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병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임성(任珹)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았다. 왕세손이 대향(大享)을 지낼 때 어가를 따른 사람과 제관(祭官)에게는 모두 말을 내려 주며, 예모관(禮貌官)149) 이보행(李普行)에게는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일 정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150) 를 설행하였다.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무신년151) 공신의 자손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집경당에 돌아와서 서울 사람으로 수석을 차지한 임석철(林錫喆)과 시골 사람으로 수석을 차지한 강휘옥(姜彙鈺)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9월 3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 동월대에 나아가 문과의 전시(殿試)152) 를 설행하였다.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무과의 전시를 설행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승지로 삼았다.
9월 4일 기유
약방에서 입진하였을 때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비국 당상 중에 홍지해(洪趾海) 같은 사람은 신신(藎臣)153) 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중망(重望)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망이야 대신(大臣)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지 않는가?"
하였다. 조금 있다가 홍인한이 또 아뢰기를,
"정승의 자리를 갖추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임금이 세상에 정승(政丞)을 청(請)하는 일도 있느냐는 하교가 있었다.
장령 윤밀(尹謐)이 상소하여 논핵하기를,
"남포 현감(藍浦縣監) 김기정(金基正)은 콩을 꾸어주고 보리로 환자를 받는데 많은 의심과 비방을 받았고, 첨액(簽額)154) 과 청송(聽訟)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전광열(田光說)이 아전의 직임(職任)을 올리고 내릴 적에 사랑하는 여종[幸婢]이 권력을 부렸고, 백성의 소송을 출납할 적에는 교활한 종들이 뇌물만 찾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진용(趙鎭容)을 승지로 삼았다.
여러 대신(大臣)이 임금의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를 앙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여러 재신(宰臣)들을 이끌고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구주(口奏)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관(冠)을 벗고 왕세손이 부축하여 일으켜 내전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보(元輔)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나의 뜻을 체득(體得)하지 못하느냐?"
하니, 여러 대신들이 대궐 밖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유시를 내려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축하해야 할 것은 경사입니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칭송하고 축하해야 하는 것은, 나라의 경사가 되는 소이(所以)가 지치(至治)의 좋은 향기와 백성의 안락보다 더 나은 것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늘로부터 복록(福祿)을 받아 성체(聖體)가 강녕하고 성수(聖壽)가 장구하시어 천추절(千秋節)이 장차 82번째의 갑자(甲子)155) 를 맞이하게 되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천지가 생겨난 지가 비록 오래 되었으나 왕위에 있으면서 장수를 누린 분은 신이 생각하기에 우리 성상 한 분 뿐입니다. 이것은 신의 지나친 말이 아니고, 역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나라의 경사가 어찌 다시 오늘날과 같은 때가 있었습니까? 비록 매일같이 칭하(稱賀)하여도 오늘날 우리 나라가 당면한 경사의 만분의 일도 감당하지 못할 것인데, 탄신(誕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응당 행하여야 할 예절을 오히려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어 예절에 부족함이 있으니, 소자(小子)의 억울하고 한맺힌 정성을 돌아보건대, 진실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며칠 동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있다가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감히 단소(短疏)로 진청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허락하시는 말씀을 내리시어 온 나라가 함께 경축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을 풀게 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으며 신의 간절히 비는 마음 지극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펴보았는데, 이 무슨 뜻이냐? 아!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였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개유(開諭)하였느냐? 진하하려는 청을 백 사람이 비록 시끄럽게 하더라도 내가 믿는 것은 너뿐이다. 아! 경봉각이 앞에 있어 황령(皇靈)이 밝게 비치고 척강(陟降)이 양양(洋洋)하여 아마도 마음을 비추실 것이니, 지금 어찌 많은 말로 하유하겠는가? 내 손자는 이것을 헤아려라."
하고, 유지(諭旨)를 전하도록 도승지에게 명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다시 계품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左相)을 해면(解免)하라."
하고, 이어 구저(舊邸)로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9월 5일 경술
인양군(仁陽君) 이경호(李景祜) 등과 이조 참의 조준(趙㻐)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먼저 회가(回駕)를 명하고 이어서 하례를 윤허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약방·승정원·옥당에서 모두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영에 나아가 병조 판서와 여러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군례(軍禮)를 행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뜰에 내려가 관을 벗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관을 벗었다. 왕세손이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신이 나라 안 온 백성의 정성으로 외람되이 소청(疏請)하였고, 천청(天聽)이 이미 가까워서는 면주(面奏)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시는 말씀을 또 아끼시니, 신은 이에 있어서 가슴이 막히고 마음이 초조하며, 다만 정성이 천박함으로 위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아! 지금 소자가 번독(煩瀆)함을 피하지 않고 청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감히 그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전후(前後)에 내리신 8자의 성교(聖敎)는 신이 매양 들을 때마다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진실로 감히 말을 다하여 우리 성상의 마음을 걱정되게 하지 못하지만, 엎드려 생각건대, 자애롭게 덮어주시는 하늘 같은 성상께서 아마도 굽어살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수(聖壽)를 이토록 오래 누리심이 얼마나 드문 일이며 소자가 기쁘게 축하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 또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나라의 경사가 연달아 겹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소자의 즐거움인들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천추절(千秋節)을 당하여 만년의 축수를 드리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소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정성이 간절하고 지극할 뿐만 아니라, 소소(昭昭)하게 밝으신 조상의 영령이 양양(洋洋)하게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또한 어찌 오늘을 기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불궤(不匱)156) 의 효심으로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전에는 간혹 월초(月初)에 앞당겨 거행하기도 하였고 혹은 보름께로 물려 거행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아래의 충정(衷情)을 따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전하께서는 유독 오늘에 와서 이와 같이도 허락을 아끼시는 것입니까? 높으신 위엄을 여러 번 번거롭게 하는 것이 외람된 줄을 매우 잘 알고 있으나, 말을 함부로 올리게 되어 황송하고 황송합니다. 신이 바야흐로 상소문을 정리하여 막 올리려고 할 즈음에 삼가 행차를 옮기신다는 명을 듣고 어가의 뒤를 따라 나왔는데, 지금 벌써 하룻밤이 지났으니, 초조한 마음 갑절이나 간절하여 외람됨을 무릅쓰고 구계(口啓)하는 것입니다. 신의 심정이 여기에 이르니, 진실로 또한 괴롭습니다. 곧바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빨리 경축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하여 주시기를 천만 축원하오며,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구전(口傳)으로 답하기를,
"만일 당일(當日)에 거행하는 것만을 청한다면 어찌 윤허할 수 있겠는가마는, 세손이 짐짓 이와 같이 전후(前後)로 날짜를 잡자고 청하니 어찌 따르지 않겠느냐? 여기는 그런 일을 할 곳이 아니다. 마땅히 편전(便殿)으로 돌아가 세손과 대신(大臣) 및 예관(禮官)들과 더불어 택일(擇日)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도승지는 이러한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 감사 윤시동(尹蓍東)을 가자(加資)하고 영상과 좌상에게 내린 하교는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연화문(延和門)으로 돌아와서 양주(楊州)·고양(高陽)·광주(廣州)의 백성들을 불러 보고 농사의 형편을 하순(下詢)하였다. 양주와 고양은 금년의 전조(田租)를 특별히 감하고 여러 읍(邑)은 반감(半減)하며 광주·여주(驪州)·개성부(開城府)는 반을 감한 외에 또 2푼[分]을 더 감하라고 명하였다.
9월 6일 신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다. 지나는 길에 의열궁(義烈宮)에 들렀는데, 임금이 문앞에서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불러 묻기를,
"내가 육상궁에서 하례를 받았으므로 유생들이 마음에 불만이 있을 것이나, 전문(箋文)을 올리지 않는 것은 나를 모욕함이다."
하고, 장의를 절도(絶島)에 보내어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구저(舊邸)에 나아갔는데,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는 실상을 아뢰니 임금이 얼마 있다가 회가(回駕)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입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구차스럽게 하례를 받다가 유생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불효(不孝)함을 깊이 한탄한다."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아뢰기를,
"전문(箋文) 읽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신 하교를 전문을 올리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신 것으로 잘못 알고, 다만 전문을 아직까지도 궐하(闕下)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전문을〉 가지고 들어와서 읽어 아뢰게 하고 한림(翰林)을 시켜 사관(史館)에 보관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세 번이나 계달(啓達)한 것이 권귀(權貴)들에게 저촉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또한 앞뒤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은 어찌 그 원인이 딴 데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내용들은 대신(大臣)이 한 일 중에 아주 보잘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 대신들은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어 집안이 번창하고 빛났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성상께서 대신을 돌보심이 어떠하였으며, 대신은 중임(重任)을 맡은 것이 또한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전하의 보주(寶籌)가 엄연히 9질(九耋)에 오르시었으며 성상의 기후도 늘 조용히 조섭하셔야 되는 상태에 있는데도 몸소 서정(庶政)을 돌보시어 병침(丙枕)157) 에도 잠잠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원보(元輔)의 큰 책무를 모두 대신에게 맡기었으니, 그렇다면 대신된 자가 처신하는 의리는 진실로 나라를 걱정하고 가정을 잊어야 하며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뒤로 미루어야 할 터인데, 지난 수년 동안 대신의 업적을 논한다면 재물과 이권을 받아들이는 문을 크게 열어 놓고 나라의 저축을 탕진하도록 하며, 벼슬을 추천하는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앉아서 그의 기세만 불꽃처럼 펼치면서, 그가 말하고 웃는 모습은 모두 윗사람을 가리고 아랫사람을 막는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좌우 상하를 부앙 고첨(俯仰顧瞻)하면서 오로지 직책을 잃어버리고 권력을 빼앗기는 것만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군부(君父)에 대하여서는 털끝만큼도 성실한 뜻이 없고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성취시키는 데에는 과감한 용기를 충분히 발휘하니, 이러한 모습이 조정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가릴 수 없고 먼 시골구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함께 비방합니다. 우리 성상의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으로 비록 그 한두 가지는 살펴보셨겠지마는, 구중 궁궐이 깊고도 먼데 또한 어찌 그 정상을 전부야 알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올린 첫 번째 상소와 두 번째 차자(箚子)를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신을 헐뜯고 신을 의심한 것이 대부분 뜻밖에서 나왔습니다. 또 신이 올린 계주(啓奏)와 상소(上疏)를 가지고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비방하고 배척하기를 자못 심각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의논 드린 바가 비록 자세하지는 못하나 그냥 얼버무린 것과는 다른데, 대신은 오히려 분명하지 않다고 하니, 이는 곧 신으로 하여금 반드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이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모두 ‘직(直)’ 자 한 글자로 아뢰는 것이 옳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이에 역시 반성하고 두려워함이 있었으니, 어찌 앞서 한 말을 거듭 아뢰어 그 실상을 다 나타내지 않겠습니까?
당초 강계(江界)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 대신이 무신(武臣) 이달해(李達海)를 이조 판서 이담(李潭)에게 추천하였는데, 문무(文武)의 차례를 바꿀 수가 없다고 하여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전 승지(承旨) 최태형(崔台衡)이 수의(首擬)로 낙점을 받았습니다. 대신의 유감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최태형이 장전(帳前)에 나와 사조(辭朝)하고 밀부(密符)158) 를 받게 되자,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대신이 뒤따라 들어와 체직시키기를 아뢰고 이어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무과(武窠)를 만들어 줄 것을 청하자, 성상께서는 이조 판서를 입시하라고 명하고 무신 중에 누가 좋으냐고 하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담이 입시한 사람 가운데도 역시 합당한 자가 있다고 앙대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조 판서의 부탁한 바를 살펴보시고 입시한 승지 이득제(李得濟)를 지명(指名)하여 하교하고 곧 개정(開政)159) 하여 첫 번째로 의망(擬望)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득제가 낙점을 받은 뒤 병 때문에 정체(呈遞)160) 하니, 대신이 마침내 이달해를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차견(差遣)하였습니다. 지금 대신의 상소 중에 이른바 ‘임금의 하순(下詢)하심으로 인하여 일찍이 병곤(兵閫)을 역임한 이득제·이달해 두 사람을 앙달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은 그가 속마음에 둔 것이 전적으로 이달해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득제 같은 이를 천거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대신의 말이 어찌 임금에게 그 실상을 고하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대신의 말과 같이 최태형이 변수(邊守)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논이 공식 석상에서 나왔다면, 진달(陳達)하여 개체(改遞)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문관이 당차(當次)하는 자리이니 문관 중에 가려서 임명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반드시 최초에 뜻을 두었던 무신으로 차례를 바꾸어 차견한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공(公)을 위한 것입니까 사(私)를 위한 것입니까?
일을 처리함에 공평함을 잃음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이길래 심지어 구현겸(具顯謙)을 핍박하여 체직(遞職)한 일에 대해서도 대신은 구현겸이 당한 불행을 이용하여 다만 이것저것 주워 모아 억지로 들추어낸 허물로써 신을 죄인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입니까? 고 중신(重臣) 구선행(具善行)은 실제로 병이 있었으나, 이는 여러 해 동안 고질이 된 증세로 단시일에 변을 당할 만한 급한 병은 아니었습니다. 대신이 아무리 지나치게 자비(慈悲)스럽더라도 어찌 그의 불행을 미리 알아채고서 새해 초부터 그의 아들을 체귀(遞歸)하라고 여러 번 독촉하겠습니까? 진실로 성상께서 효도로 세상을 다스리는 교화를 본받기 위하여 남의 자식된 자의 정을 간곡하게 이루어 주려고 하였다면, 한마디 말로써 〈성상께〉 진백(陳白)하면 곧 체직이 윤허될 수 있을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그집 사람을 불러다가 사체(辭遞)하기를 독촉하게 하고, 그들이 왕복하는 데 지체될 것을 염려하여 경중(京中)으로부터 서면으로 손장(巽狀)161) 을 올리게까지 하면서 이렇게 구차하게 얼버무려서 황망하고 급박하게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또 이르기를, ‘구현겸의 아비가 그 자식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는 말을 신에게 보내 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의 말대로라면 그 사람의 소원을 알뜰히 들어준 것이니, 그 아버지의 처지로서는 마땅히 감사하여야 할 것이고 마땅히 성을 내서는 아니될 것인데, 구현겸이 체직된 뒤에 그의 아비인 중신 구선행은 몹시 불평하기를, ‘내 자식이 만일 중임(重任)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대신이 진백(陳白)하여 개체(改遞)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 바가 있기에 다만 까닭없이 핍박하여 체직시켰으니, 어찌 이러한 조정의 체통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벼슬길에 뜻을 끊도록 하고, 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집을 팔아 동촌(東村)의 구석진 곳으로 이사를 하여 세상을 멀리할 뜻을 보였습니다. 만일 중신(重臣)이 기왕에 허체(許遞)하기를 바랬으면서도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진 데 대하여 성을 내었다면, 이는 상정(常情)에서 나올 바가 아닙니다. 대신이 운운한 바가 비록 자기를 변명하기에 아무리 급했어도 마침내 신의 의혹을 풀지는 못하였습니다. 가령 신이 대신에게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이러한 허풍을 쳤다고 한다면, 온 세상에 공공연히 전하여 말하는 자도 다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관작(官爵)을 주고 빼앗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이므로, 아무리 대신이 높다고 한들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중곤(重閫)을 핍박하여 체직시킨 것은 실제로 이전에 없던 일이므로 대관(臺官)의 말이 한번 나온 뒤에는 진실로 마땅히 깜짝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심스레 뉘우치고 복종하여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말한 자를 거칠게 욕하여 잘못을 비평하지 못하게 하니, 신은 근심과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영곤(營閫)을 청득(請得)162) 하여 모두 한꺼번에 윤허를 얻어 시행한 일에 있어서는, 대신의 상소중에, ‘전후(前後)의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안험(按驗)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신이 마땅히 말하려고 하던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한번 비국 문서(備局文書)를 가져다가 고찰해 보시면 그 허실(虛實)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니, 신은 자세히 언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가지 일이 비록 좀 오래 되었으나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연전에 대신이 좌규(左揆)163) 로 있을 때 한 무장(武將)을 권유하여 그로 하여금 호조에서 구관(句管)하는 관서미(關西米) 1만 석을 청촉하여 허락을 얻도록 하고, 수상(首相)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날을 틈타서 자기 자신이 수결(手決)하여 제사(題辭)에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문서가 회공(回公)164) 될 때 수상이 비로소 보고 놀라 의혹을 가졌으나, 동료 정승이 한 일을 저지(沮止)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사인(私人)으로 교련관(敎鍊官)이라는 가함(假銜)을 주어 그 수결을 가지고 관서로 내려보내었습니다. 1만 곡(斛)의 쌀을 발매(發賣)하는 데 있어서도 상정가(常定價)로 절가(折價)165) 하여 매석당 3냥(兩)으로 정하였는데, 매석당 남은 이익도 또 수냥(數兩)을 밑돌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만 상정 본가(常定本價)만 호조에 납부하고 그 나머지 이익을 가졌으니, 그 수량은 반드시 누거만(累鉅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본전(本錢)과 나머지 돈을 합하여 전체의 수량을 가져오게 하여 사실(私室)에 실어들였습니다. 그런데 호조에는 1만 석의 소미(小米)가 아주 간 곳이 없었는데, 중신(重臣)인 서명응(徐命膺)이 호조 판서가 되어 호조의 아전 수십 명을 별정(別定)하여 차인(差人)을 찾아 체포하였는데, 그의 가속(家屬)들도 한꺼번에 잡아다가 가두어 놓고 날마다 엄중한 형장을 치며 기한을 정하여 놓고 차인에게 징독(徵督)하여 겨우 미봉(彌縫)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거두어 들이지 못한 수량이 많다고 합니다. 이는 중신 서명응에게 한번 물어보신다면 그 실상을 환하게 아실 터이니,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금년 안에 일어났던 일로 말하더라도 해서(海西)의 번임(藩任)은 본래부터 부요(富饒)하다고 일컬어져 왔는데, 도신(道臣)이 부임하여 일을 보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1만 곡을 청득(請得)하려 한 것을 어디에 쓰고자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대신이 어렵지 않게 시행을 허가하여 5천 석은 영곡(營穀)으로 영구히 획급(劃給)하게 하고, 5천 석은 상진곡(常賑穀)으로 꾸어 주었습니다. 대저 수만 석의 곡식은 국가의 1년 경비를 넉넉히 충당할 수가 있는 것인데도 나라의 권력을 잡은 신하가 사물(私物)인 양 잡아쥐고 조금도 아끼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 몇가지 일로 미루어 본다면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국가에 갑자기 변란이 생겨 급히 쓸 수요(需要)가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조처하시겠습니까? 신은 자못 애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한 거조(擧措)가 숨김이 없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내가 애석히 여기는 것은 지금의 글이 전보다 열배나 된다. 신 판부사(申判府事)166) 에게 무엇이 그렇게 매우 잘못한 것이 있기에 이렇게 하는가? 그러나 대신의 체통은 중한 것이니, 비록 근거가 없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사(兩司)에서 중학(中學)167) 에 앉아 반드시 합사(合辭)하는 일이 있었으니, 경이 비록 품계가 높아 재상의 반열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종이 한 장, 붓 한 자루로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전에는 비록 경을 가상히 여겼으나 지금에는 그것이 해괴한 일이다. 쟁반에 물을 담은 듯이 법은 공평하여야 된다고 한 말은 동자(董子)168) 가 이미 한 말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경을 위하여 개탄하며 역시 세도(世道)를 개탄한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申晦)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 한 업적이 과연 이계(李溎)가 상소한 말과 같았지마는, 기회를 틈타서 사람을 모함하는 것도 또한 이계의 기량(伎倆)이다. 신회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에는 그의 세력에 저촉될까봐 감히 말 한마디 못하다가 성상의 돌보심이 자못 쇠퇴하여지고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비로소 틈을 보아 나열하여 한 자루의 붓으로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들었으니, 그도 역시 우물에 빠진 자에게 돌을 떨어뜨리는 소인(小人)의 행태를 면키 어렵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9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역사-사학(史學)
[註 157] 병침(丙枕) : 하룻밤을 5등분하여 세 번째의 시각을 병야(丙夜) 곧 3경(三更)이라고 하는데, 병침은 이 시각에 임금이 잠자리에 든다 하여 표현된 말임.[註 158] 밀부(密符) : 유수·방어사·총융사·절도사·감사 등에게 내려 주던 병부(兵符). 병란이 일어나면 때를 가리지 않고 급히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음. 둥근 모양에 한 면에 제1부(第一符)라고 쓰고, 한쪽에는 국왕 화압(國王花押)의 친서(親署)가 있었음.[註 159] 개정(開政) : 정사(政事) 곧 인사 행정의 사무를 행하기 위하여 관원들이 모여 사무를 보는 것.[註 160] 정체(呈遞) :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는 서면을 제출함.[註 161] 손장(巽狀) : 사직서.[註 162] 청득(請得) : 청촉(請囑)하여 허락을 얻음.[註 163] 좌규(左揆) : 좌의정.[註 164] 회공(回公) : 의정부에 도착한 공문(公文)을 의정 이하 모든 관원에게 회람시키는 일.[註 165] 절가(折價) : 어떠한 물품 대신으로 다른 물품을 받을 때에 두 가지의 값을 견주어 받을 물품의 수량을 정하고 그 물품의 값을 정함. 결가(決價).[註 166] 신 판부사(申判府事) : 신회(申晦).[註 167] 중학(中學) : 서울의 중부에 있던, 4학 중의 하나.[註 168] 동자(董子) :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申晦)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 한 업적이 과연 이계(李溎)가 상소한 말과 같았지마는, 기회를 틈타서 사람을 모함하는 것도 또한 이계의 기량(伎倆)이다. 신회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에는 그의 세력에 저촉될까봐 감히 말 한마디 못하다가 성상의 돌보심이 자못 쇠퇴하여지고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비로소 틈을 보아 나열하여 한 자루의 붓으로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들었으니, 그도 역시 우물에 빠진 자에게 돌을 떨어뜨리는 소인(小人)의 행태를 면키 어렵다."
9월 7일 임자
엄숙(嚴璹)을 대사헌으로, 이득신(李得臣)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신회(申晦)가 도성(都城) 밖으로 물러가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밤에 임금의 옥체(玉體)가 편찮았다. 명령을 내려 약원(藥院) 세 제조(提調)와 여러 의관(醫官)들을 입시하게 하였다.
9월 8일 계축
임금의 병환이 조금 나아서 약원과 여러 대신들이 상고 상고 하포(上告下布)169)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9일 갑인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고, 내국(內局)은 주원(廚院)에 입직하였다.
9월 10일 을묘
임금에게 다시 한기(寒氣)가 있어서 연달아 양위탕(養胃湯)을 올렸다.
9월 11일 병진
이재간(李在簡)·김치공(金致恭)·이정오(李正吾)·이석재(李碩載)·이득신(李得臣)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2일 정사
신회가 도성 안에 들어와 의금부에서 대죄(待罪)하였다.
9월 13일 무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후원(後苑)에 올라가서 동교(東郊)와 서교(西郊)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내전으로 돌아왔다. 여러 대신들이 임금의 건강이 평복(平復)한 데 대한 진하(陳賀)를 행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상소하여 애써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뜻은 굳게 정하여져 있다. 그러나 너의 글이 이와 같으니, 특별히 소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9월 15일 경신
서유원(徐有元)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약원 도제조에게는 구마(廐馬)를 면급(面給)하고 제조와 부제조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하였으며 주서(注書)와 한림(翰林)은 승륙(陞六)시키고 의관(醫官)과 하인(下人)들에게는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9월 16일 신유
임금이 탕제(湯劑)를 들지 않으니,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뜰에 내려가서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대신은 대궐 밖에 나가 서명(胥命)하고 약원에서는 합문(閤門) 밖에서 대죄하였는데, 밤이 깊은 뒤에 임금은 비로소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고 탕제를 복용하였다.
9월 17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의관(醫官)을 잡아들이게 하고, 이어서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다.
9월 18일 계해
약방 제조는 주원(廚院)에서 윤직(輪直)하도록 하였다.
9월 20일 을축
강지환(姜趾煥)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9월 21일 병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9월 22일 정묘
이날은 곧 왕세손(王世孫)의 탄일(誕日)이었다. 임금이 세손에게 명하여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하례를 받도록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신회(申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가 서읍(西邑)에 대한 통곤(統閫)170) 의 문제를 논한 것이 말은 갈리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신이 다시 진달하려고 합니다. 연석에서 천거하였던 이득제(李得濟)의 일 같은 것은 성상께서 직접 보셨으니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구선행(具善行)의 병세가 결코 오래 끌지 못한다는 것은 화타(華佗)·편작(扁鵲)과 같은 명의(名醫)가 아니더라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른바 ‘어찌 미리 알 수 있었겠느냐?’고 한 것은 아마도 말이 조리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구현겸(具顯謙)을 체직시키고 싶어한 뜻은 그 당시 좌상(左相)이 그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신에게 말한 것이 있기에 신이 과연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체직을 윤허 받았습니다. 고 중신(重臣) 〈구선행이〉 과연 성이 나서 불평하는 의사가 있었다면 이는 참으로 상리(常理)에 벗어나는 일이며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구씨(具氏)가 이사를 하려던 계획은 이미 여러 해 되었으므로 온 세상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 억지로 합리화하여 말을 만들어 그 아들이 사환(仕宦)에 나올 뜻을 끊었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부자(父子) 사이에 죽을 때를 당하여 결별(訣別)한 말은 다른 사람이 참여하여 들을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증거를 세우니, 저 사람이 비록 신을 모함하는 일에 급하여 쉽게 말을 해버렸지마는, 구현겸이 그 말을 듣는다면 효자(孝子)인 그의 마음이 능히 슬프고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가 이사간〉 동촌(東村) 사람 중에는 역시 사환(仕宦)하여 공경(公卿)의 지위에 있는 자도 많습니다. 또한 그의 집도 또한 옛날 총재(冢宰)171) 가 살던 집이니, 이것이 어찌 족히 세상을 등지려는 증거가 되겠습니까? 만일 구현겸이 훗날 스스로 벼슬길을 피하지 않는다면, 그 아버지의 유언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니, 이계(李溎)가 장차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해서(海西)의 환곡(還穀) 문제는 원장(元狀)과 거조(擧條)172) 가 모두 비국(備局)에 있으니, 한 번만 보시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상채곡(償債穀)의 대여를 허가한 것이 오늘에 와서 처음 시행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곧 10년 전의 일로써 지금 소청(所請)한 것은 1년을 한정하여 정퇴(停退)하자는 데 불과한 것이었고, 허락한 것 역시 우선 그 모곡(耗穀)173) 은 받아들이고 원곡(元穀)은 이전 그대로 두는 것이었으니, 아껴서 내주지 않느냐의 여부는 의논할 바가 못됩니다. 영진곡(營賑穀)을 이획(移劃)한 일은 본영(本營)의 별회곡(別會穀)을 조정에서 일찍이 획급한 것인데, 이 곡식이 작년에 탕감(蕩減)하는 가운데 들어가 있었으니, 조정에서 그 대신으로 충급(充給)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처의 영곤(營閫)에서 다른 곡식으로 탕감한 수량을 충급하는 것은 곳곳이 다 그러한데, 어찌 유독 해서만 버티어 나가는 데 인색하였겠습니까? 저 사람은 사실을 바꾸고 석수(石數)를 떠벌려 가지고 두 가지를 모두 맞출 계획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그 의도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관서(關西)의 좁쌀은 매년 지부(地部)174) 에 획급하여 경비(經費)로 만드는 것이 규례(規例)로 되어 있습니다. 사헌부의 상소 가운데 본가(本價)와 아울러 사실(私室)로 실어들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듣고는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비록 옛날의 큰 권간(權奸)이라도 반드시 감히 하려는 마음을 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지마는 벼슬이 대관(大官)에 있으면서 진실로 나라의 곡식 만여 석을 사용(私用)한 일이 있으면서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사이에 두고 그 흑막을 밝히지 않는다면, 조정의 사실 본말을 규명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이 애매모호함을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상소 가운데 신과 어떤 무장(武將)이 은밀히 상의하여 공물(公物)을 나누어 쓴 듯한 내용이 있는데, 그가 말한 무장이 과연 누구입니까? 이리저리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어 남을 죄에 빠뜨려서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총명(聰明)이 매우 밝으시며, 온 세상의 눈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니, 신은 굳이 많은 변명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서명응(徐命膺)을 증거로 삼은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탁지(度支)175) 의 신하가 반드시 공적인 재물을 개인의 집으로 돌려놓고 빈 장부만 가진 채 임금을 속이려 할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문첩(文牒)을 한 번만 살펴보시면 진장(眞贓)을 조사해 낼 수가 있으니, 어찌 중신(重臣)에게 물어서 알도록 기다릴 것까지 있겠습니까? 이 중신은 일찍이 신과 더불어 어떤 일로 가부(可否)를 말한 적이 있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이 일로 인하여 그의 힘을 빌려서 신을 밀쳐 빠뜨리는 처지로 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수레의 채비를 명하겠으니, 경은 이 뜻을 생각하여 곧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신회는 명령을 받들고 입시하여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신회가 말하기를,
"신이 당한 처지는 전고(前古)에 없던 바입니다. 바라건대, 명령을 내려 사실을 밝혀주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또 답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는 대신으로서 대관(臺官)의 탄핵을 혹독하게 받아 도성문을 물러 나갔다가, 약원에서 문안하는 소식이 있음을 핑계 삼아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왔으니, 이는 이미 대신의 체모가 아니다. 게다가 임금이 수레의 채비를 명하겠다는 하교를 듣고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입시하였으니, 염치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9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역사-사학(史學)
[註 170] 통곤(統閫) : 통제사(統制使).[註 171] 총재(冢宰) : 이조 판서.[註 172] 거조(擧條) : 임금께 아뢰는 조항.[註 173] 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에 저장한 양곡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하였다가 추수 후 받아들일 때 말[斗]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註 174] 지부(地部) : 호조.[註 175] 탁지(度支) : 호조.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회는 대신으로서 대관(臺官)의 탄핵을 혹독하게 받아 도성문을 물러 나갔다가, 약원에서 문안하는 소식이 있음을 핑계 삼아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왔으니, 이는 이미 대신의 체모가 아니다. 게다가 임금이 수레의 채비를 명하겠다는 하교를 듣고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입시하였으니, 염치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9월 24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선비들을 시험하여 심능익(沈能翼)을 뽑아 급제를 내렸다.
9월 25일 경오
이때 임금은 담후(痰候)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나 탕제 들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왕세손이 친히 약그릇을 가지고 나아가 받들어 권하였는데, 임금이 왕세손을 위하여 억지로 들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왕세손의 성품은 효(孝)에 지극하여 학문을 강하고 궁료(宮僚)를 접견하는 때가 아니면 밤낮으로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임금의 기거(起居)하는 절차를 몸소 붙들어 주었으며 측근의 신하들이 할 일을 친히 맡아 하였으며, 임금의 뜻에 순종하고 몸을 편하게 하여 임금을 기쁘게 하는 데 힘썼으니, 임금도 또한 매우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때로 몹시 노하여 마음이 편치 않다가도 왕세손이 주대(奏對)한다는 소리만 들으면 문득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양궁(兩宮) 사이에 화기(和氣)가 무르녹았으니, 이것을 본 군신(群臣)들은 감탄하고 흠앙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9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왕세손의 성품은 효(孝)에 지극하여 학문을 강하고 궁료(宮僚)를 접견하는 때가 아니면 밤낮으로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임금의 기거(起居)하는 절차를 몸소 붙들어 주었으며 측근의 신하들이 할 일을 친히 맡아 하였으며, 임금의 뜻에 순종하고 몸을 편하게 하여 임금을 기쁘게 하는 데 힘썼으니, 임금도 또한 매우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때로 몹시 노하여 마음이 편치 않다가도 왕세손이 주대(奏對)한다는 소리만 들으면 문득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양궁(兩宮) 사이에 화기(和氣)가 무르녹았으니, 이것을 본 군신(群臣)들은 감탄하고 흠앙하였다."
9월 28일 계유
양주 목사(楊州牧使) 김하재(金夏材)가 상소하여 대동세(大同稅)를 감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최몽암(崔夢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각도(各道) 진영(鎭營)은 곧 토포사(討捕使)의 아문(衙門)이니, 영장(營長)이 된 자가 평상시에 능히 계엄(戒嚴)하고 검칙(檢飭)하는 것만이라도 잘했다면, 어떻게 도적이 한밤중에 관문(官門) 안에 들어와서 칼을 휘두르는 변고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토포사의 직임에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신은 순천 영장(順天營將) 심돈(沈墩)을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언배(李彦培)는 그 고을에 은점(銀店)이 있어서 송도(松都) 부상(富商)이 그 물주(物主)가 되었는데, 단지 반값을 주고 그에게 환전(換錢)하자고 하니, 은상(銀商)이 예(例)에 의거하여 응하지 아니하자, 그에게 형신(刑訊)을 중하게 시행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신은 수안 군수 이언배를 먼저 파직시키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나문(拿問)해서 엄처(嚴處)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청 부사(北靑府使) 이덕부(李德溥)는 집이 가깝기 때문에 인족(姻族)들이 연줄을 타고 권력을 마음대로 부려서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으면서 청탁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는 지친(至親)을 향임(鄕任)으로 차출하고 모든 것을 그의 말대로 따랐으므로 향전(鄕戰)이 야기되었습니다. 신은 북청 부사 이덕부를 파직하여 서임(敍任)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는 간신(諫臣)이 영흥(永興)·함양(咸陽)·부안(扶安)의 세 수령(守令)을 탄핵한 계본(啓本)을 승정원(承政院)에 전하였으나 상달(上達)되기도 전에 간신이 먼저 체직되었습니다. 비록 상달되지 못한 계본이나 이는 이미 발표된 의논이니, 수령이 된 자들이 역시 모두 이미 체직된 관원으로 자처하고 읍무(邑務)를 폐지하고 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은 영흥 부사 정언형(鄭彦衡)과 함양 부사 이엽(李燁)과 부안 현감 이격(李格)을 모두 파출(罷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심돈의 일은 그렇게 시행하고, 논핵한 다섯 수령에 대해서는 먼 지방에서 전하여 온 소문인데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사람을 어찌 분명하지 않은 채 그냥 두겠는가?"
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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