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2권, 영조 50년 1774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6. 21:34
반응형

1월 1일 을묘

팔도와 양도(兩都)에 유시(諭示)를 내려 백성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신칙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다가 종각(鍾閣)에 이르러 어가(御駕)를 멈추고, 승지에게 명하여 길 옆에서 광경을 보는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옛날의 유민(遺民)인지라 보고 싶었기 때문에 특별히 가마의 창문을 열었을 뿐이다."
하니, 백성이 모두 천세(千歲)를 불렀다. 이어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지나는 길에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배알하였다.

 

1월 2일 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봉조하(奉朝賀), 시임 대신(時任 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기로사 당상(耆老社堂上),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여러 대신이 앞에 나아가 천세를 부르자, 여러 신하들도 모두 천세를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상(殿上)에서 어찌 호숭(呼嵩)001)  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대신이 예전에도 전상에서 모두 만세를 부른 일이 있었다고 앙대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김한기(金漢耆)의 자급(資級)을 높여 주도록 청하자, 임금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차대(次對)를 진정(進定)한 것은 의미가 대개 깊었다. 여러 당상(堂上)들이 모두 모였고 삼사(三司)가 입시(入侍)하였으니, 아름다운 말과 좋은 계책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시체(時體)에 억눌리고 기운이 저상되어 그러한가? 지난해 김고(金槹)가 처음 대간(臺諫)의 자리에 들어와서는 능히 10번이나 계달을 하였는데, 지금의 경우는 이것이 어떤 세계이고 이것이 무슨 대간의 풍습인가? 늘그막에 겸연(歉然)하다. 오늘 입시한 실직인(實職人)은 모두 추고(推考)하고, 양사(兩司)에서 비록 한번 계달을 하였으나 유신(儒臣)은 묵묵히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체차(遞差)하라."
하고, 다시 하교하기를,
"우금(牛禁) 이외에 모든 금지는 10일 이내에 모두 정지하고, 각사(各司)의 패(牌) 역시 이날로 한정하며, 현방(懸房)002)  에서 내는 속전(贖錢)은 10일로 한정하라. 특히 형조(刑曹)에서 형벌(刑罰)을 쓰는 것을 감하여 보름 뒤에 거행하고, 영어(囹圄)의 가벼운 죄수와 포도청(捕盜廳)에 구류된 사람은 오늘 곧 방송(放送)하도록 하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늘그막에 있는 임금의 마음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1월 3일 정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신·구번(新舊番)의 입직 군병(入直軍兵)에게 호궤(犒饋)하고, 구군(舊軍) 중에 강(講)을 잘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와 강을 하라고 명하였는데, 한 사람이 강에 응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명료[了了]하다."
하고, 본영(本營)의 집사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지은 두 구(句)의 시(詩)를 입시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을 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구임 낭관(久任郞官)을 소견(召見)하고 마음속에 품었던 바를 물었는데, 모두가 없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1월 4일 무오

사헌부 【지평(持平) 이제만(李濟萬)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계달하기를,
"공릉 영(恭陵令) 홍지한(洪志漢)은 일찍이 감찰(監察)이 되어 남을 위해 빚을 징구하면서 그 이익을 함께 도모하였고, 능관(陵官)이 되어서는 반찬(飯饌)과 삭시(朔柴) 등류(等類)에도 역시 부극(掊克)003)  의 행정을 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십시오. 이번 도목 정사(都目政事)004)  에서 평양 사람 조창대(趙昌大)는 아무 이력도 없는 잡기 당상(雜技堂上)인데도 오위 장(五衛將)에 차임이 되었고, 동관(潼關)의 전 첨사(僉使) 박성항(朴成恒)과 고풍산(古豊山)의 전 만호(萬戶) 최두원(崔斗元)은 현지에 나아가 초기(草記)005)  를 도로 고치고 이를 가함(假銜)이라 말하였으니, 청컨대 조창대는 도태해 버리고, 두 변장(邊將)은 가함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며,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5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홍찬해(洪纘海)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방붕(李邦鵬)은 3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결같이 탐음(貪淫)을 일삼았습니다. 산골 백성들을 찾아 모아 어호(漁戶)의 신역(身役)에 충당하여 산골의 백성들을 머리 아프게 괴롭히고, 방물(方物)을 빙자하여 자기 몸을 크게 살찌울 자본으로 삼아서 해진(海鎭)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며, 사랑하는 기생이 옥송(獄訟)에 관계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고, 교활한 관리(官吏)가 여리(閭里)를 횡행하며 마구잡이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 끝도 없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태학(太學)의 장의(掌議)와 색장(色掌)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29세에 입학을 했을 때 《대학(大學)》을 강한 것이, 지금도 오히려 잊혀지지 않는구나. 내가 당연히 외울 터이니 여러 유생(儒生)들 중에 강을 잘 하는 자도 외우도록 하라."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모두 잘 외우지 못하자,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외우도록 명하였으나 역시 잘 외우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50년 동안 군사(君師)로 있는 것은 진실로 나의 부끄러움이다."
하시고, 각각 붓·먹·종이를 지급하였다. 그 중에 한 유생이 시골에 나이 많은 어버이가 있자, 임금이 당나라 양성(陽城)의 말006)  을 인용하여, 양자(粮資)를 지급하고 그로 하여금 돌아가 어버이를 뵈옵고 봉양하도록 하였다.

 

1월 6일 경신

승지·유신(儒臣)·춘방(春坊)·한주(翰注)007)  , 기성(騎省)008)  의 당상과 낭관,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에게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고, 수석(首席)을 차지한 김노순(金魯淳)에게 시상(施賞)을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고 이어서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사직단(社稷壇)을 바라보고 잠시 부복(俯伏)하였다가 광명전(光明殿)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승지 서유원(徐有元)·이미(李瀰)에게 사은 숙배(謝恩肅拜)를 명하고, 아울러 팔도에 유시(諭示)를 내려 사직단(社稷壇)을 정결히 하고 사전(祀典)에 정성을 다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날은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을 받는 날이었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백성들을 불러들여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바를 물었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윤성(李潤成)의 직위를 파면하도록 명하였는데, 빚을 징구할려고 여러 달 사람을 구류(拘留)시켰기 때문이었다.

 

1월 7일 신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떠돌아 다니는 거지를 데리고 오도록 명하여 각각 쌀 서 말 씩을 하사하였다.

 

경기 도백(京畿道伯)에게 그 고을 백성들을 데리고 오도록 명하고, 역시 각각 쌀 서 말 씩을 하사하였다.

 

1월 8일 임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강화도 유수(江華島留守)로 삼았다.

 

대사간 홍찬해(洪纘海)가 계달하여 음악을 다시 연주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소전(文昭殿)009)   전각을 세우는 일이 오늘에 와서야 있는데, 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말 참견을 할 수가 있는가?"
하고, 의금부에서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1월 9일 계해

서회수(徐晦修)를 대사헌으로 김익(金熤)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고 이름을 현량과(賢良科)라 하였다. 책문(策問)은 ‘삼대의 치국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三代治國之道不同]’는 것으로 하였는데, 책문에 응대한 백여 명의 글이 모두 특별한 것이 없이 평범하고 당세의 일을 직언(直言)하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나 이이상(李頤祥)·이동형(李東馨) 두 사람을 뽑아 급제를 하사하였다. 송전(宋銓)이 합고(合考)010)  에 들었다가 낙방을 당하자, 임금이 입시하도록 명하여 그로 하여금 그 글을 외우도록 하고 다시 논제(論題)를 내어 시험을 보이고 특별히 급제를 하사하였는데, 과거(科擧)의 규정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1월 10일 갑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우참찬(右參贊)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새롭다.[新] 글자는 글의 뜻이 좋습니다. 신년(新年)의 법강(法講)을 이미 새롭게 하였고, 현량과(賢良科)의 이름 역시 새로운 것입니다. 대책(對策)에 마땅히 직언을 하는 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매우 평범하였습니다. 신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교화가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은 성덕(聖德)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반성하시고 더욱 힘써야 할 부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하며, 숙마(熟馬)를 하사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제수하였다.

 

관학(館學)011)  의 유생에게 전강(殿講)을 행하고 순통(純通)012)  을 받은 신사직(愼師稷) 등 3인에게 모두 급제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1월 12일 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금군(禁軍)중에 진법(陣法)을 잘 외우는 자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세 사람이 훌륭하게 잘 외우자, 용호영(龍虎營)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의 교련관(敎鍊官)으로 하여금 결원(缺員)되기를 기다려 전차(塡差)하도록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제도(諸道)의 세찬 단자(歲饌單子)를 읽게 하였다. 1백 세 된 사람에게는 가자(加資)를 하고, 8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얼마간의 고기와 비단을 가급(加給)하도록 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3일 정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문신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박상갑(朴相甲)에게 반숙마(半熟馬)를 하사하였다.

 

1월 14일 무진

서유신(徐有臣)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1월 15일 기사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등준과(登俊科)013)  를 설시하니, 대개 광묘(光廟) 병술년014)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었다. 문과에 조덕성(趙德成) 등 15인을 뽑고, 무과에는 이춘기(李春琦) 등 18인을 뽑았으며, 모두 화상(畵像)을 그려 도첩(圖牒)을 만들고, 문과는 예조에 간수하고 무과는 병조에 간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북신문(北辰門)으로부터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자,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환어(還御)하여 창방(唱榜)을 행하였다. 안집(安𠍱)은 기로소(耆老所) 사람으로, 송재희(宋載禧)는 기로과(耆老科)015)   사람으로서 모두 참방(參榜)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장원을 한 조덕성(趙德成)은 우윤(右尹)에 승진시켜 제수하고, 문과·무과 33인에게는 각각 안팎 옷감[表裏] 한 벌을 하사하고 또 납촉(蠟燭)을 내려 주어 집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백부(柏府)016)  에 명하여 각각 면(麵)·떡[餠]·고기[肉] 한 그릇씩을 가지고 대령(待令)하도록 하였다.

 

1월 16일 경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새로 방방(放榜)된 사람들에게서 사은(謝恩)을 받고, 이어서 주강(晝講)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함흥(咸興)의 민가 2백여 호가 불길이 번져 타 버리자, 임금이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관청에서 가사(家舍)를 지어 지급하도록 하였다.

 

1월 17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지사(知事) 정기안(鄭基安)의 소과 회방(小科回榜)017)  에 대한 사은(謝恩)을 받고는 호피(虎皮)를 하사하도록 명하고, 그로 하여금 영수각(靈壽閣)에 전배(展拜)하도록 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서 면(麵) 한 그릇을 진상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정실(鄭宲)을 소견하고 본관(本官)에 명하여 특별히 몇 필의 비단과 몇 근의 고기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윤상후(尹象厚) 형제가 함께 등준시(登俊試)의 방방(放榜)에 올랐기 때문에 그 어머니에게 해조(該曺)로 하여금 특별히 쌀과 고기와 비단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1월 19일 계유

우참찬(右參贊)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음악[樂]을 회복하자는 한가지 일은 신이 이미 전석(前席)에서 이미 발단(發端)을 하였지만, 예악은 나라에 있어서 관계가 매우 중대하니, 진실로 혹시 하루라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성효(聖孝)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한때의 의리(義理)를 일으켜 전에 없었던 새로운 예(禮)를 행하면, 도(度)에 지나친 결과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약원(藥院)018)  에 대한 비답에, ‘건공(建功)’이라는 두 글자가 날마다 등장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정령(政令)의 대체(大體)에는 관계되지 아니하나, 그것이 심학(心學)에 방해됨은 매우 큽니다. 진상한 삼료(蔘料) 역시 여러 백 근이 넘는데 다만 기이한 효험을 보일 뿐, 분명히 조금의 해로움도 없으니, 그것을 상정(常情)으로 범상히 보아 넘겨 쉽사리 증감(增減)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혹시 하루라도 철폐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0일 갑술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최중(李最中)이 상소하여 퇴직(退職)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개국(開國)·호성(扈聖)·보사(保社)의 3공신(功臣) 중 적장 충의(嫡長忠義)019)  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1월 21일 을해

하교하기를,
"지난번의 현량과(賢良科)는 이미 맹랑(孟浪)함에 관계되었으니, 오늘 문관(文官), 음관(蔭官)을 모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서 책제(策題)를 내어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한 자는 이인섭(李寅爕) 등 5인이었다. 이인섭은 승서(陞敍)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1월 22일 병자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거창 유생(居昌儒生) 김중일(金重鎰) 등이 상소하여 숙종(肅宗)의 존호(尊號)를 올리고 소령원(昭寧園)020)  을 능(陵)으로 봉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불러 들여 그로 하여금 잘 모르는 구절을 읽도록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정성이 있었다면, 어찌 이 무리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하도록 하였겠는가? 이 일은 마땅히 엄중히 처단해야 할 것이나, 기기(忌器)021)  를 참작하여 정거(停擧)022)  하도록 하라."
하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즉시 강교(江郊)로 축출하고 그 상소는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튿날 한성부로 하여금 호적을 상고해 보니, 그는 곧 영남의 상민(常民)이었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서 궁장(宮墻) 밖의 매곡(梅谷) 십자다리[十字橋] 가에 사는 노인 18명을 불러 들여, 각각 비단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1월 23일 정축

송문재(宋文載)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김중일(金重鎰)의 사건은 논죄(論罪)하지 아니하고, 양사(兩司)의 여러 대간(臺諫)을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송문재(宋文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계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계달하여 김중일은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도록 청하고, 또 계달하기를,
"양주익(粱周翊)의 대책(對策)에 대한 글은 공경하고 근신하는 뜻이 전혀 없고, 공을 엿보는 마음만 현저하게 있으니, 청컨대 변방의 먼곳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24일 무인

신광집(申光緝)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는데, 신광집은 신회(申晦)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전 도헌(都憲)023) 서회수(徐晦修)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서회수가 도헌이 되었을 당시, 앞서 선혜청 낭관(宣惠廳郞官)의 직임을 맡았을 때의 사건으로 선혜청 당상에게 화를 내었고, 이로 인해 선혜청의 하인을 치죄(治罪)하였기 때문에 선혜청 당상 정홍순(鄭弘淳)이 이 사실을 진달하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1월 25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갔는데,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휘지(李徽之)를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윤탁(尹鐸)이 말하기를, ‘만일 보장(保障)024)  으로 말하면 강도(江都)가 국가의 요충지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정(軍政)과 군향(軍餉)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힘쓰고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않되니, 경(卿)은 그 일을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두 본궁(本宮)의 노인(老人)들을 불러들이고 각각 쌀·고기·비단을 하사하였다.

 

1월 27일 신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삼공(三公)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을 모으고, 윤광신(尹光莘)·윤구연(尹九淵)에게 모두 직첩(職牒)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윤광신은 충청도 병사(兵使)가 되어서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으나, 왕명을 업신여기고 죄를 다스리는 데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잡혀와 국문(鞫問)받다가 장폐(杖斃)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이라 일컬었고, 윤구연은 금주(禁酒)할 때에 술병을 가졌다 하여 선전관(宣傳官)에게 잡혀 와서 남문 밖에서 효시(梟示)되었는데, 사건이 금령(禁令) 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으므로, 이때에 와서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임금의 옥체(玉體)가 편치 못하자 내국(內局)025)  은 주원(廚院)026)  으로 옮겨서 직숙(直宿)을 하고, 시임·원임 대신(時任原任大臣), 정후겸(鄭厚謙)·김한기(金漢耆) 및 여러 도위(都尉)는 모두 궐중(闕中)에 머무르며 직숙하였다.

 

1월 28일 임오

조정(朝廷)에서는 뜰에서 문후(問候)하고 약방에서는 입진(入診)하였는데, 기로소(耆老所)의 당상이 함께 입시하자 임금이 음식을 주고 어제(御製)를 하사하면서 화답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이, 이번 근정전(勤政殿) 등준시(登俊試)에 〈임금이〉 친림(親臨)하고, 병술년027) 숭정전(崇政殿) 진연(進宴) 때에 그림을 그려 첩(帖)을 만들었던 예(例)에 따라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려 올리도록 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집의 황간(黃榦)이 음악을 다시 연주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를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1월 29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봉조하(奉朝賀)가 함께 입시하였다. 임금이 사각(史閣)에 명하여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을 즉시 세초(洗草)028)  하도록 하고 상신(相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빚을 말끔히 갚았노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