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7권, 영조 47년 1771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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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기사

비로소 비가 내리니, 하교하기를,
"이미 비가 많이 내렸으니 기도를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봉상시(奉常寺)에 거둥하여 신실(神室)에 들어가서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경복궁(景福宮) 강녕전(康寧殿)의 농잠단(農蠶壇)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고, 다시 무덕문(武德門) 밖에 이르러 오랫동안 부복(俯伏)하였다. 이어서 상의원(尙衣院)에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와 사단(社壇)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저녁에 마음을 쓴 것은 밤에 빗소리를 듣고 진실로 묘량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내려 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여 사례할 바를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내일 모레 대신(大臣)을 종묘와 사직에 보내고 제문(祭文)을 내릴 것이니, 비가 내렸다고 말하지 말고, 제물(祭物)은 정성을 다해 깨끗하게 하고, 여러 집사(執事)들을 특별히 가리도록 하라."
하고, 기우(祈雨)한 헌관(獻官)에게 구마(廐馬) 1필을 면대(面對)해서 주고, 전사관(典祀官) 이하에게 차례로 시상(施賞)하였다.

 

8월 2일 경오

홍검(洪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보사제(報謝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려 하는데, 승지 홍검이 나와서 말하기를,
"지금 듣건대, 한유(韓鍮)라는 자가 와서 한 소장을 바쳤다고 하는데, 원소(原疏)는 비록 미처 보지 못하였으나, 대체로 줄거리는 전에 청했던 것을 거듭 고한 것으로서, 역적 홍봉한(洪鳳漢)의 머리를 참(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원소(原疏)를 가지고 들어오되, 그 사람은 입궐(入闕)시키지 말고 직방(直房)302)  에 구류(拘留)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한유를 석방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번에는 도끼[斧子]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하고, 전배(前排)303)  에게 대령(待令)하도록 명한 다음, 한유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물(一物)304)  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목기(木器)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목기를 말한 것은 음참(陰慘)하다. 네가 그것을 아는가? 누가 너에게 말하던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초야(草野)의 한사(寒士)입니다."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군졸로 하여금 그 입을 치게 하였는데, 한유가 말하기를,
"그 당시에 비록 혹 들었다 하나, 이를 전한 사람을 지금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한마디 말을 하고 죽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다시 그 입을 치게 하고, 잡아내어 흥화문(興化門) 밖에서 대령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한유가 감히 이와 같이 한 것은 몹시 음참(陰慘)한 일이다. 그래서 곧바로 처분(處分)하고자 하였으나, 소장 가운데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여 먼저 대강 줄거리를 물었던 것인데, 지난번에 없던 두 자는 극히 헤아릴 수 없는 데 관계된다. 이미 두 자를 일컬었으니 결단코 곧바로 처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소를 가져다 읽도록 명했던 것인데, 그 가운데 ‘일물(一物)’ 두 자는 나도 모르게 뼛속이 서늘해진다. 저도 또한 조선의 신자(臣子)라면 어떻게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일각(一刻)이라도 하늘 아래 내버려 둘 수가 없고 도성에서 정법(正法)하는 것도 또한 누추하다 할 것이니, 그 소장과 대강의 줄거리를 굳게 봉해 한유와 더불어 호서(湖西)의 감영(監營)에 내려 보내되, 크게 위의(威儀)를 베풀어 효시(梟示)한 후 장문(狀聞)하게 하라.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니, 포교(捕校)로 하여금 이틀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게 하고, 그 소장은 뜯지 말고 도신으로 하여금 불태우게 하라."
하였다.

 

여러 승지들과 약방(藥房)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포청(捕廳)에 명하여 한유의 접주인(接主人)을 조사해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심의지(沈儀之)를 잡아온 군관(軍官)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들을 패초(牌招)하였는데, 심의지와 이도찬(李道燦)은 해부(該府)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는 단자(單子)가 전좌(殿座)하였을 때 들어왔기 때문이다.

 

8월 3일 신미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친림(親臨)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반드시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잘못이 있었을 경우 신하들의 잘못이다."
하고, 심의지(沈儀之) 등에게 친히 묻고, 하교하기를,
"지금 심의지의 부도(不道)한 바는 한유(韓鍮)보다 심하다. 한유는 그래도 도와 주는 사람 없이 홀로 선 사람이므로 말을 가리지 않아도 오히려 가(可)하겠지만, 지금 심의지가 이른바 목기(木器)에 대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모르십니까?’ 한 이것은 진실로 역적이다. 빨리 역률(逆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심의지가 몹시 음참(陰慘)하므로, 비록 역률을 시행하지만, 이는 대역(大逆)에 관계되는 것과 차이가 있으니, 응당 연좌시킬 사람들은 특별히 일률(一律)을 제하여 종을 삼아 찬배(竄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도찬에게 묻기를,
"너는 한유와 어느 해부터 알았으며, 심의지 또한 어느 해부터 알았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애초에 한유는 알지 못하였는데, 지난달 그믐에 심의지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의지는 전부터 서로 친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유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기특(奇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305)  에서 만났는데, 심의지가 오기를 요구하므로 가서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세 글자에 대해 너는 알고 있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알지 못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겁을 내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역적 홍봉한(洪鳳漢)이라고 한 말을 들었으므로,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홍봉한은 권세를 탐하여 나라를 그르쳤으므로, 진실로 참(斬)할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유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 봉조하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미움받아 그 성명(姓名)을 배척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권세를 탐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세상에서 모두 미워하므로, 신 또한 매우 통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말할 수 없었고 한유가 말한 바는 한번 침척(侵斥)하는 일이 있으면, 장차 뼈가 가루가 되고 머리가 바스러지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부모가 있는 자는 두려워서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그 두 자에 대해 정직하게 공초하도록 하라."
하고, 신장(訊杖)을 베풀도록 명하였는데, 이도찬이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속으로 과연 한유를 기특하다고 생각하였느냐?"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형장(刑杖)을 두려워하므로 할 수 없었지만, 만약 형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유에게 양보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글자에 대해 속히 정직하게 고하도록 하라."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몽두(蒙頭)306)  를 씌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두 자는 비록 모른다고 하더라도 봉조하와 무슨 원한이 있느냐? 전에 한유와 심의지를 특별히 감사(減死)하게 하였었는데 이제 또 이와 같으니, 천지 사이에 살려 둔다면 훗날 다시 이와 같을 것이다. 죽인들 어찌 애석하겠는가?"
하고, 다시 형신(刑訊)을 가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자신에 한해서 충군(充軍)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다시 일한재(日閒齋)에 나아갔는데, 시임 대신·원임 대신, 여러 승지들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유와 같은 자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인데, 심의지가 또 나왔으니, 필적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고, 엄교(嚴敎)를 내리고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지 않으므로, 대신(大臣) 이하가 뜰에 내려가서 부복(俯伏)하니, 임금이 전(殿)에 오르도록 명하고 탕제를 진어하도록 허락하였다.

 

8월 4일 임신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8월 5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한유(韓鍮)가 팔뚝에 글자를 새긴 것은 만고에 없던 일이다. 아! 그도 또한 조선의 신자(臣子)인데, 어떻게 마음에 싹틔워 글에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세 글자에 대해 차마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끼[斧子]라고 대답하였고, 두 번째 물으니, 또한 목기(木器)를 말하였으며, 세 번째 물으니 데면데면하게 말하기를, ‘외방에서는 이 그릇을 그 물건이라고 한다.’ 하였다. 아! 저 한유가 이미 혈원(血怨)이 있어서 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그런 것이지 어찌 악역(惡逆)의 마음이 있었겠는가? 부도(不道)한 데 지나지 않으므로, 차율(次律)로 정법(正法)하게 하고, 그 접주인(接主人)을 물어 보았더니, 심의지(沈儀之)는 또 어찌 이도찬(李道燦)을 헤아렸겠는가?’ 아! 이런 세도(世道)는 비록 이 일이 없더라도 윤숙(尹塾)의 무리가 만약 뜻을 얻었다면, 그 전해질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성인(聖人)이 번병(藩屛)의 사예(四裔)로써 중국에 참여시켜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뜻으로 윤숙은 대정현(大靜縣)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도록 하라. 같은 시기에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가 고심(苦心)을 돌아보지 않고 문밖에서 포효(咆哮)하였으므로, 비록 똑같이 처분하였으나, 그후 내가 항상 불쌍하게 여겼었으니, 내가 어떻게 윤숙의 죄과(罪科)에 몰아넣겠는가? 그러나 소인(小人)은 소인이니, 《희경(羲經)》의 훈계를 내가 어찌 본받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을 만약 처분하지 않는다면, 심의지·이도찬이 장차 오늘에 다시 생길 것이니 임덕제에게 특별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특별히 추조(秋操)를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영남(嶺南)은 팔도 가운데 웅번(雄藩)인데, 올해에는 치우치게 가뭄이 심하여 70여 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아픔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두 도는 이미 물선(物膳)의 봉진(封進)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영남도 가을 곡식이 여물기 전에는 삭선(朔膳)의 봉진을 정지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7일 을해

특별히 조영진(趙榮進)에게 대사헌을 제수하고, 이미(李瀰)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 장차 홍봉한(洪鳳漢)에 대해 발계(發啓)하고자 하였는데, 대사간 이미(李瀰)가 홍봉한의 자부(子婦)가 곧 그의 외종매(外從妹)라 하여 억지로 친혐(親嫌)을 끌어대자, 조영진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였고 이미도 또한 인피하니, 임금이 아울러 물러가서 기다리지 말게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일전에 내리신 처분은 지극히 엄중하였으므로,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감히 당일의 일을 다시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삼가 전교(傳敎)를 보건대 성의(聖意)가 애연(藹然)하였으니, 위로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삼켜 흠앙(欽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신 홍봉한이 잘 봉승(奉承)하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이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봉조하 홍봉한을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하교했던 것은 이를 부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가 없으면 그만이겠지만, 나라가 있은 후에야 어찌 이런 계사가 없겠는가?"
하고,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조영진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한 죄인 여선형(呂善亨)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선형의 소위(所爲)가 몹시 헤아리기 어려운데, 어떻게 천지 사이에 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사헌부에서 여선형의 일을 아뢴 것은 관계된 바가 작지 않으므로, 이미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지만, 또 어떻게 잡아오겠는가? 특별히 도사(都事)를 보내어 본관(本官)과 입회[眼同]한 가운데 곧 그 땅에서 정법(正法)함으로써 비록 먼 지방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국법(國法)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여선형은 진실로 애석하게 여길 것이 못되지만, 오히려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 있으니, 왕부(王府)307)  에 명하여 잡아다 추국(推鞫)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처치해도 오히려 늦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좋다."
하고, 마침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이시건(李蓍建)을 집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사간으로, 김재록(金載祿)·이만육(李萬育)을 장령으로, 서유원(徐有元)을 헌납으로, 이방영(李邦榮)을 지평으로, 권진(權禛)·조석목(趙錫穆)을 정언으로, 이갑(李岬)을 교리로, 조재준(趙載俊)을 부교리로, 이진규(李晉圭)를 수찬으로, 유한근(兪漢謹)을 부수찬으로, 정광충(鄭光忠)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한유(韓鍮)가 상소한 후부터 성심(聖心)이 번뇌(煩惱)하여 매번 조정에 탄식하기를,
"우리 아이들은 어진데, 신하가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저가 비록 ‘홍봉한(洪鳳漢)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양사(兩司)의 장관을 제수하자 조영진(趙榮進) 등이 부득이 홍봉한에 대해 발계(發啓)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크게 권장하고 탄식하여 하교하기를,
"지금 도헌(都憲)308)  의 계사(啓辭)는 체모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대저 본 사건은 비록 한유가 홍봉한에게 앙갚음하려고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조어(措語)를 첨가하였으므로 한유는 말할 것도 못되지만, ‘헌(獻)’ 한 자는 향곡(鄕曲)에서 스스로 다스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친히 심의지(沈儀之)에게 물어 보았더니, 낱낱이 큰소리 치며 스스로 일물(一物)을 바쳤다는 말을 감당하였으니, 심의지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 사건을 어떻게 감히 다시 제기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사람은 징토(懲討)하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신(臺臣)이 아뢰는 즈음에 혹시라도 갈등(葛藤)이 있을까 두려웠지만, 지금 도헌(都憲)이 아뢰었고, 또 내가 만약 헤아린다면 이로부터 본 사건은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게 되어 이 마음이 거의 느슨해지게 되었다. 지난날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였다는 하교는 비록 심의지를 가리킨 것이라 하지만, 오늘 합계(合啓)를 망설인 것은 마땅하지 못하며, 또한 태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 상신이 할아비가 되고 고 경재(卿宰)가 아비가 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비록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더라도 유독 주계군(朱溪君)309)  에 대해서는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 국체(國體)에 있어서 일을 편안하게 여겨 신칙(申飭)함이 없을 수 없다. 대사간 이미(李瀰)에게 특별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베풀어 그 할아버지에게 사죄하게 하고, 심의지의 처남 조상연(趙尙淵)은 추자도(楸子島)에 자신에 한해서 백성을 삼도록 하라. 그리고 이제 이 사건에 대해 편안하게 여겨 이 사건을 다시 제기하는 자는 마땅히 역적 이괄(李适)의 율(律)을 시행할 것이니, 이것을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수립한 데에서 그 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대개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권진(權禛)을 대직(臺職)에 의망(擬望)한 때문이었다.

 

특별히 윤방(尹坊)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문관(文官)·음관(蔭官)·유생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심의지(沈儀之)의 일은 만고에 없었던 일로서 결단코 심의지 한 사람뿐만이 아닐 것인데, 만약 숨어 있는 자가 있으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너희들이 모두 자수(自首)한다면 죄가 가벼운 자는 용서할 것이고 죄가 무거운 자도 또한 일률(一律)을 쓰지 않겠지만, 만약 현고(現告)하지 않고 마침내 탄로(綻露)난다면, 자연히 왕장(王章)이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일에 대해 분통(忿痛)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일어났다가 엎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엎드려 있도록 하라."
하니, 여러 유생들이 모두 일어났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어온 유생 가운데 만약 심의지의 족속이 있으면, 비록 십촌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나오도록 하라. 만약 없으면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성을 가진 자들은 앞으로 나오도록 하라."
하니, 세 명의 유생들이 나와서 엎드렸다. 임금이 묻자 대답하기를,
"심각(沈殼)의 아들과 조카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약현(藥峴) 심단(沈檀)의 자손은 어찌하여 오늘 전좌(殿座)하는 데 근사(近似)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러가게 하였다. 임금이 외방의 유생으로 입시한 자들이 적었다 하여 오부(五部)의 관원들을 잡아오도록 명하고, 이어서 입직관을 아울러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였다.

 

좌우 포장(左右捕將)이 심의지(沈儀之)를 정법(正法)한 후 족인(族人)으로 시신(屍身)을 거둔 자를 수색해서 붙잡아 와서 명을 기다리니, 이도찬(李道燦)의 사촌 2인과 그 아우 이도건(李道建)을 그들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고, 임금이 심후(沈銗)에게 묻기를,
"네가 심의지의 일을 아느냐?"
하자, 심후가 공초하기를,
"심의지는 성품과 행실이 괴이하기 때문에 간혹 불러서 회초리로 때리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정법(正法)하였겠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말이 부도(不道)를 범하였으니, 조금도 참(斬)한 데 대해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으면 어찌하여 시신을 거두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시신을 드러내 놓은 지 3일이 되면 국전(國典)에 장사(葬事)를 금한다는 영(令)이 없으므로, 지친(至親)의 사이에 차마 좌시(坐視)할 수 없어서 과연 시신을 거두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도찬의 족속과 심후는 두 차례 형추(刑推)한 후 남해현(南海縣)에 정배(定配)하고, 이도건도 일체로 형배(刑配)310)  하도록 명하였다.

 

8월 8일 병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갔다.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여선형(呂善亨)이 누구의 족속인가?"
하니,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여필희(呂必禧)의 손자로서, 세상에서 여 소학자(呂小學者)라고 일컫고 있는데, 여선형은 혼암(昏暗)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관계되는 바가 막중한데, 더욱이 오늘날이겠는가? 그저께 대계(臺啓)를 특별히 윤허하였으니, 영상이 아뢴 바는 광보(匡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지난번에 처분했던 자는 여선형이었는데, 당초에 이미 혼암(昏暗)한 사람이 지금 와서 어떻게 깨우쳤겠는가? 잡아오지 말고 그 섬에 그대로 정배하라는 일을 곧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과 대사간        윤방(尹坊) 등이 죄인 홍봉한(洪鳳漢)을 삭직(削職)하여 먼저 중도 부처(中途付處)311)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홍봉한의 그 당시 일은 비록 이곽(伊霍)312)                  에 대해 하교한 것이 없었다 하나 그 뜻이 이미 있었다. 홍봉한의 처지가 어떠하며 그 관직이 어떠한데, 이곽(伊霍)의 일을 행하지 못한 것은 만고(萬古)에 없던 일이었다. 나를 도와서 그것이 비록 종국(宗國)을 위해 하였다 하나,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어찌 심의지(沈儀之)를 기다릴 것인가? 마음이 서늘해지고 담(膽)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단지 본일을 위해 10년 동안 입을 다물고 수없이 헤아려 보았는데, 먼저 한유(韓鍮)에 있어서 그 삼층설(三層說)과 같았다. 그러나 심의지는 무슨 심장(心腸)을 가졌길래 그 이름을 묻지도 않았는데 큰소리를 치며 어찌하여 이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단 말인가? 이는 한유보다 갑절 더함이 있으므로 본율(本律)로 처분하였던 것이다. 지금 이 계사(啓辭)는 대간(臺諫)의 체모를 갖추었지만 그 처분한 것은 홍봉한에 대한 것이 아니다. 비록 특별히 귀를 기울여 대계(臺啓)를 윤허하나 혜빈(惠賓)313)                  은 어디에 둘 것인가? 또 오로지 중대함을 살피지 못하고 두루 헤아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하였을 따름이다. 아! 내가 임명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결단코 나라를 그르치고 임금을 저버릴 신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발단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홍봉한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가 윤허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진실로 혜빈을 위해서이다. 처음의 율이 과연 가벼웠으므로 특별히 삭출(削黜)의 전형(典刑)을 가하였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아서 나로 하여금 그 뜻을 느슨하게 지녀 건공(建功)의 뜻을 머금게 하고, 나의 자부(子婦)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탱해 갈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계속해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9일 정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사직제(社稷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 사단(社壇)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부복(俯伏)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묘(章廟)314)  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황조(皇朝)의 흥헌왕(興獻王)315)  에 대한 고사(故事)를 준수한 것인데, 대원군(大院君)의 칭호는 목묘(穆廟)316)  에서 명묘(明廟)317)  에게 이어졌으므로, 이런 칭호가 있게 된 것이다. 창빈(昌嬪)318)  에 이르러서는 목묘에게 할머니가 되니 사체(事體)가 막중하므로, 대진(代盡)319)  하기 전에는 주면 방제(主面傍題)320)  하였다. 비록 풍속에 따라 일컬었으나, 대진한 후에도 대원군의 묘(廟)는 백세(百世)토록 부조(不祧)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주면 방제는 순서에 따라 써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공경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사체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난번 하교하여 주면은 전과 같이 그대로 하고 방제를 제거하되, 단지 축문 가운데 일컫게 한 것은 비록 관계되는 바가 없어서 저경궁(儲慶宮)321)  에 대해서와 똑같다 하나,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322)  ·하동 부인(河東夫人)323)  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 이후 중삭제(仲削祭) 때 창빈에게 먼저 행하고, 대원군묘의 차례는 본묘에 행하는 일을 예방 승지로 하여금 대원군묘에 구고(口告)하게 하라. 그리고 창빈묘는 봉사인(奉祀人) 이양(李瀁)에게 분부하게 하라. 하원군(河源君)324)  은 본가(本家)에 대해 시조(始祖)가 되므로, 비록 왕자(王子)의 부조지위(不祧之位)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후 부조지위로 제사를 받드는 일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하고, 이어서 중광원(重光院)에 두루 임어하였다.

 

8월 10일 무인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 대사간 윤방(尹坊)의 홍봉한(洪鳳漢)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하고, 이어서 피혐(避嫌)하여 말하기를,
"합사(合辭)한 논의는 지극히 엄중하여 어떻게 이미 논의를 일으켰다가 곧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일전에 삼가 몹시 측은하게 여기시는 하교를 받들건대, 달리 돌아볼 겨를이 없이 신이 과연 힘써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으켰다가 스스로 정지하는 것은 대각(臺閣)의 체모(體貌)에 손상됨이 있고 직책(職責)을 저버린 것이니, 다시 무슨 얼굴로 대차(臺次)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앞장섰다가 유시(諭示)에 감동되어 곧 정지하였으면, 본말(本末)이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혐의롭게 여기는가?"
하자, 윤방이 따라서 참여하였다가 따라서 정지하였다고 인피(引避)하였으나, 임금이 아울러 체차(遞差)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영진과 윤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기묘

복선(復膳)과 복악(復樂)을 명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가뭄 때문에 음악을 정지하고 감선(減膳)하게 하였었는데, 대신(大臣)들이 힘껏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회복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권영(權穎)을 집의로, 곽진순(郭鎭純)을 장령으로, 이창임(李昌任)을 헌납으로, 송덕기(宋德基)를 정언으로, 김노진(金魯鎭)을 교리로, 이득신(李得臣)을 수찬으로, 민양렬(閔養烈)을 사서로 삼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형조의 세 당상을 불러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임금이 동래 부사의 장계(狀啓)를 보고 하교하기를,
"교린(交隣)의 도리는 성신(誠信)이었어야 마땅한 것인데, 지금 듣건대 왜관(倭館)이 몹시 손상되어 무너진 곳은 그냥두고 심하지 않은 곳을 보수하였다 하는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다’는 것은 옛말이다. 이미 분정관(分定官)이 있고 또한 훈도(訓導)가 있으면 어찌하여 그 작은 것부터 좇아서 보수하여 큰 데에 이르지 않았단 말인가? 만약 관수왜(館守倭)로 하여금 무너져 깔리는 근심이 있게 하였다면, 어찌 교린하는 뜻이겠는가? 특별히 심한 곳은 거듭 순심(巡審)하고 나누어 정한 각 관원으로 하여금 즉시 공사를 감독하게 한 후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만약 도신과 동래 부사가 삼가지 않을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감단(勘斷)하고, 훈차(訓差)는 각영(各營)으로 하여금 곤장을 때려 충군(充軍)하게 하고, 해당 각 관원은 감영(監營)으로 하여금 곤장을 때리게 하되 곤장을 때리지 않은 자는 마땅히 금고(禁錮)할 것이니, 일체를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2일 경진

양사(兩司)의 장관이 형편상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다 하여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특별히 유언술(兪彦述)을 대사헌에 제수하고, 홍검(洪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사서 민양렬(閔養烈)이 사초(史草)를 바치지 않았다 하여 본직(本職)의 체차(遞差)를 허락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한림(翰林)은 비록 승륙(陞六)325)  하였다 하더라도 사초를 바치기 전에는 부직(付職)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례(古例)입니다.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검의(檢擬)하는 데 구애받음이 없으므로, 지난날 이로써 진달하여 전조의 당상을 추고(推考)하였었는데, 얼마 안되어 또 이러한 일이 있어서 번거롭게 처분하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해당 전관(銓官)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유언술(兪彦述) 등이 품었던 생각을 진계하고, 삭출(削黜)한 죄인 홍봉한(洪鳳漢)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또 누누이 하교하고 이어서 스스로 하는 대로 맡겨 두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유언술 등이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특별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정광충이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하기를,
"지난날 합사(合辭)한 논의가 지극히 엄중하여 잠시 일으켰다가 곧 정지하여 대각(臺閣)의 체모(體貌)를 무너뜨려 손상시킨 것은 이미 말할 만한 것도 없지만, 전 도헌(都憲) 조영진(趙榮進)이 당초에 강개(慷慨)하여 논의를 일으켰다가 곧 몹시 측은하게 여기시는 하교로 인하여 이를 정지하였다는 것은 전후가 모순된 것으로 극도로 한심한 데 해당되며, 전 간장(諫長) 윤방(尹坊)이 따라서 참여하였다가 따라서 정지하였다고 말한 것 또한 대각(臺閣)의 수치가 됩니다. 청컨대 아울러 삭직(削職)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전 도헌은 결코 강경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승순(承順)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자세히 살피지 않았으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전형을 시행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본 일에 대해서는 내가 묻고 싶지 않다. 무엇 때문에 지극히 중대하게 여기는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홍봉한은 처지가 어떠한데, 수십년 동안 정권(政權)을 잡아 제멋대로 했을 뿐만이 아니므로, 여분(輿憤)이 이미 절실하여 조정의 논의가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몹시 가엾게 슬퍼하신 하교에 감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부범(負犯)이 지극히 중대함은 어찌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봉한이 전에는 잘했으나, 그 당시의 일만 유독 잘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전의 일도 또한 어찌 잘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이에 대해 말하게 한다면, 지난번의 일을 홍봉한이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눈물을 흘리면서 간(諫)했어야 마땅하고, 간해서 얻지 못하면 마땅히 나에게 사실을 고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죄이므로, 그를 밀병(蜜餠)에 부처(付處)했었다. 내가 신축년326)  ·임인년327)  에 유복명(柳復明)을 대간(大諫)으로 삼은 후부터 ‘합계(合啓)’ 두 자에 대해 지리(支離)함을 금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또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또 대신(臺臣)도 가소롭다. 만약 하고자 하면 한층 더해야 할 것인데, 전일에 부처한 것을 어떻게 거듭할 수 있겠는가? 그 조사(措辭)도 또한 강직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정광충을 사명(賜名)한 것이 무엇 때문인데, 오늘의 거조는 판이하여 두 사람 같으니 사명한 것이 스스로 부끄럽다. 대사헌 정광충은 먼저 체차(遞差)한 다음 갑산부(甲山府)에 원찬(遠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대각(臺閣)을 살펴보건대, 말단이 어떻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서로 버틴다면 언제 처리하겠는가? 이제 내가 마땅히 스스로 처분해야지 어떻게 합사(合辭)를 기다리겠는가? 나에게는 군강(君綱)이 있는데, 또한 어떻게 구차하게 하겠는가? 혜빈(惠嬪)에게 은고(恩顧)를 내릴 것을 생각하는 것은 홍봉한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군(人君)은 거조가 정대(正大)해야 마땅하니, 어찌 지금의 이목(耳目)에 따라 용렬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양사(兩司)를 감률(勘律)한 바에 의거하여 미처 청하지 않은 자는 먼저 안율(按律)하라는 청을 먼저 윤허하였으나, 특별히 그 율을 용서하되 종신토록 서인을 삼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하교한 후에는 거듭 율(律)을 더하는 일이 없을 것인데, 이것은 충자(冲子)를 위하고 국강(國綱)을 위한 것이다. 만약 다시 이 일을 제기하면, 주(周)나라의 팔형(八刑)328)  은 난민(亂民)에 대해서도 오히려 형벌이 있었는데, 더욱이 난신(亂臣)이겠는가?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이를 듣게 하라."
하였다.

 

8월 13일 신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전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을 원찬(遠竄)하라는 명을 특별히 정침(停寢)하고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을 시행하게 하였다. 연신(筵臣)이 정광충은 남해(南海)의 적소(謫所)에서 용서받아 돌아온 지 얼마 안된다고 우러러 아뢰었기 때문에, 임금이 가엾게 여겨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특별히 한필수(韓必壽)에게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8월 14일 임오

박상덕(朴相德)을 좌참찬으로, 유수(柳脩)를 형조 참판으로, 조엄(趙曮)을 예문 제학으로, 심이지(沈履之)를 이조 참의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사간(司諫)으로, 정경서(鄭景瑞)·김시구(金蓍耆)를 장령으로, 이명빈(李命彬)을 헌납으로, 유강(柳焵)을 정언으로, 조준(趙㻐)을 부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수찬으로, 이득일(李得一)을 필선으로, 이도묵(李道默)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8월 15일 계미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329)  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8월 16일 갑신

환궁(還宮)하였다.

 

8월 17일 을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숭릉(崇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 한 큰 말이 있었는데, 살찐 말을 타면 마음이 좋지 않으므로 팔고자 하였었다. 그런데 역인(驛人)이 수백금으로 사고자 하였는데, 값은 비록 많았지만 역에 팔면 말이 반드시 피곤할 것이므로, 허락하지 않았었다."
하였다.

 

김화중(金和中)을 헌납으로, 김하재(金夏材)·조재준(趙載俊)을 교리로, 조창규(趙昌逵)를 부수찬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능에 거둥할 때 도로와 교량(橋梁)의 수치(修治) 및 횃불을 밝히는 것은 저치미(儲置米)330)  로 계감(計減)하되, 일체 농민(農民)을 쓰지 말고 또한 곡식[禾稼]을 범하지 말라는 일을 명하고, 엄중히 신칙(申飭)을 더하였다.

 

8월 19일 정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명릉(明陵)의 친제(親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여선형(呂善亨)을 특별히 적소(謫所)에서 풀어 주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근래에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만약 영상의 광보(匡輔)가 없었다면, 거의 잘못 마칠 뻔하였다."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허물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명군(明君)이 어려워하는 것이다. 이 일을 당초에 처분(處分)하였을 때에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한 번 아뢰고 두 번 아뢰면서 마침내 극률(極律)에 이르러 마치 진실로 부범(負犯)한 것이 있는 듯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일월(日月)이 밝지 않자 스스로 신충(宸衷)331)  에 놀라 측은한 마음을 보이시고 갑자기 생각을 돌이켜 계획을 바꾸지 않으셨다면 보잘것 없는 미명(微明)이야 불쌍히 여길 것이 없다 할지라도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의 조정을 보고 어떻다고 하겠는가? 옛날 제(齊)나라 선왕(宣王)은 소가 죽음을 무서워하여 벌벌 떠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백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것으로 허여하였으니, 그 어진 마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이제 이 십행(十行)332)  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은 사교(辭敎)가 애연(藹然)하여 회오(悔悟)하는 단서를 볼 수 있었으므로, 입시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 더러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비록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죄인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문왕(文王)이 불쌍히 여긴 것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에 느낀 그대로 뜻을 받들어 순종해서 확충시킨다면, 인(仁)은 모두 다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도(世道)가 이와 같이 천박해지는 것은 어찌 아래에 있는 자의 죄가 아니겠는가? 김치인은 정승이 된 지 10년 만에 이 한 가지 일을 주선할 수 있었으니, 공의(公議)는 속일 수 없고 이륜(彛倫)을 지키는 도리는 민멸(泯滅)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3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331] 신충(宸衷) : 임금의 마음.[註 332] 십행(十行) : 열 줄의 글. 곧 조칙(詔勅)의 글을 말함.
사신은 말한다. "허물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명군(明君)이 어려워하는 것이다. 이 일을 당초에 처분(處分)하였을 때에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한 번 아뢰고 두 번 아뢰면서 마침내 극률(極律)에 이르러 마치 진실로 부범(負犯)한 것이 있는 듯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일월(日月)이 밝지 않자 스스로 신충(宸衷)331)  에 놀라 측은한 마음을 보이시고 갑자기 생각을 돌이켜 계획을 바꾸지 않으셨다면 보잘것 없는 미명(微明)이야 불쌍히 여길 것이 없다 할지라도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의 조정을 보고 어떻다고 하겠는가? 옛날 제(齊)나라 선왕(宣王)은 소가 죽음을 무서워하여 벌벌 떠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백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것으로 허여하였으니, 그 어진 마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이제 이 십행(十行)332)  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은 사교(辭敎)가 애연(藹然)하여 회오(悔悟)하는 단서를 볼 수 있었으므로, 입시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 더러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비록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죄인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문왕(文王)이 불쌍히 여긴 것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에 느낀 그대로 뜻을 받들어 순종해서 확충시킨다면, 인(仁)은 모두 다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도(世道)가 이와 같이 천박해지는 것은 어찌 아래에 있는 자의 죄가 아니겠는가? 김치인은 정승이 된 지 10년 만에 이 한 가지 일을 주선할 수 있었으니, 공의(公議)는 속일 수 없고 이륜(彛倫)을 지키는 도리는 민멸(泯滅)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8월 20일 무자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이어서 익릉(翼陵)333)  ·경릉(敬陵)334)  에 두루 전알(展謁)하고 날이 저물어 환궁(還宮)하였는데,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병조 판서 신회(申晦)와 경기 감사 이중호(李重祜)로 하여금 군례(軍禮)를 행하게 하고, 면대하여 구마(廐馬)를 내려 주었다.

 

8월 21일 기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기백(畿伯)335)  과 여러 수령들을 소견하여 농사 형편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리고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옛 포흠(逋欠)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조(條)와 양주(楊州)·고양(高陽)의 금년 결전(結錢)을 아울러 탕감(蕩減)해 주되, 결전 대신 환모(還耗)336)  로 충감(充減)하는 것도 또한 작년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8월 22일 경인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배종(陪從)하였다. 능에 거둥하였을 때 어가(御駕)를 수종했던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이고, 임금이 장전(帳殿)에 나아가 몸소 궁시(弓矢)를 들어 쏘았는데, 다섯 발 가운데 2발을 맞히니 여러 신하들이 앞으로 나아가 칭하(稱賀)하였으며, 임금도 기뻐하였다.

 

8월 23일 신묘

사헌부 【지평 이방영(李邦榮)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능에 거둥하였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종(陪從)했던 여러 신하들 가운데 말을 달려 주정소(晝停所)337)  의 막차(幕次) 앞을 곧바로 지나친 자가 많이 있었으니, 자못 옛사람의 대궐을 지나칠 때에는 반드시 종종걸음으로 걷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청컨대 그날의 압반 감찰(押班監察)을 잡아다 처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윤허한다."
하고, 이어서 주정소를 곧바로 지나친 자들은 정원에서 현고(現告)를 받아 일체 잡아다 처분하도록 명하였다.

 

구현겸(具顯謙)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8월 24일 임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휘릉(徽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하고, 이어서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8월 25일 계사

침전(寢殿)으로 돌아갔다. 예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사릉(思陵)338)  을 사초(莎草)하고 무너진 곳을 즉시 수보(修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월 26일 갑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활쏘기를 한 여러 군사들에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수개(修改)한 경기전(慶基殿)339)  의 제문(祭文)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는데, 문체(文體)가 새롭고 기이하다 하여 세초(洗草)하게 하고, 친히 지어서 내렸다.

 

8월 27일 을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사릉(思陵)의 위안제(慰安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특별히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구선행(具善行)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8월 28일 병신

구상(具庠)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정업원(淨業院)의 옛터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문(興仁門)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동관왕묘(東關王廟)340)                  와 멀지 않았으며,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왕후 송씨(宋氏)가 손위(遜位)한 후 거주하던 옛터이다.

 

신위(申暐)를 대사헌으로, 남주로(南柱老)를 헌납으로, 신대승(申大升)을 정언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수찬으로, 이갑(李坤)을 교리로, 정상인(鄭象仁)을 집의로, 박취원(朴取源)을 사간으로, 임해(林瑎)를 장령으로, 송낙(宋樂)을 지평으로, 김종선(金鍾善)을 정언으로, 조엄(趙曮)을 예조 판서로, 심이지(沈履之)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29일 정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지평 이방영(李邦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군문(軍門)에서 수령을 자벽(自辟)341)  하는 것은 곧 서전(西銓)342)  에서 과궐(窠闕)을 복직(復職)시키는 자리를 이루는데, 사람의 됨됨이와 이력(履歷)을 논하지 않고 과궐에 따라 차송(差送)하니, 이것은 전선(銓選)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십분 가려서 주의(注擬)하게 하소서."
하고 또, 삼사(三司)의 아장(亞長)은 연석(筵席)에서 계품한 후 통의(通擬)343)  하라는 명을 환수하여 전선의 품격을 보존시킬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벼슬은 애초에 함답(緘答)하는 법이 없는데, 지난번 한 승선(承宣)이 전에 없던 규례를 창출(創出)하였고, 대신(臺臣)도 또한 경솔하게 앞질러 글을 써서 보냈으니, 그 대각(臺閣)의 체모(體貌)를 무너뜨려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바가 큽니다. 청컨대 아울러 삭직(削職)하는 전형(典刑)을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병조 판서와 선전관으로 하여금 군례(軍禮)를 행하게 하였는데, 모화관(慕華館)에서 시사(試射)할 때의 시관(試官)이었던 이식(李栻) 등을 잡아들이게 하고는 시기(試記)를 착오(錯誤)하였다 하여 해당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종선(金鍾善)을 정언으로, 이복상(李復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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