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5권, 영조 51년 1775년 윤10월

싸라리리 2025. 10. 17.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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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10월 1일 을사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박도원(朴道源)을 대사헌으로, 조재준(趙載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비국 일기(備局日記)를 보니 원임(原任)들도 모두 좌목(座目)188)  에 적혀 있는데 지금에는 그렇지 않다. 요즈음에는 원임을 마치 타인(他人)처럼 구분한다. 그렇다면, 모든 문의(問議)에 있어 무엇 때문에 시임(時任)·원임(原任)을 일컫는가? 시임만이 어찌 나의 신하이고 원임은 나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인가? 또한 일찍이 옛날에 보니, 만일 긴밀하게 관계된 일이 있으면 입시한 승지가 사알(司謁)189)  을 시켜 아뢰기를, ‘아무 대신, 아무 중신(重臣)이 품정(稟定)할 일이 있어서 함께 입시합니다.’ 하는 소리를 나도 또한 들었다. 그런데 지금에는 입시한 뒤에 아뢰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불러들이니, 이 또한 오늘날의 준례가 되었다. 이뒤로 무릇 비국에서 입시할 때에는 원임도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윤10월 4일 무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시립(侍立)하였다. 백성들을 불러보아 선유(宣諭)하고, 이어서 승정원으로 하여금 8도(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게 하였다. 시골 백성으로 서울에 온 자를 불러들여서 하순(下詢)하기를,
"내년 봄에는 바가지를 들고 빌어먹게 될 염려는 없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특히 조세를 감하여 주신 은혜를 입게 되면 떠돌아다니며 비럭질하게 될 걱정은 면하게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쌀을 주어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임금의 다리 부위에 약간의 부기(浮氣)가 있었는데 곧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시립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儒生)들을 불러 보고 탕제(湯劑)를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하순(下詢)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10월 12일 병진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게 하였다.

 

윤10월 14일 무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정언 한영(韓栐)이 계주(啓奏)하여, 황해 병사(黃海兵使) 전광훈(田光勳)은 탐욕스럽고 마음이 혼탁하기가 견줄 데 없고 형장(刑杖)을 너무 지나치게 쓰고 있다 하여 빨리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풍문(風聞)을 믿을 수가 없으니, 다시 더 상의한 후에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10월 17일 신유

윤사국(尹師國)을 대사간으로, 윤경연(尹景淵)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윤10월 19일 계해

조숙(趙)을 대사간으로, 홍지해(洪趾海)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홍지해는 홍인한(洪麟漢)과 가장 친밀하기 때문에 홍인한이 입시할 즈음에는 홍지해를 칭찬하여 말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는 당시 성상의 옥체(玉體)가 연이어 요양하는 중에 있어서 모든 일을 빈번이 알려 드린 뒤에 비로소 어쩌다가 기억하기 때문에 늘 홍지해를 칭찬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기억하여 두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기백(箕伯)을 작과(作窠)190)  하고, 홍인한이 한익모(韓翼謨)에게 부탁하여 홍지해를 첫번째로 의망(擬望)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갑(李𡊠)을 명하여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홍지해가 서백(西伯)191)  이 되면 〈동생인〉 홍술해(洪述海)가 때마침 해번(海藩)192)  으로 있어서 지척인 양서(兩西)를 형제가 함께 맡을 수 없는 형세였으므로 해서(海西)의 도백(道伯)을 특별히 교체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갑은 젖먹을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를 잃었다고 하여 특별히 그 대임으로 제수하고 그에게 한 도(道)의 관공(官供)을 가지고 그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10월 20일 갑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오재소(吳載紹)와 홍국영(洪國榮)에게 숙마(熟馬)를 면대해 주었다.

 

윤10월 21일 을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문신에게 제술(製述)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직장(直長) 유협기(柳協基)를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윤10월 23일 정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10월 25일 기사

제주(濟州)에서 감귤(柑橘)을 바쳤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천신례(薦新禮)를 행하게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 당금귤(唐金橘) 종자를 제주에 보내었는데, 그 뒤 귤 나무가 열매를 맺어 목사(牧使)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면 임금은 곧 선원전(璿源殿)에 천신(薦新)하였다. 이때 임금은 요양중에 있었으므로 왕세손에게 명하여 섭행(攝行)하게 한 것이다. 이어서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감귤을 나누어 주고 선비에게 시험을 보일 것을 명하였는데, 이수함(李壽咸)을 뽑아 급제를 내렸다.

 

부사직(副司直) 강유(姜游)가 상소하여 북경에 사신으로 갈 때에 쓰는 은화(銀貨)를 절약하여 은을 저축하는데 유의하고, 서울이나 변방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의 경비 외에 남은 전화(錢貨)를 모두 은으로 바꾸어 저축하여 일체 다른 용도로 옮겨 쓰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에 내려 거기서 품달하게 하고, 내일 아침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유사(有司)의 여러 당상들은, 일찍이 연경에 다녀온 사람들과 상의한 뒤에 입시하여 소견을 진술하라."
하였다.

 

윤10월 26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제주 사람을 불러 세 고을의 농사 형편과 목사의 치적(治績)을 묻고,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내가 연화문에 나간 것은 옛날을 본받으려는 의도에서이다. 섬으로 돌아가서 나는 섬의 백성이 편안히 잘 산다는 소리를 들은 뒤라야 임금의 자리가 편안할 수 있음을 전하라. 목사 유혁(柳爀)이 봉급을 덜어내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 숙마(熟馬)를 내려 주어라."
하였다. 임금이 교리(校理) 유강(柳焵)을 제주 독운 어사(督運御史)로 삼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는 지금 나를 대신하여 빨리 제주로 가서 감진(監賑)193)  하여 탐라(眈羅)의 백성으로 하여금 몹시 괴로움을 당하는 걱정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제주에 진자(賑資)의 절반인 9천여 석을 나리창(羅里倉)의 곡식과 연읍(沿邑) 소재의 곡식으로 나누어 보내도록 명하고 제주 백성을 위유(慰諭)하는 윤음(綸音)을 지어 내려 주었다.

 

여러 대신들이 하의(賀儀)를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응제(應製)194)  에 입격(入格)한 서호수(徐浩修) 등에게 각각 상을 주었다.

 

승사(承史)195)  와 유신(儒臣)에게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윤독(輪讀)하도록 명하였다.

 

윤10월 27일 신미

여러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이 동지 하례(冬至賀禮)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왕세손이 시측(侍測)하였다가 간절히 청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세손의 효성를 굽어 살펴 보시고 여러 백성들의 심정을 특별히 따르시면 한 나라가 거의 효도로써 일어날 것입니다."
하고, 승지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동짓날과 성상의 탄생하신 해의〉 간지(干支)가 갑술(甲戌)인 것은 더욱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사실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왕세손이 또 간곡히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은근한 정성은 금석(金石)이라도 뚫겠다. 이 당(堂)에서 하례를 받아 어린 세손의 마음을 펴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10월 28일 임신

장령 이평(李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듣건대, 두세 사람이 언관(言官)이 상소한 일을 가지고 사헌부의 하인(下人)을 탐문하였다고 하기에 일이 매우 괴이하고 의아하여 사람을 시켜 뒤를 밟아 잡아들였더니, 상놈 2명과 사자(士子) 3명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취초(取招)196)  케 하였더니, 과연 인석(茵席)197)  을 공물(貢物)로 바치는 일을 가지고 처음에는 비국에 소지(所志)를 올렸는데 비국에서 물리쳤으므로 결국에는 언관(言官)에게 부탁하여 상소하려는 계획을 꾸며서 돈을 모아 뇌물을 바치는 길을 몰래 열려고 하였습니다. 나라에 만일 법과 기강이 있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사헌부에서 형조(刑曹)로 이송(移送)시켜 조율(照律)하게 하소서. 신이 생각건대, 지금 이후로는 삼사(三司)와 양 포도청에 신칙하여 엄하게 규찰(窺察)하게 하고, 만일 탄로되어 붙잡히게 되면 중률(重律)로써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듣지 못하였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듣고서야 그냥 평범하게 처리할 수가 없다. 해조(該曺)로 하여금 곧 개좌(開坐)하여 엄문(嚴問)하게 하라. 만일 솔직하게 불지 않으면 잇달아 곤장을 쳐 신문하여 실상을 알아내고 공초를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또한 앞서 이미 행한 것도 신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응제(應製)에 입격(入格)한 서유린(徐有隣)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렸다.

 

인석(茵席)을 공물로 바치려는 일을 형조(刑曹)에서 조사하게 한 뒤에, 하교하기를,
"이평(李枰)은 대각(臺閣)의 나쁜 풍속을 능히 씻어 버리게 하였으니 특별히 숙마(熟馬)를 내려라."
하였다.

 

윤10월 29일 계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한 뒤에 유생과 문관·음관·무관 등을 불러 제세 안민(濟世安民)하는 계책을 가지고 물었으나 한 사람도 취지에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유생으로 온 자는 단지 수명(數名)이었는데 그들이 한 말도 역시 웃을만한 것들이었다. 임금이 곧 물러가도록 명하고, 이어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부복(俯伏)하고, 이르기를,
"조선(朝鮮)에 어질고 착하며 방정(方正)한 선비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이와 같으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4백 년에도 다만 동중서(董仲舒) 한 사람만이 일컬어질 뿐입니다. 현량(賢良)이라는 과목을 어찌 이러한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박도원(朴道源)이 아뢰기를,
"조세선(趙世選)은 일찍이 시종(侍從)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이같이 더럽고 자질구레한 일로 죄를 범하였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냥 도년(徒年)198)  으로써 형량을 감하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절도(絶島)로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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