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축
임금이 창의궁(彰議宮)에 나아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신(宗臣)의 문안청(問安廳)에 들렀다.
전 문학(文學) 조재한(趙載翰)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는데, 조재한은 곧 조현명(趙顯命)의 아들이었다.
5월 2일 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비가 내렸으니 감선(減膳)의 기한을 가을 추수까지 하라는 하교(下敎)는 도로 거두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달이 지난 후에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을 본받는 도리를 마땅히 이와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갑자기 회복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앞서 전효증(全孝曾)의 처의 상서(上書)로 인해 성상께서 그를 석방하였는데, 대신(臺臣)이 다투어 〈그 불가함을〉 고집하였으나 신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효증의 형제는 귀양을 갔고 그 어머니의 나이는 80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범한 죄는 심정연(沈鼎衍)의 사수(寫手)074) 가 때마침 왔기 때문에 밥을 준 것으로 본디 알고 있습니다만, 이 일은 옥사(獄事) 전에 있었으니 마땅히 소석(疏釋)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다투어 〈석방하지 말도록〉 고집하는 것은 나도 지나치다고 여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두 사람을 특별히 석방하고 아뢰도록 하여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호남(湖南)에서 단오절에 진상할 부채를 가지고 온 사람을 불러 들여 비가 오고 난 뒤의 농사 형편을 묻고, 이어서 또 묻기를,
"부채가 든 궤짝을 도신(道臣)이 봉진(封進)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밖은 인장(印章)을 찍어 봉하고, 안은 ‘신이 삼가 봉한다.[臣謹封]’는 것으로 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면 중간에서 어찌 부채를 바꾸는 일이 있겠는가? 오늘 중관(中官)075) 이 과연 서울 부채를 가지고 공물로 충당했다고 말한 것은, 필시 중관이 정채(情債)076) 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이렇게 아뢰게 되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전배(前排)077) 를 불러 들여 중관을 장문(杖問)한 뒤에 중관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고 창고[廂庫]의 고직(庫直)은 교동부(喬桐府)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5월 3일 을묘
최동악(崔東岳)을 평안 병사로, 홍검(洪檢)을 이조 참의로, 정만순(鄭晩淳)을 대사성으로, 서형수(徐逈修)를 승지로 삼았다.
5월 4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서경(書經)》에서 말한,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本固邦寧]’는 글귀를 써서, 어린 세손(世孫)에게 어제(御製)임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한광경(韓光綮)을 승지로 삼았다.
5월 5일 정사
임금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승지를 보내어 사직단(社稷壇)을 봉심(奉審)을 하도록 하고, 여주(驪州)에 가서 봉심을 하고 온 승지 최민(崔)에게 녹비[鹿皮]를 하사(下賜)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봉심을 하러 갔다가 빨리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5월 6일 무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평안 감사 채제공(蔡濟恭)을 소견(召見)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중신이니 내가 권면하고 신칙할 필요가 없다."
하니,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을 이와 같이 장용(奬用)하는 것은 대성 광운(大成廣運)하는 교화가 아닌 것이 없는데, 성상께서 만약 간발(簡拔)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채제공은 곧 남인(南人)이지만 바로 성상께서 총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김종수(金鍾秀)가 감사가 되어 장문(狀聞)하여 진열(陳列)하기를, ‘채제공의 군관인 김치유(金致維)가 돈·베·곡식을 환롱(幻弄)하여 도둑질해 먹은 것이 거의 거만금(巨萬金)이 된다.’고 하였으니, 감사(監司)가 알지 못하고서 군관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채제공은 성상께서 위임한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5월 7일 기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삼공(三公)과 의금부·형조의 당상관을 모으고서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는데, 가뭄을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조영순(趙榮順)을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5월 8일 경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유생(儒生)과 방민(坊民)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탕제(湯劑)가 쓴 것을 괴롭게 여겨, 탕제를 정지하도록 말을 잘하는 자가 있으면 당연히 두 자급을 올려 주고 백금(百金)을 상으로 주겠다는 영을 내렸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정중(庭中)에 북을 매달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중탕(理中湯)이 지나치다고 여기는 자는 북을 두번 치고, 하교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자는 북을 한번 치도록 하라."
하였는데, 안재규(安載圭)라는 자가 북을 두 번을 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오동잎으로 희롱한 것[桐葉作戱]078) 을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두었으므로, 그대로 〈그 아우를〉 봉(封)하였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스스로 설 수 없다."
하고, 이어서 두 자급을 올려주고 백금의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 빈대(賓對)에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안재규의 외람되고 무엄(無嚴)함과 또한 공(功)을 바라고 엿보는 마음이 있었다고 아뢰었고, 대사헌(大司憲) 송형중(宋瑩中)은 인심(人心)이 옛날과 같지 않으므로 요행을 바라는 문이 갈래가 많으니 이 길을 한번 열어 주면 공(功)을 바라고 엿보는 무리가 아마도 앞으로 잇달아 일어나 것이라고 진계(陳戒)하자,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 들였다.
5월 9일 신유
민홍렬(閔弘烈)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대사간 임희증(任希曾)이 기우제를 지내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0일 임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기우제에 향(香)을 전하는 예를 행하였다.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 및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순국한 사람의 자손을 소견(召見)하고, 자정전(資政殿)에 돌아와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관 및 관학(館學) 유생·서북(西北) 지방의 무사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승지 최민(崔)에게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079) 가 일컬은 바의 관서 부자(關西夫子)080) 는 승지에게 몇대 선조이며, 부자(夫子)라고 일컬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최민이 말하기를,
"신에게 13대조가 되는데, 명(明)나라에 봉사(奉使)하였을 때 황제가 옥하관(玉河館) 영건(營建)의 감동(監董)을 명하였는데, 그 뒤에 사신(使臣)을 통해 그가 작고(作故)하였음을 듣고 황제께서 매우 슬퍼하면서, ‘내가 다시는 동국(東國)의 양진(揚震)081) 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 2건(件)을 그려서 1건은 편전(便殿)에 걸어 두고, 1건은 사신이 돌아가는데 보내어 그 자손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제정공(齊貞公)이란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어필로 친히 ‘제정공 최용소(崔龍蘇)의 상(像)’이라 썼는데, 지금까지 종손(宗孫)의 집에서 봉안(奉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면대(面對)를 청하고 입시(入侍)하였는데 탕제(湯劑)를 올리지 않았다 하여 약원(藥院)의 세 제조(提調)를 현임(現任)에서 해직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11일 계해
김약행(金若行)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5월 12일 갑자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지영하는 예를 행한 뒤에, 친히 적전(籍田)의 양맥(兩麥)을 받았다.
5월 12일 갑자
임금이 수은묘(垂恩墓)에 나아가 진작(陳酌)하고 관왕묘(關王廟)에 들렀으며, 이어서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도승지·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하사하였다.
부응교 홍상간(洪相簡) 등이 말하기를,
"노마(路馬)가 발을 잘못 디뎌 옥체(玉體)를 경동(驚動)하게 하였으므로, 내승(內乘)과 첨정(僉正)은 이미 도태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조(提調)가 평시(平時)에 잘 검칙(檢飭)하였다면 어찌 말이 넘어졌겠습니까? 본시(本寺)082) 의 제조도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 이석보(李奭輔)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민백흥(閔百興)을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을 서용(敍用)하고, 은신군(恩信君)의 관직(官職)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5월 13일 을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북쪽으로 사직단(社稷壇)을 향하여 한참 동안 궤복(跪伏)하였다가 대궐로 돌아 왔다.
특별히 이익원(李翼元)을 제수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5월 14일 병인
이해중(李海重)을 대사헌으로, 이치중(李致重)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호남과 영남의 기선 감색(騎船監色)을 불러 들여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고, 또 사서인(士庶人)과 기로인(耆老人)으로 88세인 4인을 불러 보고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5월 17일 기사
통제사 조제태(趙濟泰)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한정한(韓鼎漢)·서영욱(徐永郁)이 2만 냥의 돈을 가지고 이식(利直)을 불려 본전을 납부하고도 수천 석의 곡식을 만들었는데, 이어 감관(監官)이 되자 빈궁한 백성들에게 진활(賑活)하였으므로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하교를 내렸다.
5월 18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비를 무릅쓰고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한참 동안 부복(俯伏)하였다가 대궐로 돌아왔다.
5월 19일 신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 및 봉조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사간원 【대사간 이치중(李致中)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요사이 중비(中批)083) 의 특별 발탁(拔擢)이 서로 수미(首眉)를 이어 일어나니 경재(卿宰)와 시종신의 수효가 거의 절반이 넘었습니다. 천고(千古)에 어찌 일찍이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 본다면 단지 자급(資級)을 지나치게 넘치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를 너무 자주 치른 것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빈한한 선비로 있을 때부터 벌써 요행의 희망을 가지고 한번 과제(科第)에 붙고나면 거의 모두가 조급하게 다투게 되니, 지금부터 뒤로는 명목 없는 과거는 창설(創設)하지 말고 공(功)없는 상은 엄격하게 억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역관[譯舌] 이종담(李宗聃)이 그가 기술한 책 1권을 진상(進上)하였는데, 대개 주금(酒禁)·남초(南草)084) ·체계(髢髻)085) ·문단(紋緞)·유과(油果)·장복(章服) 등 여섯 가지를 논한 것이었다. 〈임금이〉 안팎 옷감[表裏]을 하사하도록 명하여 ‘꺼리지 않고 문을 열어 놓는다.[開不諱門]’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5월 20일 임신
조종현(趙宗鉉)을 대사헌으로, 이숭호(李崇祜)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0일 임신
하동(河東)에 사는 유학(幼學) 이경성(李慶星)이 상소하여 민폐[民瘼] 7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관장(官長)이 백성을 학대(虐待)하는 것, 둘째는 집집마다 부역이 거듭 발생하는 것, 셋째는 관리(官吏)가 결복(結卜)의 세(稅)를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 넷째는 군포(軍布)를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 다섯째는 환상(還上)과 조적(糶糴)086) 을 포흠(逋欠)하는 것, 여섯째는 군액(軍額)을 구차하게 충원(充員)하는 것, 일곱째는 옥송(獄訟)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 등이었다.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 상소를 비국(備局)에 내려 신칙(申飭)할 만한 것은 조목별로 나열하여 초기(草記)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궤복(跪伏)하니, 내국(內局)의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삼가 바라건대, 대궐로 돌아오셔서 고요하게 누워 묵묵히 기도하는 것이 정성을 바치는 도리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능히 누워서 잠심(潛心)하겠는가? 내가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고 덕(德)도 적고 정성도 얕아서 태실(太室)에 근심을 끼치게 되었도다."
하자, 왕세손(王世孫)이 나와서 시측(侍測)을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삼가 왕세손의 애타고 황급해 하는 낯빛을 보니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왕세손의 간절한 청을 굽어 들으시어 빨리 대궐로 돌아가는 명을 내리소서."
하고, 김양택은 내시(內侍)를 시켜 교자(轎子)를 대령하도록 하고, 왕세손은 대신(大臣)과 함께 임금을 부축하여 일으키니, 임금이 교자를 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5월 21일 계유
집의 송제로(宋濟魯)가 상소하여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는 비용을 절제하고 화평(和平)의 규범(規範)에 힘쓰도록 청하자,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전 사예(司藝) 이상운(李尙運)이 상소하였는데, 때도 없이 갑자기 동가(動駕)하는 것과 여염 의복의 사치가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단군(檀君)의 사당으로부터 전조(前朝)의 여러 능(陵)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사전(祀典)에 있는 곳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친히 봉심(奉審)하고, 양도(兩道)의 유수(留守)도 또한 똑같이 봉심하도록 하며, 제때에 곧 수보(修補)를 하되 모두 모군(募軍)을 이용하고, 저치미(儲置米)087) 로 회감(會減)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5월 22일 갑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시골 백성으로 서울에 온 자를 소견(召見)하고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사헌부 【장령 안정대(安鼎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전주(全州)에 사는 송씨(宋氏) 성을 가진 양반(兩班)이 시골에서 폭력을 써가며 남에게 채무를 징수하기 위해, 동네 여인네들을 잡아들여다가 사사로이 악한 형벌을 시행하여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한 지어미가 원한을 품으면 5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는데, 지금 몹시 가무는 것이 아닌게아니라 이러한 일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청컨대, 해당 도에 분부(分付)하여 기한을 정해 잡아들여 법에 처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매우 참혹하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먼저 본관(本官)에 분부하여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고 도신이 친히 집행하여 엄중히 문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3일 을해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호서(湖西)에서 진휼을 마쳤다는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태안 군수(泰安郡守) 왕한정(王漢楨)이 스스로 비축한 곡식이 1천여 석에 이르도록 많다고 아뢰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나충좌(羅忠佐)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사급(賜給)하도록 명하였다.
각사(各司)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던 관원들의 말들이 모두 보통이었으나, 임금이 관대히 받아들였다.
전 영부사 한익모(韓翼謨)를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5월 24일 병자
이갑(李𡊠)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4일 병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글 12조목을 써서 자신을 책망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에 은(殷)나라 탕(湯)임금은 상림(桑臨)에서 단지 육사(六事)088) 를 일컬었으나, 소신(小臣)은 지금 그보다 곱절이나 되니 몸[肌膚]을 어찌 아끼겠는가?’라는 하교를 옛날에 우러러 들었다. 한 사람이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늘 마음속으로 빌었는데, 오늘에 이르도록 흡족하게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백성을 어찌 구휼하겠는가? 충자(沖子)가 따라 왔으니, 삼공과 구경 및 여섯 승지(承旨)는 모두 입시(入侍)하여 지난 해의 사한제(司寒祭)089) 때와 같이 오시(午時)를 한정하여 이곳에서 부복(俯伏)하도록 하라. 아! 300여년 동안 전해온 조선(朝鮮)에서 할아버지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의지한다는 것이 어찌 다만 계유년090) 에 자성(慈聖)에게 거듭 아뢴 것뿐이겠는가? 그런데 어찌 감히 고당(高堂)에 누워만 있겠는가? 당연히 경자년091) 상중(喪中)에 기거했던 초사(草舍)에 머물렀다가 단비가 흡족하게 오는 것을 본 뒤에야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다. 저 푸른 하늘이 밝게 비추어 보고 있으며 〈선왕의 영혼이〉 오르내리며 굽어 살펴보는데, 신이 감히 어찌 속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가 태상 신실(太常神室)에 들러 배례(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라갔다. 하교하기를,
"오늘 흐리멍덩하고 느릿느릿한 태도로써 어가(御駕)를 따라온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파직하도록 하여라."
하였다가, 즉시 정지하고, 승지를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서 영어(囹圄)의 중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구익(具㢞)·김사목(金思穆)·홍술해(洪述海)·정호인(鄭好仁)·조영진(趙英鎭)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5일 정축
큰 비가 내렸다. 이날 기우제를 지낸 제관(祭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하였다.
송재희(宋載禧)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부사직 이유철(李有喆)이 상소하여 안재규(安載圭)를 초자(招資)092) 하도록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변방의 먼 곳에 정배(定配)하여 오늘 이후의 폐단을 징계하도록 하라고 청하자, 임금이 그가 대신(臺臣)도 아니면서 안재규에게 형률(刑律)을 청하였다는 이유로 특별히 서임하지 말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고 다시는 대간(臺諫)의 의망(擬望)에 검의(檢擬)093)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날에 임금이 비로소 집경당(集慶堂)에 환어(還御)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호조의 반록(頒祿)이 공가(貢價)로는 부족함으로 군작미(軍作米) 1만 석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직책이 삼사(三司)에 있으면서 한 사람도 교지에 응하여 상소를 진달하는 자가 없으니, 청컨대 말하지 않는 삼사는 한결같이 모두 파직을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다시 청하기를,
"선부(選部)로 하여금 무릇 소원(疏遠)하여 여러 해 동안 침체(沈滯)094) 된 자는, 안면과 사정(私情)에 구애되지 말고 차차 견용(甄用)하도록 하여,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을 삼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특별히 진상(進上)할 물선(物膳)의 봉진(封進)을 정지하라는 명을 정지시켰다.
5월 26일 무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한광경(韓光綮)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유철(李有喆)은 그가 능히 교지(敎旨)의 뜻에 응하여 임금에게 힘쓰도록 하였으니 역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있다고 하겠으나, 안재규(安載圭)에 대해서는 내가 어찌 순연(純然)한 공심(公心)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먹는 것도 버리고 군사도 버릴 수 있으나 사람으로서 신용이 없으면 자립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을 하게 되었다. 이유철은 대신(臺臣)도 아니고 형관(刑官)도 아닌데, 어찌 감히 〈안재규(安裁圭)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는 율명(律名)을 정하여 청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나라의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니 처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5월 27일 기묘
보사제(報謝祭)를 행하였다.
사간원 【사간 김서응(金瑞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전 사직(司直) 이유철(李有喆)이 교지(敎旨)에 응하여 상소를 진달하였으니 그 뜻은 칭찬할 만한데 갑자기 엄중한 교지를 내리니 아마도 대성인(大聖人)이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에는 흠이 되겠습니다. 청컨대 이유철을 서임하지 말고 다시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복상(李復祥)을 승지로 삼았다.
조영순(趙榮順) 아버지의 증직(贈職)을 묵말(墨抹)하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5월 28일 경진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영빈방(寧嬪房)과 청평위(靑平尉)095) 의 집에 들렀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5월 29일 신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송재희(宋載禧)가 아뢰기를,
"옥문에 이르러 죄수를 석방시킨 것은 바로 우리 성상께서 지난해에 계술(繼述)하는 덕의(德意)를 본받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죄수를 풀어주는 은택이 많이 퍼져서 영어(囹圄)가 텅 비었으니, 형조(刑措)096) 의 덕화가 유독 성주(成周)097) 에서만 홀로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김봉대(金奉大)와 같은 경우는 그가 이미 승관(承款)098) 을 하였으니, 정절(情節)을 엄폐하기 어려운 것이 다른 죄수에 비교하여 더욱 유별하며, 나라의 체모를 헤아려 보아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김봉대를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송재희에게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승지로 삼았다.
5월 30일 임오
사간 김서응(金瑞應)이 아뢰기를,
"구성언(具聖彦)의 아주 흉악한 정절(情節)이 소상하게 《감란록(勘亂錄)》099) 에 기재되어 있는데, 수사 연좌(收司連坐)100) 를 면하였으니 이미 이것은 관대한 은전(恩典)이 시행된 것이며, 구익겸(具益謙)이 어가(御駕) 앞에서 원통함을 호소한 것은 매우 무엄하니,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단코 영남의 연해(沿海)에 정배(定配)하는데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구익겸을 섬으로 정배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갑(李𡊠)과 심상운(沈翔雲)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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