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기미
송형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탕제(湯劑)를 복용(服用)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물으니, 모두 복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시체(時體)158) 이다."
하였다.
7월 3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시골 백성을 불러 농사 형편을 물었으니, 대저 오랜 가뭄 때문이었다.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이때 전주(全州) 사람이 전 판관(判官)을 위해 유임(留任)하기를 원하여 상언(上言)한 사람이 있었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묻기를,
"전주 새 판관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임성주(任聖周)는 글을 잘할 뿐만 아니라, 경학(經學)도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학하는 사람은 모두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하니,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이미 전주(全州)를 염려하신다면 특별히 가려서 바꾸어 차출(差出)하는 것도 불가하지 아니합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의 말이 매우 좋다."
하고,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가려서 차출하게 하였다.
비가 내리기까지를 한정하여 감선(減膳)159) 하게 하고 경기·충청도의 잡선(雜膳)도 봉진(奉進)을 정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가 신패(神牌)를 환안(還安)한 뒤에 대내(大內)로 돌아왔는데, 누수(漏水)를 걷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시신(侍臣)은 모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임금은 홀로 피로한 뜻이 없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은 세 가지 일이 있으니,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과 선왕(先王)을 공경하는 것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임금이 여든 살에 공경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돈독하시니,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5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은 세 가지 일이 있으니,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과 선왕(先王)을 공경하는 것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임금이 여든 살에 공경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돈독하시니,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7월 5일 임술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판으로, 이휘중(李徽中)을 대사헌으로, 박필규(朴弼逵)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집의(執義) 정언섬(鄭彦暹)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연 부사(長淵府使) 김상태(金相台)는 본래 광패(狂悖)하고 추려(麤厲)160) 한 사람으로,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쳐서 이민(吏民)이 괴로움을 받으니,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그리고 부안 현감(扶安縣監) 김경수(金景洙)는 사람됨이 잔열(殘劣)하고 행실이 탐비(貪鄙)한데, 이곳에 부임해서는 정무를 간리(奸吏)에게 위임하여, 조정(糶政)161) 을 문란시켜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조정(趙晸)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으니, 김상복(金相福)이 추천한 것이었다.
7월 6일 계해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이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서 뜰에 부복(俯伏)한 지 한동안이 되었는데, 비가 과연 곧 내려서 곤룡포(袞龍袍)가 모두 젖으니, 상신(相臣)이 대내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걸어 나와서 모시고 앉으니, 임금이 이 때문에 일어나서 들어왔다. 전설사에서 비가 한 자[尺]가 내렸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부복하고, 헌관(獻官) 이하에게 상(賞)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
7월 7일 갑자
하교하기를,
"아! 본래 정성이 옅은데 근래에 더욱 쇠퇴하니, 지금 날이 가무는 것을 마음이 스스로 이미 판단하였기 때문에 오직 내게 있는 도리를 다하였을 뿐인데, 어제 비가 내림을 얻었으니 진실로 뜻밖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가 내렸다고 해서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제 밤 건명문에서 이미 내 뜻을 유시(諭示)하였으나 남은 뜻이 동동(憧憧)162) 하니, 어찌 침묵하겠는가? 아!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를 의지한다. 9년의 홍수(洪水)와 7년의 한재(旱災)는 내가 이를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운기(運氣)163) 에 붙인다. 밑에서 사람의 일을 닦으면 하늘의 도(道)가 자연히 응함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내가 비록 덕이 박할지라도 밤낮으로 걱정하는 한 마음은 오직 여기에 매어 있다. 옛날에 자성(慈聖)께 아뢴 것이 있었는데, 아! 저 궁벽한 농촌 사람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아픔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옛날에 ‘몸의 살을 어찌 아끼겠느냐?’라는 하교를 우러러 들었는데, 이번 축문(祝文)에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대신한다.’는 말은 꾸민 말이 아니라 진실로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혹시 일호(一毫)라도 꾸민다면 이는 어찌 마음을 속이는 것뿐이겠는가? 진실로 척강(陟降)164) 과 하늘을 저버리는 것이다. 아! 우리 충자(沖子)165) 와 온 나라의 신서(臣庶)는 이 하교에 감동하고 이 뜻을 체득하라."
하였다.
조재득(趙載得)을 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그 아버지 조현명(趙顯命)을 생각한 것이었다.
7월 8일 을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준천 도감(濬川都監) 장교(將校)와 시골 백성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고, 이익원(李翼元)을 특별히 제수하여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삼았다.
7월 10일 정묘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유생(儒生)과 방민(坊民)을 불러 보고, 탕제(湯劑)를 복용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물었다.
7월 11일 무진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7월 12일 기사
이미(李瀰)를 대사헌으로, 박기채(朴起采)를 대사간으로 삼고, 조재득(趙載得)을 우윤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대신(大臣)·예관(禮官)의 진달로 인하여 삭선(朔膳)166) 과 물선(物膳)을 회복하기를 허락하였다.
7월 13일 경오
이익원(李翼元)에게 호피(虎皮)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이섭원(李爕元)·이정제(李廷濟)의 손자를 아울러 녹용(錄用)하기를 명하였는데, 이익원이 말하기를,
"녹용하는 법은 훈척(勳戚)·청백리(淸白吏)·절의(節義)의 자손 외에는 외람되게 줄 수 없는 것이니, 곧 환수(還收)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이 명령이 있었다.
봉조하(鳳朝賀) 남유용(南有容)이 졸(卒)하였다. 남유용은 고 대제학(大提學) 남용익(南龍翼)의 손자인데,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형(兄)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 올라 승문원 부제학(承文院副提學)을 경유하여 세손 보양관(世孫輔養官)·유선(諭善)을 거쳐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70세에 상소하여 물러가 쉬기를 청하니 봉조하를 제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람됨이 탄이(坦夷)167) 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 일에 담연(淡然)하였다.
7월 14일 신미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니, 왕세손(王世孫)이 같이 예를 행하였고, 곧 주원(廚院)168) 에 나아갔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세 정승[三相]이 정치유(鄭致綏)의 자폐(自廢)한 일을 우러러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변경진(邊景鎭)이 이미 사람을 무고한 것이 탄로났으니, 이번 하교한 뒤에는 이른바,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느냐[毛將焉傳]169) ?’고 할 만하다. 그 아버지로 하여금 내 뜻을 가지고 그 아들에게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의 동생을 특별히 석방하였으니,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아뢴 것 때문이었다.
7월 16일 계유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조경(趙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칠석제(七夕製)170) 를 행하였는데, 유생(儒生)들이 미쳐 와서 기다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그 글제[題]를 가지고 궐(闕) 내의 입직(入直)한 문관(文官)들에게 글을 지어서 올리게 하였으며, 초선(抄選)된 이재간(李在簡) 등에게 차등있게 상(賞)을 내렸다. 오후에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서 칠석제(七夕製)를 추후로 다시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현묵(李顯默)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임금이 대각(臺閣)이 잠잠히 있다고 대각에 나아간 대신(臺臣)을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갑술
지평(持平) 권엄(權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선비의 추향(趨向)이 날마다 점점 어긋나고 그릇됨은, 오로지 과거(科擧)의 빈번함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름없는 제술 시험과 때아닌 과장(科場)의 설치가 거의 없는 달이 없어, 이 때문에 단지 조경(躁競)하는 풍습을 기르고 도리어 교만한 버릇을 생기게 하였으니, 어제 원점 원점 유생(圓點儒生)171) 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엄한 분부를 거듭 내려서 과장(科場)을 파하고 물리쳐 내친 것은 요컨대 후일을 징계하고 격려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반일(半日)의 비와 바람을 겪고 또 별과(別科)를 설치하여 초초(草草)하게 시권(試券)을 거둔 것은 모양을 이루지 못한 데다가, 죄를 면한 다른 유생으로 하여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다시 생기게 하였으니, 소문을 들음에 근심과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어제 제술을 시험한 유생은 직부 전시(直赴殿試)172) 하지 말도록 하고, 이 뒤로는 원래 정한 절제(節製)173) 는 반드시 당일에 과장을 설치하여 혹시 당기거나 물리지 말고, 이름없는 별과(別科)도 일체 모두 설치하지 않으면,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도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권엄(權𧟓)의 상소를 보고 진노(震怒)하여, 권엄을 정관(政官)에 비의(備擬)한 것을 파하라고 명하였으며, 권엄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갑산부(甲山府)에 서민(庶民)을 만들게 하였다.
대사헌 임희교(任希敎)가 권엄(權𧟓)을 절도 안치(絶島安置)할 것을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권엄을 잡아들여 형장(刑杖)을 가하고 추자도(楸子島)에 정배(定配)하였다. 조경(趙瓊)을 종성부(鍾城府)에 귀양 보내기를 명하였으니,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공무(公務)를 수행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조엄(趙曮)을 잡아 들여 처음에는 북청(北靑)에 귀양보내기를 명하였다가 문득 정지하고 단지 파직만 하였으며, 수원 부사(水原府使) 조정(趙晸)을 체직(遞職)하도록 명하였으니, 그의 형(兄) 〈조엄〉 때문이었다.
조명정(趙明鼎)을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8일 을해
김종정(金鍾正)을 대사헌으로, 박사륜(朴師崙)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 문소전(文昭殿)174) 옛터에 나아가 예(禮)를 행한 뒤에 부복(俯伏)하여 구주(口奏)하고, 이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양사(兩司)의 잇따른 계문(啓聞)을 정지하도록 명하여, 조영순(趙榮順)·황승원(黃昇源)에 대한 계사(啓辭)가 모두 정지되었다.
대사헌 임희교(任希敎), 대사간 조재준(趙載俊) 등이 권엄(權𧟓)의 안율(按律)을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하교하기를,
"권엄은 해도(海島)에 안치(安置)하는 것으로 족하다. 비록 평상시라도 이 율(律)은 만번 과중(過中)한 것이지만, 모름지기 오늘 구주(口奏)한 뜻은 실행해야 하겠다. 이 율은 사복(嗣服)한 처음에 생겼는데 그 뒤에 중지되었다. 한필수(韓必壽)·정광충(鄭光忠)이 전에 이미 수창(首唱)하였으나, 이 뒤에는 관계가 막중한 것 외에는 감히 이 율(律)을 적용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7월 19일 병자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하례(賀禮)를 받았으니, 어제 정계(停啓)로 인하여 부생(傅生)175) 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왕세손(王世孫)이 하례를 행한 뒤에 시좌(侍坐)하였다. 어제 반교문(御製頒敎文) 가운데, ‘고취(鼓吹)176) 한 소리에 다섯 사람이 살아났다.[一聲鼓吹五人生]’는 글귀가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에 건명문(建明門)에서는 한 소리 고취(鼓吹)에 세 사람이 살았는데, 오늘날 문소전(文昭殿)에서는 한 소리 고취에 다섯 사람이 살아났다. 예전 〈한(漢)나라〉 동평왕(東平王) 창(蒼)은 한 ‘선(善)’ 자(字)를 명제(明帝)에게 고(告)하였고, 유 선주(劉先主)177) 도 한 ‘선’ 자로 후주(後主)178) 에게 경계하였으며, 《희경(羲經)주역.》 곤괘(坤卦)에는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고 하였으니, 이 뜻은 경사를 나라에 펴려고 함이다. 문소전(文昭殿)이 3백 년 전에는 금석(金石)179) 을 연주하였는데, 오늘날에 이 전정(殿庭)에서 고취(鼓吹)를 연주하고 배례(拜禮)하니, 고취 한 소리에 다섯 사람이 살아났다. 경사(慶事)를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80세 늙은 나이에 어찌 나를 위하겠는가? 아! 충자(沖子)는 나의 뜻을 체득하여 더욱 선(善)에 힘쓸 것이며,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선’으로 보도(輔導)할 것이다."
하였다.
양사(兩司)에 명하여 권엄(權𧟓)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대신(臺臣)이 비록 내가 구주한 한 구절(句節)의 말을 잘못 들은 데에 말미암은 것이라 하더라도, 안율(按律)을 청한 것은 어찌 괴이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희교(任希敎)의 일은 내가 항상 개연(慨然)해 한다. 가자(加資)할 때에 여성군(礪城君)의 외손(外孫)으로 잘못 알고서 하교한 바가 있었다. 그가 마땅히 상소하여 스스로 밝혀야 할 것인데 염연(厭然)히 그대로 있었으니, 지극히 잘못이다. 귀먹고 눈먼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이를 듣게 하라."
하니, 대사헌 정광한(鄭光漢)이 아뢰기를,
"임희교(任希敎)는 당초에 가자(加資)할 때에 성상의 하교에 여성군의 외손이라고 잘못 일컬었으면, 임희교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글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인데 슬그머니 덮어 두었으니, 진실로 사대부(士大夫)의 수치가 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멀리 귀양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황경원(黃景源)이 외람되이 포폄(褒貶)을 담당한 것은 지극히 방자합니다. 그 종제(從弟)는 바야흐로 일률(一律)180) 에 처하는 계사(啓辭)가 있었고 숙모(叔母)는 또 원찬(遠竄)의 벌(罰)을 입었으니, 황경원의 도리에 있어서는 축복(縮伏)하여 벼슬을 사면(辭免)함이 마땅한데, 예사로이 행공(行公)하여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지나간 일이라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용(敍用)하지 않는 율로써 시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폐단이 있는 것을 이미 깨달은 뒤에 어찌 시각을 넘기겠는가? 비록 일이 역률(逆律)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안(結案)181) 은 지만(遲晩)한 뒤에 정법(正法)하는 것이 바로 왕자(王者)의 형벌을 삼가는 뜻이다. 비록 관계가 막중(莫重)한 것이라도 엄하게 국문하여 결안을 받는 것이 정정 당당한 도리라고 할 것이다. 이 뒤로는 결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바로 정법(正法)하는 것을 영구히 없앨 것과, 명령을 어기고서 청하는 자는 진신안(搢紳案)에 제명(除名)하고 3세(世) 동안 청직(淸職)을 허락하지 말도록 할 일을 수교(受敎)182) 에 싣게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20일 정축
김상집(金尙集)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금위 대장(禁衛大將) 구선복(具善復)과 어영 대장(御營大將) 장지항(張志恒)을 잡아들여서, 장지항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구선복은 파직하였으니, 융복(戎服)을 문관(文官)에게 빌려 준 때문이었다.
7월 21일 무인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서 예(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도 같이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부복(俯伏)하고, 도승지(都承旨)에게 앞으로 나오기를 명하여 황은송(皇恩頌)을 쓰게 하였다. 명나라 이 제독(李提督)183) 과 우리 나라 삼학사(三學士)184) ·선원(仙源)185) ·청음(淸陰) 【청음은 김상헌(金尙憲)의 호(號)이다.】 의 봉사손(奉祀孫)에게 각각 한 자급(資級)씩을 뛰어 올리게 하였다.
7월 22일 기묘
이수봉(李壽鳳)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경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소학(小學)》을 강(講)하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 등이 탄일(誕日)에 진하(陳賀)하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때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다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금년에는 마땅히 받겠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글이 어디에 있느냐?"
하자, 왕세손이 소매 속에서 간지(簡紙)에 쓴 것을 내어 놓았으니, 바로 상교(上敎)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들이기를 명하여 비교하니, 어긋남이 없었다. 임금이 찬탄하기를,
"할아비가 손자에게 명한 것인데 손자가 할아비에게 명한 것이 되었다. 나는 세손(世孫)이 있으니 다른 근심은 없으나, 다만 이같은 일로써 세손이 매양 마음을 쓰니 이것이 민망스럽다. 이에서도 또한 그 고심(苦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이 모두 말하기를,
"예효(睿孝)186) 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니, 행여 굽어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조용히 상신(相臣)에게 말하기를,
"내 손자가 여색(女色)에 담연(淡然)하여 하나도 가까이하는 것이 없고, 오직 아침저녁으로 나를 모시는 것만 알며, 돌아간 뒤에는 글만 읽을 뿐이다."
하니, 상신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바이니, 학력(學力)이 정착(定着)되고 덕을 기른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손을 지극히 사랑하고 세손은 정성과 효행이 구비(俱備)하였으니, 양궁(兩宮)의 사이에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였다.
7월 24일 신사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서 함일재(咸一齋)에 있었는데,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충훈부 당상관(忠勳府堂上官),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가 입시(入侍)하여 찬품(饌品)을 올리기를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7월 27일 갑신
임금이 사옹원에 나아가서 올리는 찬품을 받았다. 임금이 어제(御製) 2구(句)를 내려서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次韻)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먼저 두 상(床)을 올리라고 명하여 친히 살펴보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창덕궁(昌德宮)과 육상궁(毓祥宮)에 모시고 나아가게 하여 쌍적(雙笛)으로 앞을 인도하게 하고 이어 찬품을 올렸다. 도제조(都提調) 김상철(金尙喆)이 고취(鼓吹)를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금(嵆琴) 한 쌍만 올리기를 명하였다. 왕세손이 작(爵)을 올리니, 여러 신하가 모두 일어나 서서 부복(俯伏)하며 일제히 천세(千歲)를 세번 불렀다. 제조(提調)가 차례로 술잔을 올리고 모두 천세(千歲)를 빌었는데, 제조(提調)에게 모두 말[馬]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어 상의원(尙衣院)에 나아가니, 제조 김한기(金漢耆)·정후겸(鄭厚謙)이 사배(四拜)를 행하였다. 임금이 어제(御製) 2구(句)를 내려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전과 같이 두 상(床)을 두 궁(宮)187) 에 보내게 하였으며, 이어 찬(饌)을 올렸다. 김한기(金漢耆)가 고취(鼓吹)를 올리기를 청하니, 헌가(軒架) 고취와 무동(舞童)의 처용(處容)188) 을 격식을 갖추어 들이게 하였다. 왕세손이 작(爵)을 올리고 여러 신하가 숭호(嵩呼)189) 함을 사옹원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두 제조(提調)에게 말을 내려 주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정후겸(鄭厚謙)과 도승지 심이지(沈頤之)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 등은 오늘 술잔으로 감정을 푸는 것이 옳다."
하고, 세손(世孫)에게 말하기를,
"두 경(卿)190) 에게 이미 감정을 풀게 하였는데, 만약 풀지 못하면 네가 반드시 억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고취(鼓吹)와 무동(舞童)이 앞을 인도하라 명하고, 대내로 돌아왔다.
7월 28일 을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충훈부(忠勳府)에서 올린 찬(饌)을 받았다.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는데, 임금이 어제(御製) 1구(句)를 내려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진찬(進饌)을 어제의 예(例)와 같이 하고, 충훈부 당상관에게 각각 말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7월 29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게 나아가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행례(行禮)하고 어첩(御帖)과 어필(御筆)을 봉심(奉審)한 다음 기영관(耆英館)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시좌(侍坐)하고 여러 당상들이 사배(四拜)를 행하였다. 먼저 두 상(床)을 창덕궁(昌德宮)과 육상궁(毓祥宮)에 보내게 하였는데, 쌍적(雙笛)은 제치(除置)하였다. 임금이 어제(御製) 1구(句)를 내리고, 입시한 여러 신하와 수가(隨駕)한 비국 당상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풍악을 올리기를 청함에 임금이 영수각이 가까우므로 허락하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써 청하니,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서 대신 아뢰게 한 뒤에 고취(鼓吹)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왕세손이 작(爵)을 올리고 천세를 부르니, 대신(大臣)과 기로소 당상관이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기로소 당상관에게 말을 내려 주기를 명하고, 의정부(議政府)를 역림(歷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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