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기묘
임금이 전 판서 이담(李潭)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4월 2일 경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기구(耆耉)로서 89세 된 사람들을 불러 보고,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서 그 자손들이 부축하여 예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위해 일어나고, 각각 음식을 내려 주었다. 또 면주(綿紬)·쌀·콩·고기를 내려 주었는데, 대개 효사(孝思)의 추모(追慕)에서 나와 그들의 나이를 공경한 것이었다.
춘방 관원(春坊官員)을 불러 보고, 어제문(御製文)을 지어 내린 다음 서첩(書帖) 1건을 만들어 춘저(春邸)에 들이도록 명하였다.
4월 3일 신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상로(李商輅)를 승지로, 채홍리(蔡弘履)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판의금 박상덕(朴相德)을 곧 그 지역에 귀양살이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향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행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읽었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입니다. 전하께서는 명령을 시행하고 정사를 베푸실 때 매번 반드시 점검하시는데, 천지의 교화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으면 행하고 다르면 다시 생각하셔서 반드시 같아지기를 구하심으로써 하늘의 도리를 본받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은 본래 한 가지 이치인데, 어찌 고금(古今)의 다름이 있겠는가? 인재는 혹시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공부를 시작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곧 군자(君子)가 되는 것인데, 이는 다만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영경연(領經筵) 이하의 관원에게 각기 말을 내려 주고, 유신(儒臣) 이명빈(李命彬)·이동형(李東馨) 모두에게 자급(資級)을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4월 6일 갑신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의 진계(陳啓)로 인하여 박상덕(朴相德)을 귀양보내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박상덕이 이미 도성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명빈(李命彬)을 승지로 삼았다.
4월 7일 을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4월 8일 병술
이동형(李東馨)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반유(泮儒)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오랫동안 탕제(湯劑)에 시달려서 시골 사람 가운데 만약 탕제 3첩이 넘게 먹는 자가 있으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알아서 아뢰게 하였는데, 도승지 신익빈(申益彬)이 아뢰기를,
"무식한 상한(常漢)이 분수에 넘치게 바라는 마음으로 어지럽게 이르게 될 것이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가 〈왕명(王命)을 성실하게 출납(出納)하는〉 체모를 얻는 것을 칭찬하여 호피(虎皮)를 내려 주고, 전의 하교(下敎)를 특별히 환수(還收)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신회(申晦)가 제주 목사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청하기를,
"사노비(寺奴婢)의 공미(貢米)를 전부 견감한 후 허다한 공용(公用)은 진실로 변통하여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본주(本州)의 진휼청(賑恤廳) 곡모조(穀耗條) 가운데 절미(折米) 3백 석을 해마다 덜어 내어 세 고을에 나누어 주어 공용에 보태게 하고, 비역가(婢役價)는 매인(每人)마다 돈 1냥씩을 거두어 들여 부족한 수량을 채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불러 보고, 각각 표리(表裏) 1습(襲)씩을 내려 주었다. 이때에 임금이 몽사(夢事)로 인하여 경조(京兆)073) 로 하여금 나이를 속인 노인을 사핵(査覈)하게 하였는데, 경조에서 2인을 부첨(付籤)하여 들어와서 아뢰었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2인을 국문하고, 그들의 자급을 올려 준 것을 추삭(追削)하고 석방해 보내도록 명하였다.
4월 11일 기축
대사간 채홍리(蔡弘履)가 아뢰기를,
"신정기(申正起)·김천석(金闡碩)은 감히 요행을 바라고 그 나이를 속여서 늘렸으니, 청컨대, 형률에 의거하여 엄중히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국체(國體)에 관계되므로, 규정(規正)한 것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천지 사이에 다시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지금 비록 일률(一律)074) 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찌 감히 연하(輦下)에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나, 나이 80세가 된 사람에게 어떻게 장형(杖刑)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기전(畿甸)으로 하여금 도형(徒刑) 3년에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한성부의 관원에게 노인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이를 속인 것을 현고(現告)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그런일이 없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신정기(申正起)·김천석(金闡碩)을 흑산도(黑山島)에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4월 12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童蒙)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게 하고, 동몽에게 종이·붓·먹을 내려 주고, 교관에게는 각각 녹비(鹿皮)를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4월 14일 임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사서인(士庶人)의 노인을 불러 보고, 민막(民瘼)·시폐(時弊)에 대해 물었다. 또 균역(均役)의 이해(利害)와 탕제(湯劑)를 들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묻고, 각각 아는대로 우러러 대답하게 하였으며, 80세 이상된 사람에게 표리(表裏) 1습(襲)씩을 주게 하였다.
4월 15일 계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박도상(朴道翔)에게 말을 내려 주었다.
여러 종신(宗臣)들이 상소하여 칭경(稱慶)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다.
4월 16일 갑오
홍윤(洪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8일 병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서북(西北) 지방의 무사(武士)에게 시사(試射)를 행하고, 옥서(玉署)075) 에 두루 임어(臨御)하여 왕세손을 거느리고 《소학(小學)》을 강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각각 문의(文義)를 진술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이르기를,
"애연(藹然)076) 한 사단(四端)은 마음의 느낌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데 무엇으로써 이를 볼 수가 있느냐?"
하자,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가 마음의 느낌에 따라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느꼈다[感]는 한 글자가 뜻이 있다."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한 가지 단서로써 말하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측은(惻隱)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곧 인(仁)의 단서이니, 마음에 느낌에 따라 일어났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세 가지 느낌도 또한 서로 비슷한 점을 미루어 그 밖의 일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이 지극히 작은 일이지만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근본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쇄소하고 응대하는 것은 곧 최초의 공부입니다. 먼저 이것을 힘씀으로써 치국 평천하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큰 것에 이르는 것이며,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 후에 위로 천리(天理)에 도달하는 공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학(小學)》의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이미 이와 같으면, 사람들은 모두 성인(聖人)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삼대(三代)077) 에는 다시 성인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삼대(三代)이후로 《소학》의 가르침이 밝지 못하였으니, 성인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자(孔子)는 어찌하여 성인이 되었느냐?"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삼대(三代)이후 비록 공자가 있었다 하나, 공자의 성스러움은 곧 태어나면서 안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학》의 서문(序文)에는 회암(晦菴)078) 이라고 일컬었는데, 《대학(大學)》에는 신안 주모(新安朱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대학》은 바로 경전(經傳)이고, 《소학》은 주자(朱子)가 친히 스스로 편집하여 소자(小子)에게 주신 것이므로, 회암(晦菴)이라고 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학》은 사도(師道)로 자처(自處)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대학》과 《소학》은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소학》이 비록 《대학》의 근본이 된다 하나, 크고 작은 것으로써 말하면, 《소학》이 작은 것입니다."
하였다. 잇달아 《대학》을 강하고,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다시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남북의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에게 제술(製述)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주중순(朱重純)에게 자급을 올려 주었다.
4월 19일 정유
영의정 신회(申晦)와 영부사 김상복(金相福)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가, 이튿날 다시 정지하였는데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4월 20일 무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도기 유생(到記儒生)079) 에게 전강(殿講)을 행하고, 복태형(卜台衡) 등 2인에게 모두 급제를 내렸다.
옥당(玉堂) 배전 반수(陪箋班首) 홍상간(洪相簡)에게 특별히 자급을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4월 21일 기해
홍상간(洪相簡)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환후(患侯)가 있어서 약방에서 주원(廚院)에 직숙하였다. 임금이 의관(醫官)에게 이르기를,
"내가 기운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소학》의 ‘악정(樂正)은 사술(四術)을 숭상하였다080) .’는 한 장을 외었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오늘 전에 없던 큰 경사를 보았으니, 감히 산호 천세(山呼千歲)를 청합니다."
하고, 이내 산호 천세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82세는 바로 한(漢)나라·당(唐)나라 이후로 처음 있었는데, 오늘 이와 같은 일도 또한 한나라·당나라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을 불러 보고, 특별히 하의(賀儀)를 베풀도록 명하였으며, 오늘 대신을 보내어 종사(宗社)에 고유(告由)하게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다시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왕세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니, 왕세손에게 먼저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 여러 종신(宗臣)·의빈(儀賓), 문신으로 2품 이상과 무신으로 아장(亞將) 이상인자, 그리고 여러 승지들이 모두 술잔을 올렸다. 사문(赦文)을 반포하고, 예방 승지에게 자급을 올려 주었으며, 특별히 홍상성(洪相聖)을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고유제(告由祭)의 헌관(獻官)들에게 모두 말을 내려 주었다.
4월 24일 임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만약 억울함을 품은 사람이 있으면, 모두 불러들여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고 금오(金吾)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이지항(李址恒)을 특별히 신원(伸冤)하게 하였다.
4월 27일 을사
유수(柳綏) 형제에게 직첩(職牒)을 주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그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이었다.
4월 28일 병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6월 (0) | 2025.10.17 |
|---|---|
|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5월 (0) | 2025.10.17 |
|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3월 (0) | 2025.10.17 |
|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2월 (0) | 2025.10.17 |
| 영조실록124권, 영조 51년 1775년 1월 (0) | 2025.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