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5권, 영조 51년 1775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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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병오

임금이 황택인(黃宅仁) 때문에 몹시 노하여 대소 공사(公事)를 처리하지 않고 모두 승정원에 보류시켰다. 영의정 신회(申晦) 등이 2품관인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서 명을 거두어 들이도록 세 번이나 아뢰어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내리니, 신회 등이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였다.

 

박사해(朴師海)를 이조 참의로, 이계(李溎)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과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을 정승에서 면직시켰다.

 

승문원 관원을 모두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는데, 황택인(黃宅仁)을 준점(準點)하여 면신(免新)098)  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포도 대장(捕盜大將)과 형조 당상이 합좌(合坐)하여 황택인이 대관으로 있을 때에 문서를 다룬 서리(書吏)와 소장(疏章)을 올리기 하루 전에 시종인(侍從人)으로 찾아왔던 사람을 신문하여 진술을 받아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이 대개 당론(黨論)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염려하여 뒤에서 부추긴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영의정        신회(申晦)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는 고(故) 상신(相臣) 신만(申晩)의 아우이며 도위(都尉)            신광수(申光綏)의 숙부(叔父)로서, 임금의 인척임을 인연하여 대관(大官)에 갑자기 올라갔으며, 오로지 아첨을 일삼아 공(公)을 해치고 자기만을 이롭게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니, 사람마다 더럽다고 침뱉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정승에서 파직되자 여론(輿論)이 상쾌히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9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는 고(故) 상신(相臣) 신만(申晩)의 아우이며 도위(都尉)            신광수(申光綏)의 숙부(叔父)로서, 임금의 인척임을 인연하여 대관(大官)에 갑자기 올라갔으며, 오로지 아첨을 일삼아 공(公)을 해치고 자기만을 이롭게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니, 사람마다 더럽다고 침뱉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정승에서 파직되자 여론(輿論)이 상쾌히 여겼다."

 

7월 3일 무신

대사헌 이계(李溎)와 대사간 이세효(李世孝) 등이 황택인(黃宅仁)을 형벌에 따라 처단(處斷)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으나,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오면서 대신(臺臣)된 자가 일의 옳고 그름과 죄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오직 영합할 뿐이어서 갑자기 극률(極律)을 청하니, 대각(臺閣)의 기풍이 땅을 쓴 듯이 없어져 버렸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94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오면서 대신(臺臣)된 자가 일의 옳고 그름과 죄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오직 영합할 뿐이어서 갑자기 극률(極律)을 청하니, 대각(臺閣)의 기풍이 땅을 쓴 듯이 없어져 버렸다."

 

황근(黃瑾)을 추자도(楸子島)에 충군(充軍)시키고, 윤복후(尹復厚)를 대정현(大靜縣)에 보내어 서민(庶民)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황근은 곧 황택인의 당질(堂姪)인데, 포도청에 잡혀와서는 ‘4촌 매부(四寸妹夫) 윤복후가 소초(疏草)를 소매 속에다 가져와서 전해 주라고 하였기 때문에 제가 과연 황택인에게 전해 주었다’고 진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7월 7일 임자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한익모(韓翼謨)를 영의정으로, 홍인한(洪麟漢)을 좌의정으로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7월 8일 계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유신(儒臣)이 선유(宣諭)를 읽었다. 대사헌 이계(李溎) 등이 아뢰기를,
"오늘 통유(洞諭)한 뒤로는 오직 신기(神氣)를 화평하게 가지고 절후에 따라 건강을 돌보시는 방도를 다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9일 갑인

채홍리(蔡弘履)를 승지로 삼고, 응교 박상갑(朴相甲)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유의양(柳義養)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은 편안한 것만을 좋아하며 세월을 보내는 데에 있습니다. 각사(各司)에서 묘시(卯時)에 출근하였다가 유시(酉時)에 퇴근함에 있어서는 다만 구채(丘債)099)  의 많고 적음만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낮잠이나 한참 자고는 끝나는 데 지나지 않는가 하면 비국(備局)에서는 날마다 모여서 군국 기무(軍國機務)에 대한 것은 듣지 않고 오직 담배[煙茶]나 몇 대씩 피우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조참(朝參)하는 뜰에서 국사를 아뢰는 자가 어떤 사람이며, 차대(次對)100)  하는 자리에서 잘못을 고친 것이 어떤 일입니까? 나라의 계획과 백성의 근심을 크게 쇄신(刷新)시킬 기약이 없습니다. 문신이나 무신은 직무를 게을리하고 대·소 관원은 세월만 보내어 국사를 담당할 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상으로 하여금 마음을 근심스럽고 괴롭게 하여 소간(宵旰)101)  에 한갓 수고로움만 있을 뿐, 실제의 혜택을 어디에서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신(臣)은 생각하건대, 백관을 독려하여 인습(因習)의 폐단을 빨리 버리게 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깊이 반성하여 신칙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때 대관(大官) 이하 모든 집사들이 모두 맡은 바 제 구실을 못하고 구차스럽게 자리만 채우며 시임·원임 대신들은 종일 동안 등대하여서 건공탕(建功湯)을 칭송하고 성덕(聖德)을 찬양할 뿐이었다. 한 달에 여섯 번 차대하는 허다한 비국 당상들은 문밖에 섞여 앉아 사사로이 서로 한담이나 하다가 퇴근할 때쯤 되면 서로 돌아보며 웃기만 하니,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임금이 예문관(藝文館)에 임어하여 한림(翰林)에게 사고(史庫)에 소장한 인종(仁宗)의 지장(誌狀)을 받들어 내오라고 명하고, 도승지를 시켜 읽어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갑자기 효릉(孝陵)102)  을 추모하게 되었기 때문에 지장을 받들어 읽게 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기민(耆民)103)  을 불러들이니, 기민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천세를 부르고 모두들 임금이 탕제(湯劑) 드는 것을 우러러 보기를 원한다고 하니, 임금이 탕제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 10일 을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어서 각사(各司)의 구임 낭관(久任郞官)을 불러 보았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묘당(廟堂)의 신하들은 인자하고 너그러움이 까닭 없이 너무 지나쳐서 지방의 병사(兵使)나 고을의 수령들이 만일 공무를 빙자하여 얻기를 청하는 것이 있으면 품재(稟裁)를 한번 거치고는 쉽사리 허락하여 주니, 이는 혹시 서로 도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겠지마는 국가 재정(財政)의 애통한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에 신칙하시어 흉년에 진휼(賑恤)하는 일이 아니면 일체 베풀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달해(李達海)와 통제사(統制使) 조완(趙)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개 전 통제사 구현겸(具顯謙)은 신회(申晦)에게 핍박을 당하여 체직되었고, 전 강계 부사 최태형(崔台衡)은 새로 제수되어 부임하였는데 신회가 또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체직키고 무신(武臣)을 차송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심정이 모두 불쾌히 여긴다고 이계가 이를 논하였기 때문이었다. 집의 유의양(柳義養)이 신하들의 사치한 풍조를 논하고 더욱 특별히 신칙을 더하여 구습(舊習)을 엄격히 물리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7월 12일 무오

조준(趙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왕세손이 상소하여 청하(請賀)하였는데,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건공탕(建功湯)의 귀중한 약제는 날마다 그 신기스러운 효험을 발휘하여 성체(聖體)가 더욱 다시 강녕하여져서 천안(天顔)이 옛날보다 나으시고 총명이 더욱 새로워지시니, 이는 진실로 억만년 동안의 한없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리고 건공탕이 참으로 우리 전하에게 효과가 있음을 더욱 증거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하루에 세 첩(貼)을 드시지 않고, 기준을 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지금 돌아보건대, 나라의 경사가 전에 없이 일어나고 큰 복이 더욱 불어나니, 어느 날이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며 어떤 일이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어제 내려 주신 14자(字)의 신한(宸翰)104)  은 해와 별이 밝게 비치며 돌고, 점획(點畵)에 조금의 틀림도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만 가지 기무(機務)가 정체되지 않는 것은 이미 옥후(玉候)의 강복(康復)하심을 앙대하기 때문인데, 신(臣)의 생각으로는 바로 이 한가지 일이 곧 건공탕의 공효이니, 있지 아니한 곳이 없을 정도로 큽니다. 성상의 하교는 비록 탕제를 멈추는 것으로 치하할 만하다고 하시나, 성상의 하교 중에 기운이 나아지고 편안히 주무신다고 하는 것은 모두 그 탕제를 드신 공효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축하는 탕제를 드시는 것을 축하해야 옳겠습니다. 어찌 탕제를 멈추는 것을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어필(御筆)이 한번 내려진 것은 곧 성명(成命)과 같습니다. 동엽(桐葉)105)  에 관한 하교를 또한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소자(小子)의 정성이나 장수(長壽)를 축수하는 데 있어서 어찌 다른 신하들에게 뒤지겠습니까? 어제 미처 진청(陳請)하지 못한 것은 대신(大臣)들의 연주(筵奏)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밤을 새우며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아도 아직까지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혼자 생각으로 이것을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에 부득불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무릅쓰고 아뢰어 인자하심으로 덮어 주시는 자리를 우러러 더럽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사에게 명하시어 곧바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탕제의 공효를 널리 펼치고 건강을 회복하신 경사를 빛내게 하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신은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삼가 절하고 상소로써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도승지를 시켜 전유(傳諭)케 하였다. 그날로 왕세손은 2품(品)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집경당(集慶堂)에서 진하(陳賀)하였다.

 

공시인(貢市人)106)  의 그전부터 남아 있는 부채는 탕감시키고 사서인(士庶人)으로 80세가 된 사람은 특별히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4일 기미

임금이 숭정전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태학(太學)의 제술(製述) 시험을 보여 경향(京鄕)의 두 사람을 뽑았는데, 정문계(鄭文啓)와 백사은(白師殷)에게 급제를 내려 주었다.

 

7월 15일 경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7월 19일 갑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관서 지방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영남 지방도 그러하였는데 안동(安東)이 더욱 심하였다. 임금이 3일 동안 감선(減膳)을 명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은전을 베풀라고 신칙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여제(癘祭)를 설행하기를 청하였는데, 당시 서울과 지방에서 홍진(紅疹)이 치성(熾盛)하여서 요사(夭死)하는 우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날 밤에 임금에게 담증(痰症)의 기미가 있어 약방의 세 제조가 입시하였는데, 곧 회복되었다.

 

7월 21일 병인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입시하여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하고, 탕제를 자리에다가 쏟은 뒤에, 이어서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대신들이 모두 나와서 대명(待命)하였는데,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합문(閤門)에 나아가 구대(求對)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합문에 나아가 구대하니 임금이 드러내 놓고 진연을 청한다는 이유로 엄한 하교를 내려, 대신들이 나와서 대명하였다.

 

7월 22일 정묘

시임 대신·원임 대신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약방에서 네 번이나 계사(啓辭)를 올려 구대(求對)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금년 봄부터 임금은 탕제가 너무 쓰다고 하여 매번 정오가 지나도록 들지 않았다. 그러면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그때마다 다함께 구대하고 앙청(仰請)하면 임금은 비로소 진어(進御)하게 되었다. 만일 엄한 전교가 있으면 도제조가 대명하기를 간혹 매일같이 하였다. 진연을 청하는 것에 대하여 윤허하지 않은 것은 역시 성덕(聖德)이라고 할 만한데, 대신(大臣)들이 그 청을 꼭 얻어내려고 하다가 마침내는 몹시 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어 대신들이 하루에 두 번씩이나 대명하게 되었다. 이 역시 국가의 체통을 존중하는 도리가 아니다.

 

7월 23일 무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계(李溎)에게 일러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 전에 통수(統帥)를 핍박하여 교체시킨 일을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계가 말하기를,
"그때 묘당(廟堂)에서 용의(用意)한 흔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앞서 통수를 체직시킨 것은 역시 속여서 부임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아뢰었던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곧은 기풍이 이와 같으니, 나라가 잘 되겠구나!"
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가 한재(旱災)에 대하여 장문(狀聞)하였기 때문에 3일 동안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감선하는 일은 사체가 중한 일인데 이미 3일 동안 감선하고 지금 또 감선하라고 하교하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명령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기사

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5일 경오

임금이 홍문관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고, 강관(講官)들이 모두 사배(四拜)하였다. 임금이 《대학》의 경일장(經一章)과 보망장(補亡章)을 강(講)하게 하여 모두 독송이 끝나자 각각 글뜻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거의가 내용이 천박하였으며 수찬 정일겸(鄭日謙)이 아뢴 내용도 역시 모호하였다. 임금이 부지런히 힘쓸 것을 특별히 당부하였으며, 하교하여 포장(褒奬)할 것을 하교하고 가자(加資)를 특별히 명하였다. 이어서 왕세손에게 명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게 하였는데, 왕세손이 강을 마치자 임금이 묻기를,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되어 백성이 없으면 나라를 튼튼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은혜는 골수에 스며들고 사랑은 폐부(肺腑)에 맺혀진다.’라고 하였는데, 누가 그렇게 만든다는 뜻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능히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백성이 모두 이렇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높은 데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리 된다는 말인가?"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생각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자연히 이와 같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에 명하여 다 읽게 한 뒤에 ‘조손 회강(祖孫會講)’이라는 글씨를 몸소 써서 옥당(玉堂)에 걸게 하였다. 그리고 강연(講筵)에 참석한 여러 신하와 당상관인 시위(侍衛)에게는 모두 말[馬]을 내려 주었다. 옥당 한정유(韓鼎𥙿)와 이면수(李勉修)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춘방의 상하번(上下番)에게는 모두 승서(陞敍)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대학》 가운데 ‘재용을 절약한다[節財用].’는 것과 《성학집요》 가운데 ‘자기에게 이롭고자 하면 반드시 남에게 해로울 것이다[欲利於己 必害於人].’라는 두 가지 조목을 가지고 경계할 점을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가상히 여기어 구마(廐馬) 한 필을 하사하고 뜰앞에 나가 직접 받도록 하였다. 드디어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특별히 맥병(麥餠)을 내어오도록 명하여 진솔(眞率)함을 표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고 천세를 부르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렸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잔을 올리니, 임금이 술잔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여기서 술을 따른 뒤에 돌아가서 경의 형에게도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음식물을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명하여 풍악이 울리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였다. 행차가 돌아올 때에 5부(五部)의 백성들을 금상문(金商門) 밖에서 불러 보고 민폐(民弊)를 물었다.

 

약방에서 입진하였을 때에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황택인(黃宅仁)이 비록 애처로울 것은 없지마는 이와 같이 할 것까지야 없는데, 포도청(捕盜廳)에 내려 보내신 성교(聖敎)는 사체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과연 후회한다."
하였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그의 조카는 비록 말할 것이 못되더라도, 명색이 유자(儒者)인데 주리[周牢] 트는 형벌을 쓴 것은 참으로 지나칩니다. 일찍이 악형(惡刑)은 없애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후회하고 있으니, 경이 아뢰는 말을 귀하게 여기어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말하기를,
"근래 처분을 하실 때에 삼족을 멸하라는 하교가 계셨는데, 이 법은 우리 나라에 없는 것입니다. 재삼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옳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있었던 일은 내가 스스로 후회하고 있는데, 보상(輔相)107)  도 권유하고, 호조 판서도 이것 때문에 생각한 것을 말하였는데, 이 법은 우리 나라에 없던 것으로 내 비록 분한 마음 때문에 그러하였지마는 내가 벌써 뉘우치고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아뢰지 않았다면 이런 법이 다시 생겨날 터이니, 그러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대신(大臣)은 체통이 중하니 비록 상은 주지 못하지만, 중신(重臣)에게는 특별히 표피(豹皮)를 하사하게 하되 그들로 하여금 승정원(承政院)에서 직접 받아서 교자에 걸고 돌아가게 하라. 황택인의 행위는 비록 무상(無狀)하지마는 방목(榜目)에서 빼내게 되면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될 것이니, 그날의 하교를 효주(爻周)108)  하고 후손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이 일로 인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현필(李顯弼)이 한 일도 비록 무상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처분도 과연 황택인과 같이 하였으니, 역시 효주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6일 신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경연(經筵)의 여러 신하로부터 사전(謝箋)을 친히 받고, 이어서 《소학》을 강하고 또 동생행(董生行)109)  을 강하였다. 수찬 정일상(鄭日祥)을 준직(準職)에 조용하고 정일겸(鄭一謙)을 승지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28일 계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음식을 하사하였다. 왕세손이 시좌하였는데,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9경(九卿)들이 사배하고 시립(侍立)하니, 임금이 팥죽을 차려오라 명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고 천세를 부르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도 차례대로 잔을 올렸다. 임금이 가장(歌章)을 지어 내려 주면서 악공(樂工)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연주하게 하였다. 입시한 대신(大臣)에게는 구마(廐馬)를, 중신(重臣)에게는 숙마(熟馬)를 면대(面對)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들에게 실솔장(蟋蟀章)110)  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친히 그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유신들에게 계속 읽도록 명하였는데, 너무 편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한정유(韓鼎𥙿)를 승지로 삼았다.

 

7월 29일 갑술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음식을 들었다. 왕세손이 봉조하(奉朝賀) 이하를 거느리고 사배(四拜)하였다. 임금이 먼저 천세를 부르도록 명하니, 왕세손이 천세를 부르고 다시 사배하였다. 임금이 어제 지어 내려보낸 가장(歌章)의 선창(先唱)을 명하고 악공이 연주하게 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서 진찬(進饌)하였는데, 임금이 이익정(李益炡)·이정철(李廷喆)·안윤행(安允行)·심성진(沈星鎭) 등에게 각각 대무(對舞)하도록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중추부(中樞府)·주원(廚院)111)  에서도 또한 진찬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고 봉조하 이하도 술잔을 올렸다. 임금이 영의정 한익모(韓翼謨) 부자(父子)에게 대무를 명하고, 또 판서 조영진(趙榮進) 부자에게 대무를 명하였다. 그리고 또 조창규(趙昌逵)와 김사목(金思穆)에게 대무를 명하였다. 임금이 서유린(徐有隣)에게 술을 내려 주면서 이르기를,
"이 술잔을 그대의 할아비에게 드려라."
하였는데, 서유린은 곧 서명구(徐命九)의 손자였다. 또 92세의 노인을 불러 보고, 광성(光城)·여양(驪陽)·경은(慶恩)·달성(達城)·오흥(鰲興)의 국구(國舅) 집에 음식 한 쟁반과 술 한 병씩을 보내 주라고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한익모는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소매를 추켜들고 악공들의 사이에서 춤을 추었으며, 또한 부자(父子)간에는 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경솔하게 일어나서 춤을 추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9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註 111] 주원(廚院) : 사옹원.
사신(史臣)은 말한다. "한익모는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소매를 추켜들고 악공들의 사이에서 춤을 추었으며, 또한 부자(父子)간에는 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경솔하게 일어나서 춤을 추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비웃었다."

 

기로소(耆老所)의 당상으로 자궁(資窮)112)  된 사람에게는 숙마(熟馬)를 면대하여 주고, 자궁이 안 된 사람에게는 가자(加資)하며, 낭청(郞廳)은 승서(陞敍)하고, 3처(處) 하인(下人)과 악공(樂工)들에게는 모두 미포(米布)를 내려 주며, 입직 금군(入直禁軍)과 호위 군관(扈衛軍官)에게는 모두 말을 주고 입직 군병을 중일제(中日製)113)  로 시취(試取)하도록 명하였다. 야금(夜禁)을 완화하여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이도록 명하였다.

 

7월 30일 을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금어(禁御)114)  의 상번군(上番軍)이 홍진(紅疹)에 걸린 사람이 많아서 사망하는 자가 없지 않다고 아뢰니, 임금이 번(番)드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사복시(司僕寺) 도제조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기를,
"초도(椒島)에서 기르는 말 3백 21필 가운데 지금 2백 53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잃어버린 수만큼 목자(牧子)로 하여금 사다가 보충시켜 놓으라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집의 유의양(柳義養)이 아뢰기를,
"옛날 선조조(宣祖朝)을미년115)  에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조서를 본조(本朝)에 보내어 민충단(愍忠壇)116)  을 설치하게 하고 예부(禮部)에 은(銀)을 내려서 제수(祭需)를 준비하게 하여 임진년117)  ·계사년118)   양년에 명나라 군사가 희생된 여러 곳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지금 을미년을 맞이해서 신종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명나라 군사가 희생된 곳에 단을 만들어 치제(致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119)  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덕유당(德游堂)에 들려서 창의궁(彰義宮)과 어의궁(於義宮)·경운궁(慶雲宮)이 있는 3동(洞)의 기민(耆民)들을 소견하여 음식을 내려 주고 가자(加資)하였다. 총관 심익성(沈益聖)을 가자하고 술을 하사하였으며 지중추(知中樞)에 부직(付職)하여 영수궁(靈壽宮)120)  에 가서 사례하도록 명하였는데, 심익성은 지금 나이 80세가 되었는데도 자급(資級)이 높지 않아 기사(耆社)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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