방방(放榜)에 응하는 물품을 만들어 주도록 명하였다.
3월 12일 계축
임금이 한원(翰苑)074) 에서는 으레 신방(新榜) 뒤에 모든 합격자를 불러 모우고 그것을 ‘간택(揀擇)’이라고 하는데, 한결같이 추천하던 것을 변경시켜 권점(圈點)하게 하면서부터 관규(館規)가 없어지게 되어 나오는 자가 많지 않아 옛날의 풍습이 모두 없어졌다고 하여, 특별히 사관(史官)에게 명해 개좌(開坐)해서 간택하게 하였으나, 모든 합격자들이 다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노여워하여 한림직(翰林職)을 파면하도록 명하고, 그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된 자는 모두 교서(校書)로 시행하게 하여, 장원(壯元)을 교서 교리(校書校理)로 삼았다.
이은(李溵)을 좌참찬으로,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한 남강로(南絳老)를 전적으로, 무과(武科)에 장원한 이동식(李東植)을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삼았으며, 기로과(耆老科)의 은사인(恩賜人)인 황준(黃晙)·이태석(李台奭)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증조부(曾祖父) 신(臣) 권상하(權尙夏)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복종하며 섬기어 어렸을 적부터 선정을 부조(父祖)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신년075) 이후부터 사단(事端)이 뜻하지 않게 생기고 천심(天心)076) 이 매우 번뇌하여 선정에게 사숙(私淑)한 자에 대하여 차례로 감죄(勘罪)하였으며, 또 《유곤록(裕昆錄)》을 지어 방비를 엄중히 하여,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나누어진 허물을 사문(斯文)077) 에 돌리므로, 신이 이에 허둥대고 미혹하며 억눌리고 막혀서 문을 닫고 두려워하며 처신한 지가 이제 8년이 되었습니다. 아! 송시열이 세상에 드문 효종[孝廟]같은 성인(聖人)을 만나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친밀한 교분(交分)으로 빈사(賓師)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대의(大義)를 천하에 펼치려 하였지만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하여,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으며 정학(正學)을 부지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으로 성은(聖恩)에 보답하는 계책을 삼아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려 했다가 마침내는 원수로 여기는 자가 세상에 넘치게 됨을 이루었으며, 방몽(逢蒙)이 도리어 〈스승에게〉 활을 쏘는 데078) 이르렀으니, 이는 뭇 소인(小人)들이 선정에게서 스스로 끊겨져 나가는 것인데, 선정에게 관계되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가지고 선정의 허물을 삼는다면 환퇴(桓魋)와 장창(臧倉)과 형서(邢恕)와 호굉(胡紘)079) 이 장차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게 누(累)가 되겠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게 허물이 되겠습니까? 우리 성고(聖考)080) 의 병신년081) 의 처분은 지극히 엄정(嚴正)하였으며, 이미 손수 서원(書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특별히 화양동(華陽洞)에다 걸게 하셨고, 또 ‘선비들의 지향(指向)을 바르게 하고 사설(邪說)을 그치도록 했다.’는 것을 판(板)에다 새겨서 함께 걸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돌이켜보면 세상의 풍교(風敎)가 날마다 해이해지고 정도(正道)는 점차로 침미(寖微)해지니, 바로 더욱더 붙들어 세워 일맥(一脈)의 원기(元氣)를 보존해야 마땅한데도 어찌하여 꺾어버리고 억누르며 배척하고 끊어버리면서 그것을 염려하지 않습니까? 신의 증조(曾祖)같은 분은 선조(先朝)의 예우(禮遇)를 가장 많이 받아 행궁(行宮)에서 드물고도 특이하게 어진 임금을 만난 사실은 사책(史冊)에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전하(殿下)께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신의 증조에게 포창하고 존숭한 전례(典禮)는 유감[餘憾]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조정과 사림(士林)에서는 다른 논의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사륜(絲綸)082) 가운데 너무나 신의 증조에 대해 석연치 않은 것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듣고서 당황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천(溫泉) 때의 일은 고 판서 윤봉구(尹鳳九)가 이미 그 전말(顚末)을 다 말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다시 번독(煩瀆)하지 않겠습니다만 《가례원류(家禮源流)》에 이르러서는 신의 증조 및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가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지어서 만들었으니, 이는 바로 사가(私家)의 문자(文字)이며 조정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호남(湖南)의 유생이 맨 먼저 신의 증조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상소를 발송하였으며, 잇달아 이진유(李眞儒)·유봉휘(柳鳳輝)의 무리가 서로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몄는데, 그것은 너무나 시대의 운수에 관계되는 바이며 신의 증조가 미리 헤아렸던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도 죄가 공격하고 배척한 자에게 있고, 공격과 배척을 당한 자에게는 없을 듯합니다. 혹시라도 조용한 여가에 마음을 평안히 하고 생각을 안정되게 하여, 옛날의 군자(君子)가 사양하거나 받는 것의 마땅함과, 행동하거나 멈추는 것의 도리를 반복(反復)해 하신다면, 거의 신의 증조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며 〈의혹이〉 얼음이 풀리듯 풀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아! 《유곤록(裕昆錄)》은 바로 내가 눈물을 삼키며 쓴 것이니, 오늘날 해동(海東)의 신자(臣子)가 만약 그 임금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누가 감히 배반하거나 배척하겠는가?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이 스스로 온 것이겠는가? 오도록 부른 자는 바로 전관(銓官)으로, 지난번 자의(諮議)에 단부(單付)하였을 적에 이미 그 형세를 짐작했었는데, 지금 정말로 그러하다. 이 글은 돌려 주도록 하고 관직을 해임하도록 하며, 단부할 때의 전관이었던 이최중(李最中)과 정존겸(鄭存謙)은 특별히 서용하지 못하도록 명한다."
하였다. 뒤에 이최중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보내게 하고, 정존겸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교리 김문순(金文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곧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법(法)입니다. 더구나 지금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강학(講學)에 바야흐로 힘쓰고 있으니, 바로 덕망이 있는 사람을 맞이하여 덕성(德性)을 훈도(薰陶)083) 해야 마땅합니다.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은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은 사람으로 궁료(宮僚)의 지위를 갖추고 있으면서 이번 그가 상소한 것은 오로지 그의 증조(曾祖)를 위하고 먼저 사문(斯文)을 부지(扶持)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관직을 해임시키고 소[章]를 되돌려 주게 한 일과 ‘스스로 왔겠는가? 〈전관(銓官)이〉 불러서 온 것이다.[自來招來]’라고 한 하교는 모두 신이 짐작했던 바가 아니니, 전하(殿下)께서 어진 이를 우대(優待)하는 성덕(聖德)으로 어찌하여 이런 거조(擧措)가 있습니까? 이는 다만 열성조의 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고 그것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 주는 계책에 있어서도 과연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하고, 부교리 유언호(兪彦鎬)·이병정(李秉鼎)·김보순(金普淳) 등도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구원하니, 하교하기를,
"이번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는 곧 예전의 유봉휘(柳鳳輝)와 정식(鄭栻)을 본받은 것으로 몇 십년 뒤에 다시 보게 되니, 지금의 처분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 병정이 따라서 참여한 것은 조(趙)나라를 위해서인가? 초(楚)나라를 위해서인가? 늘그막에 있는 임금을 더욱 번갈아 가며 부끄럽게 하는구나."
하였는데, 승지 민백분(閔百奮)이 중도(中道)에 지나치다는 뜻을 대략 진달하니, 임금이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3월 13일 갑인
임금이 권진응(權震應)의 상소로 인하여 내국(內局)의 입진(入診)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특별히 도제조의 직임을 해임하였다.
전 자의(諮議) 권진응을 특별히 초선(抄選)에서 빼도록 하여 군강(君綱)을 엄중히 할 것을 명하고, 이내 하교하기를,
"사람은 세사람(君師父)에 의해 살아갈 수 있으니, 세 분 섬기기를 한결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옛날 사람의 말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할아버지의 스승에 대해 보기를 그의 할아버지와 같이 한다고 하면서 임금에게는 한결같이 어찌하여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니, 〈그를〉 초선한 사람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은가? 마땅히 구저(舊邸)에 누워서 하늘에 사죄하여야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곤록(裕昆錄)》에서 반드시 이기려고 다툰다는 것이 바로 이런 무리들이다. 유언호(兪彦鎬)·김보순(金普淳)이 옛날 습성을 행하려고 조심스럽게 모두 연명(聯名)하였으니, 비루하다. 누워 있는 가운데서도 한번 빙긋이 웃는다. 김재인(金載人)·김문순(金文淳)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낙점(落點)하기를 아꼈었는데, 지금 정말로 그러하니 앞을 내다보았다고 말할 만하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편당을 짓는 마음을 지녔으니, 어떻게 수죄(數罪)할 수 있겠는가? 아! 그 마음은 어린아이도 오히려 아는데, 총재(冡宰)084) 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러한 때에 단부(單付)를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갑산(甲山)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오히려 상(賞)을 주는 격이니, 모름지기 《유곤록》을 보도록 하라. 26년이 가까운데도 강당(强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자식된 도리이며 또한 신하된 도리이겠는가? 구저(舊邸)에 나아가고 싶지만 지금 기운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이 당(堂)에 누워서 그 마음을 지키겠다. 대가(大駕)를 움직이게 한 명령은 잠시 보류하고 모름지기 합문(閤門)을 지키라. 지금에 있어서의 만종(萬重)한 일이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이 구대(求對)하니, 하교하기를,
"나를 보려고 하거던 내일 흥태문(興泰門)의 전좌(殿座) 때에 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4일 을묘
전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을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유언호(兪彦鎬)·이병정(李秉鼎)·김보순(金普淳)을 모두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정배(定配)하고, 김재인(金載人)·김문순(金文淳)·채정하(蔡挺夏)는 영남(嶺南)의 바닷가에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권진응은 신구(伸救)085)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유곤록(裕昆錄)》을 운각(芸閣)086) 에 명하여 인출(印出)하여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간직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 과거(科擧)를 논하겠는가? 문과(文科)·무과(武科)는 이미 시행하였으나 잡과(雜科) 초시(初試)는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유가(遊街) 또한 금지하게 하라."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이창수(李昌壽)를 공주(公州)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는데, 그의 아들 이병정(李秉鼎)을 잘못 가르쳤다고 여겨서였다. 곧 환침(還寢)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흥태문(興泰門)에 나아가 신은(新恩)087) 의 사은(謝恩)을 받고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신이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도록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시임과 원임 대신(大臣)에게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부 당인(黨人)을 비호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15일 병진
이때 신방(新榜)에서 알성(謁聖)할 사람이 더러는 임금의 처분이 정상이 아니라하여 들어오지 않은 자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그것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하리가 단지 서욱수(徐郁修) 등 세 사람만 알아서 올리니 임금이 숨기고 빠뜨렸다고 여기어 하리(下吏)를 훈련 대장으로 하여금 궁문(宮門) 밖에서 여섯 차례나 회시(回示)하게 한 뒤에 남해현(南海縣)에다 햇수를 기한하지 말고 충군(充軍)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어지럽게 만든 장본인은 이최중(李最中)이다. 즉시 그가 귀양간 곳에다 엄중히 천극(栫棘)을 더하도록 하라. 여러 대신(大臣)들이 뒤돌아다 보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하교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몇 십년 동안 걱정했던 구당(舊黨)이 다시 성(盛)해지려 한다. 앞서 아뢴 자가 있었는데 지금 관찰하여 보니 아뢴 자가 임금을 속인 것이었다. 만약 먼저 임금을 속인 자를 묻는다면 유득양(柳得養)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당장 태복시(太僕寺)에 잡아들여 추문하도록 하되 격식(格式)을 갖추어 엄중하게 남간(南間)에다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이보다 앞서 임금이 조신(朝臣)에게 혹시라도 당론(黨論)이 있을까 하여 음유(蔭儒)를 불러 모아 편당을 만드는 여부(與否)를 하문(下問)하였었는데, 유득양이 ‘이때에 다시 편당을 만드는 버릇을 한다면 반드시 신자(臣子)가 아니다.’라는 등의 말을 유독 먼저 주달(奏達)하였기 때문에 이 때에 이르러 이런 명령이 있었다.
기로사 당상(耆老社堂上) 이익정(李益炡) 등과 2품(品) 이상인 신회(申晦)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면서 탕제(湯劑)를 올리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월 16일 정사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다. 궁궐로 들어올 적에 약방(藥房)에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堂上)과 2품(品)의 여러 재상(宰相)들이 일제히 나아가 탕제(湯劑)를 올리게 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삼고 하교하기를,
"지금의 기운이 지난해 10월과 같으니 제조(提調)가 탕제(湯劑)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그리고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을 갖추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는 앞서의 하교는 보류하고 모두 들어오게 하라."
하고, 수어사(守禦使) 김한기(金漢耆)와 공조 참판 정후겸(鄭厚謙)에게 직숙(直宿)하도록 하였다.
밤에 약방(藥房) 및 시임·원임 대신(大臣)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홍봉한(洪鳳漢)이 아직도 과천(果川)에 있는 것은 금오(金吾)의 초기(草記) 때문이다. 이미 김시묵(金時默)이 왕십리(往十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는데, 지금 들으니 부처(付處)는 비록 풀렸다 하더라도 앞서 형률(刑律)이 아직도 있다고 하였으니, 삭출(削黜)하라는 형률을 모두 깨끗이 씻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8일 기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까닭을 하문하자,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영의정[領相]의 말을 듣건대 흥태문(興泰門)에서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세 글자의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명령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일 전에 한탄하는 하교는 작납(繳納)에서 연유한 것인데, 늘그막에 어찌 차마 붓으로 그어서 글자를 지우거나 자르겠는가?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여러 신하들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살펴 주는 것이 구경(九經)에 기재되어 있는 바이니 그 하교(下敎)에 효주(爻周)088) 하고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원보(元輔)089) 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여 그가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의종 황제(毅宗皇帝) 기신(忌辰)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자 동궁(東宮)이 곁에서 부축하면서 대내(大內)로 돌아가도록 청하였으며, 대신(大臣) 및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모두 극력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구경(九卿)이 연달아 나아가 소매를 부여잡고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제야 일어나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子孫)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20일 신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선무사(宣武祠) 및 정동 관군(征東官軍)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3월 21일 임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사수(射手)·포수(砲手)와 군기(軍器)에 대한 장계(狀啓)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 세상이 태평한 지가 오래 되어 인심이 편안히 지내는 데 익숙하여 군무(軍務)를 소홀히 하는 자가 많으므로 마음으로 늘 놀랍게 여긴다. 그런데 요즈음 습진(習陣)과 조련(操鍊) 뒤에 총(銃)을 쏘고 포(砲)를 쏘는 시험을 한다는 장문(狀聞)이 연달아 이르지만 포를 쏘아 맞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활쏘는 데 대해서는 활을 잡을 줄도 모르며, 총쏘는 데 대해서는 탄환을 장진할 줄도 모르는데도 이른바 수령과 변장(邊將)은 평상시에 단속하고 경계하기를 잘 못하니, 만일 뜻밖의 변고가 있을 경우 그들은 장차 막대기를 가지고 적(敵)을 막을 것인가? 이는 교련(敎鍊)하지 않은 백성으로 하여금 전투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도신(道臣)이 절도사(節度使)를 겸임하는데, 하물며 수신(帥臣)은 본도(本道)의 대장(大將)인 직책이겠는가? 이 후로 만약 그전처럼 게을리하고 소홀하게 한다면 비록 무신(武臣)일지라도 어떻게 음악과 여색(女色)으로 스스로 즐겁게 지내면서 그 임기나 채우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비록 참작하기는 하겠지만 이 후로는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적간(摘奸)하게 할 것이며, 그래도 만약 그전처럼 한다면 당장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곤영(閫營)에 앉아서 중곤(重棍)을 치도록 할 것이니, 이것을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2일 계해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참판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이성수(李性遂)를 대사간으로, 홍상직(洪相直)을 집의로, 남학종(南鶴宗)을 사간으로, 정택(鄭擇)·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이일증(李一曾)을 헌납으로, 이중해(李重海)·조진형(趙鎭衡)을 지평으로, 윤광례(尹光禮)·남주관(南胄寬)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교리로, 이익선(李益烍)을 수찬으로 삼았다.
구선행(具善行)을 특별히 제수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3일 갑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평안도(平安道) 덕천군(德川郡)에서 실화(失火)하여 2백 34호(戶)를 연달아 태웠으며, 화상(火傷)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으므로, 특별히 회부미(會付米)를 제급(題給)하게 하고 화상을 입은 사람은 전례대로 구료(救療)하도록 하였으며, 창고 40간(間)이 잇달아 타버린 곳에는 역시 도신과 수령으로 하여금 즉시 방편을 강구하여 역사(役事)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어서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4일 을축
장령 정택(鄭擇)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국가의 제도에 비록 가까운 〈대수(代數)의〉 능(陵)이라 하더라도 기신(忌辰)에는 이틀을 넘기지 않고 재계(齋戒)하는데, 임금이 한없는 효성으로 사흘동안 〈재계하도록〉 제도를 정하였었다. 그런데 정택은 이 날이 명릉(明陵)의 기신 재계일인 줄을 모르고 대청(臺廳)에 나아가 피혐(避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어사 조준(趙㻐)을 파견하여 기전(畿甸)의 황구 충정(黃口充定)090) 과 인족 침징(隣族侵徵)091) 을 염찰(廉察)하도록 하였다.
3월 25일 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전(親傳)하고, 이내 억석와(憶昔窩)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읽도록 명하고, 이내 하교하기를,
"지난 신묘년092) 에는 바로 내 나이가 18세였는데 회상전(會祥殿)을 우러러 보며 소대(召對)를 행할 때에 《절작통편》을 강독하였으며, 기유년093) 에 봉사(封事)하였는데 옛날에는 회상전(會祥殿)이고 지금은 이 억석와(憶昔窩)이니 갖가지 회포가 마음 속에 교차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장원(壯元)을 교서 교리(校書校理)로, 같은 방(榜)을 교서(校書)로 시행하게 한 것은 바로 옛날에 없었던 일이니 어찌 후손에게 전하겠는가? 선정(先正) 이이(李珥)와 고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은 모두 교서(校書)에서 출발하였었는데, 요즈음에는 중인(中人)이나 서얼(庶孽)이 아니면 교서관(校書館)의 관원이 되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국자감(國子監)094) 으로 피하기를 도모하여 기필코 괴원(槐院)095) 으로 시행하려고 하기에 마음속으로 늘 그르게 여겼으니, 어찌 전례대로 따르고 참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레 한원(翰苑)과 괴원의 관원을 권점(圈點)하는 데 똑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6일 정묘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김광국(金光國)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였다.
3월 27일 무진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으로, 이휘지(李徽之)를 예조 참판으로, 송제로(宋濟魯)·유훈(柳薰)을 장령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김기대(金基大)를 교리로, 유한근(兪漢謹)을 수찬으로 삼았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은춘(李殷春)이 진영(鎭營)을 영변(寧邊)으로 돌려 설치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하문하였는데, 의논이 한결같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적합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고 지역에 달려 있지 않다."
하고, 우선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지돈녕부사 김시묵(金時默), 좌윤 이기경(李基敬), 대사간 이성수(李性遂) 등이 함께 상소하여 스스로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겨우 어제를 넘겼는데 세 사람의 상소가 아침에 들어왔으니, 대저 요즈음에는 위계 질서가 엄격치 않다. 예전에는 병조 판서가 비록 내국(內局)에 전교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례를 따라 공무를 집행하였으니, 옛날 중신(重臣)이 의(義)에 대처함이 이와 같았다. 처분(處分)은 임금에게 달려 있고 특별히 서용하는 것 또한 임금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감히 상소를 하는가? 그리고 이기경은 이미 은거[高蹈]하는 인사(人士)가 아닌데 그가 장차 고(故) 최 봉조하(崔奉朝賀)096) 가 되겠다는 것인가? 특별히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보임(補任)하니, 그에게 즉시 와서 사은(謝恩)하게 하라. 그리고 이성수가 비록 어버이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입시(入侍)를 피하려고 하였으니, 역시 그의 소장(疏章)을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으로 권점(圈點)된 사람들을 불러다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고, 그중에 뽑힌 사람들에게는 각각 종이와 붓을 내려 주었다.
3월 28일 기사
잡과(雜科)의 복시(覆試)를 전례대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고,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뽑힌 사람을 불러다 시험하여 유운우(柳雲羽) 등 세 사람을 뽑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가서 농민을 소견하고 각도(各道)의 농사 형편을 하문하였다.
3월 29일 경오
서울에 있는 수령을 소견(召見)하고 보리 농사의 풍겸(豊歉)을 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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