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2권, 영조 50년 1774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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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고, 이어서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척호장(陟岵章)을 읽도록 하였다.

 

4월 2일 갑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주원(廚院)에 나아가 입직한 낭청(郞廳) 송환익(宋煥翼)을 수령(守令)으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는데, 송환익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기 때문이었다.

 

4월 3일 을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교리 정원시(鄭元始)가, 〈성상께서〉 이하집(李夏集)을 신설(伸雪)하도록 한 뒤에, 양사(兩司)의 장관이 쟁집(爭執)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파직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계달한대로 시행하고, 이하집의 신설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심관지(沈觀之)의 직위를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그가 말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인책(引責)하여 대간(臺諫)의 지위를 모면하려는 계책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다.

 

유생 박대화(朴大和)가 그의 선조(先祖)의 일을 위하여 상소(上疏)하자, 임금이 도제조 원인손(元仁孫)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것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성조(聖祖) 계해년062)  의 반정[改玉]이 있은 후에 선정신(先正臣) 박지계(朴知誡)와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이 함께 예절로써 인재를 찾는 부름을 받았는데, 박지계는 제왕(帝王)의 집안에 어찌 예조(禰祖)063)  가 없을 수 있으며, 또한 원묘(元廟)064)  를 추숭(追崇)하는 의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김장생은 성조(聖朝)065)  께서 이미 선조[穆廟]의 체통을 이어받았으니 별도의 예묘(禰廟)를 세울 필요는 없다고 말하여 두 사람의 주장이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근거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가 박지계의 시장(諡狀)066)  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필주의 문집을 교정할 때에 그의 문인(門人)인 구상훈(具常勳)이 그 시장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대화가 이것을 진소(陳疏)하였으니, 이것은 추상(推上)할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의 사고(私藁)를 더하거나 감하는 것을 어찌 임금에게까지 알리게 하는가? 승정원(承政院)에 신칙(申飭)하여 이와 같은 상소는 절대로 받아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4일 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의식(儀式)에 대한 예행 연습을 행하였다.

 

4월 7일 기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장락전(長樂殿)에 나아가서 용비루(龍飛樓)에 올라가 동쪽을 향하여 부복(俯伏)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광명전(光明殿) 남무(南廡)에 나아가서 승지에게 어제(御製)를 써서 동궁(東宮)에게 전달하도록 명하고, 억석와(憶昔窩)에 들러서 임금이 송형중(宋瑩中)에 말하기를,
"장릉(莊陵)067)  을 복위(復位)할, 때 신규(申奎)의 상소는 과연 동평위(東平尉)068)  가 시킨 것인가?"
하니, 송형중이 말하기를,
"장릉을 복위하는 일은 동평위가 신의 아버지 송위(宋煒)로 하여금 소(疏)를 짓도록 하였고, 권이상(權以相)이 또한 윤색(潤色)을 하여 책상 머리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신규가 왔기 때문에 그를 시켜 정납(呈納)하도록 하니, 신규가 개연(慨然)히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을 지금에야 비로소 명쾌하게 알았다."
하였다.

 

4월 8일 경인

전 현감 홍준한(洪駿漢)을 승지로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홍준한은 바로 홍봉한(洪鳳漢)의 아우였다.

 

4월 9일 신묘

서회수(徐晦修)를 대사헌으로, 신익빈(申益彬)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가서 구태후(丘泰垕)를 잡아들이도록 하여, 엄하게 형벌하고 기장현(機張縣)에 충군(充軍)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구종직(丘從直)의 훌륭함을 생각하고 그 자손을 찾도록 명하여, 구태후를 효릉 참봉(孝陵參奉)으로 삼았는데, 구태후가 글을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였고 처음으로 능의 서원(書員)들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더러는 능졸(陵卒)과 더불어 서로 너나들이 하게 되니, 능졸의 무리들이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능침(陵寢) 가까운 땅에 있는 큰 소나무 두 그루를 베는 죄를 범하였다. 이것 때문에 임금이 놀라고 통분하게 여겨 이런 명령을 하였다. 사간 최민(崔)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특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특별한 능관(陵官)을 간택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태후의 일은 저들의 과실이 아니라, 곧 내가 옛날 사람 〈구종직〉을 사모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뒤에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0일 임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의릉(懿陵)을 적간(摘奸)하려 한 선전관을 잡아들여 곤장(棍杖)으로 치는 형벌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정방(鄭枋)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1일 계사

평양(平壤)의 유학(幼學) 최배호(崔配浩)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조[宣廟]께서 임진년069)  에 영유(永柔)로부터 강서(江西)로 가는 길에 평양부(平壤府) 서촌(西村) 초도동(抄道洞)에 있었는데, 중도에서 대풍(大風)을 만나 신의 6대조인 최윤(崔崙)의 집에 들어와 하룻밤을 지내시고 가셨던 일이 읍지(邑誌)에 소상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께서〉 들어가 유숙하였던 가사(家舍)가 해가 오래되어 기울어져 무너졌고, 옛터가 황폐하고 거칠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표석(表石)을 세우는 은전(恩典)을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고, 친히 ‘계사년에 주필한 곳[癸已年駐蹕處]’이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비각을 건립하고 비석(碑石)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최배호를 선릉 참봉(宣陵參奉)으로 삼으니 이때 최배호의 나이가 74세였다. 관서(關西)의 미천한 사람을 지나치게 침랑(寢郞)에 제수하였으므로, 요행을 엿보는 무리들이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4월 12일 갑오

조종현(趙宗鉉)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3일 을미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양서(兩西)와 기전(圻甸)070)  간의 직로(直路)에 사는 사람을 시취(試取)하니, 이는 대개 임진년에 선조[宣廟]께서 의주를 가고 오던 길이라 추모하는 성상의 뜻에서 나왔다. 문과에 이과(李果) 등 3인을 뽑고 무과에는 7인을 뽑았는데, 모두 급제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4월 14일 병신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의주(義州)·평양(平壤)·황화(皇華) 지방의 사람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직부(直赴)한 사람인 동몽(童蒙) 홍성신(洪聖臣)에게 특별히 선릉 참봉(宣陵參奉)을 제수하고 호조로 하여금 급량(給糧)을 도와 주고 관례를 하여 관을 씌워 주도록 하니, 이때 홍성신의 나이 18세였고,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재순(吳載純)·조영진(趙英鎭)을 승지로 삼고, 채제공(蔡濟恭)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홍성신(洪聖臣)이 영친(榮親)하러 내려갈 때 지나가는 고을에서 양식(糧食)을 지급하게 하고, 본 고을에 도착한 뒤에는 감영(監營)으로부터 미·태(米太)와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되, 선혜청(宣惠廳)으로부터 먼저 양식을 지급하게 하고 또 쇄마(刷馬)071)  도 지급하도록 하였다. 다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혼수(婚需)를 지급하고 혼사를 치르게 한 뒤에는 장계(狀啓)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5일 정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가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대축(大祝)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집례에게는 현직에 준하여 올려서 서임(敍任)하고, 여러 승지와 통례에게는 말[馬]을 내리도록 하였다.

 

특별히 구윤옥(具允鈺)을 제수하여 호조 판서로 삼았다.

 

4월 16일 무술

김한로(金漢老)를 승진시켜 병조 참의로 삼았는데, 김상복(金相福)의 청한 바를 따른 것이다. 구명겸(具明謙)을 충청도 수사(忠淸道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희간(任希簡)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7일 기해

임금이 교하(交河)의 유생(儒生) 민희천(閔喜天) 등의 상소로 인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자, 한익모(韓翼謨)가 대답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은 모두 〈서출로〉 적자(嫡子)를 계승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실(嫡室)에는 아들이 없으나 첩의 아들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아들로 후사(後嗣)를 삼는다면 그들이 당연히 원통하게 여길 것이다.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에 벌써 통청(通淸)이 되었는데, 어찌 유독 〈서출로〉 적자 계승만 하지 못하겠는가? 적실과 첩이 모두 아들이 없다고 말하는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비국 당상·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하순(下詢)한 뒤에 하교하기를,
"마음에 늘 개연(慨然)한 것이었다. 이 뒤로는 법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8일 경자

배율시(排律詩)에 응제(應製)하여 합격한 사람 송경환(宋景煥)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4월 19일 신축

임금이 서강(西江)의 세선(稅船)을 점검(點檢)하는 곳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방포(放砲)를 명하자 첫째 배가 방포를 하였고, 다른 여러 배에는 포(砲)가 없어서 북으로 대신 응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의 감관(監官) 이하에게는 작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상을 주도록 하고, 지나면서 의소묘(懿昭墓)에 들렀다.

 

4월 20일 임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4월 21일 계묘

민홍렬(閔弘烈)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3일 을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수현(沈壽賢)이 강경(講經)할 때에 ‘도(道)가 합하면 복종하고 도가 합하지 않으면 버리고 가라고 하였는데, 신 등은 이 말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더니 그 말이 진실로 옳았다. 지금 내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버리고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국(戰國) 시대에 〈식견이나 지조가 없이〉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가던 신하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교목 세신(喬木世臣)072)  이 의리에 처신(處身)함이 각각 다르며 비교하여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4월 24일 병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西北)의 별부료 무사(別付料武士)에게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종신(宗臣)을 소견(召見)하고 《소학》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4월 25일 정미

안흥 첨사(安興僉使) 서필수(徐必修)의 관직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는데, 세선(稅船)의 길 인도를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4월 25일 정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대사간 임희증(任希曾)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약원(藥院)에서 문후(問候)할 일로써 진달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갑자기 자리에 나아갔으니 진실로 개연(慨然)합니다. 지금 눈앞의 많은 일들이 성상의 몸을 보호하고 아끼는 것에 벗어남이 없는데, 약원이 전부 텅 비어서 쇄초(鎖抄)를 내리지 못하니, 이것을 청하여 얻지 못하면 전례를 따라 전계(傳啓)하는 것도 여가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약원의 제조(提調)에게 빨리 인원을 갖추고 쇄초를 내리도록 명하는 것이 곧 신 등의 간절한 희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전계(傳啓)를 먼저하지 아니하고 이 일을 우러러 진달하니 체모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송형중은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계달은 묘당(廟堂)의 계책과 다르니 청하여 얻어내지 못하면 감히 물러가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입시한 좌상(左相)을 약방 도제조로 삼고, 이조 판서를 제조로 삼고, 도승지는 전례에 의거하여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송형중과 임희증에게는 특별히 차비문(差備門)에서 말[馬]을 내리도록 하여, 칭찬하고 장려한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대사헌 송형중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역옥(逆獄)에 간련(干連)된 무리가 감히 신설(伸雪)할 계책을 세우니, 유수(柳綏)와 유정(柳綎)같은 사람들은 연좌된 죄상이 어떠한데, 지난번에 유가(柳哥)가 북을 치고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요행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엄중하게 처리하지 아니하면 뒷날 징계할 수 없으니, 청컨대 북을 친 사람 유가를 변방의 먼 곳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배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효장묘(孝章廟)에 친히 잔을 부었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집례(執禮)와 대축(大祝)은 모두 준직(準職)을 명하고, 승지 이하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하였다.

 

4월 26일 무신

전 판중추부사 이은(李溵)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구임 낭청(久任郞廳)을 소견(召見)하고 직책상 맡은 일을 물어보았다.

 

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8일 경술

심상운(沈翔雲)을 승지로 삼았다.

 

북도(北道)의 전 감사 이최중(李最中)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북도의 인심을 물었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지금은 순박한 풍속이 점점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4월 29일 신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선전관에게 명하여 남쪽 들의 모맥(牟麥)을 가서 보도록 하고, 가뭄을 근심하여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고(故) 진사 나이준(羅以俊)을 증직(贈職)하도록 특별히 명하자, 민백흥(閔百興)이 아뢰기를,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에 태학생(太學生)이 모두 도망가서 흩어졌는데, 진사 나이준은 수복(守僕) 정신국(鄭信國)과 함께 포대(布袋)를 만들어서 대성(大聖)과 오현(五賢)의 위판(位板)을 싸가지고 정신국(鄭信國)으로 하여금 등에 지고 말을 타게 하였고, 뒤쫓아가서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복인 정신국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이 있었으나, 재생(齋生) 나이준의 경우만 유독 빠졌기 때문에 영천(榮川) 유생들이 전후로 단자(單子)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자,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과연 중신(重臣)이 아뢴 것과 같다면, 나이준의 경우에도 그 당시에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10년 만에 급제하였을 때에는 방목(榜目)에 진사(進士)라고 썼으니 그 이유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추시(追施)하는 은전을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贈職)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4월 29일 신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서 공시인(貢市人)073)  과 향민(鄕民)을 소견(召見)하고 고질적인 민가의 폐단과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최민(崔)을 승지로 삼았다.

 

4월 30일 임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말하기를,
"나의 도리는 ‘수성(修省)’ 두 글자에 있도다."
하니,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이 편안한 뒤에야 등대하는 도리를 이룰 수 있으며,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은 탕제(湯劑)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해이해질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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