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1권, 영조 49년 1773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6. 19:29
반응형

8월 1일 정해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8월 2일 무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정광한(鄭光漢)이 아뢰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유진열(柳鎭說)은 호읍(湖邑)에 있을 때의 일 때문에 대간(臺諫)의 비평을 받아 재물을 탐하는 불법(不法)한 정상을 낱낱이 들어 조목조목 진달하였으나, 그대로 쭈그리고 있는 지 이미 1년이 넘었으니 탐학함을 징계하고 청렴함을 장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관직을 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3일 기축

서유녕(徐有寧)을 승지로 삼았다.

 

8월 4일 경인

임금이 대관(大官)·내국(內局)·승지(承旨) 및 감선번 교체인(監膳番交替人) 외에는 대궐 안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명령을 도로 거두기를 아뢰어 청하니, 여러 승지의 현임(見任)을 해면하라 명하고, 구익(具㢞)·조덕성(趙德成)·김재순(金載順)·조창규(趙昌逵)·임희증(任希曾)·권영(權穎)을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이택수(李澤遂)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이택수는 홍봉한(洪鳳漢)의 생질(甥姪)인데, 김상복(金相福)이 뜻을 받아 천거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상참(常參)191)  을 행하고 이어 《소학(小學)》을 강(講)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를 여러 번 청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입으로 아뢰기를, ‘신(臣)이 만약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이를 받으면, 이는 척강(陟降)을 저버리는 것입니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만육(李萬育)을 발탁해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8월 5일 신묘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傳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윤방(尹坊)을 승지로 삼았다.

 

8월 6일 임진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이치중(李致中)을 발탁하여 승지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광통교(廣通橋)에 거둥하여 석축(石築)을 살펴보았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다. 준천사 당상관(濬川司堂上官)과 금위(禁衛)·어영(御營) 두 대장(大將)에게 가자(加資)를 명하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말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오언(五言)·칠언(七言) 시(詩) 각 1 구(句)를 지어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또 준천명(濬川銘)과 아울러 소서(小序)를 짓고, 액례(掖隷)에게 명하여 돈 20관(貫)을 다리 밑에 흩어서 아동으로 하여금 줍게 하였다.

 

8월 7일 계사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주강(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광통교(廣通橋)192)  에서 관광(觀光)하는 백성은 모두 내 충자(沖子)의 백성이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였다.

 

8월 8일 갑오

삼군문(三軍門)에 명하여 준천(濬川)의 역부(役夫)193)  를 호궤(犒饋)하게 하였다.

 

8월 9일 을미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서 준천사 장교(將校)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어제시(御製詩) 2구(句)를 지어 내리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선온(宣醞)194)  하고, 장교로 하여금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였다.

 

8월 10일 병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8월 12일 무술

정존겸(鄭存謙)을 특별히 제수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는데, 귀양이 풀린 뒤에 처음 제수된 것이었다.

 

8월 14일 경자

임금이 유신(儒臣)을 편전(便殿)에 불러서 누(漏)를 걷은 뒤에 파하였으니, 대저 내일이 영고(寧考)195) 수신(晬辰)196)  이므로 추모(追慕)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었다.

 

8월 15일 신축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서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였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회란(回鑾)할 때에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8월 16일 임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판서에게 명하여 김주태(金柱泰) 아들의 원정(原情)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왕자(王者)의 정령(政令)이 어찌 일은 같은데 치죄(治罪)는 다르게 하겠는가? 아! 을해년197)  의 세 사람인데, 하나는 박재하(朴載河)요, 하나는 조동하(趙東夏)이며, 하나는 김윤(金潤)이다. 박재하는 공사(供辭)가 오활(迂闊)하였기 때문에 의금부에 내렸다가 그 뒤에 특별히 석방하였는데, 곤수(閫帥)198)  로서 사조(辭朝)할 때에 숭문당(崇文堂)에서 불러 본 것이 황연(怳然)히 어제와 같다. 조동하는 궁문에 임하였을 때에 그 아내가 억울함을 호소함으로 인하여 특별히 탕척(蕩滌)하였으니, 단지 김윤 한 사람만 남아 있다. 듣건대, 등문(登聞)이 있었는데 해조(該曹)에서 아직 회계(回啓)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맹랑(孟浪)함은 이미 맡고 있다. 김주태(金柱泰)는 감등(減等)을 정계(停啓)한 뒤에 배소(配所)에서 작고(作故)하였다고 하니, 듣기에 몹시 측연(惻然)하다.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박사눌(朴師訥)이 아뢰기를,
"아까 김윤(金潤)의 일로써 특별히 처분을 내렸는데, 김윤의 죄범(罪犯)은 죄적(罪籍)에 명백히 있어서 관계가 지극히 중합니다. 지금 그 손자의 호소하는 바로 인하여 문득 탕척(蕩滌)의 명을 내리시니, 법의 집행을 논의함에 반드시 다툼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내린 전교를 도로 거두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17일 계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이어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서 어필(御筆)로 ‘석 계사년 내숙’ 여섯 글자를 써 내리고, 목판(木板)에 새겨서 숭릉(崇陵)의 향대청(香大廳)에 걸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충자(沖子)에게 내리는 글을 지어서 보였다.

 

8월 18일 갑진

우승지 김재순(金載順)을 특명(特命)으로 가자(加資)하였는데, 게판(揭板)을 빨리 완성한 때문이었다.

 

채홍리(蔡弘履)를 발탁하여 승지로 제수하였다.

 

8월 19일 을사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홍낙명(洪樂命)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조경(趙瓊)을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지평 이기송(李基崧)이 아뢰기를,
"이태령(李泰齡)·구수온(具修溫)·유한신(柳翰申)은 미천(微賤)하고 무식하며 또 내력이 없는데, 명기(名器)199)  를 더럽히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니, 청컨대 모두 대간(臺諫)의 천망(薦望)에서 삭제하여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0일 병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서 이어 유숙하였다.

 

8월 21일 정미

임금이 집경당에 돌아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순아병(巡牙兵)을 습조(習操)한 뒤에 호궤(犒饋)하는 수요물(需要物)을 수어(守禦)·총융(摠戎) 두 영(營)의 예(例)에 의하여 저치미(儲置米)200)  로 회감(會減)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8월 23일 기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창의궁(彰義宮) 근처에 사는 노인에게 쌀을 내려 주었다.

 

8월 24일 경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고, 도총부(都摠府)와 옥서(玉署)201)  에 들러 척호장(陟岵章)202)  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늙은 임금과 젊은 신하가 한 당에 모였다.[老君少臣今會一堂]’는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려 옥당(玉堂)에 걸기를 명하였다. 시강(侍講)한 유신(儒臣)과 승지(承旨)에게 모두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입직(入直)한 유신은 정후겸(鄭厚謙)의 동생 정일겸(鄭日謙)이었다. 대내로 돌아올 때에 또 주원(廚院)을 역림(歷臨)하였다.

 

8월 25일 신해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들이 와서 승후(承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한 교지(敎旨)를 내리니,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인 김상복(金相福)·김상철(金相喆)·원인손(元仁孫)·김양택(金陽澤)·한익모(韓翼謨)·이은(李溵)·이사관(李思觀) 등이 의금부에서 서명(胥命)하였다.

 

임금이 효제잠(孝悌箴)을 지어 내렸다.

 

8월 26일 임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소과 초시(小科初試)에 합격한 사람과 옛 신하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모두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고 혹은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8월 27일 계축

조종현(趙宗鉉)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이평(李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어영 대장(御營大將) 장지항(張志恒)은 사람됨이 발호(跋扈)203)  하고 성품이 또한 재물을 탐하였는데, 일찍이 어영 대장에 임명되어서는 오직 자기의 하고싶은 대로만 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새로 주조하고 남은 돈 5만여 관(貫)이 간 곳을 알지 못하니 전하는 말이 낭자하였고, 심지어는 비국에 좌기(坐起)한 상신(相臣)의 입에서도 나왔는데 그도 또한 모호(糢糊)하게 대답하고 사실에 의거하여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또 양서(兩西)204)  의 군향미(軍餉米)를 해마다 돈으로 만들어서 모두 사용(私用)에 돌렸으며, 체임(遞任)함에 미쳐서는 장부에 기록하는 즈음에 허다한 전목(錢木)을 바꾸어서 빌려 주었다고 일컬었으며 태반(太半)은 거짓 기록으로써 전장(傳掌)205)  하였으니, 조가(朝家)의 종핵(綜核)206)  하는 정사에 있어서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엄명(嚴明)하게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하게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윤장렬(尹長烈)이 아뢰기를,
"흥양 현감(興陽縣監) 김취행(金就行)은 사람이 본래 우패(愚悖)한데다 노혼(老昏)함을 겸하여 연한(年限)이 이미 지났는데, 염치를 무릅쓰고 부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그 관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8일 갑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훈련 대장(訓鍊大將)에게 명하여 기고(旗鼓)207)  를 대령(待令)하게 하고, 장지항(張志恒)을 잡아들여 주전(鑄錢)하고 남은 이익 5만여 냥의 간 곳을 물었으며, 이어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였다.

 

윤득의(尹得毅)를 승지로 발탁하여 제배하였다.

 

8월 29일 을묘

이세택(李世澤)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장지항(張志恒)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포청(捕廳)에서 주전소(鑄錢所)의 서리배(書吏輩)들을 사문(査問)하였으나 문적(文跡)을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8월 30일 병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대사성(大司成) 조종현(趙宗鉉)에게 명하여 태학생(太學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유한정(兪漢靖)·박세기(朴世紀)가 유소(儒疏)라고 일컬으면서 탕제(湯劑)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뜻이 희기(希覬)208)  에 있었다. 이에 임금이 여러 유생들을 불러서 신칙하고 경계하였으며, 유한정을 삼수부(三水府)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