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유
임금이 권농문(勸農文)을 지어서 내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창을 닫고 권정례(權停禮)001) 로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았는데,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였다. 춘방(春坊)002) ·계방(桂坊)003) 의 관원들에게 상을 내려주고, 치사(致詞)를 대신하여 전문(箋文)을 읽은 관원을 승서(陞敍)하고, 찬의(贊儀)·인의(引儀)에게 말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으며, 세손궁의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한 하인과 통례원(通禮院)·서원(書員)·악공(樂工)에게도 상을 주었다.
1월 2일 경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고,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으므로 여러 대신들이 우러러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친히 부축해 일으키자, 임금이 억지로 여(輿)를 탔는데, 왕세손이 모시고 들어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봉조하(奉朝賀)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삼명(三明)004) 과 삼양(三陽)005) 이 개태(開泰)006) 하여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니, 이는 바로 모두 함께 새로워지는 때이다. 아! 뭇 신하들은 어떻게 감히 풍형(豊亨)007) 하게 하겠는가? 정백(精白)한 일심(一心)으로 나의 모년(暮年)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3일 신해
홍윤(洪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그리고 각사(各司)에 생각을 품고 있는 낭관들을 불러 보았다. 공조 정랑(工曹正郞) 조사충(趙思忠)이 수령의 요량 처리하는 폐단을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준 다음 제도(諸道)에 신칙하게 하고, 조사충에게 특별히 지평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예조 정랑 이중권(李中權)이 각도의 세선(稅船)의 일을 삼가 아뢰고, 각 고을로 하여금 지토선(地土船)008) 을 만들게 하되, 수령이 몸소 뱃머리에 가서 함부로 물건을 실을 수 없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 좌랑 계덕해(桂德海)는 이율곡(李栗谷)의 향약(鄕約)과 선천(宣川) 목장(牧場)의 일로써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모두 현재 직위보다 좀 나은 자리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선전관에게 명하여 선천 목장을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호위 별장(扈衛別將) 이광국(李光國)이 한 권의 책자를 소매에서 꺼내어 바치자, 임금이 엄중히 꾸짖기를,
"명령이 없었는데도 들어왔으니, 이것은 벼슬을 얻으려고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제언(堤堰)·관개(灌漑)에 대해 신칙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당 낭청으로 하여금 적간(摘奸)하게 하고, 만약 혹시라도 근신하지 않는 자는 영문(營門)에서 장형(杖刑)을 집행하라. 영문에서 장형을 집행할 수 없는 자는 해도(海島)에 귀양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진전(陳田)을 도로 기경(起耕)하도록 신칙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제언(堤堰)에 대한 하교에 의거하여 똑같이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이 아뢰기를,
"휘령전(徽寧殿) 정조제(正朝祭)의 대축(大祝)인 남학문(南鶴聞)이 나오지 않았으니, 청컨대, 견파(譴罷)의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겨우 출륙(出六)009) 하였는데 행동이 방자하다 하여 중도 부처(中道付處)010) 를 명하였다. 제주 목사 신경준(申景濬)에게 서용하지 말라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니 공과(貢果)가 지체되었는데도 글을 지어 장문(狀聞)하는 것을 오랫동안 봉정(封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사간 이보관(李普觀)이 단지 고지(故紙)만 전하였다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削除)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외방에 있으면서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군직(軍職)과 실직(實職)을 물론하고 또한 모두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김양심(金養心)에게 특별히 승지를 제수하고, 김서응(金瑞應)에게 특별히 첨지를 제수하게 하였으니, 월조(越俎)011) 를 꺼리지 않고 강개하게 소장(疏章)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호위 별장 이광국(李光國)과 형조 좌랑 전태상(田泰祥)을 모두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였는데, 전태상은 아뢴 것이 좋지 않았고, 이광국은 아뢴 책자에 아첨하는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월 4일 임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이 아뢰기를,
"근래에 각 궁방(宮房)의 무토 면세(無土免稅)012) 는 유토 절수(有土折受)와 다름이 있습니다. 단지 결수(結數)만을 각도와 각 고을에 돌려가면서 맡기고는 전세를 거두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매번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폐단이 많아 혹 정상적인 전세의 수보다 갑절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바쳐야 할 백성들은 진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많습니다. 이것은 대개 상납(上納)하는 즈음에 남상(濫觴)013) 의 근심이 없지 않으므로,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원결(元結) 가운데 이획(移劃)한 것이면 무토(無土)의 명색이 필요하지 않으니, 각 고을에 윤부(輪付)하여 각도의 세곡(稅穀)이 올라온 후에 이르러, 지부(地部)에서 각 궁방의 결수가 많고 적은 것을 헤아려 곡물을 획급(劃給)한다면 궁방에 대해서도 손해될 것이 없고 생민(生民)에 대해서도 막대한 혜택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무토 면세의 명색을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신 서유신(徐有臣)을 양주(楊州) 심찰 어사(審察御史)로 삼도록 명하고, 이어서 군기(軍器)를 적간(摘奸)하라고 명하였다.
1월 5일 계축
이조 판서 정상순(鄭尙淳)을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개정(開政)014)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패초(牌招)015) 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강화 유수 이휘지(李徽之)의 장계(狀啓)를 아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 부(府)는 사체(事體)가 중하므로, 이러한 문서는 옛날에 모두 대궐 가운데 보관해 두어 아직 이에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돕는 것 같다. 지금 유수는 곧 옛날의 윤탁(尹鐸)016) 이므로, 옛날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더욱이 지금 모년(暮年)에 이것을 듣고서 보장(保障)에 대한 명이 없었으니, 유독 조간자(趙簡子)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옛 포흠(逋欠) 가운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일체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지금 어사를 양주(楊州)에 보냈으니, 수령이 된 자들은 진실로 경척(警愓)함이 마땅합니다. 이에 의거하여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성지(城池)의 무너진 곳과 기계(器械)의 무디어 쓸모 없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제때에 보수(補修)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 물건을 보수하지 않고 단지 새로운 것만 만드는 경우 비록 백천의 수가 넘는다 하더라도 절대 자급(資級)을 올려 주지 말고 단지 말을 내려 주는 은전(恩典)만 시행하라는 일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양심(金養心)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종정(金鍾正)은 이번의 도정(都政)017) 에서 그가 검의(檢擬)한 것에 사인(私人)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친막(親幕)의 혐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두 벼슬자리를 오로지 한 사람만 붙여서 잇달아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하였습니다. 청컨대, 빨리 견파(譴罷)의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인서(金麟瑞)에게 특별히 충청 수사를 제수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인서는 곧 무신년018) 의 공신 김중만(金重萬)의 아들이었다.
1월 7일 을묘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로, 홍술해(洪述海)를 이조 참의로, 이계(李溎)를 대사헌으로, 송순명(宋淳明)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입직 낭관을 불러 보았다. 빙고 별검(氷庫別檢) 이의집(李宜楫)이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억계시(抑戒詩)019) 를 삼가 아뢰기를 청하고, 이어서, 큰 소리로 외어 아뢰니, 임금이 병풍을 치면서 칭찬하고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예빈시(禮賓寺) 주부 이진웅(李振雄)은 대답한 바가 모호하다 하여 태거(太去)하도록 명하였다.
1월 8일 병진
장령 이규위(李奎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성궁(聖躬)을 조호(調護)하는 도리에 대해 이미 진계(陳啓)하였으나, 아직 근심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매번 병이 조금 나았다 하여 부주의하면 더친다’는 경계를 소홀히 여기신다고 하는데, 삼가 원하건대,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부탁을 깊이 생각하여 동작을 삼가고 심려(心慮)를 맑게 하는 데 더욱 힘쓰셔서 절대 날음식과 찬음식을 진어(進御)하지 않으심으로써 조호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1. 근래에 연석(筵席)의 체통에 있어서 경근(敬謹)한 체통이 전혀 없습니다. 신은 이제부터 대간(臺諫)이 들어오지 않을 때에는 대신(大臣)과 승지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기강(紀綱)의 근본을 무겁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1. 훈련 도감은 연곡(輦轂)의 대군(大軍)을, 매월 두 차례 습진(習陣)하는 것이 곧 본영(本營)을 창설하였을 때 제일의 중무(重務)였는데, 대장 이장오(李章吾)는 수년 이래로 한 차례도 습진하지 않았습니다. 연전에 한 대신(臺臣)이 이를 논핵하였으나, 또한 생각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이장오에게 빨리 견파(遣罷)의 벌을 시행하고, 매월의 습진을 전에 의거하여 빠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곧 오늘날 생민(生民)에 대한 폐단으로 재상 집과 호부(豪富)가 겸병(兼幷)하여 널리 전토(田土)를 사서 세곡(稅穀)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백성의 재산을 잠식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팔도의 수령들에게 엄중히 신칙해서 그들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내게 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그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대략 동중서(董仲舒)020) 가 제한한 전지(田地)로서 30경(頃)을 넘지 못한다는 법에 의거하여 균등하게 분배(分排)하게 함으로써 민생(民生)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1. 무릇 외관(外官)이 역사(歷辭)021) 할 때 비국 당상과 대관(臺官)이 그 합당하지 못함을 살펴보고 부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유래한 법의(法意)가 깊이 있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이 법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신(大臣) 외에 비국 당상과 대신(臺臣)들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구법(舊法)의 깊은 뜻이겠으며, 또한 어찌 역사(歷辭)를 적용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다시 전례를 회복해서 조금이나마 원기(元氣)가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 근래에 조정의 폐단의 근원과 사대부(士大夫)의 풍습은 모두 과거(科擧)가 빈번한 것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폐단에 대해 깊이 생각하셔서 송(宋)나라 주선간(周宣幹)의 의논에 의거하여 드물게 과거를 설행하고 또 액수(額數)를 간단하게 함으로써 관방(官方)022) 을 맑게 하고 사습(士習)을 안정시키소서.
1. 근래에 사채(私債)로 이익을 늘리는 명색(名色)이 이루 셀 수 없어서 매우 기이하고 괴이합니다. 심한 경우 1냥의 이자가 매월 2전(錢)을 넘는다고 하는데, 백성 가운데 현재 대단히 급한 자는 앞날을 헤아리지 않고 이것을 쓰고 있으므로, 빚을 갚기에 이르러서는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유망(流亡)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서 범한 자는 율문(律文)의 금령(禁令)을 어기고 이식을 취하는 법으로써 논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 재용(財用)은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탕갈되고서 나라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국가의 계획은 듣건대 매우 애통하게 여길 만합니다. 강도(江都)의 군향(軍餉) 15만 석에 이르러서는 남은 것이 얼마 안된다고 하는데, 대개 재산을 써서 없애는 것은 그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매번 사치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신이 일찍이 사관(史官)으로서 복어(服御)하시는 물품을 우러러 보았고, 또 일찍이 능에 알현(謁見)하실 때 삼가 진어(進御)하시는 수라(水剌)를 보았는데, 비록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너절한 옷과 맛없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재물이 이와 같이 탕감된 것은 무슨 까닭에 말미암은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재산을 써서 없애는 문을 깊이 구명(究明)하심으로써 모든 것의 절용(節用)을 도모하시어 국가 재정을 여유있게 하는 도리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맨 먼저 진계(陳啓)한 일은 근래에 백례(百禮)가 해이해져 소루하여 마음속으로 일찍이 스스로 탄식하였으니, 어떻게 권면할 수 있겠는가? 연석(筵席)의 체통은 근래에 신칙한 후에 조금 나아졌지만, 말이 없는 세계에 무슨 신칙할 일이 있겠는가? 훈련 대장의 일은 영의정에게 물어 보겠는데, 일이 놀라운 것에 관계되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겠다. 겸병(兼幷)의 폐단은 엄중히 신칙한 뒤에도 다시 이와 같으니, 대신(臺臣)이 탄핵하고 대신(大臣)이 집주(執奏)하면 똑같이 탐률(貪律)로써 시행하도록 하겠다. 수령을 배사(拜辭)하는 일은 그것을 신칙하는 것이 대신(大臣)에게 달려 있으며, 대신(臺臣)은 사람이 못난 것 같으나 스스로 탄핵할 수 있는데, 어떻게 감히 앉아서 부임하지 못하게 하고 일부러 엄중히 신칙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또한 그러한데, 어떻게 감히 고례(古例)를 회복하도록 청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감히 스스로 존대(尊大)하는 데 관계되므로, 내가 몹시 놀랍게 여긴다. 과거의 폐단에 대한 일은 어제 종부시 정(宗簿寺正) 강지환(姜趾煥)이 연석(筵席)에서 이미 아뢴 것이다. 이익을 늘리는 폐단은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만약 이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중률(重律)로 다스리도록 하겠다. 사치에 대한 폐단은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곧 나 때문이니, 어떻게 개연(慨然)함을 견디겠는가?"
하였다.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한 강인(姜)을 승륙(陞六)023) 시키도록 명하였다.
1월 9일 정사
조준(趙㻐)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장령 백사은(白師殷)이 상소하여 시무(時務)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는데, 첫째 부세(賦稅)와 적곡(糴穀)을 견감해도 실제의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것과 삼남(三南)의 전환(錢還)에 대한 폐단을 말하고, 둘째 초사(初仕)를 신중히 하고 수령을 선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넷째 호적법(戶籍法)을 엄중히 하고 호패(號牌)를 고치는 것에 대해 말하고, 다섯째 군제(軍制)를 바로잡고 기계(器械)를 정제하는 것에 대해 말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일전에 전 장령 이규위(李奎緯)가 외사(外司)의 관원에 대해 계청(啓請)하였을 때 아주 적절한 말을 아뢰어야 할 것인데, 대신(臺臣)이 된 몸으로 적절한 말을 아뢰지 않고 도리어 각사(各司)의 낭관들을 꾸짖었으니, 이미 대각(臺閣)의 체모(體貌)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또 어제 올린 소장은 우활(迂闊)한 말이 많았고, 그 문법(文法)이 전말을 자세히 진술하지 않아서 상소한 것도 아니고 계문(啓聞)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간사하여 속이는 규각(圭角)이 드러나 전혀 화합하고 길한 기상이 없었으니,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영남에서 조선(漕船)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국가를 위해 크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세곡(稅穀)을 운반하는데 침몰(沉沒)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의 효과가 아닌 것이 없는데, 강상(江上)의 부민(富民)으로 배[船]를 생업으로 삼는 자들이 대부분 이익을 잃게 되자, 대신의 입을 빌어 조선을 저패(沮敗)시키려고 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양심(金養心)이 갑자기 경선(京船)을 위해 복구하자는 청을 주장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이 된 몸으로 국가의 이해(利害)를 돌아보지 않은 채 부민(富民)의 사사로운 청탁을 듣고 있으니 그가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대각(臺閣)을 욕되게 한 것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사간 김양심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평택 현감(平澤縣監) 유한장(兪漢章)을 남해현(南海縣)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조사충(趙思忠)이 아뢴 바로 인하여 유의양(柳義養)에게 염찰(廉察)하도록 명하였는데, 황구(黃口)024) 로 장정을 채운 것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월 11일 기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한성부와 오부(五部)의 관원을 잡아들이게 하고, 모두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였는데, 여가(閭家)를 빼앗아 들어간 자를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월 12일 경신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서명선(徐命善)·정언섬(鄭彦暹)·조재준(趙載俊)·박상악(朴相岳)·홍낙신(洪樂信)을 승지로 삼았다.
집의 이숭호(李崇祜)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오늘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시지 않은 것은 진실로 소신의 죄로 인하였으니, 신은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물러가서 섬돌 아래에 엎드려 관(冠)을 벗고 대죄(待罪)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나치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탕제를 진어하기를 주청(奏請)하자, 임금이 약방에 명하여 탕제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말하기를,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신 하교는 후원(喉院)025) 에서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중관(中官)이 공사를 돌려보냈다는 이유로써 승지에게 돌려 주자, 승지가 사리에 어두워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중관과 승지를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구궐(舊闕)의 소나무를 도둑질하여 베어 간 사람들은 모두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중죄로 감안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13일 신유
신광수(申光洙)와 민백분(閔百奮)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4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따라 나아갔다. 임금이 향인(鄕人)으로서 서울에 들어온 자를 불러들여 시가[市直]와 황구(黃口)로 장정을 채운 폐단에 대해 하문하고, 선혜청에 명하여 쌀 한 말씩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1월 15일 계해
응제(應製)에서 합격한 사람 신광수(申光洙)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려 주었다.
정광한(鄭光漢)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6일 갑자
밤에 월식(月食)하였다.
이유경(李儒慶)에게 특별히 지평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당초 이유경이 신회(申晦)가 월식(月食)에 대해 논한 일로 인하여 소장을 올리고 앞질러 나갔으므로, 임금이 그 의기(意氣)가 날카로운 것을 가상히 여겨 이러한 명이 있었다.
1월 17일 을축
영의정 신회(申晦)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평일에 망령되게 헤아려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의 월식(月食)은 곧 서운관(書雲觀)에서 전도(躔度)를 추보(推步)하여 전기에 미리 알았던 것이니, 옛날 사책(史冊) 가운데 기재된 마땅히 먹힐 것이 먹힌 것과는 조금 같지 않음이 있는 듯하다.’ 하였으므로, 말하는 사이에 감히 이것을 우러러 진달했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일찍이, 재이(災異)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어찌 일찍이 경계하여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였습니까? 지금 이것을 꼬집어 죄를 성토하는 자가, 심지어는 보상(輔相)으로서 임금을 예(禮)로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절박한 기롱이 닥쳐 거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또 연석(筵席)에서 아뢴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은 성교(聖敎)가 비록 지신(知申)026) 이 거느리고 도착한 것에 돌리셨으나, 우사(右史)의 소장에서는 이미 지신이 말한 것을 가지고 신의 말을 조성(助成)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지신이 아니라 곧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어찌 감히 지신에게 죄를 돌리고 무고(無故)한 사람으로 자처(自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도승지 정광한(鄭光漢)이 상소하여 또한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월식은 일식(日食)과는 다른 바가 있으나, 만약 영의정이 지신이 아뢴 것에 대해 경계하여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면, 재이(災異)를 만난 뜻을 전연 잃은 것이다. 사신(史臣)이 된 자는 스스로 자기의 사필(史筆)을 가진 것이 있는데, 소장을 올려 논핵(論劾)하기에 이르렀으니, 자기의 직분을 벗어난 혐의를 면할 수가 없다. 사관(史官)으로서 간관(諫官)의 일을 행한 이유경(李儒慶)은 나이가 젊고 사필이 날카로워 사관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註 026] 지신(知申) : 도승지.
사신(史臣)은 말한다. "월식은 일식(日食)과는 다른 바가 있으나, 만약 영의정이 지신이 아뢴 것에 대해 경계하여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면, 재이(災異)를 만난 뜻을 전연 잃은 것이다. 사신(史臣)이 된 자는 스스로 자기의 사필(史筆)을 가진 것이 있는데, 소장을 올려 논핵(論劾)하기에 이르렀으니, 자기의 직분을 벗어난 혐의를 면할 수가 없다. 사관(史官)으로서 간관(諫官)의 일을 행한 이유경(李儒慶)은 나이가 젊고 사필이 날카로워 사관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할 만하다."
1월 19일 정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함경 감사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단천(端川)의 교제창(交濟倉)을 본부의 이진(梨津)에 옮겨 설치하고, 홍원(洪原)의 교제창을 본현(本縣)의 직진(直津)에 옮겨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정후겸(鄭厚謙)을 비국 당상에 차출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하의 외손(外孫)이지 척리(戚里)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외손(外孫)인데, 척리(戚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날에 동자(童子)로 관원을 갖추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이 말이 꼭 맞다."
하였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과 우의정 홍인한(洪麟漢)도 또한 그것이 합당함을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사관이 원의손(元義孫)을 비국 당상에 도로 차출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영의정은 아직 내버려 두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은 그가 생질(甥姪)이기 때문에 원의손을 다시 차출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나로 하여금 정후겸을 쓰게 하려 하는 것인가?" 하니, 신회가 대답이 없었다. 당시 정후겸(鄭厚謙)은 나이 20여 세이었는데, 신회(申晦) 등이 깊이 스스로 결탁하려고 하였으며, 또 망령된 뜻으로 영합(迎合)하여 극렬 추천하였으나, 임금의 뜻은 동자로 관원을 채우고자 하지 않았으니, 대신이 된 자로서 능히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사헌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해가 오래 되도록 지폐(枳廢)된 사람은 차례로 녹용(錄用)함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누구인가?"
하니,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이것은 윤숙(尹塾)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차례로 단자(單子)를 써서 들여 녹용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도의 도신(道臣)이 감영(監營)에서 곡식을 사들이는 폐단을 일체 금단(禁斷)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감사가 봄·여름에 감영(監營)의 환모곡(還耗穀)027) 을 발매(發賣)한다고 핑계하고서 먼저 비장(裨將)을 연해의 쌀이 귀한 곳에 보내어 쌀값을 비싸게 정한 다음 각 고을의 원래의 환미(還米)를 내어 제 마음대로 돈을 징수하면서, 한 곡(斛)의 값에서 각각 1, 2냥을 덜 내었으며, 또 소민(小民)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을 기다려 쌀을 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전환(錢還)이었다. 군현(郡縣)에서는 이것을 빙자하여 또한 사리(私利)를 도모하였는데, 호남(湖南)지방에서 더욱 심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황단(皇壇)028) 을 수직(守直)하는 중관(中官)을 잡아들여 곤장을 때려 정배(定配)하게 하였는데, 금법(禁法)을 범하여 황단의 나무를 베었기 때문었다. 인하여 한데에서 부복(俯伏)하여 황령(皇靈)029) 에게 사죄하였다.
대사간 박사해(朴師海)가 아뢰기를,
"대사헌 이계(李溎)가 침랑(寢郞)의 일을 논계(論啓)하였는데, 그 본뜻은 은혜를 간구(干求)하는 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은혜를 간구하는 죄과에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여 대각의 체모를 손상시킨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0일 무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어영 대장 윤태연(尹泰淵)을 잡아들여 곤형(棍刑)으로 다스리고, 풀어주게 하였는데, 그가 야금(夜禁)을 신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월 21일 기사
송영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구상(具庠)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월 22일 경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림(翰林)의 거조가 비록 지나쳤으나, 또한 나쁜 마음은 아니었다."
하니,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연소(年少)한 사람은 본분(本分)을 지켜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가상히 여겨 장려하시는 것은 좋지만, 지나친 것은 잘못입니다."
하였다
심이지(沈頤之)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박사해(朴師海)가 아뢰기를,
"재이(災異)는 헛되이 생기지 않습니다. 월식(月蝕)이 비록 작은 재이라 하나, 대성인(大聖人)030) 이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게 작은 재이라 하여 이것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영의정 신회(申晦)도 또한 소견(所見)이 없겠습니까? 관직이 원보(元輔)031) 에 있고, 또 약(藥)을 논하는 직임(職任)을 겸하고 있으므로, 혹시라도 성상께서 지나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셔서 손상되는 바가 있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가 드린 말이 외면(外面)으로 살펴본다면, 비록 섭리(燮理)하는 도리가 부족하지만, 옛날에 효자로서 늙은 어버이를 돈독하게 받드는 자는 만약 큰일이 아니면 온화한 말로 이를 고하며 다만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날 영의정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더욱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에 힘쓰셔서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도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월 23일 신미
대사헌 송영중(宋瑩中)이 상소하여 명기(名器)032) 를 신중히 가리고 아낄 것을 청하였다.
강화 유수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본부(本府)의 형지(形止)를 살펴보건대, 바다로 둘러싼 견고함이 기보(畿輔)033) 를 공액(控扼)하여 본도(本道)의 요충에 위치해 있으므로, 왕성(王城)의 병한(屛翰)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험지(險地)에 웅거해 있는 경우 물에 있어서는 마땅히 준비해 둘 수 있는 것은 주사(舟師)인데, 지금 연안의 13진보(鎭堡)와 둘러싸고 있는 2백여 리에 한 척의 전함(戰艦)조차 없고 한 사람의 수군도 없으니, 이미 월안(越岸)에서 적을 막을 수 없고, 또 요진(要津)에서 적을 방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류(中流)에서 적선(賊船)이 오르내릴 때 감히 힐문(詰問)할 수 없어서, 단지 5리의 성곽(城郭)을 둘러싸고 앉아서 적을 기다렸다가 성 아래에서 가로막게 되니, 그 방비하는 계책이 소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가 유수가 되었을 때 편의(便宜)를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교동(喬桐)과 영종(永宗)은 처해 있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조응(照應)할 수 없으므로, 난리에 임하여 또한 반드시 기회를 잃을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부를 돌아보건대, 가까이는 기전(畿甸)을 당기고 멀리는 오도(五道)에 통하는 나라 안의 요해지에 있습니다. 오른쪽에 교동과 응하고 왼쪽으로 영종과 잇달아 있으며, 앞의 장봉(長峰)·주문(注文) 등의 여러 섬이 연로(連路)를 둘러싸고 있으니, 서로 응접(應接)하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로써 왕도(王都)의 수구(水口)를 진압하여 우리 나라의 형세를 웅장하게 할 것입니다. 대저 기보(畿輔) 때문에 수사(水師)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설치한다면 마땅히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에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본부는 이미 진무사(鎭撫使)를 겸하여 하나의 큰 군문이 되었으므로, 교동·영종과 같이 피폐하지는 않았고, 겸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있으니 조가(朝家)에 있어서 거듭 수용(需用)을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체모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만약 수사(水使)가 겸하는 통어사를 옮겨 본부에 소속시켜 진무사와 아울러 겸하게 하고, 교동·영종 및 전에 관장하던 통풍(通豊) 등 여러 고을에서 모두 절제(節制)를 받아 수륙(水陸)으로 서로 응하면서 서로 방수(防守)에 힘을 다하게 한다면 거의 소홀의 실수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었는데, 그 말은 진실로 형편을 상세하게 살펴서 깊은 의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통할 것이 이미 커서 감히 경솔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유념하셨다가, 천천히 그 이해(利害)를 구명해 보소서.
병기(兵器)에 이르러서는 정교하지 못하고 날카롭지 못하여 없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다른날 적을 방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본부는 물력(物力)을 판비(辦備)하기 어려운데, 무고(武庫)를 오랫동안 닫아 두었습니다. 신이 시험삼아 궁각(弓角)의 결손(缺損)과 시우(矢羽)의 떨어진 것을 가져다 보았더니 조총(鳥銃)은 구멍이 막히고 창자루가 부러지고 장식이 더러 못쓰게 되었으며, 도검(刀劍)은 자루가 빠지고, 창은 뒤섞여 깨뜨려져 있었으며, 대부분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그외 다른 기계(器械)도 또한 훼손된 것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본 것들은 위급한 때에 쓸 수가 없습니다. 신의 조부(祖父)가 유수가 되었을 때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를 청하여 얻고, 또 여러 가지로 힘써서 갖추어 놓은 기계들이 그 수효가 가장 많았는데도, 아주 오랫동안 버려 두어 장차 쓸모 없이 버려야 할 물건이 되었으니, 신의 마음이 한탄스럽고 애석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 하였습니다. 마땅히 곧 해지고 이지러진 것들을 보수하면, 거의 뜻밖의 사변에 대비할 수 있겠지만, 많은 물건들은 한때에 모두 고칠 수는 없을 것이며, 많은 재력(財力) 또한 한꺼번에 갖추어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신은 이제야 대략 생각하여 헤아려 보았는데, 거의 점차 복구할 도리가 있었습니다. 신이 본부의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았더니, 유수로 있다가 임기가 찬 자는 성을 수축한 것을 덜어내고, 2년 동안 받아들인 것으로 계속 성을 새로 쌓은 후 쓰고 남은 돈과 쌀을 본 창고에 첨가해서 보충해 두도록 하였습니다마는, 단지 삼가 생각하건대, 성지(城池)가 비록 완전하고 튼튼하더라도 병기(兵器)를 갖추지 못하면 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성지와 기계는 마땅히 한쪽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금년에 새로 성을 쌓고 다음해에 그 쓰고 남은 것을 계산하여 여러 가지 기계를 보수하되, 보수한 수효를 비국에 열거하여 보고하면, 비국에서 적간(摘奸)하여 혹시라도 충실하지 못할 경우 일을 주관한 자를 논죄(論罪)할 것이며, 이로써 한 해를 걸러 계속하여 혹 중간에 폐지하는 일이 없으면, 새롭게 성을 수축하는 것을 마치는 즈음에는 군기(軍器)도 또한 일체 새로워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신이 우러러 청하는 까닭입니다마는, 신이 작년에 진해 문루(鎭海門樓)를 고쳐 쌓기를 청하여 지금 바야흐로 경영하여 이것을 쌓고 있으므로, 진실로 다른 데 여력(餘力)이 미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한 해씩 걸려 계속 수축하는 것으로 작식(作式)하는 것은 장차 신이 떠난 후에 있겠지만, 신이 진실로 지금 영선(營繕)해야 할 것 가운데 가장 급한 것을 뽑아 언급함으로써 1일의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약간의 모은 재물을 이미 새로 갖추는 데 죄다 썼으므로, 대기치(大旗幟)는 다시 손을 써서 다스릴 도리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김진규(金鎭圭)는 유수가 되었을 때 군기를 수보하는 일 때문에 상소하여 공명첩(空名帖)034) 2백여 장을 청하였는데, 그 후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장대(將臺)를 수개(修改)하였을 때에는 조정에서도 또한 공명첩을 주었었다고 합니다. 본부에서 계청(啓請)한 공명첩을 군무(軍務)를 조비(措備)하는 데 보충해서 쓰도록 그 구례(舊例)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대(將臺)는 군무(軍務)에 관계가 되는데 군무의 중요함은 병기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장대에 견주어 보면 중요함이 더욱 특별합니다. 따라서 조가(朝家)에서도 또한 마땅히 일의 형편과 재력(財力)을 자세히 살핀 다음 1백 장을 한정해서 내려 보내어 곧 역(役)을 시작하게 하고, 또 장사(將士)와 군사들을 교훈하고 격려 권장해서 상벌(賞罰)하는 바가 있고 난 후에야 해체(解體)되는 탄식이 없을 것입니다. 본부의 돈과 곡식은 모두 비국에서 관리하므로, 수신(守臣)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한 해 두 해가 지나도록 군사들에게 상을 주어 권장(勸奬)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중(軍中)의 군교(軍校) 무리들은 이 때문에 무예를 포기하여, 간혹 궁시(弓矢)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자도 있으니, 뜻밖의 사변에 대비하는데 소홀함이 그 또한 한심스럽습니다. 신이 병고(兵庫)와 부료소(付料所)에 응당 해마다 들어야 할 수효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병고에서 발목(撥木)을 제외하고 여러 가지 응당 내려 주어야 할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30여 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련을 정지한 것이 많아서 조금이나마 남아도는 저축이 있으나, 부료소(付料所)에서 사용할 쌀은 여러 가지 응당 내려 주어야 할 것을 제외하고 남는 것이 또한 70여 석 됩니다. 신은 이것을 병고에서 남은 무명 36필과 부료소에서 남은 쌀 36석 및 군기와 전죽(前竹) 16부(浮)를 해마다 덜어 내어 1년의 상격(賞格)을 삼고, 매달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15인을 뽑아 장원의 다음은 등급을 나누어 마련해서 상을 주되, 만약 윤달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비국에 논보(論報)해서 특별히 쌀 3석, 무명 3필을 청하게 한다면, 그 감소되는 비용은 비록 많지 않으나, 무사를 높이 권장하여 그 효과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모두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셔서 군기(軍器)를 한 해 걸러 보수하게 하고, 상사(賞賜)를 매월 설행하는 일을 윤허하여 정식을 오래 준수하게 하시고, 신이 청한 공명첩도 또한 속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아! 경은 나이가 이제 회갑(回甲)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보장(保障)하는 일에 근로하며 이와 같이 소장을 올렸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아! 이곳은 내가 나이 20세 때 보았었는데, 이는 진실로 금성 탕지(金城湯池)였으니, 그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 개탄(慨歎)을 금할 수 있겠는가? 조목 별로 진계한 것이 그 수효가 많지 않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옛날에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에게 말하기를, ‘보장(保障)을 할 것인가?’ 하니, 윤탁이 그 호수(戶數)를 줄였었다. 아! 저 심도(沁都)를 어떻게 진양(晉陽)035) 에 견주겠는가마는, 이러한 품청(稟請)은 이제 시행하도록 허락하겠다. 지난번에 옛 포흠(逋欠)을 탕척(蕩滌)했던 것은 뜻이 대개 이 때문이었다. 경은 모쪼록 이것에 대해 더욱 다스려서 마땅히 윤탁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아! 어찌 다만 보장(保障)할 뿐이겠는가? 저 심도는 도성(都城)과 다름이 없으니, 경은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임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월 25일 계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각사(各司)의 입직 낭관을 불러 보고, 품고 있는 생각을 하순(下詢)하였다. 또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비국 유사 당상을 불러 보았다.
1월 27일 을해
임금이 조용히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옛날 폐주(廢主)036) 때 중관(中官) 김처선(金處善)은 직간(直諫) 때문에 사살(射殺)을 당하였는데, 당시에 처(處) 자를 은휘(隱諱)하기에 이르렀었으니, 그 충성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후사(後嗣)를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그 뒤에 이 사람의 아들이 영남(嶺南) 감영에도 단오에 진상한 부채를 보고 모두 서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재능을 자랑하여 옥관자(玉貫子)를 달고자 한 것이므로, 내가 미워하여 쫓아 버렸다. 그러나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엄중히 처분한다면, 이미 이루어진 목주(木主)도 진실로 처치하기 어려울 것이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똑같은 처지인데, 비록 이 중관(中官)일지라도 이미 충신의 후손이라면 어찌 불쌍히 여겨 대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월 30일 무인
홍문관 제학 이담(李潭)에게 명하여 제주 도과(濟州道科)의 시권(試券)의 성적을 매기게 하고, 갑신년037) 의 전례에 의거하여 강봉서(姜鳳瑞)·장한철(張漢喆)·김경회(金慶會) 등 3인을 뽑고 모두 급제를 내려 주었다.
제주 어사 홍상성(洪相聖)을 국문(鞫問)하는 예에 의거하여,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대사간 임희증(任希曾)이, 홍상성이 기생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간 것을 논핵하니, 임금이 정배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주 사람이 올라왔으므로, 임금이 어사가 다시 바다를 건넌 것과 기생을 데리고 있었는지의 실상에 대해 물었는데, 아직 배를 타지 않았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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