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병자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서 구일식(救日食)121) 하는 의식을 행하려고 하다가 상신(相臣)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8월 2일 정축
전 영의정 신회(申晦)를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8월 3일 무인
정일상(鄭一祥)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부관(部官)122) 에게 명하여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입시하게 하고, 탕제(湯劑)를 들여야 되는지의 여부를 하순(下詢)하였다. 유생 중에 경옥고(瓊玉膏)를 드시기를 청하는 이가 있어서 임금이 약원(藥院)에 약을 지어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생을 전조(銓曹)에 명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8월 4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윤양후(尹養厚)를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에 임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양후의 아버지 윤심형(尹心衡)은 일찍이 청론(淸論)을 주장하다가 세상과 불합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해서 술을 마시며 방랑하여 거친 음식도 잇기 어려웠으나 그런 처지에서도 태연하였다. 그러나 윤양후 형제는 권세 있는 사람의 친척에 빌붙어 비루하고 좀스러운 짓을 많이 하고 높은 자급이나 기름진 고을의 지방관이 되려고 온갖 방법으로 제수 받기를 도모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그 애비를 욕되게 하였다.’고 하더니 이런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96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양후의 아버지 윤심형(尹心衡)은 일찍이 청론(淸論)을 주장하다가 세상과 불합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해서 술을 마시며 방랑하여 거친 음식도 잇기 어려웠으나 그런 처지에서도 태연하였다. 그러나 윤양후 형제는 권세 있는 사람의 친척에 빌붙어 비루하고 좀스러운 짓을 많이 하고 높은 자급이나 기름진 고을의 지방관이 되려고 온갖 방법으로 제수 받기를 도모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그 애비를 욕되게 하였다.’고 하더니 이런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금이 주원(廚院)에 나아가 몸소 글 한 편을 써서 본원(本院)에 걸게 하고 입직한 낭관(郞官)과 하인(下人)들에게 상을 주었다. 이어서 도총부(都摠府)에 나아가 또 한 편의 글을 써서 본부에 걸게 한 뒤에 상을 내렸다. 그리고 광명전(光明殿)에 돌아와 하교하기를,
"내가 이 전각에 남면(南面)하여 앉고 보니, 더욱 수택(手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 창연(愴然)함을 느낀다."
하였다.
순화방(順化坊) 노인들을 불러 보고 술을 내렸다. 김효대(金孝大)에게 이르기를,
"경 등을 또한 가인(家人)의 예(禮)로써 볼 것이니, 각자 먼저 술잔을 들라."
하였다. 은잔[銀盃] 하나를 김효대에게 특별히 내려 주어 국구(國舅)의 집에 보관해 두도록 명하였다. 양정재(養正齋) 주인 윤광심(尹光心)에게는 구마(廐馬)를 특별히 내려서 광명전 앞에서 친히 받아 가도록 하고, 노인들에게는 각자 명주(明紬) 한 필(疋)씩을 내려 주었다. 노인들이 탕제(湯劑)를 드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웃으며 윤허하였다. 노인들은 천세(千歲)를 부르며 절하고 춤추면서 나갔다.
8월 5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서천(舒川)·정산(定山)·홍주(洪州)에서 보낸 세선(稅船)의 감색(監色)123) 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왕궁과 오막살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지 말아라. 돌아가 너희 고을 원에게 이 일을 말하고 성심을 다하여 백성을 돌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6일 신사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4민(四民)124) 을 불러서 쌀을 하사하였다.
8월 7일 임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수진동(壽進洞)·어의동(於義洞)·명례동(明禮洞)·용동(龍洞)의 4궁(宮)에 딸린 궁속(宮屬)들을 불러들여 각각 쌀 2말씩을 주고, 궁임(宮任)에게는 면(綿)을 주었으며, 노비의 자식 중에 72세가 된 사람에게는 면천(免賤)시키라고 명하였다. 부관(部官)에게 명하여 근처에 있는 거지아이 50명을 불러들여 각각 쌀 1말씩을 주게 하였다.
8월 8일 계미
안겸제(安兼濟)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겸제는 타고난 성품이 간교하고 행실이 더럽고 천하여 일찍이 역적의 옥사(獄事)에 걸려 세상에서 버린 바 되었고 대각(臺閣)에서 건몰(乾沒)125) 당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권세 있는 사람의 친척에 빌붙어 한 해 사이에 재상(宰相)의 반열까지 뛰어올라 금백(錦伯)126) 에 임명을 받고 오로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여 권문(權門)에 상납했다.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다시 호남의 도백으로 임명을 받으니 사람들의 비난이 자자하여 누군들 침뱉고 욕하지 않을까마는, 그자가 혼자 양양하여 마음 편히 부끄러움을 모르니, 사람이 되어 낯이 두껍기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9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125] 건몰(乾沒) : 직책이 박탈되었다는 뜻.[註 126] 금백(錦伯) : 충청 도백.
사신(史臣)은 말한다. "안겸제는 타고난 성품이 간교하고 행실이 더럽고 천하여 일찍이 역적의 옥사(獄事)에 걸려 세상에서 버린 바 되었고 대각(臺閣)에서 건몰(乾沒)125) 당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권세 있는 사람의 친척에 빌붙어 한 해 사이에 재상(宰相)의 반열까지 뛰어올라 금백(錦伯)126) 에 임명을 받고 오로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여 권문(權門)에 상납했다.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다시 호남의 도백으로 임명을 받으니 사람들의 비난이 자자하여 누군들 침뱉고 욕하지 않을까마는, 그자가 혼자 양양하여 마음 편히 부끄러움을 모르니, 사람이 되어 낯이 두껍기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유생(儒生)들을 불러들여서 제세 안민(濟世安民)하는 계책을 물었다.
8월 9일 갑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유생을 불러서 물어보았는데, 모든 유생들이 탕제(湯劑)를 드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화가 나서 구저(舊邸)로 나아갔다. 여러 신하들이 회가(回駕)하기를 간절히 청하고 왕세손도 앞에 나아가 간곡하게 청하니, 그제야 대궐로 돌아왔다.
8월 10일 을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공인(貢人)을 불러 보았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도 입시하여 탕제를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몸소 탕제를 받들고 나아가니, 임금이 드시었다. 대신 이하가 모두 천세를 불렀다.
8월 11일 병술
이경륜(李敬倫)을 승지로 삼았다.
8월 12일 정해
임금이 추모동(追慕洞)에 거둥하여 비(碑)에 절하고 돌아왔다. 추모동 노인들을 불러들여 모두 가자(加資)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모두 탕제를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모두들 금오(金吾)127) 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안동(安洞) 노인들을 불러 보고 모두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8월 13일 무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8월 14일 기축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다가 지나는 길에 민백분(閔百奮)의 집에 들렀다.
8월 15일 경인
임금이 진전(眞殿)에 배알하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종친부(宗親府)에서 진찬(進饌)하는 것을 받았다. 숭정전(崇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돌아와서 축하하는 의식과 여러 관사(官司)의 진찬(進饌)을 받고, 반교문(頒敎文)을 지어 내렸다. 진찬한 각사(各司)의 당상(堂上)들에게는 모두 말[馬]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8월 16일 신묘
서호수(徐浩修)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복궁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설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어가를 따랐다. 시권(試券)에다가 각각 경향(京鄕)을 구분하여 쓰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구저(舊邸)로 나아가 과차(科次)128) 에 든 사람들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이연년(李延年) 등 20명을 뽑아 창방례(唱榜禮)129) 를 행하였다. 회란(回鑾)130) 할 때에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서 어가를 따라 숭정전으로 들어왔다.
8월 17일 임진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한 뒤에 신은(新恩)131) 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경성(鏡城)에서 새로 출신(出身)한 윤형덕(尹衡德)을 남도 참군(南道參軍)으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먼 도(道)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8도 군현(八道郡縣) 중에 80세 된 사람을 관문(官門)에 모아 음식을 준비하여 먹이도록 명하였다.
이동태(李東泰)를 승지로 삼았다.
8월 18일 계사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한성부에 명하여 8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라고 하였다.
한림 권점(翰林圈點)132) 을 행하였는데, 이때 권점에 참여한 사람이 85명이나 되도록 많은 수효에 이르렀으니, 그 혼잡한 것을 알 만하였다.
8월 19일 갑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유생과 방민(坊民)을 불러 보고 또 탕제(湯劑)에 대한 일을 물었다. 노인(老人) 송규명(宋奎明)이 성덕송(聖德頌)을 올렸는데, 임금이 외람된 일이라고 여겨 모두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8월 20일 을미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133) 를 시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문원(承文院)의 준점(準點)을 파(罷)한 후에 분관(分館)134) 이 용잡(冗雜)하다 하고, 참하인(參下人)을 불러들여 면시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함부로 뛰어들어오는 자가 많다고 하여 그것을 파할 것을 명하고, 집경당에 돌아와서 면시(面試)하여 조장한(趙章漢) 등 2명을 뽑았다."
하였다.
8월 21일 병신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판서로, 심욱지(沈勗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청하기를,
"양남에서 바쳐야 될 금어(禁御)의 군포(軍布)를 다음해 봄까지 기다려 쌀로 상납하게 하고, 그 대신 관서(關西)의 소미(小米)135) 1만 석을 두 군문(軍門)에 분할하여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2일 정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탕제(湯劑)의 정지 여부를 하순(下詢)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더 드시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보련(步輦)을 타고 육상궁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어가를 따랐다.
8월 23일 무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8월 24일 기해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내종청(內宗廳)에 나아가 ‘억석청(憶昔廳)’이라는 글씨를 써서 내리고, 그것을 새기어 걸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고금 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愼守勤)136) 은 포은(圃隱)137) 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
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
8월 25일 경자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어가를 따랐다. 계해 공신(癸亥功臣)138) 의 자손들에게 명하여 모두 어가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는 옛일을 생각하여 느낀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8월 26일 신축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경운궁 동내(洞內)의 노인 중 60세 이상 되는 사람을 불러들여 모두 가자(加資)하고 쌀을 주었으며, 궐문(闕門)의 각곳을 지키는 군사들에게도 쌀을 주었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5부(五部)의 방민(坊民)을 불러 보았는데, 도성의 백성 수천 명이 왔다. 하교하기를,
"너희는 나의 뜻을 체득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5품(五品)139) 에 불손하는 근심이 없게 하라."
하니, 도성 백성들이 일제히 천세(千歲)를 불렀다. 임금이 물러가라고 명하고, 돌아오는 길에 덕유당에 들러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후원(後苑)에 올라 서암(瑞巖)을 함께 구경한 뒤에 친히 한 구의 시를 짓고 제신(諸臣)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김중기(金重器)의 손자 김신우(金信遇)가 상언(上言)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김중기의 손자가 이와 같이 한다면 무신년140) 의 역적 무리들이 또한 장차 날뛸 것이다. 김신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1백 대의 곤장을 치게 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을 엄격히 방비하라."
하였다.
8월 27일 임인
대사헌 이계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대신(大臣)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성기(聲氣)를 크게 허비하고 그 말을 매우 많이 하여, 신(臣)을 교밀(巧密)하다고 비난하면서 신을 어떤 기관(機關)141) 인 양 의심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달해(李達海)를 변명하면서 말하기를, ‘무변(武弁)142) 이기 때문에 탐욕이 많다고 한다면 문관(文官)이 된 사람은 모두 청렴 결백합니까?’ 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신은 남몰래 크게 웃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다만 문·무(文武)의 차례를 바꾸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을 뿐이며, 그 사람이 본래 탐욕스럽다고 한 것은 문관은 청렴하고 무관은 탐욕스럽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사람의 오명을 벗겨주기에 급하여 비교하는 말을 끌어들여서 도리어 비웃은 것은 언어의 병폐를 면하지 못할 듯하며, 또한 사람들이 천심(淺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신(大臣)이 크게 웃었다고 한 소이(所以)에 대하여 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그가 ‘핍박하여 교체시켰다[迫遞].’는 변명한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들은 바와 절대로 모순됩니다. 만일 신이 들은 바를 다시 다 털어놓는다면 어찌 많은 이야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애석히 여기는 것이 조정의 체통이고 돌보아야 할 것이 조정의 기상(氣像)이니만큼, 크고 작은 일에 상쾌함만을 힘쓰고 안정시킴이 있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조정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며 조정의 기상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성상의 마음에 괴로움을 끼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그 때문에 구현겸(具顯謙)이 돌아가서 그 아비를 만난 일을 대신(大臣)의 어진 마음과 착한 덕으로 여기고, ‘핍박하여 교체시켰다.’라는 두 자는 이야기 하든 않든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항간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역시 신과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니, 대신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신이 감히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은 김신우(金信遇)에 대하여 발계(發啓)하지 않은 것으로 대신(臺臣)들을 엄중히 책망하였다. 입시(入侍)한 대신(臺臣)들이 모두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8월 28일 계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구저(舊邸)로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어가를 따랐다. 임금이 어지러운 증세로 곧 돌아왔다. 제조(提調)는 병조에서 숙직하고 부제조는 본원(本院)에서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8월 29일 갑진
민항렬(閔恒烈)과 정일상(鄭一祥)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복궁에 나아가 경회루(慶會樓)의 연못가에 임어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자손으로부터 무신년143) 의 공신 자손까지 지손(支孫)·적손(嫡孫)을 막론하고 모두 들어와 참석하도록 명하고 음식을 내렸다. 시신(侍臣)들이 잠화(簪花)144) 를 꽂고 대신(大臣)들이 축하하는 의식을 베풀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 역시 열조(列朝)에서 천위(踐位)하는 행례(行禮)와 같은 점이 있다면 갑진년145) 8월에 인정문(仁政門)에서 하던 행사와 어찌 다르겠는가? 내 나이 지금 팔순(八旬)인데, 이는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구궐(舊闕)에 나아가 척강(陟降)의 선왕을 대신하여 축하를 받는다면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하니, 왕세손이 백관을 인솔하고 행례하였다.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23원훈(元勳)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적장인(嫡長人)에게는 모두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8월 30일 을사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있은 행사는 역시 전열(前烈)들의 공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니, 갑진년 8월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일은 마땅히 위로 조상에게 고하고 아래로 백성에게 포고한 뒤에 집경당에 앉아서 반사(頒赦)146) 하겠다."
하고, 왕세손에게 명하여 태실(太室)에 나아가 내일 아침 삭제(朔祭) 겸 고유(告由)를 행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김신우(金信遇)를 먼 곳에 정배시키기를 청하고, 또 즉시 그를 청죄(請罪)하지 않은 대관(臺官)을 모두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옛날 내국(內局)에서 청두압(靑頭鴨)을 바쳤는데, 이는 항시 바치는 것과 다름이 있는 까닭에 정지시키라고 특별히 명하였으니, 아! 훌륭한 일이다. 내가 일찍이 녹미(鹿尾)를 즐겼으므로 어영청(御營廳)에서 먼저 바치게 되었으니, 다른 영문(營門)에서도 역시 장차 이와 같이 할 것이다. 그것을 다시는 구하여 얻지 말도록 하여 내가 물건을 구하는 의도가 없음을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전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이 졸(卒)하였다. 권진응의 자(字)는 형숙(亨叔)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인데,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이었다. 소년 시기로부터 징사(徵士)147)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배웠다.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초선(抄選)148) 에 뽑혀 자의(諮議)가 되었다. 《유곤록(裕昆錄)》을 소론(疏論)한 것 때문에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었다. 몇 해 뒤에 풀려나 돌아왔으나, 병으로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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