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7권, 영조 47년 1771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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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무술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일 기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지금 이 당(堂)에서 황수(皇嫂)를 생각하였다."
하고, 승지 어석정(魚錫定)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동중추를 맡기고 인평위(寅平尉)344)  의 봉사손(奉祀孫) 정상인(鄭象仁)을 승지로 삼았으며, 이어서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345)  과 인평 도위(寅平都尉)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때 척리(戚里)346)  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곡진하게 은수(恩數)를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

 

약방에서 입시하였다. 대신이 탄일(誕日)이 점점 가까워진다 하여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3일 경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347)  를 설행하였다. 이때 유생 가운데 더러 서쪽 월랑(月廊)의 청(廳) 위에 올라간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멀리에서 바라보고 호패(號牌)를 바치도록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절제(節製)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하나는 모년(暮年)에 청금(靑衿)348)  을 보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써 뜻을 둔 때문인데, 오늘 친림하여 선비를 시험 보이며 제목을 걸기도 전에 선비가 된 자들이 감히 금군청(禁軍廳)에 올라갔으니, 이것은 국가의 기강에 관계된 것이다. 아! 명륜당(明倫堂)에 ‘사습을 바로잡는다[正士習]’는 세 글자를 친히 써서 걸게 하였으니, 청금이 된 자로서 그 누군들 듣지 못하였겠는가? 근래에 과거(科擧)가 빈번해진 때문에, 무인(武人)이 된 자들이 함부로 시관의 자리에 들어가서 제멋대로 가획(加畵)하고, 유생이 된 자들이 사배(四拜)하기 이전에 피하여 금군청에 앉으니, 당초에 시장(試場)을 철폐하려 했던 것은 십분 참작한 것이다. 서쪽 뜰의 유생들은 모두 쫓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수위(首位)를 차지한 진사 윤상후(尹象厚)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349)  하게 하고, 나머지에게 각각 급분(給分)350)  하도록 명하였다.

 

9월 4일 신축

사헌부 【지평 이방영(李邦榮)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호패(號牌)를 추납(推納)하게 하는 것은 곧 여대(輿儓)351)  를 관속(管束)하는 일인데, 이것을 청금(靑衿)에게 시행하였으니,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청컨대 정거(停擧)한 유생들을 풀어 주어 선비를 사랑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그 관직을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9월 5일 임인

서울에서 수위를 차지한 오재순(吳載純)과 향리에서 수위를 차지한 정연순(鄭淵淳)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 각각 급분(給分)하게 하였다. 당시에 이름없는 과거가 거의 비어 있는 달이 없었는데, 주문(主文)352)  이 된 자가 뽑는 것이 세벌(世閥)의 집안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남몰래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9월 6일 계묘

임금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정업원(淨業院)에 나아갔다. 이때 임금이 사릉(思陵)의 능역(陵役)으로 인하여 사릉의 옛일에 대해 물었는데, 승지 임희교(任希敎)가 전 참판 정운유(鄭運維)가 그 사적(事蹟)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우러러 대답하니, 임금이 정운유에게 명하여 정업원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입시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후(聖后)께서 언제 이곳에 와서 거주하셨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느 해인지 징험할 만한 문자가 없습니다. 그 당시 광묘(光廟)353)  께서 정순 왕후(定順王后)가 외롭게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경중(京中)에 집을 내려 주고자 하였으나, 왕후께서 동문(東門) 밖의 동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살기를 원하니, 재목을 내려 주어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곧 정업원 기지(基址)입니다. 그런데 사형(師兄) 윤씨로 이름이 혜은(惠誾)인 사람 처소의 금득(衿得)이라는 자에 대해 지금 그 문안(文案)이 아직도 신의 집에 있으므로 알고 있습니다. 문서(文書) 가운데 사당(祠堂) 3간, 숙설청(熟設廳) 2간이라는 글이 있었으니, 성후(聖后)께서 친히 이곳에서 단묘(端廟)의 제사를 행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선조 정미수(鄭眉壽)로 하여금 시양(侍養)하도록 정한 후 신의 선조 집으로 이어(移御)하셨는데, 대개 시양을 정하기 전에 정업원 주지 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이라고 일컬었으나, 이것은 불씨(佛氏)를 숭신(崇信)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선조는 성후와 어떤 친척이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는 곧 문묘(文廟)354)  의 외손(外孫)이고, 경혜 공주(敬惠公主)355)  의 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성후께서 신의 선조로 하여금 시양하게 하셨고, 신의 집에서 예척(禮陟)356)  하셨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경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두성(金斗性)의 집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임금이 정운유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정업원의 유지(遺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비석을 세워 표지(表識)하게 하였다. 비석이 완성되자 임금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어서 정업원 유지에 거둥하여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고, 비각 앞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말하기를,
"오르내리시는 성후의 영령(英靈)께서 오늘 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친히 ‘동망봉(東望峰)’ 세 글자를 쓰고 원(院)과 마주 대하고 있는 봉우리 바위에 새기도록 명하였는데, 곧 정순 왕후가 올라가서 영월(寧越) 쪽을 바라다보던 곳이다. 환궁[回鑾]할 때 동관왕묘(東關王廟)와 광은 부위 김두성의 집에 두루 임어하였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임금이 공주의 집을 두루 임어할 때 전상(前廂)·후상(後廂)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시위(侍衛)가 동구(洞口) 앞을 곧바로 지나쳤다 하여 특별히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을 파직하고 조엄(趙曮)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차(遞差)하고 정운유(鄭運維)·김치양(金致讓)·이수봉(李壽鳳)·신상권(申尙權)·여선덕(呂善德)·신대현(申大顯)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여선덕은 당시에 통례(通禮)로서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한 때문이었다.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의로,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사간으로, 박상로(朴相老)를 집의로, 임선(任珗)·이익운(李翼運)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을 부교리로, 민종렬(閔鍾烈)을 응교로, 민항렬(閔恒烈)을 정언으로, 박상갑(朴相甲)을 설서로 삼았다.

 

9월 7일 갑진

천둥하고 비가 내리고 번개가 쳤다.

 

민백흥(閔百興)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8일 을사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사행(使行)의 소식을 탐지하여 치문(馳聞)하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하교하기를,
"전대(專對)357)  하라는 명을 전한 지 이제 몇 달이 되어 단지 요동(遼東)의 경계만 바라보며 밤낮으로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이제 이 보고를 들으니 마치 복명(復命)한 사신을 보는 것 같다. 만윤(灣尹)358)  으로 하여금 순검(巡檢)에게 효유(曉諭)해서 소식을 탐문하게 하라."
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예조 판서로, 김상집(金尙集)을 수찬으로, 서유린(徐有隣)을 부수찬으로, 이상악(李商岳)을 응교로, 황경원(黃景源)을 동경연으로, 장지항(張志恒)을 우윤으로 삼았다.

 

정원에서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진계(陳戒)하기를,
"오늘날의 근심은 허위(虛僞)가 풍속을 이룬 데 있습니다. 말이 기휘(忌諱)하는 데 관계되면 서로 이끌어 경계하고, 일이 찬미(贊美)하는 데 있으면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같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릇 이변(異變)을 경계하는 일이 있으면, 한갓 속마음에 우려(憂慮)만 끼쳐 번뇌(煩惱)하시게 되니, 가끔 비상(非常)한 거조(擧措)가 있기에 이릅니다."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책려(策勵)하심이 간혹 지나치셔서 도리어 엄중하고 급한 거조가 많고, 격뇌(激惱)하심이 너무 빈번하여 화평(和平)한 기상이 아주 부족하신데, 한번 거칠 때마다 사단(事端)이 번번이 한층 더 무너져 기강(紀綱)이 점차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아울러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또한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9일 병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거재 유생(居齋儒生)359)  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식당례(食堂禮)를 행하고, 고풍(古風)의 예에 의거하여 재실(齋室)에서 직숙하게 하였다. 이어서 반수 유생(班首儒生)으로 하여금 각각 잠(箴)·명(銘)·송(頌)을 외우게 하고, 임금이 친히 《대학(大學)》의 경(經) 1장을 외우고, 칠언 일구(七言一句)를 쓴 다음 시신(侍臣)으로 하여금 갱진(賡進)하게 하였다. 이어서 예문관에 나아가 실록(實錄)의 사고(史庫)를 향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고 수위를 차지한 유생 박동준(朴東俊)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이어서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첨배(瞻拜)하고 돌아왔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0일 정미

신회(申晦)를 좌참찬으로, 신사운(申思運)을 사간으로, 김제행(金齊行)을 헌납으로, 이진규(李晉圭)를 수찬으로, 정후겸(鄭厚謙)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후겸이 굳이 사양함으로 인하여 황경원(黃景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헌납 남주로(南柱老)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는 재변(災變)이 매번 거두어 저장하는 절기에 있었지만, 식견이 있는 사람의 근심이 어찌 극도에 달한 적이 있었습니까? 단지 근일의 일을 가지고 논하건대, 추모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성궁(聖躬)께서는 더러 보색(保嗇)360)  하시는 데 소홀하시고, 칙려(飭勵)하시기에 부지런하시나 정령(政令)은 엄중하고 급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저축은 남김없이 없어졌지만 한정 없는 용도(用道)를 항상 근심하고, 언자(言者)는 기휘(忌諱)함이 많은데도 매번 천위(天威)를 가하여 억제하십니다. 전형(銓衡)은 중임(重任)인데 혹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체차(遞差)시키고, 형정(刑政)은 지극히 공정해야 하는데 더러 죄는 같으면서 벌이 다르기도 합니다. 무릇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은 모두 재변(災變)을 부르는 것들입니다.
또 근심하여 개탄할 것이 있습니다. 이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은 사람됨이 천박하여 덕(德)을 능가하는 재주는 있으나, 세상에 드러낼 만한 명망이 전혀 없습니다. 지나간 해에 처음으로 이조 참판[亞銓]을 제수하자, 성묘[省掃]하겠다고 하직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어 갑자기 진소(陳疏)하기를, ‘성묘하러 미처 길을 떠나지 못하였는데, 선부(選部)의 명을 갑자기 내리셨기 때문에 공무를 집행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뜻밖에 굴러 들어온 전임(銓任)과 휴가를 받아 성묘(省墓)하러 가는 것은 마땅히 선후(先後)가 있어야 하는데,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여 경중(輕重)이 뒤바뀌었으니, 그 영예로운 길에 조급히 진출하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연전에 대간(臺諫)의 평론에서 그의 평생을 거론하였을 때 이것은 심상(尋常)한 데 견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소하여 예사로 사양하고는 양양하게 무릅쓰고 나아가 마치 무고(無故)한 듯하였으니, 이렇게 조경(躁競)이 풍속을 이룬 날을 당하여 당당한 전형(銓衡)의 지위에 이 사람을 장관(長官)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원 인손을 영구히 전망(銓望)에서 간삭(刊削)함으로써 퇴폐한 풍속을 면려(勉勵)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사간 홍경안(洪景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전장(銓長)은 지나간 해에 대간(臺諫)의 평론에서 공의(公議)를 볼 수 있었는데, 오로지 우리 성상께서는 옛날을 생각하셔서 이것을 불식(拂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감격하여 은혜에 보답하고자 꾀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견줄 바가 아닌데도, 전조(銓曹)에 들어간 후 사설(辭說)이 매우 많았고, 두세 번 정사를 행하면서 기량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배의(排擬)하는 즈음에 마음씀이 교묘하고 은밀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켜 사사(私事)를 이루었습니다. 수령을 특별히 가려야 한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생민(生民)을 위한 덕의(德意)에서 나왔는데, 근일에 허다한 수령들을 차견(差遣)하며 전혀 신중하게 간선(簡選)하지 않았습니다. 사사롭게 막료(幕僚)로서 친한 무리가 아니면 곧 금고(禁錮)361)  에서 풀린 무리를 관서(關西)의 풍요한 자리에 옮겨 주의(注擬)하기를 계청하여 이미 극도로 구간(苟簡)하였으며, 양남(兩南)의 피폐한 고을에는 마땅하지 못한 사람을 견복(甄復)362)  한 것도 또한 방자한 데 관계되니, 전하를 저버린 것이 진실로 큽니다. 이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은 마땅히 견책(譴責)하는 전형(典刑)을 베풀어 전형을 맡은 자를 경계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신위(申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강(紀綱)은 국가의 파병(欛柄)인데, 날로 점차 퇴폐하고 해이해져 변변치 못한 군졸들도 법을 무릅쓰고 과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염치(廉恥)는 국가의 사유(四維)363)  인데, 날로 점차 없어져 진신 대부(搢紳大夫)들이 거취(去就)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탐욕을 징계하고 염치를 권려하는 것은 일세(一世)를 격려하려는 까닭인데, 탐묵(貪墨)이 풍속을 이루어 편안하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정(私情)을 없애려는 것은 힘써 격양(激揚)하게 하려는 까닭인데, 조경(躁競)이 풍습을 이루어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전관(銓官)은 아침에 체차하였다가 저녁에 고치고, 사습(士習)은 투박(渝薄)하고 해망(駭妄)하니, 성화(聖化)의 한 가지 허물이 되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위에서 근심하여 노고(勞苦)하시지만, 뭇 신하들이 받들어 발양(發揚)하지 못하니 기강은 서지 않고 염치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탐람(貪濫)을 두려워함이 없고,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함이 근일(近日)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기강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양호기설(養浩氣說)을 경계로 삼으시고, 염치를 칙려(飭勵)하시고자 하면 관경중(管敬仲)364)  의 사유설(四維說)을 본보기로 삼으시고, 탐묵을 제거하시고자 하면 먼저 청렴 개결(淸廉介潔)한 관리를 권장하시고, 사경(私逕)을 금하시고자 하면 먼저 공평한 도리를 넓히소서. 전선(銓選)의 직임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충후(忠厚)하고 근신하는 사람을 가려서 경박하고 잔꾀가 많은 천박한 사람을 쓰지 말게 하면서 책임을 맡겨 성효(成效)를 요구하소서.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은 사유장(師儒長)을 자주 신칙하여 교유(敎諭)하는 도리를 다하게 함으로써 재주 있는 선비를 많이 양성하는 공효(功效)를 책임지우소서."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원인손(元仁孫)은 재주는 있어도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 최익남(崔益男)과 사우(死友)로 결탁하여 협사(狹斜)365)  에서 노닌다는 비방이 조금 있었으며,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내외의 집안에서 대대로 경대부(卿大夫)의 반열을 힘써 차지하고 있었는데, 입을 열어 다른 사람을 꾸짖고는 문득 여항(閭巷)에 이언(俚言)을 만들어 퍼뜨리니, 진신(搢紳)들이 모두 그 악언(惡言)을 두려워하였다. 대각(臺閣)에서 극론(極論)하기에 이르러 신위(申暐)는 바로 그의 외족(外族)인데, 또한 빗대어 그를 논박하니 듣는 사람들이 흔쾌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363] 사유(四維) : 예(禮)·의(義)·염(廉)·치(恥).[註 364] 관경중(管敬仲) : 경중(敬仲)은 중국 제(齊)나라 관중(管仲)의 자(字).[註 365] 협사(狹斜) : 유곽.
사신은 말한다. "원인손(元仁孫)은 재주는 있어도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 최익남(崔益男)과 사우(死友)로 결탁하여 협사(狹斜)365)  에서 노닌다는 비방이 조금 있었으며,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내외의 집안에서 대대로 경대부(卿大夫)의 반열을 힘써 차지하고 있었는데, 입을 열어 다른 사람을 꾸짖고는 문득 여항(閭巷)에 이언(俚言)을 만들어 퍼뜨리니, 진신(搢紳)들이 모두 그 악언(惡言)을 두려워하였다. 대각(臺閣)에서 극론(極論)하기에 이르러 신위(申暐)는 바로 그의 외족(外族)인데, 또한 빗대어 그를 논박하니 듣는 사람들이 흔쾌하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남주로(南柱老)·홍경안(洪景顔)·신위(申暐)의 소장을 읽게 한 다음 하교하기를,
"2일 동안 두 대신(臺臣)이 소장을 혹 먼저 올리거나 혹은 나중에 올렸는데, 한편의 정신이 모두 이판(吏判)에게 있었다. 홍경안(洪景顔) 같은 자는 이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경알(傾軋)하는 것인가? 오늘날 말할 만한 자가 어찌 다만 이판 한 사람뿐이겠는가? 도헌(都憲)의 소장은 비록 의사(意思)가 없지 않았으나, 아! 이는 부박(浮薄)한 데에서 동요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기회로 인하여 구습(舊習)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오로지 어진 사람은 귀양보낼 뿐이다.’ 하지 않았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다 하나, 오늘날 어떻게 차마 형극(荊棘)을 열 수 있겠는가? 특별히 말감(末減)하여 남주로·홍경안에게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베풀고, 이 소장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갑술년366)  에 태어난 노인들을 소견하고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9월 11일 무신

대사헌 신위(申暐)가 두 대신(臺臣)의 소장을 다시 받아들이고 비답을 내림으로써 국체(國體)를 보존하고 대각(臺閣)을 대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편든다고 비답하고 특별히 그 관직을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정경서(鄭景瑞)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건대, 언관(言官)의 찬축(竄逐)이 도로(道路)에 서로 잇따르고 있고, 중비(中批)367)  로 총탁(寵擢)하는 것이 전후에 잇따르고 있습니다. 군병들에게 외람되게 상주고 외람되게 벌주는 것과 유사(儒士)에게 잠시 정거(停擧)시켰다가 잠시 후에 시험 보이는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모두 희로(喜怒)를 적당하게 조절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화평을 초치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아! 마음이 화평하면 기운이 화평하게 되고, 기운이 화평하면 천지가 화응(和應)하는 것인데, 성심(聖心)의 화평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므로, 조정의 위에서도 또한 화평한 기상이 없어 좌충 우돌(左衝右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세(聖世)의 돈후(敦厚)한 기풍이 전혀 없고, 인사(人事)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니, 천심(天心)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기로인(耆老人)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이고,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의 노약자(老弱者)를 불러 차등 있게 미두(米斗)를 주었다.

 

9월 12일 기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일한재(日閒齋)에 나아가 동네 안의 노인과 궁 안에 사는 사람들을 불러 혹은 쌀을 내려 주거나 혹은 가자(加資)하였다. 이어서 영빈방(寧嬪房)에 거둥하였는데, 영빈이 다시 입궐(入闕)한 것이 갑술년368)  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옛날을 생각하고 감동이 일어난 때문이었다.

 

전 판서 조돈(趙暾)이 치사(致仕)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교문(敎文)을 친히 지어서 선마(宣麻)369)  하고 또한 친림(親臨)함이 마땅하다고 하교하였다. 조돈은 본래 고집이 있어서 해마다 오지 않은 채 여러 번 걸해(乞骸)370)  를 청하며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특별히 허락한 것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4일 신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에게 선마(宣麻)하게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고 판서 조상경(趙尙絅)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곧 조돈의 아버지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임어(臨御)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백성을 무슨 일로 구제하였던가? 더욱이 이달에는 내가 스스로 겸양해야 하니, 공인(貢人)들의 옛날부터 남아 있던 가장 오래 된 것을 탕척(蕩滌)하도록 하고, 시민(市民)들에게는 달리 은혜를 베풀 도리가 없으니, 특별히 한 달의 요역(徭役)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감옥에 달려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9월 15일 임자

임금이 교관(敎官)을 불러 동몽(童蒙)을 데리고 입시하게 하고, 친림하여 고강(考講)한 다음 필묵(筆墨)을 상주었다.

 

9월 16일 계축

월식(月食)이 있었다.

 

장령 정경서(鄭景瑞)가 상소하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윤광(尹珖)은 간사한 아전에게 일을 처리하게 하고, 아객(衙客) 때문에 비방을 초래하였으니, 견파(譴罷)의 전형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경상 우병사 안종규(安宗奎)는 행실이 패망(悖妄)하였으나, 일을 잘하여 출세한 다음 진주 곤영(閫營)에 부임하자, 뇌물을 받고 차임(差任)하고 분수에 넘치게 곤장을 때려 위엄을 세웠습니다. 청컨대 먼저 견파(譴罷)하도록 명하고, 영구히 곤망(閫望)에서 간삭(刊削)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광의 일은 도임(到任)하여 귀기울여 들었지만, 어떻게 유능한 지의 여부를 알겠는가? 안 종규의 일도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7일 갑인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갔다. 이어서 공조(工曹)에 나아가 사릉(思陵)에 세운 비석(碑石)을 봉심(奉審)하고, 이어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다.

 

임금이 일한재(日閒齋)에 나아갔다. 영남 좌도의 사노비(寺奴婢) 가운데 응당 사고로 처리해야 할 자는 모두 조사하여 감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명하고, 이후 사패 노비(賜牌奴婢)371)  를 얻기를 청할 때는 비록 망정(望定)372)  하였다 하더라도 만약 혹 치우칠 경우에는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해서 교정(校正)함으로써 실효가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사패 노비를 획급(劃給)한 것이 좌도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원액(元額)이 크게 축나게 되었으나, 지부(地部)에서는 헤아려 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한결같이 전총(前摠)에 준거하게 하였으므로, 더러 몰래 기록하여 부역을 거듭 부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심리 어사(審理御史) 임정원(林鼎遠)이 돌아와서 그 폐단을 아뢴 때문이었다.

 

이수봉(李壽鳳)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8일 을묘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9일 병진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노인들을 소견하고, 사부(士夫)인 기로(耆老)에게는 비단을 내려 주고, 백성인 기로에게는 쌀을 주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황은편(皇恩編)》을 지영(祗迎)하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나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어긴 일이 있기 때문에 접대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들도 또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곧 도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서계(書契)373)  를 바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직 엄체(淹滯)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동래부(東萊府)에 분부해서 곧 들여 보내게 하소서."
하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전 재판왜(裁判倭)가 나오고부터 그 말을 따를 수 있는지 따를 수 없는지를 논하지 않고 원래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 예가 없었고, 이번에 외람되고 잗단 말은 통역을 맡은 무리가 사사롭게 수작(酬酢)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조정에서 성상께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만약 회서(回書)를 얻으면 반드시 곧 도로 돌아갈 듯하니, 이것은 오로지 동래부에 맡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의 말과 똑같으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0일 정사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2일 기미

번개가 치고 천둥하였다.

 

9월 23일 경신

임금이 10일 동안 감선(減膳)하겠다고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인책(引責)하여 체차(遞差)시켜 주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政院)과 옥당(玉堂)에서 아울러 차자(箚子)를 올려 면려(勉勵)하라고 아뢰었다. 그런데 임금이 재변(災變)을 만났을 때 정원과 옥당에서 곧 진계(陳戒)하지 않고 뒤늦게 응하여 글을 올렸다 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마땅히 스스로 칙려(飭勵)하겠다."
하고, 마침내 15일 동안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도록 명하였다. 승지와 유신은 아울러 현임(見任)을 해직(解職)하고, 특별히 이성규(李聖圭)·이재간(李在簡)·이석재(李碩載)·임희교(任希敎)·변득양(邊得讓)·정상인(鄭象仁)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임금이 금군(禁軍)을 보내어 달려가서 선래(先來)374)  의 장계(狀啓)를 가져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선래 3인은 지체하였다 하여 아울러 강변(江邊)에 충군(充軍)하고 만윤(灣尹)을 파직하게 하였다가, 선래에 대한 처분은 곧 정침(停寢)하도록 명하였다.

 

9월 24일 신유

번개가 쳤다.

 

특별히 황최언(黃最彦)에게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제수하였다.

 

교리 이양수(李養遂)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구징(咎徵)이 있을 경우 본관(本館)에서는 삼가 차자(箚子)를 올리는 것이 전례인데, 어제 유신이 일찍 진계(陳啓)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념(勤念)하여 성교(聖敎)를 내리게 되었으니, 진실로 주선(周旋)을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모두 해직(解職)한 것은 마침내 중도에 지나친 것이며, 비답 없이 차자를 돌려준 것은 전규(前規)에 어긋남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특별히 돌려주게 하고, 받아들인 승지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약방 제조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진주사(陳奏使)의 선래(先來)가 가지고 온 회자(回咨)를 독주(讀奏)하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예부(禮部)에서 의논하여 아뢴 일은 《주린집략(朱璘輯略)》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건륭(乾隆)375) 22년376)  에 경승임 절강 독무(經陞任浙江督撫) 신(臣) 양정장(楊廷璋)이 주청(奏請)하기를, ‘판편(板片)·서본(書本)을 가지고 통행하여 조사해 보았더니, 녹이고 부숴 버려 흔적을 없앤 것이 안(案)에 있었고, 그 《진건통기(陳建通紀)》는 신 등이 경성(京城) 안팎의 서사(書肆)를 두루 방문해 보았으나, 모두 파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두 책은 중국에 있어서 오랫동안 이미 행해지지 않았던 것이니, 거듭 어떻게 그 개삭(改削)을 용납하겠습니까?’ 하였었습니다. 해국(該國)의 왕(王)이 일컬은 글 가운데 그 국조(國祖) 강헌왕(康獻王)의 세계(世系)와 그 4세조(四世祖) 장목왕(莊穆王)의 사적(事蹟) 2조(條)를 무멸(誣衊)한 것에 이르러서는, 삼가 옹정(雍正)377) 4년378)  에 해국 왕의 주청(奏請)으로 소설(昭雪)하였으니, 세종 헌황제(世宗獻皇帝)께서 사관(史館)에 선부(宣付)하여 상세하게 상고하고 깊이 조사하여 이정(釐正)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흠정(欽定)한 《명사(明史)》의 조선 열전(朝鮮列傳)을 공손히 열람해 보았더니, 그 시조(始祖)의 세계와 국인(國人)들이 혼(琿)을 폐출(廢黜)하고 종(倧) 【인조(仁祖)의 어휘(御諱)이다.】 을 세운 부분은 참고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 이미 극도로 상세하고 명확하였는데, 종전에 있었던 야사(野史)에서 상고할 수 없는 말은 이미 모두 나누어 산삭(刪削)하였습니다. 다시 건륭 3년379)  에 우리 황상(皇上)께서 해국 왕의 주청을 윤허하셔서 《명사》 안의 조선 열전을 인쇄하여 반급(頒給)하게 하셨었는데, 무릇 해국에서 당시에 무함받은 것을 이미 성세(聖世)에서 신설(伸雪)받았으니, 지금 이 주사(奏辭)가 비록 매우 간절하다 하나, 또한 어떻게 반드시 무궁한 염려를 지나치게 허비하겠습니까? 해국에서 이미 반발(頒發)한 사전(史傳)을 받은 것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마땅히 황명(皇命)을 받들어 간행하여 널리 펴서 그 자손과 신서(臣庶)로 하여금 믿고 따르는 바를 알게 함으로써 천조(天朝)의 덕의(德意)를 공경히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진건통기》·《주린집략》 두 책이 해국에서 혹 아직도 유전(流傳)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스스로 조사하여 금하거나 태워 없애도록 하여 영구히 의심스러운 곳을 막는다면, 직사(直史)가 만세에 전해져서 일월(日月)이 항상 밝을 것입니다. 속국(屬國)에서는 한 편(編)을 지켜 왔는데 가리워졌던 것이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이 당연히 있는데, 삼가 황상의 훈시(訓示)를 바라면서 명을 기다렸다가, 내려지거든 해국의 왕은 공경히 받들어 준행(遵行)해야 할 줄 압니다. 건륭 36년380)   8월 20일 주본(奏本)을 갖추던 날 분부를 받들어 의논한 바에 의해 하라는 것으로 인하여 본월 22일에 행재 예부(行在禮部)로부터 이송(移送)하여 부(部)에 이르렀으므로, 초록(抄錄)한 원의(原議)를 제외하고, 아울러 유지(諭旨)를 공경히 받들어 직성(直省)의 각 독무(督撫)에게 행문(行文)하였습니다. 따라서 장차 전항의 일찍이 금지했던 서적(書籍)으로 혹 없애 버리는 일의 미진한 부분은 재차 거듭 금령(禁令)을 행하여 사사롭게 소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통행하도록 효유(曉諭)하는 외에 서로 응하면서 통지하되, 조선 국왕은 준봉(遵奉)하여 시행함이 옳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르거든…"
하였다. 채제공이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그것이 모두 다 좋은 것은 아님을 의심하여 채제공에게 묻기를,
"명백한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어의(語意)가 명백함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특지(特旨)인 듯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르기를, ‘행재 예부로부터 이송하였다.’고 한 것은 특지임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당시에 청주(淸主)가 열하(熱河)에 있었는데,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수일의 노정이었으므로, 행재라고 한 것일 뿐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다시 유감이 없다."
하니, 대신(大臣) 이하가 머리를 숙여 칭하(稱賀)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들었던 일은 비록 이루어졌다 하나 오히려 흔쾌하지 않았는데, 오늘 장본(狀本)을 읽게 하고 이로부터 이후로 전대(專對)한 뜻을 흔쾌히 신설(伸雪)하게 되었다. 아! 며칠 동안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이제 얼음이 녹듯이 의혹을 풀 수 있게 되었고, 해부(該部)에서 의주(議奏)하여 특별히 거듭 금하게 한 것이 청한 것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이로부터 이후로 거의 돌아가서 절할 수 있는 얼굴이 있게 되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진주(陳奏)한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경들이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듣건대 세 번 정문(呈文)하여 의리를 통달하고 성의를 다한 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정원으로 하여금 이로써 선유(宣諭)하게 하라. 그리고 진주사(陳奏使)가 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만윤(灣尹)으로 하여금 전선(傳宣)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5일 임술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좌빈객(左賓客)으로,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을 동지 정사로, 조영순(趙榮順)을 부사로, 이진형(李鎭衡)을 집의로, 원계영(元啓英)을 장령으로, 송영(宋鍈)을 사간으로, 노성중(盧聖中)을 헌납으로, 정경인(鄭景仁)·강유(姜游)를 지평으로, 이조원(李祖源)·채홍리(蔡弘履)를 정언으로, 이명빈(李命彬)·이득신(李得臣)을 부교리로, 유한근(兪漢謹)을 부수찬으로, 이택진(李宅鎭)을 서장관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동경연으로 삼았다. 임금이 다시 해계군(海溪君) 이집(李)을 정사로 삼았다.

 

사릉(思陵)에는 옛날에 표석(表石)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석이 완성되니 예관에게 명하여 세우게 한 것이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이어서 승지로 하여금 황은(皇恩)에 대한 송(頌)과 뜻을 보이는 잠(箴)을 쓰게 하였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입시하여, 임금이 감선(減膳)한 후 한번도 진면(陳勉)함이 없었다 하여 그의 늙어서 정신이 흐린 것을 꾸짖어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등의 일을 전례와 같이 거행하되, 경과(慶科)381)   정시(庭試)와 반사일(頒赦日)을 정해 계품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6일 계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명하여 단지 봉전(封箋)만 하고, 방물(方物)·물선(物膳)은 한결같이 모두 잠시 보류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문(箋文) 가운데 만약 하나의 ‘무(誣)’자를 일컬으면, 이것은 박필순(朴弼淳)의 대개(大槪)이니, 이로써 엄중히 신칙하게 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는데, 주청(奏請)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 27일 갑자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9월 28일 을축

다음달에 경과(慶科)를 구궐(舊闕)에서 설행(設行)하도록 명하였다. 또 유신 이득신(李得臣)에게 명하여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감인(監印)하게 하고, 판본(板本)을 사고(史庫)에 소장하게 하였다.

 

사간원 【 헌납 정환유(鄭煥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일로(一路)를 안찰(按察)하는 것은 탄압(彈壓)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도(江都)의 추설(醜說)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는데, 더욱이 일정한 때도 없이 숙배(肅拜)하니, 해괴한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크게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니, 청컨대 경기 감사 황경원(黃景源)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아뢴 바를 들으니 모년(暮年)에 청명(淸明)을 선양(宣揚)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직의 거취(去就)는 진실로 사유(四維)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전지(銓地)에 이르러서는 다른 관직과 달라서 이제까지 전당(銓堂)에서 혹 책벌(責罰)을 받았거나 혹은 대참(臺參)을 받았으면, 그 당시 요석(僚席)에 있는 사람은 한번 의리를 끌어대어 그만두어야 할 바가 있는데,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것같이 염치를 무릅쓰고 공무를 집행하여 염우(廉隅)를 손상시키는 바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며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조 참판 이담(李潭)을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홍검(洪檢)을 대사간으로, 이진규(李晉圭)를 집의로, 김복휴(金復休)·이인묵(李仁默)을 장령으로, 이방영(李邦榮)을 정언으로, 이택진(李宅鎭)을 교리로, 이창임(李昌任)을 수찬으로, 이재협(李在協)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그런데 이재협이 그 숙부 이중호(李重祜)가 체차(遞差)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다 하여 의리를 끌어대며 부임하지 않으니, 임금이 체차하도록 허락하고, 박상덕(朴相德)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9월 29일 병인

박상악(朴相岳)을 교리로, 정상인(鄭象仁)을 부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보덕으로 삼았다.

 

9월 30일 정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연강문(延康門)에 나아가 장락전(長樂殿)을 우러러보고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갔는데,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임오년382)  에 이 전(殿)에서 가례(嘉禮)를 행했기 때문이었다. 궁인(宮人)으로 전내(殿內)를 지키는 자에게 쌀을 내려 주었다.

 

특별히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이조 참의로, 홍검(洪檢)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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