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진
집의(執義) 홍빈(洪彬)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답하기를,
"그때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은 무죄로 석방하였는데 하물며 너이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소학(小學)》을 주강하였다.
11월 2일 정사
이성원(李性源)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동지(冬至)와 정조(正朝)의 하례(賀禮)를 특별히 정지하게 하였으니, 이때 삼남(三南)에서 흉년임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에서 작환(繳還)314) 하니, 임금이 ‘하여고취정(賀與鼓吹停)’ 다섯 글자를 더 써서 내렸다. 승정원이 또 작환하고 대신(大臣)·약방·예조 판서·예방 승지(禮房承旨)가 입시(入侍)하여 입을 모아 간절히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도로 받아들였다.
11월 3일 무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황감(黃柑)을 반사(頒賜)하고 선비를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익운(李益運)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백동준(白東俊)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11월 4일 기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동지사(冬至使) 세 사신(使臣)에게 각각 초모(貂帽)를 내려 주고 어필(御筆)로 1구(句)의 시(詩)를 써서 주었다.
임금이 ‘석어당(昔御堂)’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卽阼堂)에 현판(縣板)을 걸게 하였으니, 바로 경운궁(慶運宮)이었다.
11월 5일 경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치권(申致權)은 이미 처분하였으니, 그도 ‘껍질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 [皮之不存 毛將焉傅]’라는 것이다. 김제행(金悌行)의 일은 그 허물을 알 수 있는데, 어찌하여 특자(特資)315) 를 미리 알고서 선교관(宣敎官)으로 차출하였는가?"
하고, 대신(臺臣)에게 일을 아뢰라고 명하니, 대사헌 심발(沈墢)이 대답하기를,
"아뢸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없는 세상[無事世界]’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반드시 무슨 일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을 것이다."
하자, 좌의정 김상철이 〈두보(杜甫)의 시(詩) 중〉의, ‘성군의 조정에 잘못된 일이 없으니, 시대가 깨끗하여 간언하는 글이 적구나. [聖朝無關事 時淸諫書稀]’라는 시구(詩句)를 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요순(堯舜) 때에 익(益)·직(稷)·고요(皋陶)도 면계(勉戒)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의 세상이겠는가? 대사헌은, ‘지금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고 상신(相臣)은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우러러 아뢰었으니, 이것이 어찌 진실로 태평 무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6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315] 특자(特資) : 특별한 가자.
사신(史臣)은 말한다. "요순(堯舜) 때에 익(益)·직(稷)·고요(皋陶)도 면계(勉戒)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의 세상이겠는가? 대사헌은, ‘지금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고 상신(相臣)은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우러러 아뢰었으니, 이것이 어찌 진실로 태평 무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겠는가?"
11월 6일 신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여경방(餘慶坊)과 의열궁(義烈宮)을 역림(歷臨)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음(陰)을 억누르고 양(陽)을 돕는 뜻은 이와 같으나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 소인(小人)이 없겠는가? 근세(近世)의 사람들은 혹은 꾀가 많아서 말하지 않고, 혹은 죄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본디 천치가 아닌데 어찌 그 뜻[影]을 살피지 못하겠는가? 지금 뭇 신하가 한마음으로 청하는 바가 어찌 가소(可笑)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판부사(判府事) 신회(申晦)에게 묻기를,
"백성이 편안한가?"
하매, 신회가 대답하기를,
"백성의 편안함이 근세(近世)와 같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김상적(金尙迪)이 아첨한다는 말로써 고 상신(故相臣) 김재로(金在魯)를 면박(面駁)하였는데,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요순(堯舜)의 백성도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곤궁한데, 신회(申晦)는 성상이 근심하고 민망하여 물으시는 말씀에, ‘백성의 편안함이 근세와 같은 적이 없다.’고 아뢰었으니, 어찌 군자(君子)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6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요순(堯舜)의 백성도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곤궁한데, 신회(申晦)는 성상이 근심하고 민망하여 물으시는 말씀에, ‘백성의 편안함이 근세와 같은 적이 없다.’고 아뢰었으니, 어찌 군자(君子)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11월 7일 임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공시인(貢市人)을 불러 보고 폐막(弊瘼)을 물었다. 형조의 수도안(囚徒案)을 들여오도록 명하여 특사령(特赦令)을 내렸다. 각도(各道)의 방물(方物)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농사의 흉년에 대해 친히 묻고, 또 유개인(流丐人)316) 에게 죽[粥]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동지 하의(冬至賀儀)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 8일 계해
왕세손(王世孫)이 상소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동지(冬至)가 되어 만물이 비로소 소생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이때를 맞이하여 건(乾)317) 을 체득하시고 인(仁)을 행하시어 순수한 복을 많이 받으셨으니, 신은 기뻐서 춤추는 듯한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동지(冬至)날 하례는 바로 경사로움을 축하하는 것이며, 기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황천(皇天)과 척강(陟降)의 묵묵히 도우시고 돈독히 보호하심을 받으셨으니, 무릇 경사로울 만하고 하례할 만한 일은 역사에 다 기록할 수 없고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이 많으나, 신의 생각에는 올해에는 더욱 간절하다고 여겨집니다. 명절에 숭호(嵩呼)하는 것은 어느 명절이나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이 명절은 더욱 중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성상께서 50년을 다스리시어 몸소 태평함을 이루시었고, 또 망구(望九)318) 가 되는 동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라의 예(禮)에 하의(賀儀)가 없으면 그만이지만, 하의가 있는데 금년의 이 명절을 버리고 어느때 하겠습니까? 또 엎드려 생각하건대, 요즈음 연석(筵席)에서, ‘다음달부터 악(樂)을 거행하지 아니하겠다.’는 성상의 뜻을 여러번 하시(下示)하셨습니다. 만약 혹시 성명(成命)이 있게 된다면,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반드시 반한(反汗)319) 을 힘써 청할 것입니다. 반한하시기 전에는 또한 기쁨을 꾸미는 청을 지레 우러러 번거롭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미쳐서 성대한 의식을 급히 거행함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또, 신은 이러한 전에 없는 경사를 만나서 이 근거가 있는 요청을 진달하는데, 하늘에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과 애일(愛日)320) 의 정성을 굽어 살피심을 얻지 못하면, 신의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진실로 부끄러움이 많을 것이며, 성상께서 아랫사람을 체득하시는 도리에 있어서도 미진함이 없겠습니까? 충정(衷情)이 절박하여 수소(手疏)를 황망하게 진달하니, 말이 체재를 이루지 못하여 황송하고 황송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존엄하신 들으심을 넓혀서 성대한 예식의 거행을 특별히 허락하여 일국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어진 하늘과 밝은 햇볕 밑에서 강릉(崗陵)의 수(壽)를 송축하게 하시고, 신의 구구(區區)한 기쁜 정성을 펴게 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펴보고 너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글귀마다 정성된 마음이요, 글자마다 지극한 정성이 어려 있어 지난 해의 아뢴 것과 같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바로 내가 매우 기뻐하는 것은 이같은 〈너의〉 숙성(夙成)함이다. 이제 지성(至誠)으로 간절히 청함을 들으니, 아아! 네 할아비가 마음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동하지 아니하랴? 그렇지만 지금 이날을 만나 전(殿)에 배례하지 못하면서 만약 하례를 받는다면, 어찌 자식의 도리이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다음달 전에 악(樂)을 물리치는 것은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자정전(資政殿)에서 고취(鼓吹)하고 하례를 받아서 네 마음과 여러 신하의 마음에 부응(副應)하게 할 것이다. 아! 공자가 말하기를, ‘예절(禮節)이라는 뜻이 옥백(玉帛)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음악(音樂)이라는 뜻이 종고(鍾鼓)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옥백과 종고는 형식(形式)이고, 네 할아비의 마음을 체득하고 열성조(列聖祖)의 업적(業績)을 받드는 것은 바탕이다. 너는 모름지기 이를 힘쓰며, 너는 모름지기 근면(勤勉)하라. 아아! 이 뒤로부터는 어찌 조정 신하 뿐이겠는가? 비록 해동(海東)의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라도 반드시 모두 말하기를, ‘나라에 주창(主鬯)321) 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바로 조선의 억만년 공고(鞏固)한 업적(業績)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비답(批答)을 도승지[知申]가 전례에 의하여 전유(傳諭)하라."
하고, 곧 예(禮)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왕세손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치사(致祠)를 마치자, 또 사배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답교(答敎)하게 하니 왕세손이 또 사배하였다. 임금이 시좌(侍坐)하기를 명하고 백관이 예(禮)를 행하기를 마치자, 백관에게 시위(侍衛)하도록 명하고 각각 소회(所懷)를 진달하게 하였다. 또 상언(上言)을 받아들여서 야금(夜禁)을 풀게 하였다.
11월 9일 갑자
임금이 사민(四民)322) 을 궐문(闕門) 밖에 부르라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쌀을 주게 하였다. 시골에 사는 문무 재직자(文武在職者)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그 고을에 있는 폐단을 물었다. 충자(沖子)에게 보이는 글을 지어서 내렸다.
11월 10일 을축
심이지(沈頤之)를 대사헌으로, 정호인(鄭好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진자(賑資) 2만 8천 3백 석의 지급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전 아산 현감(牙山縣監) 윤득흠(尹得欽)과 전 홍주 영장(洪州營將) 이언방(李彦邦)은 전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처분된 적이 있었는데 신이 이번 걸음에 자세히 들으니 사실과 상반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친히 듣고서 이미 아뢰었으니 모두 탕척(蕩滌)하라."
하였다.
윤상후(尹象厚)를 승지로 삼았다.
도성 백성이 공채(公債)323) 를 많이 지고서 죽은 자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관비(官婢)가 되어 〈빚을〉 갚기를 원하니, 임금이 가엾게 여겨 특별히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정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대학(大學)》을 주강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서암(瑞巖)에 가서 살펴보게 하고, 이어 ‘서암송(瑞巖頌)’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고, 임금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서암(瑞巖)은 덕유당(德游堂) 서북(西北)에 있었는데 이 궁궐(宮闕)은 바로 장릉(章陵)324) 의 구저(舊邸)였다. 광해(光海)가 ‘왕암(王巖)’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궁(宮)을 세웠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였고, 계사년325) 이후로는 이 궁에 임어(臨御)하였다. 숙종 무자년326) 에 이르러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어필(御筆)로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사방석(四方石)327) 에 새기고, 오른쪽 곁에는 새기기를, ‘속칭이 왕암인데, 바로 상서로움을 징험한다. [俗稱王巖正徵休祥]’라고 하였는데, 역시 어필이었다.
김종정(金鍾正)·김문순(金文淳)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13일 무진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헌 심이지(沈頤之)가 패초(牌招)를 어기니 임금이, ‘이조 판서가 구차스럽게 이 사람을 도헌(都憲)328) 에 채웠다.’는 까닭으로 심이지를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고, 이조 판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으로 삼았으며,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경기 감사 심수(沈鏽)는 아들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 하여 체차(遞差)하고, 김재순(金載順)을 대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동서반(東西班)329) 에 명하여 각기 소회(所懷)를 진달하게 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삼고, 김약행(金若行)을 발탁하여 승지로 제수하였다.
어사(御史)를 경기(京畿) 안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었다.
11월 14일 기사
하교하기를,
"떳떳한 녹봉[常廩]을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은 형식(形式)에 가깝다. 간밤 꿈에 보았으니 그에게 뜻을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쌀·콩 각각 3석과 황육(黃肉) 5근, 생선(生鮮) 5마리[尾]를 봉조하(奉朝賀) 김치인(金致仁)에게 보내 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5일 경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으니, 16일은 바로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기신(忌辰)이고, 14일은 바로 효순빈(孝純嬪)의 기신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상당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가 명년 하의(賀儀)를 거행하기를 번갈아 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과 대신(臺臣)은 또한 경(經)을 인용하고 의(義)에 의거하여 진달(陳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말하기를,
"명년의 경사는 하례 뿐만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하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지나치다. 경 등이 이와 같이 하면 마땅히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가서 누울 것이다."
하자, 여러 신하가 황공하여 물러갔다. 경재관이 아뢰기를,
"종성 부사(鍾城府使) 강유(姜游)는 신병(身病)이 있다고 말하면서 직무를 전폐(全廢)하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명한(洪名漢)을 특별히 승진케 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여주(驪州)·이천(利川) 어사(御史)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주(驪州)는 유리(流離)하여 흩어진 자가 1백 60여 명에 이르니 잘 다스린 것인가, 못다스린 것인가? 바로 이 한 가지 일로서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친히 물어서 제도(諸道)를 면려(勉勵)하게 할 것이다. 이천(利川)은 한 사람도 흩어진 자가 없으니 심히 가상하다. 부사(府使) 이명중(李明中)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의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풀고, 임정원(林鼎遠)을 여주 목사로 삼으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내년에 하연(賀宴)을 베풀기를 청하는 것은 삼사(三司)의 신하가 말할 것이 못되는데,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하례 뿐만이 아니다.’는 등의 말로써 우러러 아뢰어 휘호(徽號)를 올리는 일절(一節)의 단서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의 직책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6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호구-이동(移動)
사신(史臣)은 말한다. "내년에 하연(賀宴)을 베풀기를 청하는 것은 삼사(三司)의 신하가 말할 것이 못되는데,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하례 뿐만이 아니다.’는 등의 말로써 우러러 아뢰어 휘호(徽號)를 올리는 일절(一節)의 단서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의 직책이겠는가?"
11월 17일 임신
송순명(宋淳明)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허임(許任)을 잡아 들이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쭉정벼를 우리 백성에게 먹여 유망(流亡)함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한차례 형추(刑推)하였다. 어사(御史) 이상봉(李商鳳)이 말하기를,
"허임은 관직에 있을 때에 월봉(月俸)을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 마음은 백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주(驪州)에 충군(充軍)하라 명하고, 이상봉을 보내어 여주의 권향(權鄕)330) 과 간리(奸吏)를 조사해 다스리게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승지·유신(儒臣)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이 말하기를,
"전일에 하례와 고취(鼓吹)를 정지하라는 하교를 아직 환수(還收)하지 아니하셨으니,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어찌 감히 받들겠습니까?"
하고, 여러 신하가 입을 모아 번갈아 힘써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 이하를 모두 현임에서 해면하도록 명하였다가, 곧 도로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어석정(魚錫定)·서유대(徐有大)·윤양후(尹養厚)를 승지로 삼았다.
내일 공상(供上) 외에는 비록 내국(內國) 사람이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상소로 진달하여 간(諫)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아니하였다.
11월 18일 계유
여러 대신(大臣)이 의금부[金吾]에서 서명(胥命)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내국(內國)에 명하여 문후(問候)하지 말고 탕제(湯劑)도 올리지 못하게 하니, 대사헌 송순명(宋淳明)이 상소하여 탕제를 올리고 신하를 불러 접견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살펴 보지 아니하였다.
음죽 어사(陰竹御史)가 복명(復命)하고 입시(入侍)하자, 내국 제조(內局提調) 채제공(蔡濟恭)이 탕제를 가지고 따라 들어와 울면서 진어(進御)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회가(回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 들여서 곧 회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휘중(李徽中)을 대사헌으로, 이수훈(李壽勛)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신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리고, 비국 당상으로서 강교(江郊)에 있는 자는 곧 나와서 참여하게 하고, 공경(公卿)으로부터 하대부(下大夫)에 이르기까지 강교(江郊)에 있는 자는 모두 몰아 들여서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봉쇄(封鎖)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조엄(趙曮)이 강교에 있으면서 빈대(賓對)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통진(通津)에 충군(充軍)하였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아버지가 옛날에 다른 의견을 세웠는데, 경도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옛 계사년331) 에 처음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이 되어 행공(行公)하였는데, 연달아 재이(災異)를 만나자, 상소로, ‘물려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때 선조(先朝)332) 께서 어제(御製)를 써서 내려, 겸양하여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선신(先臣)이 순종하는 의리로써 간략하게 상소로 논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나라의 경사는 삼대(三代) 후 처음 있는 경사로서 팔역(八域)333) 의 민생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는데, 돌아보건대, 신의 구구(區區)한 송축(頌祝)의 정성이 어찌 남에게 뒤지겠습니까? 성대한 행사가 빨리 이루어진다면 글로 찬양[揄揚]하는 것을 신은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온 세상이 아첨한다."
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과 사간(司諫) 홍구서(洪九瑞) 등이 어제 풍악을 정지하도록 한 하교를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홍구서를 파면하고 송순명을 체직(遞職)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고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아첨하는 것이다."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실상이 없이 말하는 것을 아첨이라 하는데, 지금은 임어(臨御)하신 지 50년이고 성수(聖壽)가 망구(望九)이심은 실상이 아닙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81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무릇 새해[新年]는 원일(元日)334) 을 가절(佳節)로 삼고, 한달로 말하면 초하루를 으뜸으로 삼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하매, 임금이 웃었다.
11월 20일 을해
여러 대신(大臣)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유약(柔弱)하여 이런 아첨함을 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구궐(舊闕)에 나아가겠다."
하고, 곧 문소전(文昭殿) 옛 터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면류관(冕旒冠)을 벗고 계단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척강(陟降)에게 사죄합니다.’라고 하였다. 제조(提調) 채제공(蔡濟恭)이 소매로 막아서 호위하였다. 대신(大臣)이 대명(待命)한 곳에서 들어오고 2품 이상도 서로 이끌고 와서 관을 벗고 울면서 간(諫)하니, 임금이 비로소 환궁(還宮)하였으며, 대신에게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시임·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오늘날에 탕평(蕩平)이 이루어졌는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이같은 일을 다시는 연충(淵衷)335) 에서 염려하지 말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마음을 바꾸었는가? 얼굴을 바꾸었는가? 내가 동서(東西)336) 〈당쟁〉에 대하여 꿈꾼 것이 있는데, 과연 타첩(妥帖)337) 되었는가?"
하니,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말하기를,
"다스리신 지 50년에 한 세대를 진압하여 백년의 고질적 폐단이 지금 이미 사라졌으니, 대성인(大聖人)이 아니시면 이와 같겠습니까?"
하였다.
11월 23일 무인
우참찬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치권(申致權)이 ‘순사(循私)338) ’ 두 글자로써 조명정을 평론하여 배척하였는데, 조명정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적에 사사로움에 따른다는 비난을 한 것은 신치권 뿐만 아니었다. 조명정이 사사로움에 따르는 것은 전형을 맡았을 때 뿐만 아니라, 시험을 관장했을 때에도 온 세상이 모두, ‘사사로움에 따른다.’고 하였으니, 조명정은 가는 곳마다 사사로움에 따르는 자라고 이를만한데, 나라 사람의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6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註 338] 순사(循私) : 사사로움에 따름.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치권(申致權)이 ‘순사(循私)338) ’ 두 글자로써 조명정을 평론하여 배척하였는데, 조명정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적에 사사로움에 따른다는 비난을 한 것은 신치권 뿐만 아니었다. 조명정이 사사로움에 따르는 것은 전형을 맡았을 때 뿐만 아니라, 시험을 관장했을 때에도 온 세상이 모두, ‘사사로움에 따른다.’고 하였으니, 조명정은 가는 곳마다 사사로움에 따르는 자라고 이를만한데, 나라 사람의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어사(御史) 이상봉(李商鳳)이 유민(流民)이 다시 모인다 하여 우러러 아뢰기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그날 돌아온 자가 50여 호(戶)입니다."
하며, 이어서 유민의 환상(還上)·신포(身布)를 탕감(蕩減)할 것과 군미(軍米)를 돈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니, 모두 시행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11월 24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이어서 소결(疏決)339) 하였는데, 이명숙(李命肅)의 벼슬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이명숙은 바로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후손인데, 일찍이 그 가변(家變)으로 죄를 얻어 정법(正法)340) 되었다. 지금 그의 아내가 신문(申聞)함으로 인하여 여러 신하에게 하문(下問)하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인묘조(仁廟朝)께서 연평 부원군의 자손은 10세(世)까지 죄를 용서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였고, 여러 재상이 이의(異議)가 없으므로 임금이 이 명령이 있었다.
11월 25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제주 공인(濟州貢人)을 불러들여 수고로움을 묻고, 이어 무명과 양미(糧米)를 내려 주었다. 또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서 활쏘기를 시험하였는데, 고영관(高榮觀)이 두 번 순(巡)에 일중(一中)하니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렸다. 제주(濟州) 사람 현오룡(玄五龍)은 추후(追後)에 들어왔는데, 임금이 올라온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니 만과(萬科)341) 를 보고자 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나라의 경사가 있느냐?"
하자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90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모두 큰 경사라고 말합니다."
하였다. 구윤옥(具允鈺) 등이 번갈아 아뢰기를,
"바다 가운데 있는 무지한 백성도 저절로 이와 같으니, 사람의 착한 본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시위(侍衛)하는 무부(武夫)의 무리가 우미(愚迷)한 현오룡(玄五龍)을 유인(誘引)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대답하게 한 것이니, 기폐(欺蔽)한 죄는 진실로 통탄할 만하다. 그런데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은 눈으로 그 형상을 보았으면서도 무부(武夫)의 무리와 같은 말로 주달하였으니 더욱 놀랍다. 그 뒤에도 대신(大臣) 이하가 현오룡의 말을 핑계대어 중(重)하게 여길려고 하였으니,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66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사-선발(選拔) / 군사-병법(兵法) / 재정-공물(貢物) / 역사-사학(史學)
[註 341] 만과(萬科) : 정원·자격 제한없이 특정한 다수인에게 보이던 과거. 주로 무과(武科)에서 채용한 제도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시위(侍衛)하는 무부(武夫)의 무리가 우미(愚迷)한 현오룡(玄五龍)을 유인(誘引)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대답하게 한 것이니, 기폐(欺蔽)한 죄는 진실로 통탄할 만하다. 그런데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은 눈으로 그 형상을 보았으면서도 무부(武夫)의 무리와 같은 말로 주달하였으니 더욱 놀랍다. 그 뒤에도 대신(大臣) 이하가 현오룡의 말을 핑계대어 중(重)하게 여길려고 하였으니,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11월 26일 신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오부(五部) 관원을 불러 보고 혼인할 시기가 지난 사람을 적어 책을 만들어 아뢰도록 명하고,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혼인의 수요(需要)를 특별히 보조해 주게 하였다.
11월 27일 임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경운궁(慶運宮) 동구(洞口) 안에 살고 있는 어린이를 불러서 각각 쌀을 내려 주었고, 15세된 동자(童子) 세 사람에게는 선혜청으로 하여금 혼인을 돕게 하였으며, 이어 중금(中禁)342) 으로 차출(差出)하게 하였다.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상번군(上番軍)은 내년 가을까지 한정(限定)하여 번(番)을 정지하게 하였다.
11월 28일 계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이어서 세초343) 를 행하였다. 심환지(沈煥之)·권엄(權𧟓)·황승원(黃昇源)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장령(掌令) 경재관(慶再觀)이, 화약(火藥)을 훔쳐서 판 장광석(張光碩)이라는 사람을 감률(減律)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령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전계(前啓)를 궐계(闕啓)한 날이 많으니, 사간원[薇垣]의 여러 대간(臺官)을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충청도 어사(御史)가 들어와서, ‘태안 군수(泰安郡守) 왕한정(王漢楨)에 대해 백성들이 10년동안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가자(加資)하라 명하였고, 서산 군수(瑞山郡守) 김훤(金煊)은 혼유(昏謬)하므로 체직(遞職)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기를,
"이중호(李重祜)는 정경(正卿)에 오를 만하고, 민백분(閔百奮)은 묘당(廟堂)에 둘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9일 갑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시위 향군(侍衛鄕軍)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고 고을에 있었던 일을 물었으며, 이어서 초관(哨官)344) 에게 명하여 진법(陣法)을 강(講)하게 하였다. 도총부(都摠府)에 역림(歷臨)하여 입직(入直)한 총관(摠管)에게 각각 숙마(熟馬)를 하사하였으며, 억석와(憶昔窩)에 돌아와서 재계하고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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