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신
이휘지(李徽之)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경기 도사(都事) 박상갑(朴相甲)은 이름을 시종안(侍從案)에서 간삭(刊削)하여 포천(抱川)에 정배하고, 도신(道臣)을 파직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어서 향전(鄕戰)050) 을 엄금하게 하였다. 처음에 남강로(南絳老)가 명을 받들어 포천의 옥사를 안찰(按察)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도사 박상갑이 이성급(李聖伋)의 청탁을 받고, 관문(關文)051) 을 보내어 향인(鄕人)을 수금(囚禁)하였는데, 그 근본은 유생(儒生)과 향임(鄕任)이 서로 싸운 데 말미암는 것이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윤시동(尹蓍東)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삼일제(三日製)052) 를 설행하도록 명하고, 수석을 차지한 심능필(沈能弼)에게 급제를 내려 주었다.
3월 3일 경술
부수찬 이상로(李商輅)를 승진시켜 첨지(僉知)를 제수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아버지 이의중(李毅中)을 추억하고,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입직한 무신에게 강(講)을 행하게 하고, 문신에게 명하여 10운(韻)의 배율(排律)을 지어 바치게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3월 4일 신해
홍낙명(洪樂命)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장령 조세선(趙世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만히 엿보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세상을 면려(勉勵)할 권병(權柄)을 잡으시고 풍속을 바로잡는 정사를 행하시어 한원(翰苑)053) 의 추천 제도를 폐지하고 이조 낭관의 임명 제도를 개혁하심으로써 조경(躁競)의 풍습을 종식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자장(國子長)054) 의 관직은 삼전(三銓)055) 이 통의(通擬)하는 계제가 되었으니, 그 쟁탈하는 바가 옛날 한원과 이조의 쟁탈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상으로 주의(注擬)에 해당된 사람이 거의 백십이지만, 그들 모두 비슷비슷하여 앞세우거나 뒤에 처지게 할 수 없으므로, 혹 과궐(窠闕)이 있어도 채우지 않는 데 이르렀으며, 자칫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폐단을 만약 변개(變改)하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서로 전쟁하는 것을 장차 발돋움하고 보게 될 것입니다. 아! 문화(文華)는 저절로 문화이고, 전선(銓選)은 저절로 전선이니, 문화는 국자(國子)에 마땅하고, 전선은 이의[吏議]에 마땅한데, 어떻게 반드시 문화로써 전선의 계제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이후로부터 국자에 합당한 자는 국자로써 통하게 하고, 이의에 합당한 자는 또한 이의에 곧바로 통의(通擬)하게 하신다면, 전과 같이 분경(紛競)하는 근심은 없어질 듯합니다. 외방의 세곡(稅穀)을 경사(京司)의 각 창고에 실어 들이는 것은 원래 정식(定式)이 있어서 각기 정해진 수량이 있습니다. 근래에 뱃사람의 무리가 여러 가지로 계책을 세워 편리한 곳에 돌아가기를 꾀하고, 말[斗]로써 되어 주는 창고를 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창고에서는 첨가해서 보내고 저 창고에서는 줄여서 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녹봉(祿俸)을 나누어 주는 밑천과 급료(給料)를 나누어 주는 수용(需用)이 매번 부족함을 근심해야 합니다. 도로 각 창고에 옮겨 대여해야 하겠지만, 많이 획급한 곳은 모축(耗縮)이 이미 많아서 구간(苟簡)함이 또한 심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탁지(度支)056) 에 신칙해서 한결같이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각 창고에 실어 들이게 하되, 혹 흉년을 만나 대여를 면하지 못하여 경창(京倉)에서 쓸 경우에는 미리 먼저 연석(筵席)에서 계품하여 변통하여, 강가에서 각 창고에 나누어 획급한다면, 더욱 편하고 좋을 것으로 여깁니다. 수령의 장부(臧否)057) 는 전최(殿最)058) 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근년 이래로 제정된 법의 뜻이 해이해져서 폄하(貶下)된 지 얼마 안되어 사유(赦宥)를 만나 탕척(蕩滌)되면, 다시 구애하지 않고 곧 자목(字牧)의 직임을 제수하게 되니, 매우 전최를 엄중하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전최에서 하(下)에 있었던 자는 비록 사전(赦典)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2년이 경과한 후에야 서용하는 법에 의거하게 하고, 그 전에는 자목의 직임에 의망(擬望)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불법(不法)한 자를 징계하고 면려(勉勵)하는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을 봉사(奉祀)하는 사람은 충의위(忠義衛)를 승습(承襲)한 전례에 의거하여 군직(軍職)을 주어 관복을 갖추고 봉사하라는 일을 명하였다.
3월 5일 임자
안겸제(安兼濟)를 대사헌으로, 서유녕(徐有寧)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어서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임금이 말하기를,
"아! 저 중주(中州)에서는 모두 오랑캐의 침략을 받았으나, 한 구석 해동(海東)에서만 유독 건정지(乾淨地)059) 를 보전하였다."
하고, 승문원의 입직한 관원 허전(許晪)을 승륙(陞六)시키도록 명하였다. 허전은 곧 쌍령(雙嶺)에서 순절(殉節)한 신하 허완(許完)의 6대손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3월 6일 계축
임금이 숭정전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3월 7일 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방민(坊民)과 기로(耆老)를 불러 보아 균역청(均役廳)의 일에 대해 하순(下詢)하고,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집경당에 입시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물건이 똑같지 않은 것은 물건의 실정(實情)이다. 더욱이 이 물건은 때로 간혹 증감(增減)하기도 하는데, 형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지 어찌 역(役)을 고르게 한 후에야 이러한 고가(高價)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해마다 더하고 달마다 증가할 것이다. 저 물고기가 어찌 값을 지고 왔겠는가? 곧 해민(海民)이 마음대로 조종한 것이다. 만약 다시 이렇게 작용(作俑)060) 하는 자가 있음을 듣게 되면, 마땅히 한 사람을 징계하여 1백 사람을 면려(勉勵)할 것이니, 이로써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3월 8일 을묘
안겸제(安兼濟)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였다.
3월 10일 정사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방영(李邦榮)을 승지로 삼았다.
조완(趙)을 통제사로 삼았다.
3월 12일 기미
한광경(韓光綮)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또 각 창고의 관원을 불러 보았다.
3월 13일 경신
부사직(副司直) 안복준(安復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인은 그 백성을 사랑하기를 인자한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하여, 그 아들을 반드시 사랑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찌 인자한 아버지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조그만 어린 아이를 세력이 있고 방자한 비례(婢隷)에게 맡겨서, 추위와 더위를 헤아리지 않고 제멋대로 끌고 다닌다면, 아비가 가는 곳마다 가서 보호하지 못하여 아들이 병들게 되어 마침내 어떤 지경까지 이르지 않겠습니까? 성군(聖君)은 백성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니 한갓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을 가리지 못하여 정령(政令)의 사이에 만약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바가 없으면, 그 백성을 위하는 것이 마땅히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정사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살펴보아 출척(黜陟)하는 책임은 도신(道臣)에게 있는 것이니, 도신에게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사정(私情)을 따를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 책임은 오로지 군상(君上)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갓 백성을 사랑하는 것만 마음먹는 경우 그것은 또한 인자한 아비가 그 아들이 병든 것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삼가 듣건대, 재이(災異)를 당한 초기에 성심(聖心)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셔서 여러 번 철선(輟膳)하신 지나친 거조가 있기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말단이고 근본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어찌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입시하게 하였다.
호남(湖南) 어사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서계(書啓)로써 호서(湖西) 수령을 논핵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14일 신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경(上京)한 향민(鄕民)을 불러 보고, 보리 농사와 시가[市直]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또 입직한 금위군(禁衛軍)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달밤에 숙위군(宿衛軍)을 불러 본 것은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에 모년(暮年)에 불러 본 것이다. 오늘밤에는 마땅히 죽을 공궤(供饋)하겠다."
하였다. 또 기로 당상(耆老堂上) 안복준(安復駿)을 불러 보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 아들을 조용(調用)하게 하고, 지나가는 세 도(道)의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지공(支供)하게 하였다.
3월 15일 임술
김재순(金載順)을 경상 감사로 삼았는데, 영의정 신회(申晦)가 천거한 사람이다.
수찬 유항주(兪恒柱)에게 명하여 천안(天安)에 가서 이영국(李永國)의 산송(山訟)에 대한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집의 남강로(南絳老)가 아뢰기를,
"총재(冢宰)061) 의 직임(職任)은 인물을 권형(權衡)하여 백관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 그 직임을 돌아보건대, 중요하고도 존귀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조 판서 이담(李潭)은 타고난 천성이 음흉하고 행실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처음에는 언의(言議)를 힘써 닦는 것처럼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염우(廉隅)가 전도됩니다. 전후에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3년 동안 공평하다는 칭찬이 전연 없었으며, 다만 득실(得失)에 대한 근심에만 얽매였습니다. 이리저리 농단(壟斷)062) 하는 술책은 단지 달려가서 받들게 되며,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아첨하는 태도는 오로지 성총(聖聰)을 가리기만을 일삼았으며, 위권(威權)이 미치는 곳에는 온세상 사람을 속박·억제하였습니다. 혹시 대각(臺閣)에서 그 시비(是非)를 비평할 것을 염려하면, 배의(排擬)함이 지극히 교묘하여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삼았으니, 성식(聲息)을 먼저 탐지하고는 반드시 영격(迎擊)하는 버릇을 이루었습니다. 상류(上流)에 새로 차지한 정원(亭園)은 제도가 이미 극도로 굉장하고 화려하였는데도 오히려 토목 공사를 더하여 증수(增修)하였습니다. 그리고 뇌물의 문을 몰래 열어 놓고 한정 없는 욕심이 차지 않으면, 번원(燔院)063) 을 여러 가지로 핍박하였으며, 또 강호(江湖)의 이익을 모두 휘몰아 들였습니다. 반궁(泮宮)064) 의 시험을 주장(主掌)할 책임은 진실로 이와 같이 무식(無識)한 무리가 감당하여 받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종전의 문임(文任)으로 이 역(役)을 맡은 자는 비록 홍유(鴻儒)·거공(鉅公)일지라도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기고서 억지로 힘을 쓰게 하면 그제야 나아갔으니, 분의(分義)는 오히려 가볍고 염방(廉防)이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전의 삼일제(三日製)에서는 처음 패초(牌招)에 곧 응하였으니, 백년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사대부의 명절(名節)을 진실로 어찌 그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시례(詩禮)를 가르친 집안에서 이같이 패려(悖戾)하고도 염치없는 무리가 태어난 것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세도(世道)가 허물어지고 인심이 조경(躁競)하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사람이 오랫동안 전형(銓衡)을 맡고 있는 소치에 말미암았다고 생각합니다. 청컨대, 이조 판서 이담을 영구히 전장(銓長)과 문임(文任)의 망단(望單)에서 뽑아버려 관방(官方)065) 을 중하게 하고, 퇴폐한 풍속을 면려시키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듣고 보니 매우 해괴하다. 금방 하교하겠다."
하니, 남강로가 또 피혐(避嫌)하고, 담적(潭賊) 두 자로써 말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중한 총재(冢宰)를 어떻게 불분명한 처지에 두겠는가? 이것은 함문(緘問)066) 하는 것이 아닌데, 또한 어떻게 관리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마땅히 친히 추문하여 그 옥석(玉石)을 변별(卞別)하겠다. 이조 판서는 우선 본직(本職)을 체차(遞差)하고, 금추(禁推)하는 예로써 명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담(李潭)을 잡아들이게 하고, 남강로(南絳老)가 계론(啓論)한 가운데 나열한 것들을 하문(下問)하니, 이담이 일일이 스스로 변명하였다. 임금이 입시한 대신(臺臣) 강지환(姜趾煥)·채정하(蔡廷夏)·유운우(柳雲羽)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이담이 옳으면 이담이 옳다고 말하고, 남강로가 옳으면 남강로가 옳다고 말하라."
하니, 강지환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전지(銓地)에 있었으니 이로부터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채정하가 말하기를,
"신은 강지환의 뜻과 똑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채정하를 남해(南海)의 극변(極邊)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유운우가 말하기를,
"이담이 오랫동안 전조(銓曹)에 있었으니, 자연히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특별히 이담을 석방하게 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도록 명하자, 왕세손이 걸어서 나아가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 이방영(李邦榮)이 말하기를,
"사간 이적보(李迪輔)가 현도 봉장(縣道封章)067) 하였다가 전에 이미 해직(解職)되었으므로, 우선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었습니다."
하자, 가져와서 읽도록 명하였는데, 오로지 이담을 배척하여 일체 정후겸(鄭厚謙)의 지휘만 따른다고 말하였으므로, 읽기를 마치지 않았는데 그만두도록 명하고, 곧 육상궁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고, 백관은 모두 걸어서 따라갔다. 임금이 뜰 가운데에 엎드려 잇달아 중도(中道)에 지나친 전교를 내리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일시에 나아가 엎드려 환궁(還宮)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안에 백관들이 정청(庭請)068) 한 후에야 마땅히 환궁하겠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소리를 일제히 하여 말하기를,
"환궁하신 후에 마땅히 토죄(討罪)하기를 청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환궁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남강로·이적보를 절도(絶島)에 천극(栫棘)069) 시킬 것을 청하자,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문을 치면서 말하기를,
"속히 본부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남강로를 엄중히 형신(刑訊)해서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이적보는 물어 볼 만한 것이 없으니, 흑산도(黑山島)에 천극하고, 삼족(三族)을 서민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6일 계해
의금부(義禁府)에서 남강로(南絳老)를 추포(追捕)하여 옥에 가두자, 임금이 엄중히 두 차례 형신한 후 초공(草供)을 받아 아뢰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사(供辭)가 매우 효잡(淆雜)하니, 마땅히 친히 추문(推問)하겠다."
하고,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남강로(南絳老)를 잡아들여 형벌 7도(度)를 가하고, 겸하여 신문하는 장형(杖刑)을 시행하면서 이적보(李迪輔)와 부동(符同)하여 당류가 되었다고 문목(問目)을 만드니 남강로가 애초에 서로 아는 바가 없었다고 공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불충(不忠)·불효(不孝)로 지만(遲晩)070) 한다면, 단지 네 몸만 주살(誅殺)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삼족(三族)을 죽이는 형율(刑律)을 시행하겠다."
하니, 남강로가 지만하였다. 임금이 판의금 구선복(具善復)을 잡아들이게 하고, 재촉하여 소의문(昭義門) 밖에서 정법(正法)하게 하였다. 임희교(任希敎)·유운우(柳雲羽)가 합계(合啓)하여, 이적보를 잡아다 엄중히 국문(鞫問)해서 쾌히 왕법(王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강로가 이담(李潭)을 논척(論斥)한 것이 이적보(李迪輔)의 소장과 우연히 교묘하게 주합(湊合)하여, 뇌정(雷霆) 같은 노여움으로 마침내 중도에 지나친 잘못을 하였으나,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는 감히 신구(伸救)하지 못하였다.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한낱 탐욕스럽고 비루한 총재(冢宰)를 논핵하다가 마침내 몸과 목이 떨어지는 사형(死刑)을 당하게 되었으니 성명(聖明)의 허물을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적보를 유독 국문하지 않은 것은 성상의 뜻이 대개 그가 입을 벌리면 많은 사람들이 연루(連累)될 것을 염려한 것이니, 버려 두고 묻지 않은 데에서 포함(包涵)하는 임금의 덕을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4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90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070] 지만(遲晩) :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강로가 이담(李潭)을 논척(論斥)한 것이 이적보(李迪輔)의 소장과 우연히 교묘하게 주합(湊合)하여, 뇌정(雷霆) 같은 노여움으로 마침내 중도에 지나친 잘못을 하였으나,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는 감히 신구(伸救)하지 못하였다.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한낱 탐욕스럽고 비루한 총재(冢宰)를 논핵하다가 마침내 몸과 목이 떨어지는 사형(死刑)을 당하게 되었으니 성명(聖明)의 허물을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적보를 유독 국문하지 않은 것은 성상의 뜻이 대개 그가 입을 벌리면 많은 사람들이 연루(連累)될 것을 염려한 것이니, 버려 두고 묻지 않은 데에서 포함(包涵)하는 임금의 덕을 볼 수 있다."
3월 17일 갑자
안성빈(安聖彬)을 사간으로, 김치구(金致九)를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 밖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 절하고 호숭(呼崇)071) 하니, 대소 신료에게 글을 써서 보이도록 명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50년 동안 사업이 일컬을 만한 것이 전혀 없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고, 또한 무슨 마음으로 여러 대신(臺臣)들을 인견할 수가 있겠는가? 한구석 해동(海東)에서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는데, 뜻은 있어도 유시하지를 못하나, 어찌 의거할 임금이 없겠는가? 아! 옛날에는 내가 이 문에서 시립(侍立)하였는데, 지금은 어린 손자가 곁에서 시좌(侍坐)하고 있다. 계사년072) 을 돌이켜 생각하면, 오장(五臟)이 허물어지는 듯하다. 뜰에 들어온 대소 신료들은 한 마음으로 종국(宗國)을 위해 정성을 쏟는 것이 옳은가? 구당(舊黨)을 달갑게 여기는 것이 옳은가? 오로지 한결같이 새로워지기를 원하니, 이 유시를 폐기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8일 을축
김종정(金鍾正)을 병조 판서로, 조중회(趙重晦)를 이조 판서로 삼았는데, 모두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이어서 승문원에 나아가 우윤 홍재(洪梓)와 병조 참판 홍익필(洪益弼)에게 명하여 서로 교체하게 하였으니, 대개 홍익필이 음관(蔭官)이기 때문이었다.
3월 19일 병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충량과(忠良科)를 설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규섭(李奎燮)에게 급제를 내렸는데, 그때 나이 18세였다.
3월 20일 정묘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과 충신의 자손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3월 21일 무진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2일 경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인천(仁川)의 유학(幼學) 이한운(李漢運)이 상소하여, 환곡(還穀)을 헤아려 처리하는 일과 수군(水軍)의 부역이 거듭되는 고통 및 균역청에서 쌀을 무역하고 농우(農牛)를 함부로 도살하는 폐단에 대해 논하였다.
3월 23일 임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친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영구히 사모하는 마음이 들어 친히 향과 축문을 전한다[憶昔永慕親傳香祝]’ 8자를 쓰고, 영모당(永慕堂)에 현판(懸板)을 걸도록 명하였는데, 이튿날이 바로 인원 왕비(仁元王妃)의 기일(忌日)이기 때문이었다.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집에 면주(綿紬)·쌀·콩을 실어 보내도록 명하였다.
기로(耆老)의 사서인(士庶人) 가운데 나이 89세 된 사람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나누어 내려 주게 하였다.
승지 신익빈(申益彬)에게 현판(懸板)을 빨리 이루었다는 이유로써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3월 26일 계유
임금이 재계일(齋戒日)이란 이유로써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지 않았다. 내국(內局)과 여러 대신들이 입시하여 힘껏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앞으로 나아가 부축하여 일으킨 다음 탕제를 들어서 바치니, 임금이 억지로 진어하고, 마침내 시(詩) 1구를 짓고, 동궁(東宮)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고 또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하도록 명하였다.
3월 27일 갑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3월 28일 을해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 대궐 안의 각사(各司)의 입직한 낭관(郞官)들을 불러 보았다.
3월 30일 정축
김치양(金致讓)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외읍(外邑)에서 공무로 인하여 올라온 관리를 불러 보고, 황구 첨정(黃口簽丁)이 있고 없는 것과 우택(雨澤)과 농사 형편에 대해 하순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어산(魚産)의 귀함을 듣고, 비로소 균역청의 폐해가 있는지 의심하여 연석(筵席)에 나아가 여러번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명백하게 우러러 진달하지 못하였다. 통영(統營)에서 배를 점열(點閱)하는 것을 명하여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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