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술
승지에게 명하여 선혜청 당상과 함께 대궐 문에 앉아 사민(四民)에게 쌀을 주게 하였다.
안대제(安大濟)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예조 당상을 불러 보았다. 이때 임금이 조세선(趙世選)의 일로 인하여 동지날 진하(陳賀)를 권정례(權停禮)199) 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여러 대신과 예조 당상이 교대로 그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고 왕세손도 시측(侍測)하였다가 역시 간절히 청하니, 하교하기를,
"어제의 하교는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세손과 대신과 예조 당상이 이와 같이 간절히 청하니, 억지로 부리치기 어려운 형편이다. 특별히 그 명을 정지한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하교하기를,
"어린 세손의 지성 때문에 내전(內殿)에서 하례를 받게 되었다. 스스로 처음 먹었던 마음을 돌아보건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헌가(軒架)의 종소리와 경쇠소리는 마치 옛날에 들은 것처럼 황홀하나, 산호(山呼)200) 를 3번 부르는 것은 덕이 적은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부끄러운 일이다. 추모하는 마음은 8순(八旬)이 되어 더욱 간절하고 강개(慷慨)한 마음은 등극한 지 50여 년 만에 전에 없이 깊어진다."
하였다. 공인(貢人)들의 구유재(舊遺在)를 또 감하고, 시인(市人)들의 2개월 요역(徭役)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일 을해
임금이 제도(諸道)와 양도(兩都)에 칙유(飭諭)를 내려 권농(勸農)에 힘쓰도록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입시한 여러 대신(臺臣)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다만 전일의 계사(啓辭)만 전하였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현묵(李顯默)과 그 차석(次席)을 차지한 윤이상(尹履相)에게 모두 승륙(陞六)시키도록 명하였다.
공시 당상(貢市堂上)201) 을 불러 보고 세가(勢家)에서 시민(市民)에게 작폐(作弊)하는 일을 물어 보았다.
이조(吏曺)의 삼당(三堂)202) 이 패초를 어기고 곧바로 개정(開政)하지 않은 이유로써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조엄(趙曮)을 판서로, 서명선(徐命善)을 참판으로, 박사해(朴師海)을 참의로 삼았다.
한성부의 5부(五部) 관원(官員)을 불러 보고 여염집을 탈입(奪入)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다.
11월 5일 무인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익빈(申益彬)이 상소하여 인삼(人蔘)에 대한 폐단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소장을 올림은 차견(差遣)한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할 만 하다. 내가 이에 그를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마침 차대(次對)할 때이므로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요청한 바를 모두 특별히 허락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강계에서 별복정(別卜定)203) 의 인삼 약간의 수량을 북도(北道)에 나누어 보내도록 앙진(仰陳)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한익모가 또 통영(統營)의 영하(營下)에 있는 어전(漁箭)을 그들로 하여금 그전처럼 구관(句管)하게 하고, 세전(稅錢)은 수량대로 균역청(均役廳)에 상납하게 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간 조영필(趙榮弼)이, 제도(諸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을 엄칙(嚴飭)하여 진곡(賑穀)을 이획(移劃)하는 외에는 자기 마음대로 이전(移轉)시키지 못하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익모가 통영에 대하여서는 똑같은 법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통영에 대하여서는 금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6일 기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직접 향을 전하니 왕세손이 직접 받아 가지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작(奠酌)을 대신 행하였다.
11월 7일 경진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신대현(申大顯)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엄(趙曮)을 안흥 첨사(安興僉使)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엄은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려 따르지 않았다. 개정(開政)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도 조엄이 여러번 불러들이는 패초를 어기니, 임금은 그가 포만(逋慢)하다는 이유로써 외직에 보임하는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판서로, 이담(李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성 윤상후(尹象厚)는 칙교(飭敎)가 있은 뒤에 상제(庠製)204) 를 설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사판(仕版)에서 지울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11월 8일 신사
김노진(金魯鎭)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헌납 김치구(金致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언배(李彦培)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오로지 재물만 모으기를 일삼았습니다. 싼 값에 은(銀)을 사들일려고 하는데 은점(銀店) 사람이 따르지 않으니,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다가 끝내는 그를 장살(杖殺)하였습니다. 간신(諫臣)이 논계(論啓)하여 형리(刑吏)와 대질시키게 되자 갖가지 말로 꾸며대면서 그럴듯하게 속여 공초(供招)를 바쳤는데, 비록 성상의 일월(日月) 같은 밝으심으로도 오히려 진상을 다 밝히지 못하시어 마침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언배를 먼저 파출(罷黜)하고, 빨리 본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조사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중률(重律)로써 처벌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수안 군수의 일은 인명(人命)과 탐오(貪汚)에 관계되는 것이니, 도신을 시켜서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9일 임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청(郞廳)을 불러 보고 그들이 마음에 품었던 바를 하문하였다.
응제(應製)에 수석을 차지한 조재준(趙載俊)을 가자(加資)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내국 제조(內局提調) 김상철(金尙喆)과 서명응(徐命膺)도 역시 제진(製進)케 하였는데 어필(御筆)로써 김상철의 시권(試券)에는 삼상(三上)을 쓰고, 서명응의 시권에는 삼중(三中)을 썼다. 김상철에게는 구마(廐馬)를, 서명응에게는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11월 10일 계미
오재소(吳載紹)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궐 안에 입직하는 관원을 불러 보고 그들이 마음에 품었던 바를 물어보았다.
11월 11일 갑신
임금이 대신(大臣)과 8도(八道)에 대한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굶주린 백성으로서 상경(上京)한 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 없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선전관을 시켜 유민(流民) 2명을 불러들였는데, 주대(奏對)한 것이 사실과 틀린 것을 알고 경기 구관 당상을 중벌(重罰)에 따라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11월 12일 을유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응제(應製)에 합격한 사람인 이상건(李商建)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조 판서 김종정(金鍾正)이 입시하여 사면을 청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체직을 허락하고, 그자리에서 곧 하교하기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사유(四維)205) 에 지나지 않는데 전석(前席)에서 간곡히 아뢰어 억지로 그 청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한 번 늦추고 한 번 죄는 것은 또한 문·무(文武)의 도이다. 전 판서 김종정에게 다시 이조 판서를 제수한다. 만일 다시 소명(召命)을 어기게 되면 마땅히 임문(臨門)하여 개정(開政)할 것이다."
하니, 김종정이 이내 명령을 받들어 개정(開政)하였다.
11월 13일 병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박팽년(朴彭年) 자손이 지금 사판(祠版)206) 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산다고 하는데, 특별히 정려(旌閭)를 허가하시어 격려하는 방법을 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귀한 일이다."
하며, 곧 그렇게 하라고 명하고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한익모는 또, 조성복(趙聖復)을 개장(改葬)할 때에 별치부(別致賻)207)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늘 조성복에게 잔인(殘忍)하였다고 느낀다. 곧 부의를 내려 주라."
하였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의철(李宜哲)을 빈객(賓客)의 직임에 처하게 하여 주연(胄筵)에 출입하게 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한때의 식욕(食慾)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는 농우(農牛)를 잡아 죽이는 것을 어찌 차마 하겠느냐? 중첩된 도살이나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엄중히 금하게 하라."
하였다.
명령을 내려 계방(桂坊)208) 의 김이안(金履安)을 불러 선교(宣敎)하기를,
"김이안이 어찌 다만 초선(抄選)한 사람의 자식일 뿐이겠는가? 증(贈) 이의(吏議) 김성행(金省行)의 조카라고 한다. 나라를 위한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늙은 나이가 되니 더욱 생각이 난다.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내가 그의 숙부에게 표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그 아비는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시골에 숨어 살았는데, 나는 일찍이 사모하였다. 김이안을 좋은 곳의 수령(守令)으로 비의(備擬)하게 하라. 기왕에 그 아비를 녹용할 수가 없었으니 그로 하여금 관공(官供)으로 제사하게 하여 저승[九泉]에서라도 나의 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정해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에게 이르기를,
"영상이 어제 조성복(趙聖復)의 일로 아뢴 바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곧 내가 가장 잔인하게 대한 사람이다. 조태구(趙泰耉)의 무리가 아주 흉악하였다."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조성복을 꼭 제거시키려고 한 것이 더욱 몹시 잔인하였습니다."
하니, 판부사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조성복의 일은 가장 참절(慘切)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태학(太學)과 사학(四學) 유생에게 제술(製述)을 시행하였다. 이때 임금이 꿈에 현자(賢者)를 만나 함께 국사(國事)를 의논하였는데, 이는 필시 훌륭한 보필을 얻을 징조일 것이라고 여겨 이 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책제(策題)를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달도록 명하였는데, 과차(科次)를 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임금이 한 사람도 요지를 간략하게 앙대(仰對)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차등(次等)을 두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백세(百世)의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혼모(昏耗)하여 능히 가르치지 못하는 한탄스러움을 모두 알게 하라. 이것이 어찌 노여움을 전가하는 것이겠는가? 곧 내가 부덕한 때문이다."
하고, 또 음관(蔭官)들은 와서 기다리고 제목을 걸어 시취(試取)하라고 명하였다. 고관(考官)이 먼저 올라온 시축(試軸)을 가져와서 읽어 아뢰니, 임금이 명령을 내려 그 시권(試券)에 쓰기를,
"현자(賢者)를 구하려는 희망이 간절하였다. 허두(虛頭)는 비록 준엄하고 강직한 것 같으나 협잡(挾雜)하여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어찌 명쾌하고 정직하게 탁 터놓고 말하여 나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게 못하느냐?"
하였다. 10여 장이 모두 이와 같으니, 품제(品題)209) 를 하고(下考)로 두도록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연일 현자를 구하려 하였으나 뽑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 다만 4경(四境)이 다스려지지 않을 뿐이겠는가? 특별히 감선(減膳)하라."
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고관(考官)이 2개의 시권을 가지고 들어와서 낭독하고 아뢰기를,
"한 장은 잘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령을 내려 탁봉(坼封)210) 하게 하니 바로 조진관(趙鎭寬)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조상경(趙尙絅)의 손자인가? 문장을 만드는 데 말이 간략하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말한 것이 진실로 심절(深切)하니, 조엄(趙曮)은 자식을 잘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땅히 그 아비를 사면하여 그 자식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겠다."
하고, 조엄을 외직(外職)에 임명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정지하였다. 또 비점(批點)211) 을 명하고, 이르기를,
"너의 대책(對策)은 내가 꿈속에서 수작한 것과 서로 비슷하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니, 독권관(讀券官) 이은이 말하기를,
"다만 그 사람에게만 영광일 뿐 아니라 감선(減膳)하라는 전교도 자연히 거두시게 되니, 진실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구현과(求賢科)로서 조진관에게 급제를 내리라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고 판서 조상경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1월 16일 기축
조엄(趙曮)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문관 제학 조진관(趙鎭寬)을 특명으로 가자(加資)하였다. 임금이 시관(試官)에게 명하여 융무당(隆武堂)에서 삼청(三廳)212) 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을 시취(試取)하게 하고 용호방(龍虎榜)213) 을 갖추게 한 뒤에 그날로 집경당에서 창방(唱榜)하도록 하였다. 조진관에게 명하여 전상에 올라와 술잔을 잡게 하였다. 조금 진어(進御)한 뒤 조진관에게 내려 주며 이르기를,
"너는 꿈속에 만난 훌륭한 보필지신(輔弼之臣)이다. 그리하여 마시다가 남은 술잔을 친히 내려 주니, 반드시 다 마시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승자(陞資)가 너무 빠르다고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또한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한 일이 있다."
하였다.
11월 17일 경인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간 박성원(朴盛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남강로(南絳老)의 소어(疏語)가 비록 알맞다고 하기에는 흠이 있지만 그 당시에 대료(大僚)가 정청(庭請)하여 그 죄를 성토하고 마침내는 주륙(誅戮)하게 되니, 도성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방에서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가 대신(臺臣)이었고, 언사(言事)214) 였기 때문입니다. 언관(言官)이 견책(譴責)을 당하게 되면 대관(大官)이 신구(伸救)하는 것은 실로 우리 왕조(王朝)의 아름다운 일인데, 오늘에 와서는 도리어 죄를 성토하는 행위를 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히 어떻겠습니까? 특별히 남강로를 신원(伸冤)하여 주시고 이어서 그 벼슬을 회복시켜 주어 그의 고아(孤兒)인 자식과 과부인 아내를 위로하여 주시고 또한 온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 전하께서 회오(悔悟)하신 성덕(盛德)을 모두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까지도 사은(謝恩)을 미루기에 이제 막 하교하려던 참인데, 그대의 상소가 과연 도착하였구나. 그러나 남강로는 곧 이적보(李迪輔)가 창도(唱導)하여 대계(臺啓)에서 ‘대성(大成)’이라는 두 글자를 함께 일컬었으니, 자나 깨나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적보가 곧 남강로이고 남강로가 바로 이적보인데, 지금 이러한 요청은 그 세 번째 사람이 되고자 함이니 진실로 이상스럽다."
하고, 하교하기를,
"남강로는 그 임금을 등지고 감히 계(啓)를 올렸음을 왕부(王府)215) 에서 지만(遲晩)하였으니, 그에 대해 이미 옥안(獄案)이 단결(斷決)되었으나 신중히 심리하고자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216) 을 하였다. 몇해전 편당(偏黨)이 심할 때 누가 감히 돌보아 주었던가? 그런데 더구나 같은날 이적보가 진장(陳章)하여 한 사람은 정법(正法)하고 한 사람은 작처(酌處)하였으니 누가 감히 여기에 대하여 말참견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감히 신원(伸冤) 두 자를 가지고 장주(章奏)에 써서 올렸으니, 당(黨)을 비호하는 것도 역시 역적이다. 이와 같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당파가 지금도 남아서 역시 신원하기를 청하니, 이는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관절(關節)이다. 박성원을 흑산도(黑山島)에 천극(荐棘)하게 하여 세 사람이 함께 놀도록 하라. 도헌(都憲)은 곧 합사(合辭)217)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렇게 감히 시애(撕捱)하며, 물러가지 말고 기다리게 한 뒤에도 역시 어찌하여 아무말 없는가? 〈국가의〉 흥체(興替)에 관계되는 일이니, 임희교(任希敎)에게는 삭직(削職)하는 법을 빨리 시행하고, 이조 판서는 기왕에 수유(受由)를 허락하였으니, 허체(許遞)하여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삼아 패초(牌招)하여 개정(開政)하게 하라. 양사(兩司)는 하비(下批)218) 를 기다려 패초하거든 직무에 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송영(宋鍈)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시취(試取)를 명하여, 수석을 차지한 권지언(權之彦)에게 급제를 내려 주었다.
대사간 송영(宋鍈)이 패초(牌招)를 어긴 이유로써 장기현(長鬐縣)에 귀양을 보냈다.
이계(李溎)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계가 아뢰기를,
"죄인 남강로(南絳老)는 전하가 50년 동안 고심(苦心)해 온 바를 저버리고 스스로 중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누가 감히 그를 변명하고 구호하겠습니까? 그런데 천극(荐棘) 죄인 박성원(朴盛源)이 감히 ‘신원(伸冤)’ 두 자를 가지고 방자스럽게 진장(陳章)하였으니, 그 행위를 따져 보면 불측(不測)하기 그지 없습니다. 천극하라는 형벌이 비록 형량을 참작한 성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가의 체통을 엄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냥 천극하는 형벌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흑산도 천극 죄인 박성원을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여 왕법(王法)을 빨리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에 이르러 대각(臺閣)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번 나의 처분은 역시 뜻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거칠고 도리에 어그러진 사람을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8일 신묘
임금이 이계(李溎)의 계사(啓辭)를 가지고,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고 여겨, 남구마(南廐馬)를 특별히 하사하고 전정(殿庭)에서 직접 받게 하여 정직한 것을 가상히 여긴다는 뜻을 보이게 했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설행하도록 명하여 홍시부(洪時溥)·최현중(崔顯重) 2명을 뽑았다.
11월 19일 임진
조준(趙㻐)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승문원 참하(參下)의 면시(面試)를 명하여 3명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이수함(李壽咸)을 승륙(陞六)시키도록 명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승지로 삼았다.
호서 어사(湖西御史)가 복명(復命)하였다. 충주 목사 서각수(徐覺修)는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들이게 하고, 문의 현령(文義縣令) 박대순(朴大淳)과 아산 현감(牙山縣監) 박일원(朴一源)과 홍산 현감(鴻山縣監) 정지순(鄭持淳)·전의 현감(全義縣監) 신함(申涵)·신창 현감(新昌縣監) 이수형(李修亨)·당진 현감(唐津縣監) 김경조(金景祖)는 모두 삭직(削職)시키게 하였는데, 어사가 진달한 바에 따른 것이다.
11월 20일 계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불러 보고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진강(進講)하도록 명하였다. 동궁(東宮)과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 판부사(判府事) 이은(李溵),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우부승지 안대제(安大濟), 가주서(假注書) 박상집(朴相集), 기사관(記事官) 서유련(徐有鍊)·성정진(成鼎鎭)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리자, 임금이 이르기를,
"탕평(蕩平)이 어느 때에 있었느냐?"
하니, 한익모가 아뢰기를,
"홍범(洪範)에 보이는데, 한(漢)·당(唐) 이후에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비록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더라도 진실로 수응(酬應)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데도 어찌 만기(萬幾)를 수행하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옛날 나의 황형(皇兄)219) 은 ‘세제(世弟)가 가(可)한가? 좌우(左右)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지금의 시기는 황형이 계실 때에 비하여 백 배가 더할 뿐이 아니다. 〈전선(傳禪)한다는〉 두 자(字)를 하교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우므로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성상의 안후가 더욱 좋아지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뜻은 이러한데 경 등이 몰라 주니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심법(心法)을 어린 세손에게 전하여 주려고 하는데, 《자성편》, 《경세문답》은 곧 나의 사업(事業)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일후(日後)에 소대(召對)할 때에는 《경세문답》과 《자성편》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220) 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221) 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하여 나를 지성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를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나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222) 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223) 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224) 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225) 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226) 하여 그 말이 비할 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하여 신하의 예(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인한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임금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여 노성중(盧聖中) 등 19명을 뽑았다.
저녁에 임금이 춘방(春坊)의 상·하번에게 명하여 소대(召對)할 때에 강(講)할 《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겸필선(兼弼善) 정민시(鄭民始)와 설서(說書) 신광경(申光絅)이 앞으로 나와 부복(俯伏)하니, 내외편(內外篇)의 편제(篇題)를 읽으라 명하고, 또 어제 발문(御製跋文)을 쓰도록 명하였다. 하순(下詢)하기를,
"요즈음 시상(時象)을 보니, 대신(大臣)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심법(心法)을 나의 손자에게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진강(進講)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소대(召對)할 때에 듣고 이야기할 만한 것에는 어떤 문의(文義)가 있는가?"
하니, 정민시가 우러러 대답하기를,
"어제(御題)는 체모가 중하기 때문에 감히 문의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반드시 이렇겠는가? 이 뒤로는 다른 경서(經書)의 예(例)에 따라 함께 강론(講論)하여도 좋다."
하였다. 궁관(宮官)227) 이 일어났다가 엎드리니, 임금이 세손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춘궁(春宮)에 있을 때에 궁관에게 힘을 얻은 것이 많았다. 너도 그들에게 벗을 사귀는 도리로 대접하고 조용히 강설(講說)하라. 너는 주야로 내곁에서 모시고 있느라고 과연 그럴 여가가 없겠지만,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정성을 진실하게 할 것 같으면 어찌 여가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사부(師傅)의 책임은 매우 중한 것인데, 오늘날의 일로써 살펴본다면 나는 얼굴이 붉어짐을 깨닫지 못하겠으니, 어찌 너에게 권유하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마는 세도(世道)가 이와 같고 대신이 이와 같고 나의 기력도 이와 같으니, 나의 사업이 뒷날 민몰(泯沒)될까 두렵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읽어서 구절 구절을 깊이 유념한다면, 이것이 곧 뜻을 계승하는 효도이다."
하였다.
11월 21일 갑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유당(柳戇) 등 18명을 뽑았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앞서의 도당록(都堂錄) 일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담당하지 않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소학》을 강하였다. 세손을 시켜 그것을 읽게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소학》 한 질은 차례에 조리(條理)가 있고 질서가 정연하다. 아이를 배었을 때 기우듬히 서지 않고 치우쳐 앉지 않으면, 아들을 날 때 과연 능히 단정할까?"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자식을 배었을 때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능히 감동한 바 있어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물뿌려 쓸고 응대(應對)하는 데에서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유독 삼대(三代)228) 때의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삼대(三代) 이후에는 《소학》의 가르침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의 가르침도 역시 행하여지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물뿌려 쓸고 응대하는 데서부터 능히 그 공부를 다 하였다면, 또한 거기에서 미루어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22일 을미
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삼고, 이양정(李養鼎)을 승지로 발탁 임명하였으며, 정일상(鄭一祥)을 호조 참판으로 발탁 임명하고 이어 비국 당상에 임명하였다.
11월 23일 병신
명령을 내려 전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그 아들로 하여금 부축하여 입시하게 하였다.
11월 24일 정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25일 무술
사옹원(司饔院) 초기(草記)229) 에 영남에서 보낸 납저(臘猪)230) 를 돌려보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납저가 기준에 맞는 것을 구하기는 과연 어렵다. 봉진관(封進官)을 파직하지 말고, 가지고 온 사람도 벌주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명을 내려, 선전관(宣傳官)을 흑산도(黑山島)에 보내어 가죄인(加罪人) 박성원(朴盛源), 이적보(李迪輔)의 천극(荐棘)을 검사하게 하고, 그들에게 사서(私書)를 서로 통한다든지 음식물을 보내 주는 것들을 특별히 신칙하여 엄단하게 하였다.
11월 26일 기해
사직(司直) 김기대(金器大)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으나 결국 들어오지 않았다."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조영진(趙榮進)과 이담(李潭)도 역시 죽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놀라서 묻기를,
"그런가? 애석하기 그지없다. 지금 세 신하를 잃었으니, 나의 감회가 어찌 견디겠느냐?"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내려 주고 세 집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안관제(安寬濟)를 교리(校理)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안관제는 역신(逆臣)과 결혼한 것 때문에 세상에서 버린 바가 되었는데, 갑자기 청선(淸選)의 자리에 임명되니 걱정하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았다.
11월 28일 신축
학성군(鶴城君) 이육(李焴)이 《온릉지(溫陵誌)》231) 두 권(卷)을 올리니, 임금이 사각(史閣)의 서고(西庫)에 간수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주서(注書)의 추천을 읽어 아뢰도록 명하고, 이어서 임금이 이르기를,
"유당(柳戇)의 추천은 치우쳤다고 말할 만하다. 그의 추천은 시행하지 말고, 다시 추천을 받아 아뢰도록 하여 83세인 나의 마음이 한결같다는 것을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11월 29일 임인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기미년232) 온릉(溫陵)을 복위(復位)할 때에 아래에서 청한 바인가?"
하니,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전하의 마음에서 결단하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후세에 말썽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세문답(警世問答)》이 고담(古談)보다는 나은가?"
하니, 영부사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경서의 교훈과 서로 안팎이 됩니다."
하였다.
11월 30일 계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입자(笠子)를 쓰고 동궁(東宮)에 기대어 앉았있다가 노창(臚唱)233) 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 침상(枕上)에 누웠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사(朝事)이니 국사(國事)이니 하는 것이 오히려 하찮은 말이 되었다. 경 등이 보기에 나의 기운이 이 한 가지 일이나 알 수 있겠는가?"
하고,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도 대신(大臣)들은 오히려 다투겠는가? 나의 기력이 이와 같으니, 수응(酬應)하기가 더욱 어렵다. 예로부터 전례(前例)가 있던 일을 나는 지금 생각하는 것이다."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비록 이와 같으나 어찌 감히 갑자기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인한(洪麟漢)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받들 수 있는 일입니까?"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내리십니까?"
하고, 이은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러한 하교를 내리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동궁(東宮)이 달하(達下)234) 하는 데 들여보내되, 상소에 대한 비답과 공사 중에 긴급한 것은 내가 왕세손과 상의하여 결정하겠다. 수일 동안 기다려 그 일처리하는 솜씨가 익숙하게 되는 것을 보아가며 마땅히 여기에 추가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은 영의정과 좌의정이 아뢰는 말을 듣고, 진노(震怒)하여 그만 몸소 문을 닫아 버리고 여러 신하들은 빨리 물러 나가라고 하교하였다. 또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일을 어찌 경 등과 더불어 처리하겠는가? 길가에 있는 장승(長丞)에게 묻는 수 밖에는 다시 믿을 곳이 없구나."
하였다. 대신들이 내려가 대전 섬돌에 이르자, 임금이 중관(中官)을 시켜 대신들에게 전하기를,
"대신을 믿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아뢰는 일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임금의 담후(痰候)가 몹시 심해져서, 대신(大臣) 이하는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잠시 후 담후가 조금 나아지자 대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의 기력이 이와 같다. 나의 병을 스스로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례(前例)가 있던 일을 오늘에 내가 결단하여 행하고자 한다. 내가 전후로 내린 하교가 어떠한 것인데 경 등은 듣고서도 못들은 체하여 마치 바람이 귓가를 지나가듯이 흘려 버리고 있다. 경 등은 80세 된 임금을 보는데 어찌 그리 박절함이 심한가? 내가 생각한 바의 일이 있으므로 먼저 경 등에게 알리는 것인데, 경 등은 오늘에 와서 다시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며 미루고 있는가?"
하니, 여러 대신들이 미처 우러러 대답하기도 전에 홍인한이 대신들의 뒤로부터 앞으로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어찌 신자들이 받들 수 있는 일입니까? 차라리 부월(鈇鉞)에 복주(伏誅)되더라도 결코 감히 받들어 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차례로 우러러 아뢰기를 마치자, 홍인한이 또 말하기를,
"오늘 이와 같은 전하의 하교를 받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간다면 신하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몸소 만기(萬機)를 돌보셨지만 조금도 보류되거나 지체됨이 없어서 신 등이 늘 더불어 상대하며 칭찬하고 축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와 같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하교를 내리십니까? 신은 차마 우러러 들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여러 대신들과 함께 물러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이 하는 일은 기괴(奇怪)하도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지금 막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고자 하니, 경 등은 물러가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고, 임금이 승지 이명빈(李命彬)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며 이르기를,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동궁이 달하(達下)하는 데 들여보내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나 시급한 공사는 내가 세손과 더불어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며칠을 좀 기다려 그 일처리하는 솜씨가 익숙하여지는 것을 보아가며 마땅히 여기에 추가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홍인한이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다만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또 임금의 하교에 불러 쓰게 한 전교(傳敎)를 가지고 대신들에게 구전(口傳)으로 하교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승지가 붓을 뽑아 들고 전교를 쓰도록 명하기를 기다렸으나 홍인한이 또 이와 같이 하교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소리를 높여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써놓은 전교를 읽어 보아라."
하였다. 임금의 생각은 조금전에 불러 쓰게한 전교를 이미 썼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홍인한이 또 소리를 높여 아뢰기를,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신자된 자로 누가 감히 읽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동궁이 시좌(侍坐)하고 있다가 이 전교를 곁에서 듣고서는 걱정스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홍인한에게 이르기를,
"이일은 참섭(參涉)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사세(事勢)가 급박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상소하여 사피(辭避)해야 합니다. 비록 두서너 글자라도 문적(文跡)이 있은 뒤에야 진소(陳疏)할 수가 있으니, 두서너 글자라도 꼭 탑교(榻敎)235) 를 받아 내가 진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오."
하니, 홍인한이 묵묵히 앉아 응답하지 않고 승선(承宣)236) 을 돌아보며 손을 저어 중지하도록 하였다. 이명빈은 여러 대신(大臣)들의 뒤에 있었고 여러 대신들은 홍인한의 뒤에 있었으므로 모두가 홍인한의 좌전(坐前)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또 임금의 하교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듣지도 못하였다. 이명빈이 마침내 전교를 써내지 못하였고 대신들이 또 우러러 대답할 말의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한참 있다가 홍인한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임금의 하교를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이 이와 같으니 우선 부표(付標) 등의 일에 대한 말부터 하겠다. 요즈음 부표가 여러 중관(中官)의 손에 맡겨져 있다. 시험삼아 순감군(巡監軍)을 말한다면, 수문장(守門將)의 무리들이 모두가 시골 사람들이고 중관들과 또한 서로 친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저희끼리 부탁하여 순감군을 모면(謀免)하는 폐단이 없을지 누가 알겠느냐? 만일 혹시라도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된다면 나라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데 그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성상의 총명이 전일보다 줄지 않아서 조금도 빠뜨리는 일이 없으니,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이 아뢰는 말을 듣고 문을 닫고, 큰소리로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경 등은 빨리 물러가도록 하라. 오늘날 조정의 일을 경 등과 함께 의논하겠는가? 경 등은 왜 이와 같이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 말하여 보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기력도 더욱 피로할 뿐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물러 나왔다.
순감군(巡監軍)은 동궁에 수점(受點)하고 이비(吏批)나 병비(兵批)는 중관(中官)이 대전(大殿)에 품달한 뒤에 동궁에서 수점하도록 명하였다.
행 도승지(行都承旨) 조재준(趙載俊)·좌승지 이득신(李得臣)·우승지 이명빈(李命彬)·좌부승지 윤광소(尹光紹)·우부승지 안대제(安大濟)·동부승지 이헌묵(李憲默)·부교리 이정규(李鼎揆)·부수찬 조원진(曹遠振)이 구대(求對)하였다. 영부사 김상복(金相福)·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판부사 김상철(金尙喆)·영의정 한익모(韓翼謨)·좌의정 홍인한(洪麟漢)·판부사 이사관(李思觀)이 한곳에 모여앉아 막 구대하려고 할 즈음에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약방 도제조 이은(李溵)·제조 이휘지(李徽之)·부제조 조재준(趙載俊)·가주서(假注書) 김재두(金載斗)·기사관(記事官) 서유련(徐有鍊)·성정진(成鼎鎭)이 앞으로 나와서 부복(俯伏)하였다. 이은이 말하기를,
"조금전에 승정원(承政院)에 내리신 하교는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승정원과 옥당에서 청대(請對)하였으므로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역시 구대(求對)하려고 함께 회좌(會坐)하였습니다. 마침 내국(內局)에 입시하라는 명이 있어서 신이 먼저 들어와서 감히 이와 같이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잇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전례(前例)이다."
하였다. 이은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가슴이 막혀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례는 전연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정원과 옥당에서 이미 청대하였으며, 여러 대신들도 또 청대하려고 합니다. 신이 마침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감히 진달할 것이 있으나, 황공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휘지는 말하기를,
"전례(前例)는 밖에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이와 같이 구대(求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궁(聖躬)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궁께서 시좌하여 곁에서 수고로움을 대신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시니, 이휘지가 말하기를,
"동궁께서 곁에 모시고 있다가 대신 수고하신다면 진실로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할애비와 손자가 오랜 시간을 늘 같이 있으라는 말이냐? 제조가 그르다. 파직시켜 내보낼 것이다."
하고,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제조가 아뢴 내용은 관계(關係)되는 일이 작지 않다. 삭직(削職)하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 보았다. 김상복(金相福)이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 내리신 하교는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 신자가 되어 감히 들을 수 있는 일입니까? 신 등은 전하를 우러러 보기를 마치 연소(年少)하신 군상(君上)같이 여겼습니다. 놀라고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들어 왔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신은 삼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삼가 듣고 놀라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고자 합니다. 용인(用人)이나 용병(用兵) 등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 나라의 대사(大事)이므로 비록 대리(代理)할 때일지라도 이 몇 가지 일은 자연 성상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미 대리 청정하는 등의 일과는 다르고 궐내(闕內)에서 수고로움을 대신한 것은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는데, 경 등은 어찌 이와 같이 너무도 지나치게 생각하는가? 이는 바로 3백 년 내려온 고례(古例)이고 나도 또한 일찍이 하였던 일이다."
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아침에 하교가 나온 뒤 밖에서 듣고 놀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신 등이 서로 이끌고 입시하였는데, 지금 전례에 대한 하교를 받듦에 〈내용이〉 그렇다면, 비록 밖에서 들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고는 하나 어찌 감히 갑자기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양택(金陽澤)과 이사관(李思觀)이 뒤따라 나와서 엎드려 아뢰기를,
"신 등은 삼가 오늘의 하교를 듣고 창황(倉黃)한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하고, 한익모(韓翼謨)가 뒤따라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도 역시 마음이 들떠서 왔는가?"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이 하교를 듣고 진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신도 또한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을 동궁이 점하(點下)하는 것은 곧 3백 년 된 고사(故事)이다. 옛날 내가 눈병이 났을 때 숭릉(崇陵)237) 의 고사를 따라 중관(中官)이 부표(付標)를 하였는데, 지금 이 전례를 사용하는 것은 대리 청정과 아주 가깝지 않다. 아무리 임석(臨席)한 앞에서 부표하더라도 하교를 잘못 들으면, 수망(首望)이라고 한 것을 부망(副望)에 잘못 부표하게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와 같더라도, 중관(中官)이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조용히 생각하여 보고 옛날의 규례로 돌아가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옛날 황형(皇兄)238) 께서 하교하신 그 당시에 이르기를, ‘세제(世弟)가 좋겠는가? 측근의 신하가 좋겠는가?’ 하였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목이 메인다. 고례(故例)가 분명하여 조금 전에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세손으로 하여금〉 달하(達下)하게 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청정(聽政)이라면 다투는 것도 가하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하교하려고 함에 이것은 이것과는 아주 다른 것인데, 그것을 어찌 크게 떠벌리고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기운이 10층(層)은 떨어졌다. 부자(附子)를 더 들이라는 명도 이 때문이다. 긴요하지 않은 공사를 달하하라는 하교를 특별히 정지하고 이 하교를 전례(前例)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할아비와 손자가 손수 점하(點下)하는 것이 옳겠는가? 엄수(嚴竪)239) 의 손으로 부표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는 하늘과 땅, 흑(黑)과 백(白)의 차이이다. 이 어찌 그다지도 급히 서두르는가? 영상(領相)이 명을 들었으면 승선(承宣)이 입시할 때에 따라 들어오는 것이 마땅한데, 그를 불렀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보상(輔相)의 도리인가? 이는 아주 뜻밖의 일이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를 서용(敍用)하지 않는 벌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마땅히 구저(舊邸)에 나가서 심신(心神)을 조금 쉬어야 하겠다. 전후(前後) 상협련군(廂挾輦軍)240) 은 이전 하교에 의하여 거행(擧行)하되, 하교를 기다려 대령하였다가 다만 정시(正時)가 되거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망(政望)을 서둘러 들이게 하고 해방(該房) 승지 이득신(李得臣)은 그 정망을 읽어 아뢰라."
하고, 임금이 부표(付標)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궐내(闕內)에서 수고를 대신하는 것은 고례(古例)에 분명히 있다. 경 등이 어찌 이와 같이 크게 떠벌리는가?"
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신 등은 전연 몰랐습니다. 지금 하교를 받고 또 분명히 전례가 있음을 삼가 들었으니, 신 등이 어찌 감히 다시 진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우매(愚昧)하여 전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하고,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지금에야 전례가 이와 같은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고례가 이와 같은 것을 신 등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지금 하교를 받으니 다시는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다만 순감군(巡監軍)을 낙점(落點)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공사(公事)의 수응(酬應)과 정망의 하점(下點)도 모두 궐내(闕內)에서 대신하게 하려고 한다."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고 이미 궐내에서 하도록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 등이 알만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거둥하겠다고 하교한 뒤에 군병이 반드시 대령하고 있을 터이니, 삼가 하념(下念)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조금전에 서둘던 일을 지금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타협하였으니,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
하였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는 허락을 받고 신 등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천세를 부르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당시에 청대(請對)하고 입시한 여러 대신(大臣)들이 상세하게 정지하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다만 순감군을 낙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공사의 수응과 정망(政望)의 낙점도 마땅히 수고를 대신하게 하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감군만 궐내에서 점하(點下)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홍인한은 언찰(諺札)로 인하여 임금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세손이 홍인한에게 이르기를,
"대리 청정은 오히려 전례가 있었지만 궐내에서 수고를 대신하는데 있어서는 상소에 대한 비답을 얻는 것이 문서의 판하(判下)241) 를 받는 것까지도 모두 세손에게 대신 행하도록 하셨고, 또 대보(大寶)와 계자(啓字)242) 도 다 동궁에 보관하여 두라는 명으로 하교하셨습니다. 윤자(允字)를 써서 내리는 것과 계자(啓字)를 찍어 내려 주는 것은 곧 대섭(代攝)하는 것이므로 명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모름지기 좋은 말로써 앙주(仰奏)하여 주시오."
하였으나, 모르는 체하면서 이에 말하기를,
"궐내에서 한 일을 신 등이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며, 서로 이끌고 물러갔다. 이것으로 보아 홍인한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알 수가 있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지난달 7일 대궐로 돌아오신 뒤의 하교는 외정(外廷)에서 알지 못할 바인데, 홍인한이 그것을 알았다. 이날에 이르러 대계(大計)가 이미 결정되고 임금의 뜻이 더욱 간절했으며, 홍인한 역시 이미 연석(筵席)의 하교에 앞서 들었지만, 오히려 다시 전처럼 말이 많았으며, 오직 자신의 좌차(坐次)가 혹시나 다른 여러 상신(相臣)들의 뒤로 밀려날까 염려하여 다투어 아뢰는 일에 반드시 앞장섰다. 〈왕명의〉 출납(出納)은 승선(承宣)의 직무인데, 〈그들을〉 마음대로 지휘하여 〈조정에〉 들어가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미봉하였으며 밖에 나와서는 비밀스럽게 숨기고 덮어버렸다. 심지어 기무(機務)를 궐내에서 대신 수고하는 것은 곧 대리 섭정(代理攝政)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전교를 내리지 않아 국인(國人)이 알지 못하였다. 우리 왕세손께서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 것은 국사의 민망스러움을 생각지 않아서가 아니었고, 〈성상〉의 지극한 뜻을 우러러 받들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었으며, 참으로 대사(大事)를 주고받음이 밝고 분명하게 하지 않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인한이 이에 ‘신 등이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아뢴 것은 말 자체도 이미 불경스러운 것이지마는 그 의도도 역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의 흉악한 마음과 간사한 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 가릴 수가 없었다. 이 당시 화완주(和緩主)243) 의 후자(後子)인 정후겸(鄭厚謙)이 마음이 바르지 않고 평소 행동이 못된데다 옹주를 믿고는 방자함이 심하였으니, 홍인한과 같이 서로 결탁하여 임금이 정섭(靜攝)하는 기회를 틈타 위복(威福)을 훔쳐서 무롱(舞弄)하였다. 청정(聽政)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게 되자 홍인한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온갖 방법으로 저지시켰으며, 더욱 급하게 안으로는 이목(耳目)을 포치(布置)하고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끌어들여서, 혹은 말을 지어내어 협박하기도 하고 혹은 허튼말로 탐지하며 시험하기도 하였다. 또 궁관(宮官)이 임금을 호위하는 것을 참소로 헐뜯으며 자기에게 빌붙지 않는 자는 반드시 자기들과 가까운 자와 배치 장소를 바꾸려고 하였으니, 주야로 경영하는 정적(情跡)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왕실(王室)의 척련(戚聯)으로 부귀가 또한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나, 스스로 아주 흉악한 죄에 빠져들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이 어찌 일조 일석의 일 때문이겠는가? 오직 우리 왕세손께서 재덕(才德)이 특출하고 영명하며 성을 내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으니, 두 역적이 평소에 이를 꺼리는 바였다. 〈왕세손은〉 고금의 치란(治亂)을 환하게 알고 척리(戚里)들의 정치에 대한 간섭을 깊이 미워하는 것이 두 역적에게는 마음속으로 우려하는 바였다. 우려와 꺼림이 서로 원인이 되어 자신이 나라와 원수가 되었다가 마침내는 성상의 환후(患候)까지 숨겨서 나라의 큰 계획을 저지하는데 이르게 되고 저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협박하는 데 이르게 되고, 협박하는 것도 그치지 아니하여서 거의 동요(動搖)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무엄(無嚴)한 버릇과 불령(不逞)한 마음이 날마다 더욱 더해가서 끝이 없게 되었다. 팔역(八域)에서 추대하려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한 데도 감히 놀라서 당혹할 만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극도에 달했다. 두 역적이 역적이 된 원인을 따져보면 그 까닭은 오래 되었다. 이는 유독 사사(士師)244) 가 된 자라야만 주벌(誅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었는데, 혹은 동궁이 미행(微行)한다고도 하고, 혹은 동궁이 술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김중득(金重得)과 하익룡(河翼龍) 같은 무리는 홍인한의 흉계를 몰래 받아 가지고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된 익명(匿名)의 글을 존현각(尊賢閣)에 투서하였는데, 그 내용이 흉패(凶悖)하였다. 포도청(捕盜廳)에서 그들을 잡아내니, 홍인한이 동궁을 위협하여 그들을 끝까지 신문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강도(强盜)로 조율(照律)하여 종을 만들게 하였다. 홍인한은 정후겸과 함께 내간(內間)에서 창도하여 말하기를, ‘동궁이 외롭고 위태하니 만일 외가(外家)를 후대(厚待)하지 않으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윤양후(尹養厚)와 윤태연(尹泰淵)의 무리가 또 따라서 꾀고 권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소개하니 세력을 이루고 위엄을 세움에 뿌리와 기반이 튼튼하게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동궁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여기었으나 동궁은 그들의 정상을 굽어 살피고서 소행을 매우 미워하고 몹시 괴로워하였으므로 간혹 말이나 얼굴빛 사이에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이 무리들이 흉측한 계획을 축적해 온 지가 오래 되었으나 뉘우칠 줄을 몰랐다. 5월 정시(庭試)가 끝난 뒤에 정후겸과 홍인한의 무리들이 동궁을 공갈(恐喝)시켜 곧 과옥(科獄)245) 을 일으키려고 다만 그렇게 긴요하지도 않은 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방자스럽게 위협하고 버티었던 것이니, 이 무리들의 눈에는 동궁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동궁이 혹 편안히 쉴 때가 있으면 정후겸의 어미 〈화완 옹주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정탐(偵探)하게 하여 좌우에서 엿보았는데, 동궁이 혹 궁료(宮僚)들을 불러 만나보는가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대개 이것은 정후겸이 꾀어서 한 것으로 자기들의 정적(情跡)을 말할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정후겸은 늘 사사로이 동궁을 뵐 때 앞으로 나오면서 몸을 굽히지도 않았고, 출입(出入)할 때에는 탁탁하며 신을 끄는 소리를 내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다. 임금이 화완 옹주에게 이르기를, ‘신을 끄는 소리가 어찌 그리 방자스러우냐?’ 하였는데 이 뒤로 정후겸은 늘 동궁을 대하여 말하기를, ‘옛날에는 신을 끄는 소리까지도 임금을 섬기는 예절이었는데, 성상께서 예절을 굽어 살피지 않으심이 한스럽습니다.’ 하였다. 이 무리들이 동궁에게만 무엄하였던 것이 아니라, 성상에게도 불경(不敬)하였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 정후겸은 적신(賊臣) 홍상간(洪相簡)과 더불어 일찍이 사미원(史彌遠)이 미인(美人)을 바친246) 설(說)과 제왕(濟王)이 경애주(瓊崖州)로 귀양보낼 계획을 한 논(論)을 지어 역사를 초록(抄錄)한 논(論)에 나타냈고, 당(唐)나라 순종(順宗)이 〈환관(宦官)을〉 허물없이 가까이 하던 일과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은 잘 호도(糊塗)하였다는 칭찬247) 이 흉도(凶徒)의 입에서 나와 문자로 나타났고 그것이 길거리에 공공연히 떠돌아서 궁중안에 소문이 요란스럽게 퍼졌다. 이와 같이 그 흉악한 의도와 반역의 심보를 오랫동안 품고서 〈동궁을〉 위핍(危逼)하고 동요(動搖)하는 것이라면 못 할 일이 없이 다 하였으니 이루 다 통탄할 수 있겠는가? 10월 이후로는 임금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담이 끓어오르고 헛소리를 하여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홍인한의 무리들은 스스로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의 흉악한 계획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또 정후겸의 어미에게 빌붙으니 두 역적은 곧 기각(掎角)248) 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동궁이 늘 임금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을 초조히 생각하고 염려하면, 홍인한과 정후겸의 무리는 문득 ‘저하(邸下)께서는 임금의 건강 문제에 대해 말을 주고받는 것만을 소일(消日)할 일로 여기십니까? 진실로 저하의 의도가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뜻이 대개 성상의 병세를 숨기는 데 있는 것으로 이광좌(李光佐)가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죄악이었다. 어느날 밤에 존현각(尊賢閣)의 포장(布帳) 밖에서 어떤 사람이 귀를 대고 장내(帳內)의 동정을 엿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궁중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자객(刺客)이 궁중에 들어왔는데 철갑(鐵甲)을 입고 장검(長劍)을 짚었다’고 하여 며칠 동안 어수선하고 떠들석하였는데 흉도(凶徒)들이 말을 퍼뜨리기를, ‘장지항(張志恒)이 만금(萬金)을 주고 자객을 사서 들여 보내냈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흉도들이 몰래 계획을 꾸며서 사람들을 속여서 얼을 빼며 동요(動搖)시킬려고 한 것이다. 홍인한과 홍지해(洪趾海) 등 여러 역적들이 위급(危急)한 형세를 만들어 말을 퍼뜨리기를 ‘홍지해는 살아서는 대관(大官)이 될 만하고 죽으면 서원(書院)을 만들 만하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주벽(主壁)에는 김상익(金相翊)이고 배향(配享)에는 홍지해(洪趾海)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국동(國洞)의 세상이 되면 홍계능(洪啓能)은 정승이 될 것이며 김상익(金相翊)은 학남(鶴南)이 될 것이며, 홍상간(洪相簡)은 문형(文衡)이 될 만하다.’라고 요란히 떠벌려서 그 소문이 궁금(宮禁) 안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들의 계획이 또한 흉악하고 참혹스러웠다. 정후겸의 어미가 일찍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말루하(抹樓下)249) 께서 만일 우리집과 외가(外家)가 아니라면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의(言議)를 취사(取捨)할 때에는 반드시 양가(兩家)를 위주로 한 연후에야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 〈정후겸은〉 저하(邸下)에게는 믿음을 받기도 하고 의심을 받기도 하여 우리 아이가 늘 통절히 말하고 싶었으나 잠시 또 참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역적 정후겸은 동궁에게 이르기를, ‘윤양후처럼 성심껏 보호하려는 무리도 역시 의심 받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말이나 됩니까? 대조(大朝)의 총명하심이 만일 되살아 나시면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이니, 저하께서도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들이 동궁을 위협하는 말이 늘 이와 같았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있는 곳을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었다. 정후겸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동궁의 덕(德)은 전하의 잠자리를 문안하고 수라를 드시는 일을 보살피는데 있습니다. 옛날 임금의 예(例)를 따라 보면 감국(監國)·무군(撫軍)250) 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지만, 대체(大體)로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 해가 둘이 있으면 안되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혐의가 결국 있게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청정(聽政)하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흉악한 역적이 이를 싫어하여 방해하고 공갈하는 것이 온갖 방법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청정하는 일을 내간(內間)에서 하교하였는데, 정후겸의 어미가 처음에는 이 청정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혹은 병을 핑계삼고 혹은 모른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번 물어도 한결같이 모른 체 사양하고 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정후겸이 그렇게 종용한 것이다. 정후겸은 널리 심복들을 배치하여 동궁의 일거 일동을 탐문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문서의 왕래까지라도 정후겸의 어미가 틈만 있으면 찾아내어 정후겸에게 전하여 주어 근거없는 말로 공갈할 자료를 삼게 하였으니, 그 당시 동궁의 위태로움을 상상으로도 알 만하였다. 그러니 충성과 분개를 가진 선비가 어찌 이 무리를 갈기갈기 베어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동궁이 청정을 한 뒤에 정후겸의 어미는 동궁이 청정하는 일에 의도가 있다고 여겨 다시 동궁에게 진소(陳疎)하여 고사(固辭)하라고 권유하였다. 정후겸이 또 말하기를 ‘한번의 소(疏)로써 승명(承命)하는 것은 너무 앞질러 받는다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동궁을 면대하여 모욕함이 이와 같이 무엄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갈하고 업신여기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아! 흉악하도다.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한 뒤에 정후겸이 떠들며 말하기를, ‘임금의 병환이 점점 나아질 희망이 있는데 군신(群臣)들을 시험하여 보려고 이 하교를 내렸다. 마땅히 운운(云云) 【이 두 자는 차마 쓸 수 없는 말이다.】 해야 한다.’고 하니, 역적 홍인한은 그제야 말하기를, ‘정 대감[鄭台]251) 은 내간(內間)의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이 말은 매우 옳다.’ 하고는 그들 사이에서 서로 공공연히 전파하니 만고에 어찌 이런 흉악한 말이 있단 말인가? 흉악한 무리들이 요망한 심상운(沈翔雲)을 사주(使嗾)하여 나오게 하였는데, 따뜻한 봄이 되어서는 임금의 건강이 좋아질 것이니 심상운의 글로 ‘온실의 나무[溫室樹]252) ’라는 석 자를 아뢰면, 자연히 임금은 의심을 가져서 건명문(建明門)에 전좌(殿座)하고 먼저 궁관(宮官)을 심문하게 될 것이며, 궁관을 일망 타진하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서명선(徐命善)의 상소가 또한 승부를 다투게 되었으니, 그 계획은 음험하고 또한 참혹한 것이었다. 이 때를 당하여 흉역(凶逆)들이 안팎에 웅거하여 서로 결탁하고 뭉쳐서 동궁을 위핍(危逼)하고 국본(國本)을 뒤흔드는 일에 안하는 짓이 없었으니 국가의 형세가 위기 일발과 같은 것이었다. 아!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예(禮)는 당우(唐虞) 같은 훌륭한 시대에 시작되어 역대(歷代)로 그것을 따랐으니 이미 전고(典故)를 이루었다. 옛날 효종 대왕(孝宗大王) 때에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옛날 태자(太子)가 참결(參決)하였던 말을 인용하여 고하였다. 이 당시 효묘(孝廟)의 춘추(春秋)는 한창 왕성한 때였는데도 선정신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더구나 임금이 대질(大耋)253) 의 나이인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또 더구나 병환이 깊이 든 뒤에 있는 것이겠는가? 우리 저하(邸下)는 적손(嫡孫)의 중하신 몸과 저이(儲貳)254) 의 높은 지위로 모든 정사를 대리 청정하는 것은 마치 요제(堯帝)가 늙자 순제(舜帝)가 섭정하는 것과 같아서 곧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백세(百歲)를 기다려 보아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다. 지위가 대신에 있는 자는 마땅히 고사(故事)를 참고하여 임금에게 청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지금은 이와 반대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니, 필경에는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신충(宸忠)을 결단하였다. 여기에 대성(大聖)255) 께서 종사(宗社)를 염려함이 깊고 원대함을 우러러 보게 되는 까닭이 있다.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신성(神聖)하고 영명(英明)하시어 오랜 동안 여러 역적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고, 의리의 큰 곳을 환하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척리(戚里)들의 용사(用事)를 매우 미워하였다. 더욱이 숙특(淑慝)256) 과 역순(逆順)을 구분하는 데 엄격하여서 스스로 여러 역적들로부터 그 마음을 엿보게 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역적들이 형체를 숨긴 채 궁중 안으로부터 농간을 부린 허다한 죄악은 하늘을 속일 수 있고 온 세상을 속일 수는 있었더라도 털끝만큼도 속일 수 없었던 것은 오직 저궁(儲宮)257) 뿐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저들이 저궁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들의 일을 방해한다고 미워하다가 중간에는 그들의 간사함을 엿본다고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대립하는 형세가 이루어지자 모위(謀危)하는 흔적이 점점 생겨나고 자기들을 보전하려는 계획이 더욱 깊어지자, 위를 핍박하려는 꾀가 점점 급해져서 마침내는 죽음을 걸고 저궁과 원수가 된 것이니, 이는 진실로 일의 정세가 꼭 그렇게 되게끔 된 것이었다. 다만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자애스러우시어 간흉들의 정적(情迹)을 통찰하시었으며, 비록 정섭(靜攝)하던 중에도 담증(痰症)이 조금만 그치면 말씀과 하교가 엄정하고 분명하여 흉도로 하여금 감히 음흉한 계책을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대책(大策)을 정하여 대리(代理)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어 억만년 무강(無彊)한 터전을 열어 주셨으니, 아! 참으로 훌륭하셨다.
조진관(趙鎭寬)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제수하기를 명하고, 이어서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경(卿)을 시험코자 하니, 경은 힘쓸지어다. 내가 바라는 부암(傅巖)의 꿈258) 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묵묵히 있으니 아주 해괴한 일이다. 그 사위의 청을 듣고 그 사위의 글을 받아서 감히 간인(刊印)을 청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여 감히 분수에 넘치는 일을 넘겨다보는 마음을 근절시켜라. 그리고 그의 장인[婦翁]을 시켜 상소(上疏)하게 하였는데,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나라의 은전(恩典)을 사람마다 바라게 될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아주 중대하다. 그 사위를 3년으로 기한하여 정거(停擧)259) 하도록 하라. 양사(兩司)는 귀가 먹었느냐? 빨리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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