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5권, 영조 51년 1775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7.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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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해

번개가 쳤다.

 

10월 2일 병자

대사헌 엄숙(嚴璹)이 상소하여 8도(八道)의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기를 논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따라 나아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 호조 판서, 선혜청 당상, 기전(畿甸)의 구관 당상(句管堂上),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불러 보았다.

 

10월 4일 무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경기 감사를 불러 보았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답재(畓災)에 지급하다가 남은 곡식을 전재(田災)로 옮겨 지급하기를 청하고, 기백(畿伯) 윤시동(尹蓍東)은 임진년176)  에 호서(湖西)에서 받은 공진창(貢津倉)에 있던 창고의 쌀 4천 석을 그대로 본도(本道)에 유치(留置)하여 영구히 환곡 방출용의 곡식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7일 신사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10월 10일 갑신

임금이 《팔순유곤록(八旬裕昆錄)》을 친히 짓고, 이르기를,
"8순의 늙은 나이에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가다듬어 글을 써서 어린 세손에게 보인다. 애석하구나! 너의 할아비는 세상을 다스린 지가 50여 년이 넘었고 올해 나이 82세가 되도록 평생 동안 고집한 바는 다만 충(忠)과 효(孝)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동안 마음을 지킨 것이, 하나는 자긍(自矜)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자대(自大)177)                  를 경계함이며, 하나는 포의심(布衣心)178)                  이며, 하나는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다. 만일 나의 마음을 알려면 고령(高嶺)179) 육오당(六吾堂)을 보아라. 그것은 오직 탕평(蕩平)일 뿐이니, 지금에 와서 내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균역(均役)180)                   한 가지 일은 곧 나의 큰 사업이었는데, 법(法)이 이미 오래되어 마음도 역시 태만해졌으니 다시 어떻게 바라겠는가?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국사(國事)이며 깊이 탄식하는 것이 인심이다. 국사가 이와 같고 인심이 이와 같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천승(千乘)의 지위에 있겠으며,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만기(萬機)를 돌보겠는가? 내가 지금 얻은 바는 오직 주자(朱子)가 지은 1부(部)의 《소학(小學)》뿐이니, 나는 마치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과 같다. 나는 능히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므로 나의 손자에게 깊이 바라는 것이다. 유약(有若)181)                  이 이르기를, ‘효제(孝悌)라고 하는 것은 인(仁)을 실행하는 근본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네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쓸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있다. 옛날 황명(皇明)의 고황제(高皇帝)는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만일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왕자(王子)를 낳을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한 구절을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늘 외우는 것이 내가 마치 이 말을 친히 들은 것처럼 하고 있다. 지금의 나라 형편을 본다면 더욱 여기에 대하여 힘써야 한다. 오늘 입시한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이미 이 책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어찌 범연히 보았겠는가? 경고(更鼓)182)                  가 이미 깊었고 옥루(屋漏)183)                  가 곁에 있다. 아! 82세 된 할아비가 24세 된 손자에게 이르노니,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성상께서는 8순으로써 일에 싫증이 나실 나이이고 여러 달 동안 고요히 조섭(調攝)을 하여야 하는 때를 당하여서도 대소(大小) 정무를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었으며, 알뜰히 돌보시는 일념(一念)을 더욱 후손에게 교훈으로 전하는 도리에 두었다. 그리하여 깊은 밤 전석(前席)에서 《유곤록(裕昆錄)》 1편을 불러서 쓰게 하여 그것으로 왕세손 저하에게 물려주셨다. 그 말뜻이 간곡하고 훈계가 지성껏 타이르는 것이어서 요순(堯舜)의 심법(心法)을 전한 것에 짝할 만하고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자경(自警)184)                          에 그칠 뿐만 아니었으니, 만수 무강의 경사를 장차 눈을 닦아가며 볼 수 있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0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역사-전사(前史) / 역사-사학(史學) / 출판-서책(書冊)


[註 177]          자대(自大) : 자만(自慢).[註 178]          포의심(布衣心) : 지위(地位)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註 179]          고령(高嶺) :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원소인 소령원(昭寧園)이 있는 양주(楊州) 고령리(高嶺里).[註 180]          균역(均役) : 균역법의 준말. 영조 26년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여, 종래의 군포(軍布)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나머지는 어업세(漁業稅)·염세(鹽稅)·선박세·은결(隱結) 등의 결전(結錢)으로 보충하게 한 법.[註 181]          유약(有若) : 공자의 제자.[註 182]          경고(更鼓) : 밤 시간.[註 183]          옥루(屋漏) : 사람이 보지 않는 곳.[註 184]              위(衛)나라무공(武公)의 자경(自警) :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시경(詩經)》의 억시(抑詩)를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는 말임. 《국어(國語)》에는 "위나라 무공이 95세였는데, 잠(箴)을 지어 자신을 경계토록 하였다고 했다."는 글이 있음.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성상께서는 8순으로써 일에 싫증이 나실 나이이고 여러 달 동안 고요히 조섭(調攝)을 하여야 하는 때를 당하여서도 대소(大小) 정무를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었으며, 알뜰히 돌보시는 일념(一念)을 더욱 후손에게 교훈으로 전하는 도리에 두었다. 그리하여 깊은 밤 전석(前席)에서 《유곤록(裕昆錄)》 1편을 불러서 쓰게 하여 그것으로 왕세손 저하에게 물려주셨다. 그 말뜻이 간곡하고 훈계가 지성껏 타이르는 것이어서 요순(堯舜)의 심법(心法)을 전한 것에 짝할 만하고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자경(自警)184)                          에 그칠 뿐만 아니었으니, 만수 무강의 경사를 장차 눈을 닦아가며 볼 수 있을 것이다."

 

10월 11일 을유

교서관(校書館)에서 《팔순유곤록(八旬裕昆錄)》을 간행하여 바쳤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헌가(軒架)185)  를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왕세손은 〈그 책을〉 친히 전정(殿庭)에서 받고 배례(拜禮)를 행한 뒤에 뭇 신하들이 천세(千歲)를 세 번 불렀다. 이는 나라의 성대한 행사였다. 책을 올린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 황경원(黃景源)·이휘지(李徽之)에게는 가자(加資)를, 초본(草本)을 베껴쓴 도승지 서유린(徐有隣)에게는 호피(虎皮)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10월 12일 병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기 감사 윤시동(尹蓍東)이 입시하여 급재(給災) 5백 결(結)을 더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유신 이덕사(李德師)와 이병모(李秉模)를 불러 명하기를,
"지금 너희를 어사(御史)로 삼는다. 너희들은 이 윤음(綸音)을 받들고 경기좌도·우도로 나누어 가서 백성을 위유(慰諭)하고 농사 형편을 살펴보아라."
하였는데, 그 윤음에 이르기를,
"한 해가 또 저물어 가니 농사 짓는 일도 벌써 끝났다. 안타깝구나, 소민(小民)들이여! 오막살이 생활을 하면서 쌀독을 들여다 보고 서로 얼굴을 바라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 가지고 어떻게 겨울을 지내어 다음 해까지 양식을 잇겠는가?’ 하고, 서로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구중 궁궐(九重宮闕)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소민이 비록 이와 같지마는 임금인 나 한사람이 어찌 다 듣겠는가? 이와 같은 민심은 진실로 정사를 시행하는 관청에 알려지기 어렵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쳤는데, 어찌 편안히 궁중에 누워 있겠는가? 50여 년간 재위하여 82세의 나이로 백성을 다스리는 뜻이 어디 있는가? 특별히 차대(次對)를 명하고 먼저 나의 뜻을 알려라. 특별히 두 유신(儒臣)을 어사(御史)에 임명하니, 좌도(左道)에는 이덕사가 가고 우도에는 이병모가 가서, 먼저 백성을 위유(慰諭)하고 겸하여 민정(民情)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구중 궁궐이 깊고 멀다고 이르지 말아라. 구중 궁궐과 오두막집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과 같다. 만일 민폐(民弊)가 있으면 작고 미약함을 따질 것 없이 어사로서 나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이갑(李𡊠)·서유린(徐有隣)·홍양한(洪良漢)·김노진(金魯鎭)을 비국 당상으로 차하(差下)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한익모는 충청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1천 7백 50결의 급재(給災)를 추가하여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4일 무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백관들을 모아 놓고 선유(宣諭)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석재(李碩載)를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5일 기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0월 16일 경인

경기좌도 어사 이덕사(李德師)가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위유(慰諭)하라는 명을 삼가 받들어 가는 곳마다 여러 백성을 모아 놓고 윤음을 경독(擎讀)하였습니다. 또한 방언(方言)으로 유지(諭旨)를 풀이하여 설명하니, 백성들은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가족들이 비록 굶주리지마는 역시 배가 부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호소하는 일이 있었는가?"
하였다. 이덕사가 대답하기를,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두 군영(軍營) 아병미(牙兵米)에 대하여 모두들 돈으로 대납(代納)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니, 민원(民願)에 따르도록 특명하였다. 양근 군수(楊根郡守) 홍응진(洪應辰)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어사(御史)에게 여러 고을 중에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가서 살펴보도록 다시 명하였다.

 

10월 17일 신묘

경기우도 어사 이병모(李秉模)가 복명하여 아뢰기를,
"윤음(綸音)을 삼가 받들어 여러 백성을 선유(宣諭)하니, 소민(小民)들은 어린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모두 성덕에 감동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그 지방 수령들이 잘 다스리고 있는지의 여부와 백성들의 폐막(弊瘼)을 두루 묻고, 이어서 여러 고을 중에 돌아보지 않은 곳을 가서 살펴 보라고 명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을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0월 19일 계사

평안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비국에서 아뢰기를,
"절미(折米) 2만 석을 한정하여 나누어 주고 진자(賑資)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0일 갑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아뢰기를,
"앞으로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때에 쓰게 될 삼(蔘)을 사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체삼(體蔘) 1백 80근(斤) 중 1백 60근과 미삼(尾蔘) 45근을 명년부터 두 해에 나누어 강계(江界)로 하여금 사서 바치도록 하고, 그 값은 금년에 사들인 수량과 함께 전례(前例)에 따라 관서(關西)의 소미(小米) 3만 5천 석과 별향전(別餉錢)186)   2만 냥과 무명[木] 2백 14동(同)을 구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1일 을미

어사 이덕사(李德師)가, 남양 부사(南陽府使) 박규수(朴奎壽)의 탐오(貪汚)한 정상을 계문(啓聞)하였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광통교(廣通橋)에 나아가 군대의 위세를 크게 벌려놓고, 박규수를 회시(回示)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산 데 대하여 사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양은 서울로부터 1백여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밤이 깊도록 잡아오지 못하였다. 신민(臣民)들이 모두 밤이 깊어가는데 거둥하는 것이 어렵다고 빨리 환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마침내 박규수가 도착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조율(照律)하게 하고 드디어 3천 리 밖에 유배시켰다.

 

10월 22일 병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경기 감사를 불러 보았다.

 

10월 24일 무술

정일상(鄭一祥)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5일 기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폐지된 4군(四郡)을 다시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고, 각자의 의견을 진술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삼고, 대제학 이휘지(李徽之)를 병조 판서로 삼도록 명하였다.

 

10월 26일 경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명령을 내려 문관(文官)·음관(蔭官)의 시험을 명하여 4명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윤상동(尹尙東)에게는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의관(醫官)을 잡아들이고, 약방(藥房) 세 제조(提調)의 체직을 명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익릉(翼陵)187)  을 봉심(奉審)한 승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10월 27일 신축

임금이 승지를 시켜 경상 감사의 장계를 읽게 하고, 급재(給災) 5천 결을 추가하도록 명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심이지(沈頤之)에게 숙마(熟馬)를 주도록 명하였는데, 어사의 아뢴 바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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