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1권, 영조 49년 1773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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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정사

정언(正言) 이평(李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장지항(張志恒)을 조사한 뒤에 본 사건이 탈공(脫空)209)  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의혹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군문(軍門)에서는 으레 주전(鑄錢)을 마친 뒤에 남은 이익을 비국(備局)에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인 즉 많고 적음을 조정하는 것은 오직 주장(主將)의 임의(任意)에 있는데, 처음부터 남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겠습니까? 비국에 그 수량을 줄여 허위 보고한 것은 오직 사사로이 쓰는 데 뜻을 두어, 애초에 문서에 기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 자취를 숨겼으니, 그 증거할 만한 장물(贓物)과 문권(文券)이 없는 것은 진실로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사(御史)가 단지 중기(重記)210)  만 빙거(憑據)하고 단서를 얻지 못한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살피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구일제(九日製)211)  를 행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수가(隨駕)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과 경재(卿宰)가 재실(齋室)에 입시(入侍)하여 탄일(誕日)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현임(見任)을 해면하라고 명하였다가 곧 도로 정지하였다.

 

9월 2일 무오

하교하기를,
"여러 승지를 체차(遞差)하고 정상순(鄭尙淳)·이한풍(李漢豊)·정호인(鄭好仁)·임희증(任希曾)·조창규(趙昌逵)·윤양후(尹養厚)를 승지로 삼으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연달아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삼가 보건대, 신자(臣子)로서 감히 받들어 들을 수 없는 바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대궐 뜰에서 천세를 부르고 경사를 치르는 것은 바로 온 나라가 함께 바라는 바인데, 전하께서는 모두 평상시와 같이 지내게 하시고 정부의 준례(遵禮)를 폐지하시며, 진연(進宴)은 신 등이 진달해 청한 바인데 전하께서는 곧 물선(物膳)마저도 정지하게 하셨습니다. 궐문(闕門)을 금지함에 있어서는 그 말함을 거절하는 것도 부족하여 그 몸을 아울러 거절하심이니, 이는 무슨 거조(擧措)이십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신 등의 몸이 나아갈 땅을 빌려 주시어 마음속의 정성을 모두 진달할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만약 강역(疆域)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겠다. 13일 전에는 다시 무엇을 많이 유시(諭示)하겠는가?"
하였다.

 

9월 3일 기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예조 판서를 불러 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충자(沖子)를 위하여 허락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하자,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이 억울함으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니 관계가 지극히 중한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아니하십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대신·예조 판서·승지를 모두 현임(見任)에서 해직시켜라."
하였다.

 

9월 4일 경신

임금이 환후(患候)가 있으니, 약방에서 직숙(直宿)하고, 왕세손도 감후(感候)가 있어서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김상복(金相福)·김상철(金相喆)·원인손(元仁孫)을 다시 상직(相職)에 제배(除拜)하고, 원임(原任) 여러 대신에게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였다.

 

9월 5일 신유

감시(監試)212)  의 초시(初試)에 입격한 사람 가운데 시골 선비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가 많았는데, 임금이 명년(明年) 봄에 올라올 때에는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말[馬]을 주고 양식을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9월 8일 갑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9월 11일 정묘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여러 승지와 서울에 있는 유신(儒臣)을 모두 현임(見任)에서 해면하라고 명하였으니, 임금이 때아닌 천둥의 이변으로 감선(減膳)하는 데 이르렀으나,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진계(陳戒)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아까 옥당(玉堂)과 승지를 처분하심에 근후(謹厚)하고 화평(和平)하시니, 죄를 입은 여러 신하가 감복(感服)할 뿐만 아니라 신 등도 또한 감동하였습니다. 대저 수성(修省)하는 도리는 단지 마음이 화평한 데 있으니, 마음이 화평하면 기운이 화평하고, 기운이 화평하면 얼굴이 화평하며, 얼굴이 화평하면 천지의 화평함이 응하는 것입니다. 이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를 당하여 더욱 화평한 도리에 힘써서 상하(上下)의 뜻이 사귀고 합하게 한 연후에야 천심(天心)을 감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이 탕제(湯劑)를 달여서 종일 기다리다가 입시(入侍)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드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곧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으시니 그 기상(氣像)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 때문에 번뇌한 것이 아니다.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어찌 복용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9월 12일 무진

신익빈(申益彬)을 승지로 삼았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추수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천둥하고 번개 치는 이변이 있으니, 어진 하늘의 경고(警告)가 이와 같이 곡진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가득함을 이루면 가지기 어렵고, 밝게 다스림은 근심스러운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됨에 풍속이 날로 야박하여, 위로는 평안함에 길들여진 근심이 있고 아래로는 안일함을 즐기는 버릇이 있어서, 백관(百官)은 게으르고 선비의 기습(氣習)이 어긋났으니, 공경함과 태만함 사이에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이 판가름되고, 사라짐과 길어지는 즈음에 막힘과 통함이 나누어집니다. 시험삼아 근일의 일로써 말한다면, 전례(典禮)를 행함이 마땅한데 폐지되어 행하지 아니하고, 뭇 사람의 뜻을 막기 어려운데 울분함이 소통되지 못하며, 궐문(闕門)이 때로 혹시 통하지 아니하여 경재(卿宰)가 방황함에 이르니 상하(上下)가 막히는 탄식이 있고, 조야(朝野)는 화평한 기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의 일이며, 어찌 아름다운 징조(徵兆)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로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옥당(玉堂)에서 연차(聯箚)213)  하여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8도(八道)의 구환곡(舊還穀) 3만 석을 참작하여 봉납(捧納)할 것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이 아뢰기를,
"과거(科擧)의 사체(事體)가 얼마나 엄중한데 어저께 두 유생(儒生)이 식점(食點)214)  이 차지 아니하였는데도 불법으로 관시(館試)에 응시한 것은 이미 지극히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지척의 하문(下問)에 감히 국자장(國子長)215)  이 응시하기를 허락하였다고 일컬었으며, 그 본관(本館)에서 초기(草記)216)  함에 미쳐 천청(天聽)을 기만한 죄가 스스로 드러났으니, 정거(停擧)에만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진사(進士) 김윤구(金潤九), 생원(生員) 김익하(金益河)를 아울러 조율(照律)하여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궐문(闕門)을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스스로 해당한 율(律)이 있는데, 양씨의 성(姓)인 사람이 거짓으로 입격한 유생이라고 일컬으면서 불법으로 연석(筵席)에 오른 것은 전에 듣지 못한 일이니, 바로 하나의 변괴(變怪)입니다. 청컨대, 강계(江界) 사람 양필대(梁必大)를 엄하게 형장(刑杖)을 가하여 멀리 귀양 보내며, 해당 대사성과 입시(入侍)한 승지도 조검(照檢)하지 못한 실수가 있으니, 아울러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통을 얻었다. 아울러 아뢴 대로 하되, 양필대(梁必大)만 멀리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기사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므로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약방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기후(氣候)는 어찌 내국(內國)이 직숙(直宿)하는 데 이르겠는가만, 뜻은 여러 신하를 억누르는 데 있다. 오늘부터 직숙하지 말고 차비(差備)의 대령(待令)도 본원(本院)217)  에서 예전대로 윤직(輪直)하라."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원직(院直)218)  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어찌 뭇 신하를 억누르는 마음으로 이런 거조(擧措)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개연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교하였는데 영부사가 개탄스러워하는 뜻을 능히 진달하였으니, 나에게는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물며 《억잠(抑箴)》을 짓는 때이겠는가? 호조(戶曹)로 하여금 표피(豹皮)를 가져와서 대신(大臣)의 가마 안에 펴게 하라."
하고, 비로소 여러 재신(宰臣)에게 입시(入侍)하기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에게 말하기를,
"전에 집경당(集慶堂)에서 ‘육아편(蓼莪篇)219)  ’을 외었는데 오늘은 마땅히 ‘척호장(陟岵章)220)  ’을 외겠다."
하고, 임금이 일어나 앉아서 삼장(三章)을 외었으며, 《억잠(抑箴)》 16구(句)를 지었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름을 이미 ‘억잠’이라고 하였으니, 억(抑)으로 운(韻)을 삼았다.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지어 올리라. 마땅히 위무공(衛武公)221)  의 아침저녁으로 풍송(諷誦)하는 뜻을 본받아 책을 만들어 자리 오른쪽에 놓아 두겠다."
하였다.

 

9월 14일 경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9월 15일 신미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태학생(太學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임금이 지은 《억잠(抑箴)》을 보이고, 이어 대사성과 여러 유생에게 명하여 그자리에서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으며 각기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 또 잡과 초시(雜科初試)에 입격한 사람을 불러 보았다.

 

9월 17일 계유

유생(儒生)에게 전강(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곽용제(郭龍濟)·손처인(孫處仁)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9월 18일 갑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으니, 제4실(第四室) 어용 옥축(御容玉軸) 뒤의 배첩(褙貼)에 탈(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位]에 나아가서 사배(四拜)를 행하였다. 곧 전중(殿中)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내려와 사배를 행하였다. 이어 전중에 들어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재실(齋室)에 나아가서 찬례(贊禮)222)   이하에게 상(賞)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 담장 밑에 사는 백성에게 금년을 한(限)하여 역(役)을 면제하였다. 글 1구(句)를 지어 내리고, 승지와 사관(史官)과 시위(侍衛)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이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서 배례를 행하고 담장 밑에 사는 백성에게 각각 쌀을 내려 주었다.

 

9월 19일 을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교리 이경양(李敬養)·이상암(李商巖)이 말하기를,
"직숙(直宿)을 철폐하는 날에 여러 신하들을 억누른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그때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한마디 말로 환수하기를 청한 이가 없었으니, 신 등은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환수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아뢴 바는 지극히 잘못이다. 어찌 직숙(直宿)의 전교를 회수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는가? 너무나 방자하다."
하고, 이어 이경양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9월 20일 병자

정언(正言) 박종언(朴宗彦)이 상소하여 탄일(誕日)에 빨리 하의(賀儀)를 거행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무안 현감(務安縣監) 임붕한(林鵬翰)은 조적(糶糴)223)  으로 원망이 일어나고 여자를 사랑하여 비방을 불러일으키며, 흥덕 현감(興德縣監) 신달하(申達夏)는 본디 성품이 탐혹(貪酷)하여 오로지 모리(牟利)만 일삼아 지나치게 형장(刑杖)을 썼으며, 경내(境內)의 재가(再嫁)한 여자를 수괄(搜括)하여 간음(奸淫)이라고 일컬어 관비(官婢)에 속(屬)하였다가 곧 속전(贖錢)을 받고 놓아주었으며, 그 밖에 나쁜 정사는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당하관(堂下官)이 교자(轎子)를 타는 것은 금령(禁令)이 심히 엄한데, 충청 도사(忠淸都事) 심중규(沈重奎)는 방자하게 교자를 타고 역로(驛路)에 폐단을 끼쳤으니, 신의 생각에는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두 현감(縣監)의 일이 과연 이와 같으면 이에 그칠 수 없으나 소문은 또한 믿기 어려우니, 아울러 해부(該府)224)  로 하여금 엄하게 물어서 구초(口招)를 받고, 심중규도 또한 방자하니 해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서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증자 계수족장(曾子啓手足章)225)  을 읽고 이어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리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전교를 내리십니까? 유신(儒臣)이 정말로 직숙(直宿)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면 죄가 죽임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니, 누군들 목욕 청토(沐浴請討)226)  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만, 그도 사람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차대(次對)에 비로소 와서 아뢴 바가 또 이와 같으니, 내가 개연(慨然)해 하는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이경양(李敬養)·이상암(李商巖)을 잡아들이고 하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직숙(直宿)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이것이 역심(逆心)이 아니냐?"
하니, 이경양 등이 대답하기를,
"직숙을 정지하기를 청한 것이 아니라, 제신(諸臣)을 억누른다는 하교를 환수하기를 감히 청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듣는 것이 밝지 못하나, 한림(翰林)은 귀가 밝다."
하고, 곧 한림에게 물으니, 한림 홍국영(洪國榮)이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이 듣지 못하였는데 네가 어찌 감히 지척에서 기망(欺罔)하느냐?"
하고, 곧 각각 형추(刑推)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여 구하였다[釣名]고 지만(遲晩)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이는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여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김상복을 삭직(削職)하고, 두 사람을 지만하게 하였다. 이경양은 금갑도(金甲島)에 귀양 보내고, 이상암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 보내며, 입시(入侍)한 양사(兩司)는 특별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며, 입직(入直)한 유신(儒臣)도 간판(刊版)227)  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21일 정축

임금이 창의궁(彰儀宮)에 거둥하여 이경양(李敬養)을 흥양(興陽)으로, 이상암(李商巖)을 북청(北靑)으로 고쳐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9월 22일 무인

김응순(金應淳)을 대사헌으로, 홍검(洪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좌의정·우의정이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말하기를,
"금년 10월 초4일은 바로 선묘(宣廟)228)  께서 계사년229)  에 용만(龍灣)230)  에서 회가(回駕)하여 경운궁(慶運宮)에서 하례를 받던 날이고 성상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50년 되는 해입니다. 겨우 탄신(誕辰)을 지났고 또 상후(上候)가 평복(平復)하신 즈음을 당하였는데, 이제 마침 계사년입니다. 하물며 그 때와 달[時月]이 앞서지도 않고 뒤지지도 않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기이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여 하례를 받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그런가? 그러면 마땅히 하례를 받겠다."
하였다. 이어 그날에 하례를 받고 반사(般赦)231)  를 명하였다. 또 영의정·삼사(三司)의 삭파(削罷)와 이경양(李敬養) 등의 정배(定配)를 탕척(蕩滌)하라고 명하였다.

 

9월 23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9월 24일 경진

정언(正言) 이홍제(李弘濟)가 아뢰기를,
"탄핵을 입고서 도리어 헐뜯는 것은 진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라서, 일찍이 몇번 신칙하시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박종언(朴宗彦)이, 대직(臺職)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말에 오르내렸으니, 진실로 마땅히 부드러운 말로 순하게 받아 들여서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곧 스스로 논열(論列)한 글에 현저히 분박(噴薄)하여 이기기를 겨루는 말이 있었으며 조정(朝廷)의 위계가 엄하고 두렵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청컨대 대망(臺望)232)  을 개정하소서. 승보(陞補)233)  를 매달 제술(製述)로 선발하고, 학제(學製)234)  를 분등(分等)235)  으로 설행(設行)함은 법의 뜻이 있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억지로 짜맞추어 기한을 어기고 반드시 세말(歲末)의 큰추위를 당해서야 연일 선비를 모으면서 매양 군색하고 급박한 한탄이 있으니, 나이 젊은 유생이 손상을 입는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부를 권장하여 성취하는 도리에 방해가 됩니다. 금년에 대해 말하면, 승보는 단지 처음에만 뽑고 학제(學製)는 한 차례만 거행하였으니, 전후 대사성(大司成)과 교수(敎授)를 종중 추고(從重推考)236)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25일 신사

이익원(李翼元)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홍검(洪檢)이 아뢰기를,
"매양 연분(年分)237)   때가 되면, 도신(道臣)은 보고된 것이 혹시 너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재감(裁減)하지 않을 수 없고, 수령(守令)은 영문(營門)에서 감삭(減削)할 것을 고민하여 그 감삭 당하고 남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혹 보고한 바에 의하여 청함을 얻는 고을이 많이 있으나 구분하여 처리하기가 어려워서 그 표급(俵給)하고 남은 결(結)을 가지고 혹은 공해(公廨)를 보수하는 데 쓰기도 하고, 혹은 민역(民役)을 방급(防給)한다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필경은 하배(下輩)의 손에 건몰(乾沒)되어 한갓 국계(國計)만 손실되고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일의 어처구니 없음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제도 도신(諸道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만일 분표(分俵)한 뒤에 남는 것이 있으면 곧 감영(監營)에 보고하게 하고, 혹시 명령에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발견되는대로 중하게 다스리게 하소서. 승상 과시(陞庠課試)238)  를 설립함은 오로지 권면하고 장려하기 위한 것인데, 근년 이래로 선비가 글을 읽지 아니하고 오로지 첩경(捷徑)만 생각하여 문체(文體)는 신기(新奇)한 것을 숭상하여 상도(常道)를 버리고, 서법(書法)은 궤괴(詭怪)함에 힘써서 뭇 사람의 눈을 현혹하니, 마음 속으로 개탄스러움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예전 송(宋)나라 신하 구양수(歐陽脩)는 지공거(知貢擧)가 되면서 서곤체(西崑體)239)  를 배척하고 고문(古文)을 취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일변(一變)하였으니, 가우(嘉祐)240)   때 인재의 성(盛)함이 지금까지 칭송됩니다. 대저 시문(時文)의 성쇠(盛衰)는 세도(世道)의 쇠퇴와 융성에 관계가 있으니 국자장(國子長)에게 신칙하여 문체가 부화(浮華)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낮추어 내치고, 필법이 험벽(險僻)하여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을 물리쳐서, 사습(士習)을 만회(挽回)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랐다.

 

9월 26일 임오

장령(掌令) 김광악(金光岳)이 상소하여, 음관(蔭官)의 초사(初仕)를 30세 후로 한정하고, 조적(糶糴)의 정봉(停捧)을 적당하게 헤아려서 재감(裁減)하여 기한 전에 반포하며, 상주(尙州)·괴산(槐山) 사이의 작은 길은 조령(鳥嶺)의 예(例)를 따라 진(鎭)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근년에 장시 도사(掌試都事)는 전혀 사람을 고르지 아니하여, 이극생(李克生)은 시험장을 설치한 뒤에 기생(妓生)을 끼고 행음(行淫)하였고, 임관주(任觀周)는 전방(全榜)241)  을 돈이 많고 행대(行貸)하는 무리에게 사정(私情)을 두었으며, 홍빈(洪彬)은 전혐(前嫌)을 피하지 아니하고서 양양(揚揚)히 법을 어겨 과장에 나아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도(道)가 혀를 내두르며 온 세상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이극생·임관주·홍빈은 모두 삼사(三司)의 망(望)을 개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수령(守令)의 연한(年限)을 정하는 요청은 말은 비록 옳으나, 나는 생각하건대, 그 나이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사람에 있을 것이니, 어찌 법을 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먼저 정봉(停捧)하는 요청은 비록 활리(猾吏)와 토호(土豪)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 구포(舊逋)242)  를 정봉(停捧)하라는 명이 이미 있었으니 소급할 수는 없다. 해서(海西) 세 시관(試官)의 일은 이미 해부(該府)로 하여금 묻게 하였으며, 또한 그 사람을 아는데 어찌 바로 이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이극생(李克生)·임관주(任觀周)는 과연 조목을 들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진실로 터무니 없는 일인데, 풍문(風聞)은 믿기 어려우며 또한 사람을 애매(曖昧)하게 둘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곧 엄문(嚴問) 구초(口招)하고 아침을 기다려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라. 홍빈(洪彬)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과 다름이 있으며 달리 잡은 장물(贓物)이 없는데, 일체 아울러서 이를 요청함은 혼동(混同)함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직(司直) 강시현(姜始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이 동정(動靜)은 얼마나 존엄(尊嚴)하고 경중(敬重)한 것인데, 혹시 동가(動駕)하실 때에 삼군(三軍)은 단지 입직(入直)한 사람만으로 거행하고, 백관(百官)은 단지 비국 당상만으로 맞이하게 하였으니, 반항(班行)이 구차하여 체모를 이루지 못하고, 진오(陣伍)가 착락(錯落)하여 소홀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80세의 성상께서 옥체(玉體)를 수고로이 거둥하시는데, 거개가 모두 편안하게 집에 있으면서 어느 때에 궁(宮)을 나가시고 어느 때에 궁에 돌아오시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는 무슨 분의(分義)243)  입니까? 경용(經用)244)  의 저축은 나라를 운영(運營)하는 급선무인데 지금 수년의 식량이 없으니, 만약 큰 흉년을 만나면 억만 생령(生靈)을 장차 무엇으로 구제하겠습니까? 문(文)·음(蔭)·무(武)의 침체(沈滯)를 소통하게 하시는 성상의 뜻으로 매양 대정(大政)245)  을 당하여 사륜(絲綸)246)  을 자주 내렸으나, 경향(京鄕)의 세력이 없는 사람이 한번 파직되어 10년동안 다시 조용(調用)되지 못한 자는, 헤어진 옷과 짚신으로 거의 거지와 같습니다. 신의 옅은 소견으로는 8도 수령을 문·음·무로 돌려가면서 간간이 차출(差出)하면 침체를 소통하는 방법이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살피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충자(沖子)에게 내리는 글을 지어서 보였다.

 

팔도(八道)·양도(兩都)에 명하여, 구포(舊逋)는 정봉(停捧)하고, 금년 선무포(選武布)를 탕감(蕩減)하며, 더욱 심한 고을의 결전(結錢)도 탕감하고, 경공인(京貢人)의 1년 모조(耗條)247)  로 남아 있는 것도 탕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민(市民)248)  의 요역(徭役)도 탕감하고, 오늘부터 내달에 한(限)하여 반촌(泮村)249)  의 속전(贖錢)을 탕감하며, 각도(各道)의 추노(推奴)250)  와 징채(徵債)를 금년에 한하여 아울러 금하게 하였다.

 

9월 27일 계미

김광악(金光岳)을 함문(緘問)251)  하라고 명하였는데, 김광악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시위(試圍)252)  를 이미 설치한 뒤에 상시관(上試官)과 할봉관(割封官)이 한 방에 같이 있는 것은 본디부터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옛 법인데, 이극생(李克生)은 그와 함께 유숙하는 것을 혐의하여 공공연히 쫓아 내었고, 그가 사랑하는 기생(妓生)과 마음대로 행락(行樂)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선비가 함께 분노하여 말하기를, ‘밤을 타서 기생을 끼고 놀았으니 반드시 묘리(妙理)가 있을 것이다.’ 하고, 다른 글제를 내기를 청하여 과장(科場)이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며, 임관주(任觀周)는 〈과시(科試)를 관장하는〉 도사(都事)에 제수된 이후로 이미 추잡한 소문이 있었고 문객(門客)의 돈을 받는다는 말이 또한 낭자하였는데, 그 방목(榜目)이 나오자 문필은 없고 돈이 많은 자가 반(半)을 넘는다고 침 뱉고 욕하는 말이 해서(海西) 사람들의 입에서 파다하였습니다. 대각(臺閣)253)  이 사람을 논하는 데는 풍문(風聞)으로 〈논하기를〉 허용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눈으로 보고 증거를 참고한 연후에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극생(李克生)과 임관주(任觀周)를 잡아 들여서 하문(下問)한 뒤에 놓아 보냈다.

 

9월 28일 갑신

천둥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전정(殿庭)에 내려가서 향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갔다가 곧 양정재(養正齋)에 거둥하였다. 김기대(金器大)·윤동절(尹東晳)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양정재는 바로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외택(外宅)254)  인데 왕비가 탄생한 곳이니, 임금이 추모(追慕)하는 정성으로 간혹 거둥하였으며, 이어 육상궁(毓祥宮)과 의열궁(義烈宮)을 역림(歷臨)하였다.

 

임금이 〈때아닌〉 천둥의 이변으로 3일을 감선(減膳)하고, 경운궁(慶運宮)의 연례(宴禮)를 특별히 정지하였다.

 

홍용한(洪龍漢)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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