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6. 19:19
반응형

6월 1일 기축

어제(御製)의 권세 위효제문(勸世爲孝悌文)을 간행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6월 2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동궁(東宮)의 관속을 소견(召見)하고 계유(誡諭)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선조(先朝)의 《춘방일기(春坊日記)》를 읽으라 명하고 여러 궁료(宮僚)에게 면계(勉戒)한 말을 들었었는데, 이윽고 사부(師傅)·빈객(賓客)·궁료들을 불러 하유하여 말하기를,
"지금에 있어서는 만 가지 일이 충자(沖子)에게 매였고 충자를 성취시키는 책임은 경들에게 있으니, 모름지기 보도(輔導)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여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사사(辭謝)하였다. 빈객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바탕은 하늘에서 내시고 학문은 날로 성취되시나, 신 등은 매번 본원(本源)에 더 힘쓰시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도 근본에 힘쓰는 도리로써 면려하시고 신칙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6월 3일 신묘

충량과(忠良科)를 설행하여 거수(居首)한 이범화(李範和)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6월 4일 임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민백흥(閔百興)·김기대(金器大)를 정경(正卿)에 승진 발탁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뢴 바에 의해서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정후겸(鄭厚謙)·김한기(金漢耆)·김기대를 수어사(守禦使)로 의망하였는데, 모두가 척신(戚臣)이었다. 그래서 임금이 특별히 이경호(李景祜)를 수어사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황명인(皇明人)의 자손을 소견(召見)하고 쌀을 내려주었으며, 병자년139)  ·정축년140)   호란(胡亂) 때의 충신 자손에게는 지필묵(紙筆墨)을 내려 주었다.

 

하교하기를,
"동몽(童蒙)에게 《소학(小學)》으로 신칙하는 것은 그 뜻이 깊다 하겠으니, 대개 물을 뿌려 쓸고 응대(應對)하는 것은 바로 수제(修齊) 치평(治平)의 근본이다. 동몽으로서 교관(敎官)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모두 《소학》을 읽도록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지름길에 힘쓰고 근본에 힘쓰지 않기 때문에 부박(浮薄)하고 조경(躁競)하는 습성이 대부분 여기에서 연유한다 하겠으니, 한심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느냐? 지금 여러 동몽 가운데 나이 15세가 넘어서 《소학》과 《대학(大學)》을 읽지 않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부터 읽는 자는 지난번에 구궐(舊闕)에서 시행한 예(例)대로 국자장(國子長)141)  으로 하여금 마땅히 매를 때리게 하겠다. 이번의 소견(召見)은 뜻이 깊기 때문에 참작하는 바이니, 그 부형들이 가르치도록 하라. 방심하고 소홀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군사(君師)의 자리에 있으나 도리를 닦지 못하고 요사이 더욱 쇠모(衰耗)한 때문이니 결연함을 금할 수 없다. 이 하교를 듣고도 부형이 된 자가 마음을 새로이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찌 단지 임금의 하교를 허술하게 여기는 것뿐이겠느냐? 이는 제 할아비와 제 아비를 생각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써 경향(京鄕)에 반포할 터이다. 이 뒤로는 진신(搢紳)의 자제로 동몽이 된 자를 때때로 소강(召講)하여 만일 근본에 힘쓰지 않고 건너뛰기를 일삼는 자가 있으면 국자장으로 하여금 비천당(丕闡堂) 앞에서 매를 때리게 할 것이다."
하였다.

 

6월 5일 계사

경기 유학(京畿幼學) 이한운(李漢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이번에는 헌릉(獻陵)의 금표(禁標) 내에 보[洑]를 쌓고 도랑을 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길을 바꾸고 국내(局內)를 천파(穿破)한 것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장래에는 반드시 무한한 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사부(士夫)들이 그 부형(父兄)을 거론하여 서로 욕을 하고 이민(吏民)들은 관장(官長)을 비방하고 있으니, 초범자는 엄하게 결장(決杖)하여 도배(徒配)하고 재범자는 전 가족을 변경으로 이주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천을 준설하는 비용에 한정이 없으니, 만약 물이 창일(漲溢)할 때에 하천에 사는 집의 장정에게 품값을 주고 각자 삼태기와 삽 등속을 가지고 모래를 담아서 물에 떠내려 보내게 한다면, 그 형세가 저절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한운 같은 자는 참으로 이른바 간교한 사람이며, 그 상소도 바로 재주를 자랑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불러다가 엄히 꾸짖고 한성부에 명하여 즉시 강 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임금이 《황화집(皇華集)》을 중간(重刊)하라고 명하였다. 옛날 명(明)나라의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에 그 창수(唱酬)한 시문(詩文)을 매번 기록하여 한 질의 책으로 만들고 《황화집》이라 이름하였는데, 해가 오래되어 산실(散失)되자 임금이 명나라의 사적(事蹟)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수집하여 하나의 권질(卷帙)로 합하도록 명하여 중간하게 한 것이다.

 

6월 6일 갑오

하교하기를,
"꿩·생선·참외·수박 등은 이미 간품(看品)을 하고 올라온 것이니, 각전(各殿)의 도설리(都薛里)가 중간에서 조종(操縱)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6월 7일 을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한 뒤에 지영(祗迎)하였다. 이어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으니, 내일이 곧 숙묘(肅廟)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매번 하루 전에 창덕궁으로 나아가 진전(眞殿)에 배알하였는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아 나이 팔순이 되도록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니, 성효(聖孝)의 순독(純篤)함을 흠송(欽誦)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6월 8일 병신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단 위를 봉심(奉審)하게 하였으며, 수직(守直)하는 중관(中官)과 수복(守僕)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경자년142)  에 태어난 서민을 한성부로 하여금 문 밖에 대령시키게 하고 쌀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창덕궁에 입직한 여러 무신(武臣)에게 내일 시사(試射)할 것을 명하고, 지나는 길에 월성위(月城尉)143)  의 집에 들려 특별히 쌀과 콩, 무명 등을 내려주었다.

 

6월 9일 정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지평 이유철(李有喆)이 아뢰기를,
"이한운(李漢運)의 상소는 도무지 조리(條理)가 없었으니 화소(火巢)144)   밖에 보[洑]를 쌓았다는 말도 모두 거짓으로 귀착되었습니다. 능침(陵寢)이 얼마나 지극히 중요한 곳인데, 허무 맹랑한 말을 장주(章奏)에 올린단 말입니까? 방축(放逐)으로 그칠 일이 아니니, 이한운은 섬에 정배하고 수참인(隨參人) 신귀삼(辛龜三)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한 바는 타당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禮)와 악(樂)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소중한 것으로써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습니다. 근자에 한 달 동안만 풍악을 중지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이는 특히 대성인(大聖人)의 효사(孝思)의 무궁하심에서 나온 것이오나 어제 이미 한 달이 지났으니, 하교를 거두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과 같다는 가르침 대로 속마음은 누르고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장령 신응삼(辛應三)이 신귀삼의 동당(同堂) 지친(至親)으로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인혐(引嫌)하니, 옥당(玉堂) 이창급(李昌伋)이 이르기를,
"신응삼의 아뢴 바가 속마음을 말한 것과는 다를 뿐더러 인피(引避)하는 관례에도 어긋나고 조사(措辭)할 즈음에 자연히 자기 변명이 되어버린 것도 외람되고 자질구레한 데에 관계되니, 삭직(削職)의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삭직하는〉 율은 지나칠 듯하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은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0일 무술

이유철(李有喆)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수표교(水標橋)에 행행하여 여경방(餘慶坊)에 들렸다. 하천을 준설한 뒤로 성중(城中)의 여러 교량의 양안(兩岸)은 모두 나무로 엮은 것을 사용하되 1년에 한 번씩 보수하니 그 비용이 많이 들어 마침내 돌로 쌓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3군문(軍門)에 명하여 분담해서 쌓게 하고 이날 역사(役事)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친히 나와 살펴본 것이다. 이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일한재(日閑齋)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6월 11일 기해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전(申)의 상소 뒤로 나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작년 가을의 일은 효사(孝思)에 유감이 없이 전하께서 하고자 하신 일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오직 전하께서 선처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6월 12일 경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지었다.

 

낙안(樂安)의 세선(稅船)이 치패(致敗)되니, 임금이 그 고을 군수 유이주(柳爾胄)가 때 늦게 실으면서 세미(稅米) 이외에 지나치게 많이 실어 그런 것이라 하여 삼수부(三水府)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신축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모든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조영순(趙榮順)·황승원(黃昇源)에 대한 논계(論啓) 끝부분에 ‘율에 따라 처단하라[依律處斷]’는 네 글자를 첨가해 써넣었다. 임금이 계사에 결미(結尾)가 없다 하여 대사헌 송문재(宋文載)를 죄파(罪罷)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쳐 쓰게 된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사체(事體)는 바로잡혀졌으나, 나의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서인(庶人)을 불러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라고 하였으나, 모두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오늘날의 대신(臺臣)은 비록 말할 것도 없지만 사서인(士庶人)이 어찌 칠실(漆室)에서 걱정하고 탄식하는 자가 없겠느냐? 그런데 왜 말이 없느냐?"
하니, 약방 제조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성세(聖世)에는 백성의 일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으니, 가의(賈誼)145)  나 동중서(董仲舒)146)  와 같은 재주가 없고서야 어찌 쉽사리 대답해 올리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비록 사람이 없다고 탄식을 하시오나, 그 중에는 또한 임금을 보필하고 직사(職事)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어다가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전(申)이란 자가 화경 숙빈(和敬淑嬪)을 존숭하여 능(陵)으로 봉하고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능으로 봉하자고 청한 자들은 사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공을 탐하고 상을 바라서 그런 것이니, 무슨 취할 것이 있겠느냐? 나도 이 일에 대해서는 도와야 마땅한 의리가 있겠지만 비단 선조(先朝)의 유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날 숙빈께서 겸공(謙恭)하고 소심(小心)했던 뜻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정도에 지나친 예(禮)를 행할 수 있겠느냐? 또 태실(太室) 중에서 제6실(室)과 제11실만이 4실인데147)  , 만일 부묘(祔廟)의 예를 거행한다면 장차 5실로 해야 할 것이니, 지난날 겸양하셨던 마음으로 어떠하다 하겠느냐? 사람의 자식은 어버이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아야 하느니만큼 나는 지키는 바가 있다. 또 지난날 가상(加上)하였을 때에는 자성(慈聖)께서 함께 기뻐하셨기 때문에 봉행하였던 것이나 이제는 내가 어떻게 혼자만 하겠느냐? 이 일 또한 지키는 바가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어 부원군(魚府院君)148)  이 나에게 보낸 편지를 황형(皇兄)의 책상 위에 놓은 적이 세번이나 있었다. 그 뜻은 비단 나만 참소(讒訴)하려는 것이 아니라 황수(皇嫂)에게까지 파급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황형께서 나더러 그르다고 한 마디만 하셨더라면 내가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느냐? 황형의 은덕이 지극하다 하겠다. 사람들이 혹 나는 여러 차례 존호를 받으면서 황형에게는 어찌하여 가상(加上)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나도 대답할 말이 있다. 내가 황형을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그 도리를 곡진(曲盡)하게 하여 막대한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신중히 할 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6월 15일 계묘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심이지(沈頤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주강에서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13세에 강(講)했던 책을 팔순의 나이에 다시 읽으니, ‘지난날 학업이 성취되지 못한 때라 해서 병이지성(秉彛之性)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지금 덕업(德業)을 이루었다 해서 어찌 병이지성이 남음이 있겠는가?[昔非不足 今豈有餘]와 같은 훈계에 대해서 어찌 헛되이 세월만 보낸 탄식이 없겠느냐?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이니,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올 뿐이다."
하였다.

 

이병비(吏兵批)149)  의 전최(殿最)를 입시(入侍)하여 개탁(開坼)150)  하였다.

 

6월 16일 갑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이한일(李漢一)이 아뢰기를,
"이정철(李廷喆)은 일찍이 우윤(右尹)으로 있을 때에 송사(訟事)하는 사람에게 강요하여 뇌물을 후히 받았으며 승자(陞資)한 뒤에도 그 사건을 움켜쥐고 제사(題辭)151)  를 내주지 않고 있으니, 신은 빨리 그에게 삭판(削版)의 형전을 시행하여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기에도 몹시 놀랍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현규(李玄圭)를 잡아들였다. 이현규는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로서 창곡(倉穀) 1백여 석을 도용(盜用)하였다가 이때에 발각된 것이었다. 임금이 직접 신문하여 초사(招辭)를 받은 뒤에 여성군(礪城君)의 손자라 하여 단지 금고(禁錮)만 명하였다가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6월 17일 을사

특별히 병조 참지 이한일(李漢一)을 제수하여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한일은 지체가 낮은데 임금이 특별히 이 직임에 제수하자 규정(規正)하려고 한 사람까지 있었다.

 

이성규(李聖圭)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는데, 이성규는 곧 정후겸(鄭厚謙)의 고모부(姑母夫)였다.

 

대사간 이한일이 아뢰기를,
"황승원(黃昇源)이 패초(牌招)를 어기면서까지 모피(謀避)하려고 한 것은 진실로 극히 해괴하고 통분스러운 일이오나 다만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처지에서 아들의 일로써 그 어머니에게 죄를 씌워 먼 곳에 정배하기에 이른 것은 아마도 성세(聖世)의 관전(寬典)이 아닌 듯 합니다. 또 듣자니, 그의 어머니는 배소(配所)로 가려고 말에 오를 때에 울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황승원이 어미의 훈계를 듣지 않고 형의 말도 따르지 않아 위로는 나라에 불충을 저지르고 아래로는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다. 자식을 이렇게 두었으니, 이번 걸음은 참으로 마땅하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그 어머니는 참으로 어진 분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황승원의 어머니에게는 분간(分揀)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품었던 바를 들으니,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전해 듣고 아뢴 사람도 또한 그 체통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 말을 듣고 어찌 다만 가슴이 매어질 뿐이겠느냐?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를 즉시 방면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무신 당상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6월 19일 정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6월 20일 무신

도목 정사(都目政事)에 친히 임어하여 이해중(李海重)을 이조 참의로 삼고, 특별히 정존겸(鄭存謙)에게 제수하여 지돈녕(知敦寧)으로 삼았으며, 도목 정사가 끝나자 음식을 내렸다.

 

6월 21일 기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새로 제수한 사람들의 사은을 친히 받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삼사(三司)에서 입시하였다. 대사간 이한일(李漢一)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이래로 정우순(鄭宇淳)이 법강(法講)152)  에 입시하여 성상의 하교 아래에서 무식함을 자칭(自稱)하여 글의 뜻을 아뢰지 않은 것은 비단 체통을 손상시킨 것뿐만 아니라 무엄하기도 한 것입니다. 청컨대, 그에게 견삭(譴削)의 형전을 시행하소서. 이언일(李彦一)의 소어(疏語)는 스스로 교만하고 자신만 중히 여긴 것이 몹시 해괴한 일이며, 그 인피(引避)함에 이르러서도 직무를 보살피라는 하교가 없으셨다 하여 감히 체직(遞職)을 청하는 빌미로 삼았으니, 이것은 대간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킨 것이며 또 지극히 무엄하기도 한 것입니다. 청컨대, 대망(臺望)에서 삭제해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대간의 체통을 얻었다 하겠다.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6월 22일 경술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색깔은 붉은 색이었다.

 

간원(諫院) 【대사간 이한일(李漢一) 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부터 척신(戚臣)과 의빈(儀賓)·종친(宗親)은 삼사(三司)의 임명에서 분간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대개 일시의 특별한 하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회수(李會遂) 같은 이에 있어서는 척신도 아니고 의빈이나 종친도 아닌데, 공족(公族)이라 말하며 원인(援引)할 수 없는 혐의를 억지로 끌어다가 장황하게 상소하였으며 언급한 말 또한 구차하였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지극히 온당치 못한 일이오니, 청컨대 파직의 형전을 시행하소서. 근래 이목지관(耳目之官)이 우유 부단(優柔不斷)한 것은 모두가 여러 대신(臺臣)들의 죄이오나, 일전에 하교하실 때에 ‘종각 걸인(鍾閣乞人)’이라고 하신 네 글자는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말씀이 과중하신 것이오니 신 등은 그날의 하교는 거두셔야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3일 신해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西北)의 별부료 군관(別付料軍官)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데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6월 24일 임자

동지(同知) 송규빈(宋奎斌)이 상소하여 존주 대의(尊周大義)를 말하고, 이어 《방략(方略)》이란 책자를 올리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렸다.

 

임금이 탕제(湯劑)를 들기 어렵다 하여 도성 안의 사자(士子)들에게 방도를 물으려 하였으나 미처 와서 대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거(停擧)를 명하였으며, 도승지는 능히 아랫사람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다 하여 체차하라 명하고 구익(具㢞)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조귀명(趙龜命)의 문집 서문을 지었다. 조귀명의 호는 동계(東谿)이며 고(故) 상신(相臣) 조상우(趙相愚)의 손자인데, 사람됨이 청정(淸淨)하고 과욕(寡慾)하였으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여러 종형제들이 권병(權柄)을 잡고 있을 때에도 혼자만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서적에만 마음을 쏟았다. 임금이 입학할 때에 장명생(將命生)153)  이 되었었는데, 임금이 그에게 문집이 있고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이천보(李天輔)·원경하(元景夏) 등과 서로 친하였다고 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 서문을 지어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포의(布衣)의 문집으로써 임금의 서문을 얻었으니, 이는 족히 경상(卿相)의 존귀(尊貴)함을 대신할 만하다."
하였다.

 

6월 25일 계축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조영진(趙英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동위 관례문(銅闈冠禮文)154)  을 제정(製定)하였다. 임금이 《춘방일기(春坊日記)》를 읽다가 선조(先朝)에서 10세에 관례를 행한 사실을 알고는 임금에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는 범인(凡人)과는 달라 10세 전에 관례를 행하면 너무 이르고 10세가 지나면 또한 늦으니, 10세에 삼가례(三加禮)를 하는 것이 정히 사리에 합당하겠다."
하고, 동위의 관례를 10세에 행하는 것으로 정제(定制)하라고 명하였으며 마침내 서문을 지어 간행(刊行)하게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행행하였는데,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대령하지 않자 잡아들이게 하여 수가(隨駕)를 명하고 효장묘(孝章廟)로 나아가니 왕세손(王世孫)이 따라 나아갔다.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자, 왕세손 이하가 재배하였다. 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서도 효장묘의 예(禮)와 같이 행하였다. 양묘(兩廟)의 찬례(贊禮)인 예조 판서에게는 숙마(熟馬)를 면전에서 주고, 승지와 춘방관(春坊官) 이하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으며, 인경궁(仁慶宮) 옛터에서 사는 백성들을 불러들여 쌀을 내렸다.

 

6월 27일 을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양역(良役)으로 하천을 준설한 것은 비록 나의 사업이었지만, 이 뒤의 일은 나의 알 바가 아니다."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전하의 공업(功業)은 단지 이 일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탕평(蕩平)도 나에게는 한 가지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뒤에는 반드시 다른 이름이 붙여지고 필경에는 후세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하매,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남인·북인·노론·소론이 틀림없이 서로 바뀔 것이다."
하였다.

 

6월 28일 병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한 뒤에 뜰에 내려 지영(祗迎)하여 연광문(延光門)에서부터 무덕문(武德門)에 이르러 땅에 부복하고 대원군(大院君)의 사우(祠宇)를 우러러 보았다. 광명전(光明殿)으로 돌아와서 어제(御製)를 쓰라고 명하였으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이어 임금이 채제공(蔡濟恭)에게 어제의 편차(編次)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광릉(光陵)155)  과 장릉(長陵)156)  에 동시에 향을 전하였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손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만일 써서 보이지 아니하면 네가 어떻게 의리로는 형수(兄嫂)와 시숙(媤叔)이지만 은정(恩情)은 모자(母子)와 같다는 글귀를 알겠느냐? 장래에 효장(孝章)과 효순(孝純)157)  에게서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본받아라."
하였다. 이어 상의원(尙衣院)에 임어하여 어필(御筆)로 ‘석 신묘 문안청(昔辛卯問安廳)’의 여섯 글자를 써서 판각(板刻)하여 달게 하였다.

 

임금이 호남(湖南)의 가뭄에 대해서 듣고 교리 이상건(李尙建)을 심리 어사(審理御史)로 특별히 차임하여 호남 지방을 염찰(廉察)하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정사

임금이 석우(石隅)에 행행하였다. 이때에 오래 비가 내리지 않자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전답을 직접 보려 한 것인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다. 농민을 불러 농사 형편을 묻고 지나가는 길에 수표교(水標橋)에 들러 돌을 쌓는 역사(役事)를 살펴보고 3군문(軍門)에 쌀과 베를 내려주고 역사하는 곳에 상(賞)을 내걸어 근실(勤實)한 사람에게 시상하게 하였다. 또 교동(校洞)에 있는 옹주(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가, 이어 의열궁(義烈宮)에 나아가 세손에게 명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