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7권, 영조 47년 177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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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진

이번의 경과(慶科)는 ‘전대(專對)하여 순조롭게 이루었다.’는 것으로 이름을 삼도록 명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이보천(李普天)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0월 2일 기사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3일 경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4일 신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이의(肄儀)를 행하고, 이를 마친 다음 수복(守僕) 및 전악(典樂) 등에게 각각 목면(木綿)을 내려 주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제도(諸道)의 재결(災結)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획급(劃給)하고, 수해를 입어 엄몰(淹沒)된 사람들에게 갑신년383)  의 예에 의거하여 환자(還上)·신포(身布)를 특별히 감해 주게 하였으며, 당년조(當年條) 외에 옛날에 미처 받아들이지 않았던 신미(身米)·신포(身布)·증렬미(拯劣米)384)  를 아울러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고 시기를 늦추도록 하였는데, 대신이 주청(奏請)한 것이었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재년(災年)을 당하여 곡식을 대신하여 받아들이도록 허락하되 반드시 준절(準折)하게 하는 것은 본래 영갑(令甲)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외방 고을에서 잘못된 예가 있어서 곡품(穀品)의 정조(精粗)와 귀천(貴賤)을 논함이 없이 석(石)을 헤아려 대신 받아들이고 있으니, 내년 가을에 이르러 또 본색(本色)을 도로 만들지 않을 경우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나라의 곡식이 점점 줄어들 것이고, 곡부(穀簿)가 문란해질 것입니다. 청컨대 도신에게 엄중하게 신칙해서 이 폐단을 엄중히 금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5일 임신

이번 반사(頒赦)할 때 문관·음관·무관을 물론하고 연로한 사람 외에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오지 않는 자는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하여 진신(搢紳)에 끼지 못하게 하고, 자제들은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였다.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곽진순(郭鎭純)을 장령으로, 이창급(李昌伋)·강이복(姜彛福)을 지평으로, 조재준(趙載俊)을 헌납으로, 이춘보(李春輔)를 정언으로, 김하재(金夏材)를 수찬으로, 이담(李潭)을 좌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환관 안국래(安國來)가 내의 방태여(方泰輿)로 인하여 그 집을 전 승지 김광묵(金光默)에게 환매(換賣)하였다는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남아(南衙)385)  와 북시(北寺)386)  는 한계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인데, 곧바로 명관(名官)에게 매매하였으니, 이것은 북시가 무엄(無嚴)하고 남아가 의리가 없는 것으로, 근래의 기강을 알 수 있다. 다시 이와 같은 자가 있을 경우 경조(京兆)에서는 계문(啓聞)하여 곧바로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387)  을 시행하고, 사율(私律)로 명관(名官)을 영구히 시종안(侍從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하라."
하였다.

 

칠도(七道)의 유생·생원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만물은 하늘에 근본이 있고, 사람은 조상에 근본이 있다.’ 하였으니, 사람에게 시조(始祖)가 있는 것은 만물에게 하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夏)나라에서는 전욱(顓頊)을 제사지내고, 은(殷)나라에서는 현왕(玄王)을 제사지내고, 주(周)나라에서는 후직(后稷)을 제사지냈습니다. 그런데 국조(國朝)의 시조(始祖) 사공공(司空公)께서는 은덕을 널리 펴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고, 그 상서를 길이 드러내어 성조(聖祖)에 이르러 크게 천명(天命)을 받든 것이 진실로 은나라·주나라의 직설(稷契)과 같았습니다. 시조를 존숭하여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갚는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묘(廟)를 세우는 일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이것을 빠뜨리고 있으니 어찌 밝은 시대에 하나의 큰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공공은 연대가 이미 멀어서 조역(兆域)이 적확(的確)하지 못하므로 상석(象石)을 설치하여 숭봉(崇奉)하는 일은 비록 수거(修擧)할 수 없다 하나, 묘를 세워 제사지내는 전례(典禮)에 이르러서는 본래 삼대(三代)의 규례가 있으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을 헤아린다면, 어찌 추향(追享)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지난번 태상시 정(太常寺正) 이정중(李廷重)이 단제(壇祭)를 청한 것은 모호하여 마땅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대신들의 헌의(獻議)가 두 가지로 나뉘어지게 되었었습니다. 대개 단선(壇)의 예가 대경(戴經)에 보이지만, 단지 최근의 조주(祧主)에 대해서 말하고 시조의 예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단으로써 진청(陳請)한 것은 적합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의한 가운데 교체(郊禘)는 예가 아니고 체협(禘祫)388)  은 막중하다는 말은 더욱 이 예에 대해 헤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방(侯邦)에서는 비록 감히 천자(天子)와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대대로 모두 제사하여 시조를 제사지내는 예는 이로부터 제후(諸侯)·사서(士庶)의 예에 도달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의 선계(璿系)는 사공공으로부터 비롯되어 《황명정사(皇明正史)》에 그 관함(官銜)을 기록하였고, 또 〈명나라〉 섭향고(葉向高)의 문집(文集)에 그 세덕(世德)을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성전(盛典)을 거행하셔서 선열(先烈)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전에 이정중이 아뢴 바를 먼저 입시했던 신하들에게 물어 보고 다음에 다시 문의(問議)하였으나, 사체가 중대하여 아직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금 너희들의 상소를 듣건대 선파(璿派)의 후예(後裔)에 대해 1천에 가까운 유생들이 똑같이 기록하였는데,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 적확(的確)하고 사의(辭意)가 명백하고 적실하였으니, 종백(宗伯)389)  으로 하여금 시임 대신·원임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명(命)을 지켜 문의하게 하였으나, 작은 정성으로 마음이 불안하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마땅히 종신(宗臣) 정1품과 문관 2품 이상에서 널리 순문(詢問)해야 하니, 서울에 있는 유신과 백부(柏府)390)  ·미원(薇垣)391)  은 똑같이 입시하고, 세손은 시좌(侍坐)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소두(疏頭)392) 이득리(李得履) 등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내가 한마디로 유시하건대, 윤시랑(尹侍郞)의 묘(墓)에 대해 여러 윤씨들이 소장을 올렸었는데, 신자(臣子)가 그 시조(始祖)를 위한 것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더욱이 국군(國君)이겠는가? 불초(不肖)한 내가 모년(暮年)에 먼저 이정중(李廷重)에게 듣고, 이제 다시 1천 명에 가까운 유생들이 소장을 올린 것을 듣게 되어 시조를 돌이켜 생각해 보았는데, 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이 일은 막중한 것인데, 어떻게 예조 낭관에게 맡기겠는가? 곧 종백(宗伯)으로 하여금 이 주문(奏聞)을 가지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물어 본 다음 내일 아침에 입시하여 아뢰게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사릉(思陵)을 복위(復位)한 것은 곧 지나간 해에 다하지 못했던 효도이고, 온릉(溫陵)393)  을 복위한 것은 곧 내가 계술(繼述)하는 뜻이었는데,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예조 당상은 문의할 때 신칙(申飭)함이 옳다. 그리고 소장을 읽은 유생에게 특별히 표리(表裏) 1습(襲)을 내려 주어 나의 뜻을 표시하게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하루 사이에 전대(專對)가 강을 건너고, 또 이 소장을 듣게 되어 한편으로는 조선에 의리(義理)를 환하게 비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세(後世)에 조선(祖先)을 더욱 환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만약 태실(太室)의 곁에 묘(廟)를 세운다면 진실로 가벼이 허락하기 어렵겠지만, 소장 가운데 인용한 것은 완산(完山)에 묘를 세운다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전주(全州)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고 영흥(永興)에는 준원전(濬源殿)이 있으므로, 이제 비록 묘를 세운다 하더라도 한 경기전을 더하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의리의 밝음이 매우 분명하다. 아!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국군(國君)의 추모(追慕)하는 뜻을 돌아보고 그 선조들이 대대로 녹(祿)을 받은 의리를 생각하여 조금이나마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도록 하라. 아! 오늘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잠을 이루겠는가?"
하였다.

 

10월 7일 갑술

특별히 전 봉상시 정 이정중(李廷重)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 2품 이상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 일에 대해 경들과 상의(相議)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영부사 김상복(金相福) 등은 말하기를,
"성심(聖心)으로 재량(裁量)하여 행하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말하기를,
"지금 묘를 세우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가볍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의 말이 옳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소서."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특별히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교리 박상악(朴相岳)이 말하기를,
"이것은 막중하고도 막대한 일이므로, 지극히 마땅하고도 좋은 데로 귀착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은 채 말하기를,
"연소한 젖내나는 무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이어서 입시한 삼사(三司)의 관원들을 일체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고, 여러 옥당(玉堂)들은 봉록(俸祿) 10등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보여(步輿)를 타고 숭정문(崇政門)을 거쳐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가 저녁이 되어 환궁(還宮)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예조 당상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묘(廟)를 세운 후 묘호(廟號)는 무슨 자를 써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신 등이 밖에서 상의하였는데, 조경묘(肇慶廟)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고유문(告由文)과 반사문(頒赦文)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여 그 청한 것이 진실로 어렵지만, 이미 두 차례 문의(問議)하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불만(不滿)의 뜻이 있으면, 이는 해동(海東)의 신자(臣子)가 아니다. 이미 본주(本州)로 정했으면 단(壇)을 설치하고 묘(廟)를 세우는 일을 일체로 하도록 하라. 내가 나이 장차 80세가 되어 거의 13세(世)의 얼굴을 뵈올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시임 대신·원임 대신·예관을 불러 하교하고, 또 충자(冲子)에게 명하여 내일 아침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나를 대신해서 아뢰게 할 것이니, 삼국(三國) 때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던 전례에 의거하여 본주(本州) 경기전(慶基殿) 곁에 묘를 세우고, 위판(位版)은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라고 쓰고, 비(妣)의 위판은 ‘시조 비 신라 경주 김씨(始祖妣新羅慶州金氏)’라고 쓰고, 묘호(廟號)는 ‘조경묘(肇慶廟)’라고 하되, 제물(祭物)은 경기전의 전례에 의거하고, 묘관(廟官) 또한 경기전의 예에 의거하여 서울에서 차송(差送)하도록 하라. 아! 이날의 이 일은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지도(指導)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경사를 합해서 과거를 설행하되, 이름을 ‘양경 정시(兩慶庭試)’라고 하여 20인을 뽑을 것이며, 고유문(告由文)·반사문(頒赦文)을 첨서(添書)하여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막중한 일이므로, 기초를 닦을 때 오로지 도신에게만 위임할 수 없습니다. 신이 마땅히 내려가서 봉심(奉審)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축사(祝辭)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문(祭文)의 머리말은 ‘효 증손(孝曾孫) 국왕(國王)’이라고 일컫는 일을 향실(香室)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고, 상량문(上樑文)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짓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부사 김상복(金相福),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을 해면(解免)하고, 원임 약방의 세 제조는 겸임을 해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주대(奏對)한 것이 해연(駭然)하니, 전일에 입시했던 유신들은 서인(庶人)을 삼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서민의 형이 어떻게 감히 기전(畿甸)을 안찰(按察)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현임을 해면하고, 특별히 서명응(徐命膺)을 경기 관찰사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8일 을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엄숙(嚴璹)을 대사간으로, 이홍직(李弘稷)을 사간으로, 이진항(李鎭恒)을 집의로, 성윤검(成胤儉)·김훤(金煊)을 장령으로, 어석령(魚錫齡)·이방영(李邦榮)을 지평으로, 노성중(盧聖中)을 헌납으로, 이범제(李範濟)·이상건(李商建)을 정언으로, 김기대(金基大)·심관지(沈觀之)를 교리로, 김상집(金尙集)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아뢰기를,
"경기전(慶基殿)의 제물(祭物)은 한결같이 영희전(永禧殿)과 같이 하여 희생(犧牲)을 쓴 일이 없었는데, 조경묘(肇慶廟)의 제물도 또한 마땅히 이것을 준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집안 형편에 알맞은 가례(家禮)이니, 일체 경기전의 예를 준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홍순이 말하기를,
"경기전의 제향(祭享) 때 향과 축문을 전관(殿官)이 전기(前期)에 한 달마다 배진(陪進)하였으므로, 이제 이 조경묘의 향과 축문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해야 할 것인데, 제사의 기명(器皿)을 서울에서 준비하여 내려 보내는 일을 청컨대 미리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박상악(朴相岳)이 아뢴 바로 인하여 10일 동안 감선(減膳)하고, 하례(賀禮)할 때의 헌가(軒架)는 벌여 놓고 연주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원임 이창의(李昌誼), 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 등이 아울러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請對)하고,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원임 김상복(金相福) 등이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좌통례 임해(任瑎)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자손들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묘례(廟禮)가 새로 이루어졌으니 누군들 경사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마는, 오직 금계군(錦溪君)의 손자 박상악(朴相岳)만 감히 이의(異議)가 있었으므로, 내가 이미 처분하였다. 너희 가운데 혹시라도 박상악의 마음을 가진 자는 이번의 경과(慶科)를 관광(觀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 예조의 세 당상을 소견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감선(減膳)과 헌가를 베풀어 놓고 연주하지 않도록 한 하교를 정침(停寢)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조경묘(肇慶廟)의 향사(享祀) 때 제관(祭官)의 복색(服色)과 배례(拜禮)에 대해 품(稟)하니, 임금이 흑단령(黑團領)394)  을 입고 사배(四拜)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게 하였다.

 

10월 9일 병자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서명선(徐命善)을 대사성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지평으로, 안겸제(安兼濟)를 헌납으로, 남강로(南絳老)·권회(權恢)를 정언으로, 이사증(李師曾)·이석구(李碩九)를 장령으로, 심이지(沈頣之)를 부응교로, 조창규(趙昌逵)를 교리로, 김노순(金魯淳)을 필선으로 삼았다.

 

중부 도사(中部都事) 이수형(李修亨)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현왕(玄王)을 추존(追尊)하였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을 추존하여 하늘과 짝하게 하였고, 당가(唐家)에 이르러서는 노자(老子)를 추존하여 현원 황제(玄元皇帝)를 삼았으니, 이로써 살펴보건대 제왕가(帝王家)에서 조상을 존숭(尊崇)한 예는 여러 가지임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조경묘(肇慶廟)는 수립한 덕과 기업(基業)이 마땅히 직설(稷契)에게 밑돌지 않는데, 오직 숭봉(崇奉)하는 전례는 이대(二代)와 다름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은나라·주나라로 기약하셨으면, 옛날로 인하여 조상을 존숭하는 예가 이대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범제(李範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청대(靑臺)395)  의 보고가 또 이르렀는데, 옛날에 이른바 ‘인애(仁愛)한 우리 임금이 재이(災異)를 바꾸어 상서를 초지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그 기틀입니까? 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전하의 근일의 정령(政令)은 과연 인심(人心)을 화합하여 천의(天意)에 합당하였습니까? 아! 기강을 세우는 것은 박급(迫急)한 데 말미암지 않고, 명령을 행하는 것은 번거롭고 잗단 데 달려 있지 않으니, 회린(悔吝)이 생기는 것은 매번 빨리 하고자 하는 것으로 연유합니다. 근래에 조정의 기상이 조급하게 서둘러 불행하게도 전도(顚倒)되어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탄식은 이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고, 형벌한 자는 다시 붙일 수 없으니, 이것은 명주(明主)가 훈계할 바입니다. 관방(官方)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사람들이 영예를 알지 못하니, 이것은 세상을 면려(勉礪)하는 지극한 경계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크고 작게 의기(義氣)가 저상(沮喪)되어 불행하게도 백성들은 몸둘 바를 모르고 선비들이 동렬(同列)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성인(聖人)의 마음은 하늘과 다름이 없으므로, 반드시 명확하게 공허한 처지에 놓인 후에야 아름답고 못생긴 것과 착하고 악한 것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유 우불(都兪吁咈)396)  하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일이 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일을 하는 즈음에 성의(聖意)가 먼저 정해지면, 대소 신공(大小臣工)은 충성을 다할 수 없습니다. 격렬한 노여움을 내리시면 뜻을 진달하지 않았는데도 죄가 이미 뒤따르고, 근본은 자질구레한 것이었는데 점차 끝에 가서 확대됩니다. 구저(舊邸)에 거둥하신 일은 동작(動作)을 삼가지 않은 것이고 탕제(湯劑)를 물리친 하교는 성궁(聖躬)의 보호를 생각지 않은 것이니, 모두 ‘나는 성인이니 나를 어길 자는 없다.’는 데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요순(堯舜)을 감동하여 본받아 후손에게 부요(富饒)함을 전해 주는 도리에 허물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지난 일을 신이 일일이 들 수는 없으나, 오로지 이것은 관대하여 핍박하지 않는 정사에 뜻을 내리신다면, 빈번하게 거듭되는 근심을 거의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성찰(省察)하소서."
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고, 특별히 그 관직을 체차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이범제(李範濟)의 소장을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천둥하고 번개가 치는 것은 진실로 나의 허물로 인한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아득하게 작은 소리가 있었으므로, 들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득하게 들렸다고 하지 말라. 높이 울려 경계를 보였으니, 진실로 귀를 끌어 당겨 들려주고 눈앞에서 가르쳐 준 것이다. 지난날 박상악이 아뢴 바는 극도로 무상(無狀)한 일이었는데, 경들이 죄를 청하지 않았으니 매우 그르다."
하고, 이수형(李修亨)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묻기를,
"소장이 무엇 때문에 늦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묘(廟)를 창건(創建)한 후에 비로소 이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늦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王)을 존숭(尊崇)하는 〈예(禮)가〉 옳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부(大夫)로 장사하고 선비로 제사지내는 예(禮)는 나의 뜻과 똑같다. 지금의 일은 천지(天地)에 세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니,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존칭(尊稱)이 미안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논이 모두 똑같으니, ‘신라 사공(新羅司空)’이라고 쓰는 것이 왕(王)으로 일컫는 것보다 낫겠다."
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10일 정축

대사헌 홍중효(洪重孝)가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진소(陳疏)하여 나이 때문에 치사(致仕)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여 허락하고, 그로 하여금 올라와서 선마(宣麻)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1일 무인

하교하기를,
"대부(大夫)와 선비를 모두 부군(府君)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선조를 존숭하는 뜻이다. 《중용(中庸)》에 이미 선공(先公)을 상사(上祀)하였다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옛 성인(聖人)이 일컫는 것이다. 또 한(漢)나라 제도에 삼공(三公)을 일컫는 것이 있는데, 단지 신라(新羅)의 작호(爵號)만 쓴다면 어찌 추술(追述)하는 뜻이겠는가? 선공(先公)이라고 일컫는 것이 참람(僭濫)되지 않으니 사공(司空) 아래 신위(神位) 위에 ‘선공(先公)’ 두 자를 더 쓰도록 하라."
하였는데, 후에 ‘선(先)’ 자는 시조(始祖)의 ‘시(始)’ 자와 서로 방해되니 거듭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를 해면(解免)하였는데, 박상악(朴相岳)을 죄주도록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곧 정침(停寢)하였다.

 

사간원 【 헌납 안겸제(安兼濟) 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제택(第宅)을 매매(賣買)하는 일은 마땅히 규제(規制)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대부와 환시(宦侍)는 진실로 차별이 있는 것인데, 지난번 환시의 집을 매입한 것이 비록 사실이 어떠했는지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미 현발(現發)하였으니, 전 승지 김광묵(金光默)을 삭직(削職)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의 경사스러운 예(禮)는 진실로 수백 년 동안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것으로서, 이것은 예경(禮經)에서 상고해 보더라도 백세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전에 순문(詢問)하였을 때 박상악(朴相岳)이 아뢴 바는 비록 그 말이 그 의사를 드러내어 진술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버려둔 채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박상악을 원찬(遠竄)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12일 기묘

특별히 정존겸(鄭存謙)에게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10월 13일 경진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사릉(思陵)의 비문(碑文)의 족자(簇子)를 지영(祗迎)하고, 영건청(營建廳)의 호조·예조·공조 세 당상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도록 명한 다음, 나머지에게 차례로 시상(施賞)하였다.

 

최민(崔)·이해진(李海鎭)을 장령으로, 노서국(盧瑞國)을 지평으로, 김상집(金尙集)을 헌납으로, 안정대(安鼎大)를 정언으로, 윤동섬(尹東暹)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진주사 김상철(金尙喆)이 돌아와서 입시하니, 임금이 손을 잡고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특지(特旨)는 분명히 의심할 것이 없는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황지(皇旨)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한 바는 단지 녹이고 부숴 버리는 것 일절(一節)만이었는데, 피국(彼國)에서는 거듭 금하기를 이와 같이 곡진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뜻밖이다."
하였는데, 김상철이 말하기를,
"서장관 심이지(沈頣之)가 데리고 간 사람인 이홍상(李鴻祥)이 《강감찬요(綱鑑纂要)》를 사들인 후에 이것을 가지고 질정(質正)하여 청을 허락받았으니,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이 책을 얻은 사람이 공의 으뜸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훈(首勳)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한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록 오늘이라도 정사를 행하여 현주(懸註)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사(上使)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였고, 부사(副使)에게는 표피 1령(領)을 사급(賜給)하였고, 서장관에게는 가자하였다. 수역(首譯) 이하는 각기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특별히 심이지(沈頣之)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특별히 박필순(朴弼淳)에게 예조 참의를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박필순은 화(禍)를 미연에 방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이러한 명이 있었다.
아! 우리 나라의 종계(宗系)의 무함은 지난 선묘조(宣廟朝)에도 있었지만, 사신을 보내어 남김없이 소설(昭雪)하였으나, 피국(彼國)에는 《패관잡설(稗官雜說)》의 그릇된 근본을 잘못 답습하고 있는 것이 간혹 많이 있었다. 이것은 이미 정사(正史)에서 소설(昭雪)하였으니, 또한 외국의 사람이 집집마다 깨우쳐 알아듣게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일체 괘오(詿誤)에 부친 것이다. 그런데 박필순이 요행을 희구하는 마음으로 망령되게 한 소장을 올려 군상(君上)의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초치하여 명가(名家)의 사자(士子)들도 또한 뜻밖의 억울한 죽음에 걸려든 자들이 많았으니, 오로지 그를 투비(投畀)하여 요행의 문을 두절(杜絶)해야 마땅할 것인데, 도리어 권장하여 발탁하였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특별히 무신(武臣) 이정수(李廷守)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봉조하 홍계희(洪啓禧)가 죽었다. 임금이 애석하게 여겨 슬퍼하며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렸다. 홍계희는 스스로 유문(儒門)에 출입하며 문자(文字)를 저술(著述)하기를 좋아한다고 일컬었으나, 일찍이 자신의 친지(親知)에게 탐람(貪婪)하다고 논박(論駁)받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아들 홍지해(洪趾海)의 영변(寧邊)의 임소에서 죽었다.

 

10월 14일 신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10월 15일 임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았다. 예방 승지와 선교관(宣敎官)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고, 동궁(東宮)의 춘방(春坊)397)  과 계방(桂坊)398)  에 차례로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는데, 진주(陳奏)한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내일 신주(神主)를 만들어 봉안(奉安)한 후에 마땅히 제사를 행할 것이니, 제물(祭物)을 봉상시로 하여금 영희전(永禧殿)의 예에 의거하되, 명을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태실(太室)의 수복(守僕) 2인이 돌아가며 우문각(右文閣)에서 직숙하고 중관(中官)399)  이 입직하여 방(房)을 배설하되, 친히 제사지낼 때의 재실(齋室)은 예문관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학림군(鶴林君) 이육(李焴)이 상소하기를,
"건지산(乾芝山)은 세상에서 사공(司空) 시조의 옷과 신을 소장한 곳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청컨대 묘우(廟宇)를 옮겨 세우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한근(兪漢謹)을 부수찬으로, 조종현(趙宗鉉)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특별히 부수찬 서유린(徐有隣)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안천군(安川君) 이계(李烓) 등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비록 쇠(衰)하였더라도 지금 이 일이 어찌 이에 합당하겠는가? 만약 엄중히 신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첨을 그치게 하겠는가? 먼저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그 소장은 진실로 충성스럽고 사랑하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80세가 되었으니, 경들이 반드시 청하는 것이 있겠지만, 모름지기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6일 계미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조경묘(肇慶廟)의 위판(位版)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친히 자정전(資政殿)의 동계(東階)에 나아갔다.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 ‘시조 비 경주 김씨 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라고 쓰게 하고, 자정전에 봉안(奉安)하기를 마치고, 임금이 세손을 데리고 친히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득일(李得一)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17일 갑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예조·병조·공조의 세 당상을 소견하였다. 예조 참판 이휘지(李徽之)가 아뢰기를,
"이번의 의절(儀節)은 경기전(慶基殿)에서 영정(影禎)을 모시고 오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大臣)·예관·승지·사관 각 1원이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배종(陪從)하고, 본도의 감사와 지방관이 각각 경상(境上)에서 교체(交遞)하며, 의장(儀仗)과 전부(前部)·후부(後部)의 고취(鼓吹)는 서울에서는 장악원에서 거행하고 외방에서는 본도에서 거행하고, 위판(位版)을 받들고 강가에 나아가 동가(動駕)를 지송(祗送)할 때에는 왕세손이 동가를 수종(隨從)하고, 고유(告由)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는 왕세손이 모시고 참여하고, 신판(神版)을 신련(神輦)에 봉안(奉安)할 때에는 대축(大祝)과 궁위령(宮闈令)이 거행하고, 작헌례 때에는 대축과 궁위령이 거행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공조 판서 김시묵(金時默)이 조경묘의 위판을 봉안할 때 모든 의절을 한결같이 무진년400)  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어장선(御粧船)은 진선(津船) 4척을 협선(挾船)에 연결해서 30척으로 좌우로 나누어 끌고 정박하는 일을 품정(稟定)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내일 모레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 면복(冕服) 차림으로 강가에 수종(隨從)하여 나아갔다가, 회가(回駕)할 때에는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을 하되, 백관(百官)은 임금의 복식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절대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고 모두 저치미(儲置米)로 거행하는 일을 세 도에 분부하게 하였다.

 

5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고, 덕유당(德游堂)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천둥의 이변(異變)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신련(神輦)을 받들고 갈 때 숙소참(宿所站)401)  과 주정소(晝停所)의 형지(形止)에 대해 신이 마땅히 예조 당상·도신과 연명(聯名)하여 장문(狀聞)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신련(神輦)을 포진(鋪陳)할 휘장(揮帳) 등은 각 고을에서 대령(待令)하다가 정결(精潔)하게 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아울러 호조로 하여금 마련해서 새로 준비해 두었다가 차례로 정돈해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말하기를,
"신련을 배호(陪扈)할 군사는 마땅히 위군(衛軍)을 정해서 보내야 할 것인데, 복색(服色)은 홍의(紅衣)로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조운규가 말하기를,
"독(櫝) 안은 설면자(雪綿子)402)  로 빈 곳을 채우게 하고, 독의 겉은 면주(綿紬)의 편의(片衣)를 쓰게 하고, 그 겉은 면주로 싸게 하고, 씨를 뽑은 솜으로 빈 곳을 채우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조엄(趙曮)이 말하기를,
"협련군(挾輦軍)·사대군(射隊軍)의 군사 액수(額數)는 무진년의 등록(謄錄)에 의거하게 하되, 경기·충청·전라 세 도의 영장(營將)이 군사를 거느리고 지경(地境)에서 대후(待候)하고 있다가 차차로 체대(替代)하라는 일은 표신(標信)403)  을 내려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분부하고, 강가에 도착한 후에는 훈국(訓局)의 군사로써 액수대로 체대(替代)하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8일 을유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는데, 참판 정존겸(鄭存謙)이 그와 대대로 혐원(嫌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은(李溵)을 이조 판서로, 민백흥(閔百興)을 이조 참판으로, 김상익(金相翊)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정언 안정대(安鼎大)가 상소하여 한필수(韓必壽)의 아첨하는 비루함과 유수(柳脩)·김광국(金光國)·나충좌(羅忠佐)·강시현(姜始顯)의 미천함은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풍헌(風憲)의 장(長)에서 발거(拔去)하고 오직 진실로 천망(薦望)하는 데에 미치도록 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논하였다. 또 논하기를,
"이장오(李章吾)는 천박하고 경솔한데도 오랫동안 병권을 맡아 정령(政令)이 전도되었으며, 거조(擧措)가 놀랍고도 망령됩니다. 또 탐욕이 많고 사치스러운 것이 습관을 이루어 제택(第宅)이 제도를 넘어 널리 여염집들을 차지하고는 법을 무릅쓰고 거두어 허물었으니, 그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는데 대해서 견삭(譴削)의 전형(典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지나침을 꾸짖고 들어주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안정대의 소장은 당론(黨論)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를 채집한 것이었다. 이장오에 이르러서는 경솔하고 거짓되어 다른 사람과 마주앉아 잠시도 편안하게 있지 못하는 등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지 왕후의 인척과 혼인한 까닭에 병권을 맡은 지 가장 오래 되었으며, 군문(軍門)의 재화(財貨)를 많이 흩어 팔로의 물건을 거두니, 전장(田庄)과 노복(奴僕)이 없는 고을이 없었다. 부유(富裕)함이 왕국(王國)과 같아 날로 교만과 사치가 심해졌으나, 임금의 권애(眷愛)가 변함이 없으니,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9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안정대의 소장은 당론(黨論)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를 채집한 것이었다. 이장오에 이르러서는 경솔하고 거짓되어 다른 사람과 마주앉아 잠시도 편안하게 있지 못하는 등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지 왕후의 인척과 혼인한 까닭에 병권을 맡은 지 가장 오래 되었으며, 군문(軍門)의 재화(財貨)를 많이 흩어 팔로의 물건을 거두니, 전장(田庄)과 노복(奴僕)이 없는 고을이 없었다. 부유(富裕)함이 왕국(王國)과 같아 날로 교만과 사치가 심해졌으나, 임금의 권애(眷愛)가 변함이 없으니,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속광국지경록(續光國志慶錄)》이 완성되었다.

 

10월 19일 병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친히 조경묘(肇慶廟)의 위판독(位版櫝) 전면에 ‘전(前)’자를 쓰고, 왕세손에게 명하여 보획(補畵)하게 하였다.

 

임금이 기백(畿伯)의 방미방(放未放)404)  에 대한 계본(啓本)을 보고 하교하기를,
"관서(關西)에 원배(遠配)하는 자는 유(流) 3천 리가 아니면, 다른 도에 정배함이 마땅하니, 방기(邦畿) 천리 안은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이라고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원배를 기전(畿甸)에 정배하는 경우 그것이 옳은 것인가, 전도(顚倒)된 것인가? 이후로 외방에 원배하는 죄인은 기읍(畿邑)에 정배하지 말라는 일을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이홍직(李弘稷)이 상소하여 황해 감사 홍양한(洪良漢)의 주색(酒色)에 빠졌음과 병사 이한창(李漢昌)의 행실이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됨과 선천 부사(宣川府使) 유진설(柳鎭說)이 재물을 탐내어 법을 지키지 않음을 논하고, 아울러 견파하기를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홍양한의 일은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이한창·유진설에 대한 일은 풍문(風聞)으로 믿기 어려우니, 너는 모름지기 다시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홍직은 그 내력(來歷)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당시 재상의 응견(鷹犬)이 되어 전후에 다른 사람을 탄핵(彈劾)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았었는데, 지금의 소어(疏語)도 반드시 관규[官師之規]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홍직은 그 내력(來歷)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당시 재상의 응견(鷹犬)이 되어 전후에 다른 사람을 탄핵(彈劾)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았었는데, 지금의 소어(疏語)도 반드시 관규[官師之規]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번에 정시(庭試)에서 창방(唱榜)할 때 문과는 전례에 의거하여 말을 주되, 무과는 단지 갑과(甲科)·을과(乙科)만 말을 주도록 명하였다.

 

10월 21일 무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조경묘(肇慶廟)의 위판(位版)을 공경히 알현(謁見)하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조경묘(肇慶廟)의 제사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10월 22일 기축

이날 조경묘의 위판을 받들어 전주(全州)로 갔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여(輿)를 타고 신련(神輦)을 배종(陪從)하여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도착하자, 신련을 용주(龍舟)에 봉안(奉安)한 후 네 번 절하여 하직하고는 사장(沙場)에 부복(俯伏)한 채 오랫동안 목이 메어 울었다. 어가(御駕)를 돌려 관왕묘(關王廟)에 두루 임어하여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지금 사공(司空)의 묘우(廟宇)를 전주(全州)에 처음으로 설치하는 일은 1천여 년 후에 있게 되었는데, 6일 동안 자정전(資政殿)에 아침마다 전배(展拜)하여 신성(晨省)405)  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으니, 하늘에서 타고나신 성효(聖孝)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9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註 405] 신성(晨省) : 이른 아침에 부모를 뵙고 안부를 살피는 일.
사신은 말한다. "지금 사공(司空)의 묘우(廟宇)를 전주(全州)에 처음으로 설치하는 일은 1천여 년 후에 있게 되었는데, 6일 동안 자정전(資政殿)에 아침마다 전배(展拜)하여 신성(晨省)405)  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으니, 하늘에서 타고나신 성효(聖孝)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어 고(故)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과 고 기성 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의 집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신라(新羅)의 시조묘(始祖墓)에 치제하게 하였다.

 

10월 23일 경인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조영순(趙榮順)을 호조 참판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이조 참판으로, 홍낙순(洪樂純)을 이조 참의로, 김서응(金瑞應)을 장령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황해 감사로, 이명빈(李命彬)을 교리로, 서유원(徐有元)을 수찬으로, 이창임(李昌任)을 부수찬으로, 이성수(李性遂)를 대사간으로, 조영진(趙英鎭)을 부교리로, 채정하(蔡廷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정축년406)   이후로 의지하여 앙모(仰慕)할 바가 없었으나, 우연히 오늘날이 있게 되어 5일 동안을 모시고 지냈는데, 오늘 아침부터 마치 젖먹이가 젖을 잃어버린 것 같으니 지금은 조금 슬픈 마음이 있어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나의 기운과 마음이 쇠약해져서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선무사(宣武祠)407)  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일체로 치제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봉조하 홍중효(洪重孝)가 선마(宣麻)하겠다는 하교를 듣고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하여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전형(典刑)을 시행하게 하였다. 또 이번의 진하(陳賀)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삭직(削職)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4일 신묘

조경묘(肇慶廟)를 봉안(奉安)한 후 신련(神輦)을 시위(侍衛)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예조 당상과 대축(大祝)에게 숙마(熟馬) 1필을 아울러 면급하고, 나머지에게 모두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11월부터 명년 정월까지 악기를 보관해 두도록 명하였는데, 조경묘의 봉안(奉安)이 11월 초길(初吉)에 있기 때문에 임금이 감모(感慕)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특별히 이휘지(李徽之)에게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내국(內局)에서 약으로 쓰는 주침(酒浸)408)  과 주세(酒洗)409)  가 한 달에 통틀어 30병[壼]이 된다는 것을 듣고, 이것은 내주방(內酒房)을 혁파한 뜻이 아니라 하여 반으로 줄이게 하였다.

 

10월 25일 임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인경 왕후(仁敬王后)410)  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10월 26일 계사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경기전(慶基殿)의 동지제(冬至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10월 27일 갑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유생들이 가득 차서 모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건명문(建明門) 안과 숭정문 밖에 나누어 앉아 각각 작축(作軸)411)  하여 들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시지(試紙)의 위에 ‘숭(崇)’ 자와 ‘건(建)’ 자를 쓰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차(小次)412)  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와서 여(輿)를 타고 전정(殿庭)에 머문 채 하교하기를,
"경유(京儒)는 서고 향유(鄕儒)는 앉도록 하라."
하고, 그 많고 적은 것을 본 다음,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경과(慶科)는 다른 과거와 다르다. 너희들이 반드시 천안(天顔)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할 것이므로, 이를 위해 친히 보는 것이다."
하였다. 일기가 점차 추워지므로, 과거를 본 후에 즉시 내려가게 하고, 즉일로 창방(唱榜)하여 김상정(金相定) 등 20인을 뽑았으며, 친림하여 급제를 부르게 하였다.

 

임금이 전주 이씨와 경주 김씨는 한 사람도 참방(參榜)하지 못했다 하여 명일 숭정전에서 완경과(完慶科)를 설행(設行)하여 서울과 향리에서 각각 한 사람씩 뽑되, 경표 향부(京表鄕賦)413)  에 남김없이 모두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선비들을 시험 보이는 시소(試所)에 친림(親臨)하였는데, 갑자기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울부짖어 하소연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곧 추조(秋曹)로 하여금 공초(供招)를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대개 여인이 거짓으로 남복(男服)을 꾸미고 호위한 가운데에 난입(攔入)하여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형조 판서        심수(沈鏽)가 공초를 받아 아뢰자, 하교하기를,
"듣건대 한(漢)나라에서는 제영(緹榮)414)                  이 상서(上書)한 바가 있고, 당(唐)나라에서는 목란(木蘭)415)                  이 종군(從軍)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형제가 남복(男服)을 바꾸어 입고 전정(殿庭)에서 상언(上言)하였다는 것은 지금 처음 듣는다. 예조에서 회계(回啓)한 일이 매우 상세하고 적실한데, 저 김만규(金萬規)가 물고(物故)된 것이 비록 해후(邂逅)한 데 말미암았다 하나, 막중한 계하 문서(啓下文書)를 아직도 시행하지 않아 김 소사(金召史)로 하여금 이것을 품은 채 신리(伸理)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덕화(德化)를 펴고 풍교(風敎)를 이어받는 뜻이겠는가? 만약 이미(李瀰)가 없었다면 김만규가 어떻게 감옥에서 물고되었겠는가? 회계(回啓)를 가지고 인자(人子)를 신리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인데, 공공연하게 창준(昌濬)을 대신하여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 것은 상인(常人)이 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등문(登聞)하고자 왔는데 그 형 이은(李溵)이 제 마음대로 잡아서 보냈으니, 나라에 기강(紀綱)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오로지 고집하여 승부를 다투고야 말려고 한 것에 말미암았음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다. 아! 김 조이가 비록 아비를 위해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하나 그 성주(城主)를 배척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남자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여인으로서 능히 하였으니, 이것은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그 당시 도신이 만약 엄중히 처치하지 않았으면, 국가의 기강은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어사(御史)에게 사문(査問)하도록 명하고자 하였는데, 김조이가 만약 혈원(血冤)이 없었으면 어찌 손가락을 잘랐겠으며, 또한 어찌 피로 글씨를 썼겠는가? 곧 이 한 가지 일은 저절로 단안(斷案)이 되는 것이니, 듣고 매우 불쌍하고 참혹하게 여겼다. 경재(卿宰)가 되어 방자한 뜻으로 법을 업신여긴 이은과 이미에게 빨리 삭판(削版)의 전형(典刑)을 시행하고, 창준 또한 도신으로 하여금 엄중히 세 차례 형벌을 베푼 후 정배(定配)하게 하라. 창윤(昌潤)을 입후(立後)하는 일은 기축년416)                  에 예조에서 회계(回啓)한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김 조이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쌀을 제급(題給)하게 해서 내가 불쌍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을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문과·무과의 신은(新恩)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고 상신 이천보(李天輔)의 아들 이문원(李文源), 고 참판 오원(吳瑗)의 아들 오재소(吳載紹), 도위(都尉) 신광수(申光綏)의 아들 신재선(申在善)을 보고 곧 고 상신과 해창위(海昌尉)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시험을 주관한 명관(明官)은 판부사 김양택(金陽澤)과 제학 조엄(趙曮)이었다.

 

임금이 숭정전에 전좌(殿坐)하여 완경과(完慶科)를 행하고, 침전으로 돌아왔다. 성적의 순위를 매겨 경유(京儒)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 김한로(金漢老)와 향유(鄕儒)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 이면수(李勉修) 등 4인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김한로는 곧 국구(國舅) 김한구(金漢耉)의 아우인데, 전후의 과방(科榜)을 서울의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차지하였으나, 이와 같은 때가 없었다.

 

10월 29일 병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 안에 나아가 친히 완경과(完慶科)를 행하여 무사들에게 시험 보이고, 수위를 차지한 자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임금이 날씨가 추워진 까닭에 선전관으로 하여금 종각(鍾閣)에 달려가서 걸인(乞人)들을 모아 선혜청(宣惠廳)에 맡겨 죽을 먹이게 하고, 또 승지를 보내어 감옥에 달려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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