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사
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일 임오
이형규(李亨逵)를 대사간으로, 이응혁(李應爀)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10월 3일 계미
관서(關西)도과(道科)178) 에서 계덕해(桂德海) 등 다섯 사람과 예차(預差)179) 홍기서(洪箕敍), 북도(北道) 도과에서는 주중순(朱重純) 등 다섯 사람과 예차 김재성(金載聲)에게 모두 급제를 내렸다.
이조 판서 이담(李潭)이 상소하여 은가(恩暇)를 허락하여 효도할 수 있도록 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담은 명문의 후손인 까닭에 일찍부터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는데 명성과 지위에 연연하고 탐내어 아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겨 침을 뱉았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담은 명문의 후손인 까닭에 일찍부터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는데 명성과 지위에 연연하고 탐내어 아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겨 침을 뱉았다."
10월 4일 갑신
장령 이세효(李世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함종 부사(咸從府使) 박재문(朴載文)은 오로지 자기 살찌울 것만 알고 게을러 정사를 살피지 않으면서 모든 정령(政令)을 아래 아전들에게 전부 맡기고 있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김치준(金致晙)은 오로지 간사한 향리(鄕里)의 말만 듣고 나라의 곡식을 함부로 받아들이며 요사스러운 첩의 참소하는 말을 지나치게 믿어 형장(刑杖)을 혹독하게 시행하니 둘 다 삭직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경기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급재(給災) 1천 2백 결(結)을 더 내려 주고, 삼군문 보미(三軍門保米)는 백성들의 원대로 돈으로 받아들이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5일 을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다.
10월 7일 정해
사간 이상로(李商輅)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관서 도과(關西道科)에서 시권(試券)의 봉내(封內)가 격식에 어긋나는 것을 특령으로 고쳐 쓰게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우리 성상께서 인재를 아끼고 원방의 백성을 위로하는 성지(聖旨)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뒷날의 폐단이 되는 중대한 일입니다. 양도(兩道)의 예차(預差)에게 모두 급제를 내리신 것 역시 규정 밖의 일에 해당되니 즉시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과거 제도를 엄격히 하심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이중복(李重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경과(慶科)는 중대한 뜻이 있으니 공도(公道)를 크게 넓히며 많은 선비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함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물며 서울은 다른 도(道)에 비하여 더욱 중요하므로 반드시 공명 정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관(試官)의 직책에 임명한 뒤라야 백성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해조(該曹)에 엄중 신칙하시어 대소과(大小科)의 초시(初試)·회시(會試)의 시관 의망(擬望)을 각별히 정밀하게 선택하시고, 황경원(黃景源)·조명정(趙明鼎)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지목받는 사람이니 뒤섞어 의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승지가 읽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른 대로 배척하고서 조금도 숨기거나 거리낌이 없구나."
하고, 이중복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보궤 불식(簠簋不飾)180) 이라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중신(重臣)으로서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너는 지금 이름을 들어 사감(私感)으로 배척하니,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네가 지목하여 배척하는 말을 아뢸 수 있느냐?"
하니, 이중복이 대답하기를,
"황경원은 전에 홍상직(洪相直)·김양심(金養心) 두 대신(臺臣)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적이 있고, 조명정은 고(故) 중신(重臣) 이정보(李鼎輔)가 주시관(主試官)으로 있을 때 비록 함께 시원(試院)에 들어갔으나 간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지금도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고 물으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황경원은 신과 친혐(親嫌)이 있으니 함부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지만 조명정은 글도 능하고 주시관도 오래 지냈는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신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이중복이 말하기를,
"조명정의 이름에 공사(公私) 두 글자를 써 놓고 조정의 모든 사람에게 동그라미를 치게 한다면 그들도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반드시 ‘공(公)’ 자에 동그라미를 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중복이 피혐(避嫌)하여,
"성명(聖明)한 조정의 신하로서 충후(忠厚)한 기풍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중신은 사람됨이 화평하여야 하는데 근래에는 여러 말이 많은 까닭에 방(榜)이 나아가 필연코 근거 없는 비방이 있으니, 중신은 불행하게 근거 없는 비방의 표적이 됩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근거 없는 비방으로 말미암아 대신(臺臣)으로부터 탄핵당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칩니다."
하였다. 지평 김양근(金養根)이 아뢰기를,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관원을 정선하여 우리 저하(邸下)로 하여금 학문이 반드시 경술(經術)에 종사하게 하여 치국의 원천이 되는 기초가 되게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신회가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아뢰기를,
"급재(給災) 1천 3백 결(結)과 구재(舊災) 6천 2백 결(結) 영(零)을 더 주는 것은 작년 예에 따르고, 금년 재결(災結)로 획급된 것 외에 사고로 처리된 각종 신포(身布)는 백성들의 원대로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회가 강원도 관찰사의 장계에 의해 아뢰니 급재 5백 결을 더하여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응교(應敎) 정지환(鄭趾煥)을 승지로 발탁하여 임명하니 봉조하(奉朝賀) 정실(鄭宲)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10월 8일 무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신회가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급재(給災) 7천 3백 결(結)을 더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9일 기축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말하기를,
"어제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로 인하여 구재(舊災) 6천 2백 결을 작년의 예에 따라 탈품(頉稟)181) 을 허락하면서 구탈(舊頉)이라는 명목으로 금년의 급재(給災)를 허감(許勘)한 것은 실로 법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한차례 사실을 조사하여 과연 이것이 영영 토지의 형체가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으면 백징(白徵)182) 할 수 없으니 영구히 탈품을 허락하는 것도 혹시 옳을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농사를 권장하는 정치를 조금도 느슨하게 할 수 없으니 내년부터는 신칙하여 ‘구탈에 의하여[以舊頉]’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전례에 따라 장계로 알리지 말게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0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납 임희우(任希雨)가 아뢰기를,
"유광국(柳匡國)은 행동이 비루하고 패악하여 아전과 액례들에게 웃음을 사고, 김양근(金養根)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며칠전 경연에 올라가 행동을 해괴 망측하게 하였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벌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각도의 재결(災結)을 정밀하게 조사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1일 신묘
조정(趙晸)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司諫) 이상로(李商輅)가 아뢰기를,
"병조의 입직자(入直者)는 반드시 얼굴을 보아야 하는데 며칠 전 해조(該曹) 당상이 병을 핑계로 곧장 나갔는데도 승정원에서는 단지 추고(推考)하기만을 청하고 말았으니 해당되는 병조 당상과 해방(該房) 승지를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문과 시망(試望)에 시임 제학(時任提學)을 임의로 의망(擬望)에서 빼는 것은 정식 규정에 위배되니 해방(該房)의 승지를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둘 다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유신(儒臣)은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고 탑전(榻前)에 입대하여서는 도리어 ‘응문고사(應文故事)’ 등의 말로써 애매 모호하게 둘러대어 차자의 글과 아뢴 말이 서로 모순되었고, 경계하기를 아뢰는 말은 전혀 성의와 공경심이 없었으니 차자를 올려 아뢰었던 유신을 모두 삭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네 글자는 나 역시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오래된 일을 왜 꺼내느냐?"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차자를 올려 아뢰었던 유신이란 곧 이조원(李祖源)과 강혼(姜俒)이었다.
10월 13일 계사
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충청 감사의 장문으로 인하여 급재(給災) 5천 8백 결(結)과 구초불(舊初不)183) 2천 7백 60 결을 더 보태어 허급해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14일 갑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5일 을미
승정원에서 천둥하고 번개가 친 것을 가지고 연계(聯啓)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었다.
대사헌 심발(沈墢)이 상소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었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차자를 올려 경계할 것을 아뢰며 이어 물러나게 해주기를 원하였고, 영의정 신회(申晦)도 진연(診筵)에서 물러나게 해주기를 원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수봉(李壽鳳)과 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6일 병신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여 문임(文任)을 사임하고, 또 조사하여 규명해 주기를 원하니,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중신(重臣)이 상소하여 사실을 조사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대개 이중복(李重馥)이 경연에서 ‘고(故) 중신 이정보(李鼎輔)가 함께 시원(試院)에 같이 들어가서 간여하지 말도록 하였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시관(試官)으로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자가 많으니 중신이 사문(査問)하기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만약 사문할 일이 없더라도 과거장에서 사사로운 행동을 한 사람은 조정의 벼슬아치로 둘 수가 없는데, 황경원(黃景源)과 조명정을 몇 년 동안이나 임용하여 일을 맡겼다가 지금 밝지 못한 일로 버리게 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하였다.
10월 17일 정유
조창규(趙昌逵)를 대사간으로, 홍양한(洪良漢)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만육(李萬育)과 이택수(李澤遂)를 승지로 삼았다.
집의(執義) 정언섬(鄭彦暹)이 상소하여 고창 현감(高敞縣監) 김성구(金聲九)와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관하(李觀夏)를 논핵하였다. 상소문이 들어오기 전에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수령을 자주 갈지 말도록 주청(奏請)하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좌의정은 수령 경력이 많은 까닭에 그 폐단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臺臣)들이 소문으로 듣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정언섬의 상소가 들어오니, 임금이 웃으며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된 일이냐?"
하니, 신회가 말하기를,
"이관하는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고, 이사관(李思觀)은 말하기를,
"김성구는 진휼을 잘 하여 가자(加資)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러냐?"
하고, 대신(臺臣)에게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쓰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 대간의 직책이 문란하고 번잡스러워 무인 출신의 수령을 탄핵 공격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역시 비루하였다. 함양(咸陽)과 창원(昌原)의 두 수령이 탄핵을 받자 임금이 묻기를, ‘두 고을이 큰 고을인데도 모두 무관 출신의 무관 수령이냐?’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언섬의 탄핵을 받은 두 고을은 그 전에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았는데 그의 상소가 들어오려 하자 대신(大臣)들이 먼저 주선(周旋)하다가 임금이 묻자 한 목소리로 각기 옹호하였고 정언섬은 피혐(避嫌)하였다. 아뢴 말 가운데 이른바 ‘이관하는 윗사람을 잘 섬겨 명예를 구하고, 김성구는 가까운 집으로 불러들였다.’라고 하는 것이 그 실상이니 대신(臺臣)과 상신(相臣)이 번갈아 본분을 잃었다 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8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 대간의 직책이 문란하고 번잡스러워 무인 출신의 수령을 탄핵 공격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역시 비루하였다. 함양(咸陽)과 창원(昌原)의 두 수령이 탄핵을 받자 임금이 묻기를, ‘두 고을이 큰 고을인데도 모두 무관 출신의 무관 수령이냐?’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언섬의 탄핵을 받은 두 고을은 그 전에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았는데 그의 상소가 들어오려 하자 대신(大臣)들이 먼저 주선(周旋)하다가 임금이 묻자 한 목소리로 각기 옹호하였고 정언섬은 피혐(避嫌)하였다. 아뢴 말 가운데 이른바 ‘이관하는 윗사람을 잘 섬겨 명예를 구하고, 김성구는 가까운 집으로 불러들였다.’라고 하는 것이 그 실상이니 대신(臺臣)과 상신(相臣)이 번갈아 본분을 잃었다 할 것이다."
10월 21일 신축
홍지해(洪趾海)를 이조 참판으로, 조정(趙晸)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서명응(徐命膺)이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한 뒤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전라 수사(全羅水使) 김영준(金永㻐)은 군기(軍器)를 수리하였고, 낙안 군수(樂安郡守) 권탁(權䎐)은 월봉을 털어 세선(稅船)을 만들었으니, 격려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영준은 현직보다 나은 자리에 쓰고 권탁은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2일 임인
이조 참의 조정(趙晸)이 그의 형이 마침 병조 판서였으므로 사임하고 체직해 줄 것을 상소하니, 이재간(李在簡)으로 대신하였다.
조정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3일 계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원인손(元仁孫)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성복일(成服日)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에게 인삼과 부자 등의 약제를 하사하게 하고, 또 예관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위문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정승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았으며, 그의 지혜도 뛰어나서 어린 왕세손을 위하여 기대하였으니 어찌 다만 슬플 뿐이겠는가?"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원인손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천박스러워 전혀 체모가 없었으며, 정승에 임명되어서도 그 경박하고 조급함은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원경하(元景夏)는 탕평(蕩平) 정치에 협찬한 신하로서 지론이 자못 공평(公平)함을 보였는데, 원인손이 가정에서의 교육으로 그다지 편벽된 주장을 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더욱 깊이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지만 그가 사실은 권세와 이익만을 보아 처신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할 수 있다. 삼가 살피건대, 원인손의 자(字)는 자정(子靜)이요,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의 증손이었다. 형제가 문과에 올랐고, 그의 아버지가 원경하인 까닭에 청요직을 두루 거쳐 양전(兩銓)184) 의 판서가 된 지 겨우 50일이 지나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총명하고 민첩하여 자못 재예(才藝)가 많았으나 경박하고 이익을 붙쫓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고, 정승으로서의 업적은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2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84] 양전(兩銓)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사신(史臣)은 말한다. "원인손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천박스러워 전혀 체모가 없었으며, 정승에 임명되어서도 그 경박하고 조급함은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원경하(元景夏)는 탕평(蕩平) 정치에 협찬한 신하로서 지론이 자못 공평(公平)함을 보였는데, 원인손이 가정에서의 교육으로 그다지 편벽된 주장을 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더욱 깊이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지만 그가 사실은 권세와 이익만을 보아 처신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할 수 있다. 삼가 살피건대, 원인손의 자(字)는 자정(子靜)이요,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의 증손이었다. 형제가 문과에 올랐고, 그의 아버지가 원경하인 까닭에 청요직을 두루 거쳐 양전(兩銓)184) 의 판서가 된 지 겨우 50일이 지나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총명하고 민첩하여 자못 재예(才藝)가 많았으나 경박하고 이익을 붙쫓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고, 정승으로서의 업적은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10월 25일 을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으로 나가서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는데, 내일이 곧 익릉(翼陵)185) 의 기일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에 제관을 뽑고 재실(齋室)에 가서 반나절 눈물을 흘려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다시 이 날을 맞이하여 어떻게 양념을 넣은 음식을 먹겠느냐?"
하였다.
10월 26일 병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양택(金陽澤)을 입시하도록 명하니, 익릉(翼陵)의 외척이기 때문이었다.
10월 27일 정미
이치중(李致中)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가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10월 28일 무신
호남 어사 박천형(朴天衡)이 해남(海南)의 괘서 고변(掛書告變) 사건을 조사해 보니, 이는 그 지방민이 좌수(座首)와 다투면서 무함하여 제거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금이 괘서한 사람을 엄중히 처벌하되 자백을 받은 뒤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좌수와 알력이 있어서 괘서하는 사건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약 신칙하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해남 현감 이육(李堉)에게 빨리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고 전라 감사 서호수(徐浩修) 역시 중추(重推)하라."
하니,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이같이 중대하고 어려운 사건이라면 수령된 자를 숨기어 두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육은 세밀하고 일에 밝아 사랑할 만하나, 이 일은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10월 29일 기유
이시정(李蓍廷)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북경(北京) 사행(使行)의 관모(官帽) 무역을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채제공(蔡濟恭)이 장계(狀啓)하여 아뢰기를,
"칙수고(勅需庫) 은자(銀子) 4만 냥(兩)이 비록 지급되었다 하더라도 대신 지급한 것을 속히 갚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장계 속의 말 뜻에 ‘칙수고가 중대함은 다른 것과 다른데 상인들에게 만약 기강을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 은자를 청하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었는데, 승지가 여기까지 읽자 임금이 손으로 문짝을 두드리며 대단히 가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꼭 다 읽어야 하느냐? 거기서 그쳐라. 관서(關西)의 일을 올해는 그렇게 처리하지만 내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나라의 기강이 이와 같으냐?"
하니,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그 당시 신들이 상주한 것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한 것이니 평안 감사의 장계가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명목이 정당해야 한다. ‘관모(官帽)’ 두 글자를 나는 진작부터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어서 비루하게 여겼다."
하며, 이어 여러 비변사 당상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다 말하기를,
"명목이 이미 바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것을 폐지하라고 특별히 명령하고, ‘4만 냥의 은은 보민사(保民司)186) 에 충당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신회가 말하기를,
"이 은(銀)은 곧 역관들의 재물이니 지급하여야 합니다. 보민사의 5천 냥은 신들이 구획하여 조치하겠습니다."
하니, 조엄(趙曮)이 말하기를,
"보민사에서 스스로 맡아 계획하여 처리해야 하지만 4만 냥은 바로 포외(包外)187) 이니, 포외 4만 냥을 모두 지급할 수 없습니다. 본래 나라의 은(銀)이니, 그 반을 지급하고 남은 반은 곡물로 무역하여 보민사에 충당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구윤옥(具允鈺)과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의 포외라는 말은 참으로 잘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2만 냥은 역관에게 주고 2만 냥은 보민사에 충당하는 것이 실로 원만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관모(官帽)의 설치는 홍봉한(洪鳳漢)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한(漢)나라의 각주제(榷酒制)188) 와 같은 것이다. 임금이 하교한 이른바 ‘나는 진작부터 비루하게 여겼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여서.’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상인들의 은자를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영의정·좌의정 및 호조 판서가 한결같이 칙수고(勅需庫)의 은자를 내어 지급하자고 아뢰었으니 놀랍다 할 만하고, 채제공은 바야흐로 주요 변방에서 벼슬살이하고 있었으니 어찌 감히 묘당(廟堂)의 뜻을 어기겠는가? 다만 ‘대신 지급한 것을 속히 갚아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맺고, 중간에 넣은 말로는 ‘상인들에게 만약 기강을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다면’이라고 하면서 ‘어찌 감히 이 은자를 청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었으니, 역시 인물이 뛰어났다고 할 만하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면서 즉시 중지하는 명령을 내리니 궁중이 물을 뿌린 듯이 얼굴색이 변하고, 영의정과 좌의정 및 호조 판서 모두가 감히 그르게 여기지 못하고 모두 다 평안 감사의 장계가 체통을 유지했다고 아뢰니, 실로 한번 웃을 만한 일이다. 만약 채제공으로 하여금 그 중대한 것을 근거로 미루어 옮겨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바로 방계(防啓)189) 하게 하였다면 진실로 체통을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에 유능한 사람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82면
【분류】의생활(衣生活) / 광업-광산(鑛山)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신분-중인(中人) / 역사-사학(史學)
[註 186] 보민사(保民司) : 조선조 때의 관청 이름. 1746 영조 40년에 장례원(掌隷院)을 없애고 그 대신 각도에서 속전(贖錢)을 거두어 들여 형조와 한성부의 비용을 충당하려고 설치하였음. 1775 영조 51년에 혁파됨.[註 187] 포외(包外) : 팔포(八包) 외의 물품을 말함. 팔포는 선덕(宣德) 연간에 상역(象譯)의 반전(盤縳:여비) 조로 매인(每人)에게 인삼 80근을 가지고 가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이것을 팔포(八包)라고 하였음. 뒤에는 백금과 잡물을 대신 가져가게 하였음.[註 188] 각주제(榷酒制) : 중국 한(漢)나라 이후에 행하여지던 술의 전매법. 무제(武帝)가 기원전 98년에 국용(國用)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시행하였는데, 관(官)에서 양조 판매하는 일, 누룩만을 만들어 주가(酒家)에 판매하는 일, 일정한 주호(酒戶)에 전매권을 주는 일 등의 방법이 있었다. 각고(榷沽)라고도 함.[註 189] 방계(防啓) : 남이 내세우는 의견을 막고서 계문하는 일.
사신(史臣)은 말한다. "관모(官帽)의 설치는 홍봉한(洪鳳漢)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한(漢)나라의 각주제(榷酒制)188) 와 같은 것이다. 임금이 하교한 이른바 ‘나는 진작부터 비루하게 여겼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여서.’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상인들의 은자를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영의정·좌의정 및 호조 판서가 한결같이 칙수고(勅需庫)의 은자를 내어 지급하자고 아뢰었으니 놀랍다 할 만하고, 채제공은 바야흐로 주요 변방에서 벼슬살이하고 있었으니 어찌 감히 묘당(廟堂)의 뜻을 어기겠는가? 다만 ‘대신 지급한 것을 속히 갚아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맺고, 중간에 넣은 말로는 ‘상인들에게 만약 기강을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다면’이라고 하면서 ‘어찌 감히 이 은자를 청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었으니, 역시 인물이 뛰어났다고 할 만하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면서 즉시 중지하는 명령을 내리니 궁중이 물을 뿌린 듯이 얼굴색이 변하고, 영의정과 좌의정 및 호조 판서 모두가 감히 그르게 여기지 못하고 모두 다 평안 감사의 장계가 체통을 유지했다고 아뢰니, 실로 한번 웃을 만한 일이다. 만약 채제공으로 하여금 그 중대한 것을 근거로 미루어 옮겨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바로 방계(防啓)189) 하게 하였다면 진실로 체통을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에 유능한 사람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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