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노인을 소견(召見)하고 친히 음식과 기동(起動)을 물어 보았으며,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직명(職名)이 있었던 사람 및 사족(士族)과 서인(庶人)으로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쌀과 명주를 내려 주었다.
4월 3일 계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중국 사람의 자손(子孫)으로 별군직(別軍職)에 있던 왕한정(王漢禎) 및 명(明)나라 사람이라고 거짓으로 일컬은 왕묵석(王墨石)·왕한길(王漢吉) 등을 잡아들이도록 명하여, 왕한정은 대정현(大靜縣)에다 충군(充軍)하게 하고, 왕한길은 그의 관직에서 도태시켜 방출(放出)하게 하였다. 당초에 왕한길이 총과(銃科)에 오르자, 임금이 중국 사람이라고 여겨 별군직을 주도록 명하였는데, 왕한정이 말하기를, ‘왕한길은 본래 조선 사람으로 성(姓)을 거짓으로 왕씨(王氏)라고 하였으나 본성(本姓)은 김씨(金氏)입니다. 청컨대 그 성씨를 회복하도록 하소서.’ 하매, 임금이 중국 사람이라고 거짓으로 일컬었다고 여기어 왕한길을 잡아들이도록 하여 추문(推問)하니, 왕한길이 ‘나이가 어려서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임금이 그의 아비 왕묵석을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득하여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성씨(姓氏)를 거짓으로 한 것이 햇수가 오래되었으니, 진실로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왕한길의 군직(軍職)을 도태시키도록 명하였으며, 왕한정에게 하문하기를,
"너희 무리들은 똑같은 산동(山東) 사람이고 똑같은 왕성(王姓)이라면 형과 아우처럼 지내야 마땅한데, 더구나 그의 부자(父子)가 알지 못하는 바라고 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혼자만 그것을 알고 있는가?"
하자, 왕한정이 아뢰기를,
"왕한길이 김성(金姓)이라는 것은 신이 청중(廳中)에서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 한길이 정말 김성(金姓)이라면 너희 무리가 비록 온 청(廳)이 일어나 일제히 호소하더라도 가능할 터인데, 지금에야 성(姓)을 회복해 줄 것을 청원하였으니, 마치 왕한길의 처지를 위하는 것인 듯하지만 그 실제로는 왕한길이 총과(銃科)에 급제(及第)하여 특별히 군직(軍職)에 임명되었으므로, 너희 무리가 그와 같은 반열(班列)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겉으로는 성(姓)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을 핑계로 하고서 나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여 그가 중국 사람이 아님을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설사 수양(收養)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중국 사람을 버리고 조선 사람을 취하겠는가? 왕성(王姓)을 김성(金姓)이라고 한 것은 바로 너의 죄다."
하고, 이내 하교하기를,
"왕한정이 거짓말을 꾸며 비방을 만들었으니, 햇수를 기한하지 말고 충군(充軍)하도록 하라. 왕묵석 부자(父子)가 혹시라도 중국 사람의 집단에서 누락되어 그의 성(姓)을 거짓으로 일컫는 듯하지만 그가 아는 바가 아니니, 참작하여 분간(分揀)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왕묵석의 옛날 호구(戶口)에 어부(漁夫)인 중국 사람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인하여 그의 성(姓)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강윤(姜潤)을 집의(執義)로, 여선형(呂善亨)을 필선(弼善)으로, 민범수(閔範洙)를 전라도 좌수사(全羅道左水使)로, 김영수(金永綬)를 전라도 우수사(右水使)로, 이성묵(李性默)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4월 4일 갑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5일 을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이의(肄儀)097) 를 친히 살펴보았으며, 이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오늘 이의에 친림(親臨)하시고 묘악(廟樂)이 모두 연주되었는데도 흠탄(欽歎)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종조(世宗朝) 때에는 아악(雅樂)을 사용하였으며, 그 뒤에는 속악(俗樂)을 참작해서 사용하였었는데, 지금은 속악만 남아 있으니, 3백 년 동안 미처 틈을 내지 못했던 일을 오늘날 변통(變通)할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개탄스럽고 애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참으로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서 웃었다.
왕세손(王世孫)이 상소하기를,
"삼가 대덕(大德)은 우뚝하고 넓으며 보령(寶齡)은 더욱 높아 칭송은 강릉(岡陵)처럼 올라가고 경하(慶賀)는 구우(區宇)에 넘치니, 무릇 오늘날의 신서(臣庶)로서 누군들 기뻐서 뛰며 춤추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더구나 신의 마음으로는 잔치를 베풀어 경사스러움을 드날리는 도리를 생각함에 있어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만 성지(聖志)가 몹시 겸양하시므로 신의 마음이 받들어 순종하는데서 나와 그대로 따라 지금까지 잠자코 있기는 하였으나 늘 억울하게 여겨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하향[夏享]의 이의에 친림하시게 되자 소자(小子) 또한 시좌(侍坐)할 수 있게 되어 반나절 동안 법악(法樂)이 번갈아 연주됨을 보았는데, 종고(鍾鼓)의 소리와 관약(管籥)의 음률이 귀에 가득히 넘치어 어렴풋이 양년(兩年)의 시연(侍宴)했던 때와 같았습니다. 신이 이에 더욱 보고서 느끼는 생각이 간절하여 충정(衷情)이 격렬해짐을 깨닫지 못하겠으며, 소자가 평일에 진달하고 싶었던 정성이 이제 또 유연(油然)히 일어나 금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헌수(獻壽)하며 칭상(稱觴)하는 예(禮)는 비록 예대로 거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노인을 봉양하는 연회(宴會)는 예전(禮典)에 기재된 일이며 또한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했던 의식이니 전하(殿下)께서 혹시라도 생각이 여기에 이르신다면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헤아리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번독(煩瀆)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직접 짧은 글을 써서 미미한 정성을 우러러 나타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빨리 노인을 봉양하는 연회를 행하도록 하여 소자의 마음에 위안이 되게 하고 신민(臣民)들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도승지 김광국(金光國)에게 명하여 소(疏)를 읽게 하고 임금이 글씨를 쓴 것이 어떠냐고 하문하자, 대신(大臣)이 모두 잘 썼다고 앙대(仰對)하였으며, 또 문체(文體)가 어떠하냐고 하문하자, 모두 훌륭히 지었다고 앙주(仰奏)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충자(冲子)의 지극한 소원이며 양로연(養老宴)을 행하도록 청한 것은 훌륭하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동궁(東宮)의 지극한 정성을 윤허하고 겸해서 신민(臣民)의 소망을 위로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서 진연(進宴)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이 이로 인하여 진연하려고 한다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기쁘게 여길 만한 것은 지금 이 소를 보니 조선(朝鮮)이 의뢰하여 편안해질 것이다. 기축년098) 의 진연도 또한 어찌 이보다 지나치겠는가? 세손(世孫)의 양로연에 대한 말은 생각이 나를 봉양하려는 것이니, 내가 진실로 이미 세손의 효성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의 소는 또한 헤아렸던 바가 아니다. 세 가지 기쁜 일이 있으니 양로연을 청한 것이 하나이고, 글을 잘 지은 것이 하나이며, 글씨를 잘 쓴 것이 하나이다."
하고, 바로 비답(批答)을 쓰도록 명하기를,
"네가 상소하였음을 듣고 너의 숙성(夙成)함을 가상히 여기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쁘다는 뜻을 유시하고 다음으로 고심(苦心)을 유시하는 것이 옳을까? 네가 평소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었다. 양로연을 청한데 대해서는 너의 할아버지의 마음을 잘 본받아 감히 마음을 먹지 못했다가 네 할아버지가 어제 옛날에 노인을 어여쁘게 여긴 일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오늘 아침에 월대(月臺)에서 기축년에 등가(登歌)의 소리를 듣고는 이런 청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순수하게 본성(本性)을 지키는 자의 어버이를 오래도록 모시려는 것이니, 이것이 내가 너에게 기쁘게 여기는 것의 첫째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리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문장이 어찌 마음을 따를 수 있겠는가? 잠깐 동안에 열 줄의 문자(文字)를 지을 수 있었으니, 너의 할아버지라도 어떻게 이와 같은 줄을 알았겠는가? 너에게 기쁘게 여기는 것의 둘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네가 쓴 글씨를 보매 이는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으니, 너에게 기쁘게 여기는 것의 셋째이다. 아! 너의 할아버지가 비록 늙기는 하였지만 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노인을 봉양한다고 일컫게 되면 자연히 너의 할아버지에게 칭상(稱觴)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청원이 있으니, 허락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충자(冲子)가 이와 같으면 조선이 반석(磐石)같은 편안함이 있을 터인데, 어찌 다만 세 가지의 기쁨 뿐이겠는가? 종국(宗國)의 대단한 기쁨이며 너의 뜻을 아름답게 여겨 이미 유시하고 또 유시하니 나의 마음도 감탄스럽도다. 충자는 모름지기 너의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하라. 몇 해 전에 실록(實錄)을 봉람(奉覽)하여 건국(建國) 초기에 양로연을 설치한 내력을 상고해 내었는데, 이것 또한 《오례의(五禮儀)》에 기재(記載)된 바로서 ‘크게 떠벌리지 말라.’고 하였으니, 3백 년 동안 고사(故事)를 계속해서 행하는 것 또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이다. 다만 〈쾌하게 한다는〉 쾌자(快字)와 〈만족하게 한다는〉 족자(足字)는 바로 네 할아버지가 매우 경계하는 것이니, 어찌 다만 이것뿐이겠는가? 종고의 소리와 관약의 음률은 평상시 궁전(宮殿)에 나아가거나 대가(大駕)가 움직일 때에도 오히려 듣게 되는데 더구나 잔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겠는가?"
하고, 이내 지신사(知申事)099) 로 하여금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제신(諸臣)들이 왕세손(王世孫)의 청원을 힘써 따르도록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4월 6일 병자
임금이 태령전(泰寧殿)에 나가서 시임·원임 대신(大臣)을 불러다 합문(閤門)을 열도록 명하여 어진(御眞)을 우러러 보았으며, 이내 숙종[肅廟]의 어제(御製)를 보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서암(瑞巖) 및 영열천(靈冽泉)을 가서 보도록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또 《시경(詩經)》의 척호(陟岵) 3장(章)과 하천(下泉) 4장을 강하게 하였으며, 또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강독을 잘하는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각기 《태극도설(太極圖說)》100) 을 외우게 하고는 종이와 붓을 내려 주게 하였다.
4월 7일 정축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상복(金相福)·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양택(金陽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우의정 김상철(金尙喆), 판중추부사 이창의(李昌誼)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노인을 봉양하도록 청원한 것은 전례(典禮)에 있는 바이며 열성조(列聖朝)에서 행하던 바입니다. 그런데 왕세손(王世孫)의 열 줄로 된 소(疏)를 올려 아뢴 것은 성의(誠意)가 넘쳐서 자천(慈天)101) 을 우러러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세 가지를 기쁘게 여긴다는 성상의 비답을 읽었는데, 말씀마다 아름답게 여기며 기뻐하는 내용이었고 글자마다 간곡함이 지극하였으니, 무릇 그것을 듣는 사람이면 누군들 기쁨이 용솟음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유음(兪音)이 거듭 내리기만을 바라면서 어제 앞 자리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정성이 미덥지 못해서 밤에 내린 비망기(備忘記)에는 내용이 더욱 엄절(嚴截)하였으니, 신 등은 진실로 아랫사람의 마음을 체찰(體察)하는 인덕(仁德)에 대하여 섭섭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아! 신정(宸情)이 아무리 추모(推慕)하는데 독실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법을 따르는 것이 바로 대효(大孝)를 빛나게 하는 것이며, 성상의 하교가 비록 스스로 겸양하는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간절한 정성을 굽어 부응하는 것이 바로 왕세손의 효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성상께서 굳이 거절하시니 신 등은 그 까닭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종일토록 구대(求對)하였으나 감히 못하는 바가 있으며, 물러나서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 것도 또한 도리가 아니니 빨리 전하의 명령을 내려 왕세손의 효성을 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충자(冲子)가 청원한 것이 비록 어버이를 오래도록 모시려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내가 굳이 거절하는 뜻도 진실로 깊다. 여러 신하들이 이런 내용을 듣고 소란스러움을 중지하는 것도 또한 그 아름다움을 따르는 방법이다."
하였다.
임금이 경기 어사(京畿御史) 조준(趙㻐)을 소견(召見)하여 서계(書啓)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전 양주 목사(楊州牧使) 윤면동(尹冕東)이 근시(近侍)에서부터 기전(畿甸)에 있으면서 30여 명의 유아(幼兒)를 모두 장정(壯丁)으로 기록하여 올렸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들으니 마음이 괴롭다. 그리고 큰 문제는 수리청(修理廳)에서 전지[田疇]를 척량(尺量)한다는 명목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측량하고 다시 측량한 것인데, 뜻은 비록 백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백성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몇 가지 일만으로도 그 행정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염문(廉問)한 것은 뜻이 황구(黃口)102) 문제에 있어 나는 10구(口)로 한계를 삼았는데, 이곳에는 수십 구(數十口)가 있으니, 그것을 어찌 다시 묻겠는가? 윤면동은 북청부(北靑府)로 정배(定配)시키되 30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년 동안 금고(禁錮)하게 하라. 그리고 이 뒤로 만약 범(犯)하는 자가 있으면 8, 9세(歲)로 한계를 삼되 10 명의 경우 금고 10년으로, 20명인 경우는 20년으로 하여 한계를 삼고, 그 수효가 이보다 초과하더라도 자신에게만 국한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니 이것을 엄중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원중회(元重晦)가 아약(兒弱)을 군대에 충정(充定)하였는데, 바야흐로 통수(統帥)가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참작하여 4등(等)의 녹봉(祿俸)을 감하도록 명하였으며, 삭녕 군수(朔寧郡守) 이염(李琰)은 근무지를 비워두었다는 죄로 영문(營門)에서 결장(決杖)하게 하였으며, 수원 부사 김상묵(金尙默)은 분조(分糶)를 잘 하였다하여 특별히 숙마(熟馬) 한 필(匹)을 내려 주도록 하고 이내 팔도(八道)의 추생 어사(抽栍御史)103) 를 신칙해 적간(摘奸)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양택(金陽澤)이 다시 양로연(養老宴)에 관한 일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4월 8일 무인
약방(藥房)에서 구대(求對)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침에 이미 하교하였는데 지금 또 나를 피곤하게 한다."
하고, 특별히 세 제조(提調)를 해임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하교하기를,
"나의 오늘 마음을 미루어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 그 어버이를 뵙도록 하려고 하니, 오늘 안으로 즉시 정사(呈辭)를 올리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서 어버이를 뵙게 하라."
하고, 이내 사알방(司謁房)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4월 9일 기묘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와 하교하기를,
"친향(親享)을 을유년104) 이후로는 모두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으나, 이 정성을 어떻게 억제하겠는가? 지난 달 25일에 이곳에서 재숙(齋宿)하면서 서교(西郊)를 위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여 잤고, 어제는 태실(太室)을 위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여 잤으며, 수조(受胙)를 하면서는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앉아 있었으니, 이는 《자성편(自省編)》 가운데 〈음복(飮福)〉 술잔을 받은 뒤에 면복(冕服)을 벗는다는 의미에서이다. 이틀이나 이 집[窩]에서 재숙하니 아마도 옛날과 같은 듯하다. 몸은 비록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태실(太室)에 가 있다. 아! 여러 신하들이 모든 집사(執事)에 있어서 어찌 감히 오만하거나 편리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종신(宗臣) 해계군(海溪君) 이집(李)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진연(進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용산(龍山)에 보내어 세선(稅船)이 도착하여 정박했는지의 여부(與否)를 알아서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10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을 지영(祗迎)하였는데, 태백산(太白山)의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하기 때문이었다. 이내 주강(晝講)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경운궁(慶運宮), 대은암(大隱巖), 여경방(餘慶坊), 연추문(延秋門) 동구(洞口)의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으로 직명(職名)이 있는 자를 명소(命召)하여 명주를 내려 주고, 나머지는 모두 쌀을 내려 주었다.
어사(御史) 심이지(沈頤之)를 파견하여 몰래 호서(湖西)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또 저경궁(儲慶宮)의 내계인(內契人)으로 나이 80세인 사람을 불러다 가자(加資)하게 하고, 나이 21세인데도 장가들지 못한 자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면주(綿紬)를 지급하게 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이조 참판으로, 이진규(李晉圭)를 부교리로, 이현영(李顯永)·남주로(南柱老)를 부수찬으로, 이명빈(李命彬)을 부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사서로, 최동악(崔東岳)을 경상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청하기를,
"영희전(永禧殿)을 봄가을로 봉심(奉審)한 후 전사청(典祀廳) 및 여러 곳을 수리 보수하고 잡물(雜物)과 기명(器皿) 등을 진배(進排)할 때에 지부(地部)105) 의 낭관(郞官)이 친히 본전(本殿)에 나아가 전랑(殿郞)과 함께 대조하고 점검하는 일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11일 신사
임금이 무신 전강(武臣殿講)에 친림(親臨)하였다.
4월 12일 임오
문신 전강(文臣殿講)에 친림하여 하교하기를,
"시종(侍從)이 비록 게을렀다고 하더라도 몇 백 명의 문신(文臣) 가운데 전강(殿講)에 응한 자가 단지 16인뿐이었으니, 일을 마땅히 시행하지 말아야겠지만 우인(虞人)106) 을 두어 사냥하기를 기약한 뜻으로 하겠다."
하였다.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이 제주(濟州)의 귀양간 곳에서 졸(卒)하였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하교하기를,
"아! 이번의 처분이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에는 지금까지 차마 못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본주(本州)의 계본(啓本)이 어제 도착하였는데, 중관(中官)이 혹시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머물러 두게 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알렸으니, 슬픈 마음을 어디다 비유하겠는가? 관재(棺材)는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가려서 지급하게 하고, 의금(衣衾)은 본현감(本縣監)으로 하여금 종신(宗臣)의 예(例)에 따라 살피고 단속하여 마음을 써서 거행하도록 하되, 우선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마음을 써서 운구(運柩)하도록 하라.〈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이 만약 함께 물고(物故)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특별히 석방하는 일을 당일 안에 배도(倍道)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의 처(妻)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는 성(城)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왕실(王室)의 울타리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진은 지금 임금의 손자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의 죄가 아닌데 죽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례를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미칠 수가 없었다.
하교하기를,
"요즈음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순문(詢問)하는 하교가 어찌 특별히 〈위급한 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무더기로 날 뽕나무 뿌리에 잡아매는 뜻일 뿐이겠는가? 실제로는 백성을 위해서이다. 지금 도신의 장계(狀啓)를 듣건대 홍화보(洪和輔)의 뜻이 모두 조리가 있어서, 본부(本府)의 주민들이 조련(操鍊)에 나아갔을 때의 상황이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늘그막에 이런 사실을 듣고 구습(舊習)에 따라 방치한다면 이는 백성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우리 백성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모레 지영(祗迎)한 뒤에는 마땅히 숭정전(崇政殿)에서 조강(朝講)하고 차대(次對)하면서, 먼저 소상(消詳)하게 한 다음 입시(入侍)하여 아뢰도록 해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내가 우리 백성을 위하는 간절한 뜻과 이것이 다섯 고을 세 진영(鎭營)의 많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큰 기틀임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3일 계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요즈음 종신(宗臣)이 영체(零替)107) 하여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이 하게 하니 누구에게 물어야 옳겠는가? 아! 예설(禮說)을 가지고 다투던 이후로 문득 하나의 당(黨)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사문(斯文)에 있어서 망측(罔測)하게 바뀌었으므로 이미 《유곤록(裕昆錄)》에 유시하였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많은 유시를 하겠는가? 아! 무신년108) 에는 세 당이 〈변란을〉 만들었으며 아! 을해년109) 에는 남아 있는 부류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거의 징계될 수 있었는데, 지난 겨울과 올 봄의 일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바이니, 차마 임오년의 사건110) 을 말하겠는가? 급암(汲黯)이 한(漢)나라에 있으니 회남왕(淮南王)이 위축이 될 수가 있었고,111) 당(唐)나라의 배도(裵度)가 정승이 되자 한홍(韓弘)이 두려워 하였으니,112) 비록 내가 교훈(敎訓)을 잘하지 못한 데에 연유되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엄수(閹竪)113)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조정에 바른말을 하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올 봄에도 만약 이목(耳目)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 자가 있어 사건이 작을 때에 잘 억제시켰다면 어찌 커지는 데 이르렀겠는가? 아! 한결같이 병오년114) 과 정미년115) 부터 그전에 서로 혼인(婚姻)하고 함께 조정에 섰던 자들이 서로 사이가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지게 되어 파가 갈리게 되었으니, 아!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어찌 무신년116) 의 변란이 있었겠는가? 아! 나홍언(羅弘彦)의 책자(冊子)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니, 밤중에 조용히 생각하면 꿈속에서도 가슴이 내려앉는 듯하다. 아! 모름지기 조용한 옛날 당중(堂中)의 시(詩)를 볼지어다. 이러한 자품(姿稟)으로 임오년의 사건에 모함되었으니, 이가 누구이며 이가 누구인가? 아! 상훈(常訓)117) 을 지어서 훈유(訓諭)하였고 《자성편(自省編)》과 《심감(心鑑)》을 지었으니, 그것이 비록 언교(言敎)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극진하게 한 것이었는데, 협찬(協贊)하는 자가 누가 있었으며 절개가 곧은 자가 누가 있었던가? 조정이 이와 같으니 환관(宦官)이 옳지 않은 일을 만들어 내어 임오년에 이르게 되었다. 아! 올 봄의 일을 내가 매번 억제시켰던 것은 종국(宗國)을 위해서였다. 아! 이목(耳目) 구실을 하는 자가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행동하며 좌우(左右)를 돌아다 보고 눈치나 살피니, 아! 한 모퉁이에 위치한 조선에는 늙은 임금과 충자(冲子)가 있는데, 대대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대신이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신축년118) 과 임인년119) 이후로 국가에 8촌(寸)의 친척이 없으니, 종신의 영체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아! 오늘 여러 신하들이 이 하교를 듣고 만약 마음에 감동이 되지 않는다면 이밀(李密)120) 의 진정표(陳情表)나 제갈양(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보고서도 감동하지 않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이계(李溎)를 도승지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14일 갑신
송영(宋鍈)·최몽암(崔夢嵒)을 장령으로, 김치구(金致九)를 정언으로, 정이환(鄭履煥)을 사서(司書)로, 조영순(趙榮順)을 대사성으로, 조완(趙)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해서(海西)121) 와 관북(關北)122) 에 유시(諭示)를 내려 병기[戎器]를 수리하고 보수하도록 신칙하였으며, 특별히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기경(李基敬)을 임명하여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삼았다.
4월 15일 을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4월 16일 병술
노인(老人) 등을 불러 음식을 내려 주는 데 친림(親臨)하였다가 진시(辰時)에 궁궐로 돌아왔으며,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당하관인 무신(武臣)을 시사(試射)하였다. 교관(敎官)에게 명하여 동몽(童蒙)을 데리고 입시(入侍)하여 친히 강(講)을 받게 하고 각기 종이와 붓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4월 17일 정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가서 직산 어사(稷山御史) 심이지(沈頤之)에게 서계(書啓)를 읽고 아뢰도록 명하였으며, 또 향민(鄕民)을 불러 황구 첨정(黃口簽丁)과 백골 징포(白骨徵布)123) 의 폐단을 묻고 하교하기를,
"아! 그 황구(黃口)는 그들이 비록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사람은 있겠지만 백골(白骨)에 이르러서는 어느 곳에다 미루어 징수하겠는가? 지금 들은 바로는 그것이 오히려 15구(口)나 된다고 하는데, 설령 한 현(縣)에 한 구(口)라 하더라도 3백 60고을로 말한다면 이는 벌써 죽어서 뼈만 남은 3백 60명에게 면포를 징수하는 것이니, 화기(和氣)를 감응하게 하여 손상시킴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아! 만약 신묘일기(辛卯日記)와 좌규(左揆)124) 의 아뢴 바가 아니었으면 또한 어떻게 염문(廉問)하는 거조(擧措)가 있었겠는가? 대저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니 지금은 비록 균역(均役)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뒷날 폐단이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을 알겠는가? 겨우 수십년이 지났는데 폐단이 다시 그전과 같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관찰해 보면 지난번에 면포를 줄여 주고 순문(詢問)하던 때에 고(故) 최 봉조하(崔奉朝賀)의 헌의(獻議) 가운데 ‘수령을 가려 뽑아야 한다[擇守令]’는 세 글자에 대하여 그 당시에 가상히 여긴다고 말하였지만 오늘날에야 바로 징험(徵驗)이 된다. 아! 양역(良役)에 대한 폐단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지금 이 하교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반포(頒布)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왜선(倭船)이 오고 가는데 대한 장계(狀啓)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도 하리(下吏)를 시켜 대신 보고하게 하고서 마음대로 임지(任地)를 비워 두게 한 자를 신칙하지 못한 경상 좌수사 및 도신(道臣)은 함사 추고(緘辭推考)125) 하도록 하고, 해당자인 기장 현감(機張縣監)은 만약 감영(監營)에 있으면 도신으로 하여금 결장(決杖)하게 하고, 만약 본현(本縣)에 도착하였으면 좌수사로 하여금 결곤(決棍)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무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밤에 꿈 속에서 인원 왕후(仁元王后)에게 진하(陳賀)하려고 하다가 행하지 못하고 깼는데, 성심(聖心)에 감회가 일어나 덕유당(德游堂)으로 나가서 정묘년126) 에 출생한 노인(老人)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인원 왕후의 탄생(誕生)이 정묘년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음식을 내려 주게 하고 이내 왕세손(王世孫)으로 하여금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도록 하였으며, 총융사(摠戎使) 김효대(金孝大), 군자감 정(軍資監正) 윤동석(尹東晳) 등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리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세손(世孫)의 지난날 청원을 이 일에서 마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내 윤동석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였다. 윤동석의 어머니는 바로 인원 왕후의 동모제(同母弟)였으므로 사람들은 간혹 은전(恩典)이 설월(屑越)하다고 우려를 하였지만, 또한 성효(聖孝)로 미루는 바가 가는 곳마다 어버이를 사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한필수(韓必壽)를 대사간으로, 권영(權穎)을 사간으로, 유훈(柳薰)·김낙수(金樂洙)를 장령으로, 이약채(李若采)·오현주(吳鉉胄)를 지평으로, 남주로(南柱老)를 헌납으로, 송낙(宋樂)·홍상성(洪相聖)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9일 기축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아! 탁지(度支)127) 에다 1년에 세(貰)로 바치는 은(銀)은 수천 냥(數千兩)에 불과한데 한 사람의 사행(使行)이 가지고 가는 것은 거의 10만 냥에 가까우니, 옛날에도 이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 더구나 팔포(八包)128) 는 〈대상(對象) 물건이〉 본래 인삼(人蔘)이었는데, 그 인삼을 지탱할 수가 없어 남쪽과 북쪽에서 백사(百絲)와 정은(丁銀)으로 유천(流泉)을 만들게 되었으니, 아! 나라 가운데 몇 십만의 광은(礦銀)을 요수(遼水)로 흘려 보내게 하고 쓸데없는 당화(唐貨)129) 를 짐바리에 가득 싣고 돌아오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하는 원대한 도리이겠는가? 내가 바로 사치를 금지하는 장본인으로 내가 일찍이 비단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몇 년 동안 내려오면서 그 값이 높게 뛰어올라 전인(廛人)이 폐해를 입고 있는데, 그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면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하나는 근년(近年)에 가정(加定)한 역원(譯員)을 줄이는 것이며 하나는 저들이 만약 값을 높게 정하면 포장한 것을 풀지 말고 본래 포장한 대로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역원을 줄이게 되면 팔포 대상(大商)은 저절로 따라서 줄일 수 있으며, 교역(交易)을 하지 아니하고 온다면 피인(彼人)의 조종(操縱)은 저절로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한 번 호령(號令)하는 일에 불과한데 어찌 번거롭게 순문(詢問)하겠는가? 금년의 절사(節使) 및 재자관(䝴咨官)130) 부터 시작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난날에 없었던 명색(名色)은 한결같이 모두 조사하여 줄이게 하라.
또 듣건대 요즈음 하교로 인해서 명주 값이 벌써 올랐다고 하니, 이것으로 관찰하여 보면 이 영(令)은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전인(廛人)에게 달려 있는 것이므로 역시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명주 값이 만약 앞서와 비교하여 높게 오른 일이 있으면,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는 당장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131) 을 시행하고 낭청(郞廳)은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라. 지금 이 하교는 국가를 위한 깊은 계책인데 사신(使臣)이 상역(象譯)132) 의 개인적인 안면에 구애되어 억지로 교역을 허락한다면 당연히 중감(重勘)133) 이 있을 터이니, 이것을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윤(右尹) 이기경(李基敬)을 금오(金吾)에 회부하여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기경이 은교(恩敎)가 내렸는데도 오랫동안 명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은점(銀店)으로 캘 만한 곳은 모두 각 아문(衙門)이나 군문(軍門) 또는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한 바가 되어 있어 설령 개광(開礦)할 데가 있다고 하더라도 탁지(度支)에 소속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예전의 사례이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만일 새로 파는 은광(銀礦)이 있을 경우 모두 본조(本曹)에서 관장하도록 하는 것을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이내 기록하여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좌참찬 서명응(徐命膺)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음악(音樂) 가운데 등위(等威)가 엄격히 구분되는 곳은 모두 예(禮)입니다. 그러므로 고(故) 판서(判書) 박연(朴堧)이 세종조(世宗朝)에 청하기를, ‘황종궁(黃鍾宮)134) 은 오직 인군(人君)이 사용하므로 여러 신하들은 사용할 수 없으니, 마땅히 지금부터 전하(殿下)께서 출입할 때에는 황종궁을 사용하게 하고 여러 신하들이 배례(拜禮)할 때에는 고선궁(姑洗宮)135) 을 사용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지금의 경우는 임금의 출입과 신하의 배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여민락(與民樂) 황종궁을 사용하니 등위를 분변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선궁은 지금 그 곡보(曲譜)가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우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거하여 전하께서 출입할 때에는 여민락을 사용하고 여러 신하들이 배례할 때에는 낙양춘(洛陽春)을 사용하는 일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권영(權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계품(啓稟)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한 죄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을 특별히 석방하도록 한 하교를 환침(還寢)하도록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은언군〉 인 등이 당초 죄를 범(犯)한 것은 궁노(宮奴)를 금즙(禁戢)하지 못해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죄명(罪名)이 매우 중대하였으며,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경우는 나이가 어림으로 놀라고 겁을 내며 병(病)에 걸린 나머지 운명(隕命)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슬프게 여겼다. 성의(聖意)가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고 측은히 여겨 돌보고서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였으니 모두가 대성인(大聖人)의 자애로운 상정(常情)인데도 대신(臺臣)은 혹시라도 성상의 마음이 진정(眞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하여 이렇게 환침하도록 하는 아룀이 있었으니 또한 세상의 도의를 살펴 볼 수 있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노인을 소견(召見)하여 음식 대접을 하게 하였는데, 무진년136) 에 출생한 사람으로 누락된 이는 연화문(延和門)에서 일체(一體)로 음식 대접을 하게 하였으니, 경묘(景廟)의 탄강(誕降)이 무진년이었기 때문이었다.
4월 20일 경인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황주 어사(黃州御史) 유한근(兪漢謹)과 고양 어사(高陽御史) 홍상간(洪相簡)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보다 먼저 두 어사에게 명하여 안렴(按廉)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復命)한 것이다.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전 황해 병사(黃海兵使) 이경무(李敬懋)가 〈국법(國法)을〉 범하면서 유용한 것이 비록 사용(私用)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수단의 교활함이 이와 같으니, 그 숫자를 모두 상세히 조사하게 한다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러니 해부로 하여금 구초(口招)를 바치게 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황주(黃州)·금천(金川) 두 곳의 수령에게는 결코 지방 장관으로의 임무를 맡길 수 없으니, 일정 기간에 준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라. 그리고 고양(高陽)의 경우는 황구 첨정(黃口簽丁)이 5명, 백골 징포(白骨徵布)가 3명이었는데 그 수효가 적다는 것 때문에 비록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하지 않았지만 해당 군수(郡守)에게는 녹봉(菉俸) 5등(等)을 감(減)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개과 천선(改過遷善)하도록 하라."
하였다.
동지 상사(冬至上使) 경흥군(慶興君) 이전(李栴)이 돌아오다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므로, 임금이 탄식하며 슬퍼하고 특별히 치제(致祭)하게 명하였으며, 해조(該曹)로 하여금 우휼(優恤)137) 하도록 하였다.
의관(醫官) 유상(柳鏛)의 손자(孫子)를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는데, 유상은 일찍이 숙묘(肅廟)께서 천연두(天然痘)를 앓을 때에 그의 약(藥)을 써서 성궁(聖躬)을 나아서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공로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특별히 이기경(李基敬)을 석방하게 하고 그를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은혜로 유시하기를 정중히 하면서 심지어 급류(急流)에 용감히 물러났다고 하교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놀랍게 여기며 의혹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 21일 신묘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주강(晝講)을 행하였으며, 강(講)하기를 마치자 공시인(貢市人) 등을 불러다 질고(疾苦)를 하문하였다.
4월 22일 임진
우윤(右尹) 이기경(李基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조정은 전적으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중세(中世)에는 명유(名儒)가 배출(輩出)되어 나라의 보배 구실을 하였으며, 울연(蔚然)하여 한 시대의 현인(賢人)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공명과 이익을 추구하는 학설이 성해지자 세속(世俗)으로 전해지는 피해가 심해져 지금은 독서(讀書)하는 종자(種子)가 끊기지 않고 겨우 보존하기는 하지만 밑바닥에 있는 치양(穉陽)과 같은 격이니 이를 부지하게 하고 보호한 연후라야 거의 원기(元氣)를 만회(挽回)할 수 있어 망하여 없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138) 에 전하(殿下)께서 유현(儒賢)을 초연(招延)하여 특별히 총재(冡宰)139) 로 임명하였는데, 신이 그 당시 연중(筵中)에서 소환(小宦)에게 부축하여 궁전(宮殿)에서 내려 가도록 명하는 일을 직접 보고서 신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감탄하기를 전하께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융성함이 여기에 이르렀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140) 에 이르러 또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산림지사(山林之士)를 예(禮)로 대우함이 아주 끊어졌다고 하며 또 지난해와 같은 대우에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며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애석합니다. 그 말하는 바가 성상의 마음〈에 있는 근심〉을 씻지 못하여 은혜와 예우를 끝까지 못하도록 만들게 되어 미워하고 냉대하며 사기를 꺾이게 하여 일생을 마치게 하였고, 기타 남의 죄에 연좌된 것을 지금까지 석방하지 않아 경의(經義)를 연구하며 도(道)를 지닌 인사(人士)로 하여금 다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전하의 평소 유술을 숭상하던 마음이 어찌하여 앞뒤가 그렇게도 판이(判異)하며, 미워하고 좋아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어긋나서 행동거지가 합당함을 잃어버린 데로 돌아가게 됩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말이 나의 뜻에 거스름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구하며〈마음에 거슬린다는 것으로 거절하지 말며〉 말이 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 구하라.〈뜻을 따른 것이라 하여 들어주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인군(人君)이 말을 듣는 성대한 절차입니다. 더구나 산야(山野)에서 진언(進言)하는 체모는 자체가 조신(朝臣)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숨김이 없는 의리를 다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본심(本心)이므로 성실하게 다른 마음이 없다면 진실로 용서할 만하지 처벌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신은 아마도 일월(日月)이 우연히 비춤을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도 천지(天地)에는 오히려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부터 이뒤로는 암혈(巖穴) 사이에서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면서 거침없이 유자(儒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숨기게 되니, 이런 풍토를 자라게 하고 그치지 않게 한다면 사학(斯學)141) 이 어떻게 끊어지지 않겠으며, 세상의 도의가 쇠약해지고 허물어지며 사람의 마음이 잘못된 곳으로 빠져드는 것을 장차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지나친 계교로는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한 가닥의 머리털까지도 병(病)이 들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원기(元氣)가 떨어지고 빠뜨려진 것이 현재의 가장 위태롭고 나쁜 증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바꾸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초선(抄選)하는 제도를 설치하고 예(禮)로써 용서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아름다운 제도이니 설령 한마디 말의 망발(妄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갑자기 최절(摧折)을 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번에 진언(進言)한 사람의 본래 마음은 다만 스스로 그의 뜻을 편 것에 불과할 뿐인데, 먼 바다 가운데로 귀양을 보내어 가극(加棘)하게 하여 광경이 근심스럽고 기가 꺾이었으니 산수(山藪)가 독충(毒蟲)·악수(惡獸)를 포용해 주는 아량을 성조(聖朝)께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승지에게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상소 내용이 《유곤록(裕昆錄)》을 범(犯)하고 권진응(權震應)의 죄가 없음을 변명하며 구원한다는 것으로 특별히 이기경(李基敬)의 관직을 해임하도록 명하고, 당일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하였다가, 도로 삭직(削職)하도록 명하고, 상소를 받아들여 올린 승지도 함께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4월 23일 계사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여염집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든 자를 적간(摘奸)하게 하였으며, 범(犯)한 자는 영남(嶺南)의 바닷가에 나누어 귀양보내게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기경(李基敬)을 나는 처음에 남인(南人)으로 여기면서 단지 옛날 정승의 손자(孫子)인 줄만 알았는데, 듣건대 그가 이재(李縡)에게서 학문을 배워 받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옛날에는 강지환(姜趾煥)에게 속임을 당하였고 지금에는 또 이기경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이 무리는 난적(亂賊)인데 경(卿)들이 어찌하여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기경(李基敬)을 남해현(南海縣)의 서민(庶民)으로 만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이미 속임을 당하였으니 관계됨이 이보다 더 중대할 수 없는데, 어찌 풍패(豊沛)의 향(鄕)142) 에다 안치할 수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이런 명령이 있었으며, 지난날에 내려 준 어필(御筆)은 그로 하여금 승정원(承政院)에다 도로 바치게 하였다.
임금이 이기경(李基敬)의 일로 대단히 번뇌하여 탕제(湯劑)를 굳이 거절하고 군신(群臣)들을 접견하지 않으므로 온 조정이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어제(御製) 《유곤록(裕昆錄)》 한 편(篇)은 바로 우리 성상(聖上)께서 40년 동안 고심(苦心)하신 것으로 세상의 도의를 위하고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무릇 신서(臣庶)로서 누군들 감히 그 사이에서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에 이기경은 우리 성상의 총애하고 우대하는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방자하게 상소를 하여 감히 우리 전하(殿下)께서 기본 법칙을 세워 다스리는 정치를 무너뜨리고 어지럽히려고 하였으니, 엄중히 처분(處分)을 가하는 것이 진실로 불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일로 인하여 성상의 마음이 번뇌하여 탕제(湯劑)를 올리지 못하도록 한 지가 이미 여러 날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오늘날 탕제를 한 때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성궁(聖躬)을 손상시키는 데 있어서는 실제로 평상시에 열흘 동안 올리지 않는 것의 갑절이 됩니다. 매번 천안(天顔)을 우러르면 지난날 보다 〈기력이〉 감소됨이 있으시니 탕제를 더욱 어떻게 잠시라도 정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자가 초조하게 허둥대며 민망하고 절박함이 이 지경까지 이르러 더욱 절실하며 이런 일 또한 소자가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한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충정(衷情)이 절박하기에 번독하고 동요하게 하는 것임을 피하지 아니하고 우러러 긴박하고 간절함을 진달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로서 굽어 헤아리고 보살펴 주셔서 빨리 탕제를 진어(進御)하도록 허락하시어 소자의 크게 우러러 바라는 마음에 부응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간절한 마음을 살폈는데 맨 앞에 부분은 네 할아비만이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니 의리(義理)가 정대(正大)한 것이다. 아! 《유곤록(裕昆錄)》의 뜻을 부탁할 사람이 있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희망이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 공(功)을 세우려는 것이고 소인배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번의 청원은 진연(進宴)과는 다름이 있으니 어찌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서 너의 간절한 정성을 저버리겠는가? 도승지[知申事]가 보는 곳에서 〈탕제를〉 먼저 마실 터이니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아!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는 것은 구체(口體)를 봉양(奉養)하는 것143) 과 같으니 증자(曾子)의 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효성(孝誠)을 체득하여 네 할아버지의 뜻을 깊이 본받아 해동(海東)의 종국(宗國)으로 하여금 영원히 반석(盤石)처럼 튼튼하게 하여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갑오
이조 판서 이은(李溵)이 연달아 패초(牌招)를 어겼다하여 특별히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삼도록 하였다.
홍낙순(洪樂純)을 이조 참의로, 박상덕(朴相德)을 판윤으로, 윤동섬(尹東暹)을 좌윤으로, 이장하(李長夏)를 우윤으로, 심발(沈墢)을 형조 참판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이일증(李一曾)을 헌납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사간으로, 정문주(鄭文柱)를 장령으로, 이경호(李景祜)를 좌참찬으로, 이우규(李羽逵)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납 이일증(李一曾)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기경(李基敬)은 머리가 허옇게 센 재신(宰臣)으로 특별한 예우(禮遇)에 감격하였으니, 그가 논열(論列)한 바는 진실로 성실하게 딴 뜻이 없는 데서 나왔으니 전하(殿下)께서 진실로 후하게 용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를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서인(庶人)으로 편입시키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시니 신은 놀라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이 진실로 이 신하의 직분이니 이기경은 본래 나이가 젊고 과격(過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것이 이 한 가지 방법에 달려 있는데, 최절(摧折)이 너무 지나치며 말씀의 내용이 갈수록 엄중하여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를 논할 것도 없이 〈국가의 일에 대하여〉 말을 하면 번번이 처벌하게 하시니 실로 자손(子孫)을 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관계됨이 막중(莫重)하니 이일증(李一曾)을 우선 체차(遞差)하게 하고, 당장 태복시(太僕寺)에 전좌(殿座)144)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의 직임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일증을 주의(注擬)145) 하여 올리도록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구대(求對)하지 않은 귀먹고 눈먼 삼사(三司)의 관원을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내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시(內司僕寺)에 나갔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등이 앞으로 나아가자 임금이 화난 음성으로 하교하기를,
"경(卿)들이 당연히 청토(請討)해야 하는데 도리어 구대(求對)하는가?"
하고,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일증을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하문하기를,
"그대가 어제 충자(冲子)의 상소를 보고서도 감히 이런 짓을 하였는가? 이것은 바로 역적을 비호한 것이니 지만(遲晩)146) 하는 것이 가하다."
하자, 이일증이 말하기를,
"금령(禁令)을 알지 못하고 단지 의례적인 말로 알고서 소(疏)의 끝부분에다 첨부하여 진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히 형신(刑訊)하도록 명하였다. 이일증이 말하기를,
"신에게 늙은 어버이가 있으니, 원하건대 한번 보고서 죽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하문하기를,
"이일증이 누구의 족속인가?"
하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이경춘(李景春)의 조카입니다."
하였더니, 즉시 이경춘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성토할 것을 주청하지 않은 대신(大臣)은 중도 부처(中途付處)할 뿐만이 아니라 영남(嶺南)의 바닷가로 내쫓는 것이 가하다. 그리고 어제 충자(冲子)의 소장을 보고서 신자(臣子)의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합당하겠는가?"
하자,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대신(大臣)이 구대(求對)한 것은 실제로 성토할 것을 주청하려던 것이었는데 미처 결론지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 이하의 관원들은 이재(李縡)만을 생각하고 그 임금은 생각하지 않는가? 권상하(權尙夏)의 손자만 위하면서 그 임금은 위하지 않으니 비루한 자들이다. 그리고 이기경(李基敬)은 일절(一節)이 앞서 일절보다 더 심한데도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성토하도록 주청하는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니, 이는 나와 세손(世孫)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고, 이내 이일증(李一曾)을 추자도(楸子島)에 귀양 보내어 천극(栫棘)하게 하였으며, 또 하교하기를,
"내용이 엄중하고 의리가 바른 소를 심상(尋常)한 것처럼 보고, 국가의 주창(主鬯)147) 을 돌보지 않으며 대신은 김종수(金鍾秀)가 성토하기를 청하는 일을 봉행(奉行)하려 한다는 비난에 겁을 내고, 소관(小官)은 윤시동(尹蓍東)이 말한 바 영합(迎合)하는 데로 돌아간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으니, 그 근본을 물어보면 바로 김종수·윤시동 때문이다. 모두 영원토록 사판에서 삭제하고 관직을 박탈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을미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김원행(金元行)을 승지(承旨)의 의망(擬望)에서 빼버리도록 명하였다.
조정(趙晸)·조엄(趙曮) 형제를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삭제하도록 명하였으며, 특별히 구윤옥(具允鈺)을 임명하여 평안도 관찰사로 삼고, 이익원(李翼元)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당시 조 정이 승지로서 사진(仕進)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그가 당(黨)을 비호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의심해서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주(周)나라 말기에 제후(諸侯)가 강성하고 주나라 왕실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난왕(赧王)148) 이 난왕으로서의 구실밖에 못하였으며, 한(漢)나라에 있어서는 권신(權臣)이 〈황제(皇帝)의〉 권한을 도둑질하여 10명의 상시(常寺)가 작용(作俑)하였기 때문에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49) 가 헌제로서의 구실밖에 못하였고, 명(明)나라에 이르러서는 애석하게도 붕당(朋黨)이 만세산(萬歲山)의 비극150) 의 비극(悲劇)을 초래하여 지금까지 오열(嗚咽)하는 형편이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동인(東人)·서인(西人)에서부터 일어나 그 뒤에는 사분 오열(四分五裂)하였으므로 밤중에도 이 일을 생각하면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곤두선다. 아! 무신년151) 의 〈변란이〉 만고(萬古)에 어찌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작은 사건이니, 모름지기 《유곤록(裕昆錄)》을 보라. 어찌 특히 고심(苦心)할 뿐이겠는가? 여기에 손을 대려고 하니, 이는 난신(亂臣)이다. 이 하교(下敎)를 듣고 어찌 특히 얼굴만 바꾸겠는가? 모두 마음을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6일 병신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다.
4월 27일 정유
하교하기를,
"요즈음 정도(正道)를 지켜야 할 위치에서 뒤섞이고 어지러워지기를 바라는데, 그 납언(納言)152) 에 있어서는 이일증(李一曾)·기언관(奇彦觀)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다고 하겠으니, 심지어는 편지 내용 가운데 제(弟)라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비록 일찍이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관할 안의 수령(守令)이 만약 문의함이 있을 경우 으레 회답하는 것이 가하다고는 말하지만 어찌 이 일증을 위해서 한탄하며 애석하게 여길 수 있었겠는가? 전 총재(冡宰)153) 는 유약[巽軟]하였고 후 총재는 구차스러웠으니 이 뒤로는 반드시 일을 살피고 신중하게 하도록 전조(銓曹)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이일증(李一曾)이 잡혀온 문서(文書) 가운데 이은(李溵)이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嶺伯]로서 이일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제(弟)라고 일컬었으며, 또 한탄하면서 애석하게 여기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성상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았는데 대저 이 시기의 대각(臺閣)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하였기 때문에 통청(通淸)154) 하는 것이 날마다 점차로 외람되고 잡(雜)되었으니, 임금이 신칙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만 이일증의 일을 가지고 매우 번뇌하는 하교를 내린 것은 중도(中道)에 지나쳤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특별히 전 판서 이은(李溵)에게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일증(李一曾)을 만약 납언(納言)의 수망(首望)으로 검의(檢擬)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은(李溵)과 비교하여 〈죄가〉 더 무거우니 그의 어지럽힌 근본을 추문(推問)하고, 서명응(徐命膺)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한 처분은 너무 가벼우니 빨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다시 김상철(金尙喆)을 임명하여 우의정으로 삼으니, 김상철이 그날로 임금에게 숙배(肅拜)하였다.
4월 28일 무술
다시 김치인(金致仁)을 영의정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좌의정으로 삼고,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판중추 부사 김양택(金陽澤)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좌의정 한익모가 진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고 즉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강이복(姜彛福)을 문학으로, 민종렬(閔鍾烈)을 부수찬으로, 이현영(李顯永)을 교리로, 임성(任珹)을 사간으로 삼았다.
4월 29일 기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30일 경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요즈음에 와서 수령[守宰]이 된 자가 공비(公費)를 보충하는 핑계로 영문(營門)이 있는 곳의 보목(保木)155) 이나 보전(保錢)156) 을 얻도록 청하고는 먼저 그 이식(利息)을 제(除)하여서 사용(私用)으로 돌리고 민간(民間)에 빚으로 나누어 주고는 그들에게 대출(貸出)한 원수(元數)를 갚게 하는데 1년, 2년이 지나서는 점점 바치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되니 공화(公貨)가 점차로 줄어들게 되고 소민(小民)이 지탱하기 어렵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연유하게 되며 관서(關西)가 더욱 〈폐단이〉 심합니다. 그러니 이 뒤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알아서는 안되는 큰 역사(役事)를 제외하고는 청컨대 일체 엄격히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당 수령은 당장에 금고(禁錮)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고, 도신(道臣)에게도 또한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여 엄중히 신칙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이 또 아뢰기를,
"장산(長山)의 남쪽과 북쪽을 나누어 조련(操鍊)하게 한 일은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수군 절도사가 북쪽에서 조련할 때에는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당연히 중군(中軍)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급박하게 경계할 일이 있어 미처 수군 절도사의 절제(節制)를 받지 못하게 될 경우는 당해(當該) 부사(府使)가 맡아서 스스로 호령(號令)을 해야 하며 장산 남쪽의 읍(邑)과 진(鎭)에서는 마땅히 그의 절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잠시 권한을 그에게 빌려 주고 겸영장(兼營將) 또는 방수장(防守將) 등의 명호(名號)를 가(加)한 후에라야 여러 고을과 진을 진압(鎭壓)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는 아뢰기를,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은 아뢰기를,
"이미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조련하게 하였으니, 그 절제(節制)하는 호령을 빌리게 하고 관할(管轄)하는 책임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부호군(副護軍) 장지항(張志恒)은 아뢰기를,
"이미 조련을 나누어서 하도록 하고, 다섯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으면 명호(名號)를 조금 높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도(道)에는 비록 수군 영장(水軍營將)이 없다 하더라도 관서(關西)의 수군 방어사(水軍防禦使)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로 하여금 수군 영장을 겸임하게 하는 것을 이력과(履歷窠)로 정하게 한다면 저절로 적합한 인재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장(營將)을 겸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변지(邊地)의 이력(履歷)을 허락하되 죽산 부사(竹山府使) 홍화보(洪和輔)를 장연 부사(長淵府使)로 옮겨서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이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어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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