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진
정호인(鄭好仁)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2일 신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새로 사은(謝恩)한 사람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일상(鄭一祥)을 교리(校理)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득영(李得永)을 직위에 합당하게 임용할 것을 명하니, 정일상은 고(故) 중신(重臣) 정형복(鄭亨復)의 아들이요, 이득영은 고 중신 이태중(李台重)의 아들인 까닭이었다. 예조 판서 정상순(鄭尙淳)이 아뢰기를,
"정조 하례(正朝賀禮)를 그만두라 명하시니, 신민(臣民)들의 답답한 마음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세손(世孫)의 정성을 어떻게 굽어살피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에 예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정전(正殿)에서 진하(陳賀)를 받으면 내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12월 3일 임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홍용한(洪龍漢)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4일 계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거행하였다.
12월 5일 갑신
정만순(鄭晩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6일 을유
홍낙신(洪樂信)을 승지로 발탁하여 임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술원(李述源)의 손자가 아직 벼슬하지 못했으니 특별히 뽑아서 쓰고,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은 직위가 영상(領相)에 있으면서 충절을 세웠으니 참으로 존중할 만한데도 지금 듣건대, 익창 부원군의 손자가 전참봉(殿參奉)이라고 하니 특별히 오늘 구전(口傳)으로 6품직에 승진시켜 그로 하여금 사은한 뒤 입시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7일 병술
정홍순(鄭弘淳)을 병조 판서로, 홍인한(洪麟漢)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홍인한은 정후겸(鄭厚謙)과 결탁하여 변방의 큰 고을살이에서 겨우 체직되자 바로 대관(大官)에 임명되니 이미 대단한 기세를 이루었고, 위세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거리낌이 없는 마음이 이때에 더욱 커졌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의 헌의(獻議)는 명헌의(名獻議)라 할 만하니, 그가 세운 충절은 정포은(鄭圃隱)과 거의 같다."
하니, 영의정 신회(申晦)와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은 흉악하고 참혹하다. 그런 역심(逆心)을 품고서 나를 섬겼으니,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겠느냐?"
하니, 신회와 이사관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효경(梟獍)194) 같은 무리는 그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악(沈)과 유수원(柳壽垣)은 무신년195) 의 일로써 의리를 헤아려 보면 흉악하였다. 심유현(沈維賢)의 역적 행위는 전례에 없던 것이었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이술원(李述源)의 사적은 안고경(顔杲卿)196) 의 행적과 같다. 그의 손자가 어제 벼슬에 제수되었는데, 언제쯤 올라오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임희증(任希曾)이 아뢰기를,
"제주 어사(濟州御史) 홍상성(洪相聖)이 길에서 눈이 맞은 기생을 데리고 함께 배를 탔습니다. 어사란 신분이 남달라 그 행동하는 바를 스스로 조심하여 더욱 엄격하고 삼가야 할 것인데, 이 일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9일 무자
장령 유언수(兪彦脩)가 상소하여, 유신(儒臣)이 글을 올려 지방 수령이 되기를 원하더라도 3백 리 밖을 넘지 말도록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령을 내렸으나 대신(大臣)들이 아뢰는 바람에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전(前) 판서(判書) 홍명한(洪名漢)이 졸(卒)하였다.
12월 10일 기축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구임 낭관(久任郞官)을 소견하여 생각하는 바를 물어 보았다.
12월 11일 경인
정언섬(鄭彦暹)을 승지로 삼았다.
주서(注書) 오대익(吳大益)을 육품직에 승진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오광운(吳光運)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서명응(徐命膺)을 파직하라고 명하니, 신회(申晦)가 서명응의 상소로 말미암아 차자(箚子)를 올려 자인(自引)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12월 13일 임진
박상덕(朴相德)을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역과(譯科)에 합격한 사람을 소견하였다.
12월 14일 계사
김노진(金魯鎭)을 대사성으로, 이경륜(李敬倫)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12월 15일 갑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여러 도(道)의 포폄(褒貶)한 보고를 뜯어보았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동몽들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동몽으로 하여금 《소학(小學)》을 강독하도록 명하였다. 교관 조영경(趙榮慶)과 이상렬(李商烈)을 특별히 6품직에 승진하여 임용하니, 조영경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손자이고 이상렬은 판서 이성중(李成中)의 조카인 때문이었다.
12월 16일 을미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방영(李邦榮)을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니, 그가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보수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2월 17일 병신
제주 어사 홍상성(洪相聖)을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해남현(海南縣)에 귀양 보냈으니, 기생을 싣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사간(司諫) 김양심(金養心)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비의 습관이 옛날과 같지 않아 과거장에서도 무엄합니다. 금년 봄에는 시관(試官)을 크게 꾸짖고 근래에는 낭관(郞官)을 손으로 때리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이런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괴변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급히 성균관 대사성으로 하여금 낱낱이 적발하여 엄중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전(前) 지평(持平) 윤행진(尹行晉)이 지난번 경연에서 주책을 부린 것은 진실로 매우 해괴한 일이니 신은 생각하기를 견책하여 삭직시키는 벌을 빨리 내리시기 바랍니다. 병조의 이군색(二軍色)197) 에서 받아들이는 기보포(騎步布)는 국가의 경상 비용으로 쓰는 것인데도 지난번 군색(軍色)의 낭관이 임의로 쓴 것이 많아 1천 민(緡)이 넘게 되자 해조(該曹)의 당상관이 서리와 고지기를 갈아치우고 벌주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않는다면 나라의 군수품이 장차 낭관의 개인 전대(纏帶)로 들어가게 되니 신은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하게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사은 숙배하고 입시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내국(內局)을 겸직하고 있으니, 나로 인하여 매우 애쓰는구나. 세 번 소를 올려 진심을 아뢴 뒤에 도승지와 함께 밤늦게 사은하니, 우의정의 마음을 내가 알고 있다. 만년에 재상다운 사람을 얻은 것이 매우 기쁘다."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새해가 다가오니 무한한 경사이고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니, 속히 겸양하는 마음을 돌리시어 바로 윤허를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 입시하여 먼저 이렇게 아뢰니, 그 성의에 감탄하겠다. 불러 보면서 그 말을 거절하면 어찌 이것이 그 사람을 쓰고 그 말을 쓰는 뜻이겠는가? 전례(展禮) 전배(展拜)는 내가 마땅히 친히 받아야 할 것이니, 예조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며 다만 정조하(正朝賀)에 의하도록 하라. 내 마음이 느긋해진다."
하였다.
12월 18일 정유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판으로, 조준(趙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19일 무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함께 들어와 일제히 헌수(獻壽)를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조정(趙晸)을 이조 참의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12월 20일 기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도목 정사(都目政事)198) 를 행하여 홍구서(洪九瑞)·김양심(金養心)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제수하기를 명하였으니, 간관(諫官)으로서 진언(進言)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21일 경자
홍술해(洪述海)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새로 임명한 수령, 변장(邊將)과 처음 벼슬하는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인제 현감(麟蹄縣監) 이국형(李國亨)에게 녹비(鹿皮)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고인이 된 사부(師傅)의 손자인 까닭이요, 참봉(參奉) 최경(崔炅)과 봉사(奉事) 이익찬(李益燦)을 특별히 육품직에 승진시켰으니 그들의 나이가 많은 때문이었다. 참봉 조종철(趙宗喆)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손자이므로 직장(直長)으로 뽑아 쓰도록 명하였고, 현계인(玄啓寅)은 죽은 의관(醫官) 현제강(玄悌綱)의 손자인 까닭에 역시 육품직에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
12월 22일 신축
이형규(李亨逵)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3일 임인
이석보(李奭輔)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가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5부(五部)에 엄중히 신칙하여 이달 안으로 서울에서 술을 담그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장혁(李長爀)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고 하교하기를,
"다 같은 무장[武弁]에게 변방의 임무를 맡기면서 선임(先任)과 후임(後任)에 어찌 형제를 바꾸어 둘 수가 있겠는가? 이장섭(李長燮)을 즉시 뽑아 쓰라."
하였다.
12월 25일 갑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자리를 더 만들게 하여 변득양(邊得讓)을 특별히 제수할 것을 명하였으니 그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했기 때문인데, 변득양에게는 여든 살의 양친(兩親)이 있었다.
12월 27일 병오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정언 권이강(權以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왕세손 저하에게 정조례(正朝禮)를 잠시 보류(保留)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전하의 추모(追慕)의 정성과 겸양의 덕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잘 알지만 왕세손의 새해를 맞이하는 기쁜 마음을 바치는 의식에 있어서는 어찌 답답한 마음이 없겠으며, 또한 법도를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임금께 가납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고(故) 정승 이종성(李宗城)의 집과 고 부원군(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집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콩을 실어 보내어 설날 제수에 보태도록 명하였다.
연상시(延祥詩)199) 에 으뜸을 차지한 박상갑(朴相甲)에게 녹비(鹿皮)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8일 정미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한 해가 저무니 삼양(三陽)은 장차 정월이 되고, 새해는 태평할 것이요, 하늘의 경사가 이르러 보령(寶齡)이 날로 높으시니 이는 실로 종묘 사직에 이보다 큰 경사가 없습니다. 소자(小子)의 기뻐하여 춤추고 싶은 심정을 돌이켜 보면 북두(北斗) 같은 술잔에 술을 따라 남산 같은 장수[南山之壽]200) 를 빌기를 원하나 정조 하례(正朝賀禮)는 이미 형편에 따라 정지하기를 명하시고 헌가(軒架) 거는 것 등의 절차도 또한 모두 설치하지 못하게 하시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 어느 날인들 경사스럽지 않으며, 어느 일인들 경사스럽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새해를 경축하는 것은 법문에 있는 예(禮)이겠습니까?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자식으로서 자식의 직분을 빠뜨림이 있으면 후세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두고 무어라 하겠습니까? 엎드려 곰곰이 생각하건대, 올봄의 신년 하례는 집경당(集慶堂) 편전(便殿)에서 거행하되 종·북·피리 등 모든 악기를 예법에 맞게 갖추었는데도 유독 정조 하례에는 악기를 법도에 맞게 갖추지 못하게 하시어 적은 정성을 펴지 못하게 하시니 소자의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이 더욱 심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신년 초하루가 단지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호소하는 정성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기에 짧은 글월을 두서 없이 아뢰어 우러러 존엄을 더럽힙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윤음을 내리시어 편전에서 하례를 거행하되 헌가(軒架) 거는 것은 전례에 따라 올해의 신년 하례와 같이 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너의 글을 보고 너의 정성을 칭찬한다. 나의 부모를 추모하는 마음 때문에 전례(展禮)와 전배(展拜)를 모두 빠뜨리니 이것이 어찌 효도이며, 또 어찌 자식된 도리이겠느냐? 우의정이 아뢴 것으로 말미암아 비록 정조 하례는 허락하였으나 침전에 누워서 이러한 찬배성(贊拜聲)을 듣는 것이 전정(殿庭)에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전정에서 하례한다면 너로서는 반드시 마음 아프고 허전할 것이니 특별히 청한 대로 허락한다."
하였다.
12월 29일 무신
봉조하(奉朝賀) 남태저(南泰著)가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벼슬이 아경(亞卿)201) 에 이르고도 국무를 맡아 일을 논해 본 적이 없었으나 나이가 현거(懸車)202) 할 때도 되지 않아서 재빨리 용감히 물러날 뜻이 있었으니 그것 역시 취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84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201] 아경(亞卿) : 경(卿)의 다음 벼슬. 곧 참판(參判)·좌우윤(左右尹).[註 202] 현거(懸車) : 한(漢)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연로(年老)하여 치사(致仕)하였을 때 천자(天子)께서 하사한 안거(安車)를 매달아 놓고 행영(幸榮)의 기념으로 하였다는 고사(故事). 전(轉)하여 연로하여 특히 70세에 치사함을 이름.
사신(史臣)은 말한다. "벼슬이 아경(亞卿)201) 에 이르고도 국무를 맡아 일을 논해 본 적이 없었으나 나이가 현거(懸車)202) 할 때도 되지 않아서 재빨리 용감히 물러날 뜻이 있었으니 그것 역시 취할 만하다."
이 해 서울 오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8천 5백 31호이고, 인구는 19만 7천 5백 58명이었다. 【남자가 9만 5천 4백 35명이고, 여자가 10만 2천 1백 23명이었다.】 8도의 원호(元戶)는 1백 66만 4천 4백 99호이고, 인구는 6백 90만 8백 83명이었다. 【남자가 3백 34만 2천 6백 52명이고, 여자가 3백 55만 8천 2백 31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84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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