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2권, 영조 50년 1774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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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미

김한로(金漢老)를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으니, 김한노는 척신(戚臣)으로서 등과(登科)한 지 3년도 채 못되었다.

 

청도(淸道)의 유학(幼學) 김은(金垽) 등이 상소를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인데, 하늘이 경사스러운 징조를 내려서 미개(未開)한 세상에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자영(紫纓)의 금합(金榼)101)  은 진실로 〈은(殷)나라 시조 설(契)이 탄생할 때의〉 제비가 알을 떨어뜨린 것[玄禽之墮卵]과,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이 탄생할 때의〉 거인이 디딘 발자국[巨人之降跡]의 사실과 부합됩니다.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峯)은 곧 수로왕이 탄강(誕降)한 곳인데, 해마다 심한 가뭄이 들 때에 기도를 드리면 신령(神靈)의 감응이 어긋나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70명의 양정(良丁)을 배정(配定)하여 수호하는 방법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102)  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무덤[塚]을 파헤치는 변고를 당하자, 조정에서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함양(咸陽) 지경에서 망제(望祭)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높이 받드는 지극한 뜻을 누군들 흠탄(欽歎)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시조의 후손(後孫) 여러 사람들이 수십 칸의 청사(廳事)를 창설(創設)하고 30경(頃)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제전은 김해부(金海府)의 향청(鄕廳)에 속하게 하고, 오직 동지(冬至)에 한번 제사를 행하였습니다. 본 고을의 품관(品官)이 헌작(獻爵)과 유식(侑食)103)  을 하고 서리(胥吏)가 제사일을 맡아보게 되니, 예의(禮儀)가 어긋나고 희생(犧牲)과 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숭인전(崇仁殿)104)  ·숭덕전(崇德殿)105)  의 규모와 같게 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청원한 것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숭인전·숭덕전·숭의전(崇義殿)106)  과는 차이가 있고, 또 신라의 본시조(本始祖)도 또한 이러한 예는 없었는데, 지금 어찌 신라에 딸린 작은 나라에 처음 개시(開始)할 수 있겠는가? 아! 천여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영역(瑩域)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것은 향청(鄕廳)의 공 때문이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보살펴서 수축(修築)하도록 하고, 국초(國初)에 무덤을 지키던 의리를 본받아, 부사(府使)로 하여금 제문(祭文)에 국왕을 칭하여 치제(致祭)하라고 할 것이니, 그대들은 천년에 한번 만나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본관(本官)을 따라서 제사에 참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는데,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겸제(安兼濟)가 송명흠(宋明欽)을 위하여 정계(停啓)107)  하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니,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에 안겸제를 잘하였다고 하였지만, 송명흠은 아직 직첩(職牒)을 지급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도 역시 잘 말하였다."
하고, 특별히 고(故) 찬선(贊善) 송명흠의 직첩을 환급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명흠(宋明欽)은 산림(山林)의 예우(禮遇)받는 신하로서 갑신년108)  에 올린 한 통의 상서가 이륜(彛倫)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도운 것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임진년109)  에 대신(臺臣)들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논하면서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데까지 이르니, 중외(中外)의 사림(士林)들이 기운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령이 있게 되자 조야(朝野)가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107] 정계(停啓) : 전계(傳啓)에서 죄인의 이름을 지워버림.[註 108] 갑신년 : 1764 영조 40년.[註 109]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명흠(宋明欽)은 산림(山林)의 예우(禮遇)받는 신하로서 갑신년108)  에 올린 한 통의 상서가 이륜(彛倫)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도운 것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임진년109)  에 대신(臺臣)들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논하면서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데까지 이르니, 중외(中外)의 사림(士林)들이 기운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령이 있게 되자 조야(朝野)가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사간 김서응(金瑞應)이 함종 부사(咸從府使) 전문현(田文顯)을 서임하지 말도록 하는 법을 계청(啓淸)한 것은 무신(武臣)으로서 교자(轎子)를 탓기 때문이라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하교하기를,
"정직한 사람을 거용(擧用)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버리는 것이 왕도(王道)로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의 정치인데, 근자에 대각(臺閣)이 한심한 이때에 김서응의 전후 거조(擧措)는 노년에 처음 본다. 특별히 숙마(熟馬)를 하사하여 내가 한사람을 장려하여 백사람을 권면(勸勉)하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일 갑신

송순명(宋淳明)을 대사헌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임성주(任聖周)를 군자 정(軍資正)으로 삼고, 특별히 구윤명(具允明)을 제수하여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삼았다.

 

6월 3일 을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박사눌(朴師訥)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사산(四山)의 감역(監役)을 폐지하였으나 참군(參軍)을 창설한 후로는 군문(軍門)의 군사들이 스스로 계방(契房)이라 일컫고는 서로가 투작(偸斫)110)  하고 있으니, 청컨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변통하고 각별히 엄중하게 금지하는 지역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삼군문(三軍門) 대장(大將)을 중추(重推)하고 사도(四道)의 참군(參軍)은 병조 판서로 하여금 곤장(棍杖)으로 치는 형벌을 집행하고 도태시키도록 명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이최중(李最中)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최중(李最中)은 청관(淸官)과 현직(顯職)을 두루 거쳐서 뛰어올라 총재(冢宰)111)  에까지 이르렀으나, 임진년112)  에 이르러서는 신명(身名)이 괴류(壞謬)되어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였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연이어 글을 올려 휴직을 청하였으니, 이때 나이 60이었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111] 총재(冢宰) : 이조 판서.[註 112]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최중(李最中)은 청관(淸官)과 현직(顯職)을 두루 거쳐서 뛰어올라 총재(冢宰)111)  에까지 이르렀으나, 임진년112)  에 이르러서는 신명(身名)이 괴류(壞謬)되어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였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연이어 글을 올려 휴직을 청하였으니, 이때 나이 60이었다."

 

6월 4일 병술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고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6월 5일 정해

특별히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을 파직(罷職)시켰는데, 그들이 하사(下賜) 받은 바의 제택(第宅)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월 6일 무자

임금이 문관·음관·무관·유생(儒生) 중에 뜻이 있는 자는 모두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고 명하자, 유생 박문현(朴文絢)이 교지(敎旨)에 응하여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니, 박문현이 말하기를,
"건공탕(建功湯)은 곧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좋은 약제인데, 늘 진상하는 것을 싫어하는 명령을 내리시니, 이후로는 다시 이와 같이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안재규(安載圭)를 어떠하다고 생각하느냐?"
하자, 박문현이 말하기를,
"죽여야 할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할 말이 있는가?"
하니, 박문현이 말하기를,
"과거(科擧)를 연이어 실시하고 동가(動駕)를 자주하니, 국용(國用)이 탕갈(蕩渴)되기 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할말이 있는가?"
하자, 박문현이 기복(起伏)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오늘의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아십니까? 산림(山林)에 있는 노성(老成)을 쓰지 않은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산림에 있는 노성(老成)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소(年少)한 무리들이 용사(用事)하여 삼강(三綱)이 밝혀지지 못하고 풍속이 날로 변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뢰는 바에 무엇인가 의도가 있다. 우선 과거를 정지시키고 빨리 물러가게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무신(武臣)의 아들이 산림(山林)의 선비에게 아첨을 한들, 그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언어와 행동이 유치한 이런 자가 어찌 감히 여기서 협잡을 하는가? 조정의 형상이 이와 같은 것은 《가례원류(家禮源流)》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여러 병증이 더해지는 것도 역시 이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경자년113)                   이후로 나의 자성(恣聖)께서 늘 하교하면 그 역시 눈물을 흘렸으니, 나의 한결같은 마음은 오직 여기에 있는데, 요마(夭麽)114)                  한 무리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뜻을 내는가? 훈국(訓局)115)                  으로 하여금 곧 군관 전령(軍官傳令)으로 삼아 현신(現身)116)                  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박문현(朴文絢)은 고 수사(水使)            박재하(朴載河)의 아들인데, 나이 겨우 25세이다. 강개(慷慨)하게 주대(奏對)하여 자못 사기(士氣)가 있었으나, 당시의 기휘(忌諱)를 알지 못하여 말이 많아 저촉되고 거슬렸으니, 상도(常道)를 벗어나 과격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임금이 이어서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겠다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75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국용(國用)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13]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114]          요마(夭麽) : 어리고 작음.[註 115]          훈국(訓局) : 훈련 도감.[註 116]          현신(現身) : 죄인이 관가에 나타나거나 자수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박문현(朴文絢)은 고 수사(水使)            박재하(朴載河)의 아들인데, 나이 겨우 25세이다. 강개(慷慨)하게 주대(奏對)하여 자못 사기(士氣)가 있었으나, 당시의 기휘(忌諱)를 알지 못하여 말이 많아 저촉되고 거슬렸으니, 상도(常道)를 벗어나 과격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임금이 이어서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겠다고 명하였다.

 

6월 8일 경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창덕궁(昌德宮) 동구(洞口) 및 육상궁 동구 안에 사는 백성 중 60세 이상을 불러 들여 각각 쌀을 하사하고, 어가(御駕)를 따라온 승지(承旨)·유신(儒臣)·당상(堂上) 시위(侍衛)에게 모두 말[馬]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6월 9일 신묘

장령 오저(吳著)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겸양(謙讓)하는 괴로운 마음으로 풍형(豊亨)에 대한 경계를 초래(招來)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은 진실로 성상의 덕을 유양(揄揚)하고 큰 경사에 우러러 보답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응당 행하여야 할 전례(典例)에 대해서는 곁에서 들은 지가 여러 날인데도 아직 듣지를 못하였으니, 삼정승의 책임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경서(鄭景瑞)는 본래 돈친(敦親)이 없는데, 편안하게 공무를 집행하고 있으니 견책하고 파직하는 법을 시행해야 할 것이며, 경양 찰방(景陽察訪) 서휘(徐彙)는 본래 전주(全州)의 이속(吏屬)으로, 역기(驛騎)를 출척(黜陟)하거나 이졸(吏卒)을 사역하는 데는 모두 정해진 뇌물이 있어 부극(掊克)하는 방법이 다양하며, 형장(刑杖)이 너무 지나치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번 대·소과(大小科)에서 고강(考講)하라는 명은 경진년117)  의 삼일제(三日製)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중첨(趙重瞻)이 그 해 인일제(人日製)118)  에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강(講)을 통하지 못하여 특별히 방(榜)에서 이름을 빼도록 명하였습니다. 강을 하도록 명한 것은 이미 영전(令前)의 일이며, 입법(立法)의 귀중함은 꼭 신임하도록 하는데 달려있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원통해 하고 아쉬워 함이 대체로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헌신(憲臣)의 직책(職責)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아첨을 하고 한편으로는 사정(私情)을 쓰고 있으니, 내가 어떤 예(例)로 비답을 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김용겸(金用謙)을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봉조하 이최중(李最中)에게 선마(宣麻)하고 임금이 친히 지은 칠언시(七言詩) 한 구(句)를 써서 면전(面前)에서 주니, 이최중이 절하고 받으면서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물러나와 쉬려고 하는데 한마디 진달(陳達)할 것이 있습니다. 일전에 궐문(闕門)에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하순(下詢)한 거둥을 누군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던 덕과 같다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이튿날 비가 내렸으니 이것도 역시 성덕(聖德)에 감응(感應)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더러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사지(辭旨)가 지나치게 엄중하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황공하여 비록 받들어 행하지만 물러나서는 근심하고 탄식합니다. 지금부터 뒤로는 혹시라도 이와 같이 하는 일이 없게 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성심껏 섬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심으로 섬기게 하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청한 여덟 글자를 역시 받아 들이는 것이 옳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받아 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덕(功德)으로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수(聖壽)가 이미 팔순(八旬)을 넘었으니 나라의 경사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공덕이 어찌 해마다 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이와 같다면 나는 구저(舊邸)나 혹은 연융대(鍊戎臺)에 누워있고 싶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그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이 어려워서 이와 같은 하교를 하십니까? 대체로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옹용(雍容)하고 화순(和順)함을 더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그가 생각한 바를 다 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면만(面謾)119)  함을 면하지 못하니, 신의 진달한 바가 아니면 전하께서 어찌 이런 일을 알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에게 전강(殿講)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이보영(李普榮)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정언 박성태(朴聖泰)가 계달하여 각 궁방(宮房)의 세납(稅納)을 호조로부터 똑같이 봉상(捧上)을 감독하고 구획(區劃)하여 각궁(各宮)에 보내도록 청하자, 임금이, 호조가 구관(勾管)120)  을 하면 나라의 체모에 흠이 된다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0일 임진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활쏘기 시험에 합격한 무사(武士)에게 상을 반사(頒賜)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홍낙순(洪樂純)·조영진(趙英鎭)·한광경(韓光綮)·이치중(李致中)을 승지로 삼고, 구현겸(具顯謙)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6월 11일 계사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활쏘기 시험을 행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에게 문을 조금 열 때는 단지 징과 북[金鼓]을 울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훈련원 정(訓鍊院正)·군기시(軍器寺) 관원이 즉시 와서 대기하지 아니하자, 훈련원 정 이방성(李邦城)·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강요신(康堯愼)에게 면회(面灰)하는 등의 절차를 제하고 회시(回示)한 뒤에 이방성을 해남현(海南縣)에 충군(充軍)하고 강요신은 교동부(喬桐府)에 충군하도록 하였다가 곧 도로 정지하였다.

 

전 현감(縣監) 임덕제(林德躋)를 좌승지로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덕제는〉 가정 생활에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정직하였으며, 임오년121) 수립(樹立)122)  은 고인(古人)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죄를 입었기 때문에 침체(沈滯)되어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임소(任所)에서 몰(歿)하니, 임금이 호남(湖南)에 진휼(賑恤)을 마친 장계(狀啓)를 보고는 비로소 그가 작고(作故)하였음을 깨닫고 한참 동안 슬퍼하고 아까워하다가 특별히 증직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76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121] 임오년 : 1762 영조 38년.[註 122] 수립(樹立) : 1762 영조 38년에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비행(非行)에 격노한 영조가 세자를 죽이려 하자, 임덕제(林德躋)가 11세 된 세손(世孫:정조)을 업고 나와 그로 하여금 조부에게 부친의 잘못을 빌게 하였던 일.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덕제는〉 가정 생활에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정직하였으며, 임오년121) 수립(樹立)122)  은 고인(古人)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죄를 입었기 때문에 침체(沈滯)되어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임소(任所)에서 몰(歿)하니, 임금이 호남(湖南)에 진휼(賑恤)을 마친 장계(狀啓)를 보고는 비로소 그가 작고(作故)하였음을 깨닫고 한참 동안 슬퍼하고 아까워하다가 특별히 증직을 명하였다."

 

유서(諭書)를 내려 호남(湖南)·호서(湖西)의 도신(道臣)에게 각각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해서(海西) 도신에게는 녹비[鹿皮]를 하사하도록 하니, 모두 진휼을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정환유(鄭煥猷)·고창 현감(高敞縣監) 김성구(金聲九)는 스스로 비축(備畜)한 곡식이 제일 많았으므로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6월 12일 갑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내삼청(內三廳)123)  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에게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박문현(朴文絢)을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의 활쏘기 시험은 너희들을 위하여 설시하였다. 처음으로 활을 쏘는 자가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으나 참으로 활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면 비록 〈과녁을〉 맞히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과녁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질 수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고의로 이와 같이 하였다면 그것은 다시 산림(山林)에 있는 자와 같은 부류가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13일 을미

부수찬 이창급(李昌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청평위(靑平尉)의 옛집에 들렀던 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옛날의 돈친(敦親)을 생각하는 융성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미 귀주(貴主) 혼자만이 제향(祭享)하는 곳이 아니고 이는 곧 심씨(沈氏) 여러 세대의 사당이었으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지존(至尊)께서 엄연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아주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친히 술잔을 올리게 하는 일이 옛날에는 전혀 없었던 성전(盛典)으로 신하에게 사제(賜祭)하는 상례(常例)와 매우 달랐습니다. 때문에 인신(人臣)이 감히 받들어 감당할 바가 아닌데도, 직책이 원보(元輔)124)  로 있으면서 도리어 난처(難處)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분주(奔走)하게 집사(執事)를 하면서 응당 행해야 할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가인(家人)의 예와 같이 하였으니, 대신(大臣)의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저 심상운(沈翔雲)은 자신이 가주(家主)가 되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은혜를 힘써 사양하지 않고, 곧 다시 그가 마땅히 진현(進現)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진현하도록 하고서 도리어 사가(私家)의 영광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고두 사죄(叩頭謝罪)하는 글을 진달하여 본분(本分)을 지키고 의(義)를 두려워 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책망할 것이 못 되나, 나라의 체모에 관계가 되므로 그대로 두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으니, 신은 전 승지 심상운을 빨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여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서형수(徐逈修)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소학(小學)》을 강하도록 명하고,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는데, 교관에게는 각각 녹비[鹿皮]를 하사하도록 하였다.

 

6월 14일 병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지난해의 절제(節製)125)  의 〈합격자를〉 역시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였고, 황감제(黃柑製)126)  에도 해마다 한 예(例)로 급제를 두었으니, 이것 역시 공자(孔子)께서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까워한다.127)  ’고 한 그런 뜻인데, 더구나 지금 비록 절제(節製)라 하더라도 전과 비교하면 매우 다르니, 황감제는 당연히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급제를 하사하고, 삼일제(三日製)와 구일제(九日製) 역시 고례(古例)를 따라서 회시에 직부하는 것이 마땅하며, 도기과(到記科)128)  의 경우는 친림(親臨)과 명관(命官)을 논할 것 없이 모두 회시에 직부하도록 할 것이며, 전강(殿講)129)  은 사람의 수효를 이미 법으로 정하였으나, 이 뒤로는 친림이 아니라도 회시에 직부하도록 법을 정한다면 조금이나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억제할 것이다."
하였다.

 

6월 15일 정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여러 도(道)의 전최(殿最)130)  를 열어 보았다.

 

임금이 기로사(耆老社)의 포폄(褒貶)을 고례(古例)대로 하고, 기로사에 진찬(進饌)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서울에 있는 봉조하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는데, 홍봉한(洪鳳漢)이 탕제(湯劑)를 받들어 올리고 세번 천세를 부르자, 임금이 한 구(句)의 시(詩)를 써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6월 16일 무술

사문(私門)에서 형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6월 17일 기해

심이지(沈頤之)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호위 군관(扈衛軍官)에게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6월 18일 경자

유학(幼學) 이희겸(李希謙) 등이 상소하여 향록(鄕錄)131)  을 받아 들이도록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6월 19일 신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고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참의로, 홍윤(洪錀)을 대사간으로, 이미(李瀰)를 부제학으로 삼으니, 이조 판서 이담(李潭)의 정사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담은 이익을 즐기고 세력을 쫓아, 세상 형편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켜 삼년 동안 전형(銓衡)을 잡았으니 정사(政事)가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담은 이익을 즐기고 세력을 쫓아, 세상 형편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켜 삼년 동안 전형(銓衡)을 잡았으니 정사(政事)가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이지(沈履之)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중비(中批)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6월 20일 임인

조명정(趙明鼎)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또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 새로 벼슬을 제수한 사람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사간 홍윤(洪錀)이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도사(都事)는 곧 외대(外臺)132)  의 직책입니다. 이미 좌막(佐幕)133)  을 차지하였고 또 과시(課試)134)  를 관장하였으니 그 소임이 가볍지 아니한데, 근년에 와서 갑자기 용관(冗官)135)  을 만들어서 늘 권력이 없고 피연(疲軟)한 무리들을 거의 많이 차임(差任)하여 보내니, 송문집(宋文楫)의 일로써 말한다면 이것이 어찌 유독 송문집의 죄이겠습니까? 반년 동안 머물러 지체한 죄를 도리어 아래 관원(官員)의 계만(稽慢)한 데로 돌려서 송문집으로 하여금 바로 그 지역에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있도록 만들었으니, 그 사실을 따져 보면 흐리멍덩하게 살피지 못한 실수와 일을 잘못 처리한 책임이 실제로는 도신(道臣)에게 있습니다. 청컨대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계(李溎)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계묘

임금이 도총부(都摠府)에 나아가자 왕세손(王世孫)이 따라 나아갔다. 기내(畿內)의 백성을 소견(召見)하고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으며, 도총부에 입직(入直)한 당상관과 낭관에게 모두 말[馬]을 주도록 하고, 이예(吏隷)에게는 쌀과 베를 사급(賜給)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명정(趙明鼎)은 교동부(喬桐府)에 충군하도록 명하고, 특보(特補) 조엄(趙曮)을 교동 수사(喬桐水使)로 삼았다가 곧 교동에 충군하도록 명하니, 모두 홍문관 제학으로서 임금의 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담(李潭)을 특별히 제수(除授)하여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도당록(都堂錄)에 〈권점(圈點)을〉 행하고 임희우(任希雨) 등 17인을 뽑았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입시(入侍)하여 해직을 원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한익모(韓翼謨)를 영의정으로, 이은(李溵)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판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전라 감사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였다.

 

집의(執義) 황간(黃榦)이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저축(儲蓄)을 늘리도록 계청(啓淸)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 들였다.

 

6월 23일 을사

집의(執義) 황간(黃榦)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노안(奴案) 중에 나이 백여 살이 넘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죽은 사람에게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으로 지극히 원통한 일입니다. 이번 비공(婢貢)136)  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날에 노안까지 함께 조사하여 정돈한다면, 을해년137)  의 절목(節目) 역시 지상(紙上)의 공문(空文)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경우에는 노구(奴口)의 수효가 전부 합하여 3천을 넘지 아니한데, 영남(嶺南)의 경우에는 남은 노목(奴木)의 수량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조사하여 정돈할 때에 비록 더러 모자라는 걱정이 있을지라도 영남에 많이 있는 것으로 호남·호서의 모자라는 것을 보충한다면, 거의 정한 수량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을해년138)  의 절목이 있는데, 사람이 어찌 백세를 넘은 자가 있겠는가? 계달한 바가 확실하다면, 비국으로 하여금 정확하게 상의하여 등대(登對)할 때에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문고(申聞鼓)를 다시 설치한 것은 대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호소하여 아래 사정을 통하려고 한 것인데,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져 사건사(四件事)139)   이외에, 향곡(鄕曲)에서 은혜 구하기를 엿보고 희망하는 무리들이 시끄럽게 와서 북을 치니, 일의 외람되고 무례한 것이 지극히 놀랄만 합니다. 지금 이 뒤로는 사건사 이외에 만약 난잡한 폐단이 있을 것 같으면, 해당된 당상과 낭관은 특별히 견책(譴責)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뒤로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특별히 견책의 형전을 시행할 뿐이 아니라, 엄중하게 죄를 다스리는 일로 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4일 병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서형수(徐逈修)를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정민시(鄭民始)를 부수찬으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였다.

 

6월 25일 정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였다.

 

장령 권평(權坪)이, 조명정(趙明鼎)·조엄(趙曮)의 충군(充軍)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정의달(鄭義達)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의달은 재상 가문의 방탕한 아들로서 일자 무식(一字無識)인데도 세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곧 홍문관의 선발에 올랐으니, 식견이 있는 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의달은 재상 가문의 방탕한 아들로서 일자 무식(一字無識)인데도 세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곧 홍문관의 선발에 올랐으니, 식견이 있는 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6월 27일 기유

채홍리(蔡弘履)를 승지로, 김상묵(金尙默)을 병조 참의로 삼았는데, 김상묵 역시 임진년140)  에 저지를 당하였던 사람이었다.

 

6월 28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달하고, 이어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승지 심이지(沈頤之)에게 풍형(豊亨)141)  을 경계함에 대해 통유(洞諭)하는 글을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조정에서 바야흐로 유양(揄揚)하는 거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통유가 있었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우의정 이은(李溵)을 특별히 면직(免職)하였으니, 이때에 이들이 유양(揄揚)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정병(情病)으로 상소하고 해직(解職)을 원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원인손은 경망스럽게 스스로 기뻐하고 있으므로 위의(威儀)가 너무나 모자랐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원인손은 경망스럽게 스스로 기뻐하고 있으므로 위의(威儀)가 너무나 모자랐다."

 

신회(申晦)를 영의정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였다.
사관(史官)은 말한다. "신회는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방자하고, 이사관은 몸가짐이 비천(卑賤)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관(史官)은 말한다. "신회는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방자하고, 이사관은 몸가짐이 비천(卑賤)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6월 29일 신해

임금이 우문각(右文閣)에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신회(申晦)와 우의정 이사관(李思觀)에게 돈유(敦諭)함을 정하자, 모두 명을 받들고 사은 숙배(謝恩肅拜)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조명정(趙明鼎)·조엄(趙曮)을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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