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7권, 영조 47년 1771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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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경자

왜인(倭人)이 표류(漂流)하여 동래(東萊)에 도착하였는데, 실정을 물어 보니 말하기를 ‘대마도(對馬島)는 살아갈 계책이 없어서 관백(關白)에게 가서 하소연하였더니, 관백이 조선인과 서로 교역(交易)해서 살아갈 계책을 얻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부사 이보관(李普觀)이 사유를 갖추어 치문(馳聞)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글을 받아서 관백(關白)에게 증좌(證左)를 만들고자 한 것은 교린(交隣)한 후 처음 듣는 일인데, 이것을 엄중히 막지 않으면 국체(國體)가 존중되겠는가? 부사 이보관(李普觀)은 잡아다 추문하여 엄중하게 처분(處分)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동래 부사로 삼아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저 사람들은 지극히 교사(巧詐)하므로 먼저 엄중히 바로잡은 다음에 이어서 효유(曉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7월 3일 신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임인

주원(廚院)249)  의 직숙(直宿)을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7월 5일 계묘

장령(掌令)        김서응(金瑞應)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병판(兵判)        이익원(李翼元)은 초정(初政)이 있고부터 이미 사설(辭說)이 많았는데, 도정(都政)250)                  이 지나자 기량(伎倆)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삼청(三廳)251)                  의 취재(取才)에 우등(優等)인 자 가운데 한 사람도 의망(擬望)252)                  에 참여시킨 자가 없으므로, 팔도의 무사들이 억울함을 품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부유한 역관(譯官)의 아들을 첨사(僉使)로 삼고, 관예(官隷)의 무리를 가장(假將)253)                  으로 삼았습니다. 남쪽 변방의 곤임(閫任)을 다스릴 때에는 처음에 채수(債帥)254)                  의 이름을 숨겼으나, 서쪽 변방의 좌막(佐幕)을 다스릴 때 마침내 사도(司徒)의 오명(汚名)이 생겼으니, 변진(邊鎭)의 풍요한 벼슬자리는 강상(江上)의 화부(貨夫)가 차지하였고, 외방(外方)의 구근(久勤)한 벼슬을 앞질러 뽑아 도하(都下)의 부민(富民)이 함부로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혜경(蹊逕)이 여러 갈래이고 추악한 말이 떠들썩하니, 청컨대 이익원에게 특별히 사판(仕版)255)                  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소서. 근일에 동전(東銓)256)                  에서 시행한 정사에 대해 전하는 말이 많아서 어지럽습니다. 풍요한 고을은 절인(切姻)이 아니면 가객(家客)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전가(銓家)에서 공정하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근거 없이 떠도는 비방을 죄다 믿을 수는 없지만, 모두 입을 다물어 고요한 때에 그래도 강직하게 말하였다.’고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김서응(金瑞應)의 소장(疏章)을 읽도록 명하고 대신들에게 두루 물어 보니, 대신들이 이익원(李翼元)이 반드시 속임을 당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풍요한 고을에 대해 물어 보니, 더러 양덕 현감(陽德縣監) 백사은(白師殷)이라고 우러러 대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당(亞堂)257)  의 정사이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조신(朝臣)들이 모두 당동 벌이(黨同伐異)하였으므로, 김서응의 소장도 또한 이러한 투식에서 나왔으나, 이익원이 무릅쓰고 전지(銓地)에 웅거하며 잘못된 정사를 많이 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말을 초치(招致)함은 마땅한 것이다. 절인(切姻)·가객(家客)의 말에 이르러서는 전석(前席)에서 하순(下詢)하였을 때 대신들이 모호하게 우러러 대답하였으므로, 이에 백수(白首)로 등과(登科)하고도 곤궁해서 굶주려 죽고자 했던 백사은은 가객(家客)이 되어 그 벼슬이 체차(遞差)되었다. 그런데도 ‘절인(切姻)’ 두 자에 대해 끝내 개진(開陳)하지 않았으므로, 절인으로서 풍요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뽐내어 부임(赴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본말(本末)을 조사하여 밝히는 정사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8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257] 아당(亞堂) : 참판(參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조신(朝臣)들이 모두 당동 벌이(黨同伐異)하였으므로, 김서응의 소장도 또한 이러한 투식에서 나왔으나, 이익원이 무릅쓰고 전지(銓地)에 웅거하며 잘못된 정사를 많이 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말을 초치(招致)함은 마땅한 것이다. 절인(切姻)·가객(家客)의 말에 이르러서는 전석(前席)에서 하순(下詢)하였을 때 대신들이 모호하게 우러러 대답하였으므로, 이에 백수(白首)로 등과(登科)하고도 곤궁해서 굶주려 죽고자 했던 백사은은 가객(家客)이 되어 그 벼슬이 체차(遞差)되었다. 그런데도 ‘절인(切姻)’ 두 자에 대해 끝내 개진(開陳)하지 않았으므로, 절인으로서 풍요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뽐내어 부임(赴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본말(本末)을 조사하여 밝히는 정사이겠는가?"

 

태천현(泰川縣)의 실화(失火)한 72가호(家戶)에 모미(耗米)258)  를 회부(會付)해서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도록 명하고, 또한 본현(本縣)과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고휼(顧恤)을 더하여 집을 지어 안접(安接)할 수 있게 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평안 감사 구윤옥(具允鈺)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아뢴 것이었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담(李潭)을 이조 참판으로, 이시건(李蓍建)을 집의로, 홍상간(洪相簡)을 부교리로, 윤희동(尹僖東)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7월 6일 갑진

윤득우(尹得雨)에게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김서응(金瑞應)의 소장으로 인하여 병판 이익원(李翼元)에게 함답(緘答)259)  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지가 임금의 하교를 잘못 전하여 김서응으로 하여금 함답하게 하니 김서응이 마침내 함답하기를,
"채수(債帥)는 전득우(田得雨)를 말한 것이고, 좌막(佐幕)은 정징세(鄭徵世)를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가 임금의 하교를 전한 것도 진실로 놀랄 만한 일이지만, 김서응이 대신(臺臣)으로서 감히 복난(覆難)하지 못하고 함답을 올렸다. 대신으로서 함답한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으니, 대각(臺閣)의 수치가 이에서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새로 간행하였는데, 다섯 군데 사고(史庫)에 소장하고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여러 승지들에게 나누어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고 판서 이현석(李玄錫)이 지은 《명사강목》에 주인(朱璘)의 이름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세초(洗草)260)  하고 홍계희(洪啓禧)로 하여금 개찬(改纂)하도록 명했다가 후회하여 단지 주인의 논평만 빼고 구본(舊本) 그대로 새로 간행하여 반포(頒布)하게 한 것이었다.

 

7월 8일 병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지영(祗迎)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정언 이범제(李範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의 현감(旌義縣監) 하용주(河龍珠)는 혹은 무녀(巫女)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사천(私賤)의 아들이라고도 하였으나, 본래 거부(巨富)로 일컬어졌는데, 겨우 도정(都政)을 파하자마자 추잡한 말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歷辭)261)  할 때 신이 과연 그로 하여금 정체(呈遞)262)  하게 하였으나, 끝내 체차하여 해면(解免)되지 않았습니다. 저리(邸吏)를 잡아 가두기에 이르러서는 돈을 치러 뇌물을 바치고 반드시 신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초사(初仕)에서부터 고을 수령이 되기까지 전화(錢貨)를 뇌물로 바친 가운데 변통하여 얻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정의 현감 하용주는 빨리 간삭(刊削)해서 태거(汰去)시키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전례(前例)에 따라 사판(仕版)에서 간삭하는 데 그칠 수는 없다.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해서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7월 9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어서 소대(召對)263)  를 행하였다.

 

특별히 이창수(李昌壽)에게 예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특별히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후손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명(明)나라의 정사(正史)를 보고 무릇 즉위한 다음해가 원년(元年)이 되고 광종(光宗)이 재위(在位)한 것은 1월이므로 태창(泰昌)의 칭호는 없으며, 그해 6월 이전은 전 황제가 재위한 것이 되고 이달 이후가 광종에 속하니, 태창의 칭호는 단지 반년밖에 안된다는 것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번 달은 어찌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휘월(諱月)일 뿐이겠는가? 또한 광종의 태창에 속하는 해이니, 풍천(風泉)264)  의 감회(感懷)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1일 기유

조엄(趙曮)을 이조 판서로, 조영순(趙榮順)을 병조 참판으로, 이은(李溵)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성윤검(成胤儉)·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이상건(李商建)·이방영(李邦榮)을 지평으로, 정문주(鄭文柱)를 헌납으로, 심환지(沈煥之)·남강로(南絳老)를 정언으로 삼았다.

 

대각(臺閣)에 나아갔다. 대신(臺臣)이 입시(入侍)하여 전계(傳啓)265)  하였다. 헌납 여선형(呂善亨)이 전계(傳啓)를 읽었는데, 죄인 이인(李䄄)266)  에 이르러 여선형이 이가 빠져서 말하는 소리가 매우 똑똑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죄인의 이름을 누락한 것으로 잘못 알았다. 승지 윤득우(尹得雨)가 인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먼저 서용하지 않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거조(擧措)가 매우 놀랄 만하니, 어찌 두려워하여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마땅히 상참(常參)의 예에 의거하여 자정전(資政殿)에 전좌(殿座)할 것이니, 단지 시임 대신 비국 당상, 삼사(三司)만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오늘의 거조는 손발이 황망(惶忙)하고 어지럽다."
하자, 좌의정 한익모(韓翼暮)가 말하기를,
"임금 앞에서는 꺼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더욱이 논죄(論罪)하는 즈음에 어찌 꺼려하는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말하기를,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쇠모한 까닭에 신하들이 뒤돌아보고 있으니, 장래에 조선은 망할 것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무망(無妄)한 소치이니, 어찌 일부러 범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유언술(兪彦述)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의 사체(事體)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전 헌납 여선형(呂善亨)은 전계(傳啓)하는 즈음에 높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으니, 대체(臺體)를 헤아려보건대, 진실로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않는 것에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입시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는데, 지평 신대승(申大升)이 여선형의 처조카로서 인혐(引嫌)한 때문이었다. 특별히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으로 제수하고, 홍술해(洪述海)를 대사간으로 삼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여선형(呂善亨)을 잡아들이도록 명하여 친히 추문(推問)하고 형벌을 가한 다음, 하교하기를,
"억지로 잇달아 아뢰면서 그 이름을 들어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장심(將心)267)  인 것이다. 특별히 일률(一律)을 용서하여 흑산도(黑山島)의 서민(庶民)을 삼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사헌 한광회(韓光會)와 대사간 홍술해(洪述海)가 엄중히 추국(推鞫)하기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인(䄄268)  ·진(禛)269)  은 어리석고 무지(無知)하였으니 어찌 마음먹은 것이 있었겠는가마는, 성상께서는 대개 당인(黨人)들이 붙좇아 다른 날 국가에 대항할 것을 염려하여 대계(臺啓)가 일어나는 것을 핍박하여 해도(海島)에 찬축(竄逐)함으로써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방비하는 계책을 삼는 것이었다. 진은 곧 병들어 죽고 인은 겨우 육지로 나오게 하였으나, 성심(聖心)은 오히려 의심과 염려를 지나치게 허비하여 일찍이 하루도 인을 잊지 않았었다. 여선형은 본래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임금의 가까운 자리를 지킨 적이 없었으므로, 천위(天威)가 황공(惶恐)하여 잘못 조치하여 ‘인(䄄)’ 자를 빠뜨리기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노(天怒)가 점차 격렬해져 정국(庭鞫)을 베풀어 형벌을 가하였으나, 대신이 된 자들이 한마디도 그만두기를 간하지 못하여 성조(聖朝)에서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게 하고,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생재(眚災)270)  의 형벌을 받게 하였으니, 황각(黃閣)271)  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8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역사-사학(史學)


[註 267] 장심(將心) : 금장지심(今將之心).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에 말하기를, "임금의 친척에게는 장(將)이 없고, 장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君親無將 將而必誅]"고 하였는데, 《한서(漢書)》 숙손통전(叔孫通傳)을 보면 "인신에게는 장이 없어야 한다.[人臣無將]"하고, 그 주(注)에 "장은 역란을 말한다.[將謂爲逆亂也]"라고 하였음. 그러므로 장차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는 불충(不忠)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함.[註 268] 인(䄄 : 은언군(恩彦君).[註 269] 진(禛) : 은신군(恩信君).[註 270] 생재(眚災) : 과실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됨으로 생기는 재앙.[註 271] 황각(黃閣) : 의정부(議政府).
사신은 말한다. "인(䄄268)  ·진(禛)269)  은 어리석고 무지(無知)하였으니 어찌 마음먹은 것이 있었겠는가마는, 성상께서는 대개 당인(黨人)들이 붙좇아 다른 날 국가에 대항할 것을 염려하여 대계(臺啓)가 일어나는 것을 핍박하여 해도(海島)에 찬축(竄逐)함으로써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방비하는 계책을 삼는 것이었다. 진은 곧 병들어 죽고 인은 겨우 육지로 나오게 하였으나, 성심(聖心)은 오히려 의심과 염려를 지나치게 허비하여 일찍이 하루도 인을 잊지 않았었다. 여선형은 본래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임금의 가까운 자리를 지킨 적이 없었으므로, 천위(天威)가 황공(惶恐)하여 잘못 조치하여 ‘인(䄄)’ 자를 빠뜨리기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노(天怒)가 점차 격렬해져 정국(庭鞫)을 베풀어 형벌을 가하였으나, 대신이 된 자들이 한마디도 그만두기를 간하지 못하여 성조(聖朝)에서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게 하고,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생재(眚災)270)  의 형벌을 받게 하였으니, 황각(黃閣)271)  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7월 12일 경술

임금이 선전관(宣傳官) 오익상(吳益祥)·이윤빈(李潤彬)에게 명하여 이인(李䄄)이 머물러 살고 있는 곳에 가서 탐지(探知)하고, 인하여 문서(文書)를 수색해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이윤빈이 단지 《통감(通監)》 1권만 찾아 가지고 왔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윤빈을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인이 바야흐로 어디에 있는지 묻자, 이윤빈이 대답하기를,
"흑석리(黑石里)에 있었는데, 물건은 단지 이 《통감》 1권과 28수(二十八宿)를 주서(朱書)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인이 몇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단지 〈인의 처가인〉 송가(宋家)의 종 한 사람과 양제(良娣)272)  의 가노(家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전동(典洞)의 집은 문을 닫아 놓은 채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인의 어미와 진(禛)의 처(妻)가 뒤쪽 모퉁이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또 오익상을 잡아들이도록 명하였는데, 오익상이 혹은 말하기를, ‘전동의 집에는 문을 걸어 잠가 둔 채 사람들이 죄다 과천(果川)에 가고 없었습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그 집이 도동(桃洞)에 가서 있었습니다.’ 하는 등 이윤빈의 말과 서로 어긋나 다르므로, 마침내 곤장(棍杖)을 때려 거제부(巨濟府)에 충군(充軍)시키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이 감히 이름을 지적하지 못하고, 삼사(三司)는 모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문관·무관이 이와 같으니, 내가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 쇠모한 임금을 생각지 않고 뒷날을 돌아보고 있으니, 내가 이러한 거조를 위해 거의 망해가는 윤강(倫綱)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하고, 사간 이행원(李行源)을 거제(巨濟)에, 헌납 정문주(鄭文柱)를 남해(南海)에 충군(充軍)하고, 정언 심환지(沈煥之)를 갑산(甲山)에, 남강로(南絳老)를 삼수(三水)의 서인(庶人)으로 삼게 하였다.

 

특별히 정환유(鄭煥猷)를 장령(掌令)으로 제수하고, 이진형(李鎭衡)을 사간으로 삼았다.

 

황간(黃榦)을 집의로, 강이복(姜彛福)·홍병성(洪秉聖)을 지평으로, 서병덕(徐秉德)을 헌납으로, 이익선(李益)·이창급(李昌伋)을 정언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헌납 서병덕(徐秉德)과 집의 황간(黃榦)은 자신에 한하여 서인(庶人)을 삼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백부(柏府)273)  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삭판(削版)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영(宋鍈)을 집의로, 안겸제(安兼濟)·김서응(金瑞應)을 장령으로, 어석령(魚錫齡)을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조참(朝參)274)  을 행하였다. 장차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려 하는데, 사정전(思政殿) 옛터에 이르러 층계 아래에 엎드려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으므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등이 말하기를,
"죄가 있는 자에게 그 죄 때문에 죄주었는데, 어찌하여 성궁(聖躬)을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도록 폄손(貶損)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부러 한 자(字)를 누락시킨 것은 훗날 공(功)을 세우려는 계책을 삼은 것이었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궁을 보호한다고 칭탁하며 훗날의 계책을 삼은 자도 또한 있었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비록 혹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모두 이와 같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당습(黨習)과 경중(輕重)이 어떠한가? 그 경중을 견준다면 내가 마땅히 일어나서 앉겠다. 빨리 정침하도록 비답하라고 나에게 협박하여 말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복합(伏閤)하지 않는 것인가?"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죄는 뭇 신하들에게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만약 서용하지 말 것을 아뢰었다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겠는가? 그 악(惡)을 인도하여 나로 하여금 이러한 거조를 하게 해 놓고는 이제 도리어 아첨할 계책을 삼는 것인가?"
하니, 대사헌 한광회(韓光會), 대사간 홍술해(洪述海), 교리 이택진(李宅鎭) 등이 나아가 엎드리자, 임금이 안석(案席)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죄인 인(䄄)이 죄를 받은 것은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 것입니까? 특별히 용서하라는 명(命)이 비록 성상께서 곡진히 생각하신 덕의(德意)에서 나왔다 하나, 쟁집(爭執)하는 의논이 이미 대각(臺閣)에서 나왔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 중도(中途)에서 두려워하여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서 처분(處分)을 기다렸어야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감히 방자하게 전진(前進)하여 근기(近畿)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정적(情跡)을 논하면 진실로 매우 방자합니다. 청컨대 죄인 인에게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인 때문이겠는가? 오로지 오늘날 대신(臺臣)들이 양성(釀成)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찌 양성한 것뿐이겠는가? 여선형(呂善亨)은 감히 이름을 들어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것이다. 오늘의 하교는 여선형을 가리키고 있는데, 삼사에서는 인에 대해 쟁집(爭執)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뜻밖이며, 이것은 아주 지나친 일이다.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죄인 여선형은 전계(傳啓)할 때에 죄인 인의 명자(名字)를 고달(告達)하지 않았는데, 친히 추문(推問)하시는 아래에서 감히 천총(天聰)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은 그 마음의 자취를 구명(究明)해 보고자 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작처(酌處)하게 하신 명이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德)에서 나왔다 하나, 국체(國體)로써 논하건대, 도배(島配)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한 죄인 여선형은 엄중히 추국(推鞫)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이름을 들어 말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단안(斷案)인데, 오늘 아침의 하교는 진유(眞儒)에 견준 것이 아니며, 또한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홍술해가 아뢰기를,
"오익상(吳益祥)은 죄인 인의 집을 적간(摘奸)하는 선전관으로서 돌아와서 아뢸 때 실상을 완전히 숨긴 죄는 기망(欺罔)한 데 있으니, 국법으로 논하건대, 당률(當律)이 있습니다. 청컨대 거제부(巨濟府)에 충군(充軍)한 죄인 오익상은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이택진(李宅鎭) 등이 말하기를,
"사헌부에서는 오익상을 논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아울러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직무를 거행한 것으로 여겨 녹비(鹿皮)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인은 곧 한낱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었다. 궁궐에서 나간 후 오래 되지 않아 전혀 견식(見識)이 없었으므로, 진기한 노리개를 구하여 찾아서 시전(市廛)을 침탈(侵奪)하고, 노예(奴隷)를 신칙하지 않아 거리에서 주정을 부려 소란을 피웠다. 그 죄안(罪案)을 논하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니, 성상께서 궁중에 불러들여 가르쳐 책망하고 회초리를 때리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한밤중의 천아(天鵝)275)  는 도성 사람들을 경동(驚動)시키며 천리 밖의 절해(絶海)에 어리석은 사람을 귀양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여선형의 일이 일어나자 더욱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 그 집을 수색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아! 성수[聖籌]가 더욱 높아지고 세손(世孫)은 나이 어린데, 당인(黨人)들은 나뉘어져 다투므로, 조정이 안정(安靖)되지 못하여 항상 국세(國勢)가 고단하고 위태한 염려가 있으니, 매번 조선에는 단지 쇠모한 임금과 충자(冲子)가 있을 뿐이라는 전교를 내리곤 하였다. 이러한 때에 인이 사치하여 방자하다는 것을 듣고 지나치게 의심하고 염려하여 거조(擧措)가 번뇌(煩惱)하였으니, 대개 성상께서 의심하고 염려했던 것은 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인(黨人)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연중(筵中)에서 여러 번 당인이 임금을 가리고 삼당(三黨)이 임금을 다툰다는 전교를 내렸었으니, 진실로 인을 전형(典刑)에 비추어 처치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위노(威怒)를 엄중하게 보여 당인의 싹트는 역심(逆心)을 미리 꺾으려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은 드러난 죄가 없었고 당인들은 진장(眞贓)이 없었으니, 전후의 처분(處分)은 진실로 중도에 지나친 것이었다. 한광회(韓光會) 등은 갑자기 뇌위(雷威)가 점점 격렬해지는 것을 보고 망령되게 천심(天心)이 소재한 바를 헤아려 영합(迎合)할 계책을 삼으려고 마침내 전형(典刑)을 바로잡으라는 계사(啓辭)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임금에게 골육(骨肉)을 죽이라는 일이었으니,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겠는가? 설령 혹시라도 임금이 그에게 발계(發啓)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언지(言地)에 있는 자로서 쟁집(爭執)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먼저 발계한 것이겠는가? 또 더욱이 발계하였지만 성심(聖心)에 알맞지 않은 것이겠는가? 이른바 유신은 윤의(倫義)를 알지 못하여 한 목소리로 발계하는 데 참여하여 마침내 똑같다는 비난을 받으며 녹비(鹿皮)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성교(聖敎)에서 ‘눈알을 뽑힌 장님과 모자를 쓴 허수아비’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8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역(軍役) / 역사-사학(史學)


[註 274] 조참(朝參) : 매 아일(衙日:매월 5일·11일·21일·25일)에 받는 조회(朝會).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모두 모이는 대조회(大朝會)를 말하며,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매일 열던 소규모의 조회를 상참(常參)이라 함.[註 275] 천아(天鵝) : 천아성(天鵝聲).
사신(史臣)은 말한다."인은 곧 한낱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었다. 궁궐에서 나간 후 오래 되지 않아 전혀 견식(見識)이 없었으므로, 진기한 노리개를 구하여 찾아서 시전(市廛)을 침탈(侵奪)하고, 노예(奴隷)를 신칙하지 않아 거리에서 주정을 부려 소란을 피웠다. 그 죄안(罪案)을 논하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니, 성상께서 궁중에 불러들여 가르쳐 책망하고 회초리를 때리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한밤중의 천아(天鵝)275)  는 도성 사람들을 경동(驚動)시키며 천리 밖의 절해(絶海)에 어리석은 사람을 귀양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여선형의 일이 일어나자 더욱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 그 집을 수색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아! 성수[聖籌]가 더욱 높아지고 세손(世孫)은 나이 어린데, 당인(黨人)들은 나뉘어져 다투므로, 조정이 안정(安靖)되지 못하여 항상 국세(國勢)가 고단하고 위태한 염려가 있으니, 매번 조선에는 단지 쇠모한 임금과 충자(冲子)가 있을 뿐이라는 전교를 내리곤 하였다. 이러한 때에 인이 사치하여 방자하다는 것을 듣고 지나치게 의심하고 염려하여 거조(擧措)가 번뇌(煩惱)하였으니, 대개 성상께서 의심하고 염려했던 것은 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인(黨人)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연중(筵中)에서 여러 번 당인이 임금을 가리고 삼당(三黨)이 임금을 다툰다는 전교를 내렸었으니, 진실로 인을 전형(典刑)에 비추어 처치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위노(威怒)를 엄중하게 보여 당인의 싹트는 역심(逆心)을 미리 꺾으려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은 드러난 죄가 없었고 당인들은 진장(眞贓)이 없었으니, 전후의 처분(處分)은 진실로 중도에 지나친 것이었다. 한광회(韓光會) 등은 갑자기 뇌위(雷威)가 점점 격렬해지는 것을 보고 망령되게 천심(天心)이 소재한 바를 헤아려 영합(迎合)할 계책을 삼으려고 마침내 전형(典刑)을 바로잡으라는 계사(啓辭)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임금에게 골육(骨肉)을 죽이라는 일이었으니,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겠는가? 설령 혹시라도 임금이 그에게 발계(發啓)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언지(言地)에 있는 자로서 쟁집(爭執)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먼저 발계한 것이겠는가? 또 더욱이 발계하였지만 성심(聖心)에 알맞지 않은 것이겠는가? 이른바 유신은 윤의(倫義)를 알지 못하여 한 목소리로 발계하는 데 참여하여 마침내 똑같다는 비난을 받으며 녹비(鹿皮)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성교(聖敎)에서 ‘눈알을 뽑힌 장님과 모자를 쓴 허수아비’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엄숙(嚴璹)에게 특별히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 엄숙(嚴璹), 대사간 홍술해(洪述海)·집의 송영(宋鍈), 사간 이진형(李鎭衡)·장령 안겸제(安兼濟)·김서응(金瑞應), 정언 이익선(李益烍)·이창급(李昌伋)·지평 남주관(南胄寬)·어석령(魯錫齡)·교리 이택진(李宅鎭), 부수찬 김기대(金基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죄인 여선형(呂善亨)에 대해 왕법(王法)을 흔쾌하게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또 이인(李䄄)에 대해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여선형의 죄는 용서하지 않아야 하는 데 관계되는데도 그 율(律)이 가볍고 인에 대해서는 도리어 무겁게 하였다 하여 대사간 홍술해에게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을 베풀게 하고, 마침내 환궁(還宮)하였다.

 

김복휴(金復休)를 지평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판의금으로, 민백분(閔百奮)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7월 14일 임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광명전(光明殿)에 두루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조선에 어찌 신하가 있다 하겠는가? 단지 군민(軍民)이 있을 뿐이다."
하고, 동궁(東宮)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종통(宗統)을 받들고 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무신년276)   이후 당인(黨人)들은 그 당(黨)을 위해 그 임금을 가리려고 하고 있다. 내가 늙고 충자(冲子)가 약하니, 여선형(呂善亨)은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여 공(功)을 세우고자 정성을 다한 것이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해마다 5분의 1을 헤아려 줄이고 전수(典守)277)   각 사람들에게 징수(徵收)하게 하는 것은 곧 갑인년278)  에 정식(定式)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증가되어 갑인년부터 지금 40년이 되었으니, 막중한 군향(軍餉)의 모축(耗縮)이 마땅히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른바 5분의 1을 징수하는 것은 옛 환곡(還穀)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할 때마다 번번이 그 가운데에 들어가니,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 이제부터는 비록 정지하거나 날짜를 늦추는 때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이전의 분수(分數)에 의거하여 징수하게 하되, 감히 거듭 헤아려 줄이는 것을 계문(啓聞)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유수(留守)와 경력(經歷)279)  을 종중 논죄(從重論罪)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치인이 또 말하기를,
"오부(五部)280)  의 관원들이 사송(詞訟)을 관장하는 아문(衙門)이라고 칭탁하여 죄인을 붙잡아 징채(徵債)하는 것이 법사(法司)281)  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추조(秋曹)282)  와 경조(京兆)283)   외에도 다섯 개의 법사를 설치한 것으로서, 도성의 백성들에게 크게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후로 혹 이러한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관원을 무겁게 감단(勘斷)하고, 경조의 당상(堂上)도 또한 죄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양사(兩司)에서 패초(牌招)를 어겼다 하여 자정전(資政殿)에서 상참(常參)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한필수(韓必壽)를 대사간으로, 권영(權穎)을 집의로, 이치중(李致中)을 사간으로, 김상집(金尙集)·김재천(金載天)을 장령으로, 서유원(徐有元)을 헌납으로, 이한일(李漢一)·권회(權恢)를 지평으로, 임희증(任希曾)·이범제(李範濟)를 정언으로, 조종현(趙宗鉉)을 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김기대(金基大)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5일 계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침전(寢殿)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정광한(鄭光漢)을 대사간으로, 이진항(李鎭恒)을 사간으로, 곽진순(郭鎭純)을 헌납으로, 이사조(李思祚)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6일 갑인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인(李䄄)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연소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마복(馬僕)도 없이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 그 장인[妻父]이 잘 인도하지 못하다가 예(例)를 좇아 인도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인은 죄가 없고 죄는 송낙휴(宋樂休)에게 있다.’ 하였는데, 이미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예사로 비답하겠는가?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대신(臺臣)이 송낙휴를 논하지 않았다 하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였다.

 

7월 17일 을묘

사간원 【사간 이진항(李鎭恒)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참봉 송낙휴(宋樂休)를 변원 정배(邊遠定配)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8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齎宿)하였는데, 신시(申時)에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임금이 걸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층계 위에 한데에서 엎드려 있다가 밤이 되어 침전으로 돌아갔다.

 

7월 19일 정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입직(入直)한 금군(禁軍)을 불러 비의 혜택이 많았는지 적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또 향민(鄕民)으로 서울에 들어온 자를 불러 각 고을의 시가(市價)가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 물었다. 인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오랫동안 가물다가 비가 왔다 하여 기우제(祈雨祭)의 헌관(獻官) 등에게 말을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7월 21일 기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일(忌日)인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이 병조 판서 신회(申晦)의 생질(甥姪)인 까닭에 인혐(引嫌)하여 굳이 사양하니, 임금이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고, 판윤 이은(李溵)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김낙수(金樂洙)를 사간으로, 조영필(趙榮弼)을 지평으로, 김상집(金尙集)을 교리로, 서유원(徐有元)을 필선(弼善)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보덕(輔德)으로, 김이주(金頣柱)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임금이 병환이 들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7월 22일 경신

임금이 비의 혜택이 두루 흡족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금오(金吾)284)  와 추조에 명하여 소방(疏放)285)  하게 하였다.

 

7월 23일 신유

하교하기를,
"어제 저녁에 내린 비는 거의 밤이 되도록 쏟아지다가 그쳤으므로, 진실로 나의 심기(心氣)가 모두 청명(淸明)해졌다. 마땅히 자정전(資政殿) 서랑(西廊)에 나아가 저녁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오려 하는데, 만약 비가 쏟아질 수 있게 한다면, 감히 지나간 해 희우정(喜雨亭)의 예(例)286)  에 의거하여 우문각(右文閣)에 이름을 정하고 오겠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자정문(資政門)에 나아가 비가 온 때문에 보사제(報謝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제보부(祭報府)287)  를 가져다 보고 이후로 기우·보사 등의 제사에 관한 단자(單子)는 단지 단호(壇號)만 쓰고 신명(神名)을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288)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여 《강목(綱目)》의 인역(印役)에 대해 묻고 하교하기를,
"경은 《풍천록(風泉錄)》을 보았는가? 창업(創業)이 정대(正大)한 것은 고황제(高皇帝)289)  만한 이가 없었고, 순사(殉社)가 조용한 것은 열황제(烈皇帝)290)  만한 이가 없었으니, 내가 반드시 무신년291)  에 시작해서 갑신년292)  에 마치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지난날 봉조하 남유용(南有容)이 을유년293)   이후의 일을 부당하게 덧붙여 기록하였다는 뜻을 우러러 아뢰었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오늘날의 사체(事體)를 생각하건대,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수찬(修撰)한 것과 명(明)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송원강목(宋元綱目)》을 수찬한 것은 시대가 다르므로, 한(漢)나라·송(宋)나라 말(末)은 적용할 수 없고 특별히 정통(正統)을 써서 열국(列國)의 예를 나누어 주해(註解)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금은 청사(淸史)가 미처 나오지 않았으므로, 계통을 세워 나누어 주해하는 것은 이미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단지 숭정(崇禎)294)  의 말(末)에 홍광(弘光)295)  을 계속해서 쓰고 사례(史例)는 적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단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명나라 조정에 대해 내복(內服)과 같으니, 명나라 조정의 남은 후예(後裔) 가운데 남쪽으로 강을 건너가서 회복(恢復)하기를 도모한 자들에 대해서는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광 이후의 일이 비록 근심스럽지만, 오히려 민몰(泯沒)된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청병(大淸兵) 등의 말을 쓴 것은 보고 싶지 않다."
하므로 홍계희가 말하기를,
"신의 뜻도 또한 사실(事實)이 민몰될까 두려워서 따로 한 책을 만들어 《황명통기(皇明統紀)》와 아울러 인쇄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기록하고 비록 번거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줄이지 아니하여,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계책을 삼겠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이름을 ‘삼신기(三燼紀)’라고 이름을 지으려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燼)’ 자는 불가(不可)하다. 《황명유문(皇明遺聞)》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이것은 좋습니다."
하였다.

 

7월 24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보사제(報謝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7월 25일 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세도(世道)를 살펴보건대, 전혀 직기(直氣)가 없으니, 한밤중에 이에 대해 생각하면 얼굴을 가리고 울지 않을 수 없다. 지난번 당습(黨習)을 일삼을 때에는 다투어 큰소리 치다가, 지금은 좌우에서 뒤돌아보고 있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것은 임금께서 거느려 인도하고 배양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김치인이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윤동승(尹東昇)이 아뢰기를, ‘본도는 읍세(邑稅)·대동(大同)을 곧바로 바칠 때 으레 경강선(京江船)에 실어 운반하므로, 함부로 마구 싣고 늦게 출발하는 폐단은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습니다. 본도의 조선(漕船)은 6백 석을 기준으로 삼아 싣고, 영남의 조선은 1천 석을 기준으로 삼아 싣고 있는데, 배는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진실로 밝지 않은 바가 있으니, 이제부터 한 배에 싣는 것은 8백 석으로 예를 고치게 하소서. 그리고 원래 있었던 조선(漕船) 56척 외에 10척을 더 만들어 삼창(三倉)에 분속(分屬)하게 하소서. 조군(漕軍)은 원래 액수(額數)가 2천 6백 88명 되는데, 배마다 타는 자는 16명에 지나지 않고, 베를 바치고 타지 않는 자가 또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지 않는 자 가운데에서 돌아가며 책정(責定)하고 그 신포(身布) 대신 배의 잡비(雜費)로 쓰고 남은 것은 급대(給代)하게 하소서. 영광(靈光)·옥구(沃溝) 등 일곱 고을은 읍세·대동을 운반하여 바치는 일로 영구히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청하면서 논열(論列)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게 갖추어졌고 또한 순편(順便)하니, 청컨대 장청(狀請)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진안 현감(鎭安縣監) 권중립(權中立)은 그 부모가 귀양가 있다 하여 도신(道臣)296)  이 장파(狀罷)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무릇 오늘날의 사람 가운데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자가 아주 없었는데, 간혹 한두 사람 있다 하더라도 말이 임금의 몸에 저촉되거나 일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관계되면, 위노(威怒)가 진첩(震疊)되고 거조(擧措)가 번뇌(煩惱)하여서 혹 궁벽한 시골에 찬배(竄配)하거나 혹은 왕옥(王獄)에 가두어 신문(訊問)하니, 자신과 집안을 마음에 걸려 잊지 못하는 무리는 누군들 기꺼이 과감하게 말하고 극력 간함으로써 눈앞의 앙화(殃禍)를 범하려 하겠는가? 성상께서 최절(摧折)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서 직기(直氣)가 없다고 세도(世道)를 한탄하지만, 들어가고자 해도 그 문이 닫혀 있는 것과 거의 같다. 아! 김치인은 데면데면하게 거느려 인도하고 배양해야 한다고 일컫고, 전후의 사실을 개진(開陳)함으로써 그 궐유(闕遺)를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으니, 그 또한 자신과 집안을 마음에 걸려 잊지 못해 그러한 것인가? 이은(李溵)은 부귀(富貴)한 집안의 자제로서 갑자기 경월(卿月)297)  에 올라 여러 번 대관(臺官)의 비평을 받았으나, 염치와 예방(禮防)이 없어서 장전(長銓)298)  에 오르자, 엄명(嚴命)을 칭탁하여 뽐내며 공무를 집행하였다. 권중립(權中立)은 곧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의 아들이다. 권진응이 초선(抄選)에 대한 언사(言事) 때문에 해도(海島)에 찬축(竄逐)되었으면, 그 아들이 되어 마땅히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보호해야 할 것인데, 편안하게 관직을 띤 채 머물러 다섯 달이 지났으니, 윤리(倫理)를 알지 못하고 전혀 염치(廉恥)가 없었다. 이른바 유가(儒家)의 자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홍계능(洪啓能)이 그를 위해 글을 주어 읍력(邑力)으로 그 아비를 접제(接濟)하였다고 하는데, 부인(夫人)의 아들을 해쳤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방백(方伯)이 된 자가 지체하며 잡아 둔 채 곧 파직하여 보내지 않은 것은 거의 산림(山林)에게 겁을 먹은 때문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296] 도신(道臣) : 관찰사(觀察使).[註 297] 경월(卿月)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경사(卿士)는 오직 1년 중 월(月)에 대하여 살펴야 하는 것으로, 경상(卿相)의 소임(所任)을 나타내는 말.[註 298] 장전(長銓) : 이조 판서(吏曹判書).
사신(史臣)은 말한다."무릇 오늘날의 사람 가운데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자가 아주 없었는데, 간혹 한두 사람 있다 하더라도 말이 임금의 몸에 저촉되거나 일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관계되면, 위노(威怒)가 진첩(震疊)되고 거조(擧措)가 번뇌(煩惱)하여서 혹 궁벽한 시골에 찬배(竄配)하거나 혹은 왕옥(王獄)에 가두어 신문(訊問)하니, 자신과 집안을 마음에 걸려 잊지 못하는 무리는 누군들 기꺼이 과감하게 말하고 극력 간함으로써 눈앞의 앙화(殃禍)를 범하려 하겠는가? 성상께서 최절(摧折)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서 직기(直氣)가 없다고 세도(世道)를 한탄하지만, 들어가고자 해도 그 문이 닫혀 있는 것과 거의 같다. 아! 김치인은 데면데면하게 거느려 인도하고 배양해야 한다고 일컫고, 전후의 사실을 개진(開陳)함으로써 그 궐유(闕遺)를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으니, 그 또한 자신과 집안을 마음에 걸려 잊지 못해 그러한 것인가? 이은(李溵)은 부귀(富貴)한 집안의 자제로서 갑자기 경월(卿月)297)  에 올라 여러 번 대관(臺官)의 비평을 받았으나, 염치와 예방(禮防)이 없어서 장전(長銓)298)  에 오르자, 엄명(嚴命)을 칭탁하여 뽐내며 공무를 집행하였다. 권중립(權中立)은 곧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의 아들이다. 권진응이 초선(抄選)에 대한 언사(言事) 때문에 해도(海島)에 찬축(竄逐)되었으면, 그 아들이 되어 마땅히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보호해야 할 것인데, 편안하게 관직을 띤 채 머물러 다섯 달이 지났으니, 윤리(倫理)를 알지 못하고 전혀 염치(廉恥)가 없었다. 이른바 유가(儒家)의 자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홍계능(洪啓能)이 그를 위해 글을 주어 읍력(邑力)으로 그 아비를 접제(接濟)하였다고 하는데, 부인(夫人)의 아들을 해쳤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방백(方伯)이 된 자가 지체하며 잡아 둔 채 곧 파직하여 보내지 않은 것은 거의 산림(山林)에게 겁을 먹은 때문인 것이다."

 

7월 26일 갑자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였다. 그런데 일기가 몹시 더워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 낮고 좁아서 더위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잇달아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7일 을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인견하였다. 이어서 향민(鄕民)으로 서울에 들어온 자를 불러서 농사 형편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김광위(金光緯)·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한경(李漢慶)을 지평으로, 이상암(李商巖)을 정언으로, 이창임(李昌任)을 부교리로, 서명응(徐命膺)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태묘(太廟)와 사직단(社稷壇)에서 네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자신을 꾸짖는 전교를 내리고, 감선(減膳)299)  하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이휘지(李徽之)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였다.

 

7월 28일 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기우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전설사(典設司) 뜰 가운데에 앉아 올해에는 두 명일(名日)의 물선(物膳)의 봉진(封進)을 아울러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대신(大臣), 해당 당상, 양사(兩司)를 불렀는데, 우문각(右文閣)에 입시하니,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어사 이양수(李養遂)·김기대(金基大) 등을 보내어 양주(楊州)·고양(高陽) 등지에 나누어 가서 억울한 옥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7월 29일 정묘

고 판서 이현석(李玄錫), 고 목사 서종벽(徐宗璧)을 추삭(追削)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일은 말하지 말아야 하니, 살아 있는 자가 마땅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정법(正法)되었다 하나 어찌 그 후손들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찬배(竄配)된 사람 김약행(金若行) 등을 아울러 풀어주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약행은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패려(悖戾)하여 세상에서 미친 듯이 해괴하다고 지목하였다. 연전에 한 소장을 올려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쓰기를 권하며 존주(尊周)를 칭탁하여 나라의 허물을 초래하는 문을 열고자 하였으니, 이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실로 이른바 번병(藩屛)의 사이(四夷)로서 중국(中國)300)  에 참여시켜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 할 짓인데, 지금 소석(疏釋)으로 인하여 갑자기 은유(恩宥)를 입었으니, 많은 사람이 놀랍게 여겨 탄식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9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300] 중국(中國) : 나라의 중앙.
사신은 말한다. "김약행은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패려(悖戾)하여 세상에서 미친 듯이 해괴하다고 지목하였다. 연전에 한 소장을 올려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쓰기를 권하며 존주(尊周)를 칭탁하여 나라의 허물을 초래하는 문을 열고자 하였으니, 이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실로 이른바 번병(藩屛)의 사이(四夷)로서 중국(中國)300)  에 참여시켜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 할 짓인데, 지금 소석(疏釋)으로 인하여 갑자기 은유(恩宥)를 입었으니, 많은 사람이 놀랍게 여겨 탄식하였다.

 

7월 30일 무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친히 새로 간행한 《황명통기(皇明統紀)》를 받고 감인관(監印官) 황경원(黃景源)에게 고비(皋比)301)  를 내려 주고, 감동관(監董官) 홍검(洪檢)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지 않은 지 여러날 되었는데, 약방에서 힘껏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부덕(否德)하고 무능한 내가 정성이 위로 미덥지 못하고 은혜가 아래에 미치지 못하니, 깊은 연못과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다. 몇 차례 기우(祈雨)를 모두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었으니, 어찌 단지 제사하지 않은 탄식과 같겠는가? 좌우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하늘의 감응은 아득하기만 하다. 단지 기도하도록 거듭 명한 것은 진실로 내가 불초(不肖)하여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을 우러러 저버리고 아래로 백성들을 저버린 것이니, 정성이 얕았다고 말하지는 말라. 인사(人事)를 다스림이 마땅하니 다섯 번째의 기우제를 날짜를 가리지 말고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왕세손(王世孫)을 거느리고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영남의 농민(農民)으로 상경(上京)한 자를 소견하고, 임정원(林鼎遠)을 보내어 영남을 자세히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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