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갑신
임금이 옥체(玉體)가 불편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가 땀을 낸 후에 상쾌하고 편안하게 되었다. 팔도에 명하여 이달 안에 부세(賦稅)와 요역(徭役)을 특별히 감하고, 도민(都民)과 삼강(三江)029) 지역 사람에게도 모두 이달의 요역을 감하도록 하였다.
2월 2일 을유
왕세손(王世孫)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경사가 어느 해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올해와 같은 해가 있겠으며, 어느 날인들 그렇지 않으리오마는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이 있겠습니까? 올해는 곧 보산(寶算)030) 이 90을 바라보는 해이며, 오늘은 곧 성상의 옥체가 평상시처럼 회복된 날입니다. 약원(藥院)의 관원이 옮겨서 직숙(直宿)을 하고 중외(中外)에서 걱정하고 황급해 한 것이 무려 5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천(上天)의 도움을 받고 조종(祖宗)의 신령(神靈)의 돌보심을 힘입어 일찍이 두어 시간이 못되어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가 곧바로 천화(天和)031) 를 얻게 되었으니,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타고 나신 강건(强健)함이 보통 사람보다 탁월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상천과 조종의 음즐(陰騭)032) 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곧 성상께서 상천과 조종이 내려주신 복을 받은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삼대(三代)033) 가 융성할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이 비상한 대경(大慶)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돌아 보건대, 소자의 기쁘고 좋아서 축원하는 정성이 저절로 얼굴에 나타나서 말로 표현하게 되었으며, 말로 표현하게 되어서는 글이 이루어 진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넓은 천하 창생(蒼生)으로 어리석은 지아비, 어리석은 지어미 그리고 보통의 혈기 있는 부류에 이르러서도 고무(鼓舞)하고 동탕(動盪)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머리를 들고 발꿈치를 돋우며 모두 구중(九重)을 바라보고 천세(千歲)를 부르기를 원하니,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의 마음은 마땅히 어떠하겠으며, 조정에 있는 신료들의 마음 또한 저절로 그만두지 못하는데 소자(小子)가 밤낮으로 목마른 것 같이 바라던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이번에 나라의 경사를 높은 상천(上天)과 조종(祖宗)의 혼령에서 받았다면, 아무리 우리 성상께서 늘 겸양[撝謙]을 덕(德)으로 삼으실지라도, 어찌 우러러 신령에게 보답하고 아래 〈사람들의〉 뜻에 부응하는 거조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신의 진청(陳請)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성상께서 역시 묵묵히 관찰하셨던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천지의 부모이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청원한 바를 윤허하여 곧바로 의조(儀曹)로 하여금 좋은 날을 가려서 빨리 욕례(縟禮)를 행하고 병이(秉彛)를 함께 얻는 마음을 이루도록 하소서. 그리고 삼가 생각하건대, 근일에 비록 음악을 정지하도록 한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포쇄(曝曬)034) 하는 행차에서 이미 고취(鼓吹)하도록 허락을 하였다면 대체로 소중히 여기는 점에는 마땅히 달리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경사는 진실로 고유(告由)하고 진하(陳賀)함이 마땅하니 그 소중함을 어찌 포쇄하는 행차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리고 대정(大庭)의 법악(法樂) 역시 잠깐이라도 폐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유독 관약(管籥)의 소리를 듣지 못하여 억압되고 답답한 심정이 늘 마음속에 간절합니다. 이에 하례를 청하는 상소의 말미에 두어 마디 진달하였으니 성명(聖明)께서 깊이 헤아려 주신다면 신이 크게 희망하고 간절히 비는 지극함을 금할 길이 없겠습니다. 삼가 절하고 소(疏)를 올려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펴보고 너의 정성을 칭찬한다. 지난 달의 3일과 이달의 1일은 아침에는 조금 나았다가 금방 다시 병기운이 있었는데, 곽란[癨]도 아니고 산증[疝]도 아니어서 형용하기도 어렵고 형상하기도 어려웠으며, 어제 아침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상치 않아서 특별히 봉조하(奉朝賀)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불렀으니, 나의 생각이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나 겨우 두어 마디 말을 하고는 잠든 것인지 혼미한 것인지 취한 것도 같고 멍청한 것 같기도 하다가 3시간 정도 되자 억지로 두어 차례 토하고 거기에다 설사까지 하며 토사(吐瀉)도 겸하였는데, 추운 듯 하면서도 춥지는 않았으나 수족은 거의 차가웠고 심지어는 몸이 떨렸으며 체기(滯氣)가 다시 시작되어서 자량(自量)하기가 진실로 어려울 듯하였다. 때문에 유시(諭示)를 하려고 불렀으나 겨우 두어 마디하고 혼수상태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제대로 자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이를 만한다. 지금 나의 나이 81이니 이 모두가 오르내리는 〈조상의 신령이〉 내려주신 은혜라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朝鮮)은 단지 쇠약한 임금과 어린 세손(世孫)이 있을 뿐인데, 올해에 그 임금의 기운이 이와 같기 때문에 종국(宗國)을 위하여 불초한 나와 손자를 불쌍하게 여기니, 추측건대 〈조상의 신령이〉 돌아보고 도와서 귀를 끌어 당겨 알려주시고 얼굴을 대하여 명령하시는 듯하니 이것이 어찌 감히 우연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진장(陳章)하여 청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글이 지난 번의 글보다 나으니 두어 달 사이에 문장이 어찌 그렇게 숙성하였는가? 그 글 중에 저 하늘이니, 〈조상의 신령이〉 오르내리느니라는 글귀에 이르러서는 바로 너의 할아버지의 뜻과 똑같으므로 눈물이 자리에 흘러 내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미진(尾陳)이라는 두 글자는 네가 어떻게 이 글을 배웠는지? 나의 경우로 말하면 너무 지나치다고 하겠다. 할아버지가 그 손자에게, 손자가 그 할아버지에게 밤낮으로 곁에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지 못한 것은 어찌해서인가? 내가 비록 덕이 적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 손자를 위하는데 그 옛날을 잊어버렸겠는가? 매우 칭찬한 나머지 열 글자의 옛말로 너에게 힘쓰도록 하고자 하니, 그것은 곧 주(周)나라에서 숭상하던 문식[文]은 줄여서 적게 하고, 하(夏)나라에서 숭상하던 성실[忠]을 활용하여 성취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 일은 전부 우러러 사례함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오르내리는 〈조상의 신령이〉 불초를 돌아보고 돕기를 그 저녁을 넘기지 않았으니, 불초 소자 또한 어찌 감히 그날을 넘기겠는가? 바로 고(告)하고 우러러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일 새벽의 고유제(告由祭) 중에서 종사(宗社)와 영녕전(永寧殿)은 이번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고,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휘령전(徽寧殿)에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섭행하도록 하라. 비록 고취(鼓吹)를 정지하였는데, 지금 내 기운이 좋아져서 능히 정치를 하는 데 힘쓸 수 있다고 여기나 일어서기에는 과연 어렵다. 융복(隆福)이 가까이 있으니 찬미하고 절하는 그 소리가 조상의 신령에게 통하도록 하고자 한다. 일영문(日永門)의 와내(臥內)에서 갓을 쓰고 하례를 받을 것이니, 너와 백관들은 곤의(袞衣)를 입고 관대(冠對)를 쓰고 예를 행하도록 하라. 나도 역시 〈글의〉 끝에 부쳐 증손에게 경사가 있기를 깊이 너에게 빌어 마지 않는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도승지는 이 비답을 가지고 세손(世孫)에게 전하여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숭호(李崇祜)가 상소하여 하례를 행하는 날에 음악을 설시(設施)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을 하고 특별히 말[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2월 2일 을유
약방 도제조(都提調)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면급(面給)하고, 제조 이중호(李重祜)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부제조에게는 숙마(熟馬)를 면급하고, 그 나머지 의원(醫員)들에게는 모두 상을 주고,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승륙(陞六)하고, 여러 부마 도위(駙馬都尉)와 지돈녕부사에게는 각각 구마(廐馬)를 사급(賜給)하도록 명하였다.
2월 3일 병술
조정(朝廷)에서는 뜰에서 문안(問安)하고 왕세손(王世孫)은 백관을 거느리고 뜰에서 하례(賀禮)하니, 임금이 아직 조섭(調攝) 중에 있어서 좌석에 나오지 못하고 당중(堂中)에 누워서 문안과 하례를 받았다. 태묘(太廟)에 고유(告由)하고 교지(敎旨)를 반포하였다. 임금이 친히 지으신 오언시 한 구(句)를 내리고 왕세손 및 조정에 들어온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2월 5일 무자
임금이 책제(策題)를 써서 내리고 궁궐 안의 여러 신하들에게 응제(應製)하도록 명하였는데, 도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수석을 차지하자 호피(虎皮)를 하사하도록 하였다.
2월 6일 기축
주원(廚院)의 직숙(直宿)을 철거하라고 명하고 여러 대신들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판부사(判府事) 한익모(韓翼謨)가 늙음을 〈빙자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7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비국 당상(備局堂上)·봉조하·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이산 부사(理山府使) 윤광소(尹光紹)를 파직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당초, 윤광소가 흠축(欠縮)035) 이 생긴 것으로 허위 보고한 곡물을 특별히 감하여 주도록 청하였는데, 감사 홍인한(洪麟漢)이 비장(裨將)을 보내어 적간(摘奸)하니 원래 부패된 곡식이 없자, 이것을 장계(狀啓)하여 아뢰었기 때문에 대신(大臣)들이 파직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장오(李章吾)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옛날에는 무신(武臣)이 이 관직에 차임(差任)된 자가 매우 드물었는데, 근일에 무장(武將)을 숭품(崇品)에 올리고 갑자기 〈문반(文班)〉의 전례와 같이 제수(除授)하니 관방(官方)이 무너져 감을 알 수 있다.
2월 8일 신묘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진달하고 유양(揄揚)036) 의 의식(儀式)을 거행하도록 청하자, 해운군을 파직하고 서임(敍任)하지 말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0일 계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봉조하를 소견(召見)하고 갑산(甲山)의 환자곡[還上穀] 중에 쥐가 먹어 축이 난 것과 오래 되어 썩은 것 1천 1백 80석(石) 영(零)을 탕감(蕩減)하여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본도의 감사가 조사하여 보고한 장계(狀啓)로 인하여 대신(大臣)이 이를 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초에 이산 부사(理山府使) 윤광소(尹光紹)가 상소하여 본부(本府)의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다른 고을에도 이러한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서북(西北) 두 도의 감사를 시켜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더니,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문(狀問)이 윤광소의 상소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윤광소를 파직하도록 하였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장계를 올려 갑산의 폐단을 진달하자, 임금이 윤광소를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송문재(宋文載)가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자, 임금이 해부(該府)로 하여금 문계(問啓)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송문재가 정홍순(鄭弘淳)을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니 이것은 경재(卿宰)로서 경재를 논핵하였기 때문이고, 그것은 대개 정홍순이 경연(經筵)에서 서회수(徐晦修)가 혜민국(惠民局)의 하인을 수치(囚治)하도록 했던 일을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12일 을미
82세인 사람이 향시[鄕解]에 합격하여 올라오자, 해청(該廳)에 명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의 양식과 반찬을 보살피고 도와 주도록 하였다.
2월 13일 병신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 갔는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2월 14일 정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비국 당상·봉조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이창임(李昌任)을 승지로 삼았다.
김응순(金應淳)이 시노비(寺奴婢)의 고질적인 폐단을 가지고 건의하여 진백(陳白)하였다. 임금이 여공(女貢)의 명목을 모두 혁파하고자 하여 시비(寺婢)와 역비(驛婢)의 공물 및 무녀(巫女)의 베[布]를 모두 없애도록 하고, 사비(私婢) 역시 그들로 하여금 공물을 거두지 말게 하려고 묘당(廟堂)에 명하여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만들게 하였는데, 묘당의 의논이 다른 물건으로 대신 지급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오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15일 무술
임금이 신방 진사(新榜進士)로 문경(聞慶)에 사는 이세림(李世林)을 소견(召見)하고 특별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니, 그는 곧 82세인 사람이었다.
2월 16일 기해
내국(內局)에 명하여 이날로부터 윤직(輪直)을 하도록 하였다.
2월 17일 경자
강주제(姜柱濟)를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삼도록 명하니, 강주제는 칠원(漆原) 사람으로, 나이 70세에 신방(新榜)에 참여한 자였다.
2월 19일 임인
여러 대신(大臣)이 빈청(賓廳)에 모여 성상의 덕(德)을 유양(揄揚)할 것을 논계(論啓)하여 청하자, 임금이 옛집에 거둥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약원의 3제조(提調) 및 여러 대신(大臣)과 승정원·삼사(三司)의 관원이 모두 면대(面對)를 요구하고 입시(入侍)하자, 임금이 들어가 빈청에서 계달한 초안을 보고 한결같이 모두 현임(現任)을 해직하도록 명하고 동가하라는 하교(下敎)는 도로 거두었다.
2월 20일 계묘
하교하기를,
"공자[孔聖]가 임금을 섬기는데 예(禮)를 다하자,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아첨한다고 일렀는데, 더구나 오늘날 풍형(豊亨)을 행하면 이것은 온 세상이 모두 아첨하는 것이다."
하고, 다시 하교하기를,
"아! 팔순(八旬)이 되어 한결같이 강방(剛方)하고 정직한 사람을 얻고자 하였으나, 온 세상이 모두 혼미(昏迷)하고 임금 역시 기운이 혼미하니, 슬프고 슬프도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요(堯)·순(舜)의 융성할 때에도 직(稷)·설(契)037) 이 역시 풍형을 하였던가? 내가 덕(德)이 적고 정성이 얕아서 그러하도다. 임금이 덕이 있다면 신하가 어찌 감히 떠버릴 수가 있겠으며, 임금이 만약 성의가 있었다면 신하가 이와 같이 우매하였겠는가? 삼공(三公)이 있는가? 구경(九卿)이 있는가? 임금이 병이 조금 나았는데 신하에게 도리어 곤욕을 당하니, 존호(尊號) 여덟 글자를 꼭 더 청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만고에 아첨하는 것이다. 아! 요·순의 1백 10세 동안 과연 이러한 청이 있었으며, 무왕(武王)의 93세 동안 또한 이러한 청이 있었던가? 하례하는 것과 연회하는 것도 오히려 그것이 아첨에 가까운데 더구나 이런 청이겠는가? 직일(直日)을 철수하자 그들이 이것을 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들이 역시 임금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겠는가? 슬프다! 지금 내가 누구를 믿겠느냐? 스스로 그 마음을 결단하고 스스로 지켜야 할 뿐이로다."
하였다.
2월 21일 갑진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서형수(徐逈修)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원임 대신과 유신(儒臣)은 현임(見任)에서 해직하고, 하교는 도로 정지하도록 하며, 삼공(三公)은 다시 전임(前任)에 제배(除拜)하고, 약방 도제조는 다시 제수(除授)하라고 명하였다.
2월 22일 을사
임금이 삼상(三相)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卿) 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32글자 존호(尊號) 이외에 다시 무엇을 청할 것인가? 임금을 섬기는데 예(禮)를 다하는 것도 오히려 아첨을 한다고 하는데 더구나 이것을 청하는가?"
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을 아첨이라고 하는데, 신 등은 늘 성상의 뜻을 거역하였으니 아첨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요(堯)·순(舜)·우(禹)·탕(湯)은 모두 봉선(封禪)038) 을 하였는데, 그 뒤의 임금은 덕(德)이 적어서 능히 봉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요·순은 어찌 봉선을 하였던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경사(經史)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였다.
2월 24일 정미
율제(律題)를 써서 궁중에 입직(入直)하는 사람들에게 시험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홍낙순(洪樂純)이 수석을 차지하자 그에게는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나머지에게도 모두 상을 주도록 하였다.
2월 25일 무신
상주(尙州) 유생 채경룡(蔡景龍)이 상소하여 효종[孝廟]의 어필(御筆)과 어제(御製)를 헌상(獻上)하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어 입고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어제와 어필을 배송(拜送)하여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에 봉안(奉安)하였으며, 어제문(御製文)을 써서 어린 세손(世孫)에게 보이고 친히 척호 삼장(陟岵三章)039) 을 외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월 27일 경술
서춘군(西春君) 이엽(李燁)이 상소하여, 숙종[肅朝]의 존호(尊號)를 더 올리도록 청하고 다시 나라의 경사를 유양(揄揚)하도록 청하자, 그 상소를 사각(史閣)에 소장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내용이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를 죄주지는 않았다.
2월 29일 임자
이날은 저경궁(儲慶宮)의 생신일(生辰日)이었다. 임금이 안으로부터 다례(茶禮)를 갖추어 의식을 행하도록 하고 왕세손(王世孫)을 보내어 대신 전작(奠酌)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달하였는데, 왕세손이 꿇어앉아 받았다. 임금이 걸어서 함장문(含章門) 밖으로 나아갔다가 덕유당으로 환어(還御)하였다. 특별히 예방 승지 조종현(趙宗鉉) 및 예모관(禮貌官) 이양수(李養遂)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춘방(春坊)040) 요원(僚員)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어제(御製)의 글을 써서 어린 세손(世孫)에게 보이라고 명하였다.
이양수(李養遂)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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