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묘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문신에게 제술(製述)을 행하였다.
12월 2일 무진
경기 유생 이연(李衍)이 상소하여 시조 신라 사공(新羅司空) 이하 16대에게 제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제왕(帝王)의 보본(報本)은 본래 상략(詳略)이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12월 3일 기사
유학(幼學) 이희장(李熙章)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장군공(將軍公) 이상 17대의 묘소는 연대가 오래 되어 지금 경험할 만한 것이 없으나, 오직 장군공의 조역(兆域)이 삼척(三陟) 노지동(蘆池洞)에 있다고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국가의 선묘(先墓)라고 여기면서 아직도 봉축(封築)하고 쇄소(灑掃)한 전례(典禮)가 없었으니, 천리(天理)로 헤아려 보고 인정으로 참고해 보건대, 몹시 미안(未安)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주(全州)에 묘우(廟宇)를 세우는 예(禮)는 진실로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하는 효도(孝道)에서 나왔으니, 삼척에서 향사(享祀)하는 예(禮)도 또한 다음 차례의 일일 따름입니다. 청컨대 빨리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속히 욕의(縟儀)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이희장(李熙章)의 소장을 읽게 하고, 이어서 불러들이게 한 다음 하교하기를,
"노지동(蘆池洞)은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부사직 홍명한(洪名漢)이 말하기를,
"유생의 말은 잘못입니다. 신도 또한 보았는데, 노지(蘆池)에서 모란봉(牧丹峰)은 서로 거리가 1백여 리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응당 그곳을 보았다면 그 산형(山形)에 용과 호랑이의 모습이 있던가?"
하였는데, 이희장이 말하기를,
"산세(山勢)가 서로 껴안은 듯하여 물이 흐를 수가 없었고, 산허리에 굴이 뚫린 것이 남대문(南大門)보다 컸습니다."
하자, 홍명한이 말하기를,
"그 말은 그릅니다. 모란봉은 노지동에 있지 않으니, 이것은 유생이 반드시 황지(黃池)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부터 이러한 청이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지나간 해에 봉학주(奉鶴柱)가 청했던 곳이 곧 노동(蘆洞)이고, 지금 네가 본 곳은 곧 황지인데, 마음이 비록 만 배나 간절하지만 형편상 가볍게 행하기가 어렵다. 이미 경과(慶科)를 거쳤고, 또 감제(柑製)가 있었는데, 마음을 이에 두지 않고 먼길을 걸어와서 상소하였으니, 진실로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이 희장·이희충(李熙忠)에게 특별히 《서전(書傳)》·《시전(詩傳)》을 언해(諺解)를 갖추어 각각 1부(部)씩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4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숭릉(崇陵)449) 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특별히 윤득양(尹得養)을 도승지에 제수하였다.
12월 6일 임신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이명식(李命植)을 대사간으로, 윤동승(尹東昇)을 우윤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집의로, 이진형(李鎭衡)을 필선으로, 이춘보(李春輔)를 사서로, 송환억(宋煥億)을 설서로 삼았다.
12월 7일 계유
임금이 유신을 불러 《수덕신편(樹德新編)》을 가져다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이 편을 읽도록 명한 것 또한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로 인하여 개탄하는 마음이 있는데, 과혼(過婚)450) ·과장(過葬)451) 은 사복(嗣服)한 후 부지런히 신칙한 것이었는데, 지금 송상(宋相) 조변(趙抃)의 일은 우연히 나의 뜻에 일치한다. 그는 하나의 상국(相國)에 지나지 않았으나, 벼슬살이 할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오히려 또 이와 같았는데, 더욱이 백성들에게 군림(君臨)한 자이겠는가? 만약 수십 일이 지나면 삼양(三陽)이 회복되어 태평해지고 세월은 봄을 알릴 것인데, 미처 장사지내지 못하고 혼인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경외(京外)에 신칙해서 유념하여 돌보아 도와 주게 하라. 과혼(過婚)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빈부(貧富)가 본래 똑같지 않으므로 옛날에는 가시나무 비녀와 무명 치마가 있으면, 어찌 자장(資粧)이 있고 없는 것에 구애받았는가? 혼인을 권하여 성사된 자는 경외로 하여금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청근 현주(淸瑾縣主)의 길례(吉禮)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봄이 된 후에 날을 가리게 함으로써 내가 몸소 솔선하여 인도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판돈녕부사 이익정(李益炡)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성덕(盛德)은 당요(唐堯)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 역사에서는 그 덕을 일컬어 구족(九族)을 친애(親愛)함이 앞섰다고 하였습니다. 이윤(伊尹)이 임금에게 교훈할 때 제일 먼저 말하기를, ‘사람을 세우되 집안 사람부터 하소서.’ 하였습니다. 일찍이 을축년452) 에 전하께서는 종영(宗英)이 영체(零替)한 데 생각이 미치시자, 사지(辭旨)가 측달(惻怛)하셨으므로, 지금까지 장송(莊誦)하며 종친(宗親)을 돌보아 주시는 성덕을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아! 지금 별자(別子)의 종통(宗統)을 이어온 것이 합쳐서 90여 가(家)가 되는데, 바야흐로 종직(宗職)을 띠고 있는 사람과 약간의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사람 외에는 대부분 몰락하여 평민과 다름이 없어서 간혹 군적(軍籍)에 편입되어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향리(鄕里)의 업신여김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후손이 불초(不肖)하여 자초(自招)한 것으로 말미암았다 하나 또한 조가(朝家)에서 애초에 정한 제도가 없었던 데 인연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아 오며 보조(寶祚)가 바야흐로 융성하지만, 조종(祖宗)의 지서(支庶)가 갑자기 영체한 데 이르러 종친(宗親)의 반행(班行)이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한심하게 여길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우리 전하께서 융성한 예로 태어나신 근본에 보답하여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봉안하시는 예를 특별히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거행하셨으니, 구구하게 흠송(欽頌)하는 정성이 다른 사람의 갑절이 될 것입니다. 삼가 고훈(古訓)을 끌어대어 근거를 삼고 시의(時宜)를 참작해서 행할 만한 6조(六條)를 기록해서 차자에 따라 바칩니다."
하였는데, 첫째 종법(宗法)을 세우고, 둘째 보계(譜系)를 밝히고, 셋째 교회(敎誨)를 삼가고, 넷째 선거(選擧)를 공정하게 하고, 다섯째 회례(會禮)를 강(講)하고, 여섯째 규금(糾禁)을 엄중하게 하라는 등 그 지목한 것이 거의 수천 마디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이익정을 소견하고 우악하게 비답하였으나, 그 가운데 더러 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9일 을해
운관(芸館)453) 에 명하여 어제(御製) 《수덕(樹德)》 전편을 간행하여 바치게 하였었는데, 책이 완성되자 인쇄를 감독한 낭관 이갑(李𡊠)을 준직 승서(準職陞敍)하게 하고, 운관의 낭청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12월 10일 병자
임금이 기로 당상(耆老堂上)을 불러 친히 기로의 전최(殿最)를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 심수(沈肅)가 공도회(公都會)454) 때 제술(製述)과 고강(考講)의 액수(額數)가 고르지 않다 하여 변통하고자 합니다. 일찍이 관동(關東)과 해서(海西)에는 이미 허락한 전례가 있으니, 청컨대 청한 바에 의거하여 강경(講經) 3과(窠)가운데 1과를 제술에 옮겨 붙여 시(詩)·부(賦)·강(講)에서 각각 두 사람씩 뽑아 고루 배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이행원(李行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적소(謫所)에 있었을 때 들었는데, 함안 군수(咸安郡守) 전태상(田泰祥)은 한낱 작은 일로 인하여 포민(浦民)에게 무거운 장형(杖刑)을 3일 동안 4인에게 나란히 베풀도록 명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들은 것도 또한 매우 떠들썩하였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여 형벌을 신중하게 시행하시는 덕의(德意)가 어떠한데, 자목(字牧)이 된 자가 조금도 우러러 본받지 않은 채 외람되게도 혹독한 형벌이 이에 이르렀으니, 엄히 핵실하여 무겁게 죄를 다스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태상을 잡아다 추문해서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노진(金魯鎭)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11일 정축
홍명한(洪名漢)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조준(趙㻐)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12월 12일 무인
특별히 양주 목사(楊州牧使) 민백순(閔百順)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청근 현주(淸瑾縣主)의 집을 수리하되, 치대(侈大)하게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현주가 나이가 차서 장차 저택에 나아가 길례(吉禮)를 행하기 때문이었다.
12월 14일 경진
민백흥(閔百興)을 형조 참판으로, 조중회(趙重晦)를 우윤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였는데, 효순빈(孝純嬪)455) 의 초도일(初度日)456) 인 때문이었다.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특별히 윤동승(尹東昇)을 도승지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신이 어장(御將)457) 장지항(張志恒)을 폄좌(貶坐)하고 체모를 잃은 일에 대해 과실을 기록하였더니, 이로써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였습니다. 또 신의 배리(陪吏)에게 곤장을 때렸으니, 신의 유연(柔軟)함은 이미 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건명문(建明門)에 마땅히 전좌(殿座)할 것이니, 장지항은 과실을 기록하여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건명문에 나아가 장지항을 잡아들이게 하고, 하문하기를,
"막중한 전최(殿最)에 늦게 도착한 것은 무슨 일인가? 군문(軍門)의 체통이 어떠한데, 대신의 배리(陪吏)에게 임의로 스스로 곤장을 때린단 말인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비록 제태(除汰)458) 하였으나, 애초에 곤장을 때리지는 않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제거가 전최할 때 지영(祗迎)하지 않았고, 차대에 또 참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황송(惶悚)하게 여김이 마땅할 것인데, 감히 소장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인하여 장지항을 영종진(永宗鎭)에 충군(充軍)시키도록 명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12월 19일 을유
임금이 어의궁(於義宮)에 나아갔다. 향교동주(鄕校洞主)의 집에 두루 임어(臨御)하였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하였다.
12월 21일 정해
이해중(李海重)을 이조 참의로, 정상인(鄭象仁)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예조 판서로, 김한기(金漢耆)를 예조 참판으로, 김화중(金和重)을 집의로, 이중해(李重海)를 장령으로, 신광집(申光緝)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22일 무자
임금이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을 좌윤으로, 최동악(崔東岳)을 경상 좌병사로, 이응혁(李應爀)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조엄(趙曮), 병조 판서 윤동섬(尹東暹)의 정사(政事)였다. 특별히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24일 경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명숙(李命宿)의 종이 격고(擊鼓)한 일에 대해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등이 대답하기를,
"종으로서 주인을 〈위하여〉 송사한 것은 사리(事理)가 당연한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이명숙의 종이 신문고를 침으로 인하여 비록 시행하지 말게 하였으나, 같은 때의 세 사람과 이명숙이 어떻게 누락되었을까 생각하여 《설원록(雪冤錄)》을 가져다 읽어 보고 이 일을 깨닫게 되었다. 1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심스럽고 어두운 일이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금할 수 있겠는가? 더욱 개연(慨然)하게 여겨야 할 것은 입시한 대신들이 본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재산을 다툰 것을 처분한 일로 생각하였다 하니, 아! 나라에 비록 법이 없다 하더라도 저 이명숙이 낱낱이 승복하여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로잡았으면, 지금 와서 그 처(妻)가 어떻게 감히 종으로 하여금 임금을 속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명숙의 처를 만약 논하지 말게 한다면, 임오년459) 에 간신히 엄중하게 조사했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진도군(珍島郡)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아! 그 임금을 이미 《설원록》에 기록하였고, 또 언석(諺釋)하여 반포하였는데, 1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와 같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뢴 바가 해연(駭然)하니, 입시했던 세 상신은 모두 상직(相職)을 해면(解免)하여 군강(君綱)을 엄중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5일 신묘
하교하기를,
"이명숙(李命宿)의 일은 내가 비록 처분(處分)하였으나, 오히려 어렴풋하다. 《설원록(雪冤錄)》을 읽도록 명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권처(權妻)가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세 상신은 단지 방외(方外)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다는 말만 듣고 본 사건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러했던 것이다."
하고, 아울러 상직(相職)을 다시 제배(除拜)하도록 명한 다음, 사관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이명숙(李命宿)의 초명(初名)은 ‘명숙(命肅)’이었는데, 임금이 숙묘(肅廟)의 묘호(廟號)와 글자가 똑같기 때문에 특별히 고치도록 명했던 것이다. 이명숙의 종질부(從姪婦)는 곧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의 손녀로서, 젊은 나이에 청상 과부로 살면서 집안이 자못 부요(富饒)하였다. 그런데 이명숙이 더러운 행실이 있다고 하며 핍박해 죽여서 그 양자(養子)를 파하고, 그 아들을 대신 세우게 하였다. 과부[孀婦]의 처음 양자였던 10세 된 이름이 이경룡(李景龍)이라는 아이가 이에 상경(上京)하여 격고(擊鼓)하자, 임금이 이를 듣고는 진노(震怒)하여 금부(禁府)로 하여금 추핵(推覈)하게 하고, 임금이 이명숙이 이 일을 구무(構誣)하였다 하여 정법(正法)하도록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처가 종으로 하여금 격고하게 한 것이었다.
신문고(申聞鼓)를 철거하도록 명했다가, 곧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신문고를 설치한 후 오래 된 일에 대해서도 대부분 격고할 마음을 먹고 한갓 남잡(濫雜)한 일만 아뢴다 하여 철거하도록 명했다가 곧 정침(停寢)한 것이었다.
이명숙(李命宿)의 처에 대해 처분했던 명을 정침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그가 비록 무상(無狀)하지만 처음에는 유인(孺人)이었는데, 지금 모년(暮年)에 어떻게 이 길을 열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2월 27일 계사
하교하기를,
"세율(歲律)이 장차 저물어 3일 후에는 신정(新正)이 된다. 50년 동안 임어(臨御)하였고, 또 나이 팔순이 되었지만, 그 무엇을 계지(繼志)하고 그 무엇을 술사(述事)하였는가? 지금 나에게 있어서 다른 하나는 옛날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는 백성을 위하는 것인데, 납향(臘享)460) 전에 눈이 내렸으니, 풍년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도에서는 또 장차 창고를 봉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편히 쉬게 하라. 그리고 경중(京中)에서는 새해가 되기 전 3일 동안과 새해 후 3일 동안 모두 장패(藏牌)461) 해서 나의 모년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이로써 경외(京外)에 하유(下諭)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힘껏 음악을 써서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자, 하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이 이와 같이 할 줄 나도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상신(相臣)이 아뢴 그 뜻은 옳다. 비록 장악(藏樂)하는 가운데 있으나, 지난번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받던 날에도 또한 이를 허락하되, 고취(鼓吹)하지 못하게 한 것은 진실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었다. 이번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운 후 처음 절하는 것인데, 나는 하례(賀禮)를 받으면서 어떻게 경사를 보답하는 일이 없겠는가? 원조(元朝)에 기축년462) 의 예에 의거하여 단지 동구(洞口)에서만 음악을 연주하고, 돌아올 때에는 경복 동구(景福洞口)에서 음악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9일 을미
하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 풍류(風流)의 기상은 지금까지 칭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여러 신하들을 위해 축년(祝年)하는 것이다. 내후년에 마땅히 기사(耆社)463) 에 들어갈 사람들은 기사로 하여금 문관·무관의 권지(權知)의 예에 의거하여 명년 봄에 기사청 벽에 이름을 쓰게 하라."
하였다.
12월 30일 병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각 능전(陵殿)의 정조제(正朝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이해에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는데, 오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8천 4백 97이고, 인구는 19만 6천 2백 19이었다. 【남자는 9만 5천 1백 35구(口)이고, 여자는 10만 1천 84구이었다.】 팔도의 원호는 1백 65만 5백 49이고, 인구는 6백 82만 1백 51이었다. 【남자는 3백 28만 9천 69구이고, 여자는 3백 53만 1천 91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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