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2권, 영조 50년 1774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6. 21:44
반응형

3월 1일 갑인

이중호(李重祜)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으니, 이중호는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041)  의 이종(姨從)이었다. 그러므로 형제와 자질(子姪)이 모두 명환(名宦)과 웅번(雄藩)042)  이 되었는데, 그가 또 척리(戚里)임을 자처하므로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3월 2일 을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삼일제(三日製)043)                  를 설시하도록 명하고 5인을 선발하였으며, 수석을 차지한 진사 한광계(韓光綮)에게는 급제를 하사하도록 하였다.

 

3월 3일 병진

사헌부 【지평 윤경룡(尹慶龍)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계달하기를,
"장릉 참봉(章陵參奉) 강주제(姜柱濟)는 본래 품행이 바르지 않아서 향리에서 버림을 받았고, 거우(居憂)044)   중에 두 아들을 데리고 함부로 초시 시험장 안에 들어왔으므로 남도에서 온 사람들이 그 말을 전하지 않음이 없으니, 본도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여 죄를 주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황단(皇壇)045)   의식(儀式)에 대한 예행 연습을 행하였다. 임금의 옥체(玉體)가 아직 정섭(靜攝) 중에 있는데 노동(勞動)을 꺼리지 아니하고 친히 제사의 의식을 돌보시니 존주(尊周)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3월 4일 정사

김보순(金普淳)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니, 응제(應製)에 다섯 차례나 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김보순은 본래 문명(文名)이 없었는데 한림 소시(翰林召試)에 장원(壯元)을 하였고, 문신 제술(文臣製述)에도 장원을 하였으며, 세 차례 율시 응제(律詩應製)에도 수석을 차지하였으니 이상하다고 할 뿐이다.

 

3월 6일 기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도총부(都摠府)에 들러 친히 ‘옛일을 생각하니 만가지가 그립다[憶昔懷萬]’는 네 글자를 써서 판(板)에 걸도록 하고, 제보부(祭報府)046)  를 읽어 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말하기를,
"진배관(進排官) 이봉모(李鳳模)는 곧 이정(李瀞)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정이 하는 일은 갑관요(蓋寬饒)047)  처럼 뒤에서 다시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나이 70이 넘었다고 하니 특별히 그 아들을 승륙(陞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어제문(御製文)을 써서 어린 세손(世孫)에게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3월 8일 신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달하고 육상궁(毓祥宮)으로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집례 김사목(金思穆)에게 가자(加資)를 하였으며, 예를 도운 여러 승지에게는 모두 말[馬]을 내리도록 하고, 최동악(崔東岳)에게는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최동악은 권세를 믿고 교만함이 지나쳐서 불법(不法)을 많이 저질렀는데, 대신(大臣)들의 뜻을 잘 맞추어 웅곤(雄閫)048)  의 자리에 천수(薦授)되었으니,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매우 한심스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7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48] 웅곤(雄閫) : 큰 도의 감사.
사신(史臣)은 말한다. "최동악은 권세를 믿고 교만함이 지나쳐서 불법(不法)을 많이 저질렀는데, 대신(大臣)들의 뜻을 잘 맞추어 웅곤(雄閫)048)  의 자리에 천수(薦授)되었으니,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매우 한심스럽게 여겼다."

 

3월 9일 임술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3월 10일 계해

홍검(洪檢)을 승지로 삼았다.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니, 육상궁(毓祥宮) 제사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박상덕을 변명하여 비호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를 파직하고 다시 서임(敍任)하지 말도록 명하였다가 금방 도로 정지하였다.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판서로, 홍술해(洪述海)를 이조 참의로, 정창성(鄭昌聖)을 대사헌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선혜청 당상 정홍순(鄭弘淳)을 파직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홍순이 재상(災傷)으로 감면된 공가(貢價)의 정지를 가지고 인의(引義)하여 공무를 집행하지 아니하자, 김상복이, ‘당초에 재상(災傷)을 감면한 것이 경솔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인의(引義)한 것 역시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이러한 청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임금의 어가(御駕)가 육상궁(毓祥宮) 뒷산 기슭에 이르러서 보토(補土)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익빈(申益彬)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1일 갑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상참(常參)을 행하고 호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의 아뢴 바로 인하여 관서(關西)에서 전세(田稅)로 거두어 들인 쌀 1만 석과 별향고(別餉庫)의 돈 2만 냥 및 포목(布木) 1백 동(同)을 특별히 호조에 획급(劃給)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창성(鄭昌聖)이 보상(輔相)과 전관(銓官)은 원망을 떠맡고 공무를 받들어 행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자신을 잊어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면전에서 더욱 신칙(申飭)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아름다운 말과 좋은 계책을 구하고자 하는데, 아뢰는 바가 ‘원망을 떠맡고 공무를 받들어 행하라.[任怨奉公]’는 네 글자이니, 혼탁한 세상에 따끔한 경계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엄칙(嚴飭)을 더하도록 하라."
하였고, 대사간 심관지(沈觀之)가 육조(六曹)의 장관으로 상참(常參)에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을 파직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에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은 자는〉 계달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처분하라는 하교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어 영상에게 유시를 펴고 그와 더불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을축

원풍 부부인(原豊府夫人)이 졸(卒)하자, 모든 거행을 기축년049)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조정(朝廷)의 관원이 뜰에 와서 문안(問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3월 13일 병인

임금이 역비(驛婢)의 공물(貢物)과 사비(寺婢)의 공물을 똑같이 탕감하여 주는 일로 대신(大臣)과 선혜청 당상에게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품달하라고 명하고, 무녀(巫女)에게 받는 베[布] 역시 특별히 감하도록 명하였다.

 

3월 15일 무진

중궁전(中宮殿)이 성복(成服)을 한 뒤에 조정(朝廷)의 관원들이 뜰에 가서 문안(問安) 하였다.

 

3월 16일 기사

박도원(朴道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베풀고 한광경(韓光綮)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2등을 한 사람이었다.

 

3월 16일 기사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이 졸(卒)하였다. 연의 사람됨이 평온하고 조용하여 화려함을 일삼지 않았고, 가정 생활에서는 한사(寒士)와 같아서 사람들이 그를 많이 칭송하였다.

 

3월 18일 신미

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서 신은(新恩)050)  에게 창방(唱榜)을 행하였다.

 

3월 20일 계유

사헌부 【지평 권평(權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계달하여 음관(蔭官)의 나이가 벼슬하는데 준(準)하지 못할 자는 비록 승전(承傳)이 있다 하더라도 비의(備擬)051)  하지 못하게 하여 요행의 문을 막고 정사(政事)의 격식(格式)을 보존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특별히 조재준(趙載俊)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3월 21일 갑술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따라 갔다. 임금이 전배(展排)를 한 뒤에 황조인(皇朝人)052)  의 자손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옥서(玉署)053)  에 나아가서 비풍(匪風)과 하천(下泉)054)   두 장(章)을 외우고, 이어 유신(儒臣)들에게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고, 또 세손(世孫)에게도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으며, 다시 춘방(春坊)도 읽어 아뢰도록 하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옛날에 〈문종(文宗)이〉 옥서(玉署)055)  에 나아가 근보(謹甫)를 불렀던 융성한 뜻056)  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하고, 곧 어린 세손(世孫)과 함께 와서 입직(入直)한 유신 모두에게 승서(陞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근보는 바로 성삼문(成三問)의 자(字)인데, 옛날에 문종(文宗)이 옥서에 거둥하여 성삼문의 자(字)를 부른 것은 친구의 도리로서 그를 대접한 것이었다. 이어 춘방에 나아가 세손(世孫)에게 《성학집요(聖學集要)》를 읽도록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들러서 친히 두 구(句)의 시를 쓰고 승정원·옥당(玉堂)·춘방·한주(翰注)057)  로 하여금 시를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옥서의 이예(吏隷)에게는 모두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주서(注書)는 6품으로 올리고, 승지와 춘방, 좌·우사(左右史)에게는 말[馬]을 주도록 하였으며, ‘근신하고 성실해야 한다.[恪謹惟允]’는 네 글자를 친히 써서 판(板)에 걸도록 하였다.

 

3월 22일 을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원 【사간 최민(崔)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전효증(全孝曾)을 특별히 방면(放免)하도록 한 명을 도로 정지하도록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개 전효증은 역적 심정연(沈鼎衍)의 사수(寫手)058)  요, 전효순(全孝舜)의 식주인(食主人)으로서 연해(沿海)에 정배(定配)된 사람인데, 지금 그의 처가 상언(上言)하였기 때문에 석방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이전부터 강가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하교 중에, ‘들여 몰아서 그곳을 봉쇄하라.[驅入封鎖]’는 네 글자는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3월 23일 병자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조 판서 한광회(韓光會)와 참의 홍술해(洪述海)를 잡아들이게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80세의 임금이 장차 개정(開政)059)  을 하려는데, 그대들이 어찌 감히 곧바로 임금이 소명(召命)하는 패(牌)를 받들지 아니하는가?"
하고, 이어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로, 이명식(李命植)을 참의로 삼았다. 이는 대개 새로 급제한 사람인 하범석(河範錫)이 나이 70이 넘었기 때문에 개정(開政)하여 부직(付職)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한광회와 홍술해가 서로 미루며 사양하고 바로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되었다.

 

채홍리(蔡弘履)를 승지로 삼았다.

 

3월 23일 병자

홍명한(洪名漢)을 특별히 제수(除授)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5일 무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명릉(明陵)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척호장(陟岵章)을 강하도록 하였다.

 

3월 27일 경진

중궁전(中宮殿)이 사복(私服)으로 공제(公除)060)  를 하자, 조정(朝廷)의 관원들이 뜰에 와서 문안(問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가서 한림 소시(翰林召試)와 주서 소시(注書召試)를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 홍낙항(洪樂恒)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달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권식(權拭)을 임명하는 제목을 내리자, 여론이 매우 시끄러우니 청컨대 개차(改差)하고, 전관(銓官)은 추고(推考)하도록 하며, 죽산 부사(竹山府使) 이은복(李殷福)은 족징(族徵)을 교활한 하리(下吏)와 꾀하였고, 의심나는 송사(訟事)를 간악한 향임(鄕任)에게 맡겼으니, 자목(字牧)061)  의 직임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9일 임오

임금이 친히 어린 세손(世孫)에게 유시(諭示)하는 글을 지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