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3권, 영조 50년 1774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1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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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계축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감귤(柑橘)을 나누어 주고 선비를 시험 보이어 서울에는 김종순(金鍾純)을 뽑고 지방에는 박장설(朴長卨)을 뽑아 둘 다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창방(唱榜)하는 날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조하 김치인(金致仁)에게 유시(諭示)를 전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 과거에서 김상복(金相福)이 명관(命官)190)  이 되어 과차(科次)를 다섯 번 베풀고 입시(入侍)하여 장원을 정하였는데, 등수를 쓰려 할 즈음에 갑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뽑아 장원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김종순이었다. 제학(提學) 조엄(趙曮)이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게 어찌 된 일인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3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왕실-사급(賜給) / 역사-사학(史學)


[註 190] 명관(命官) : 임금이 과장에 친림하여 직접 임명하는 시험관.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 과거에서 김상복(金相福)이 명관(命官)190)  이 되어 과차(科次)를 다섯 번 베풀고 입시(入侍)하여 장원을 정하였는데, 등수를 쓰려 할 즈음에 갑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뽑아 장원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김종순이었다. 제학(提學) 조엄(趙曮)이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게 어찌 된 일인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월 5일 갑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과(慶科)의 대과(大科)·소과(小科) 초시(初試)에 급제한 사람 중 나이가 일흔이 넘은 사람이 많이 있었으므로 임금은 해당 고을 수령에게 명하여 옷감과 노자(路資)를 보조해 주게 하였다.

 

11월 9일 무오

이때 팔도의 노인 단자(老人單子)가 연달아 올라왔으니, 1백 살 이상된 사람이 20여 명, 아흔 살 이상된 사람이 6백여 명이었다. 임금이 놀라며 말하기를,
"괴이하다. 그것이 확실한지를 어찌 알겠느냐?"
하니,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그 폐단이 없지 않으나 어찌 이렇게 많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더 보탠 것이 있더라도 역시 장한 일이다. 명운(命運)과 기수(氣數)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니, 이사관이 말하기를,
"이렇게 장수(長壽)하게 된 것은 또한 성상(聖上)의 조화(造化)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각각 옷감과 음식물을 내려 주게 하였다.

 

11월 10일 기미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판서로, 송순명(宋淳明)을 대사헌으로, 민백분(閔百奮)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가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11일 경신

동지절(冬至節) 하례(賀禮)를 정지토록 명하였다.

 

11월 12일 신유

집의 정언섬(鄭彦暹)을 승지로 승진 임명하였다.

 

연천 현감(漣川縣監) 조중국(趙重國)의 사판(仕版)을 즉시 깎아버리라고 명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신주를 그 봉사손(奉祀孫)의 집을 찾아 세우고 제문을 지어 내려보내어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고, 음식물과 옷감을 그 집에 제급(題給)하며, 봉사손의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벼슬을 주어 쓰고, 봄 가을 제수(祭需)는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도와 주되 봉사손이 벼슬을 얻어 녹봉으로 제사를 지낼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정에서는 선정신의 자손이 가난하여 제사를 잇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조혁(趙爀) 부자(父子)를 임용함이 옳다 하고 조혁을 단성(丹城) 수령으로 임명하였으며, 조중국 또한 대신들이 경연에서 아뢴 것으로 인해 6품직으로 올라 연천 수령이 되었는데 조중국이 몰래 종가(宗家)를 빼앗을 계획을 품고 억지로 선정신의 사당을 임소(任所)에 두고 받들었다. 선정신의 봉사손의 나이가 겨우 열 셋이었으므로 그의 어미 오씨(吳氏)가 휘양[揮項]을 쓰고 대궐문으로 들어와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리니, 임금이 그를 현명하게 여겨 이런 명을 내린 것이었다.

 

11월 14일 계해

이득신(李得臣)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니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집경당에 까는 보료를 갈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역시 지나치다."
하였다.

 

11월 17일 병인

집의 송덕중(宋德中)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정언섬(鄭彦暹)의 경우와 같다."
하니,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성상의 크신 덕화 아닌 게 없으니 정언섬·송덕중 같은 사람이 성은(聖恩)이 아니면 어떻게 당상관(堂上官)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이를 임명하지만 역시 자연히 시기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소과(小科)의 회시(會試)에 입격(入格)한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11월 18일 정묘

조재준(趙載俊)을 대사헌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다. 이어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공시인(貢市人)을 불러 폐단과 어려움을 물었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20일 기사

송덕중(宋德中)을 승지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해조(該曹)에서 서명응(徐命膺)을 대과 회시(大科會試)의 시망(試望)에 으뜸으로 의망(擬望)하니 서명응이 상소하기를,
"지금 내국(內局)을 겸직하고 있으므로 전례에 따라 시망에 의망될 수 없습니다. 또 금년 가을 정시(庭試)에 명관(命官)과 더불어 가부(可否)를 지적한 일이 있어 시권(試券)을 고사하거나 가지고 나가지 말라는 책망을 받기에 이르렀사온데, 시권을 고사하는 한 가지 일은 변경할 수 없는 기한 앞에 있습니다."
하니, 그 당시 명관은 곧 신회(申晦)였다. 어제 빈대(賓對)에서 신회가 아뢰기를,
"홍문관 제학 이담(李潭)은 고향에 가 있고 예문관 제학 조엄(趙曮)은 지금 병조 판서여서 의망할 수 없으므로 옛날 문임(文任)을 통의(通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대체로 서명응을 지적한 것이었다. 신회는 이중복(李重馥)이 조명정(趙明鼎)을 탄핵한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서명응의 무리로 하여금 과거를 주관하도록 했으나, 서명응이 상소하여 아뢰니, 여러 시망(試望)들이 모두 패초(牌招)를 어겼다. 임금이 손으로 문짝을 두드리며 연달아 엄중히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이 상주한 대로 문임(文任)을 공식적으로 의망하여 제수하는데도 내의원의 제조로 비의(備擬)되었으니, 그것을 공평(公平)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조엄(趙曮)을 시관으로 명하였는데, 조엄은 네 번 패초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물어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입시하게 하여 임금이 그가 패초를 어긴 까닭을 물으니, 조엄이 대답하기를,
"병조는 곧 한(漢)나라의 태위(太尉)가 관장하던 것으로 6일, 7일 동안이나 외부와 통하지 않는 일이 한둘이 아니니, 실로 중대하고도 곤란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조엄이 말하기를,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은 신과 혐의가 있으므로 상시관(上試官)과 대제학이 상의할 수 없으니 막중한 과거가 시험을 어찌 치룰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즉시 정상순(鄭尙淳)을 상시관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그 후 신회가 이홍제(李弘濟)의 통청(通淸)에 관한 일 때문에 빈대(賓對)에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입시하기를 명하고 묻기를,
"시망(試望)에 관한 일 때문이냐?"
하니, 신회가 말하기를,
"신이 마지못하여 아뢰는 것이지만 이것은 아뢸 게 아닙니다."
하였다.

 

11월 21일 경오

조재준(趙載俊)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2일 신미

장령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여 인의(引儀) 조영약(趙榮約)의 망령됨과 패악함을 논하며 사판(仕版)에서 지워 도태시키기를 청하고, 또 검의(檢擬)한 전관(銓官)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당시의 전관을 알고 들어오게 하니 곧 윤득양(尹得養)이었다.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임신

임금이 승지에게 묻기를,
"조영약(趙榮約)이 누구냐?"
하니, 조재준(趙載俊)이 말하기를,
"조태억(趙泰億)의 종손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복직하는 일 때문에 정관(政官)191)  을 이와 같이 논핵하는 것이냐?"
하며, 이어 하교하기를,
"그가 탐관 오리가 아니라면 전관(銓官)에 대하여 적용하는 형률이 어찌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냐? 부정한 짓으로 남을 속이는 낡은 마음을 가진 이홍제를 전조(銓曹)에 명하여 다시는 대망(臺望)에 검의하지 말게 하여 그로 하여금 방구석에서 하던 낡은 습관을 응징하도록 하라."
하니, 이는 진실로 대성(大成)192)  의 존호를 받은 임금으로서 만년의 한 가지 조화(造化)였다.

 

11월 24일 계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홍상찬(洪相纘)을 부수찬으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어제 임금이 지난 갑오년 일기를 가져오게 하여 동짓달과 섣달 좌목(座目)을 읽게 하였는데, 고(故) 정승 홍치중(洪致中)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처음 협찬(協贊)한 영의정이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표시하는 뜻이 없겠는가? 그의 증손 홍상찬(洪相纘)을 특별히 6품직(六品職)으로 승진시키라."
하고, 잇달아 이 관직을 제수하고, 제문을 몸소 지어 고 정승 〈홍치중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 제문을 몸소 지어 고 정승 이종성(李宗城)에게 치제하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건극(建極)193)  이라는 존호를 받을 때 고 정승이 말하기를, ‘신이 살피건대, 전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고 정승은 현명하다."
하였다.

 

집의 홍구서(洪九瑞)가 이홍제(李弘濟)를 논하며 아뢰기를,
"미관 말직인 한 사람을 복직시킨 것을 가지고 아울러 전관(銓官)의 파직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조태억(趙泰億)의 종손자를 탄핵한 것도 지나치지만 홍구서 역시 비루하다. 서로가 한층 더하여 가면서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하기까지 하니, 지나친 일이다."
하며, 이홍제와 함께 똑같이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홍구서와 이홍제를 같이 논하시지만, 사람들이 모두 이홍제를 괴이하게 여기는 까닭에 아뢴 것이지 맞대결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비분 강개하여 한 것이냐?"
하며, 홍구서를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하교를 그만두게 하였다.

 

11월 25일 갑술

임금의 빠진 이가 새로 났다. 입시한 대신들에게 보게 하고 말하기를,
"누런 머리에 다시 새 이가 난다는 말은 옛말에서나 들었는데 이것 역시 보통과 다른 일이다."
하였다.

 

경과(慶科)의 대과 회시(大科會試)를 창방(唱榜)하여 정일상(鄭一祥) 등 33인을 뽑았다. 서용보(徐龍輔)가 나이 열여덟에 소과(小科)·대과(大科)를 연달아 급제하니, 당시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11월 27일 병자

김사목(金思穆)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8일 정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경과 전시(慶科殿試)를 거행하여 이영철(李永喆) 등 44인을 뽑았다.

 

임희증(任希曾)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9일 무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이 아뢰기를,
"조중국(趙重國)은 그의 아비로부터 감히 종가(宗家)를 빼앗을 계획을 내었으니 전후 사정으로 보아 참으로 악독합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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