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주(翰注)168) 의 소시(召試)를 행하였는데, 한림시(翰林試)는 표(表)로써 하고 주서시(注書試)는 부(賦)로써 시험하여 뽑았다.
김노진(金魯鎭)을 이조 참의로, 이석재(李碩載)를 대사간으로, 윤양후(尹養厚)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내승(內乘) 양완(梁垸)을 해남현(海南縣)에 충군(充軍)하니, 초하루 시사(試射) 때 남을 시켜 대신 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2일 임자
도당록(都堂錄)에서 이노술(李魯述) 등 9명을 뽑았는데, 임금이 강혼(姜俒)에게 고(故) 대제학(大提學) 강현(姜鋧)의 손자라고 하여 교리(校理)를 특별히 제수하게 하였다.
조준(趙㻐)을 대사성으로, 이갑(李𡊠)을 승지로 삼았다.
9월 3일 계축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이 입시하여 모두 겹친 경사를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 임금의 수(壽)가 81세요, 재위한 지가 50년, 계비(繼妃)를 맞이한 지 16년이었으며, 임금의 환후가 평상으로 회복되었으니, 모든 것이 이보다 큰 경사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매일 간청하였으나, 임금은 겸양하는 뜻으로 윤허를 내리지 않았다.
함양(咸陽)의 유학(幼學) 정지교(鄭之僑)가 상소하여 백성의 고통을 아뢰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그 글을 내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의 처결토록 하였다.
9월 5일 을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아뢰기를,
"며칠 전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임성주(任聖周)를 논하면서 경학(經學)은 잘한다고 하면서 수령(守令)의 직책은 맡길 수 없다고 하니,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 성천(成川)은 본래 사무가 많은 고을이 아닌데도 부임한 지 10여 일도 지나지 아니하여 공무를 폐지하는 폐단이 있다는 따위의 말은 모두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나온 것이니, 경재관을 파직하시기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6일 병진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9월 7일 정사
수찬 박재원(朴在源)이 천재 지변을 이유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감옥이 비는 교화(敎化)는 태평 성대이지만 민간에서는 도둑이 날마다 생기고, 구언(求言)하시는 정성이 은근하고 간절하지만 초야에서는 임금의 은혜를 입으려고 잇달아 올라오며, 호조의 경비가 다하여 해마다 변통하여 간신히 거두어 쓰게 되니, 전하의 재물 절약하는 것은 결국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바라는 글이 마구 넘쳐 집집마다 금관자(金貫子)와 옥관자(玉貫子)를 가져도 사람들이 영화로움을 알지 못하니, 전하께서 벼슬 내리는 것을 신중히 하는 데에 더러는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안주(安州) 유생(儒生) 윤응리(尹應履) 등과 회덕(懷德) 유생 이지원(李志遠) 등이 상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지원은 남을 속여 은혜를 구하니, 어찌 〈구언(求言)하는 뜻이〉 막중하다 하여 신칙하지 않을 것인가? 유안(儒案)에서 영구히 삭제하라. 윤응리는 말이 두루뭉실하여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를 무엇 때문에 불러 묻겠는가? 모두 쫓아 보내라. 이후부터 이런 유생의 상소문은 승정원에서 해당 이속(吏屬)으로 하여금 쫓아버리게 하고 다시는 아뢰지 말라."
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이 입시하여 모두 진하의(陳賀儀)를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가, 박재원(朴在源)이 경계하기를 아뢰자 임금이 비답을 내리면서 진하의의 명을 거두어 들였다. 이때 대사헌 심발(沈墢)과 대사간 이석재(李碩載) 역시 천재 지변으로 경계하기를 아뢰고자 승정원에 상소문을 제출했다가 갑자기 가져갔는데, 양사(兩司) 장관의 상소문이 승정원에 왔다가 도로 가져간 것은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9월 8일 무오
시임·원임 대신과 승지, 유신(儒臣)과 여러 비변사 당상들이 함께 청대를 구하여, 이전대로 진하(陳賀)를 명하시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9일 기미
시임·원임 대신들이 또 이전대로 진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0일 경신
왕세손이 상소하여 이전대로 진하(陳賀)를 명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는데,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올해 같은 경사는 곧 우리 나라에서 두 번 다시 없던 경사입니다. 보령(寶齡)이 아흔을 바라보는 것도 올해부터 시작이요, 〈시탕(侍湯)하시던〉 거룩한 일의 옛 갑오년이 돌아온 것도 올해에 들었고, 탕제(湯劑)를 쓰지 아니할 기쁨도 올해에 겹쳤으며, 재위하신 지 꼭 50년이 되는 해 또한 올해에 속하였고, 계비(繼妃)와 성례(成禮)한 것이 금년으로 또 열여섯 해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두 번 다시 없던 경사인데, 하물며 탄신일도 이달에 들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다섯 가지 큰 경사가 있으면서도 뛰며 춤추고 싶은 만백성의 심정을 한번도 펴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며 잠시 청하였다가 이내 그만두며 속절없이 올해 이달까지 이르게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의 정성과 효성이 모자란 소치이니, 돌이켜 보건대, 이 엉키고 맺힌 마음을 어찌 감히 잠시라도 쉬며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겠습니까? 다행히 성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어 성대한 의식을 치를 길일을 택하시니, 신은 몰래 기뻐하고 즐거워 손가락을 꼽고 기다리면서 엿새 동안을 오히려 오래고 멀다고 여겼습니다. 어제 엎드려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결정했던 하례의를 물리고 진찬(進饌)은 정지시킨다는 명이 있었으니, 신은 이에 놀라고 답답하여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힘써 쌓아 성상의 마음을 돌릴 것으로 대신들의 경연에서 아뢰는 말에 희망을 걸었던 까닭에, 잠시 잠자코 있으면서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늘 대신으로서 아뢰는 바가 전혀 성의가 없고 간곡한 마음이 너무 부족하면서 허둥지둥 몇 마디 말로써 답하는 글에 귀착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직분으로서 감히 나올 수 있으며 백성의 윤리로서 본디부터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아! 오늘날 대신들로 하여금 이 청하는 바를 그만둘 수 없으며 오늘을 넘길 수 없는 것임을 진실로 알게 한다면, 어찌 이처럼 예삿일 보듯 하고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처리하겠습니까? 그 말의 뜻을 따져 보면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견책이 혹시 가해질 것을 정분과 이치로 헤아려 본다면 이를 어떻게 흐지부지하고 말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오늘날 대신들의 거조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이제는 대신들이 청하는 것을 이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번거롭게 함을 피하지 않고 짧은 글로 바쁘게 아뢰어 우러러 들으시기를 구하오니, 오직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이제 엎드려 일전의 윤허하고 따르신다는 명을 생각건대, 하나는 앙사(仰謝)요 하나는 계술(繼述)이니, 과거 어느 진하, 어느 연회도 앙사와 계술이라는 성상의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 더구나 지금에 와서 의식과 범절을 줄이고 생략하여 준비가 되지 않아 보잘것이 없으니, 언제 털끝만치라도 풍형 예대(豊亨豫大)169) 의 행동에 가깝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미 내리신 명을 무엇 때문에 되돌리십니까? 하물며 일전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이미 12일에 고유(告由)하시겠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엎드려 생각건대, 밝으신 조선의 혼령이 반드시 기운이 유동(流動)하는 곳을 굽어살피시어 성상의 보아도 형체 없고 들어도 소리 없는 효성이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갑자기 마음을 고쳐서 우러러 본받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오래오래 모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성상께 사정을 호소하지만, 말을 간추릴 줄 몰라 황송하고 황송하여 신은 기도하고 간구함이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진찬(進饌)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19일의 진하의(陳賀儀) 행하는 것만을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마음에 겸양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왕세손(王世孫)이 효성을 다한 것이 임금의 마음을 돌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8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마음에 겸양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왕세손(王世孫)이 효성을 다한 것이 임금의 마음을 돌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하교(下敎)하기를,
"나의 마음이 비록 금석(金石)과 같을지라도 어찌 감동하는 일이 없겠는가? 내 손자는 어질다. 어찌 기리어 칭찬해 줄 마음이 없겠느냐? 입시한 춘방(春坊)의 두 신하는 준직(準職)으로 내 뜻을 받들어 전하여 팔도(八道)에 보이게 하라."
하였다.
9월 12일 임술
조명정(趙明鼎)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9월 13일 계해
성균관(成均館)에서 구일제(九日製)170) 를 설시하라고 명하니, 제학(提學)이 시권(試券)을 가지고 와 빈청(賓廳)에서 고사하여 서울 출신으로는 이득영(李得永)을 뽑고, 지방 출신으로는 이수대(李壽岱)를 뽑아 모두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봉조하(奉朝賀)를 소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탕제(湯劑)를 드시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들은 이것을 금단(金丹)171) 으로 삼아 헌수(獻壽)하려 합니다."
하였고, 홍봉한(洪鳳漢)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아뢰기를,
"전상(殿上)에서 천세(千歲)를 부른 일은 옛날에도 역시 있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일제히 천세를 부르니, 이날은 곧 대전의 탄신일이었다. 탄신일의 진하(陳賀)는 국법으로도 당연히 거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성상의 마음이 부왕(父王)을 추모하는 데 쏠리고 겸양하여서 윤허하지 않은 까닭에, 여러 신하가 이렇게 거행하였던 것이다.
9월 14일 갑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몸소 향을 전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곽란기(癨亂氣)로 밤에 편치 못하여 조정에서는 정후(庭候)하였고, 내국(內局)172) 은 주원(廚院)173) 으로 옮겨 숙직하였다.
9월 18일 무진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나의 마음은 오직 추모하는 데 있는데, 하물며 6, 70 넘은 여러 신하들이야 어떻겠는가?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에게는 내일 해조(該曹)로 하여금 옷감과 곡식을 제급(題給)케 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고, 90세 이상 노인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9월 19일 기사
주원(廚院)의 숙직을 그만두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먼저 사배(四拜)한 다음 전문(箋文)을 올린 뒤 사배하고 집경당에 올라 시좌(侍坐)하니, 어제 반교문(御製頒敎文)을 내렸다. 그 반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숭정전(崇政殿)에서 헌수(獻壽)하고 광명전(光明殿)에서 시연(侍宴)하며 이틀 동안 내리신 기쁨과 머리에 꽃 꽂고 집으로 돌아오던 일이 아득한데, 오늘에 이 아침을 다시 만나게 되어 청에 못이겨 하례를 받았으나 마음은 오로지 추모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어찌 나를 위한 것이리요? 뜻이 계술(繼述)하는 데 있다. 기묘년174) 에 전(殿)에 상주(上奏)함으로써 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즉위한 지 50년, 수(壽)는 여든 하나이니, 이것이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계비(繼妃)를 맞이한 지 열 여섯 해가 되니 그 역시 하늘이 주신 복이로다. 봄 가을 두 번 하례를 받으니 나는 태평하고, 신하들은 풍형(豊亨)하고자 하니 임금은 하늘에 감사한다. 오늘의 이 일은 어린 세손의 지극한 정성으로 억지로 전상(殿上)에 나왔으니 어찌 허식으로 대응하겠는가? 오늘 이전의 잡범(雜犯) 이하의 죄수는 모두 용서하고,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1계급씩 가자(加資)하며, 오늘부터 3일 동안 패초를 금하고, 전국의 90세 이상 노인에게는 각각 1계급씩 가자하며, 증렬미(拯劣米)175) 를 축낸 자는 모두 탕감해 주라. 나라의 경사를 듣기 흔치 않으므로 은혜를 널리 베풀어 뜻이 오로지 추모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모두 빠짐없이 듣고 자세히 알라."
하였다.
9월 20일 경오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이 소찬(小饌)을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이 소찬을 받들어 올리면서 은잔에 술을 따르고 절하면서 헌수(獻壽)하니 여러 신하들은 전상(殿上)에서 천세(千歲)를 불렀다. 은잔은 곧 선조(先朝) 을해년176) 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사연(賜宴)할 때 하사한 것이었다.
9월 21일 신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과 봉조하(奉朝賀)를 소견(召見)하였다.
9월 22일 임신
내의원(內醫院)의 세 제조의 직임을 해면(解免)하도록 하고, 김양택(金陽澤)을 도제조(都提調)로, 한광회(韓光會)를 제조(提調)로, 특별히 임명하고 서명선(徐命善)을 도승지로 임명하였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의원을 가까스로 철거하니 이게 무슨 모양이냐? 시임(時任)이 비게 될 것인데 그대들이 보상(輔相)을 겸무할 것인가? 마땅히 구저(舊邸)로 나아가겠다."
하였다. 이때 승지와 홍문관에서 면대를 청하고, 영의정과 좌의정은 의금부에 서명(胥命)하였다.
9월 23일 계유
이재협(李在協)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4일 갑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김문순(金文淳)과 조영진(趙英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관포(冠袍)와 옥대(玉帶)를 갖추고 시강(侍講)하였다. 임금이 《대학(大學)》 경문(經文) 1장(章)을 강론한 뒤 또 보망장(補亡章)까지 외우니 왕세손이 계속해서 읽었고, 여러 신하들은 각각 글의 뜻을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경의 뜻은 모두 차례가 있으나 수신(修身)은 천자나 서인이나 꼭같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 조손(祖孫)이 함께 강론한 것은 의미가 대체로 깊다."
하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모두 상을 내렸다. 당시 임금의 춘추가 매우 높고 오랫동안 환후에 있었는데도 법강(法講)을 열어 외우고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중외(中外)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9월 25일 을해
지평 남학원(南鶴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후의 진하(陳賀)가 번번이 춘궁(春宮)177) 의 간절한 상소에 의한 것이었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대신(大臣)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여서는 종신(宗臣)이 앞장서서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 또한 이것이 고례(古例)인데 며칠전 여러 종신들이 진하와 연회를 청하는 일로 공당(公堂)에 모여 의논하면서 소장(疏狀)을 만들어 올리려 할 즈음에 소두(疏頭)를 싫어하고 회피한다고 하여 서로 헐뜯고 싸움이 일어났으니 신은 아뢰건대 종친부(宗親府)의 으뜸 당상(堂上)에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심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칠원 현감(漆原縣監) 서명국(徐命國)은 사람이 이미 광패(狂悖)하여서 정사(政事)에 불법이 많습니다. 매일 술에 취하여 서슴없이 무거운 곤장을 쳐서 한 지방이 떠들썩하게 난리를 만난 것과 같으니 신은 빨리 삭직(削職)하는 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정산 현감(定山縣監) 강필교(姜必敎)는 천성이 본래 간사하고 행동 또한 탐욕스럽고 더러워 공해(公廨)를 짓는다고 핑계하고는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부역을 독촉하고 조금 나은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강제로 거두어서 자기를 살찌우는 밑천으로 삼고 있으니 신은 삭직하는 벌을 베푸심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 지금 나의 마음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조선의 신령에게 질정하겠다. 저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소리내어 웃는 모양으로 그렇게 되겠는가? 임금이 이와 같은 까닭에 재상 역시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니 그것을 어찌 비난하겠는가? 종신의 일은 듣고 보니 우습지만 일인즉 다른 일과 다르니 내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서명국과 강필교에 대해서는 나의 마음이 오로지 백성에게 있으니 이미 들은 이상 어떻게 잠자코 있겠는가?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구임 낭청(久任郞廳)을 소견하여 관장 업무를 두루 물어보았는데, 비록 조섭하는 중일지라도 스스로 힘쓰고 부지런하였으며 백관들을 신칙하였다.
윤득양(尹得養)·최태형(崔台衡)·조창규(趙昌逵)를 승지로 삼았다.
9월 30일 경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황해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급재전(給災田)으로 1천 5백 결(結)을 추가해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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