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6권, 영조 47년 1771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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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제관(祭官)과 하례(下隷)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감히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였다.

 

5월 2일 임인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임금이 육사(六事)157)  로 자신을 책망하고 3일 동안 감선(減膳)158)  하도록 명하였으며, 인하여 하교하기를,
"비록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3일 동안은 〈감선을〉 그대로 준행하도록 하고 만약 아득하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찌 3일만 〈감선하겠는가?〉 비가 내린 뒤에 복선(復膳)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일 계묘

재차(再次)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황갑(黃柙)을 대사헌으로, 심수(沈鏽)를 형조 판서로, 한광회(韓光會)를 판윤으로, 신사운(申思運)을 집의로, 정문주(鄭文柱)·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남주로(南柱老)를 헌납으로, 송낙(宋樂)을 지평으로, 이상건(李商建)을 정언으로, 김기대(金基大)를 부교리로, 유한근(兪漢謹)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바로 보장(保障) 구실을 하는 중요한 지역이며 이른바 수성소(修城所)란 바로 재력(財力)을 모아 성(城)을 쌓는데 사용하려고 대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창고에 저축해 둔 것은 다 떨어졌고 흘러 들어올 돈은 모두 1만 3천여 냥(兩)이 되지만 빚을 놓아 이자를 받으므로 민간에 끼친 폐단 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갑신년159)   이후로는 그 돈으로 논을 사서 둔전(屯田)을 설치하였으니, 진실로 전례대로 세금을 거두어 본고(本庫)에 귀속되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갑신년에서부터 무자년160)  에 이르기까지 사들인 논에서 나오는 수입을 더러는 교리(校吏) 등의 반찬 값이나 옷감 값으로 귀속되기도 하며, 더러는 막비(幕裨)161)  의 사용(私用)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본고에 관계되는 바는 1천여 냥에 불과하니 이것이 어찌 성을 쌓는 자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요과(料窠)를 더 설치하여 지탱할 계책이 없습니다. 본부(本府)에서 시작한 것이라서 조정에서 알 바는 아니겠지만, 서울이나 지방의 재물이 어느 것인들 조정의 재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로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후(前後)에 나누어 준 수신(守臣)은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고 둔전(屯田)은 낱낱이 되돌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기록해서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으며, 이 뒤로 본영(本營)에서 가분(加分)하는 등의 일은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에 용(龍)을 그려서 제사를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그 종이로 제물(祭物)을 싸서 강물 중류(中流)에다 가라앉힌다고 하는데, 비록 토룡제(土龍祭)162)  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신(神)을 업신여기는 것은 심한 편이다. 석척 기우제(蜥蝪祈雨祭)163)  의 동자축(童子祝)은 거의 윤리(倫理)가 없기 때문에 어제(御製)에 이미 기재(記載)를 하였는데, 더구나 이것이겠는가? 지금부터 시작하여 용을 그린 종이와 축문(祝文)은 〈다른 제사 의식에서〉 축문을 불사르는 일과 같이 하도록 기록하여 규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아산창(牙山倉)의 조운(漕運)은 내양(內洋)164)  에 불과한데도 두 차례 조운을 하면 번번이 모두 승천(陞遷)165)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성창(法聖倉)의 경우는 칠산(七山)의 험난한 바닷길을 출몰(出沒)해야 하니, 바닷길의 멀고 가까움과 수고롭고 편안함은 현격하게 다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변통(變通)하는 때를 당하여 세 차례 조운한 뒤에야 변경[邊地]에다 조용(調用)하라는 영(令)이 있었으니 아마도 경중(輕重)을 잃은 듯합니다. 이 뒤로는 법성창의 조운도 역시 두 차례에 준(準)하게 하고 해조(該曹)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변경에 이의(移擬)하게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피중(彼中)166)  에서 물가(物價)가 뛰어오르는 것은 피인(彼人)이 조종(操縱)해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마주배(馬主輩)167)   또한 간교한 폐단이 많아서입니다. 앞서의 경우는 이런 무리들이 역관배[譯舌輩]나 사환(使喚)에 불과하여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들의 장악(掌握)에 있었기 때문에 일마다 힘을 다하였지만 아마도 그 뜻을 잃은 듯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작청(作廳)한 이후로 매년(每年)의 사행(使行)이 차례대로 들어가지만 역관(譯官)에게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역관 보기를 없는 것같이 하며, 사고 파는 가운데 물종(物種)의 귀천(貴賤)에 따른 이른바 타발가(打發價)168)  를 피인(彼人)에게 누설하여 알리지 않는 것이 없고, 그 무리들은 그 중간에서 이익을 탐내어 역관들도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연화(燕貨)가 조등(刁蹬)169)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됩니다. 마땅히 바로잡아 구제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다시 이런 폐단이 있으면 엄중히 다스릴 뿐만 아니라 그 청(廳)의 이름도 바꾸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5월 4일 갑진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신이 여러 비국 당상들과 장연(長淵)에 대하여 변통(變通)할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였는데, 본현(本縣)은 그 자체가 내지(內地)이니 변지(邊地)라고 일컫는 것은 끝내 이름과 실제가 적합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름과 실상이 모순(矛盾)되면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성(城)을 관장하는 데 방어(防禦) 이력을 사용하는 것은 명분이 더욱 바르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뒤로는 장연(長淵)의 사례에 의거하여 이력(履歷)을 사용하지 말고 일찍이 방어사(防禦使)를 거친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단지 육사(六事)만 자책(自責)하고 또 자신을 희생(犧牲)에 대신하도록 하여 단비[甘霈]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열 가지 허물이 있으면서도 편안하게 누워 있으니, 어떻게 비가 내리기를 바라겠는가? 내가 비록 정성은 얕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억지로 〈탕제(湯劑)를〉 마시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하자, 약방(藥房)에서 잇달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단오제(端午祭) 및 재차(再次)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걸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두 차례 씩이나 〈기우제에 쓸 향을〉 지영했는데도 비가 내릴 징조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친향(親享)도 할 수가 없어 단지 스스로 구름만 바라볼 뿐이다. 이러하니 어찌 늘상 쓰는 사례만을 따르겠는가? 대전(大殿)에 3일을 더 감선(減膳)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5일 을사

임금이 가뭄을 염려하여 어사(御史)        강이복(姜彛福)에게 명하여 강교(江郊)에 원통한 일이 있는 자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강이복이 복명(復命)하니 서계(書啓)를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불동(李弗童)은 윤리(倫理)에 관계되니 형률(刑律)을 상고하여 죄상을 감안해서 처단하고, 주조이(周召史)는 이미 자폐(自斃)170)                  하여 지금은 심문할 수가 없으나, 그 남편이 이익을 탐하여 사사로이 화해함으로써 그 처(妻)를 곤욕스럽게 한 것은 너무나 인륜에 어긋났으니, 일체(一體)로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도록 하며, 금지하는 법을 어긴 난전(亂廛)에 대해서도 역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중히 조처하게 하여 그 폐단을 없애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비가 오려나! 비가 오려나! 백성을 위하여 대단히 민망스럽다. 세 번째의 기우 제문(祈雨祭文)을 당장 지어 내릴 터이니, 남교(南郊)와 우단(雩壇)에 모두 중신(重臣)을 파견하되 남교의 경우는 일품(一品)의 관원으로 전차(塡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6일 병오

내삼청(內三廳)의 무겸(武兼)·금군(禁軍) 등의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감선(減膳) 때문에 정지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진시(辰時) 때가 되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유시(酉時)까지 계속내렸다.

 

하교하기를,
"임금은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데, 아! 해동(海東)이 한 달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번민하면서 마음이 초조하고 급박하였기를,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몸소 기도하는 것이 적당하겠다고 여겨 오늘 친도(親禱)하는 의식에 의거하여 먼저 목욕(沐浴)하고 기우 제문(祈雨祭文)을 짓고, 내일은 〈향(香)을〉 지영(祗迎)하려 했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비내리는 소리가 들려 처음에는 1촌(寸) 가량 내렸다고 알려 왔으며, 두 번째는 5촌 가량 내렸다고 알려 왔었고, 세 번째는 1척(尺) 가량 내렸다고 알려 왔다. 오늘 내린 이 비는 하늘이 백성을 구제(救濟)한 것이니 그것이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경건한 정성은 상(賞)을 주어야 마땅하다. 저자도(楮子島)와 용산(龍山)의 헌관(獻官) 및 전사관(典祀官), 대축(大祝)에게 모두 말을 내려 주는 은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비가 내렸다 하여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비가 내렸다고 해서 마음을 해이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제도(諸道)에 골고루 비가 내렸는지도 알 수 없다.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의 비가 내린 상황의 보고를 기다렸다가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수(李廷壽)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는 화려하고 중요한 직책이므로 무신(武臣)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정밀하게 선발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특별 임명이 잦은 것으로 인하여 이정수같이 보통의 인물도 이 임명에 참여하였으니, 관방(官方)171)  이 천(賤)해진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겠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지난해에는 가뭄으로 번민하면서 사단(社壇)에 상언(上言)을 바치라는 전교가 있었고, 또한 대가(大駕)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어시(御詩)가 있었다. 오늘 건명문에 나온 것은 옛날 일을 준수하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니 지방의 백성으로 서울에 온 자는 그들에게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비인(庇仁)의 백성으로 어전(魚箭)을 세력이 있는 집안에게 빼앗겼다는 것으로 비국(備局)에 정소(呈訴)하려고 올라온 사람이 있었는데,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그 글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여 독주(讀奏)하게 하였으며, 인하여 추조(秋曹)로 하여금 세력 있는 집안에 대하여 엄중히 신문하여 공초(供招)를 받아서 아뢰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체로 어세(魚稅)는 처음에는 각기 주관하는 곳이 있어 민간의 폐해가 여러 갈래로 많았는데, 균역청(均役廳)에 전속(專屬)된 이후로 그 폐단이 조금 제거되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을 듣건대 옛날 주인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크게 처분(處分)한 뜻이겠는가? 아! 경오년172)   뒤에 결전(結箭)한 것은 비록 큰 군영(軍營)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이라 하더라도 감히 손을 쓸 수가 없도록 하였는데, 지금 조진겸(趙鎭謙)의 문서(文書)는 〈피부가 없는데〉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느냐고 말할 만하다.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문서를 효주(爻周)하게 하라. 그리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근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처분하는 것이 적당하다. 태학(太學)의 관원으로 하여금 조 진겸은 청금안(靑衿案)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뒤에 헌신(憲臣)이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 사람이 이르기를, ‘인재가 있으면 행정은 거행된다.’고 하였다. 〈양민(良民)에게 신역(身役) 대가로 군포(軍布)〉 1필(疋)을 바치게 한 뒤로 생각하기를 어떻게 황구 첨정(黃口簽丁)과 인족 침징(隣族侵徵)이 있겠느냐고 여겼었는데, 다시 이런 폐단이 있으며 여염집을 빼앗지 말도록 금지시킨 것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거행하게 한 행정이었는데, 요즈음 간혹 〈범(犯)하는 자가〉 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어전(魚箭)에 있어서는 보잘것없는 포의(布衣)173)  가 다시 감히 이와 같이 하였는데, 나에게는 어사(御史)가 있으니 당장 추생 어사(抽栍御史)에게 염문(廉問)하도록 하여 만약 그런 자가 있으면 자신에게 한해서 금고(禁錮)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가 만약 자수(自首)할 경우는 잠시 보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것을 균역청(均役廳)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다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정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교동(喬桐)의 수영(水營)에서 합조(合操)할 때에 바닷길로 왕래(往來)하던 군사가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폐단이 있다는 것으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下詢]하였으나 의논이 귀일되지 않았다. 특별히 장산(長山) 이북의 백성들에게 교동에서의 합조에 나아가지 말게 할 것을 명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외롭고 약한 혼백(魂魄)이 만약 물 속에서 부르짖기를,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추성(鄒聖)174)  이 이른 바,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행정이다. 어떻게 늘그막에 장산 이북의 백성들에게 이런 폐단을 남겨 두겠는가?"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김효대(金孝大)가 말하기를,
"본청(本廳)의 중군(中軍)은 이미 관성장(管城將)을 겸임하여 행궁(行宮)에 들어가 거처하니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여 감히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며, 면간 교대(面看交代)175)  하게 하여 이미 마음대로 산성(山城)을 떠날 수 없도록 하였으니, 지방에 보임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공회(公會) 및 차제(差祭)하는 일을 청컨대 일체로 잠시 보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9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보사제(報謝祭)에 쓸 향(香)을 친전(親傳)하고 이내 주강(晝講)을 행하였으며, 대내(大內)로 돌아와 하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신중히 하였던 것은 첫째가 제사(祭祀)였다. 비록 친향(親享) 때라 하더라도 여러 집사(執事)가 모두 정결(淨潔)을 다하였는가는 알 수 없는데, 더구나 섭행(攝行)하는 제사이겠는가? 나의 경우는 비록 제소(祭所)에서 목욕을 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목욕을 했었다. 그런데 일찍이 듣건대 제관(祭官)에게 목욕하도록 아뢰면 모두들 이미 목욕을 하였다고 핑계댄다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겨울철에야 비록 어렵겠지마는 여름철에는 무엇이 어렵겠는가? 무릇 막중(莫重)한 일을 함에 있어 좌우에서 모시는 자에게도 모두 손을 씻도록 신칙하는데, 더구나 여러 집사(執事)들이겠는가? 이것을 별도로 신칙하여 내가 사전(祀典)을 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향(香)을 친전(親傳)하던 날에 비가 내렸으니 그것은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어떻게 우러러 사례(謝禮)해야 하겠는가? 만민(萬民)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약을 삼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으니, 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오늘 차대(次對)하러 와서 모인 여러 신하들은 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각기 직책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5월 10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몸소 행하였는데, 이날은 바로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의 기신일(忌辰日)이었다. 명나라 사람의 자손(子孫) 및 고(故) 충신(忠臣)의 자손을 명소(命召)하여 와서 기다리게 하고 하교하기를,
"80세가 다 된 임금이 우리 고황제를 위하여 이 의식을 행한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고 충신의 후손에게 이미 월랑(月廊)176)  으로 와서 기다리도록 명하였었는데, 그들의 임금이 자정문(資政門) 앞에 들어오기도 전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정성이 부족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죄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야 하겠다."
하고, 인하여 도총부(都摠府)에 머물다가 밤을 지새고 돌아왔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고, 인하여 도총부(都摠府)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58년 동안 내려오면서 이렇게 뜻을 표하는 것이 적당하다. 입직(入直)한 도총부의 당상관과 낭청에게 모두 말[馬]을 내려 주는 은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1일 신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뜰에 나아가 명릉(明陵)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예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을 보내어 명릉(明陵)의 무너진 부분에 사초(沙草)한 곳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12일 임자

하교하기를,
"일기(日記)를 보니 옛날에는 영장(營將)도 모두 소(疏)가 있었다."
하고, 인하여 여러 무신(武臣)들을 소견(召見)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각각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진달하게 하였다.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윤수인(尹守仁)이 강계(江界)의 인삼(人蔘) 폐단에 대하여 우러러 주달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뒤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강주(江州)에서 1년 동안 캐는 인삼(人蔘)의 전부를 취하여다 쓴다면 상납(上納)하는 원수(元數)에 아주 충분합니다만, 도내(道內) 각 고을에 사사로이 무역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인삼의 값이 뛰어올랐으니, 사상(私商)의 왕래(往來)를 엄중하게 금지하고 단절시킨다면, 정공(正供)은 판비(辦備)할 수 있고 민력(民力)을 펴게 할 수 있는 것이 진실로 윤수인(尹守仁)의 말과 같습니다. 청컨대 엄중히 금지하도록 신칙하여 범(犯)하는 자는 발각되는 대로 죄를 논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강변(江邊)의 파수군(把守軍)에 대하여 매번 무삼(貿蔘)177)   5분(分), 미삼(尾蔘) 2분(分)이라는 명목으로, 규정을 정하여 호역삼(戶役蔘)의 예(例)로 인삼을 무역하게 하는데, 그것도 상납하는 것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니 입파삼(立把蔘)은 바로 중첩된 부역(賦役)입니다. 그래서 그 고달픔을 감당하지 못하여 보충하는 대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만약 정군(正軍)에게 부파(赴把)하게 하는 규정을 혁파하고 한 고을의 주민과 군(軍)을 통계(統計)내어 4년마다 한 차례씩 윤번(輪番)으로 돌아가게 하여 입파(立把)하도록 한다면 군사들이 도망하는 폐단은 없어질 것이며 국가에는 융정(戎政)178)  의 실효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윤수인(尹守仁)이 일찍이 평안남도의 만호(萬戶)를 맡았었기로 인삼(人蔘)에 대한 폐단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만, 이것은 멀리서 헤아려 강경하게 정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해당 부사(府使)에게 편리한가 않은가를 상세히 묻도록 하고 조리 있게 논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김면행(金勉行)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임희우(任希雨)를 지평으로, 이명빈(李命彬)을 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수찬으로, 윤승렬(尹承烈)을 보덕으로, 안종규(安宗奎)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조규진(趙圭鎭)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5월 13일 계축

임금이 석우(石隅)에 거둥하니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는데, 비가 내린 뒤에 관가(觀稼)179)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추모동(追慕洞)에 나아가 추모비(追慕碑) 앞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도 같이 행례(行禮)하였으며, 민태열(閔台烈)을 소견(召見)하고 그를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다음에는 무안묘(武安廟)에 나아가 왕세손과 같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으며, 친히 제문(祭文)를 지어 내일 향(香)을 받게 하고, 아울러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인하여 관가대(觀稼臺)에 나아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그리고 기백(畿伯)180)  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언        송취행(宋聚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 나라의 임금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바로 훌륭한 지방관입니다. 신이 지난해 겨울 이후로 잇달아 관서(關西)에 흉년이 들었다는 보고를 들었으나, 먼 지방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마침 관서 지방의 사람을 만나 상세히 소식을 물었더니, 한 포(包)의 전미(田米)181)                   값이 10여 냥(兩)의 많은 값에 이르렀다고 하니, 전미가 이와 같았다면 대미(大米)182)                  의 값이 틀림없이 장차 이보다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한 말[斗] 쌀의 값이 백금(百金)이라는 것을 옛날에 들었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날 관서 지방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아! 건장(健壯)한 자들은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버리고 노약(老弱)한 자들은 구학(溝壑)에 나뒨구는데도 방백(方伯)이나 수령(守令)이 된 사람들은 흉년이 든 것에 대하여 한 마디 언급도 없으며, 진구(賑救)하는데 대하여 한 가지 일도 미친 것이 없으니 더욱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신해년183)                  ·임자년184)                  과 을해년185)                  ·병자년186)                  의 흉년에는 전하(殿下)께서 진제(賑濟)한 덕(德)을 의뢰하여 우리 백성들이 다행스럽게도 모두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서 지방의 쌀값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신해년과 임자년이나 을해년과 병자년보다 더 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40만 냥(兩)의 감영(監營) 빚을 민간에다 징수하도록 독촉을 하며, 모곡(耗穀)187)                  을 척매(斥賣)하는 시기에 그 가전(價錢)을 바치기 어렵다는 것으로 소민(小民)에게는 〈지급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모두 거상(巨商)에게 지급하므로 수백만의 생령(生靈)이 수화(水火) 가운데 있는 듯하다고 하니, 애처로운 저 적자(赤子)들 또한 유독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내리신 전교(傳敎)를 보건대 백성을 염려하는 성의(聖意)가 매우 부지런하고 간절함이 전교의 내용 밖에 넘쳤으니, 누군들 감격하여 울먹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하의 팔다리 구실을 하는 중신(重臣)이 된 자가 이미 성심(聖心)을 잘 인도하여 통달하지 못하였으며, 전하의 방백이 된 자 또한 덕의(德意)를 선포(宣布)하지 못하여 한갓 종이 위의 쓸데없는 말이 되도록 하였으니, 훌륭한 지방관과 함께 다스린다는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엄(趙曮)을 엄격한 법으로 중하게 다스려 관서의 백성들에게 사죄(謝罪)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지금 해야할 계책으로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벌써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난 뒤라서 비록 재민(災民)을 구제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겨우 참혹한 흉년을 거친 나머지 또 모맥(牟麥)의 환곡(還穀)을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의뢰하여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특별히 모맥의 환곡을 정봉(停捧)하게 하여 추수하기를 기다려 대봉(代捧)하도록 하고, 환곡의 절반으로 창고에 보관하여 둔 것을 또한 민간에 더 지급하게 해서 당장 눈 앞에 닥친 급박함을 구제하게 한다면 그것이 실질적인 은혜가 됨이 정말로 클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대신(大臣) 및 대신(臺臣)을 불러다 송취행에게 그 소(疏)를 읽도록 명하였다. 송취행이 말하기를,
"문자(文字)로 진달하였기 때문에 감히 들은 바를 상세하게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곳의 흉년이 든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는 말하기를,
"작년에 정말 흉년이기는 하였지만, 반드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송취행이 말하기를,
"사행(使行)이 돌아올 때에 백성들이 가마를 잡아당기며 정소(呈訴)하였기 때문에 사신(使臣)이 애당초에는 진달하려고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가을과 겨울 이전에는 별로 들리는 바가 없었지만 3월 이후에는 흉년이 들었다는 말이 점차로 들렸습니다."
하였다. 송취행이 말하기를,
"한 도[一路]가 흉년이 들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위에 보고하지 아니하고 또한 진제(賑濟)하지도 않았으니, 이와 같은 도신(道臣)을 만약 죄주지 않는다면 어찌 징계하여 두렵게 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대신(臺臣)이 아뢴 바를 들으니 그의 상소 내용보다 갑절이나 더하다. 그리고 〈인상식(人相食)이란〉 3자(字)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호남(湖南)에서 그것을 들었는데, 지금 비록 생각만 하여도 오히려 놀랍다. 금년 봄에 이와 같았다면 작년 겨울에 크게 흉년이 들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도신(道臣)이 되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면서 일은 느슨하게 하니 내가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 감영(監營)의 빚에 대해서는 일찍이 상신(相臣)이 아뢴 바를 듣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 누가 원망을 떠맡으며 직무를 거행하겠는가? 차라리 이 때문에 비방(誹謗)을 불러들이는 일이 없지나 않을까 하고 여겼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빚을 진 것 또한 관서(關西)의 백성들이니 이런 굶주린 백성에게 한결같이 모두 독촉하며 징수하는 것도 또한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 이런 일로써 살펴본다면 그들이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나간 해에 본도(本道)에 이런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재신(宰臣) 이일제(李日躋)로 하여금 풍환(馮驩)의 고사(故事)188)                  를 활용하도록 하였었는데, 본사(本事)는 논할 것도 없고 작년의 농사 상황도 그 임금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모르도록 하였는가? 서북(西北) 지방에 대한 조정의 염려가 어떠한데 늘그막에 이런 일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신칙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해당 도신(道臣)은 우선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고 진휼(賑恤)하는 행정은 대신(大臣)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니, 그것을 충분히 강구(講究)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책이 〈임금의〉 이목(耳目) 구실을 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하고 간곡하게 한 것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리고 〈인상식(人相食)이란〉 3자의 설에 이르러서는 이미 들은 뒤에 상세히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묻도록 하여 정말로 이런 일이 있다면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말고, 특별히 돌보며 진휼한 뒤에 장문(狀聞)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나의 늘그막에 측은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는 뜻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자, 한익모가 말하기를,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역의 흉년이 든 사실에 대해서는 비록 모두 대관(臺官)의 말과는 같지 않지만 대체로 조엄(趙曮)이 부채(負債)를 독촉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근거없는 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송취행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14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인하여 주강(晝講)을 행하였으며, 강(講)을 마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조엄(趙曮)에게 함문(緘問)하도록 명하자,〈인상식(人相食)이란〉 3자의 설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관서(關西)에서 대죄(待罪)했을 적에는 도내(道內)에서 들을 수 없었으며, 4월 보름쯤에 이르러 서울로부터의 기별로 인하여 처음에는 이런 말이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만약 본사(本事)가 실제로 있었고 신이 들었다면 어찌 차마 덮어두고서 즉시 아뢰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조엄(趙曮)의 함답(緘答)을 읽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온 사람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3자의 설은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신(大臣) 및 여러 비국 당상들도 모두 신 회의 말과 같았으나 임금은 그래도 의심스럽게 여겨 태천 현감(泰川縣監) 이종영(李宗榮)과 전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억(洪檍)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하문[下詢]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일이 없었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또 전 서장관(書狀官) 이명빈(李命彬)을 불러다 사행(使行) 때 백성들이 정말로 눈물로서 간절히 하소연했는지의 여부(與否)를 물었는데, 이명빈 또한 울부짖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대사간 김면행(金勉行)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3자의 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랍고 비참하게 합니다만 풍문(風聞)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청컨대 암행 어사[繡衣]를 가려 보내어 염찰(廉察)하고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은 암행 어사를 보내는 것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대신(臺臣)이 청할 바가 아니라고 책망하였다. 장령 정문주(鄭文柱)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신대승(申大升)을 지평으로, 이택진(李宅鎭)을 부교리로, 이진항(李鎭恒)을 보덕으로, 김기대(金基大)를 필선으로, 김종선(金鍾善)을 사서로, 이도묵(李度默)을 설서로 삼았다.

 

5월 15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6일 병진

송재경(宋載經)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는데, 전 부윤 구상(具庠)은 감사(監司)와의 친혐(親嫌)으로 체임(遞任)되었다.

 

5월 17일 정사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5월 18일 무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적전(籍田)에서 수확한 보리를 받았다.

 

5월 19일 기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제릉(齊陵)의 수개 고유제(修改告由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제릉을 봉심(奉審)하게 하였으며, 또 경덕궁(慶德宮)·목청전(穆淸殿), 선죽교 비각(善竹橋碑閣)을 지나는 길에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지평 송덕기(宋德基)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문덕(李文德)은 포탈한 조세(租稅)를 징수하는 행정으로 형장(刑杖)이 너무 지나쳤으며, 여산 부사(礪山府使) 최암(崔嵒)은 유약하고 겁이 많아서 구태(舊態)를 일소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정언 남주로(南柱老)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 김면행(金勉行)이 암행 어사[繡衣]를 보내도록 청한 것은 사체(事體)가 경솔하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담(李潭)을 특별히 제수하여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정상인(鄭象仁)을 응교로, 이진규(李晉圭)를 교리로, 홍경안(洪景顔)을 부교리로, 김응순(金應淳)을 이조 참의로,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20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인하여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행하였으며, 대내(大內)로 돌아와 과차(科次)를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홍이건(洪履健)을 승륙(陞六)189)   하였다.

 

전 지평        박필순(朴弼淳)이 상소하였는 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어제 우연히 연경(燕京)에서 가져 온 《강감회찬(綱鑑會纂)》을 삼가 보니, 《명사(明史)》에 연계(連繫)된 것으로, 바로 강희(康熙)190) 병자년191)                  무렵에 주인(朱璘)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기재된 바 우리 조정에 관한 일로 선계(璿系)에 망극(罔極)한 무어192)                  가 있으니, 우리 동방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놀랍고 가슴이 아프며 박절함이 마땅히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지난날 선왕조(先王朝)에서 여러 번 이것을 가지고 명나라에 보내어 분변하여 심지어 《명조회전(明朝會典)》의 누명(陋名)을 씻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당연히 이런 류의 문자(文字)가 없어야 하는데, 이번에 이 한권의 책이 태학사(太學士)        주인의 손에서 나왔으며, 예부 상서 겸관한원 첨사(禮部尙書兼管翰院僉事)        장영(張英)이 서문(序文)을 지어 믿을 만한 역사책으로 만들었으니 초야(草野)의 책과는 다른데도 국계(國系)에 대한 무어가 아직도 이와 같으니 적극적으로 분변하여 분명히 하는 도리를 결코 일각(一刻)이라도 더디게 하거나 늦출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승지에게 읽고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책상을 치며 크게 놀라면서 즉시 박필순(朴弼淳)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또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예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박필순이 바친 책자(冊子)를 상고해 보게 하였다. 한 익모 등이 말하기를,
"별다른 일이 아니고 바로 종계(宗系)에 관한 일입니다."
하니, 박필순이 말하기를,
"선묘조[宣廟朝]에 변무(辨誣)한 일은 신도 들었습니다만, 이것은 바로 강희(康熙) 년간(年間)에 지은 것인데도 다시 망측(罔測)한 문자가 있기 때문에 신이 마음이 아프고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정사(正史)인가?"
하자, 한익모가 말하기를,
"비록 이미 변무하였다고 하더라도 초야의 경우에는 아직도 헤아리기 어려운 말들이 전해지기 때문에 역사책을 짓는 자가 그러한 것들을 모아서 찬집(纂輯)한 것이며, 결단코 금궤(金櫃)에 넣어 둘 만한 글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변무할 일이 없어도 되겠다."
하자, 한익모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박필순이 말하기를,
"비록 정사(正史)는 아니라 하더라도 믿을 만한 역사책이라고 말할 만한데,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전해진다면 마음 아프고 박절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 역시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면서 또 하교하기를,
"이 책을 누구의 집안에서 빌렸는가?"
하자, 박필순이 말하기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서 빌렸는데, 그 집에서도 다른 곳에서 빌려 온 것을 빌려 주었기 때문에 미처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신(使臣)으로서 이와 같은 책자(冊子)를 구해 온 것이 또한 무슨 마음에서인가?"
하자, 원 인손이 말하기를,
"전질(全帙)을 사가지고 왔기 때문에 애당초 상고해 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가 어찌 감히 일각(一刻)이라도 머물러 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또 하교하기를,
"지금 박필순의 상소 내용을 듣건대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널리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숭정전(崇政殿)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그리고 비국 당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을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21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가니 여러 신하들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년에 변무(辨誣)하였는지는 이미 정사(正史)에 기재되어 있으니, 비록 꿈속에서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좌의정은 변무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였는데, 밤에 누워서 다시 생각하여 보니 이 책을 우주(宇宙)에 하루 동안 머물러 있게 하면 하루 동안 불효(不孝)하는 것이고, 이틀 동안 머물러 있게 하면 이틀 동안 불효하는 것이다. 경(卿)들은 각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진달하도록 하라."
하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한 차례 진주(陳奏)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는 말하기를,
"놀랍고 가슴 아픈 것은 극도에 달하였지만 정사(正史)가 이미 반포되어 사실이 분명하기가 일성(日星)과 같으며, 이것은 피인(彼人)이 개인적으로 기술(記述)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밑천으로 삼으려는 것에 불과하니, 그것이 믿을 것이 못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와 같이 지나치게 성심(聖心)에 번민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의정의 말은 너무나 느슨하다."
하자,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아주 놀랍고 가슴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정사(正史)가 아니라면 지금 변무(辨誣)할 단서가 없으며, 사신(使臣)을 보내어 진주하게 한 뒤에 책을 태워버리고 판(板)을 허물어 버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책을 불태우게 하고 판을 허물도록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주인(朱璘)의 처벌을 청한 후라야 가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먼저 사 가지고 온 사신을 처벌한 연후라야 피국(彼國)에 대하여 요청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여러 비국 당상들이 더러는 책을 불태우고 판을 허물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더러는 주 인의 처벌을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는데, 한익모는 말하기를,
"비록 책을 불태우게 하고 판을 허물게 하도록 청한다 하더라도 저들의 청답(聽答)은 기필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염려가 됩니다."
하고, 부응교 정상인(鄭象仁)은 그 당시의 세 사신을 삭직(削職)하도록 청하고, 지평 송덕기(宋德基)는 아주 먼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을 하지 아니하고 하교하기를,
"아! 두 차례 변무한 뒤에 그 무설(誣說)이 통쾌하게 씻겨 분명하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으니, 이번의 이 책은 진실로 너무나 뜻밖이었다. 어제 이 사건을 듣고 마음과 뼈가 모두 떨렸으며, 그 중의 한 글자는 무자년193)  에 없었던 일이니, 이런 등류의 문자(文字)를 비록 연경(燕京)의 저자거리에서 얻었다 하더라도 감히 단장을 하여 묶어서 두겠는가? 먼저 우리 나라 사신(使臣)을 처벌하고 계속해서 청(淸)나라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 〈그 책자를〉 얻어 가지고 온 사신을 삭직(削職)하라는 청은 그것이 윤리(倫理)가 없으며, 멀리 귀양을 보내라는 청은 이보다 낫기는 하다. 아! 비록 솔선하여 연경에 달려가 주인(朱璘)의 살점과 가죽을 사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오늘 입시(入侍)한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어찌 감히 같은 목소리로 성토하기를 청하지 않는가? 그 당시 사가지고 온 세 사신에게는 빨리 천극(栫棘)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고, 입시한 삼사의 관원들은 모두 삭직하도록 하며, 사신의 명칭은 진주사(陳奏使)라고 하라. 아! 선대(先代)를 위하여 마음 아파하는 때에 반전(盤纏)194)  이 웬 말인가? 역관(譯官)의 3분의 1을 줄이도록 하고 상매(商買)와 데리고 가는 팔포(八包)도 일체 엄중히 금지하되 그것을 만약 금지하지 않으면 해당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서장관(書狀官)에게는 중률(重律)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사신의 복명(復命)을 미리 기다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연후에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으니, 배표(拜表)195)  하는 날짜를 이달 안으로 택정하여 들이도록 하고, 오늘부터 감선(減膳)·철악(撤樂)하게 하며 박필순(朴弼淳)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명기집략(明紀輯略)》 가운데 찍힌 도서(圖署)를 상고해 보도록 하였는데 바로 서종벽(徐宗璧)이었다. 임금이 승지를 시켜 금상문(金商門)에 나가도록 하여 그 무어(誣語)가 관계된 곳에다 먼저 세초(洗草)하게 한 뒤에 불태우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주(陳奏)하면 청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다만 이정귀(李廷龜)와 같은 이가 없으니196)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신이 치우치게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조그마한 공적도 없었으니, 원하건대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기필코 청원을 이루고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의정이 떠나기를 청하니 그의 충성은 감동할 만하다. 다만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만 의망(擬望)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을 진주 정사(陳奏正使)로, 호조 참판 윤동섬(尹東暹)을 부사(副使)로, 심이지(沈頤之)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예문관 제학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홍빈(洪彬)을 지평으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3대신(三大臣) 및 제학(提學)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채제공(蔡濟恭)에게 말하기를,
"주문(奏文)은 경(卿)이 모름지기 지어 내도록 하라."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신이 연전(年前)에 괴롭고 걱정되는 일을 만났으므로 문원(文苑)197)  의 직함(職銜)을 겸임하게 하는 것은 죽어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신의 제학(提學) 직임을 체임(遞任)하게 한다면 신이 삼가 당장 지어서 올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채제공의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의 직임을 해임하도록 허락하고 하교하기를,
"이미 경(卿)의 청원에 부응하였으니 주문(奏文)은 경이 즉시 지어서 올리도록 하라. 나는 초본(草本)을 본 연후에야 궁궐로 돌아가겠다."
하고, 하교하기를,
"이번 사신의 행차에 저들이 만약 뇌물을 요구한다면 이는 피인(彼人)들이 하는 짓이 아니고 반드시 역관(譯官)이 피인과 부동(符同)해서 그렇게 된 것일 터이니, 내가 비록 쇠약하였지만 만약 이런 일이 있으면 해당 역관은 마땅히 전좌(殿坐) 남문(南門)에서 효수(梟首)하여 군중(群衆)에게 보이도록 하고, 이번에 마주(馬主)198)  가 만약 사대부(士大夫)의 청탁을 받는 경우가 있으면 해당 사대부는 당장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하도록 일체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그전에는 자현(自現)199)  할 경우 더러는 참작(參酌)하여 진실과 허위를 논하지 말도록 하였지마는, 이런 망측(罔測)한 책을 얻어다 서첩(書帖)을 꾸며서 만들고 도서(圖署)를 찍었으니, 지금 진주(陳奏)하려는 시점에서 먼저 그 근본을 엄중히 신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 장본인이 이미 사망하여 비록 의거하여 신문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그의 자식이 어떻게 모르겠는가? 아! 삼사(三司)의 관원이 된 자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성토하기를 청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게으르고 느슨하게 하니, 어떻게 이웃 나라에 알리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의성 현령(義城縣令) 서명민(徐命敏)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국수(鞫囚)의 사례에 의거하여 잡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담(李潭)을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참판으로, 윤득우(尹得雨)를 도승지로, 박필순(朴弼淳)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5월 22일 임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있었는데 채제공(蔡濟恭)이 주문(奏文)을 지어 올리자 하교하기를,
"마땅히 주문을 널리 보여야 할 것이니, 모레 숭정전(崇政殿)에서 여러 비국 당상들을 입시(入侍)하도록 하되, 전 문임(文任) 홍계희(洪啓禧) 등과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패초(牌招)하게 하라."
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을 특별히 제수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주문(奏文)의 초고(草稿)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대가를 돌리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수(自首)하는 자를 본 연후에 대가(大駕)를 돌리는 것이 가하다."
하고, 하교하기를,
"주문은 비록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자현(自現)했다는 사실은 듣지를 못했으니 이것이 무슨 분수와 의리이겠는가? 오늘 대가를 돌리는 일은 오직 자현을 빨리하고 더디게 하는 데 달려 있으니, 나의 뜻이 진실로 정해졌다. 그런데 오늘 해동(海東)의 신자(臣子)로 그 임금을 구저(舊邸)에 누워 있게 하겠는가? 연시(燕市)에서 혹은 책 장사에게 산 것을 따지지 말고 즉시 자현하도록 하는 일을 오부(五部)에 분부하게 하라. 만약 다시 늦추어 지체시킬 경우 해당 당상관을 중형(重刑)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다. 인하여 숭정전(崇政殿)에 나가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그리고 비국 당상이 입시하였다. 지평 홍빈(洪彬)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원 계보(璿原系譜)가 통쾌하게 씻겨진 뒤에 정사(正史)에 기재한 것이 분명하기가 일성(日星)과 같았는데, 뜻밖에 비할 데가 없는 흉측한 책을 연시(燕市)에서 사왔으니, 종계(宗系)에 대한 망극(罔極)함에 온 나라가 가슴 아파하고 절박하게 여기었으며, 사가지고 온 사신(使臣)에 대해서는 이미 천극(栫棘)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인장(印章)을 찍고 서첩(書帖)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도 이미 죽었다는 것으로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고(故) 목사(牧使) 서종벽(徐宗璧)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신의 행차에 관은(官銀)을 가지고 가지 않을 수 없겠는가?"
하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전후(前後)에 사건이 있었던 행차에 번번이 모두 〈관은(官銀)을〉 가지고 들어갔었는데, 유독 이번의 행차에만 빈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염려가 없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많고 적음을 하문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례(前例)의 경우는 대부분 만 냥(兩)을 기준으로 하였지만 이것은 지나친 듯하며, 7, 8천 냥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하교하기를,
"역관(譯官)이 만약 별봉은(別封銀)의 소식(消息)을 누설하여 저들이 그것을 요구하게 한다면 마땅히 전좌(殿坐)에서 효시(梟示)할 것이다."
하였다.

 

5월 23일 계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건원릉(健元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하교하기를,
"이 책 한 부(部)가 국중(國中)에 남겨져 있다면 어찌 진주(陳奏)하는 뜻이 있겠는가? 오늘 안으로 자현(自現)하도록 경조(京兆)200)  에 별도로 신칙하게 하라."
하고, 인하여 20년에 부사(副使)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던 자 가운데 만약 이 책이 있으면 즉시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되 오늘 자현하는 자에게는 참작하도록 하라고 명하고, 특별히 신회(申晦)를 임명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고 오부(五部)에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당시 사대부(士大夫)·중인(中人)·서얼(庶孽)의 집안에 이 책이 있어 자수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므로, 상서성(尙書省)에 쌓아 두었다.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관원을 잡아들이게 하여 자현하도록 엄중히 신칙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자현(自現)한 사람인 유한길(兪漢吉) 등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박필순(朴弼淳)이 상소를 올린 뒤에 지금까지 집안에 머물러 두었으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무너졌다. 일을 보아서는 당장 한결같이 모두 방형(邦刑)으로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이미 자수한 뒤에 모두 일률(一律)로 처리한다면 왕명(王命)을 신임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전례(前例)를 따라 백방(白放)할 수 없다. 그러니 더러는 형신(刑訊)을 시행하고 더러는 섬에다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되, 사가지고 온 역관(譯官)은 모두 해도(海島)의 종[奴]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4일 갑자

하교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박필순(朴弼淳)이 상소하였던 5월〉 20일 뒤에 숨긴 자는 사마의(司馬懿)와 환온(桓溫)201)  과 같은 존재이니, 장차 한번 크게 수색한다는 것을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을축

조영순(趙榮順)을 이조 참판으로, 민백흥(閔百興)을 병조 참판으로, 김응순(金應淳)을 좌윤으로, 기언정(奇彦鼎)을 정언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응교로, 정호인(鄭好仁)을 부수찬으로, 홍상간(洪相簡)을 필선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방물 봉과(方物封裹)를 친히 살펴보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안표(安杓)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적성 현감(積城縣監) 윤완(尹浣)은 집안에서의 행동이 너무나 도리에 어긋납니다. 까닭없이 양자(養子)의 인연을 끊다가 그 양매(養妹)가 만류하고 저지하는 것을 노엽게 여겨 심지어 구타까지 하는 해괴한 일이 있었고, 본현(本縣)에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탐욕과 비루한 짓을 일삼았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정묵(李廷默)은 고을 주민들의 정소(呈訴)를 아객(衙客)202)  에게 대신 제사(題辭)하도록 하여 고을의 창고가 거의 비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철원 부사(鐵原府使) 윤중연(尹重淵)은 죄가 없는 군교(軍校)에게 중곤(重棍)을 혹독하게 시행하였으며, 고을의 업무나 주민들의 소원(訴冤)에 대하여도 사리에 어두워 살피지를 못했으니, 청컨대 삭직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부임(赴任)한 지가 근일(近日)이고, 풍문(風聞)은 믿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따르지 아니하였다.

 

5월 26일 병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책 거간꾼을 잡아들이게 해 책자(冊子)를 사고 판 곳을 추문(推問)하도록 하여 김이복(金履復)·심항지(沈恒之) 등을 차례로 정죄(定罪)하였다. 그리고 또 이희천(李羲天)을 심문하니 이희천이 공초(供招)하기를,
"비록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사서 두기는 하였습니다만 실제로 일찍이 상고해 보지는 못하였으며, 박필순(朴弼淳)의 상소 내용을 대략 들은 뒤에 그대로 즉시 불태웠습니다."
하니, 마침내 하교하기를,
"아! 지금 진주(陳奏)하려고 하는 때에 우리 나라에 사가지고 온 자를 만약 정법(定法)하지 않는다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의 아픔과 박절함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차례대로 자세히 묻도록 하라."
하였는데, 과연 이희천 및 책 거간꾼 배경도(裵景度) 등을 찾아내었으니, 그것이 만약 《봉주강감(鳳洲綱鑑)》에 서로 뒤섞였다면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이상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측(罔測)한 책을 서로 사고 판 것이니, 듣고서 마음은 섬뜩하고 뼈가 멍이 든 것같아 전례를 따라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희천 및 책 거간꾼 배경도는 장전(帳殿)에서 세 차례 회시(回示)한 뒤에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하여금 청파교(靑坡橋)에서 효시(梟示)하게 하여 강변(江邊)에 3일 동안 머리를 달아 놓도록 하고, 그들의 처자[妻孥]는 흑산도(黑山島)에다 관노비(官奴婢)로 영속(永屬)하게 하였으며, 인하여 박필순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상소의 요지[疏槪]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자, 박필순이 대답하기를,
"선원 계파(璿源系派)의 허위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하교하기를,
"그 상소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소의 요지를 듣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내려 앉았다. 상(賞)을 줄 것은 상을 주고 경계할 것은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큰 요지를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진주(陳奏)하는 의미이겠는가? 전 승지(承旨) 박필순을 회양부(淮陽府)에다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경조(京兆)에서 《명사강목(明史綱目)》 중에 주인(朱璘)의 문자(文字)가 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이현석(李玄錫)이 찬술(撰述)한 《명사강목》에 주인(朱璘)의 말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고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에 간행하도록 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그런 사실을 들은 뒤에는 천지[覆載] 사이에 그대로 둘 수 없다. 한결같이 모두 세초(洗草)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약 오늘날의 거조(擧措)가 없었다면 어떻게 세상의 도의를 징계하겠는가? 책 장수가 도성(都城) 가운데 가득하며 사야 하는 것은 오직 《봉주강감(鳳洲綱鑑)》뿐인데, 그 가운데 유독 주인의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산 자에 대해서는 나라의 형률을 빨리 시행하여 책 장수 8인은 흑산도(黑山島)의 종으로 삼게 하고, ‘강감(綱鑑)’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경조(京兆)로 하여금 한결 같이 모두 불태우도록 하라."
하였다. 서명민(徐命敏)이 옥(獄)에 갇혀서 전혀 모른다고 공초(供招)하니, 분간(分揀)해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5월 27일 정묘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진주사(陳奏使)를 전송하였다. 이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서 배표(拜表)를 보고 진주 3사신(陳奏三使臣)을 소견(召見)하여 하교하기를,
"일을 만약 성취시키지 못하면 대궐 밖에 엎드려 기필코 청원을 얻어내도록 하라."
하자, 정사(正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한(漢)나라 때〉 소무(蘇武)가 19년 동안 흉노(凶奴)에 구금당했던 것으로 기약하겠습니다."
하니, 물러나도록 명하고 인하여 모화관에 거둥하여 사대(査對)203)  에 친림(親臨)하였으며, 사대를 마치고 임금이 모화관에서 내려와 지영(祗迎)하게 한 뒤에 곧 궁궐로 돌아왔다.

 

주문(奏文)에 말하기를,
"삼가 아뢰는 일이 선계(先系)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면서 불쌍히 여기고 허락받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소방(小邦)을 살펴보면 번복(藩服)으로서의 도리를 조심스럽게 지키면서 대대로 황제(皇帝)의 은혜를 받아 아뢰는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응답을 해주셨기 때문에 소원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신이 뼈를 끊는 듯한 아픔과 가슴이 썩는 듯한 원통함이 있는데도 한갓 분수에 넘친다는 두려움만 품은 채 그 원통함을 드러내어 씻어버릴 계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애(仁愛)로 포용해 주는 하늘같은 은혜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근간에 처음으로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병자년204)   무렵에 주인(朱璘)이 지은 《명기집략(明紀輯略)》을 보니, 그 가운데 신의 국조(國祖) 강헌왕(康獻王)205) 휘(諱)206)  의 종계(宗系) 및 신의 4대조[四世祖] 신 장목왕(莊穆王)207) 휘(諱)208)  의 사적(事蹟)이 기재되어 있는데, 잘못되고 사리에 어긋나기가 유례가 없을 정도이며, 명예를 손상시킴이 한이 없어 오내(五內)209)  가 놀라고 서글퍼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책이 이루어진 것은 벌써 70여 년이 되었으며 소방(小邦)으로 유전(流傳)된 것 또한 어느 해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신의 성효(誠孝)가 천박(淺薄) 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스스로 깨닫고 살펴서 즉시 진달하여 호소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더욱 신이 사사로이 스스로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대체로 강헌왕(康獻王)의 종계가 《명조회전(明朝會典)》에 잘못 기록되게 된 것은 실제로 고려(高麗) 말기의 간사한 사람들이 몰래 추잡하게 거짓을 꾸며대기를 극도로 한 데서 연유하였는데, 신의 선조(先祖) 공정왕(恭定王)210) 휘(諱)211)  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정성을 쌓고 간절히 기원(祈願)하여 신종(神宗)무자년212)  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부분을 삭제하고 바로잡도록 쾌히 허락하셨고 인하여 책을 만들어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장목왕(莊穆王)의 사적을 《십육조기(十六朝紀)》에다 잘못 기록한 것 역시 가도(椵島)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몰래 멋대로 거짓을 꾸민 것에 연유하였으므로, 신이 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병오년213)  에 전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호소해서 윤가(允可)를 받았으며, 우리 황상(皇上) 대에 이르러 정사(正史)를 반포하여 보여 주셨으니 분명하기가 일성(日星)이 하늘에 걸린 듯하여 소방(小邦)에서 전후(前後)에 무함을 받았던 부분이 이때에 이르러 얼음이 녹듯 남김이 없게 되어 자애와 은혜가 미치는 곳에 숨겨진 원통을 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이 입으로 칭송하며 머리 위에 떠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스스로 그것이 오늘날과 후세(後世)에 믿을 만한 책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이 《명기집략》은 주인이 사사로이 집찬(集纂)한 것에 불과하니 국승(國乘)214)  으로 영구히 전하는 책에다 견주어 의논할 것은 아닙니다만 와전(訛傳)된 것으로 인해서 잘못된 부분을 답습한 내용이 아직도 권질(卷帙) 가운데 남아 있어 시장 사이에 전포(傳布)되고 있으니, 신의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절박하며 원통하고 분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의 이 책은 대체로 본보기[從來]가 된 것이 있었으니, 명(明)나라 사람인 진건(陳建)이 지은 《황명통기(皇明通紀)》에도 역시 소방의 종계에 대한 망측(罔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홍무(洪武)215)   무렵에 시작하여 정덕(正德)216)   무렵에 마쳤으며, 이는 가정(嘉靖)217)   무렵에 편찬한 것이었고, 소방에서 얻어다 보기는 바로 명나라 조정에서 분명하게 바로잡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소방의 백성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명조회전》에서의 무어(誣語)가 이미 바로잡혀졌다면 이와 같은 내용은 앞으로 저절로 제기되었다가 저절로 없어져버리는 데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겼었기 때문에 다시 분변하여 밝히는 것을 일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인의 글을 가지고 보면 대체가 《황명통기》에서 주워 모은 것이었으니, 또 이 뒤에 주인을 답습하여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기필코 근본을 뽑아버리고 근원을 막아야겠다고 하면서 아울러 거론하고 우러러 주청하게 된 까닭입니다. 신이 가만히 삼가 생각하건대 한 부(部)의 《명사(明史)》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선황제(先皇帝)의 명명(明命)을 받들었으며, 마침내는 우리 황상(皇上)의 은혜로운 반포를 받게 되었으니, 그 기재된 것의 광명(光明)함과 사체(事體)의 존엄(尊嚴)함이 생각하건대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무망(誣罔)한 책이 공공연하게 매매가 되며 고려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그것이 소대(昭代)218) 돈사(惇史)219)  의 규정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히게 되어 하나로 통일하여 문자를 같이 하는 뜻에 크게 어긋난 것이 또한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이 책을 보면서부터 분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여 먹을 때를 당해서도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이며 잠잘 때를 당해서도 잠자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만약 이 책을 하루라도 천지[天壤] 사이에 머물러 두게 되다면 신이 장차 무슨 낯으로 신의 선조(先祖)에게 돌아가 뵙겠습니까? 이에 감히 눈물을 흘리며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오니, 몸은 비록 해동(海東)에 머물고 있지마는 마음은 천자(天子)의 궁궐에 붙좇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 소방의 인륜과 의리에 관계된 바를 굽어살피시고 특별히 성조(聖朝) 사례(史例)의 지극히 중대함을 진념(軫念)하시어 위의 항목(項目)에 진달한 《황명통기》·《명기집략》 두 책 가운데 사리에 어긋나는 내용으로 소방(小邦)에 관계된 것은 빨리 명지(明旨)를 내려 모두 삭제해 버리도록 하여 보잘것없는 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심정을 위로해 주신다면, 해동의 신민(臣民)들은 삼가 당연히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는 풀을 묶어[結草] 천지(天地)같이 곡진하게 이루어 주는 은혜를 갚겠습니다. 연계(緣係)된 일이 선대(先代)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감히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어 사리로 불쌍히 여기고 허락해 주심을 받도록 바라며 이렇게 조심스럽게 주문(奏文)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주인(朱璘)의 망측(罔測)하고 비할 데가 없는 책을 어찌 한 시각(時刻)이라도 천지[覆載] 사이에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주인과 장영(張英)의 살점을 먹을 수 없고 가죽을 깔고 잘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책을 매매(賣買)한 자는 같은 날 정법(正法)해야만 주인과 장영의 죄를 대신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 사람들이 시체(時體)220)  를 힘쓰는 데 말미암은 폐단으로, 이번 일은 지금 별 일 없이 순조롭게 끝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니, 이런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이 책이 외방(外方)에 전포(傳布)된 것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제도(諸道)와 양도(兩都)에 거듭 신칙하여 그 책을 모두 불에 태우도록 하고, 만약 숨기는 자가 있으면 역적을 다스리는 형률로 엄중히 처벌한다는 일을 엄격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홍렬(閔弘烈)을 대사간으로, 김치구(金致九)를 지평으로, 조재준(趙載俊)을 수찬으로, 원인손(元仁孫)을 판윤으로 삼았다.

 

5월 28일 무진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겨우 문폐(文陛)221)  를 떠나기는 하였지만 어리석은 충정(衷情)은 잊지를 못하고 염려가 되어 감히 이렇게 덧붙여 진달합니다. 성주(聖籌)께서는 팔순(八旬)이 다 되는 나이가 되어 하루에도 많은 정무(政務)의 번거로움을 처리하시었는데, 그 신서(臣庶)222)  의 저죄(抵罪)가 서로 잇달아 매번 번뇌(煩惱)를 이루게 되어 약원(藥院)의 관원을 접견하지 않고 탕제(湯劑)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으니, 원하건대 옥체(玉體)를 보전하고 아껴야 하는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소서. 신이 어제 하직하고 물러나면서 감히 ‘너그럽게[寬]’ 하여야 한다는 한 글자를 가지고 대략 우러러 권면한 것이 있었는데, 성상(聖上)의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명철한 자질로 어찌 한 가지 정무(政務)가 혹시라도 착오가 생기거나 한 사람의 남자라도 생업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만, 많은 신하들이 보잘것없어 잘 받들지 못하여 한두 가지 일이 엎치락뒤치락 겹으로 격동하게 되어 더러는 사령(辭令)이 공평함을 잃으며 처분(處分)이 중도(中道)를 지나치게 됨을 면하지 못하여, 대소(大小)의 관원들이 두려워하면서 모두들 위태롭게 여기며 겁내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너무나 성대[盛世]의 태평스러운 기상(氣像)에 흠이 됩니다. 신이 너그럽게 하시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대면하여 말씀드린 것은 진실로 성실하고 전일하게 사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 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소맥(小麥)을 친히 받았다.

 

전 참판 엄인(嚴璘)의 이름을 엄숙(嚴璹)으로 고치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주린(朱璘)의 이름과 같다는 것 때문에 대신(大臣)이 진달하여 고치게 한 것이었다.

 

5월 29일 기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공조 판서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부사로, 신응현(申應顯)을 사간으로, 김복휴(金復休)를 지평으로, 조종현(趙宗鉉)을 부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이 이미 특별히 석방되었으니 올라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 걸음에 어느 사람이 머물러 맞아 주겠으며 어느 사람이 입혀주고 먹여 주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나의 마음이 괴롭다. 도성(都城) 밖에 도착한 뒤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두어 칸의 집을 사서 지급하도록 하되 또한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달마다 쌀 한 섬을 지급하게 하고, 전 양제(良娣)의 집안과의 노복(奴僕)의 왕래(往來)를 금지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관[柩]이 도착한 뒤에도 역시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필요한 물품을 도와 주게 하라."
하였다.

 

고(故) 판서(判書) 이현석(李玄錫)의 관직을 추삭(追削)하도록 명하였는데, 이현석이 편찬(編纂)한 《명사강목(明史綱目)》에 주인(朱璘)의 평(評)이 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그리고 또 여러 곳의 사고(史庫)에 간직된 《명사강목》은 이 뒤 포쇄(曝曬)할 때에 즉시 그 부분을 세초(洗草)하도록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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