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태학(太學)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의 거조(擧措)는 정대(正大)하게 해야 마땅하니, 이번 달은 곧 음악을 회복해야 하는 달이다. 모레는 마땅히 정문에서 조참(朝參)할 것이니, 이를 의조(儀曹)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최중(李最中)을 직산현(稷山縣)에 투비(投畀)하도록 명했다가 곧 도로 정침(停寢)하고,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후세(後世)에 만약 다시 남유용(南有容)이 있어서 장차 조선의 사기(史記)를 찬집한다면 반드시 그 강(綱)에 특별히 쓰기를, ‘총재(冢宰)를 찬배(竄配)하였다.’고 할 것이다. 아! 이제 모년(暮年)에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마는, 그 사람은 비록 근거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벼슬이 주관(周官)의 총재이니, 특별히 투비하도록 한 명을 정침한다. 개정(開政)하였을 때 진실로 시애(撕捱)할 것이 있었으면 정사를 마친 후 대신(臺臣)이 어제 날이 저물어 추후에 소장을 올린 것처럼 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 불가(不可)하기에 이러한 거조를 한단 말인가? 이미 특별히 정침하겠다고 하였으면 태연하게 여김이 마땅할 것이다. 십분 말감(末勘)해서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일 정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이어 월대에 나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을 시취(試取)하여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에게 아울러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승지로 삼았다.
이명빈(李命彬)을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2월 3일 무진
장령 홍구서(洪九瑞)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근일의 신충(宸衷)065) 을 엿보건대, 조금이라도 촉격(觸激)하는 일이 있으면, 사교(辭敎)가 지나치게 엄중하고 급하여 아랫사람을 접견하실 때 혹 예로 부리는 방도가 부족하시고, 일을 처리하실 때는 중도에서 지나친 데로 감을 면하지 못합니다. 매번 번뇌(煩惱)한 때를 당하시면 성궁(聖躬)을 스스로 가볍게 하심은 생각지 않으시고 여위(輿衛)를 갖추지 않아서 갑작스레 전도(顚倒)되는 탄식이 많습니다. 무릇 죄과(罪過)가 있으면, 마땅히 유사(有司)가 감처(勘處)하도록 맡겨야 할 것인데, 전정(殿庭)에서 친문(親問)하시니, 편안함을 물려 주는 계모(計謨)가 마침내 부족합니다. 대신이 연석에서 주달하는 것은 온 나라에서 똑같이 느끼는 것인데도, 굳게 거절하는 것도 부족하게 여겨 번거롭게 동가(動駕)하시기에 이르렀고, 대각(臺閣)에서 출패(出牌)하는 것이 고례(古例)에는 그러하였으나 칙려(飭勵)하심이 너무 지나쳐 돌려주고 승정원에서 계품(啓稟)하게 하시니, 비록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라 하더라도 감히 힘써 청할 수 없고, 비록 억지로 하기 어려운 정세라 하더라도 스스로 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규모와 기상은 아마도 치세(治世)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 듯한데, 또한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온화하고 태평하여 하늘의 화기(和氣)를 배양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을 행하였다. 임금이 처음으로 음악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선조(先朝)의 고례(古禮)를 좇아 대조회(大朝會)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너무 심하게 떠들썩하다 하여 병조 판서를 추고(推考)하고, 금훤랑(禁喧郞)을 태거(汰去)하게 하였다. 임금이 동반(東班)·서반(西班)으로 뜰에 들어와 시위(侍衛)한 사람들에게 각각 시폐(時弊)를 진달하게 하였는데 교지(敎旨)에 응하여 아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임금이 노하여 모두 문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 일로(一路)는 전정(田政)이 가장 문란합니다. 전 도신도 또한 개량하기를 장청(狀請)하여 처음에는 윤허를 받았었으나, 곧 흉년으로 인하여 아직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전(量田)066) 한 가지 조항은 비록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겠지만, 우선 도신으로 하여금 미처 양전하지 않은 고을을 추려내게 하고, 지방관에게 분부해서 사실에 따라 답험(踏驗)해서 등급을 나누어 결세(結稅)를 정한 다음 성안(成案)을 만들게 한다면, 관리들이 환롱(幻弄)067) 하는 폐단을 거의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068) 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새로 기경(起耕)한 전지(田地)는 3년 동안 면세(免稅)한다는 것이 사목(事目)에 밝게 실려 있으나 수령들은 삼가서 지키지 않고, 관리들은 중간에서 조종하니, 백성들은 법을 믿지 않고 은택(恩澤)은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봄부터 시작하여 구제(舊制)를 거듭 밝혀 백성들에게 기간(起墾)하기를 권장하시되, 특별히 성책(成冊)을 만들어 3년을 한정해서 세금을 견감한다는 약속을 밝게 보이시고 비국으로 하여금 팔도와 양도(兩都)에 분부하여 특별히 신칙해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 수영(黃海水營)은 신설하였기 때문에 미처 우후(虞候)069) 를 설치하지 않은 채 군관(軍官)을 중군(中軍)으로 가칭(假稱)하여 우후의 일을 대신 행하게 하고 있으니, 일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마땅히 다른 수영의 예와 같이 우후를 설치하고, 지금의 중군의 늠료(廩料)와 이졸(吏卒)을 우후에게 이속(移屬)한다면, 아마도 편의(便宜)한 데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과 수신에게 분부하여 상확(商確)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지평 임관주(任觀周)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서쪽에서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재해를 입은 여러 고을에서 절미(折米)를 작전(作錢)하여 대신 받아들이는 폐단이 있으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곡부(穀簿)는 태반이 실상이 없고 비록 이미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속이 빈 껍질이 아니면, 바로 묵은 땅이라고 하며, 족속과 이웃을 침징(侵徵)하여 농기(農器)·솥 따위를 대신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나누어 진휼(賑恤)한다면, 한갓 진휼을 베푼다는 이름만 있을 뿐이니, 청컨대 도신에게 분부하고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먼저 안집(安集)하게 하시고, 마땅히 조금 충실한 고을의 환곡(還穀)을 헤아려 가장 심한 고을로 옮겨 나누어 주게 하시며, 속이 빈 껍질과 기명(器皿)을 대신 받아들인 수령을 적발해서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전조(銓曹)와 각도의 도사(都事)에게 분부해서 시종(侍從)을 각별히 가려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읍재(邑宰)의 장부(臧否)를 상소하여 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장(疏章)을 올리게 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처음 시작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병을 끌어대어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미안(未安)한 하교가 있었다. 그리고 침전(寢殿)으로 돌아온 후 구언(求言)하였는데도 말에 실효(實效)가 없다 하여 탕제(湯劑)를 물리치고 진어(進御)하지 못하게 하며, 여러 공사(公事)를 승정원에 머물게 하였는데, 입시한 대신들이 굳이 간쟁하여 정침함을 얻었다.
2월 4일 기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요팔(李堯八)을 소견하고 특별히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요팔은 호남 사람으로 당시에 나이 85세이었다. 당초에 이요팔이 향해(鄕解)070) 에 뽑혀 상경(上京)하자. 임금이 특별히 음사(蔭仕)를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발탁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니, 대개 노인을 우대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었다.
2월 5일 경오
집의 이태정(李台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3년 동안의 치적(治績)을 고사(考査)하는 것은 우사(虞史)에 보이고, 3년 동안의 정사를 보고하는 것은 《주서(周書)》에 실려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안으로 모든 관직과 밖으로 방백(方伯)·연수(連帥)는 모두 30개월의 제도를 쓰고 있는데, 오직 수재(守宰)만 6년을 한정해서 과만(瓜滿)071) 으로 하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반드시 구임(久任)으로 성효(成效)를 이루려는 뜻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입법한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름진 고을의 좋은 지역은 매번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메마르고 잔폐(殘廢)한 고을은 모두 세력이 없는 무리에게 돌아갑니다. 진실로 세력이 있으면 겨우 삭한(朔限)을 채우고 점점 승천(陞遷)되어 일찍이 과만(瓜滿)을 기다리지 않지만, 진실로 세력이 없으면 허물이 쉽사리 생겨나서 얼마 안되어 체차되고 파직되어 도리어 여러 번 체차되는 데로 돌아가니, 이것이 어찌 벼슬을 위해 사람을 가린다는 뜻이겠습니까? 더욱이 이른바 문과(文窠)는 시종(侍從)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으므로, 오래 되지 않아 내직(內職)에 주의(注擬)받는 까닭에 관리의 직사(職事)에 전념하지 않습니다. 무과(武과)는 오로지 위맹(威猛)을 숭상하여 지나치게 강극(剛克)하며, 음과(蔭窠)는 단지 자격에 따라 대부분 구차하게 보충하므로, 직임은 비록 근심을 나누는 것이라 하나 백성들이 폐해를 많이 받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이제 팔로(八路)의 군현(郡縣)을 3년의 벼슬자리로 정하고, 문관·무관·음관을 융통성 있게 차송(差送)하신다면, 여러 인재들을 아울러 시험해 보는 방도를 잃지 않고, 또한 오늘날 소통시키는 정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이어서 문신으로 하여금 제술(製述)하게 하고, 각사의 낭청 및 내삼청의 관리 중에서 향리(鄕里)에 사는 사람들에게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하게 하였다. 그 말이 대부분 잗단 것들이었으나, 임금이 일례로 우악하게 답하여 땔나무를 베는 나무꾼의 말도 가린다는 뜻을 보였다.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힘껏 진연(進宴)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이시건(李蓍建)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죽산 부사(竹山府使) 강계주(姜啓周)와 흥양 현감(興陽縣監) 김이준(金履準)은 거듭 대간의 논박을 받은 후에도 염치를 무릅쓰고 부임하였으니, 청컨대 삭판(削版)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대각(臺閣)이 문득 염피(厭避)하는 곳이 되어 인망(人望)과 지망(地望)이 조금 우수하면 가볍게 여겨 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번 통망(通望)되면 다시 의논하여 주의(注擬)하지 않고, 간혹 한번 제수한 적이 있으면 자신을 더럽히는 것같이 하여 의노(疑怒)를 문득 품으니, 전관(銓官)이 된 자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양사(兩司)의 장관은 한번 전관을 거친 사람을 다시 검의(檢擬)하지 않으므로, 평소 대망(臺望)에 들어가는 자는 본래 마땅한 사람이 있는 것인데, 이와 같고서야 오히려 어떻게 대풍(臺風)이 진작되고 언로(言路)가 넓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책임은 정관(政官)에게 있습니다. 신은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해서 다시는 이전의 습관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우악하게 권장하시고 용서하여서 대각에 들어간 자로 하여금 대간의 직함을 영광스럽게 여겨 과감하게 말하는 것을 직임으로 삼게 하신다면, 또한 어찌 싫어하고 가볍게 여겨 규피(規避)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으면 도헌(都憲)·미원장(薇垣長)072) 은 전관에게 일임하고 영구히 사양해야 하겠는가? 결코 이럴 수는 없으니, 이로써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겠다. 아랫 조항의 일은 안겸제(安兼濟)를 가장(嘉奬)하였는데, 김화중(金和中)·임관주(任觀周)가 어찌하여 모두 고석(顧惜)하였는가? 그러나 없으면 더욱 면려(勉勵)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김재찬(金再贊)의 신문 공사(申聞供辭)을 읽도록 명한 다음, 충청 감사 민백분(閔百奮)을 파직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도신이 그르다. 도형(圖形)을 적간(摘奸)한 후 처결하는 것은 뜻이 대개 신중하게 살피려는 것인데, 이미 장례의 기한을 넘긴 사람을 도와 주라는 유시를 받고서도, 10여 세 된 아이의 무덤에 대해 세초(歲初)에 관(棺)을 복검(覆檢)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경상(景像)인가? 그 근본을 물으면 곧 도신이 살피지 않은 소치이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는데, 선묘(宣廟) 임진년073) 의 공을 돌이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6일 신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 지영례(祗迎禮)를 행하고 제보부(祭報府)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헌관(獻官)을 2품으로 차출하지 않았다 하여 해당 당상을 중추(重推)하게 하였다. 이어서 도총부에 거둥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는데, 잠저(潛邸) 때 총관(摠管)에 제배(除拜)된 달이 곧 이달인 까닭에 감회가 일어나서 특별히 임어한 것이었다. 선생안(先生案)을 가져다 보고 이어서 또 의정부에 거둥하였을 때 병조에 두루 임어하여 ‘억석입림(憶昔入臨)’ 네 글자를 써서 내리니, 대개 광묘(光廟)074) 가 일찍이 대사마(大司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의정부에 나아가 대신을 소견하고, 칠언시 1구(句)를 써서 내린 다음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게 하였다. 그리고 부내(府內)의 백성들에게 1년 동안 급복(給復)075) 하도록 하고, 부예(府隷)에게는 호조로 하여금 상을 주게 하였다. 환궁할 때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병조 판서와 포장(捕將)으로 하여금 범필(犯蹕)한 죄인 정윤신(丁潤愼)을 엄중히 추문하게 하고, 이어서 해도(海島)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정윤신은 애초에 억울함을 품은 일이 없었는데, 함적(陷嫡)할 계책을 이루려고 어가 앞에서 울며 하소연하여 천청(天聽)을 경동(驚動)시킨 것이었다. 그후 대신(臺臣)들이 잇달아 극률(極律)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예관을 고(故)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집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이순신(李舜臣)의 예에 의거한 것이었다.
2월 7일 임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임금이 개양문(開陽門)을 닫도록 명하였으니, 대교(待敎)가 열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매번 입시할 때마다 성수(聖壽)가 80세라 하여 진하(陳賀)하는 의례를 청했으나, 임금이 억지로 고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일제히 모여 구대(求對)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를 알고 이러한 명을 내렸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였다가 곧 도로 정침하였다.
2월 8일 계유
임금이 기로과(耆老科)를 창방(唱榜)할 때 헌가악(軒架樂)076) 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서명선(徐命善)이 작환(繳還)하자, 여러 승지들을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이재협(李在協)·서유린(徐有隣)·김상정(金相定)·임희교(任希敎)·최태형(崔台衡)·이해중(李海重)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이어서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신 등은 성의(誠意)가 천박하여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청하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가 다 옳은 것이다. 2품 이상은 무엇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듣고 갔는가?"
하고, 《중광록(重光錄)》을 지영(祗迎)한 후 다시 월대에 나아갔다. 전악(典樂)에게 명하여 섬돌 위에 올라와서 악장(樂章)을 연주케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주인(朱璘)이 사실(史實)을 위조한 일로 연경(燕京)에 사신을 보내어 흔쾌하게 변정(卞正)하였으므로, 《중광록》을 만들도록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자, 경사스러워하는 뜻으로 이렇게 한 것이었다. 임금이 경봉각에서 예를 행할 때 부복(俯伏)하여 구주(口奏)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구주한 것에 대해 대신들은 부끄러울 것이다."
하였다. 이 때 세 대신들이 녹사(錄事)로 하여금 명소패(命召牌)를 바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명을 기다리지 말게 하였으며, 사관을 보내어 전해 주도록 하고 이어서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 이하가 다시 진하(陳賀)하는 의례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령 홍구서(洪九瑞)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대교(待敎)에게 개양문(開陽門)을 열라고 한 명이 있었습니다. 문을 열 때에는 승정원에서 진실로 우러러 계품(啓稟)한 후 자물쇠를 풀어야 마땅한 것인데, 다른 궐문(闕門)을 먼저 연 후 늦게서야 비로소 구대(求對)하였습니다. 금약(禁鑰)을 혹 열거나 혹 닫는 것은 크게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데, 출납(出納)을 담당하는 곳에서 곧 복난(覆難)하지 않았으니, 신칙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날 직소(直所)에 앉아 있었던 승지들을 아울러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홍빈(洪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일을 논하는 신하들의 말이 진계(陳戒)하는 데 미치면 문득 곡영(谷永)에 대한 전교를 내리시고, 일이 권요(權要)에 관계되면 대부분 부효(浮囂)한 죄과로 돌리십니다. 이 때문에 대각(臺閣)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진부(陳腐)한 말로 미봉하여 책임을 면하는 것을 스스로 묘책(妙策)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인심이 날로 더러워지고 세도(世道)가 날로 비천해지는 것은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뭇 신하들의 허물이 아닐 수 없으니, 신은 눈앞의 일들에 대해 끝내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 판서 이최중(李最中)은 이미 정청(政廳)에 들어가서 소장(疏章)을 올리고는 앞질러 나가 깊은 밤에 함부로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다만 그날의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진 것을 삼가 보건대, ‘개국 승가(開國承家)한 소인(小人)’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진실로 그 죄가 있다면 영해(嶺海)에 찬축(竄逐)077) 하여도 진실로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것인데, 이제 두 글자로 하교하신 것은 진실로 중도에 지나친 것이 되니, 신은 그때의 하교를 속히 정침하도록 명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조참 때 통례원의 하례(下隷)를 기조(騎曹)로 하여금 곤장을 때리게 하신 명이 있었는데, 해방(該房)의 승지가 기조의 낭청으로 하여금 전교를 듣고도 거행하지 못하게 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기조 낭청이 곤벌(棍罰)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엄중히 문책하고, 승지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정령 이혜조(李惠祚)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성상께서 지어서 내리신 창방(唱榜)에 대한 치사(致詞)는 하례(賀禮)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전례에 어긋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금문(禁門)을 열고 닫는 것은 본래 정해진 시각이 있는데, 날이 늦게서야 비로소 열었으니, 청문(聽聞)에 의혹되는 바가 있습니다. 비록 한때의 하교에서 나왔다 하나 명령은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는 데 있어서 어찌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언 이동우(李東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여러 승지들을 일체 아울러 견책하여 체차(遞差)하라는 명에 대해 가만히 의혹되는 바가 있습니다. 지금 친히 구궐(舊闕)에 나아가 특별히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신 것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인데, 지난번에 동가(動駕)하셨을 때 세장(細仗)·고취(鼓吹)를 하지 말라고 하신 하교에 대해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후원(喉院)에서 작환(繳還)하는 것은 사리가 당연한 것인데, 갑자기 위벌(威罰)을 가하시니 경색(景色)이 쓸쓸하였습니다. 신은 조금 전에 하교하여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차하게 하신 명을 빨리 환수하도록 허락하시고 또한 특별히 정침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구저(舊邸)와 구궐(舊闕)은 경중(輕重)이 다른 것이다. 어가(御駕)를 따르는 복색과 참례(參禮)하는 것은 뜻이 또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부(前部)·후부(後部)의 고취(鼓吹)를 좌우에서 연주하도록 명하였던 것은 그 음악에 달려 있고 한편으로는 장대(張大)함을 경계하려는 것인데, 무슨 작환(繳還)할 일이 있는가? 서로 고집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일인데, 서로 고집하고 있으니 진실로 가소롭다. 현재의 직임을 해면(解免)하도록 명한 것도 또한 참작한 것이었다. 본 사건이 비록 다르다 하나 특별히 이 하교를 정침할 것을 지금 청한 것은 본 사건에 대해 잘못 안 것인데, 내가 어떻게 답하겠는가?"
하였다.
2월 9일 갑술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준(趙㻐)이 상소하여 본부(本府) 민폐(民弊)의 3조(條)를 논하였는데, 첫째는 적곡(糴穀)이 많은 폐단에 대해 말하고, 둘째는 양기(量器)가 줄어든 폐단에 대해 말하고, 셋째는 옛 포흠(逋欠)078) 의 폐단에 대해 말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 참판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여 휴치(休致)를 원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우악(優渥)하게 답하고, 장임(將任)·경연 관·비국 당상의〈휴치를〉 특별히 허락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민백순(閔百順)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정(親政)하겠다고 하교한 후 이조 판서는 이미 비답을 받았을 것인데, 어떻게 감히 패초(牌招)를 어길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좌이(佐貳) 두 사람이 엄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또한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판서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특별히 시행하게 하고, 두 좌이에게는 특별히 고신 3등(告身三等)079) 의 율을 시행하여 스스로 자신을 꾸짖게 해 게으른 여러 신하들에게 임금이 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하라."
하였다.
2월 10일 을해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의 구기(舊基)에서 기로과(耆老科)를 창방(唱榜)할 때 고취(鼓吹)와 치사(致詞)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전교(傳敎)를 내리신 것을 엎드려 보건대, 구궐(舊闕)·구저(舊邸)에서 모두 고취를 정지하게 하고 치사 또한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신은 지극히 마음이 답답하고 의혹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악(樂)은 화기(和氣)를 인도하고 치사는 기쁨을 뜻하는 것이니, 진실로 빠뜨릴 수 없는 전례(典禮)입니다. 지금 구전(舊殿)에 임어하여 기구(耆耉)를 시험하는 날을 만나 헌현(軒懸)080) 을 의식과 똑같이 할 수 없다면 이미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부족하게 여겨 탄식하는 바가 절실할 것인데, 또 이렇게 고취와 치사를 정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고취는 동가(動駕)하는 즈음에 시작하고, 또 문에 들어온 후에 연주하는 것인데, 과거를 설행해서 방방(放榜)할 때 정지하여 연주하지 않게 하시고, 또 치사(致詞)와 더불어 이를 정지하게 하셨으니, 진실로 성의(聖意)가 있는 것은 알겠지만 또한 어찌 심한 궐례(闕禮)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거듭 세 번 더 생각하셔서 특별히 성명(成命)을 정침하시어 전례를 거행하게 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펴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러움을 금할 수 없겠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구구한 생각이 있어서 한번 진계(陳啓)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중대한 일이어서 이것을 축하하는 것인데, 여러 신하들과 함께 치사의 의절을 거행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의 마음속에 굳게 맺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기로과를 설행한 것은 다른 과거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구저(舊邸)에 나아가는 갑일(甲日)이 거듭 돌아와 봉양하는 성대한 일을 행하게 되었으니, 신이 애일(愛日)081) 하는 마음으로 축하하는 글을 올려 작은 정성을 만분의 일이나마 펴고자 하는 것은 이로부터 정례(情禮)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손수 단장(短章)을 써서 숭엄(崇嚴)하신 성심(聖心)을 우러러 번독(煩瀆)하니,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지극한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의 청하는 바를 윤허해주소서. 신은 격절(激切)한 마음을 감당할 바 없어서 간절히 기구하며 삼가 절하여 소장(疎章)을 올려 아룁니다."
하였다. 소장을 받아들이자, 임금이 도승지에게 입시하여 독주(讀奏)하도록 명하고, 크게 기뻐하여 비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펴보고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이에 대해 내가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있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여러 신하들이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몇 차례 나를 곤란하게 하였는데, 아! 나의 충자(沖子)082) 가 할아비의 고심(苦心)을 깊이 헤아렸도다. 비록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하나 그것은 오로지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의 하교는 비록 불안함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었으나, 간지(干支)를 그 해에 견주었으니 뜻이 비록 예(禮)에서 지나쳤지만, 아! 충자가 능히 이를 판리(辦理)하였도다. 네가 이미 할아비의 마음을 체득(體得)하였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청을 억제하겠는가? 그 청을 모두 윤허하니, 너는 모쪼록 이 마음을 지녀 할아비의 뜻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하라. 나는 장차 손자가 있음을 오르내리는 영령(英靈)께 아뢰며 특별히 여섯 자를 친히 써서 겸하여 전할 것이니, 너는 마땅히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라."
하고, 도승지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글을 바친 궁관(宮官)에게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대신과 예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세손(世孫)에게 묻기를,
"치사(致詞)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네가 높은 소리로 아뢰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듣게 하라."
하자, 세손이 대답하기를,
"친잠(親蠶)을 치사하는 것 또한 팔역(八域)에서 기뻐 뛸 것이니, 이것으로 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것으로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따랐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이어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그대로 머물렀다.
2월 11일 병자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의 구기(舊基)에 나아가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고, 곧 다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헌납 이형원(李亨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왕세손께서는 천자(天姿)가 숙성(夙成)하셔서 예학(睿學)이 날로 진취(進就)되고 있으니, 더욱더 올바른 선비를 가까이 하여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해야 합니다. 근래에 궁료(宮僚)를 극선(極選)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체차(遞差)되어 바뀌는 것이 빈번해서 구임(久任)의 책임에 대한 효과가 없습니다. 신은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이의(移擬)하지 말게 함으로써 보도(補導)하는 방도를 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인군(人君)은 많은 백성들 위에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을 접해야 하므로, 중화(重華)083) 의 성명(聖明)으로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며, 성탕(成湯)의 성덕(聖德)으로 간언(諫言)을 좇아 어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옛날의 성인(聖人)들이 어찌 일찍이 성지(聖智)로 자처(自處)하며 다른 사람의 도량이 좁다고 여겼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이목(耳目)의 직임(職任)과 논사(論思)의 책무(責務)를 맡기셨으면,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직무일 따름입니다. 말에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면 곧 흔쾌히 따르는 것이 마땅하며, 만약 혹시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우악하게 용납하는 것이 마땅한데, 전하께서는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시는 도량이 넓지 않아서 먼저 듣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십니다. 승여(乘輿)에 대해 말하면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시고, 관리의 간사함을 규핵(糾劾)하면 경알(傾軋)하는 것으로 의심하시며, 득실(得失)에 대해 논열(論列)하면 구허 날무(構虛捏無)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일이 기휘(忌諱)하는 데 관계되면 곧바로 배척한다고 노하시고, 묘당(廟堂)에 관계되면 동요(動撓)할까 염려하십니다. 따라서 언론(言論)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으시고 본심(本心)에 다른 뜻이 없음을 헤아리지 않는 채 그 말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엄중히 견책(譴責)하거나, 혹은 특별히 명하여 체차(遞差)시키거나, 혹은 영해(嶺海)에 찬출(竄出)하거나, 혹은 산지(散地)에 폐기(廢棄)해 두거나, 혹은 언근(言根)을 힐문(詰問)하거나, 혹은 제배(除拜)하는 즈음에 호오(好惡)의 편사(偏私)를 뚜렷이 보이시니, 누군들 싫어하는 안색을 범하여 위세에 항거하면서 천균(千鈞)의 무거운 데에 눌리기를 즐거워하겠습니까? 백성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세 가지 있으니, 조세(漕稅)를 외람되게 받아들이고, 조적(糶糴)084) 이 정밀하지 못하며, 호부(豪富)가 겸병(兼倂)하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열읍(列邑)의 수재(守宰)들 사이에서 보건대, 성적이 중등인 자가 30개월 후에 승차(陞差)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십고(十考)085) 에서 성적이 상등인 자는 겨우 체차하여 부직(付職)하니, 신은 정례(政例)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전형(銓衡)을 공평하게 시행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성신(聖神)이 계승되시어 문교(文敎)·치화(治化)에 있어 안으로는 근궁(芹宮)086) 에서, 밖으로는 교학(校學)에서 배양하고 권과(勸課)함이 극진하게 하지 않은 바 아니지만, 수선(首善)087) 의 지역에서는 법도(法度)에 맞는 행실을 갖춘 선비를 보지 못하였고, 향교(鄕校)에서는 봄에 예를 행하고 겨울에 시서(詩書)를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사유(師儒)의 장(長)과 여러 도의 도사(都事)에게 열읍(列邑)을 두루 돌아다니며 양학(兩學)을 권과(勸課)한 명(明)나라 독학 어사(篤學御史)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는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군정(軍政)과 융기(戎器)를 모두 매우 소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은 제도화되어 있는 군대이지만, 대부분 피잔(疲殘)하고 약한 무리들입니다. 마군(馬軍)에 이르러서는 말이 없는 사람이 반을 넘고, 기계(器械)는 무디어 소용이 없으며, 궁시(弓矢)는 근각(筋角)의 아교가 안으로 좀먹고 손상되어 잡아다니면 활이 부러지고 화살 또한 그와 같으며, 총약(銃藥)은 구혈(口穴)의 심지가 성글고 화약이 맹렬하지 못하여 탄환이 대부분 맞지 않습니다. 만약 경급(警急)이 있을 경우 진실로 믿을 것이 없을 것이니, 미리 위험을 대비하는 데 대해 더욱 경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빨리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적간(摘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고(故) 순절신(殉節臣)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이순신(李舜臣)을 치제한 예에 따른 것이었다.
2월 12일 정축
이보관(李普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구기(舊基)에 나아가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고, 문과에서 신광수(申光洙) 등 6인을 뽑고, 무과에서 김세창(金世昌) 등 6백 26인을 뽑았는데, 이 과거에 나온 자들은 모두 나이 60세 이상을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다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창방(唱榜)에 친림(親臨)하였다. 임금이 손수 칠언시(七言詩) 1구를 쓰고 입시하여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게 하였으며 밤이 되어 환궁(還宮)하였다. 창방할 때 입시한 여러 신하들과 어가(御駕)을 수종한 사람들에게 아울러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2월 13일 무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문과·무과 일방(一榜)의 사은(謝恩)한 자들을 인견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있는 자들에게 음악을 내려 주어 영화롭게 하였다. 또 구저(舊邸)의 방내(坊內)에 사는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 주었다. 이어서 주강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2월 14일 기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특별히 문과(文科)의 신방(新榜)에게 아울러 가자하도록 명하였으니, 연로했기 때문이었다.
신광수(申光洙)·송재희(宋載禧)를 승지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준(趙㻐)의 상소로 인하여 매년 1만 5천 석을 한정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대여하되, 3년 이상된 묵은 쌀은 비로소 감해 주도록 허락하고, 석(石)마다 2승(升)의 구포(舊逋) 일체를 아울러 탕척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6일 신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고, 이어서 삼일제(三日製)088) 를 설행하여 민응세(閔膺世)·윤재겸(尹在謙) 2인에게 급제를 내려 주었다.
임금이 기로과(耆老科)의 출신 4인이 함께 정원(政院)에 있다 하여 어필(御筆)로 ‘사호각(四皓閣)’ 세 자를 써서 내리고, 이어서 서명응(徐命膺)에게 발문(跋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홍양보(洪亮輔)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7일 임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고, 입격한 유생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구궐(舊闕)에서 시사(試射)하고, 동가(動駕)하였을 때 시위했던 무신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2월 18일 계미
사예(司藝) 위흥조(魏興祖)가 상소하여 환조(桓祖)의 정릉(定陵)과 의혜 왕후(懿惠王后)의 화릉(和陵)에 있는 문신석·무신석·장명대(長明臺)가 훼상(毁傷)된 것을 고쳐 세울 것을 청하고, 또 경흥전(慶興殿)의 제도가 박루(朴陋)하다 하여 고쳐 세워서 의모(儀貌)를 보존하며, 특별히 비석을 세워 공렬(功烈)을 게양(揭揚)하기를 청하였다. 또 본도의 사람으로서 능관(陵官)이 된 자는 승천(陞遷)과 늠료(廩料)를 한결같이 경관(京官)의 예에 따르기를 청하는 등 말에 협잡(挾雜)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그르게 여겼다. 그 후 정언 유항주(兪恒柱)가 아뢰어 논척(論斥)해서 파직하였는데, 위흥조는 곧 함흥인(咸興人)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어장(御將) 장지항(張志恒)에게 포장(捕將)을 겸찰(兼察)하며 주전(鑄錢)의 일을 강구하게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전 대사간 이기경(李基敬), 전 헌납 이일증(李一曾), 전 장령 김서응(金瑞應)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고, 그 나머지는 서인(庶人)을 삼게 하였다.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여 부첨(付籤)한 무리로서 제도(諸道)에 도(徒) 3년 이하에 처해진 사람과 유생으로서 특교(特敎)로 찬배(竄配)되거나 충군(充軍)된 사람을 아울러 방면하고, 수령으로서 죄를 받아 찬배되거나 충군된 사람들 또한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목별로 열거해서 아뢰게 하였다. 당시에 기로과(耆老科)를 겨우 행하고, 임금이 비록 하례를 받지 않았지만, 특별히 옛사람을 본받는다는 뜻을 미루어 마침내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베푼 것이었다. 파산(罷散)·월봉(越俸) 등의 벌을 받은 자들도 모두 탕척받아 서용되었다.
2월 19일 갑신
박지원(朴志源)을 대사간으로, 이휘지(李徽之)를 이조 참판으로, 김상정(金相定)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각사의 구임 낭청(久任郞廳)과 오부(五部)의 관원을 소견하고,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도록 명하였다.
2월 20일 을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내시 변안국(邊安國) 등 5인을 친국(親鞫)하였다. 당시 대내(大內)에 소장(所藏)하고 있던 《임진일기(壬辰日記)》가 전부 유실(遺失)되었으므로, 임금의 위노(威怒)가 중도에서 지나쳐 여러 변 형추(刑推)를 더하였으나, 5인 등이 모두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스스로 변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말하기를,
"이들을 죽여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김치인이 말하기를,
"과연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법에 있어서는 죽일 수 있는 율(律)이 없지만, 정실(情實)로 말한다면 살릴 도리가 없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만, 법에 있어서 죽일 수 있는 글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지(傳旨)를 써서 아울러 모두 찬배(竄配)시키도록 명하였는데, 그 후 일기는 대내에서 대략 도로 얻은 것이 있었다.
2월 21일 병술
헌부 【지평 이장로(李長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예조 좌랑 김낙희(金樂熙)는 한 동료 관원과 함께 주선(周旋)하기 어렵다고 여러 차례 정단(呈單)하였는데, 해당 당상이 초기(草記)하여 개차(改差)하고자 하기에 이르면, 도로 정단을 뽑아내고는 쭈그리고 앉음을 무릅쓰고 행공(行公)하니, 그 구차하고도 염치없는 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간개(刊改)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동려(東呂) 지순(址淳)을 도로 배소(配所)에 보내라는 명을 정지하고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국(推鞫)하게 하기를 계청(啓請)하였다. 또 정배(定配)한 죄인 김주태(金柱泰)를 감등(減等)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할 것을 계청하고, 또 흑산도의 노비로 삼은 죄인 오득(五得)을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할 것을 계청하였다. 또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089) 한 죄인 이인(李䄄)090) 을 특별히 방면하게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김귀주(金龜柱)·임희교(任希敎)·서유린(徐有隣)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대신을 소견하였는데, 임금이 시(詩) 1구를 지어서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또 시 2구를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환궁한 후에 갱진하게 하였다.
2월 25일 경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정부(政府)의 진찬(進饌)을 받았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고,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시임 동벽(東壁)·서벽(西壁)을 지낸 여러 신하들에게 아울러 참배(參陪)하도록 허락하였다. 사인(舍人)이 찬(饌)을 받아 올리자, 임금이 먼저 바친 찬기(饌器)를 치우고 두 가자(架子)에 담아 천신(薦新)하는 예(例)를 써서 선원전(璿源殿)과 육상궁(毓祥宮)에 보내어 바치게 하고 친히 계단을 내려가 전송하였다. 다시 전탑(殿榻)에 나아가 척호장(陟岵章)을 외었다. 왕세손이 진작(進爵)하자 여러 신하들이 산호(山呼)091) 하고, 대신(大臣) 2품 이상 및 승지가 차례로 진작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법악(法樂)을 베풀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다만 혜적(嵆笛)만 연주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잇달아 총부(摠府)·기사(耆社)·종친(宗親)·의빈(儀賓)과 각사로 하여금 진찬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총부에 나아가 부총관 김한기(金漢耆)·정후겸(鄭厚謙)을 소견하고, 이어서 침전으로 돌아갔다.
2월 26일 신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중추부의 진찬(進饌)을 받았다. 왕세손이 진작(進爵)하자 호숭(呼嵩)하고,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차례로 진작하였다. 임금이 시 1구를 지어서 내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2월 27일 임진
임금이 도총부에 나아가 진찬(進饌)을 받으니, 여러 총관(摠管)이 입시하였다. 김한기(金漢耆)·윤동절(尹東晳)·정후겸(鄭厚謙)에게 먼저 진작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작악(作樂)·무동(舞童)을 예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진작하고 계단을 내려오자 호숭(呼嵩)하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진작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 때 총부에 제배(除拜)된 일이 이해의 이날이었음을 생각하였으므로 본부에 나아가 진찬을 받았다. 마치고 나서 임금이 여(輿)를 타자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였다. 다시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에게는 각각 숙마(熟馬)를 면대하여 주고, 중재(重宰)에게는 각각 숙마를, 사인(舍人)에게는 아마(兒馬)를 내려 주었으며, 정부·추부(樞府)의 원역(員役)과 숙수(熟手)에게 시상하였다. 그리고 세손궁의 장번(長番)에게 숙마를 내려 주고, 설리(薛里)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병조 판서를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고 이경호(李景祜)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향리에 있는 기조(騎曹)의 당상을 그 지역에 투비(投畀)하게 하고, 계품을 게을리 한 승지에게 서용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특별히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차(移次)하여 밤에 도총부에서 잤다. 경외(京外)의 사서(士庶) 가운데 80세 된 어버이를 봉양하는 자에게 찬수(饌需)를 내려 주도록 명하니, 지나간 해의 구신(舊臣)과 구민(舊民)을 생각하여 효도(孝道)를 일으키는 은택(恩澤)을 미룬 것이었다.
2월 28일 계사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거둥하여 진찬(進饌)을 받고 영수각(靈壽閣)에서 예를 베풀었는데, 기사 당상이 입시하자 피리를 불도록 명하였다. 왕세손이 진작(進爵)하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진작하였다. 기사 대신(耆社大臣)에게는 구마(廐馬)를 면대하여 주며, 여러 당상들에게는 숙마(熟馬)를 면대하여 주고, 입직 낭청과 약방에는 각각 아마(兒馬)를 내려 주고, 원역(員役)·숙수(熟手)에게도 각각 상을 내려 주었다. 이어 종친부에 나아갔는데, 여러 종신(宗臣)들이 입시하여 드디어 기사의 예(禮)와 같이 진찬하였고, 돈녕부 당상이 입시하여 종친부의 예와 같이 진찬하였으며, 충훈부 당상이 입시하여 돈녕부의 예와 같이 진찬하였다. 삼부(三府)의 당상들에게 각각 숙마를 면대하여 주었는데, 혹 반숙마(半熟馬)를 내려 주기도 하였고, 낭청·녹사·원역 등에게도 또한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칠언 사구(七言四句)를 지어서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이은춘(李殷春)이 완은군(完恩君) 이수량(李遂良)의 아들이라 하여 특별히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2월 29일 갑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효장묘(孝章廟)·수은묘(垂恩廟)·의소묘(懿昭廟)에 제사지내도록 명하였으니, 진찬(進饌)으로 인하여 감회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특별히 장택하(張宅夏)를 해도(海島)에 충군(充軍)시키도록 명하였다. 장택하는 유원 첨사(柔遠僉使)로서 차고 있던 병부(兵符)를 잃어버렸는데, 스스로 다른 병부를 위조하여 잠시 그 흔적을 숨기다가 이때에 이르러 북병사(北兵使)가 비로소 적발하여 장문(狀聞)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고 마침내 작처(酌處)하도록 명하니, 대신(臺臣)들이 다투어 정법(正法)하기를 아뢰었다.
형조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정언 강유(姜游)가 아뢰기를,
"총부와 전설사는 재숙(齋宿)하기에 마땅하지 못하고, 구저(舊邸) 또한 경숙(經宿)하기에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30일 을미
장령 이인묵(李仁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일전에 사인(舍人)이 정부(政府)에서 개좌(開坐)하자, 대신도 선진(先進)으로서 나갔었다고 합니다. 대신이 사인의 자리에 나아가 참여하는 것은 또한 고례(古例)에 맞지 않습니다. 비록 고풍(古風)이라 하더라도 웃음거리에 불과한데, 이미 대부(大夫)가 허둥지둥 몸을 굽혀 따라 참여하였으니, 체모를 중상(重傷)한 바가 없었겠습니까? 설사 성상께서 하교하신 바가 있었다 하더라도 대신(大臣)의 도리에 있어서 또한 그 불가한 까닭을 넌지시 진달함이 마땅한데, 급히 나아가며 일찍이 다시 어렵게 여기지 않은 것에 대해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선혜 낭청 송익수(宋翼洙)는 감히 침모(侵侮)할 마음을 품고 비로소 말하기를, ‘대신이 아니면 배례하지 않는다.’고 하고, 대신이 출좌하기에 이르러서는 해안(駭眼)·박물(薄物)로써 책임을 면하여 부응하였으니, 일은 비난하여 조소하는 데 가깝고, 자취는 공손하지 못한 데 관계됩니다. 신은 선혜 낭청 송익수에게 간태(刊汰)의 형전(刑典)을 내리심이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또한 풍류 고사(風流古事)인데, 더욱이 하교한 것이겠는가? 대부가 허둥지둥한다는 것은 말이 억양(抑揚)되었고, ‘이해하지 못하겠다.[未曉]’는 두 자도 또한 어찌 구경(九經)092) 의 대신을 공경하는 뜻이겠는가? 송익수의 일같이 이런 작은 것은 조정에서 계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이어서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황단(皇壇) 춘향제(春享祭)의 예의(隷儀)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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