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3권, 영조 50년 1774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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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자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홍(李洚)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이홍은 곧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서손으로서 당시 나이가 아흔이며 소과(小科) 회방인(回榜人)142)  이다. 뜰 안으로 들어올 때에 임금이 일어서 음식을 내리라고 명하였으며, 또 호조에 명하여 초헌(軺軒)을 주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원인손(元仁孫)으로 하여금 후배(後陪)케 하니, 모두 지나치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입직 유신(儒臣) 이조원(李祖源)과 홍국영(洪國榮)이 차자를 올려 간쟁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을 불러 보고 초4일의 진하(陳賀)를 특별히 윤허하니, 그날은 곧 지난해의 정하일(庭賀日)로 왕세손의 정성에 못이겨 따라 준 것이다. 하교하기를,
"이것은 이날을 맞아 예를 거행하고 주악을 울리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취주(吹奏)를 정지하는 중에 있으니, 북치고 나팔 부는 것은 논할 것도 없고 단지 헌가(軒架)143)  만 설치하라."
하였다.

 

지평 박준원(朴俊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잠단(先蠶壇) 제향 때 아헌관(亞獻官)인 전(前) 판서(判書) 이익원(李翼元)은 도성문을 곧장 빠져나갔고, 종헌관(終獻官) 서회수(徐晦修)는 뒤늦게 따라갔으니, 모두 견책하여 파직시키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대각(臺閣)에서 입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신은 이르건대, 구언(求言)이 내린 뒤 단지 한 일이라고는 베껴서 대각에 전하여 준 것뿐이니, 모두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소서. 전(前) 장령(掌令) 노윤중(盧允中)은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끝내 한마디 답변도 올리지 않았으며, 그 뒤 두 사람은 계속 사헌부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노윤중과의 약속을 지켜 성상의 은혜를 저버리니, 신은 노윤중의 무리 세 사람 모두에게 체직하는 벌을 베푸시고, 상언(上言)하다가 죄를 받은 사람은 차례로 뽑아 서용하여 우대하고 용서하는 뜻을 보이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직위가 청관 요직에 있는 사람은 지방 고을로 나가는 것이 드물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직은 중시하고 외직은 업신여긴다는 뜻을 훤히 알게 하고 있습니다. 어제(御題)가 얼마나 지중한데 현량(賢良)의 과거장에서 서로 빼앗고 다투다 찢었는데도 시소(試所)의 승지(承旨)는 감히 계문하지 않아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죄과로 자연히 귀착되게 하였으니, 신은 해당 시소의 승지를 견책하여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심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7월 2일 계축

유학(幼學) 정집(鄭㙫)이 앞서의 상소문을 다시 올리니, 임금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에게 명하여 즉시 도성문 밖으로 쫓아내어 분수에 곧 넘치는 것을 바라는 무리를 징계하도록 하였다.

 

7월 3일 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으로 나아가서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다.

 

집의 황간(黃榦)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헌수(獻壽)하던 옛 갑오년144)  이 다시 돌아와 천세 소리 드높은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하려 하면서 겨우 헌가(軒架)만 단지 대궐의 뜰에 설치하고 주악은 백관이 늘어선 반열에서 들을 수 없으니, 더구나 흑단령(黑團領)의 예식으로는 너무나 간략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그와 같은 의식으로 하라는 명을 고쳐 내려 주시어 성대한 예식을 빠짐없이 갖추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4일 을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금년 전세(田稅)의 반을 특별히 줄이고, 사서인(士庶人)으로서 나이 여든이 넘은 사람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給)씩 올려 주게 하고, 공시인(貢市人)은 과거의 예에 따라 수량을 줄이게 하고, 현방 속전(懸房贖錢)은 이달에 한하여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이윤성(李潤成)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하고 윤태연(尹泰淵)을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가자하였는데, 두 장신(將臣)에게 공도 없이 함부로 가자하니 여론이 놀라고 의아하게 여겼다.

 

7월 5일 병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전(大殿)의 정선(停膳)은 사흘이 기한이니 오늘로써 끝내고, 내일부터는 이전대로 올리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올해의 첫 가뭄은 바로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지금 철 늦은 비가 오는 것 역시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를 만약 상례대로 따른다면 높은 곳에서 하늘이 내려다보고 말하기를, ‘이런 임금도 있다.’라고 할 것이니, 다시 하교(下敎)를 기다려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7월 6일 정사

임금이 글을 지어 내려서 대소 관료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7월 7일 무오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임금이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에 나아가 옛날을 추억하고 감회에 젖어, 입직한 총관(摠管) 두 사람에게 각각 말을 하사하고 낭청(郞廳)으로 승진시켜 서용하였다.

 

김보순(金普淳)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무사들을 시사(試射)하였다. 또 어제(御製) 오언 십운율(五言十韻律)을 내리고 궐내에 입직한 문신들에게 글을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수찬(修撰) 정민시(鄭民始)가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녹비(鹿皮)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홍용한(洪龍漢)·심관지(沈觀之)에게 승지를 특별히 임명하였다.

 

7월 9일 경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으로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호조(戶曹)의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과 경기 관찰사 및 지방민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올해 줄여 주는 전조대(田租代)와 각도의 환모(還耗)를 모두 탕감하는 일을 팔도와 양도(兩都)145)  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7월 10일 신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소과(小科) 회방인(回榜人) 신돈복(辛敦復)에게 입시를 명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옷감과 식량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7월 11일 임술

장령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몇년 전부터 과거의 명칭이 해마다 늘어 인재가 섶처럼 많이 쌓이니, 어떤 사람은 낭관(郞官) 10년에 조그마한 고을살이도 얻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몸은 삼사(三司)146)  에 진출했으나 끝내 보잘것없는 고을살이도 얻지 못했습니다. 임금 곁에서 국사를 논하는 신하가 쌀과 땔감의 근심을 면치 못하고, 사헌부(司憲府)를 출입하는 사람으로서 굶주림과 추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대체로 많습니다. 심지어는 사관(史官)을 겸직한 사람으로 밥을 빌어먹으며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걸어서 등청하는 것은 보고 듣는 바이니, 세도(世道)의 한심스러움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3백 60고을이지만 그 가운데 문무관이 교대로 갈리는 곳이 30여 자리, 문관으로 뽑혀 나간 곳이 30여 자리, 무관으로 뽑혀 나간 곳이 80여 자리로서 그 나머지 1백 90여 자리는 모두 음관(蔭官)으로 뽑혀 나갔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동래(東萊)와 의주(義州) 외의 기타 목(牧) 부(府)·군(郡)·현(縣)은 모두 3년을 기한으로 하여 문관·무관·음관을 돌아가면서 뽑아 보내시기 바랍니다. 도사(都事)는 책임이 가볍지 않는데도 흔히 할일 없는 벼슬자리로 만드니, 전조(銓曹)에 신칙하시어 각별히 골라 쓰게 하시고 각도의 우후(虞候)147)  의 예에 따라 그들이 고정적인 녹봉을 받게 하고 그 근무 연한이 차면 내직(內職)에 의망(擬望)하는 경로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7월 12일 계해

지평 유영진(柳榮鎭)이 경봉각(敬奉閣) 곁에 별도로 전각 한 채를 세워 청(淸)나라의 칙서(勅書)를 봉안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고, 호조 판서에게 명하여 자리를 골라 공사를 시작하게 하고 이름을 봉안각(奉安閣)이라 하였다.

 

7월 13일 갑자

장령 안정대(安鼎大)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날 도당록(都堂錄)148)  을 시행할 때 지체와 명망이 평소부터 낮은 이동욱(李東郁)과 문장도 못하고 용렬한 이창한(李昌漢)으로 구차히 수효를 채웠으니, 청컨대 관적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시고, 권점(圈點)에 참여한 여러 신하도 아울러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록 윤허하지 않았지만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호피(虎皮)를 하사하며 장려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정대가 당초 소회(所懷)를 아뢰자, 임금이, ‘계사(啓辭)149)  로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므로, 안정대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러시다면 신은 마땅히 계사로 우러러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무릇 대신(臺臣)의 계사와 소회는 체모가 각기 같지 않은데, 이미 재일(齋日)이 아니면서 소회를 아뢴 것은 이미 대신의 체통을 손상한 것이다. 임금의 하교를 받기에 이르자 갑자기 계사로 바꾸었으니, 이와 같은 대각(臺閣)은 전일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148] 도당록(都堂錄) :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제2차 추천 기록. 의정(議政)·찬성(贊成)·참찬(參贊)·이조 판서(吏曹判書)·이조 참판(吏曹參判)·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이 모여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명단에서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다시 권점(圈點)을 찍어 찬반(贊反)을 보이며, 이 결과를 임금에게 올리면 득점의 순위대로 교리와 수찬에 임명됨.[註 149] 계사(啓辭) : 논죄(論罪)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정대가 당초 소회(所懷)를 아뢰자, 임금이, ‘계사(啓辭)149)  로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므로, 안정대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러시다면 신은 마땅히 계사로 우러러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무릇 대신(臺臣)의 계사와 소회는 체모가 각기 같지 않은데, 이미 재일(齋日)이 아니면서 소회를 아뢴 것은 이미 대신의 체통을 손상한 것이다. 임금의 하교를 받기에 이르자 갑자기 계사로 바꾸었으니, 이와 같은 대각(臺閣)은 전일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갑(李𡊠)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창경궁(昌慶宮)의 수직 군사(守直軍士)와 중관(中官)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게 하니, 그들이 잡인들을 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 을축

판서 조명정(趙明鼎)의 직위를 특별히 파직하였으니, 그의 종[奴]의 아들이 빈 대궐 안으로 이유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김종정(金鍾正)을 대사성으로, 윤이복(尹彛復)을 황해도 수사(黃海道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환곡(還穀)의 수량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전조(田租)를 반으로 하는 것에 비하여 거의 갑절에 이르지만, 나는 작서 감모(雀鼠減耗)150)  라는 말이 못내 구차스럽다고 여긴다."
하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반드시 감모(減耗)로 명목을 삼을 게 아니라, 그냥 환곡을 10분의 1을 탕감한다는 것으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와 같이 한다면 명목과 실제가 부합된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주서(注書)의 일기(日記)와 사관(史官)의 사기(史記)에 오늘 탕감해 준 수량을 ‘금년 환곡 몇 석(石) 탕감’이라 특별히 기록하여, 내가 반드시 명목을 바르게 하려는 뜻을 표시하라."
하였다.

 

7월 15일 병인

하교하기를,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처음에는 4백 명의 사수(死囚)에게 휴가를 주어 고향에 돌려보냈으나 기일 전에 남김없이 모두 왔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선유(先儒)들은 비록 나무라지만, 나는 ‘정관(貞觀)151)   시대의 정치가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하겠다. 내 비록 노쇠했으나 어찌 여든의 늙은 나이에 한갓 그 명예를 취하여 세상 사람을 속이겠느냐? 아! 여든 한 살에 두 번째 맞이하는 갑오년152)  은 바로 여덟 달 동안 시탕(侍湯)153)  하던 해이다. 모두들 말하기를, ‘이처럼 특별한 경사에는 반드시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옛날 그 해를 추모하는 뜻이다. 이번의 이 일이 어찌 당 태종을 본받은 것이겠느냐? 하물며 옥에 갇힌 여러 죄수들은 모두 미련하게 참고 여태껏 남아 있는 자에 불과한 것으로 감히 계해년154)  에 감옥을 활짝 열어 두었던 성대한 덕을 본받은 것이며, 이것은 올 갑오년의 은혜가 아니라 지난 갑오년의 은혜요, 또한 갑자년155)  의 전례(前例)를 삼가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집의 황간(黃榦)이 아뢰기를,
"성상의 교화가 맑고 밝아 감옥이 텅 비었고 50년 동안 형벌을 두고도 시행하지 않은 정치를 중외(中外)가 모두 우러러보는데도 양 포청(兩捕廳)에서는 판결을 오래 미루어 미결수가 생기기에 이르렀습니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장지항(張志恒)과 조완(趙)에게 귀양 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형벌을 두고도 시행하지 않는 정치는 억지로 이룰 수 없는 것이요 도둑을 다스리다 판결이 늦어져 미결수가 있는 것은 본시 죄가 될 수 없는데도,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장황한 논계(論啓)를 하는 머리 허연 늙은 대신(臺臣)은 부끄러운 마음이 없을까?"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7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형벌을 두고도 시행하지 않는 정치는 억지로 이룰 수 없는 것이요 도둑을 다스리다 판결이 늦어져 미결수가 있는 것은 본시 죄가 될 수 없는데도,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장황한 논계(論啓)를 하는 머리 허연 늙은 대신(臺臣)은 부끄러운 마음이 없을까?"

 

7월 16일 정묘

사헌부와 승정원에서 전계(前啓)를 정지하였으니,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따른 것이다.

 

황간(黃榦)을 승지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정후겸(鄭厚謙)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후겸은 부마[都尉]의 양자로서 열여덟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淸要)한 관직을 마음껏 욕심을 내어, 재신(宰臣)의 반열에 뛰어오르고 문임(文任)을 차지하는 데 이르렀다. 대문을 열어 놓고 권세 있는 자를 불러들여 세도가 한세상을 기울이니, 이익(利益)을 좇는 무리가 이[蝨]처럼 달라붙지 않음이 없었다. 제 마음대로 위복(威福)을 만드니, 나라의 정치가 날로 그릇되어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분노하면서도 누가 감히 힐문하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7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후겸은 부마[都尉]의 양자로서 열여덟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淸要)한 관직을 마음껏 욕심을 내어, 재신(宰臣)의 반열에 뛰어오르고 문임(文任)을 차지하는 데 이르렀다. 대문을 열어 놓고 권세 있는 자를 불러들여 세도가 한세상을 기울이니, 이익(利益)을 좇는 무리가 이[蝨]처럼 달라붙지 않음이 없었다. 제 마음대로 위복(威福)을 만드니, 나라의 정치가 날로 그릇되어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분노하면서도 누가 감히 힐문하지 못하였다."

 

지평 박준원(朴俊源)이 동추 죄인(同推罪人) 역시 구핵 처결(究覈處決)하여 판결을 오래 미루는 미결수가 없게 하도록 계청(啓請)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계문한 바는 진실로 대간의 체모를 얻었다. 팔도와 이부(二府)156)  에 엄중히 신칙하라."
하니, 또 아뢰기를,
"죄가 탐오(貪汚)와 역모의 안건에 관련된 것들은 비록 대사령(大赦令)이 내리는 때를 만나더라도 절대 가볍게 논결하지 말고, 세도(世道)를 닦고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형조 판서와 양사(兩司)157)  와 경기 관찰사를 소견(召見)하고 각도의 도류안(徒流案)158)  을 들여오게 하여 석방할 자에게 점을 찍었다.

 

7월 17일 무진

장령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기를,
"청컨대 법령을 엄격히 정하여 비록 재상가일지라도 혼인 폐백과 다리[首髢]의 비용을 간략하게 한 데 따라 법을 정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황해도 병사(兵使) 이국현(李國賢)은 불법을 많이 저지르고 제 마음대로 백성을 침학하였으며 곤장 치기를 남발하고 형벌이 혹독하여 원한을 사는 정치 아님이 없으니, 견책하여 파직시키는 형전을 시행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언로(言路)를 개방하여 숨기지 않은 뜻을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지평 유영진(柳榮鎭)이 야간 통행 금지를 신칙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청한 것은 시폐(時弊)를 구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밤에 문을 닫지 않고 개도 짖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태평 성대의 일이니, 지금은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8일 기사

집의 홍수보(洪秀輔)가 청하기를,
"상소문으로 아뢰는 선비에게서 비록 그 말이 취할 것이 있더라도 피륙이나 곡식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보낼 일이요, 가볍게 벼슬을 제수하지 말아야 요행을 바라는 짓을 막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구익(具㢞)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와 영제(禜祭)159)  를 행하고, 여러 헌관(獻官) 이하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이 아뢰기를,
"황해도 병사(兵使) 민범수(閔範洙)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미련하며 성질 또한 탐욕스럽고 비루한데, 벼슬을 내리자 사람들이 놀라고 탄식하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나는 그 사람이 쓸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의(末擬)로 낙점하였다. 지금 계문(啓聞)한 바를 들으니, 막중한 병사의 직임을 어찌 밀고 당기는 자라도 만들어 억지로 윤허하겠느냐?"
하였다. 정언 신우상(申禹相)이 아뢰기를,
"의령 현감(宜寧縣監) 조노진(趙潞鎭)이 관찰사와는 대대로 혐의가 있다고 말하며 오래도록 관직을 게을리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이계(李溎)를 대사간으로, 전광훈(田光勳)을 황해도 병사로, 서명선(徐命善)·이석재(李碩載)를 승지로 삼았다.

 

홍수보(洪秀輔)를 승지로 발탁하여 제수하였다.

 

7월 20일 신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행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이조 정랑(吏曹正郞) 홍이건(洪履健)을 특명으로 승진 서용(陞進敍用)하였다.

 

7월 21일 임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판위(板位)에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전(殿)에 올라 향을 사르고 조금 물러나 다시 사배를 행하였다. 이어 경봉각(敬奉閣)으로 나가고 다음은 봉안각(奉安閣)으로 나아갔는데 망배례가 끝났다. 명(明)나라 사람의 후손과 병자 호란 당시 순국한 사람의 자손을 소견(召見)하고, 《삼학사전(三學士傳)》을 간인(刊印)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환궁하여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지방민을 소견하여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이어 과거를 설행하여 순국한 사람의 후손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김이후(金履厚)와 그 차석인 허전(許晪)에게 모두 급제를 내렸다. 명나라 사람의 후예에게는 중일청(中日廳)에서 시사(試射)하게 하였다. 회묘(懷墓)에 수묘군(守墓軍)을 별도로 정하고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내되 본관(本官)에서 거행하게 하였으니, 회묘란 곧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무덤으로 연산군 당시에는 능(陵)으로 봉했던 곳이었다.

 

7월 22일 계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으로 거둥하니, 왕세손이 따라 나아갔다. 임금이 진찬(進饌)을 받은 다음 이어 계유생(癸酉生)과 갑술생(甲戌生) 노인 김치명(金致明) 등에게 사찬(賜饌)을 명하고, 기로소(耆老所)의 당상(堂上)에게는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그 나머지 사람에게는 각각 명주와 무명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서명선(徐命善)에게 하문하기를,
"조세(租稅)를 감해 주는 것과 환곡(還穀)을 감해 주는 것 중 혜택이 어느 것이 더 나으냐?"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조세를 감해 주면 농토가 없는 백성은 은혜를 입지 못하지만 환모(還耗)를 감해 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환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은혜가 고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국가의 손실은 조세를 감해 주는 것에 비하여 다섯 배가 될 뿐만 아니라, 이제 막 비공 급대(婢貢給代)한 나머지에 또 이런 거조가 있게 되면 일년 쓸 경비가 걱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은 왜 궁핍하게 되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호조(戶曹)에서 거두어 들이는 조세가 해마다 줄어들었기 때문에 선혜청에서 3만 석을 가져다 썼으므로 선혜청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가 빈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하였다.

 

7월 23일 갑술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순국한 사람의 자손에게 시사(試射)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지평 박준원(朴俊源)이, 경외(京外)에서 이익을 꾀하는 것을 엄금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조정(趙晸)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4일 을해

정언 이정운(李鼎運)이 소회(所懷)를 말하면서, 먼저 별과(別科)를 당일에 응방(應榜)하는 폐단을 논하고, 정시(庭試)의 초시(初試)·회시(會試)의 법을 복구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회상전(會祥殿)의 뜰에 나아가서 1백 5세 노인과 88세 이상 노인을 소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말[馬]을 하사하였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쌀과 고기와 표리(表裏)160)  를 하사하였다. 입시한 김기대(金器大), 김효대(金孝大)·윤동석(尹東晢)·어필명(魚必溟)에게는 각각 면전에서 말을 내리고, 승지와 사관(史官)에게도 역시 말을 하사하였다. 어필명에게 명하여 《대학(大學)》의 수장(首章)을 읽게 하고, 임금 또한 몸소 외웠다.

 

7월 25일 병자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으로 거둥하니 왕세손이 따라 나갔는데, 의열궁(義烈宮)도 차례로 들렀다.

 

7월 26일 정축

임금이 1백 세 된 노인을 소견하였다. 선왕(先王)을 추모하는 임금의 뜻으로 말미암아 영모당(永慕堂)에 유숙하고 이날 비로소 환궁하였는데, 교동(校洞)의 옹주(翁主)의 집에도 차례로 들렀다.

 

7월 27일 무인

이치중(李致中)을 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한성 우윤(漢城右尹) 김응순(金應淳)이 졸(卒)하니, 임금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겨 특별히 예조 판서로 추증하였다. 김응순은 자(字)가 회원(會元)인데, 강화에서 순절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8대손이었다.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찍이 문과에 올라 경상 감사(慶尙監司)와 부제학(副提學)을 차례로 거쳐 앞길이 바야흐로 열리고, 임금이 매우 총애하였는데, 하루 저녁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7세인지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애석하게 여겼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81세 된 노인들에게 사찬(賜饌)하였다.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에게 《대학(大學)》의 경문(經文) 한 장(章)을 외우게 하고 임금 역시 몸소 외웠다. 면전에서 숙마(熟馬)를 지급하고, 그 나머지 사람에게는 각각 녹비(鹿皮)를 하사하였다.

 

7월 28일 기묘

성천주(成天柱)를 대사헌으로, 이상주(李商舟)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9일 경진

임금에게 환후가 있어서 내국(內局)이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겨 숙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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