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3권, 영조 50년 1774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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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임오

일식(日食)이 있었다.

 

정시 무과 초시(庭試武科初試)를 열었으니, 임금의 환후가 평상으로 회복된 경사를 이때에 이르러 행한 것이었다. 이 해는 임금이 전(前) 갑오년161)  에 시탕(侍湯)한 지 60년이 되는 해로, 선왕(先王)을 추모하여 풍악을 중지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풍악을 회복하게 하였다.

 

8월 2일 계미

조정에 명하여 정후(庭候)를 하지 말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환후가 곽란[癨]을 앓다가 곧 나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갑오년 9월 13일에는 외연(外宴)에 참예하고 15일에는 내연(內宴)에 참예하여 꽃을 꽂고 흥원문(興元門)을 나선 것이 마치 어제인 것 같지만, 지금은 옛날과 다르므로 만약 술 한잔이라도 받는다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닌데, 하물며 이에 더할 수 있는가?"
하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연달아 진하(陳賀)를 청하자 임금이 굳이 윤허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은 부모를 추모하는 효심의 도리와 겸양을 지키는 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8월 4일 을유

김기대(金器大)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賀禮)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상주(李商舟)가 궁궐 담을 넘은 금군(禁軍)의 군사는 형률에 따라 시행하고, 번(番)을 선 장수는 유배형에 처하며, 입직한 병조의 당상과 낭관은 모두 파직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군의 군사는 충군(充軍)하고, 번(番)을 선 장수는 유배하며, 병조 당상은 사건에 따라 시행하고, 병조 판서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빨리 시행할 것이며, 도총관(都摠管) 역시 이 법에 따라 시행하고, 용호장(龍虎將)은 관직을 삭탈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서북 여러 고을의 잉곡(剩穀)·소곡(掃穀) 등의 명목을 모두 혁파하시기 바라며, 팔도의 관용모(官用耗) 조항 가운데 절미(折米)의 규정 역시 엄금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김동연(金東淵)이 아뢰기를,
"황해도 수사(水使) 윤이복(尹彛復)은 잡기(雜技)로 가자(加資)되어 외람되이 변방 장수에 임명되었는데, 사람됨이 간사하고 허탄하여 과거부터 벼슬에 있으면서 탐학과 가렴 주구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먼저 파직하여 영원히 다시는 변방 장수에 의망(擬望)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 지방의 풍문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잘못을 알고서 인혐(引嫌)하는 것은 옛날에도 역시 아름다운 일이었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처리하라."
하였다.

 

조엄(趙曮)을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8월 5일 병술

장령 임시철(林蓍喆)이 아뢰기를,
"어제의 대계(臺啓)에서의 소위 ‘사탄(邪誕)’이란 두 자는 제목으로 내세워 말할 만합니다. 대개 그의 행동 거지와 일의 처리에 오로지 간사하고 음흉함을 숭상하여 벼슬자리에 앉아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거의 모두가 거짓이고 여러 고을에 벼슬을 하면서 대부분 견책받아 체직되었고 비변사의 공식 석상에서 장신(將臣)으로부터 배척받았으며 하물며 〈부임〉 중도에서는 장형(杖刑)을 함부로 가하여 가는 곳마다 소란을 일으켰으니, 윤이복(尹彛復)을 먼저 파직하시고 다시는 영구히 변방 장수로 의망(擬望)되지 말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6일 정해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8월 7일 무자

함평(咸平) 유생(儒生) 정홍신(鄭弘臣)이 상소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칠고 잡스러웠으며 전혀 조리가 없었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었으니, 이는 간(諫)하는 말이 들어오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8월 9일 경인

대사간 이상주(李商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함평(咸平) 유생(儒生) 정홍신(鄭弘臣)의 상소가 겉으로는 백성의 고통과 시폐(時弊)를 빙자한 것이었으나, 그밖에 늘어놓은 말은 전후 사정을 숨기지 않은 것이 없고 떠도는 말을 은근히 내비치어 온 세상을 헐뜯고 욕하며 조정을 능멸하고 모독하였으니, 아주 놀랄 만합니다. 어느 해 어느 해를 낱낱이 꼽으며 당치 않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하는 말들이 음흉하고 정상(情狀)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그대로 두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유배형을 시행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비록 거칠고 잡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아뢴 말이 비록 옳기는 하지만 윤허하기를 아끼는 것은 의도한 데가 있다."
하였다.

 

8월 10일 신묘

홍낙순(洪樂純)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정홍신(鄭弘臣)의 상소로 말미암아 연명으로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관서(關西)의 요군목(遼軍木) 40동(同)을 훈련 도감에 획급(劃給)하되 중순(中旬)에 시행하게 하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진달한 바를 따른 것이었다. 지평 유영진(柳榮鎭)이 정홍신(鄭弘臣)을 유배 보낼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2일 계사

팔도 유생 남궁옥(南宮鋈) 등이 상소하여 소령원(昭寧園)을 추숭(追崇)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소견하여 비답을 내렸으나 의견을 따르지는 않았다. 남궁옥이 물러나려 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백성의 고통을 열거한 것이 있는데, 글은 소매 속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시영(金始煐)이 졸(卒)하였다.

 

8월 14일 을미

유신(儒臣) 이조원(李祖源)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거둥하겠다는 하교를 도로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보다 먼저 보름날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한다는 명이 있었으나 임금의 건강이 아직도 조섭 중에 있었으므로 유신이 차자를 올린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유신이 차자로 아뢰매 승정원에서 소대(召對)하기를 요구하니 만약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의 정성이 얕기 때문이다. 승지와 유신을 모두 체차하고 정상순(鄭尙淳), 윤방(尹坊), 이정수(李廷壽), 이수봉(李壽鳳), 김광묵(金光默), 조준(趙㻐)을 승지로 삼아라. 오늘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내국(內局)162)  의 세 제조(提調) 때문이니, 모두 겸직을 해면하라."
하였다.

 

8월 15일 병신

임금이 진전(眞殿)으로 가서 참배하니,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어가가 돌아올 때 육상궁(毓祥宮)으로 가려고 송현(松峴)에 이르자 임금이 갑자기 곽란기가 있어서 가래침을 토하는지라, 건공탕(建功湯)을 올리니 곧 멈추어졌다. 왕세손이 연(輦)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뛰어가서는 보여(步輿)를 타고 곁을 떠나지 않으며 성의를 다해 부축하고 간호하면서 바로 대궐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왕세손의 정성과 효심이 창황하고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더욱 돋보이니, 배종하는 여러 신하들은 물론 군졸과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도승지가 승정원에서 숙직하였다.

 

8월 18일 기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주서(注書)에게 빈대 좌목(賓對座目)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응순(金應淳)이 아깝구나. 오늘 비변사 당상들이 모두 늘어앉아 있는데 혼자 없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장계(狀啓)로 아뢴 것을 가지고 영의정 신회(申晦)가 청하기를,
"호남(湖南)의 별회미(別會米)를 획급(劃給)한 뒤 10여 년 동안 한번도 실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형편상 한꺼번에 모두 갚기는 어려우니, 풍년든 해를 기다려 나누어서 실어 보낼 것을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시기 바랍니다. 교동(喬桐)에서 호서(湖西)로 옮겨간 쌀은 모곡과 아울러 수봉(收捧)하여 내년 봄을 기다려 수량대로 모두 실어 보내라는 뜻을 분부하심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備局)의 회안(會案)에서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정홍순(鄭弘淳)과 김종정(金鍾正)을 차하(差下)하였으니, 신회의 아뢰는 바를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금군(禁軍) 함도형(咸道亨)의 사건을 두고 당연히 계문(啓聞)하여야 하는 것을 계문하지 않은 대신(臺臣)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케 하고, 계문하였는데도 단속하지 않은 해방(該房) 승지(承旨)는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8월 20일 신축

경복궁(景福宮)에서 문과 정시(文科庭試)를 설시하였는데, 무과 회시(武科會試)도 같이 설시하였다. 당초 친림(親臨)을 명하였으나 환후의 회복이 성과가 없으므로 영의정 신회(申晦)를 명관(命官)으로 삼아 시권(試券)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와 숭정전(崇政殿)에서 성적을 매기게 하였으니, 친림하는 예(例)를 따른 것이었다.

 

8월 21일 임인

입시(入侍)한 과차(科次)163)  에 김노영(金魯永) 등 20명을 뽑았다.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참의로, 조영진(趙英鎭)을 대사간으로, 조엄(趙曮)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김노영은 문과 장원을 하였는데, 등과하기 전에 자궁(資窮)164)  이었으므로 가자(加資)하였다.

 

8월 22일 계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8월 24일 을사

이복원(李福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김종정(金鍾正), 정상순(鄭尙淳)을 가자(加資)하여 서북 별견 시관(西北別遣試官)으로 삼았으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아뢴 것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황해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영의정 신회(申晦)가 우러러 청하기를,
"상평곡(常平穀)을 해마다 나누어 사들인 뒤 창고 보관조 6만 석(石) 중 3만 석과 모조(耗條) 3천 석을 획급(劃給)하되, 각고(各庫)의 돈은 청한 바대로 탕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간(司諫) 이혜조(李惠祚)가 논계하기를,
"액례(掖隷)들이 무소(武所)에 가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모두 엄중 처벌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액례들을 곤장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8월 25일 병오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김응순(金應淳)에게 치제(致祭)하면서 하교하기를,
"아깝게도 크게 쓰지 못했다."
하였다.

 

8월 26일 정미

의주(義州) 유생(儒生) 김하련(金夏璉) 등이 상소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무진년165)   5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할 때 진을 치던 곳과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임진년166)  에 주필(駐驆)하던 곳에 비석을 세워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비답을 내렸다.

 

8월 27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창방(唱榜)하니,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禮)를 행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8월 28일 기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김노영(金魯永)에게 이르기를,
"너는 부모가 다 살아 있는데도 풍악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네 아비의 뜻인 것 같다. 네가 사는 동네가 바로 나의 옛집과 같은 동네이다. 용호영(龍虎營)의 삼현(三絃)167)  을 특별히 내려 줄 터이니, 너는 오늘 유가(遊街)하라."
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곡식과 피륙을 제급(題給)하게 하니,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였다.

 

8월 29일 경술

조정(趙晸)을 이조 참의로,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윤양후(尹養厚)를 부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고, 김노영(金魯永)을 승지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임성주(任聖周)는 경학(經學)은 참으로 잘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부터 잘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 전주(全州)로 제수(除授)되어서도 대신(大臣)이 체직(遞職)을 청하기에 이른 적이 있으니, 그가 사무에 서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지에 간 뒤부터는 관아를 닫아걸고 병치레만하여 고을의 일이 쌓였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덕천 군수(德川郡守) 구팔주(具八柱)는 성질이 본래 광망하고 행동이 비루하여 패악한데, 요사한 기생에게 현혹되어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형장(刑杖)을 너무 남용하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시행되니,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문책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성(固城) 유생(儒生) 이봉징(李鳳徵)이 상소하여 시폐(時弊)와 백성의 고통을 논하니, 임금이 소견하여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문을 내려 비변사로 하여금 품의 처결토록 하였다.

 

부제학 윤양후(尹養厚)가 홍문관(弘文館)의 권점(圈點)에서 이노술(李魯述) 등 6명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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