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술
정언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순천 부사(順天府使) 구채오(具采五)가 봄에 세곡(稅穀)을 포장해 실을 적에 1천 5백 석을 한 배에 넘치게 실어서 바로 그 경내(境內)에서 파선(破船)되어 썩게 되었는데, 약간을 건져 내어 민간에 나누어 주고 환상미(還上米)로 바꾸어서 구차하게 그 수량을 채웠으므로 원성(怨聲)이 길에 깔렸고 떠도는 말이 낭자(狼藉)하였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무안 현감(務安縣監) 임붕한(林鵬翰)은 묵어서 썩은 환상미 7백 석을 개색(改色)255) 한다면서 민간에 나누어 주었는데, 1석(石)의 수량이 5, 6말에 불과하였고, 5, 6말의 쌀을 8월에 나누어 주었다가 15말을 두어 달 후에 징납(徵納)하니, 어찌 궁민(窮民)이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홍주 영장(洪州營將) 이언방(李彦邦)은 밝게 살피지 못하여 도둑을 잡을 때에 간혹 옥석(玉石)256) 이 함께 화를 당하는 탄식이 있었으며, 그의 집이 해영(該營)과 멀지 아니한데 일가(一家)와 친구의 추노(推奴)·징채(徵債)를 앞장서서 담당하고, 장교(將校)를 많이 내보내서 민간에 횡행(橫行)하여 소문이 해연(駭然)하니,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구채오(具采五)·임붕한(林鵬翰)의 일은 듣기에 몹시 해연(駭然)하니, 그대로 시행하라. 외방의 영장(營將)은 민폐(民弊)와 관련되므로 일찍이 이미 신칙하였는데, 그의 일가를 위하여 추노(推奴)하였으니 무상(無狀)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에 그칠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검의(檢擬)257) 하지 말게 하여 다른 사람을 힘쓰게 하라."
하였다.
10월 2일 정해
임금이 위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258) 를 본받아서, 충자(沖子)와 대소 신공(大小臣工)을 면계(勉戒)하는 글을 지어서 내렸다.
10월 3일 무자
남평 현감(南平縣監) 남기명(南紀溟)을 삭직(削職)하여 10년을 자목(字牧)259) 에 의망(擬望)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나이가 차지 아니한 자를 충군(充軍)한 것이 세 사람이고, 대(代)를 채우지 아니한 것이 두 사람이라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0월 4일 기축
임금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서 전무(前廡)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의정부와 육조(六曹)에서 찬(饌)을 올리고, 왕세손이 잔[爵]을 올려 헌수(獻壽)하였으며, 봉조하(鳳朝賀) 홍봉한(洪鳳漢) 이하가 차례로 잔을 올려 헌수하였다. 임금이 민백흥(閔百興)·김기대(金器大)·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특별히 잔을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옛날 두 일을 추모(追慕)하여 경운궁 앞에서 하례를 받고 연회를 베풀어, 선왕(先王)을 빛내는 뜻을 이어 행하고 종국(宗國)을 위하여 천만년을 빈다.’는 글을 지어 내려 도창(導唱)으로 하여금 창(唱)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장(章)을 지어 내려 도창으로 하여금 선창(先唱)하게 하고, 여러 신하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지나치지마는 내가 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척강(陟降)이 받으시는 것이다."
하였다. 선교관(宣敎官)·전교관(傳敎官)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기를 명하고, 임금과 신하가 머리에 꽃을 꽂고 돌아왔다.
김제행(金悌行)을 승지로 삼았으니, 선교관(宣敎官)으로서 새로이 가자(加資)했기 때문이었다.
10월 5일 경인
사간(司諫) 이혜조(李惠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조(聖祖)260) 께서 이 궁(宮)에 임어(臨御)하실 때는 곧 지극히 괴롭고 지극히 어려운 시기였으며, 우리 성상께서 이날의 계술(繼述)하신 일은 곧 임금이 대대로 현명하여 태평성세가 계속된 나머지입니다. 지금으로써 예전을 비교해 보건대, 진실로 일은 반(半)만 하여도 공(功)은 배(倍)가 될 수 있는 일대기회(一大機會)입니다. 그러나 삼남(三南)의 풍년과 흉년이 고르지 못한 데 대해서는 다음 해에 구제하는 대책을 듣지 못하였고, 제사(諸司)의 재력(財力)이 다하였는데 때가 되어서는 강구(講究)하는 방법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며, 입을 찌르는 간절한 논의가 전석(前席)에 상달되지 아니하고 눈 앞에 미봉(彌縫)하는 계책으로써 모두 좋은 계산으로 삼으니, 식자(識者)의 근심함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장계(狀啓)로써, 6천 결(結)을 추가로 급재(給災)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7천 결의 급재를 허락하였다. 김상복이 또 전라 감사의 장계로써 요청한 2만 2천 결의 추가 급재를 청한 것 가운데 절반을 획급(劃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검(洪檢)이 아뢰기를,
"경과(慶科)의 기일이 점점 가까와 오니, 각도의 많은 선비가 장차 모두 서울에 모일 것입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 선비를 뽑는 법이 시문(時文) 각체(各體)일 뿐이니, 한(漢)나라의 효렴(孝廉)261) 과 당(唐)나라의 향공(鄕貢)262) 에 비하여 소략(疏略)함에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는데, 시험의 체통이 근래에 더욱 엄하지 아니하고 선비의 풍습도 예전과 같지 아니합니다. 시험삼아 장위(場圍)263) 에서 글을 짓는 것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짓고 많은 사람이 써서 올리며, 심지어는 일접(一接)264) 이 모두 그러하여 자구(字句)와 말뜻[語意] 사이에 혹시 서로 같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사세(事勢)가 본래 그러하니, 아예 스스로 짓지 아니하고 전부를 베껴서 올린 자가 또한 혹시 유리할 수도 있으니, 주객(主客)265) 이 혼동되기 일쑤라서 합격하고 떨어짐이 일정치 않습니다. 이번 과거로부터 비롯하여 만약 이같은 폐단이 있으면 모두 낙과(落科)시키고 또한 유벌(儒罰)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소민(小民)에게 명하여 소회(所懷)를 진달하게 하였다.
10월 6일 신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활쏘기를 시험한 무사(武士)에게 상(賞)을 내렸다.
10월 7일 임진
임금이 수진궁(壽進宮)에 나아가서 이문(里門) 안에 사는 백성에게 한달을 한(限)하여 역(役)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칠언시(七言詩) 1구(句)를 지어 내리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돌아와서 대신(大臣)과 형관(刑官)에게 옥수(獄囚)를 심리(審理)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재해가 아주 심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정지해 물리게 하였다.
10월 8일 계사
지평 황택인(黃宅仁)이 상소하여,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하여 급재(給災)를 정밀하게 살피기를 청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아산 현감(牙山縣監) 윤득흠(尹得欽)은 멍청하고 어두우며 전혀 지각(知覺)이 없어서, 예사로운 청리(聽理)266) 도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여 한 가지 일을 두 번 송사(訟事)하게 하였습니다. 세미(稅米)를 받을 때에는 지나치게 큰 말[斗]을 써서 더 징수하는 것이 매석(每石)마다 두어 말에 이르렀으며, 포구(浦口)에서 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취하는 백성에게 약간의 푼돈[分錢]을 주고 징색(徵索)함이 번거롭고 가혹하였습니다. 송화 현감(松禾縣監) 남태헌(南泰憲)은 두 차례 거중(居中)267) 을 일미(一味)로 버티고 앉아 법을 어겨가며 향임(鄕任)의 제수와 파면을 모두 뇌물을 받는 데로 귀착(歸着)시켰습니다. 고성 현령(固城縣令) 정여익(鄭汝益)은 간사한 기생(妓生)이 안에서 정사를 해롭게 하고 교활한 아전이 밖에서 권세를 농락하였으며, 그 곡식이 귀할 때에는 쭉정벼로서 색책(塞責)을 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실곡(實穀)으로 받아 돈을 만들어서 오로지 사복(私腹)을 채우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세 고을 수령은, 견책(譴責)하여 파면하는 율로써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김기장(金基長)은 본래 주색(酒色)의 무리로서 추패(醜悖)한 일이 많으므로 침 뱉고 더럽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제까지 벼슬에 있으면서 전혀 검속(檢束)함이 없으니, 간태(刊汰)268) 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말로 비답(批答)하고, 세 고을 수령의 일은 입시(入侍)하여 발계(發啓)269) 하라고 명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대사헌으로, 윤승렬(尹承烈)을 대사간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병조(兵曹)·호조(戶曹) 판서와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과 선혜청 당상[惠堂]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택인(黃宅仁)의 거조(擧措)가 창황(惝慌)270) 하다. 이미 하교하였으면 마땅히 전계(傳啓)해야 할 것인데, 진장(陳章)271) 도 아니고 소회(所懷)도 아니면서 아뢴 바가 이상하다. 지평(持平)·정언(正言)의 통망(通望)을 전에 이미 신칙하였는데, 이같은 형편없는 사람을 지평(指平)으로 삼아서 한번 입시(入侍)하자 추태(醜態)가 이미 드러났으니, 임금이 비록 쇠하고 늙었으나 기강(紀綱)을 세워야 마땅하다. 황택인을 대망(臺望)에서 특별히 뽑아 버리라."
하였다. 내빙고(內氷庫)·외빙고(外氷庫)에서 얼음 간직하는 것을 반(半)으로 감하게 하였으며, 강가의 백성[江民]은 얼음을 깨게 하고, 운반해 들이는 것은 호조·병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9일 갑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서 삼강(三江)의 늙은 백성들을 불러 들여서 얼음을 저장할 때의 일을 묻고, 얼음을 저장할 때에 20일을 한정하여 역(役)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서 재숙(齋宿)하였다.
10월 10일 을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지평 안대제(安大濟)가 아뢰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유한경(兪漢炅)은, 일전에 대신(大臣)이 연중(筵中)에서 탕척(蕩滌)하기를 아뢰어 이미 탑전(榻前)의 하교에서 나온 일을, 아래에서 흐리멍덩하게 하여 함부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율로써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도사(前都事) 오언상(吳彦相)은 세상에서 지점(指點)272) 하는 바가 되어 제목(題目)을 〈보고는〉 물정(物情)이 놀라워 했는데, 오언상은 이미 체임(遞任)되어 전관(銓官)에 제배(除拜)되었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前) 병사(兵使) 조계태(趙啓泰)는 예궐(詣闕)할 때에 감히 편하게 여(輿)를 탔으므로 거리에서 모두 지목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고(故) 사부(師傅) 이세환(李世瑍)의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하고, 연시연(延諡宴)273) 의 수요(需要)274) 를 특별히 돕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간(司諫) 이태정(李台鼎)은 나이가 지금 몇인가?"
하니, 69세라고 대답하자 승지(承旨)로 발탁하여 제수하였으며, 황택인(黃宅仁)에 대한 하교를 특별히 정지하였다.
10월 11일 병신
어필(御筆)로, ‘탄생당 팔십서(誕生堂八十書)’ 여섯 글자를 써서,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보경당(寶瓊堂)에 현판(懸板)을 걸게 하였다.
임금이 이광의(李匡誼)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였으니, 고 사부 이진망(李眞望)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서형수(徐逈修)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2일 정유
심이지(沈履之)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고 사부 이세환(李世瑍)의 시호(諡號)를 효헌(孝獻)으로 하였다.
예조 판서 민백흥(閔百興), 참판 정후겸(鄭厚謙), 참의 송명순(宋明淳)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니, 장릉(章陵)·명릉(明陵)·순강원(順康園)을 개수(改修)한 공로(功勞)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3일 무술
조중회(趙重晦)를 대사헌으로, 이득순(李得淳)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5일 경자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로, 서유린(徐有隣)을 대사헌으로, 이담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헌신(憲臣)의 선계(先啓)로 성상의 굽어 살피심을 입어 연중(筵中)에서 하교하심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신의 자정(自靖)하는 뜻은 다만, 벼슬길에서 자취를 감추고 편히 쉬면서 허물을 보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 경(卿)을 익히 알고 있다. 지난번 구저(舊邸)275) 에서 문에 앉아 경에게 일렀으니, 경은 거의 생각날 것이다. 그 뒤에 괴이한 거조는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臺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첩정(牒呈)으로 인하여, 교동(喬桐)에 설진(設賑)276) 하는 일은 본영(本營)277) 근방의 연읍(沿邑)278) 의 첩가곡(帖價穀)279) 과 진곡(賑穀) 가운데에서 2천 석을 한정하여 획급(劃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 신치권(申致權)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당초에 조급하게 나온 것은 이미 예의에 어긋나거니와 그 정사를 행함에 미쳐서는 사사로이 구제하는 일이 많아, 무릇 차제(差除)한 바가 인아(姻婭)가 아니면 족속(族屬)이므로 공론이 불울(拂鬱)280) 해 하며, 진신(搢紳)이 해괴하게 생각해서 비웃고 있습니다. 일전의 사헌부 계달(啓達)은 이미 정주(政注)281) 로서 간절히 경계하였는데, 몹시 급하게 상소를 올려 바로 정사에 나아가 전혀 염의(廉義)가 없이 한결같이 벼슬만 탐하였으니, 총재(冢宰)282) 의 중한 임무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16일 신축
정언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과거 시험이 엄하지 못함이 요즘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방목(榜目)이 한번 나오면 말들이 분분하여 그릇된 버릇이 이미 고질이 되었고, 사사로운 뜻이 넘쳐서 시권(試券)을 받을 즈음에 농간(弄奸)하는 단서가 없지 아니하며, 축(軸)을 나눌 때에도 매양 사정(私情)을 쓰는 폐단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고관(考官)283) 을 특별히 골라서 엄하게 신칙을 가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요즈음 새문[新門] 밖 사대부(士大夫) 집에 4·5명의 적한(賊漢)이 밤을 타서 들어와서 칼을 뽑아 공갈하고 집에 간직한 물건을 겁탈해 갔는데, 강도(强盜)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도성(都城)의 지척에서 이런 도둑의 폐단이 있었는데 마침내 수색하여 체포한 일이 없으니, 해당 대장(大將)284) 에게 특별히 파면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첫 머리에 진달한 일은 먼저 신칙할 것이며, 해당 대장은 마땅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10월 18일 계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서 선비를 시험하여 유학(幼學) 이겸환(李謙煥) 등 20명을 뽑았다. 이 과거(科擧)는 모름지기 세가지 기쁜 일을 합친 것이었으니, 임금이 전 계사년285) 회란(回鑾) 때의 일을 추모(追慕)하였고, 의주(義州)와 영유(永柔)는 선묘(宣廟)286) 가 오래 주필(駐蹕)한 땅이기 때문에 종이 머리[紙頭]에 ‘의(義)’ 자(字)와 ‘영(永)’ 자(字)를 쓰게 하여 각각 한 사람을 뽑아서 〈합격자〉 20명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이겸환(李謙煥)을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에 제수하여 호조(戶曹)로 하여금 옥관자(玉貫子)를 주게 하였는데,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며 이원익이 옛날 용만(龍彎)에서 수가(隨駕)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서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이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서 무과 전시(武科殿試)를 행하고, 영유(永柔)·의주(義州)의 문과 신은(文科新恩)에게 풍악을 내려 주었다.
10월 19일 갑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신은(新恩)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이겸환(李謙煥)을 승지로, 이상로(李商輅)를 지평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이상로는 곧 이의중(李毅中)의 아들이었다.
영유(永柔)·의주(義州)의 문과(文科)에 합격한 사람이 시골로 내려갈 때에 말[馬]과 양식을 주며, 무과(武科) 합격자에게도 양식을 주라고 명하였다. 정징최(鄭徵最)·유패흥(劉沛興)이 주서 권점(注書圈點)287) 에 들었다. 정징최와 유패흥은 바로 영유·의주의 신은(新恩)인데, 관서(關西) 사람이 주서 권점에 들어간 것은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10월 20일 을사
정언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신치권(申致權)이 전(前) 이조 판서의 파직을 논할 적에 여러 사람을 낱낱이 들어 애써 배제(排擠)한 거조(擧措)가 있었고, 심지어 성모(聖母)288) 의 지친(至親)과 선정(先正)의 후손에 대해서는 이미 녹용(錄用)하라는 승전(承傳)이 있었는데, 지명(指名)하여 주대(奏對)할 때에 이 두 집을 전가(銓家)289) 의 족친이라고 말하며 ‘사정(私情)에 따른다.’는 죄과(罪科)에 싸잡아 돌렸으니, 비록 사람을 모함하는 데 급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해괴한 거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생각에는 지평 신치권을 빨리 견삭(譴削)을 시행하고 다시 대망에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臺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집의(執義) 이시정(李蓍廷)이 아뢰기를,
"감찰(監察)의 직책은 바로 옛날 전중 어사(殿中御史)로서 체모(體貌)가 매우 높고 책임도 중하여 대신(大臣)의 공회(公會)에서 더불어 마주 읍(揖)하니, 이는 진실로 당하관(堂下官) 중에서도 아주 잘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골라서 추천하지 않는 자가 많아 문관(文官)으로는 운각(芸閣)290) 에 분속(分屬)되고, 무관(武官)으로는 말천(末薦)으로 6품에 오른 자가 간혹 섞였으니, 이런 비미(卑微)한 사람으로 어떻게 과거 시험을 감독하고 조반(朝班)을 탄압(彈押)하게 하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문관은 승문원(承文院)에서, 무관은 선천(宣薦)291) 에서 그 풍력(風力)292) 이 있는 자를 각별히 골라서 차출하면 마땅할까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의 경과(慶科)는 진실로 왕첩(往牒)293) 에 드물게 있는 일인데, 장옥(場屋)294) 이 협착하여 거자(擧子)로서 밟혀 죽은 자가 자그마치 근 10명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집 근처에도 이 비참한 지경을 만난 자가 있으니 신은 놀라고 측은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함께 보이는 과거(科擧)는 절제(節製)와 달라서 대궐 안에 설치하면 땅이 좁고 사람이 많은 폐단을 면하지 못하여, 한 사람이 넘어지면 만 사람[萬夫]이 밟아 비록 맹분(孟賁)295) 과 하육(夏育)296) 의 용맹이 있을지라도 구제할 수 없으니 어찌 크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전국적인 규모의 과거는 구궐(舊闕)의 넓은 땅에 설치하여 미리부터 들어오게 한 연후라야 밟고 다치는 폐단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제 너의 진달한 바를 들으니 어찌 소가 헐떡거림[牛喘]297) 에 비(比)하겠는가? 오부(五部)에 분부하여 자세히 물어서 아뢰게 하라. 대저 정시(庭試)는 전정(殿庭)이 아니면 춘당대(春塘臺)인데, 구궐(舊闕)은 바로 내가 근년에 처음 시작한 것이다. 비록 고례(古例)라 하더라도 과장(科場)을 설치하는 처소(處所)는 막중(莫重)한데 신하가 어찌 감히 청하겠는가? 그리고 임금의 시어소(時御所)를 신하가 또한 청하겠는가? 이는 오활(迂闊)할 뿐만 아니라 분의(分義)가 한심스럽다. 이미 한심스럽다고 하였으니 어찌 인혐(引嫌)을 기다리겠는가? 본직(本職)을 체직(遞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친히 전작(奠酌)을 행하였다.
10월 21일 병오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전조(前朝)298) 의 왕릉(王陵)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장문(狀聞)에 이미 전조(前朝) 사람의 자손 세 사람을 천거하였으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주서 소시(注書召試)를 행하여 두 사람을 뽑았다.
10월 22일 정미
윤득의(尹得毅)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네 사람을 뽑았다.
임금이 과거(科擧) 보는 유생(儒生) 두 사람이 과장(科場)에서 밟혀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특별히 오늘은 풍악(風樂)을 정지하게 하고, 그 아들이나 동생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무신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사서인(士庶人)으로 나이가 80인 자와 정묘(丁卯)299) ·무진(戊辰)300) ·계유(癸酉)301) 년에 출생한 노인들을 불러 보고, 국수[麵] 한 그릇과 주면(紬綿)302) 을 내려 주고, 80세 이상은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전 동돈령(同敦寧) 김시교(金時敎)를 지중추(知中樞)로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선의 왕후(宣懿王后)303) 의 제부(娣夫)이기 때문이었다.
10월 24일 기유
송순명(宋淳明)을 승지로 삼았다.
호당(湖堂) 박상갑(朴相甲)이 십운시(十韻詩)를 화답하여 올리니, 초모(貂帽)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경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김하재(金夏材)를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에 제수하였는데, 인경 왕후(仁敬王后)304) 의 지친(至親)이었으며, 이날이 바로 인경 왕후의 기신일(忌辰日)이기 때문이었다.
10월 26일 신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말하기를,
"내년 봄 진정(賑政)은 마땅히 조정(朝廷)에서 구획(區劃)할 것이니, 부호(富戶)로부터 강제로 빼앗는 폐단 같은 것은 엄격하게 금해야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칙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하재(金夏材)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불러 보고, 《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을 읽게 하였다.
10월 27일 임자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구선행(具善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전 기해년305) 에 ‘근본을 튼튼하게 하라.’는 성교(聖敎)는 북한산(北漢山) 옛 성(城)을 수축하고 또 조지서(造紙署) 동구(洞口)를 막아서 난리가 나면 이어(移御)할 장소로 삼으려고 하신 것이니, 〈이러한〉 예지(睿智)와 신략(神略)306) 은 도성(都城)이 먼저 허물어지는 근심을 개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묘년307) 에 계술(繼述)한 성단(聖斷)은 천고(千古)에 우뚝하여 비로소 북한 산성을 쌓아 근본을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았으며, 정묘년308) 에 이르러 우리 성상께서는 큰 계책을 정하고 뭇 사람의 꾀를 모두 거두어서 도성을 지키자는 윤음(綸音)309) 이 금석(金石)처럼 견고하고 사시(四時)처럼 미더웠습니다. 또한 일찍이 하교에 이르기를, ‘총융청(摠戎廳)에 이르러서는 그 책임이 더욱 중하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북산(北山)을 먼저 점거하는 자는 이긴다.」고 하였으니, 북한산은 바로 도성의 요충(要衝)이다. 적이 만약 이를 점거하면 어떻게 손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옛날 여기에 산성(山城)을 쌓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였으며, 근래에는 총융사(摠戎使)가 경기 병사(京畿兵使)를 겸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있는 것은 대저 이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지군(一枝軍)으로 하여금 사록(沙麓) 사이를 막으면, 적이 감히 수문을 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현(沙峴)도 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북한 산성은 연병대(鍊兵臺)와 더불어 국도(國都)의 후관(後關)이 되며, 하늘이 만든 금성 탕지(金城湯池)로서 도성(都城)의 등[背]을 옹위(擁圍)하고 있습니다. 사면(四面)이 험하고 높아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니, 또한 남한 산성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주객(主客)과 공수(攻守)의 이해(利害)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고 또 전후(前後)에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한 지난 일에 현혹되어, 도성을 굳게 지키자는 논의를 감히 주장하지 못합니다. 아! 총융청을 연병대로 옮긴 뒤에 선신(先臣)310) 이 마음을 다하여 서성(西城)의 축조를 마치고, 또 동쪽 산록(山麓)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형제봉(兄第峯) 아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나무꾼이 다니던 길을 통해 모래흙이 흘러내려서 언덕이 점점 허물어지게 되었으니, 그 외면(外面)에 새로이 흙을 보충하여 잔디를 입히고 나무를 심어서 곡성(曲城) 밑에까지 연접하게 하고 이어서 산책(山柵)을 만든다면, 높이 솟은 절벽을 누가 감히 쉽게 올라오겠습니까? 더욱이 서성(西城)은 꾸불꾸불한 모양으로 북쪽은 향림(香林)으로부터 남쪽은 불암(佛巖)311) 에 이르기까지, 거듭 쌓인 금성 탕지(金城湯池)를 이루었으며, 한북문(漢北門) 길은 약간 석천(石川)이 열렸으나 파자(巴字)로 굴곡(屈曲)하여 좌우가 막히고 좁아서 말을 타고 열(列)을 이루기 어려우며, 또 다른 길로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또한 어찌 감히 경기(輕騎)가 두 산머리의 화살과 돌 밑에 날뛸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성을 한번 견고하게 한다면 어찌 적병(賊兵)이 깊이 침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허다한 화기(火器)가 어느 것이나 쓸모가 없지만, 조화 순환포(造化循環砲)와 일와 봉전(一窩蜂箭)은 모두 만인(萬人)을 대적할 것입니다. 신이 이 몇 가지 병기(兵器)를 만들었는데, 과연 신기(神機)312) 가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징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경의 정성이 가상하다. 내가 묻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내일 진찰하는 자리에 우의정과 같이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10월 28일 계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구선행(具善行)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도성(都城)을 지키는 것은 나의 굳은 마음이다. 이제 입시(入侍)를 명하여 그 아뢴 바를 들으니 분명하다. 하물며 금위영(禁衛營)에도 또한 그 도본(圖本)이 있다고 하니, 도성을 지키고자 한다면 이를 버리고 무엇을 먼저하겠으며, 총융청을 버리고 또한 무엇을 먼저하겠는가? 먼저 총수(摠帥)로 하여금 만들어 갖추게 하고, 또한 삼군문(三軍門)·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라. 내가 그 근면함과 태만함을 살펴 보겠다."
하였다.
10월 30일 을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호남에 비국(備局) 군작미(軍作米) 1만 석을 대용(貸用)하기를 허락하여 진휼(賑恤)하는 자본에 보충하게 한 뒤에 가을을 기다려서 도로 갚게 하고, 각종 진곡(賑穀) 4만 석과 제민창(濟民倉) 곡식 3만 석을 본도(本道)313) 에 획급(劃給)하기를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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