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유
대사헌 남태저(南泰著)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신의 자손은 문과(文科)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영(令)이 비록 시폐(時弊)를 바로잡고 요행을 바라며 상도(常道)를 벗어나는 것을 억제한다는 성의(聖意)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다만 생각하건대, 인품(人品)은 각각 다르고 힘은 똑같지 않은 것이므로, 혹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하고도 이를 포기한다면 애석하게 여길 만하며, 혹 쏘아서 서찰(書札)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활을 조종하기가 어렵거나, 혹은 여러 대 동안 문(文)을 업(業)으로 삼다가 한 사람이 붓을 내던지고 무예에 종사하는 바람에 그 아들이 된 사람이 다시는 조업(祖業)을 닦을 수 없게 된 경우, 이와 같은 무리를 일체 금단(禁斷)한다면,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뽑는 데 있어서 일정한 한도가 없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한(漢)나라 때 기문(期門)417) ·우림(羽林)418) 이 모두 장구(章句)에 통하였으니, 옛사람이 아름다운 일로 여겼습니다. 어찌 무가(武家)의 자제라 하여 문(文)을 업(業)으로 삼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여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장 장지항(張志恒)의 아들 장현국(張鉉國)에게 무예를 익히도록 권하니, 여러 가지 방도로 면하고자 꾀하여 팔이 부러졌다고 사칭(詐稱)하기에 이르렀으므로, 특별히 금령(禁令)을 내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침(停寢)하였다.
대사간 이성수(李性遂)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판서 이은(李溵)은 사람됨이 어리석어 본래 지식(知識)이 없고, 천성(天性)이 탐욕이 많고 비루하여 나쁜 짓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전후에 탄핵(彈劾)받은 것이 몇 차례나 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말이 없으면 제수하는 대로 번번이 나아갔습니다. 분수에 어긋난 정병(政柄)을 맡았으면, 오로지 혹시라도 과실이 있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그 구차하고도 염치없는 실상에 일세(一世)에서 침을 뱉아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염괴(廉媿) 일절은 진실로 책망할 것도 못되지만, 방도(方倒)하기를 달갑게 여김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 천관(天官)419) 의 장(長)이 얼마나 중대한 직임입니까? 성상께서 여러 번 전임(銓任)을 맡기신 것은 혹 공평한 정치에 보탬이 될 것을 생각하신 것인데, 지의(志意)가 만족하게 여겨 정법(政法)이 방자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공의(公議)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근일에 행한 정사를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신상권(申尙權)은 연인(連姻)으로서 허물이 있는 사람인데, 두루 내외에 거용(擧用)하여 마치 널리 권장하듯이 하였고, 이상정(李象靖)은 이전부터 폐기(廢棄)되어 공의가 허여(許與)하지 않는 사람인데 갑자기 수재(守宰)에 주의(注擬)하여 뚜렷이 부호(扶護)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고 한결같이 자기의 편사(偏私)한 습관을 이룬 것이니, 더욱 극도로 통분스럽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청컨대 견삭(譴削)의 전형(典刑)을 시행하소서. 일전에 듣건대 영남의 여인이 혈서(血書)를 가슴에 품고 길에서 호소하여 울부짖었는데, 대개 그 아비가 법에 어긋난 남형(濫刑)을 받고 죽었으나, 이은에게 저지당해 부득이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아! 한 부녀(婦女)가 억울함을 호소할 경우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까닭이니, 성치(聖治)에 누(累)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이 일이 이미 밝혀지자, 이은의 형제를 아울러 삭판(削版)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무릇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므로, 비록 방백(方伯)이라 하더라도 죄가 아니면 제멋대로 죽일 수 없는 것이고, 비록 권재(權宰)라 하더라도 외방에서 옹폐(壅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삭판하는 데 그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아울러 찬배(竄配)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편으로는 견삭(譴削)하기를 청하고 한편으로는 찬배하기를 청하였으니, 한 사람에 대해 마땅히 어떤 율을 써야 하겠는가? 자못 대각(臺閣)의 체모(體貌)가 부족하니,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동자(童子)가 관함(官銜)을 갖추었다는 하교는 그에게 이미 관대한 전형(典刑)을 보인 것이지만, 관계되는 바가 막중한 까닭에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미 달을 넘겼고 일이 또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서인(庶人) 박상악(朴相岳)은 연소하여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특별히 탕척(蕩滌)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김상정(金相定)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서인으로 삼도록 한 명을 탕척(蕩滌)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대(專對)한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때문이었다. 또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가운데 한 사람이 곧 그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유시(諭示)하려고 하였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미원장(薇垣長)이 진장(陳章)한 것을 듣고서야 이번에 김 조이(金召史)의 일은 비록 이미 처분(處分)하였으나 그 근본을 물어 보니 상주 목사(尙州牧使)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근본을 버려 두고 말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해당 목사는 본도에 물어 본 다음 빨리 금고(禁錮) 3년의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한 도의 억울함을 사례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 【장령 노서국(盧瑞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탐욕을 징치(懲治)하는 전형(典刑)은 대개 백성을 위해 폐해(弊害)를 제거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상 병사 이명운(李明運)은 제주목(濟州牧)이 되어 흉년이 들었으나, 백성들의 굶주림을 진제(賑濟)할 것을 생각지 않은 채 더욱 제멋대로 매를 때리며 재물을 빼앗아서, 7천의 백성들이 마침내 손척(損瘠)하기에 이르렀는데, 충군(充軍)하는 것으로 가볍게 감죄(勘罪)하였다가 곧 석방하였습니다. 일찍이 얼마 안되어 옛날처럼 향용(嚮用)하여, 북읍(北邑)·남곤(南閫)을 오로지 역임 하였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솥에 넣고 삶는 전형을 당일에 시행하지 않았으나, 금고(禁錮)의 율(律)은 그에게 결단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이명운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여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일 무술
특별히 윤동섬(尹東暹)에게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지평 어석령(魚錫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는 사체(事體)가 엄중한 것인데, 지난번 발계(發啓)하는 즈음에 간장(諫長) 이미(李瀰)는 속으로 규피(規避)하려는 마음을 품고 겉으로 부당한 혐의를 끌어대어 구차하게 조어(措語)가 군색하여 달아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어리석다 하나 어찌 법에 벗어난 혐의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감히 교묘하게 사리에 어긋난 말을 만들어 모면(謀免)하려는 계책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엄중하게 징치(懲治)하지 않는다면, 유군 후친(遺君後親)의 무리가 반드시 꺼려함이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찬배(竄配)의 전형(典刑)을 시행하소서. 전 이조 참의 김상익(金相翊)은 정주(政注)에 어두워 한결같이 자기의 사정(私情)을 좇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여 꺼려함이 없으니, 식견이 있는 선비 가운데 놀라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찍이 호남(湖南)을 안찰(按察)하였을 때 완전히 탐도(貪饕)만 일삼아 미곡(米穀)을 변통하여 사들인 다음 후한 이식(利殖)을 남겼으므로, 남방(南方)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을 뱉아 욕하고 있습니다. 영도(榮塗)에 진출하는 데 탐욕을 품고 권세를 붙좇아 1년 동안 세 번 통하니, 물의(物議)가 모두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그 문벌(門閥)에서 무슨 관직인들 만들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차마 이러한 비부(鄙夫)의 일을 하였으니, 청컨대 한결같이 아울러 간삭(刊削)해서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의 일은 지난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성인(聖人)이 경계하였다. 내가 몹시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틀 동안에 어제에는 형을 찬배(竄配)하라고 청하고, 오늘은 아우를 찬배하라고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경상(景像)이란 말인가? 이러한 풍습은 내가 취하지 않겠다. 김상익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근사(近似)한 것인가? 전지(銓地)에서 내쫓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세택(李世澤)을 대사간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으로, 남주관(南胄寬)을 정언으로, 서형수(徐逈修)·조재준(趙載俊)을 교리로 삼았다.
사헌부 【집의 이진항(李鎭恒)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잇달아 겹친 나라의 경사는 전고(前古)에 드물게 듣던 것인데, 광탕(曠蕩)의 은사(恩赦)가 중외(中外)에 바야흐로 고루 미치고 있습니다. 누군들 대성인(大聖人)의 합류(合流)하는 덕의(德意)를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마는, 관계됨이 막중한 데 이르러서는 어떻게 갑자기 탕척(蕩滌)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서인(庶人) 홍봉한(洪鳳漢)을 참작하여 처분하라는 명을 빨리 정침(停寢)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조사(措辭)에 대해 꾸짖어 답하자, 이진항이 인피(引避)하니,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을 시행하게 하였다.
11월 3일 기해
문형 권점(文衡圈點)420) 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전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지난해에 탄핵(彈劾)받았다 하여 의리를 끌어대니, 다시 전전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권점(圈點)을 행하여 들여오게 하였다.
경기 감사 서명응(徐命膺)을 대제학으로, 심수(沈鏽)를 경기 감사로,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김광악(金光岳)을 지평으로, 이갑(李𡊠)을 부교리로 삼았다.
한림 소시(翰林召試)421) 를 행하여 유운우(柳雲羽) 등 4인을 뽑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4일 경자
승지를 보내어 국구(國舅) 김한구(金漢耉)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1월 5일 신축
중궁전(中宮殿)에 2품 이상과 육조에서 국구의 대상(大祥)인 때문에 받들어 위로하고 문안(問安)하였다.
임금이 장차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여경방(餘慶坊)에 두루 임어하고, 또 양정재(養正齋)에 임어하였다. 이어서 육상궁에 나아가 재실(齋室)에서 경숙(經宿)하였다.
서학(西學)의 지영(祗迎)한 유생들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주게 하고, 학예(學隷)에게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도록 명하였는데, 어가(御駕)가 여경방(餘慶坊)에 거둥하였을 때 서학의 문 밖을 지나가자,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지영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회가(回駕)할 때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422) 의 집과 증(贈) 영상(領相)423) 의 집에 아울러 내시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연로(輦路)에서 바라보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는데, 증 영상은 곧 육상궁의 본가(本家)이다.
11월 7일 계묘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차자(箚子)를 올려 병을 끌어대며 내국(內局)의 직임을 체차해 주기를 원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약방 제조와 부제조가 연명(聯名)하여 문후(問候)하니, 하교하기를,
"도제거(都提擧)의 자리가 비어 있는데, 대신(大臣)을 대신하여 양양하게 문후하였으니, 제조와 부제조에게 빨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한익모(韓翼謨)가 전일에 엄중한 하교를 받았다 하여 황공하게 사직하자, 임금이 비록 사면(辭免)을 허락하였으나, 성심(聖心)이 격뇌(激惱)하여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개성부 진사 최경성(崔景星)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부(本府)의 목청전(穆淸殿)은 곧 우리 태조(太祖)께서 용잠(龍潛)424) 에 계실 때의 구저(舊邸)이었습니다. 이에 옛날 우리 태종조(太宗朝) 때 성조(聖祖)의 영정(影幀)을 이 전(殿)에 봉안(奉安)한 다음, 사관(祠官)을 두어 수위(守衛)하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를 지내고 불행하게도 임진란(壬辰亂) 때 전(殿)은 이미 불타고 영정도 잃어버렸으며,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전의 기초가 되는 섬돌만 우뚝 서 있을 뿐입니다. 숙묘조(肅廟朝) 계유년425) 에 거둥하셔서 누각(樓閣)을 세우고 비(碑)를 세우게 하신 다음 어필(御筆)로 친히 ‘목청전비계령경지비(穆淸殿丕啓靈慶之碑)’라고 쓰신 것이 비음(碑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경신년426) 에 거둥하여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셨으니, 용잠(龍潛)의 옛터를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및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과 일체로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무릇 여러 궐전(闕典)을 모두 거행하지 않으신 것이 없는데, 오로지 목청전에 영정을 봉안하는 의례는 아직도 거행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성조의 하나의 큰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우(殿宇)를 중수(重修)하고 다시 영정을 모획(摹繣)하여 성효(聖孝)를 빛내소서."
하였는데, 비답하여 허락하지 않고, 최경성을 불러들여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조경묘(肇慶廟)를 새로 세운 후 진소(陳疏)했던 유생들이 우악한 비답을 받고 조용(調用)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비록 의사(意思)가 있었으나 계획적으로 억양(抑揚)한 것이다.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판부사 김상복(金相福)을 내국 도제거로 삼고, 신회(申晦)를 제거로 삼고, 이성규(李聖圭)를 도승지로 삼도록 하라. 전 제조와 부제조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라는 하교는 특별히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8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도승지 이성규(李聖圭)를 호조 참판으로 삼고, 어석정(魚錫定)을 도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총재(冢宰)427) 가 사면(辭免)하고 궐문(闕門) 밖에 엎드리는 것은 옳지만, 이조를 염피(厭避)하여 이조의 직방(直房)에 엎드린 것은 매우 해괴하게 여길 만하므로, 엄중히 처분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에 전대(專對)한 후 공(功)과 죄(罪)가 서로 대등하니,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서용하지 않는 전형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은 일찍이 이력이 없었으나, 특별히 전장(銓長)을 제수하였으므로, 잇달아 소명(召命)을 어기며 현패(懸牌)하고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존겸(鄭存謙)을 예조 참판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우윤으로, 김시묵(金時默)을 판의금으로, 권영(權穎)을 사간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집의로, 곽진순(郭鎭純)·이만육(李萬育)을 장령으로, 이사조(李思祚)·조영필(趙榮弼)을 지평으로, 정경인(鄭景仁)·신응삼(辛應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을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대은암(大隱巖) 노인(老人)들을 소견하고 각각 쌀과 베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0일 병오
사간 권영(權穎) 등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홍봉한(洪鳳漢)을 서인(庶人)으로 삼은 것을 특별히 정침(停寢)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수응(酬應)하기 어렵다 하여 아울러 돌려주도록 명하고 입시해서 면대하여 아뢰게 하였다.
장령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의 관명(官名)과 외방의 읍호(邑號)를 어떻게 감히 사휘(私諱) 때문에 제멋대로 고칠 수 있겠습니까? 전라 감사 윤동승(尹東昇)은 윤부(尹扶)의 손자로서, 부안(扶安)을 희안(喜安)이라고 고치고, 왕래하는 문첩(文牒)에 희안이라고 써서 일컫고 있으니, 이미 극도로 무엄(無嚴)합니다. 지금 묘우(廟宇)를 세우는 일은 진실로 처음 있는 성대한 의전(儀典)으로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덕음(德音)이 측달(惻怛)하셨으니, 일을 맡은 신하는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근신함으로써 성의(聖意)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력(物力)을 나누는 즈음에 단지 안정(顔情)에 따르고 있으므로, 총애하는 비장(裨將)과 간사한 아전들이 중간에서 폐단을 일으킨다는 말이 남쪽에서 전해져 오자,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공경스럽고 중대한 일을 이와 같이 경솔하고 천박하여 자기 생각대로 하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청컨대 윤동승(尹東昇)을 먼저 파출(罷黜)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령 이만육(李萬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가뭄을 근심하시는 때를 당하여 심리사(審理使)가 된 자는 마땅히 원왕(冤枉)을 통찰(通察)하여 실상(實狀)을 채탐하여 아룀으로써 성려(聖慮)를 풀 수 있게 했어야 할 것입니다. 아! 저 효녀(孝女)가 몸이 안옥(按獄)에 잡혔다가, 길을 막고 등문(登聞)하며 가슴에 혈서(血書)를 품은 채 울부짖어 하늘에 호소하자, 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탄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파하였는데, 심리사는 마치 귀막이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모르는듯이 한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입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심리사 임정원(林鼎遠)에게 마땅히 간삭(刊削)의 전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우악하게 비답하고, 임 정원에게 서용하지 않는 전형을 시행하게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신이 중대한 역사(役事)를 바야흐로 벌이고 있으므로, 완백(完伯)428) 이 반드시 의리를 끌어댈 것이니, 체차(遞差)를 허락하기를 청하자, 특별히 홍낙성(洪樂性)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고 당일로 사조(辭朝)한 다음 가서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이명식(李命植)을 특별히 파직(罷職)하게 하였는데, 김 조이(金召史)가 격쟁(擊錚)한 일 때문이었다.
11월 11일 정미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고, 특별히 이흥종(李興宗)·심이지(沈頣之)를 승지로 삼았다.
전라도의 유학(幼學) 이헌(李)이 상소하여 임진년429) 에 절개를 지켜 죽은 고경명(高敬命)의 충의(忠義)에 대해 논하고, 부조지위(不祧之位)로 정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만약 이러한 청을 가볍게 허락한다면, 먼 옛날의 유신을 생각하여 힘써 새롭게 하려는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慨然)하게 여기던 것이다."
하고, 하교하여 꾸짖었다.
임광(任珖)을 지평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응교로, 이담(李潭)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2일 무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6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이번에 조경묘(肇慶廟)의 일은 1천여 년 만에 있는 해동(海東)의 성대한 일인데, 풍패(豊沛)430) 의 고도(古都)에서 역사하는 백성들이 많으니, 아!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어찌 민망스럽게 여기지 않으시겠는가? 인자(人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하는 것이니, 더욱이 국초(國初)에 선조(先祖)의 마음이겠는가? 수천의 재목과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로 운반하는 쌀 등 그 폐해(弊害)가 적지 않을 것이니, 백성을 위해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전주(全州) 등 11고을은 결전(結錢)과 선무포(選武布)를 특별히 감해 주고, 호남(湖南)은 옛 환곡(還穀)으로 올해에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또한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라. 지금의 이 하교는 진실로 1천여 년 만에 시조(始祖)의 성덕(聖德)을 유양(揄揚)하는 것이다. 《시전(詩傳)》에 주(周)나라는 비록 오래 된 나라이지만 그 받은 천명(天命)은 새롭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방명(邦命)은 모두 성조(聖祖)께서 덕(德)과 인(仁)을 쌓아서 그러한 것이다. 아! 도신(道臣)은 53주(州)의 백성들에게 선포(宣布)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경묘를 우러러보며 성덕(聖德)을 우러러 생각하게 하라. 기전(畿甸)·호서(湖西) 등 신련(神輦)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은 올해의 결전(結錢)을 일체 탕감(蕩減)해 주고, 새 환곡을 헤아려 감해 주도록 하라. 전주는 11고을의 가운데에 있는데, 경주(慶州)만 오직 베푸는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전을 탕감해 주고, 새 환곡을 헤아려 감해 줌을 일체 거행하도록 하라. 문(文)과 무(武)에 대하여 똑같이 경사스러워하는 뜻을 보여야 하겠지만, 근본은 나라의 안녕(安寧)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경중의 시민과 공인에게는 오래된 유재와 요역을 최근 전례에 의거하여 탕감하라. 그리고 경외(京外)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경사를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조경묘의 수복(守僕)과 금화군(禁火軍)은 마땅히 경기전(慶基殿)의 예에 의거하여 차정(差定)해야 하는데, 이 전(殿)의 수복과 금화군은 명수(名數)가 이미 많고 묘와 전이 서로 연접(連接)하였으며, 또 제향(祭享)이 똑같지 않으니, 본전(本殿)의 수복 등으로 하여금 겸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경기전 참봉은 이미 감영(監營)에서 전최(殿最)431) 하였으니, 묘의 참봉도 마땅히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예조 참판 정존겸(鄭存謙)이 말하기를,
"일전에 있었던 감귤(柑橘)은 한결같이 태실(太室)의 예에 의거하여 원진상(元進上) 가운데에서 내려 보내어 천신(薦新)432) 하도록 하교하셨는데, 무릇 종묘(宗廟)에 천신할 때에는 봉상시의 관원이 으레 배진(陪進)하였으니, 지금 조경묘(肇慶廟)에 천신할 감귤 또한 봉상시로 하여금 따라가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의(忠義)로 하여금 배진하게 함이 옳겠다."
하였다.
강화(江華)의 군병을 모아 점열(點閱)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유수 유언민(兪彦民)이 장계(狀啓)하기를,
"본부는 군병들이 여러 섬에 흩어져 있으므로, 양식을 싸 가지고 멀리 나아가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본부에서 군병을 점열하는 것은 각 고을의 관문(官門)에서 군사를 모아 점열하는 것과 다름이 있으니, 청컨대 정침(停寢)하소서."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고경명(高敬命)의 일에 대해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였는데, 김치인이 말하기를,
"절의(節義)와 훈로(勳勞)는 다름이 있으니, 전부터 훈로에 대해서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허락하였으나 절의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신(先臣)이 일찍이 고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부조지전을 청하였었는데, 이것은 고 상신이 종계(宗系)와 임진란(壬辰亂)에 대해 크게 훈로가 있었지만, 혼자 책훈(策勳)에 누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는 말하기를,
"고경명은 절의가 탁연(卓然)하였습니다. 송상현(宋象賢)은 이미 순절(殉節)로 부조지전을 허락하였으니, 이제 고경명에 대해서도 똑같이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영상이 아뢴 바는 진실로 근거할 것이 있으니, 고경명의 충절(忠節)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에 비추어 송상현에 밑돌지 않습니다. 송상현에게는 이미 부조지전을 허락하였는데, 오직 고경명에 대해서만 어떻게 이것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송상현의 전례를 상고하여 등대(登對)할 때 아뢰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조경묘(肇慶廟)의 제전(祭典)은 한결같이 이번에 정식(定式)한 것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제물(祭物) 또한 경기전(慶基殿)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한 다음 기록하여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3일 기유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은 조헌(趙憲)·송상현(宋象賢)의 예에 의거하여 부조지전(不祧之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예조 당상이 상고하여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후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국전(國典)에는 오직 훈신(勳臣)에 대해서만 부조지전을 허락하고 있는데, 이제 구별함이 없이 한결같이 시행한다면, 법(法)을 제정한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성명(成命)을 특별히 정침(停寢)하였다.
이조 참판 이휘지(李徽之)가 왕명을 받들어 전주(全州)에 가기 때문에,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고, 예조 참판 정존겸(鄭存謙)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선왕께서는 음(陰)을 억제하고 양(陽)을 부지하신 것이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 건도(乾道)가 해에 의해 순환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만약 3일만 자면 일양(一陽)이 장차 아래에서 회복될 것이니, 인군(人君)이 천하에 임하여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을 어떻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오늘날의 세계(世界)를 보건대, 일양(一陽)이 비록 회복된다 하더라도 만민(萬民)은 더욱 곤궁해질 것이니, 생각이 오로지 이에 미치면 음식이 어찌 달겠으며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임금이 비록 부덕(不德)하더라도 뭇 신하들은 마땅히 힘써 할 것이니, 이는 바로 군신(君臣)이 협심(協心)해서 인도하여 맞이할 시기인 것이다. 아! 팔도의 방백(方伯)과 양도(兩都)의 유수와 3백 60주의 수령들은 장년(壯年)이므로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하지 않을지언정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동자(董子)가 말하기를, ‘스스로 마음을 바로잡으면 만민(萬民)을 바로잡는 데 이른다.’ 하였는데,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가리킨 것이다. 내가 본래 부덕(不德)하여 이미 조정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또한 어떻게 백관을 바로잡고 만민을 바로잡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그 바람은 깊다. 아! 대소 신공(大小臣工)들은 나의 이러한 뜻을 헤아려 서로 이르기를, ‘양기(陽氣)가 이미 회복되었으니, 많은 음기가 소멸되어 많은 사람들이 양기와 더불어 회복될 수 있겠는가?’ 하고, 항상 부지런히 힘쓸 것을 생각하여 자나깨나 게을리 하지 않고, 비록 중도에 맞지 않더라도 멀지 않기를 바라며 이러한 마음으로 그 임금을 돕고 그 백성을 돌아본다면, 그것도 또한 생각이 반을 넘는 것이다. 내가 지나간 해에 애휼하던 백성들이 모두 양기에 회복되어 함께 춘대(春臺)·수역(壽域)의 가운데에 나아간다면, 내가 훗날 배주(拜奏)할 때 세신(世臣)에게 말하지 못한 언교(言敎)가 있게 될 것이니, 모두 모름지기 복응(服膺)하라는 일에 대해 하유(下諭)하는 한 사항을 써서 정부(政府)에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와 정릉(靖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공인(貢人)·시인(市人)을 소견한 다음, 각 시전(市廛)의 옛날에 남아 있던 미납(未納)된 것을 탕감해 주게 하였다.
11월 15일 신해
예조 참판 이휘지(李徽之)가 아뢴 바로 인하여 조경묘(肇慶廟)의 삭제(朔祭)·망제(望祭)의 분향(焚香)을 경기전(慶基殿)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열읍(列邑)에 명하여 증렬미(拯劣米)의 가장 오래 된 조(條)를 일체 탕감(蕩減)하게 하였다.
11월 16일 임자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군호(軍號)가 ‘효장(孝章)’ 자와 음이 똑같다 하여 특별히 해당 당상을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저 군호(軍號)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단지 야간 순찰의 암호(暗號)를 위한 것으로서, 이전에는 당상이 생각한 것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부(可否)를 논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 성상께서 특별히 신칙(申飭)을 더하여 반드시 은연중에 비친 뜻을 취하여 더러 상벌(賞罰)이 뜻밖에서 나오니, 여러 가지로 기휘(忌諱)하였다. 그리고 매번 써서 낼 때가 되면 병조 당상이 매우 괴로워하며 상량(商量)하였으니, 이미 고례(古例)가 아니었다. 더욱이 군상(君上)의 표명하는 덕의(德意)가 외정(外廷)에서 들어 알던 바가 아니었는데, 이제 글자의 음이 우연히 똑같다 하여 칙교(飭敎)를 내리기에 이르니, 날마다 써서 바치는 글자가 거의 궁박(窮迫)해지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02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대저 군호(軍號)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단지 야간 순찰의 암호(暗號)를 위한 것으로서, 이전에는 당상이 생각한 것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부(可否)를 논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 성상께서 특별히 신칙(申飭)을 더하여 반드시 은연중에 비친 뜻을 취하여 더러 상벌(賞罰)이 뜻밖에서 나오니, 여러 가지로 기휘(忌諱)하였다. 그리고 매번 써서 낼 때가 되면 병조 당상이 매우 괴로워하며 상량(商量)하였으니, 이미 고례(古例)가 아니었다. 더욱이 군상(君上)의 표명하는 덕의(德意)가 외정(外廷)에서 들어 알던 바가 아니었는데, 이제 글자의 음이 우연히 똑같다 하여 칙교(飭敎)를 내리기에 이르니, 날마다 써서 바치는 글자가 거의 궁박(窮迫)해지게 되었다."
임금이 양기(陽氣)가 회복되었는데도 전과 같이 천둥의 이변이 있는 것은 진실로 부덕(否德)함으로 말미암았다 하여 6일 동안 감선(減膳)하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동지제(冬至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는데 한 남자가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사람 살려!"
하였으므로, 임금이 묶어서 사문(査問)하게 하였더니, 바로 내포고(內圃庫)의 고자(庫子)로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당폐(堂陛)433) 가 엄중하지 못하다. 지난번에는 전정(殿庭)에서 등문(登聞)하였는데, 이제 가마 옆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으니, 옛날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본 사건은 시비(是非)를 논할 것도 없이 뒷날의 폐단을 징계하는 방도에 있어서 엄중하게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다. 해청(該廳)에서 곤장을 때리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계축
하교하기를,
"일양(一陽)이 이미 회복된 아래에서도 소민(小民)들은 어찌하여 향리(鄕里)에서 곤궁한 것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전(廈氈)434) 또한 추워진다. 북도(北道)에 지의(紙衣)435) 를 하송(下送)하는 일의 여부(與否)를 비국(備局)에 묻도록 하고,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파수군(把守軍)에게 면포(綿布)를 잘 헤아려 지급한 후에 계문(啓聞)하게 하라. 날씨가 이와 같이 추워졌으니, 전주(全州)의 역민(役民)에게 본도로 하여금 수시로 죽을 끓여 먹이게 하고, 종루(鐘樓) 근방의 걸인(乞人)들을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찾아보고 죽을 끓여서 먹인 후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이수일(李秀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백성에 대한 근심과 정사(政事)의 폐단을 두루 거론하기는 어렵겠지만, 우선 성상께서 정령(政令)을 시행하고 조치하는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동가(動駕)가 너무 빈번한데 여(輿)의 시위(侍衛)가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동작에 신중한 방도가 부족하셔서 위노(威怒)를 매번 갑자기 내시며 사교(辭敎)가 번다(繁多)하시고, 조상(朝象)이 바쁘신 후에는 착오가 있어서 상전(賞典)은 사람을 권장(勸奬)하는 까닭인데 은수(恩數)의 절도가 없고, 관직(官職)은 성효(成效)를 요구하는 까닭인데 쉽게 체차(遞差)하여 일정하지 못합니다. 무릇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어떻게 감히 오늘날의 재변(災變)에 부회(傅會)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알맞게 조화시켜 위육(位育)하는 공효(功效)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권면한 것은 마땅히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신응삼(辛應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 진언(進言)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염방(廉防)이 날로 무너진다는 것으로써 말하려 하는데, 신은 사부(士夫)가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하께서 신하들을 예우하여 부리는 도리가 미진(未盡)한 데 인연하였다고 말하겠습니다. 조용(調用)이 날로 확대되어 적신지탄(積薪之歎)436) 이 있어서, 열조(列朝)의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과목(科目)인데 홍패(紅牌)를 차지한 것은 헛되어 늙은 자들이 많고, 성세(聖世)에서 경계하는 것은 요행(僥倖)을 바라는 마음인데 경험 없는 연소한 무리는 간진(干進)하는 자들이 많으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무엇으로 두절(杜絶)하고, 관방(官方)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맑게 하겠습니까? 재화(財貨)와 포백(布帛)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은사(恩賜)하는 즈음에 용도(用度)가 더러 확대되니, 신은 우리 전하께서 대포(大布)의 검소함이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한다는 것에 부족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것은 마땅히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교리 이명빈(李命彬) 등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살펴보건대, 근일에 노동(勞動)이 너무 번거롭고 사령(辭令)이 더러 지나치십니다. 재용(財用)은 한정없이 쓰는 것을 경계함이 마땅한데, 점점 줄어서 없어져 매번 절도가 없음을 근심하고, 명기(名器)는 빈소(嚬笑)437) 를 아껴야 마땅한데 너무 외람됨을 면하지 못하고, 분수에 지나친 사치는 이것을 경계하였으나 검소를 숭상하는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조경(躁競)에 대해 비록 신칙하였으나 마음속에 잡념이나 망상을 품지 않는 풍도(風度)를 지킴이 전혀 없고, 재상(宰相)은 일컬을 만한 염약(恬約)이 없고, 수령은 탐도(貪號)한 습관이 많습니다. 아랫사람들에 대한 인사(人事)의 과실이 이와 같으니, 윗사람에 대한 천상(天象)의 감응이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1월 18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전주(全州)의 위봉 별장(威鳳別將)은 매우 사납고 박하여 경군문(京軍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람들이 모두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 벼슬자리를 완영(完營)438) 에 소속시키고 무릇 군문에 관계된 자들에게는 도신이 과장(科場)을 설시(設施)하여 시취(試取)하되, 우등(優等)한 자 3인을 한결같이 시수(矢數)로써 삼망(三望)439) 을 비의(備擬)440) 하여 올려 보내 해조(該曹)에서 입계(入啓)하여 수점(受點)하는 것으로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는다면, 위열(慰悅)하고 권장할 수 있을 것이니, 진실로 양쪽이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기백(畿伯)이 아뢴 살옥(殺獄)에 대한 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후 저자 거리에서 씨름하며 치고 때리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살인(殺人)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그 관사(官司)에서 엄중히 장(杖) 1백 대를 때리도록 하라. 일찍이 듣건대 평양(平壤)에서는 상원일(上元日)441) 에 석전(石戰)을 벌인다고 하니, 장(杖)으로 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더욱이 돌멩이이겠는가? 관서에 분부해서 일체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경중(京中)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에 벌이는 석전을 포청에 분부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종중결곤(從重決棍)하게 하라."
하였다.
이수봉(李壽鳳)을 승지로 삼았다.
특별히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보임하고, 3일 길을 하루에 걸어 부임하게 하였다. 당시에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박상덕이 시애(撕捱)한 채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판서로, 조명정(趙明鼎)을 우참찬으로, 김치양(金致讓)을 대사성으로, 이언형(李彦衡)을 호조 참판으로, 송영(宋鍈)을 집의로, 원계영(元啓英)·김서응(金瑞應)을 장령으로, 이복휘(李福徽)·정범조(丁範祖)를 지평으로, 이득일(李得一)을 보덕으로, 서명응(徐命膺)을 지경연으로, 유진하(柳鎭夏)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11월 20일 병진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왕자대군·대신·옥당의 차자(箚子) 외에는 진차(陳箚)할 수 없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신(憲臣)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진계(陳戒)하면서 상소하지 않고 차자(箚子)를 올렸었는데, 이는 고례(故例)가 아니었으므로 이미 당상의 비답에 유시하였다고 배척하였으나, 집의 송영(宋鍈)이 또 이것을 말한 까닭에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병조 판서 조엄(趙曮)을 이조 판서로, 윤동섬(尹東暹)을 병조 판서로, 김양심(金養心)을 장령으로, 이득화(李得華)를 지평으로, 이시정(李蓍廷)을 사간으로, 이세석(李世奭)을 헌납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기미
당시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찬(修撰)하도록 명하였는데, 종부시 제조 이창수(李昌壽)가 《선원보략》의 발문(跋文)에 추탈(追奪)442)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것이 있다 하여 산삭(刪削)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령 김서응(金瑞應)이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기를,
"나라의 경사가 전에 없던 것으로서, 보첩(譜牒)에 첨삭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단지 삼가 생각하건대 추탈한 죄인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발문(跋文)이 아직 편록(編錄) 가운데 있는데, 추탈한 관직은 비록 사가(私家)의 문자라 하나, 감히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극히 존숭하고 공경해야 할 보첩에 옛날 그대로 쓰는 것은 사면(事面)을 존숭하는 뜻이 아닐 듯하니, 산거(刪去)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해연(駭然)한 데 관계된다. 막중한 보첩(譜牒)에 있어서 그 발문이 어떻게 지나간 해의 지문(誌文)443) 과 다르다고 개찬(改撰)하라는 청을 감히 청할 수 있는가? 빨리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조태억이 지은 발문이 곧 어떤 시사(時事)인데, 어떻게 감히 오늘날 입을 열어 헐뜯을 수 있는가? 삭직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전 장령 김서응을 북청부(北靑府)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초(國初)의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창덕궁(昌德宮)의 진선문(進善門)과 시어소(時御所)의 건명문(建明門) 남쪽에 신문고(申聞鼓)444) 를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구법(舊法)을 회복한 후에는 차비(差備)를 물론하고 길에서 바라를 치는 자는 비록 사건사(四件事)445) 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장(杖)을 때리고, 비록 신문고(申聞鼓)를 쳤다 할지라도 사건사에 관계되지 않는 자는 호남의 연해에 충군(充軍)시키도록 하라. 만약 사건사가 아니면 형추(刑推)하여 정배하는 일을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신문고의 전면과 후면에 ‘신문고(申聞鼓)’라고 세 글자를 써서 우부 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이창수(李昌壽)에게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그 글은 사체(事體)가 어떠한 것인가? 또 우리 황형(皇兄) 때 찬술한 것인데, 그 마음을 구명해 보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근본을 물어 보면 이창수이다."
하고,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24일 경신
임금이 약방의 입진을 허락하지 않으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등이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당초에 김서응(金瑞應)을 통청(通淸)한 전관(銓官)에 대해 그 당시의 전관을 조사해서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곧 홍인한(洪麟漢)이라 하니, 내버려 두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땅에 부복(俯伏)하자 김치인 등이 환궁하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봉안(奉安)하였으나 세운 공(功)을 알지 못하겠으니, 지금부터 명일(明日)까지 마땅히 누워서 옛집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하고, 이어서 교정청 당상 해운군(海運君) 이연(李炟), 판서 조운규(趙雲逵) 및 낭청에게 아울러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다.
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김낙수(金樂洙)를 사간으로 삼았다.
신문고(申聞鼓)를 친 사람을 정례에 따라 형추(刑推)하라는 명을 제외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미 신문고를 설치하고 비록 관계에 따라 형추하게 하였으나, 이것은 반드시 국초(國初)에 없던 것으로서 신문고를 설치한 뜻이 아니다. 이후로 만약 신문고를 울린 자가 있으면 병조에서는 어떤 사람이 신문고를 울렸는지 해조(該曹)에 내려서 추문(推問)하게 한 다음 아뢰되, 해조와 해부(該府)를 물론하고 아울러 전일의 관례에 따라 형추하게 한 것을 제외하고, 곧바로 초기(草記)446) 하여 정식(定式)에 의거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헌서 재자관(時憲書齎咨官)이 비국에 보고한 수본(手本)에 ‘호남에서 표류한 백성 18명이 절강성(浙江省)에 도착하였는데, 한 사람이 물고(物故)되었다’고 하였는데, 듣고 보니 매우 참혹하여 그 사람의 처노(妻孥)가 바다를 바라보는 실상을 마치 보는 듯하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고, 그 나머지 살아서 돌아오는 자들도 또한 본군(本郡)에서 그 처노에게 먼저 알려 주게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임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묘전(廟殿)은 체모가 중대하니, 탁지(度支)447) 로 하여금 누기(漏器) 3좌(坐)와 소일영(小日影) 3건(件)을 제조해서 전주(全州)와 영흥(永興)에 보내게 하고, 강화(江華)의 제향(祭享) 때에는 이로써 날짜와 일을 정하는 것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날이 곧 조경묘(肇慶廟)에 봉안하고 제사를 행하는 날인 때문이었다. 임금이 한밤중에 동쪽 월대에 나아가 수시간 동안 부복(俯伏)하였다.
11월 27일 계해
하교하기를,
"용호영(龍虎營)의 도시(都試)448) 를 오랫동안 폐지한 것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매번 개탄(慨歎)하였는데, 나도 또한 평일에 애휼(愛恤)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거조(擧措)는 몹시 해괴하게 여길 만하니,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마땅히 모화관(慕華館)에 전좌(殿座)할 것이니, 대군(大軍)·중군(中軍)은 용호장(龍虎將)을 거느리고 대령(待令)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전주(全州)의 장계(狀啓)가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금군(禁軍)에게 명하여 탐지해 오도록 명하였는데, 금군이 중간에 병이 들어 늦게서야 비로소 돌아오니, 임금이 노하여 곧 모화관에 거둥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신시(申時)에 모화관에 나아가 병조 이하에게 군례(軍禮)를 받았다.
11월 28일 갑자
사헌부 【지평 이득화(李得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격고(擊鼓)한 사람 조대(趙垈)는 조동하(趙東夏)의 아들로서 방자하게 격고하였는데, 만약 엄중히 징치하지 않는다면 불법한 행동을 함부로 하는 무엄(無嚴)한 무리가 뒤를 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청컨대 조대(趙岱)를 변원 정배(邊遠定配)하고, 그 공사(供辭)는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9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30일 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정조제(正朝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감귤을 나누어 주고 선비들에게 시험 보인 다음, 진사 심상운(沈翔雲) 등 5인을 뽑았는데, 심상운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하게 하였다.
제주(濟州)의 감귤을 바친 공인(貢人) 등을 소견하고, 선혜청으로 하여금 쌀을 주어 내려 보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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