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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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묘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윤시동(尹蓍東)을 이조 참의로, 이미(李瀰)를 대사성으로, 이택수(李澤遂)를 대사간으로, 백사은(白師殷)을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삼았다. 백사은은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나라 일에 대해 말한 상소가 있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가납(嘉納)하고, 수령을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정관(政官)이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하였던 것이었다.

 

김양심(金養心)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과 대사간 박사해(朴師海) 등이 아뢰기를,
"홍상성(洪相聖)이 기생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간 것은 고금에 없던 해괴한 일입니다. 처분이 엄중하였으니, 마땅히 머리에 진흙칠을 하고 〈사죄하는 뜻〉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편안히 기생을 데리고 스스로 보통사람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하니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엄중히 추국(推鞫)해서 실정을 알아내어 빨리 왕법(王法)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에는 과연 대각(臺閣)이 있다."
하고,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박사해가 또 논핵하기를,
"전 제주 목사 신경준(申景濬)은 어사의 죄를 받은 후 어사의 장계가 자연히 시행하지 않는 데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이것은 죄를 받기 전의 장계와 동봉해서 올려 보냈으니, 그것이 해괴한데에 관계가 됩니다. 청컨대, 청컨대 잡아다 추문한 다음 엄중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무지개의 변고 때문에, 하교하여 10사(十事)로 스스로 책망하고 10일 동안 감선(減膳)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승지 심이지(沈頤之)와 승지 정호인(鄭好仁)·이숭호(李崇祜)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는데, 서운관(書雲觀)의 보고를 곧 계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시한 여러 대신(臺臣)들을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홍상성(洪相聖)이 애초에 신문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엄중히 신문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홍상성을 잡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도록 명하였다.

 

정광한(鄭光漢)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지신(知申)이 되어 연중(筵中)에서 월식은 재이(災異)가 아니라고 대답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양심(金養心)·홍구서(洪九瑞)·이갑(李𡊠)을 승지로 삼았다.

 

겸보덕 서유신(徐有臣)을 발탁해서 승지로 제수하였는데, 서지수(徐志修)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임희증(任希曾)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4일 임오

임금이 무지개의 변고 때문에 대신과 비국 당상 및 각사(各司)의 낭관을 인견하고,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는데, 대관(大官) 이하가 모두 시무(時務) 한 두 가지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여 책임을 면하는 데 그쳤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웃을만한 일인 것 같으나, 혹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특별히 선전관 이득제(李得濟)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승정원에서 진계(陳戒)를 잇달아 아뢰니, 비답하기를,
"아! 내가 임어(臨御)한 지 51년이 되었고, 내 나이 82세가 되었으나, 본래 재주가 없고 덕이 없는데, 근래에 날로 더욱 쇠모(衰耗)해지고 온갖 법도가 좀스럽고 만기(萬機)가 해이해졌으니, 지금 나라 일은 어느 곳에서 탈가(稅駕)038)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다. 느낌이 오로지 이에 미치니, 한밤중에 강개(慷慨)하고 있다. 더욱이 근일에 깊이 개탄하는 것은 곧 말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인데, 인애(仁愛)로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일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이는 귀를 끌어당겨 얼굴을 맞대고 명령한 것과 다름이 없어서 더욱 두려움이 절실하였으니, 어제 이후로 먹는 것이 어찌 달겠으며, 잠자리가 어찌 편하였겠는가? 직임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능히 광구(匡救)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대사간으로, 이성묵(李性默)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부응교 이상악(李商岳) 등이 차자를 올려 면계(勉戒)를 아뢰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장령 이평(李坪)이 상소하여 맨 먼저 강진(康津)의 아전 포흠(逋欠)에 대해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번 세도(世道)가 부박(浮薄)함을 근심하시지만, 조경(躁競)의 풍습이 오히려 죄다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매번 뭇 신하들이 으르고 소홀히 하는 것을 신칙하시지만, 게으른 습성이 오히려 제거되지 않은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경비를 절약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나라의 저축은 넉넉하지 못한 근심이 있으며, 분수에 지나친 사치를 금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세속(世俗)은 점점 변하여 가는 탄식이 있습니다. 무릇 이러한 몇가지의 일은 진실로 이변(異變)을 초래하는 한 가지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이변은 참으로 나의 부덕(否德)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바야흐로 두려움이 절실하다. 힘쓸 것에 대해 힘껏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진 수령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문하여 구초(口招)를 받도록 하겠다."
하였다.

 

2월 5일 계미

김하재(金夏材)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수성(修省)하는 성의(聖意)로써 잇달아 빈대(賓對)039)  를 행한 것이었다. 임금이 조용히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김양심(金養心)과 이계(李溎)는 서로 친밀하다고 하는데, 붕우(朋友) 사이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거든, 더구나 군신(君臣) 사이에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겠는가? 나의 이 마음은 가히 저 하늘에 질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뭇 신하들이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민시(鄭民始)에게 당진(唐津) 등 여러 고을의 곡부(穀簿)를 안핵(按覈)하도록 명하였는데, 이평(李坪)의 상소에, 남읍(南邑)의 창고가 텅 비었다고 말함으로 인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헌납 김동연(金東淵)이 아뢰기를,
"재이(災異)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언로(言路)를 열고 인재(人材)를 채용하는 것만함이 없습니다. 언로를 열고자 할 경우 만약 주위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버려 두고, 만약 충성스럽고 곧으면 이를 권장하되, 조금이라도 꺾어서 억제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상의 뜻은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릴 필요 없이 언로가 저절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근일에 재서(才諝)와 문학(文學)이 대부분 미련하고 무식하여 인재를 가리는 즈음에 그 재주와 학문을 논하지 않고 오로지 지처(地處)만 논하고 있으니, 이 같이 하고도 어떻게 물정(物情)을 화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2월 6일 갑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어서 농민[田民]을 불러 쌀을 내려 주었다.

 

2월 7일 을유

임금이 숭정전 동쪽 월대에 나아가 3품 이상의 문관·음관·무관 및 반유(泮儒)040)  를 불러 보고,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이어서 각각 붓과 종이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각을 정리하여 써서 바치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사교(辭敎)가 간측(懇惻)한 데 대해 감동하여, 각각 의견을 펴서 시폐(時弊)·시무(時務) 및 직장(職掌)에 대해 써서 바쳤다. 임금이 와내(臥內)에서 도승지 이갑(李𡊠)으로 하여금 종일 독주(讀奏)하게 하였는데, 도합 70여 본이었다. 그런데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은 모두 일일이 답을 내리고, 책을 만들어 비국에 내려 거행하게 하였다. 간혹 시폐에 절실하여 곧 거행할 만한 것이 있었으나, 모두 저지하여 행하지 않았으니, 마침내 비국의 휴지(休紙)가 되고 말았다.

 

백관들에게 명하여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궁궐 안의 공해(公廨)에 머물면서 뜻을 다하여 써서 올리게 하고, 일일이 답을 내렸다. 그리고 승정원에 명하여 책자를 만들어 의정부에 내리게 하였다.

 

이득제(李得濟)를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삼았다. 그때 영의정 신회(申晦)가 아뢰기를,
"강계 부사 최태형(崔台衡)이 지금 바야흐로 사조(辭朝)041)  하려 하는데, 세상 사람의 비난이 있으니 일로 보아 마땅히 체차(遞差)해야 합니다. 듣건대, 통신사의 행차가 수년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인삼 2백 50근을 마땅히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강계는 지금 비록 문관을 차출해야 하는 순번이 되었다 하나, 청컨대, 무신을 차출해서 보내어 인삼을 모으는 바탕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합당하겠는가?"
하자, 신회가 무신 승지 이득제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승지 가운데에도 합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득제를 차출하였는데, 이득제는 일찍이 어버이의 나이 70세가 되었다 하여 해곤(海閫)에서 체차되어 돌아왔는데, 하물며 변지(邊地)이겠는가? 곧 전례를 끌어대어 사직하므로 체차시키고, 마침내 이달해(李達海)를 강계 부사로 삼았다. 이달해는 본래 윗사람을 잘 섬긴다고 칭찬받은 사람이었다. 후에 임금이 통신사의 행차에 대해 언제쯤 가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누차 물으니,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반드시 수년 안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회의 말은 모두 허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임금에게 고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두려워하여 삼가는 바가 없는 것인가?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는 것은 아득히 정확한 기한이 없고, 어버이가 연로한 사람에게는 변방을 맡기지 않는 법인데, 신회가 어찌 몰랐겠는가? 그리고 진실로 앞일에 대한 염려와 사람을 가린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무인 수령을 차출해서 보내어 인삼을 모으게 한다는 말은 더욱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최태형은 과연 피연(疲軟)하여 변문(邊門)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체차하여 고칠 것을 건의한 것은 옳았지만, 이에 허망하여 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겨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8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재정-전매(專賣)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역사-사학(史學)


[註 041] 사조(辭朝) : 외임(外任)에 임명된 신하나 외국의 사신으로 나가는 신하가 길을 떠나기에 앞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일.
사신은 말한다. "신회의 말은 모두 허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임금에게 고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두려워하여 삼가는 바가 없는 것인가?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는 것은 아득히 정확한 기한이 없고, 어버이가 연로한 사람에게는 변방을 맡기지 않는 법인데, 신회가 어찌 몰랐겠는가? 그리고 진실로 앞일에 대한 염려와 사람을 가린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무인 수령을 차출해서 보내어 인삼을 모으게 한다는 말은 더욱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최태형은 과연 피연(疲軟)하여 변문(邊門)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체차하여 고칠 것을 건의한 것은 옳았지만, 이에 허망하여 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겨 비웃었다."

 

2월 8일 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태학(太學)의 장의(掌議)에게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람으로 절반씩 나누어 차출하게 하였는데,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아뢴 바로 인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다.

 

2월 9일 정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2월 10일 무자

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좌윤 홍지해(洪趾海)를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고, 이조 참의 윤시동(尹蓍東), 부사직 김노진(金魯鎭)을 아경(亞卿)으로 삼았는데, 영의정 신회(申晦)가 아뢴 것이었다.

 

수찬 이진규(李晉圭)를 발탁하여 이조 참의로, 공조 참의 홍재(洪榟)를 좌윤으로 삼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을 형조 판서로 삼고, 윤시동(尹蓍東)에게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다.

 

헌납 김동연(金東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렴풋이 듣건대, 바야흐로 주전(鑄錢)하려 한다고 하는데, 주전의 폐단을 다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전로(錢爐)가 열리는 것은 간사한 협잡배들이 몰리는 곳이 되니, 도둑이 숨어있는 것은 오히려 제2건의 일에 속합니다. 돈이 생민(生民)의 통화(通貨)를 위한 것이면, 이전에 주조한 것이 지금 무엇이 부족하여 빈번하게 새로 주조하는 것입니까? 관장하는 영문(營門)에서 남는 것은 제 몸만 이롭게 하는 밑천으로 삼기에 알맞게 되고, 전로(錢爐)를 감독하는 장교는 도둑질하여 사리(私利)를 꾀하는 구멍이 되는데, 민간에서는 1전도 보지 못하고 한갓 온갖 폐해만 받게 됩니다. 주현(州縣)에서 돈을 돌려 보내면, 각 감영에서 헤아려 처리하는데, 생민들이 떠들썩한 것은 많이 주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구전(舊錢)을 소각(銷却)하고 신전(新錢)을 주조할 경우 무거운 것을 헐어서 가볍게 만듦으로써 그 이익을 취하므로, 신전(新錢)은 매우 얇아져서 오래 두면 모두 부서지게 됩니다. 이것을 옛날에 이른바 악전(惡錢)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장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어영 대장 윤태연(尹泰淵)은 주전을 주관한 자인데, 이에 말하기를,
"신이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을 때 명을 받들어 감독하였는데, 물역(物役)은 지금 비로소 조치 준비하고서, 바야흐로 날을 가려서 전로(錢爐)를 열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비에 보충해서 쓰는 밑천은 신의 군영(軍營)에서 관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권진(權禛)이 상소하여, 방백과 수령을 가리고, 경비를 절약해서 쓰고 주사(舟師)042)  를 신칙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산골의 고을에서 대동미(大同米)를 겹쳐서 받아들이는 폐해와 호남 고을에서 미역을 팔아서 이익을 쓸어 모은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신칙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기로과(耆老科)의 노인을 불러 보았다. 반유(泮儒)에게 책문(策問)을 시험 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박행순(朴行淳)에게 처음에는 회시(會試)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가, 다시 급제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2월 11일 기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방민(坊民)을 불러 보고, 폐막(弊瘼)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또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는 것이 마땅한 지의 여부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방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중간에 그치지 말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이로부터 올리게 하되 날마다 3첩씩 올리게 하였다.

 

파주 목사 홍화보(洪和輔)에게 승지를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영의정 신회(申晦)의 추천으로 인한 것이었다.

 

고 부제학 권변(權忭)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손자 권진(權禛)의 상소로 인한 것이었으며, 또 선조(先朝)에서 청심(淸心)·고절(苦節)의 포상을 생각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홍상성(洪相聖)을 석방하여 나주(羅州)에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홍상성을 잡아온 후 초공(草供)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는데,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그 초공을 보신 후에 원컨대, 성상께서는 반드시 신중하게 살펴서 처분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그 공초를 보게되자 그를 한곳에 머무르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특별히 일률(一律)043)  을 감하고, 이어서 나주에 정배하였다.

 

구익(具㢞)을 대사헌으로, 홍검(洪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3일 신묘

사간 신응현(申應顯)이 구태후(丘泰垕)를 승륙(陞六)시키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박행순(朴行淳)에게 급제를 내리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4일 임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홍검(洪檢)이 도배(島配)한 죄인 이굉(李㙆)을 물간 사전(勿揀赦典)044)  하고 그 지역에 안치(安置)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종신(宗臣) 이굉이 인명(人命)을 제멋대로 살해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상명(償命)045)  을 용서하여 처음에 도배하게 하였으므로 홍검이 이 계청을 내었으나, 법을 집행하는 의논이 또한 구차스러웠다.

 

2월 17일 을미

집의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수령 가운데 곡식이 귀한 때 창고에 남겨둔 것을 발매(發賣)하고는 부유하여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백성에게 돈으로 나누어 준 다음 가을을 기다려 조(租)로 받아들이면서 갑절의 이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비록 어느 고을의 어느 수령이 이것을 범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폐단이 되는 것은 심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도신(道臣)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엄격하게 금단(禁斷)을 가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곡(錢穀)에 대한 일은 이 뒤로부터 이를 범한 사람은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고, 탐률(貪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또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불러 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기구회(耆耉會)에 시(詩)가 없을 수 없다."
하고, 오언 절구(五言絶句) 2수를 지어서 내리고, 해당 당상으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한 다음 각각 표리(表裏) 1습(襲)을 내려 주었다.

 

2월 18일 병신

양주(楊州) 목사 홍찬해(洪纘海)가 상소하여 본목(本牧)에 방영(防營)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 보고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권무 군관(勸武軍官)에게 친히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2월 19일 정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에게 전강(殿講)046)  을 행하고, 한영운(韓永運)·신배권(申配權)에게 급제를 내렸다.

 

신익빈(申益彬)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3일 신축

박사해(朴師海)를 이조 참의로, 김재순(金載順)을 대사헌으로, 홍술해(洪述海)를 황해 감사로 삼고, 최경악(崔景岳)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경상 감사 윤양후(尹養厚)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함안(咸安)의 환모(還牟) 3만 석을 이번 봄에 발매(發賣)하고, 가을을 기다려 작미(作米)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홍검(洪檢)이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평소에 묘모(廟謨)를 강구했다가 때로 진백(陳白)해서 진실한 도리를 삼게 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조재한(趙載翰)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4일 임인

주금(酒禁)을 신칙하도록 명하고, 빼앗아 온 술독을 입직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동부(東部)의 관원이 기한을 늦춘 후 크게 술을 빚었기 때문에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였다.

 

홍수보(洪秀輔)를 승지로 삼았다.

 

2월 25일 계묘

집의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양 군수(高陽郡守) 조덕행(趙德行)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어리석은데다가, 행실이 탐욕스럽고 비루합니다. 영문(營門)에서 획급한 쌀을 죄다 작전(作錢)하고, 청나라에 무역하여 방결(防結)047)  하고는 민간에서 억지로 값을 갑절이나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한 지경 안에서는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고, 다만 속히 떠나기만 원하고 있었습니다. 신은 먼저 파출(罷黜)하고, 영구히 자목(字牧)의 망단(望單)에서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봉산 군수(鳳山郡守) 민범수(閔範洙)는 작년에 해곤(海閫)을 새로 제수받았는데, 가는 곳마다 탐오(貪汚)·불법(不法)한 실상으로 대신(臺臣)에게 탄핵받아 부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탄핵한 소장(疏章)의 먹물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또 이 고을의 수령에 제수되자, 염치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부임하여 옛날의 습성을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또한 먼저 파출하고, 영구히 곤임(閫任)과 수령의 망단에서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유신(儒臣)이, 철원(鐵原)의 두 수령이 먼저 대동(大同)048)  을 혁파한 일로 진달(陳達)한 바가 있었는데, 모두 표리(表裏)의 상전(賞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도신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주는 은전(恩典)이 단지 한 사람에게만 미치고, 스스로 갖추어 처음으로 실시한 사람에게는 유독 혼자만 은전을 받지 못하는 탄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똑같이 차별 없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덕행(趙德行)은 해부(該部)로 하여금 엄중히 추문하여 아뢰게 하라. 민범수(閔範洙)는 당초에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청했었는데, 영구히 뽑아버리라는 청은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철원(鐵原)에 대해서는 이미 표리(表裏)를 시행하였으니, 한 가지 일로 두 번 시행하는 것을 나는 지나치다고 여긴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앞에 배열한 기고(旗鼓)를 들여오도록 명하였는데, 액례(掖隷) 11인을 잡아들이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후 해조(該曹)에 회부하여 수금(囚禁)하게 하였다. 처음에 액례와 포교(捕校)가 주가(酒家)에서 서로 싸우다가, 포교가 액례를 결박하였는데,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과치(科治)하게 하였다. 그런데 포교를 형리(刑吏)가 붙잡아 오는 즈음에 액례들이 무리를 지어 포교를 구타해서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형조에서 이로써 초기(草記)049)  한 까닭에 이 같은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8일 병오

임종주(任宗周)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수찬 남강로(南絳老)에게 명하여 포천(抱川)의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2월 29일 정미

한광회(韓光會)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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