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1권, 영조 49년 1773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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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을유

이중호(李重祜)를 발탁하여 판윤에 제수하고, 이재간(李在簡)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형달(李亨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관령(大關嶺)에서 횡성(橫城) 경계까지 1백 60리가 되고, 또 남·북으로는 정선(旌善)과 춘천(春川)까지의 거리가 혹은 1백 리, 혹은 수백 리가 되며 그 사이에 6개 방면(方面)에 창고를 설치하였는데, 지형(地形)이 모두 깊고 험한 산골이어서 〈그 곳에〉 사는 백성이 적으며, 어염(魚鹽)의 이(利)가 없고 단지 무명과 삼베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6개 방면에 환곡(還穀)을 받는 백성은 3백여 통(統)에 불과하고 1통은 5호(戶)가 되니 통틀어 계산하면, 민호(民戶)가 또한 1천 5백여 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각 창고에 있는 각 곡식의 도합 수량이 5만 3천 2백 석 영(零)이 되니, 절반을 나누어 주더라도 1호(戶)에서 받는 것이 17석 영(零)이 됩니다. 따라서 백성은 적고 환곡은 많으므로 이미 그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귀보리[耳牟] 일종(一種)이 1만 7천 석 영(零)이 되니, 이는 영서(嶺西) 백성들에게 하나의 큰 폐막(弊瘼)이 됩니다. 저축한 것이 명년(明年)이 되면 파종하여도 싹이 나지 아니하고, 절구질을 하면 부스러져 쌀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민호가〉 금년에 모두 받아두었다가 〈명년에〉 전부 버리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후의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하여 다른 고을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다른 고을 백성들도 한결같이 받기를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한 해 두 해 하면서 해마다 모곡(耗穀)이 늘어나면, 불과 10년도 안되어 자그마치 수만 곡(斛)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는 지금에 이르러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嶺)345)   동쪽과 서쪽에 모두 황장산(黃膓山)이 있는데, 〈사기(砂器)를〉 번조(燔造)하는 나무와 선박(船舶)을 짓는 재목 같은 것은 비록 경사 군문(京司軍門)에서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봉산(封山) 고을을 놓아 두고도 채취할 만한 땅이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이니,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한번 신칙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진자(賑資) 3천 석을 지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자년346)  을 추억하니, 내가 어찌 악(樂)을 정지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자, 김상복 등이 그렇지 아니함을 힘써 진달하였고, 사간 이진항(李鎭恒)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계(啓)를 올려 전일의, ‘하례와 고취(鼓吹)를 정지하라.’는 하교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중한 일을 아뢰는 곳인데, 오늘날 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다시 아뢰겠는가?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고, 이어서 시종안(侍從案)에서 영구히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세 정승이 의금부에서 서명(胥命)347)  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이 있었다.

 

12월 2일 병술

임금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이진익(李鎭翼)에게 명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문집(文集) 가운데 《연행록(燕行錄)》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고, 교서관[藝閣]에 명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진익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에 제수하고, 이진복(李鎭復)을 돈녕부 도정으로 대신 제수하였으니, 두 사람은 모두 인평 대군의 후손이었다.

 

12월 3일 정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죄를 입을지라도 어찌 감히 충정(衷情)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건공탕(建功湯)은, 팔순(八旬)348)  의 임금이 이로써 지탱(支撑)해 나가니 비록 하루라도 없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하례에 대해서는 끝내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내년을 만약 지나게 되면, 나라는 나라 꼴이 되지 아니하고 신하는 신하 꼴이 되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이른바, 향원(鄕愿)349)  이다."
하고, 조엄(趙曮)을 특별히 석방하여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수훈(李壽勛)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진항(李鎭恒) 등의 처분을 환수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승지 임희증(任希曾)을 이에 대신하게 하고 홍낙인(洪樂仁)·이진복(李鎭復)을 승지로 삼았다.

 

지중추(知中樞) 유언술(劉彦述)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유언술이 어떤 상태인지 내가 알지 못하다가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한 바는 조금도 협잡(挾雜)이 없고 질박(質朴)하여 숭상할 만하다. 더구나 기로소[耆社]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이런 보고를 들으니 슬프구나. 치부(致賻) 외에 가급(加給)하여 이런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12월 5일 기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내일은 바로 옛 계사년350)  에 내국(內局)을 따라 직숙(直宿)했던 날이다. 팔순(八旬)에 이날을 거듭 만나니 나의 회포가 천만 가지다. 이날부터 명년 8월 전까지 대향(大享)351)  의 헌가(軒架)와 막중한 배진(陪進)에는 전례에 의하되,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창방(唱榜)과 전정(殿庭)의 헌가는 진열만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6일 경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입직(入直)한 군병(軍兵)을 불러 노고를 위문하고, 이어 죽(粥)을 마련하여 먹이게 하였다. 승보(陞補)에 뽑힌 유생(儒生)을 불러 보았다.

 

12월 8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임희증(任希曾)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평 이중복(李重馥)은 이진항(李鎭恒)이 죄를 입을 때에 같이 참여한 사람으로서, 대각(臺閣)에 나아가 스스로 인책(引責)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그의 직임을 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한림(翰林) 이노술(李魯述)·이면수(李勉修)를 잡아들여, 이노술은 양재역(良才驛)에, 이면수는 중림역(重林驛)에 정배(定配)하였으니, 춘추관 겸함(兼銜)352)  을 가지고 승강이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12월 9일 계사

토성(土星)이 자미원(紫微垣) 가운데 들어갔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0일 갑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종루(鍾樓)353)  의 거지를 데려다가 선혜청(宣惠廳)에 넘겨주어 죽(粥)을 먹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서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이어서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서 사직단(社稷壇)을 첨망(瞻望)하고, 광명전(光明殿)으로 돌아왔다. 통례(通禮) 이시정(李蓍廷)을 특별히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승진시켰다.

 

12월 11일 을미

임금이 억석와(憶昔窩)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불러서 전최(殿最)를 행하게 하였다. 이어 주강(晝講)을 행하여 임금이 《열녀전(列女傳)》을 읽고 유신(儒臣)과 기사 당상으로 하여금 각각 한 장(章)을 읽게 하였는데, 기사(耆社)에서 소찬(小饌)을 올렸다. 양성 현감(陽城縣監) 이우규(李禹圭)를 가까운 곳 수령과 서로 바꾸어 부모를 찾아 뵙는데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기사 당상 이익정(李益炡)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병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문신(文臣)의 제술(製述) 시험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정랑(正郞) 강혼(姜俒)에게 반숙마(半熟馬)를 하사하였다.

 

12월 13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탕제(湯劑) 복용키를 괴로워하여, 현상(懸賞)으로, ‘탕제를 올리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말을 올리기를 요구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해주(海州) 유생 김갑손(金甲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만력(萬曆)계사년354)  에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용만(龍彎)에서 회가(回駕)하실 때에, 이 고을에 주필(駐蹕)355)  하여 행궁(行宮)을 부용당(芙蓉堂) 서쪽에 짓고 종묘(宗廟)를 백림당(栢林堂) 옛 터에 창건하였습니다. 환도(還都)하실 때에 중궁전(中宮殿)과 후궁(後宮) 및 여러 왕자(王子)를 머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원종 대왕(元宗大王)께서는 민가(民家)를 잠저(潛邸)로 삼았다가 3년이 지난 을미년356)   11월 초7일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탄강(誕降)하셨습니다. 성상께서 임어(臨御)하신 이후로 열조(列祖)에 숭보(崇報)하는 전례(典禮)를 모두 거행하지 아니하심이 없었으나, 오직 이 해주(海州)에서만 전(殿)을 설립하고 비(碑)를 세우는 일을 이제까지 아직 하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성의(盛儀)를 빨리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문소전(文昭殿)의 예(例)에 의하여, ‘표승첩고기(表勝捷古基)’ 다섯 글자를 특별히 써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閣)을 세우고 비(碑)를 세우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의 관원을 잡아 들였다가 곧 석방하였는데, ‘탕제를 올리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말하는 사서인(士庶人)을 대령(待令)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익(具㢞)·홍용한(洪龍漢)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15일 기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주강하고 포폄(褒貶)을 행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소학》을 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건공탕(建功湯) 드는 것을 고민하여 현상(懸賞)까지 하였으나 한 사람도 응지(應旨)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제 우연히 동몽(童蒙)에게 물으니 대답하는 바가 시속(時俗)에 벗어났다. 김문협(金文協)을 해청(該廳)357)  으로 하여금 혼수(婚需)를 도와 주고, 성혼(成婚)한 뒤에 초기(草記)하여 초자(招資)와 백금(百金)의 상(賞)에 대신하도록 하며, 순통(純通)한 동몽에게는 각기 지필묵(紙筆墨)을 주라."
하였다.

 

이산 부사(理山府使) 윤광소(尹光紹)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부(本府)의 건너편은 바로 파저강(婆猪江)적로(賊路)358)  이니, 곧 옛날에 이만주(李滿住)가 변란(變亂)을 일으킨 땅으로 최고의 요해지(要害地)가 됩니다. 돌아보건대, 그 군제(軍制)가 단약(單弱)하여 참으로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무(壯武) 갑사(甲士)라는 두 대(隊)는 단지 3백 96명인데, 그 가운데 각 표하군(標下軍)359)  과 잡색군(雜色軍)360)  을 제외하면 조련을 받는 실제의 수는 2백 77명입니다. 예전 임진년361)  에 선묘(宣廟)께서 의주(義州)에 주필(駐蹕)하실 적에 도신(道臣)인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다시 강변(江邊)에 들어가서 토졸(土卒)을 조발(調發)하여 천병(天兵)362)  을 따라 공을 이루었는데, 반(半)은 이 강변의 건장(健壯)한 군병들이니 그들의 쓰임은 다만 관방(關防)을 방비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마땅히 군액(軍額)을 더 두어서 변경을 튼튼하게 하는 계책을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오래 되어 허흠(虛欠)363)  된 곡식은 탕감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2월 17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세 정승과 전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을 지낸 신하를 불러 보고, 이산(理山)의 군정(軍丁)과 환곡(還穀)을 물은 뒤에 3천 석을 특별히 탕감하였다. 관서 도신(關西道臣)에게 명하여, 변지(邊地) 가운데 만약 이와 같은 고을이 있으면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였고, 북도 도신(北道道臣)에게도 분부하였다.

 

12월 18일 임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음관(蔭官)·수령(守令)·강원(講員)을 불러 보았다.

 

12월 19일 계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해중(李海重)·홍양한(洪良漢)·홍낙순(洪樂純)을 가자(加資)하고, 윤양후(尹養厚)를 비국 부제조(備局副提調)로 차출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진달한 것 때문이고, 홍낙순은 성간(聖簡)364)  에서 나온 것이었다.

 

12월 20일 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노술(李魯述)·이면수(李勉修)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임어(臨御)한지 50년에 일컬을 만한 사업은 없으나, 양역(良役)과 준천(濬川)은 사업이라고 조금 이를 만한데, 탕평(蕩平)은 어찌 능히 이루었다고 하겠는가?"
하니, 도제조(都提調)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신과 제조(提調) 이익원(李翼元)은 세상의 지목되는 바가 같지 아니하나 지금은 중심(中心)에 간격(間隔)이 없으니, 이는 대성(大成)한 교화 아님이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였다. 한참만에 말하기를,
"당고(黨錮)365)   후에 사기(士氣)가 저상(沮喪)하여 순욱(荀彧)이 조씨(曹氏)366)  의 신하가 되었다. 오늘날 조정에는 침묵하여 말이 없는 세계가 되었으니 도리어 지난날 보다도 못하다. 이는 탕평이 그렇게 한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이문정(李文靖)367)  은 참 성인(聖人)이라고 하였다. 나이 젊은 사람이 또한 여기 많이 있는데, 훗날 반드시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됨을 볼 것이다."
하였다.

 

12월 22일 병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친히 도목 정사를 행하여 이수득(李秀得)을 대사헌으로, 정후겸(鄭厚謙)을 동춘추(同春秋)로, 홍지해(洪趾海)를 대사성으로, 이해중(李海重)을 예조 참판으로, 홍낙순(洪樂純)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말을 실천해야 하니,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은 체차(遞差)하기를 허락하고, 조중회(趙重晦)를 이에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3일 정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새로이 제수한 수령(守令)·변장(邊將)과 처음 벼슬한 사람을 불러 보았다. 포천 현감(抱川縣監) 신영(申暎)에게 명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과세(過歲)한 뒤, 곧 함께 부임하게 하였으며, 또 해조(該曹)에 명하여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특별히 하사하게 하였다. 신영의 어머니가 나이 80살이고, 그 남편이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에 숙종[肅廟]께서 융무당(隆武堂)에서 불러 보고 활과 화살을 특별히 하사하였는데, 그때 임금이 곁에서 모시고 보았기 때문에 옛일을 추감(追感)하여 이 명령이 있었다.

 

12월 24일 무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시임·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례(賀禮)와 연회는 말할 것도 없고 칭경(稱慶)의 일절(一節)에 대해서도 지나치다."
하니,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말하기를,
"금년은 즉위한 지 50년이 되니, 이는 신 등이 우러러 청하는 큰 관절(關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경 등의 아첨함을 말하는데, 나는 장차 대신(大臣)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하니,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어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왕안석(王安石)368)  이 되고자 하는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는 신 등이 남의 말을 돌보지 않은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이사관(李思觀)은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데 예(禮)를 극진히 함을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하는데, 이는 신 등이 오늘날에 예를 다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성상이 겸손하신 덕으로 하례를 받지 아니하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을 따르는 것이 또한 보상(輔相)369)  의 도리이다. 그런데 날마다 연석(筵席)에 올라와서 말함이, 민생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에는 미치지 아니하고, 오직 나라의 경사만을 첫째의 급선무로 삼고 있으니, 그 뜻이 어찌 임금에게 아첨하는 데 있지 아니하면서 그러하겠는가? 성상의 하교에 아첨하는 글자로써 배척하는 것을 들으면, 그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마땅히 얼굴이 붉어지게 될 것인데, 이에 공자(孔子)의 교훈인, ‘예를 다한다.’는 말로써 스스로 해명하니, 사람의 거리낌 없음이 탄식하고 놀랄만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부터 명주 바지를 입지 아니하고 친히 누에를 친 뒤에 비로소 교직(交織)을 썼으며, 궁중(宮中)에서 누에치고 길삼을 하였기 때문에 폐지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내가 입은 바지는 바로 교직이다."
하였다.

 

12월 25일 기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서명응(徐命膺)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12월 26일 경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호남 어사(湖南御史)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고, 연읍(沿邑) 수령 가운데 수원 부사(水原府使) 서호수(徐浩修)가 성적이 가장 으뜸[最]이 되므로 특별히 말[馬]을 하사하였다. 정의(旌義) 전 현감(縣監) 유익성(柳翼星)을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으니, 제주 목사(濟州牧使) 박성협(朴聖浹)의 장계(狀啓)에 ‘유익성이 표류(漂流)한 왜선(倭船)의 물화(物貨)를 몰래 취하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12월 28일 임자

이갑(李𡊠)을 도승지로 삼았다. 당시 이갑이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일 때문에 파면되었으므로 대루원(待漏院)에 나가 앉아서 말[馬]을 기다리며 미쳐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전직(前職)을 도로 주기를 명하자 이갑이 곧 들어와서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대궐 밖에서 오래 머뭇거리며 발끈 성내고 떠나가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하여 가상하다고 감탄하기를 오래 하다가, 특별히 가자(加資)를 명하고 도승지를 제수하였는데, 당시 논의는 잘못된 은혜라고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선전관(宣傳官) 이의빈(李義彬)을 잡아들여 곤장(棍杖)을 쳐서 교동부(喬桐府)에 정배(定配)하였는데, 강상(江上)의 빙정(氷丁)370)  의 적간(摘奸)을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포도 대장 장지항(張志恒)이 즉시 대령(待令)하지 않았다 하여 잡아들여 곤장을 쳤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포도 대장 장지항(張志恒)의 상소가 승정원에 이르렀는데, 승지가 전례에 따라 퇴각하고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고, 장지항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장령(掌令) 이종영(李宗榮)이 악(樂)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체직(遞職)하기를 명하였다.

 

12월 29일 계축

서유대(徐有大)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제도(諸道)의 호장(戶長)과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불러 들여서 연사(年事)의 풍흉(豐凶)과 여리(閭里)의 질고(疾苦)를 묻고, 각각 양식을 주어 내려 보내게 하였다. 선전관에게 명하여 종가(鍾街)의 거지를 데려다가 선혜청(宣惠廳)에 넘겨서 쌀을 주게 하고, 연화문에 입직(入直)한 군병(軍兵)에게도 쌀을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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