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진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10일을 감선(減膳)하고, 정조(正朝)의 하례는 권정(權停)하며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역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같은 소리로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 조재준(趙載俊)이 전교를 작환(繳還)260)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낙점(落點)이 아니라 바로 대점(代點)인데, 충자(沖子)가 만약 상소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불윤(不允)’〉 두 글자의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하교를 반포한 후에 마땅히 수라(水剌)를 들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전 제조(提調) 이휘지(李徽之)의 상소는 그 말이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한 데 불과한데, 이번의 처분은 지나쳤으니,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 답하기를,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 사람이 누구인가? 좌우가 충신(忠臣)이다. 좌우가 충신이다."
하였으니, 대개 어제의 수응(酬應)이 이미 많았고 상선(常膳) 역시 빠뜨려, 밤중에 담증(痰症)이 더해 참기름을 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 사람이 누구인가?[是誰是誰]’란 네 글자는 대신이 즉시 받들어 행하지 않아서 성심(聖心)을 과로하게 하여 증세를 더하게 했다는 것으로써 옳지 않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좌우가 충신이다. 좌우가 충신이다.[左右忠臣 左右忠臣]’라는 여덟 글자는 근일에 매양 경묘(景廟)261) 의 ‘좌우가 옳은가?[左右可乎]’라는 하교를 외었는데도, 대신들이 임금의 뜻을 체득하지 않고 심지어 ‘좌우는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여, 마치 좌우가 충신인 것처럼 했던 까닭에 또 이 여덟 글자로써 개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12월 2일 을사
하교하기를,
"이제 기운이 조금 안정되었으니, 놀라운 일을 신칙해야 마땅하다. 대신(大臣)에게 이미 하교하였고, 도승지 조재준(趙載俊)과 두 유신(儒臣)은 모두 특별히 체직시키되, 승지는 이택진(李宅鎭)을 제수하라."
하였으니, 승지와 두 유신이 어제 구대(求對)했었기 때문이다.
승지 이득신(李得臣)·이명빈(李命彬)·안대제(安大濟)가 상소하여 함께 벌받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정유년262) 의 고사(故事)를 알았을텐데, 그저께의 하교를 어찌 자세히 상고하지 못하였는가? 지신사(知申事)263) 에 대한 처분 역시 대략만 한 것인데, 어찌 지나치게 승강이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대신(大臣)이 입시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계청하기를,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를 간삭(刊削)하고, 그 사위를 역시 정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나, 그의 사위는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264) 의 손자로서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빼 문외로 방축(放逐)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승지가 위패(違牌)한 것은 사세가 본디 그렇다 하여 아울러 체직을 허락한다고 명하였다. 강시현(姜始顯)·채위하(蔡緯夏)·윤면승(尹勉升)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3일 병오
행 부사직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오직 우리 성상께서 임어하신 지 이미 50년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하시고 노고하심을 하루같이 하시어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느라 거의 소간(宵旰)265) 을 돌보지 않으시고, 번잡한 기무(機務)로 인하여 혹 보양(保養)에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를 이어서 오늘날의 하교가 계셨으니, 이 대리(代理)하는 일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성(至誠)·측달(惻怛)하신 하교는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돈어(豚魚)266) 에게까지 믿음을 사기에 족하였습니다. 지금 대신이 된 자는 마땅히 그 말을 자세하고 신실하게 하고, 그 일을 신중히 처리하여 국체(國體)를 더욱 중하게 함으로써 예심(睿心)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듣건대, 지난달 20일 대신이 입시하였을 때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감히 ‘동궁(東宮)이 알게 할 필요 없다.’라는 말을 함부로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저군(儲君)이 알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알아야 하겠습니까? 아성(亞聖)이 임금을 공경하는 의(義)267) 를 비록 이런 사람에게 책임지우기는 어렵겠으나, 그 무엄하고 방자함은 아주 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참(常參) 때에 전 영상(領相) 한익모(韓翼謨)의 ‘좌우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또 무슨 망발입니까?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엄수(閹竪)268) 들이나 할 맹세의 말을 한 것이니, 옛날의 대신 가운데 또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날 아뢴 내용 가운데, ‘대내에서 한 일이니, 신은 쟁집(爭執)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천만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의 성교(聖敎)는 나라에 있어서 얼마나 큰 일이 되는데도 궁위(宮闈)의 안에서는 비밀로 하고 깊고 엄한 가운데 행하여 만백성이 알 수 없고 팔방에서 들을 수 없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의 오늘날 거조는 명정(明正)하고 뇌락(磊落)269) 하여 천고에 탁월하시니, 성심(誠心)과 간측(懇惻)한 뜻이 사교(辭敎) 사이에 애연(藹然)하였습니다. 그런데 아! 저처럼 모든 사람이 다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는 자가 이를 허문(虛文)·가식(假飾)으로 보고 오로지 미봉(彌縫)하기를 일삼아 전하께서 고심하는 지덕(至德)으로 하여금 어둡게 하여 드러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갈양(諸葛亮)이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거늘, 하물며 막중하고 막대한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 말이 비록 무식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고 하나, 그 사실은 불충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나라 일이 이러하고 대신이 또한 이와 같은데도 옆에서 들은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삼사(三司)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통곡하고 크게 탄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손수 상소문을 봉하고 직접 궐하(闕下)에 나와 경건한 정성으로 바쳐 우러러 성청(聖聽)을 번거롭히오니, 삼가 비옵건대, 성상의 밝으신 지혜를 혁연(赫然)히 떨쳐 펴시어 크게 밝은 명(命)을 내리시고 빨리 대신의 죄를 바로잡아 국가의 대사가 존중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서명선(徐命善)으로 하여금 그 상소문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내국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이 인의(引義)하여 궐외에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승지 정호인(鄭好仁)·가주서 임석철(林錫喆)·기사관 서유련(徐有鍊)·성정진(成鼎鎭)이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이 서명선에게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였다.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지난달 20일 연중(筵中)에서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누구는 무슨 색(色)270) 이고, 어떤 사람은 무슨 관직에 맞는가를 마땅히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조정의 일을 익숙히 알게 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홍 인한이 대답하기를, ‘이런 일들은 동궁께서 알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이 이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것이 과연 말이나 되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내가 들을 때에도 역시 어떨까 하였었다."
하였다. 읽다가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30일 연중(筵中)에서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붙이게 하였기 때문에 수망(首望)이라고 부르면 부망(副望)에 잘못 부치고, 부망이라고 부르면 말망(末望)에 표지를 잘못 붙일 것이니, 그 사이에 어찌 폐단이 없겠는가?’라고 하셨는데, 한익모(韓翼謨)가 대답하기를, ‘좌우에서 어찌 그렇게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성려(聖慮)의 미친 바가 참으로 지당하셨는데도, 이에 도리어 그렇지 않다고 맹세의 말을 하였습니다. 좌우의 일을 대신이 어떻게 분명히 알겠으며 나라가 본받아야 할 대신의 말이 어찌 이래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르다."
하였다. 읽다가 ‘대내에서 한 것이니, 신은 쟁집(爭執)하지 않겠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이휘지(李徽之)의 말인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은 홍인한의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그날 입시 때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대내에서 이미 하였다.’라고 하셨는데, 홍인한이 말하기를, ‘만약 대내에서 하신 일이라면, 신이 어찌 반드시 쟁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처럼 막중하고 막대한 일은 명분을 바로 하고 말을 순(順)하게 하여 예(禮)에 의거하여 거행하되, 안팎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된 자가 반드시 머뭇거리며 미봉(彌縫)하려고 ‘밖에서 한 것이라면 쟁집하겠지만, 대내에서 한 것이니 쟁집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읽다가 ‘성심(誠心)이 간측(懇惻)한데도 허문(虛文)·가식(假飾)으로 보았다.’라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문턱을 치면서 말하기를,
"과연 그렇도다, 과연 그렇도다."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 서명선이 일어났다가 다시 엎드려 말하기를,
"신은 타고난 성품이 본디 유약(柔弱)하여 일찍이 삼사(三司)에 있을 때에도 한 사람도 탄핵하여 논박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관직이 없는 때에 어찌 반드시 이렇게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아 신이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사람 가운데 그 누가 거실(巨室)의 미움을 받으면서 솔선하여 진달하겠습니까? 신이 만약 이러한 줄을 알면서도 앞뒤로 눈치를 보고 머뭇거리면서 곧바로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와 동궁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전하와 동궁을 저버리고서 어떻게 죽어서 신의 아비를 뵐 수 있겠습니까? 일신(一身)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서 지위를 벗어나 진달한 것은 실로 어리석은 충심이 격발(激發)된 데서 나온 것인데, 특별히 사대(賜對)를 입어 남은 생각을 다 진달하게 하시니, 비록 물러가 골짜기에 빠져 죽더라도 더는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는, 이어 소리내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는 소리를 들으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위인이 유선(柔善)함을 알고 있었으나, 오늘날 이렇게 수립(樹立)할 줄을 몰랐으니, 어질다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충성이 격발되어 나온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세 건의 일 가운데서 아래 한 건은 신이 좌상과 함께 연석(筵席)에 들어갔었기 때문에 진달하여 아뢴 형상을 자세히 압니다. 그날 순감군(巡監軍)의 낙점(落點)을 위해 이병비 망통(吏兵批望筒)271) 을 대전(大殿)에 여쭌 뒤에 동궁(東宮)에 들이라는 일을 정원(政院)에 명하시자, 여러 승지가 합문(閤門)에 나가 작환(繳還)하였습니다. 신들 역시 추후에 입시하였는데, 전 영상이 죄를 입은 후에 좌상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고례(古例)가 있다고 하교하셨으나, 근거할 만한 고례를 신들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성상께서는 ‘대내에서 대점(代點)한 것이요, 나 역시 일찍이 했었으며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는 바로 3백 년 동안 해 온 고례이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좌상이 말하기를, ‘신들은 알겠습니다. 모든 망통(望筒)에 관계된 것은 아래에서 곧바로 동궁에 들이겠습니다. 이제 안에서 대점(代點)하는 고례가 있었다는 하교를 들었는데, 신들은 처음에 성교의 본의를 몰랐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원임 대신을 부르도록 명하고, 또 양사(兩司)에 패초(牌招)하여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영부사 김상복(金相福)·영돈녕 김양택(金陽澤)·판부사(判府事) 이은(李溵)·판부사 이사관(李思觀)·대사헌 송형중(宋瑩中)·사간 성윤검(成胤儉)이 나와 엎드리니, 임금이 명하여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를 가져다가 돌려보게 한 후,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니, 영부사 김상복이 말하기를,
"그때에 시임 대신과 함께 입시하여 간절한 하교와 대점(代點)하라는 명이 전에도 있었던 일이라는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성상의 생각이 표지를 붙이는 것에 혹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신 데서 나온 것이어서 시임 대신이 받들었고 원임 대신 역시 시임 대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명선의 상소가 어떠한가?
하니, 김상복이 말하기를,
"반드시 어느 곳에선가 들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두 대신이 아뢴 것 가운데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과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들이 연석에서의 말을 듣지 못하여 전연 알지 못합니다. 서명선이 알고 있으니, 서명선에게 묻는 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의 근원에 대해서 논하지 말고 서명선의 말이 옳은가 틀린가 단지 그 시비만 아뢰면 된다."
하니, 김상복이 ‘시비(是非)’ 두 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앙대(仰對)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상소했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신은 연석의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재신은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재신의 상소가 비록 옳고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야 하나, 그 가운데 한 단락(段落)의 말은 처음부터 본사(本事)에 대해 제기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갑자기 그 소를 보아서 그 이면(裏面)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창졸간에 어찌 감히 질언(質言)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은은 말하기를,
"신은 그동안 황송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이제 소명을 받들었기에 입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과 서명선은 지친(至親)이 되기 때문에 서명선의 상소에 대해 신은 감히 가부와 시비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과 서명선은 친척 사이인가?"
하니, 김상복이 말하기를,
"이 대신과 서명선은 사촌(四寸)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도 그날 입시했었는가?"
하니, 이은이 말하기를,
"그날 처음 명이 내린 후에 외간(外間)에서 전례를 알지 못해 모두 경황이 없어서 정원과 옥당(玉堂)이 즉시 합문으로 나아가 구대(求對)하였습니다. 정원과 옥당이 이미 구대하였기 때문에 대신은 또 감히 물러나오지 못하였고, 시임·원임은 상참(常參)이 끝난 후 미처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끌고 청대하는 즈음에 마침 내국(內局)에 대해 입시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먼저 입시하여 삼가 하교를 받들었는데, 밖에 있을 때에 들은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손수(祖孫手)’ 등의 하교는 아주 간측(懇惻)하여 눈물이 나와 다시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입시하기 이전과 입시한 이후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이 사관이 말하기를,
"이번 이 재신(宰臣)의 상소가 비록 그 소견을 진달하려는 데서 나왔으나, 신은 그날 입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비록 명을 받들고 들어왔으나 본사를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창졸간에 우매하여 능히 앙대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상복에게 말하기를,
"서명선의 말이 옳은가 그른가? 다만 그 시비만 진달하면 된다."
하니, 김상복이 말하기를,
"재신이 무슨 말을 들어서 이처럼 상소했는지 모르겠으며, 신은 연석의 말을 듣지 못했으나 재신은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들이라고 명하니, 임석철(林錫喆)이 미처 수정(修整)하지 못했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서명선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경은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신이 궁관(宮官)의 말을 들으니, 동궁이 이 때문에 진소(陳疏)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들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동궁이 인의(引義)하기에 이르렀는데도 조정 신하들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국체(國體)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상소를 진달한 것은 대개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에 입직했던 사람의 입시를 명하니, 보덕 이상건(李商建)·겸사서 홍국영(洪國榮)이 앞으로 나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지난번에 진소(陳疏)하려고 했었다는데, 너희들이 아뢰어 보라."
하니, 홍 국영이 말하기를,
"이는 신이 춘방에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에 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니, 이상건이 말하기를,
"과연 그때에 왕세손께서 상소하고자 하여 소본(疏本)이 이미 나왔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상소를 들이라."
하여, 정호인(鄭好仁)에게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신은 천만 뜻밖에도 조금 전 여러 신하들이 구대(求對)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이에 두렵고 가슴이 막히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나 어찌 우리 성상께서 지성으로 측달(惻怛)하시는 뜻을 본받아 고통을 나누기를 다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천만 불안한 것이 있는데, 참으로 두 대신의 ‘알게 할 필요가 없고,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연석에서의 주달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아직 나이가 적으니,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으며, 성후(聖候)가 더욱 건승(健勝)하시니 좌우 역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더욱 신이 감히 받들어 감당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쩔 줄 몰라 감히 긴말을 하지 못하고 대략의 문자를 들여 보내 우러러 성청(聖聽)을 구하오니, 성명께서는 소자(小子)의 지극한 간성(懇誠)을 굽어살펴 주시기를 원하오며 간절히 비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과연 이 말이 있구나."
하니, 정호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김상철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삼가 읽어 아뢴 예소(睿疏)를 듣건대, 사부(師傅)가 주대(奏對)한 말로써 인의(引義)하는 단서를 삼았으니,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중관(中官)이 전한 것이다."
하고는, 엄문(嚴問)하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그때 동궁이 시좌(侍坐)하여 직접 들어서 그리된 것입니다."
하니, 이은이 말하기를,
"신이 그때에 내국(內局)의 〈도제조로서〉 입시하여 우러러보니, 동궁께서 시좌하여 직접 들으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동궁이 시좌한 일이 없었다. 이판부사(李判府事)가 혹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은이 말하기를,
"그날 내국이 입시할 때에 동궁께서 분명히 시좌하였으며, 또 ‘《자성편(自省篇)》·《경세문답(警世問答)》 등의 책을 서연(書筵)에서 진강(進講)하면 심법(心法)을 전수(傳授)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하교하신 바가 계셨습니다. 그때 동궁께서 시좌하시어, 정녕 앙첨(仰瞻)하였습니다."
하니, 김상복·김양택·김상철이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그때에 내국의 도제조가 목도(目覩)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이은이 말하기를,
"누차 진달하여 아주 황송하오나, 그날 동궁께서 시좌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 판부사가 참으로 보았는가?"
하니, 이은이 말하기를,
"그날 우러러본 것이 비단 분명할 뿐만 아니라, 《자성편》 등의 책자로 심법(心法)을 전수받으라는 뜻으로 동궁을 교회(敎誨)할 때에 연신(筵臣)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전교를 지워버려야 한다."
하였다. 이어서 대신(臺臣)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말하기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는 말을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옥서(玉署)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 ‘색목(色目)을 성상의 마음에 머물러 둘 필요가 없다.’라고 앙주(仰奏)한 바가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좌상이 색목의 일을 가지고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는데, 신은 그것이 잘못인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우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어떤가?"
하니, 송형중이 말하기를,
"이 역시 본사(本事)를 자세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사간 성윤검(成胤儉)이 말하기를,
"신의 뜻도 도헌(都憲)272) 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김상복이 말하기를,
"도헌의 말 역시 그럴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상소는 옳은가 그른가?"
하니, 송형중이 말하기를,
"신의 뜻으로는 너무 심각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서명선(徐命善)은 내가 안 지 오래인데 털끝만큼도 남을 해치는 마음이 없었다. 이번의 이 일을 나는 결단코 한결같은 혈충(血忠)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특별히 원임 대신을 부르고, 또 양사를 부른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어서였는데, 여러 원임 대신들이 예사 일로 보아 ‘본사를 모른다.’라는 것으로 흐지부지하려 하고, 한 원임 대신은 중관(中官)을 엄호하니, 아뢴 바가 한심하다. 처음에 이미 정원(政院)에서는 겁을 먹고 모호(模糊)하게 입계(入啓)하였는데, 어찌 원량(元良)의 시좌를 알고도 엄수(閹竪)를 엄호하는가? 대신의 체모가 아니니, 판부사 이은에게는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영부사 김상복은 처음에는 모호하게 하다가 도헌(都憲)의 말을 듣고서야 ‘신의 마음 역시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으니, 어찌 그리 구차스러운가? 판부사 이은과 함께 또한 같은 율을 시행하여 머뭇거리는 습성을 면려하도록 하라. 영돈녕 김양택(金陽澤)은 성심(誠心)으로 부른 뜻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개탄스러움을 금하겠는가? 특별히 현임(現任)을 해면한다. 아! 지금의 내 하교가 어찌 마음 편해서 그러한 것인가? 한결같은 고심(苦心)으로 이런 일을 막고자 해서인데, 비단 구차할 뿐 아니라 말이 모두 놀랍도다. 아! 한 재신이 가슴 가득한 충심(忠心)에서 이런 일을 하였는데, 나는 단지 그의 선(善)함만을 알았을 뿐, 이렇게 수립할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충자(沖子)의 진장(陳章)을 듣고서 강개(慷慨)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이는 곧 그의 아비를 저버리지 않고, 또한 그의 형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아! 만년에 한 곧은 신하를 보았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도헌(都憲)이 지난번 아뢴 바를 오늘날 세밀히 보니, 어찌 이처럼 놀라운가? 도헌의 직분을 무너뜨려 사람들로 하여금 대신 부끄럽게 하였으니, 삭직하는 법을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 허다한 대신(臺臣)이 근습(近習)을 따라서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으니, 내가 스스로 대신 부끄러워지도다. 하나같이 아울러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양사가 이미 비었으니, 내가 마땅히 교체하겠다. 보상(輔相)이 임금의 마음을 민망히 여기지 않고 단지 문후(問候)하는 것만 능사로 여기니,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런 까닭에 막중한 하교가 바람이 지나가는 것같이 되어버렸다. 이번의 이 말 역시 미봉(彌縫)하는 데서 말미암아 그런 것이었다. 이런 등등의 보상(輔相)이라면 비록 천 명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전 영상 한익모(韓翼謨),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에게 아울러 삭판(削版)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근래에 환관(宦官) 무리가 작용(作俑)273) 하는 습성이 없지 않으니, 한(漢)나라 때의 십상시(十常侍)274) 와 당(唐)나라 때의 전영자(田令孜)275) 가 지금 다시 생기려 하는 것인가? 내가 비록 노쇠했으나 태아검(太阿劍)이 손에 있으니 어찌 이런 무리들의 제재를 받겠는가? 아! 세도(世道)가 이러한데 83세의 임금이 어느 때에 강개(慷慨)한 직언(直言)을 듣겠는가?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하는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오직 저 높고 높은 푸른 하늘뿐이다."
하였다.
신(臣)이 삼가 상고하건대, 정후겸(鄭厚謙) 모자(母子)가 홍인한의 여러 적들을 끼고서 내외에서 요사한 일을 선동하여 사변(事變)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10월 7일 안으로부터 하교가 있으면서부터 외척 관계의 여러 역적들이 본디 먼저 외정(外廷)에서 들어 알고는 지휘(指揮)·배포(排布)함이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그후 11월 20일의 연교(筵敎)와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동궁으로 들이고 대점(代點)하라는 명이 계속 내렸는데, 임금이 매양 한번 하교하면 여러 역적들이 문득 한번의 흉계를 더하였다. 이때를 당해서 대리 청정(代理聽政)의 대책(大策)이 이미 결정되었으나, 대리 청정의 성명(成命)이 내리지는 않았었다. 여러 역적들이 백가지 계책으로 저지한 것이 그 형세가 이에 더욱 급하게 되었고, 그들의 계책이 또 대리 청정을 저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급한 기미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을 만큼 박두하였다. 궁료(宮僚)들이 사생(死生)을 걸고 흉역(凶逆)의 정상을 한번 밝히고자 하여 그 계책을 결행했으나, 처지가 혐의쩍어 단지 화(禍)만 불렀을 뿐이었다. 서명선(徐命善)이 이에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에 죽을 결심으로 마침내 한마디 말을 아뢴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대책(大策)이 빨리 정해졌으므로 우리 나라 4백 년 큰 기업(基業)이 길이 공고하게 되었다. 서명선 같은 이야말로 참으로 옛날의 이른바 위충(危忠)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공로는 또 어떠한가? 송형중이 억지로 부당한 말을 끌어대어서 홍인한을 위해 변명하여, ‘심각한 글이다.’라고까지 하면서 서명선을 배척한 것을 살펴보면, 적의 세력이 크게 날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번 성상의 해와 달 같은 밝으심이 아니었더라면, 서명선은 흉도들에게 어육(魚肉)이 된 지 오래였을 것이니, 아! 오늘날까지 나라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각해도 오래오래 더욱 잊지 못할 것이다.
12월 4일 정미
김상철(金尙喆)을 영의정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좌의정으로 제배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기관(機關)은 만고에 처음 있는 일이다. 순감군(巡監軍)에 대한 하교를 청정(聽政)으로 잘못 알고 한바탕 성급하게 굴었도다. 충자(沖子)는 그 일을 모르고 역시 마음이 움직여 왔다가 영상과 좌상이 아뢴 바를 듣고서 서당(書堂)에 나아가 상소문을 초(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뢴 바를 들으니, ‘조금 도움이 되겠다고 여겼으므로 이처럼 상소문 가운데 첨입(添入)하였는데, 그 도움이 된다고 여겨 첨서 낙점(添書落點)한 것이 도리어 사부(師傅)의 일대 죄안(罪案)이 되었으니 내가 우습도다. 한때의 성급한 소란에 내 뜻도 진정되지 않았는데, 어린 나이에 어찌 마음이 진정되었겠는가? 그런데 상소문을 쓰면서 여러 행(行) 사이에 한 곳도 착오가 없었으니, 바로 내가 송(宋)나라의 태조(太祖)가 태종(太宗)에게 한 말을 인용하면, ‘이는 실로 뜻밖에 이처럼 숙성(夙成)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기쁘도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러한 손자가 있는데, 내가 어찌 마음을 쓰겠는가?
어제 서명선의 상소를 통해 그 사람을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백 사람이 ‘기관(機關)을 만든다.’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그러나 승지가 아뢰기를, ‘소장 가운데 중대한 일이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 〈서명선을〉 불러 상소를 읽게 하고서야 내 마음이 태연해졌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누구의 손자이며,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동생인가? 수립(樹立)함이 이와 같은 것은 충심(忠心)이 한결같고 이 단단(斷斷)하고 혈성(血誠)이 가슴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아! 내가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하며 이 상소에서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결코 그럴 이유가 없다. 결코 그럴 이유가 없다. 두 조항의 일에 대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장차 어떤 사람처럼 되겠는가? 더군다나 원량(元良)이 이미 포가(褒嘉)하였는데, 이제 어찌 다시 유시하겠는가?
이 방안에서 함께 입시하였는데,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끝에서 들은 한마디 말은 과연 미봉한 것이니, 이런 등등의 대신들을 어찌 믿겠는가? 가소롭게도, 도헌(都憲)을 특별히 불러서 양사(兩司)의 공언(公言)을 듣고자 한 것인데도 그 상소를 보고서는 그대로 전에 아뢴 말로써 흐지부지하려고 하였다. 이런 등등의 말은 비록 대신의 부자·형제라 하더라도 어제까지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도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사람이 기(氣)가 넘치지만 나는 오히려 곧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특별히 불러서 그의 가슴 가득한 뜻을 보고자 한 것이었는데, 교활하였다. 도헌을 특별히 불러왔는데도 흐지부지하고 흩어버리니, 이 역시 내가 마음속으로 강개(慷慨)해 하는 것이다. 83세나 된 조선(朝鮮)의 임금이 대신(大臣)을 믿겠는가, 이목(耳目)의 신하를 믿겠는가? 이후에 내가 믿을 자는 단지 백성들뿐이다. 아! 만약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면, 후일 연중(筵中)의 일을 백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나에게 반드시 알려줄 것이다."
오대익(吳大益)을 부수찬으로 삼고, 윤광소(尹光紹)를 병조 참판으로 탁제(擢除)하였으며, 서호수(徐浩修)를 승지로, 신회(申晦)를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12월 5일 무신
승지를 보내 고(故) 판서 서종옥(徐宗玉)을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내가 잘 안다. 이번의 이 일은 가슴 가득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어서 특별히 대신(大臣)을 불러서 물었더니, 모두 머뭇거렸다. 그러나 강개하게 솔선하여 능히 그의 아버지와 형을 생각하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한 것이다. 고 판서 서종옥은 아들을 잘 두었다고 할 수 있고, 아! 만년에 나 또한 신하다운 신하를 얻은 것이다. 옛날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이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여 그 이름이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말편(末編)에 올랐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비록 정문(旌門)을 세워 주더라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어찌 가자(加資)만 하고 말겠는가? 내가 스스로 겸연쩍으니, 비록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내리더라도 이것이 어찌 그 충성에 보답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두 자급(資級)을 건너뛰는 데 불과하고, 지금 마침 자리가 있으니, 특별히 도총관(都摠管)을 제수하여 이처럼 머뭇거리는 구차스런 세상에서 중외(中外)가 모두 그의 충성을 알게 하라. 내가 장차 제문을 지어 내려 정려를 대신할 것이다. 승지를 보내 고 판서 서종옥을 치제하도록 하라. 고 판서의 영혼이 알게 된다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고 북쪽을 바라보며 사례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세문답(警世問答)》은 어떤가?"
하니, 제조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경세(警世)하는 가르침과 신민(新民)하는 방도가 모두 이 책에 들어 있습니다."
하였다.
12월 6일 기유
정홍순(鄭弘淳)을 병조 판서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남 어사(湖南御史)가 복명하였는데,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약행(金若行), 여산 부사(礪山府使) 김상훈(金相勳), 만경 현감(萬頃縣監) 한덕후(韓德厚),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격(李格), 옥과 현감(玉果縣監) 유정양(柳正養),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보한(李普漢)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이평(李枰)·고익경(高益擎), 헌납 이중복(李重馥)이 아뢰기를,
"삭판(削版)한 사람 한익모(韓翼謨)·홍인한(洪麟漢)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알게 할 필요가 없고 걱정할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아뢰어 머뭇거리며 미봉할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니, 이는 천만 무엄한 일로써 삭판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은 삭판한 사람 한 익모·홍 인한을 문외 출송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처분하였는데, 국체(國體)를 존중하고 방헌(邦憲)을 엄히하는 데 있어 어찌 율(律)을 더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니, 이평이 말하기를,
"이조 참의 박사해(朴師海)는 한갓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하는 태도만 지녀 이처럼 합사(合辭)가 한창인 날을 당하여 양사(兩司)를 안배하여 의망(擬望)하는 즈음에 세력이 있는 자와 사사로이 안면이 있는 자를 감히 의망에 넣지 못하고, 3백 명 시종(侍從) 가운데 세력 없는 향리에 있는 사람만 구차하게 충당해 의망하였습니다. 신은 박사해에게 빨리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신(儒臣) 이유경(李儒慶)이 말하기를,
"오늘 여러 대간의 합계에 대해 ‘어찌 율을 더하겠는가?’라는 비답을 내렸으니, 여러 대간들은 마땅히 피혐(避嫌)해야 하는데도 피혐하지 않아 대간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합계한 여러 대신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12월 7일 경술
하교하기를,
"이번 일이 있고 난 뒤로 내 마음이 불안정하다. 충자(沖子)가 처리하는 것을 본 연후에야 내 마음이 펴질 수 있겠다. 장문(狀聞) 가운데 품지를 청한 것이 있으면 2, 3장(張)을 동궁으로 들여 그 답을 보겠으니, 승지는 가지고 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신이 방금 정원에 내린 비망기(備忘記)를 보았는데, 지극히 인자하신 우리 성상께서 어찌 이런 하교를 하셨습니까? 신은 참으로 황송하고 기가 막혀 그 까닭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아!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나, 어찌 우리 전하께서 지성(至誠)으로 측달(惻怛)하시어 반드시 시험해 보려 하신 뜻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건대 신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학식이 넓지 못하여 한갓 일월(日月) 같은 빛에 의지해서 저이(儲貳)276) 의 임무를 욕되게 하며 문침(問寢)·시선(視膳)하는 자식의 당연한 직분도 오히려 잘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이번의 성명(成命)은 바로 국체(國體)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근심이 눈에 가득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어려워지는 때를 당하여, 스스로 효과를 이루고 마음을 다해 대신 수고하는 도리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나, 어리석은 식견과 노둔한 재주여서 실로 조금도 받들 가망이 없습니다. 좌우로 생각하고 헤아려보아도 천만 초조하고 긴박하여 이에 감히 대략의 문자를 들이어 존엄(尊嚴)을 번거롭게 하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소자의 간절함을 굽어 따르시어 특별히 품청(稟請)에 대한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살펴보았다. 아! 묻노니, 나의 손자는 내 나이를 아는가? 이제 83세가 다 되어 간다. 아! 예로부터 드물다는 나이에서도 이제 10여 년을 더하게 되었는데, 이는 건공탕(建功湯)으로 지탱한 것이다. 네 할아비의 기운이 아직 왕성해서 그러했으나 기운이 나른할 때는 자리에 누워야 하니, 전생(前生)에 먹은 바가 옛날 제갈양(諸葛亮)이 나보다 나았는지를 금세(今世)에는 모르겠다. 아!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는데, 너는 어찌 이렇게 하여 네 할아비를 생각하지 않는가? 혹여 잡기(雜技)같이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배우지 않으면 또한 어찌 능할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가 문장(文章)을 배우는 것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만기(萬機)의 국사(國事)에 있어서이겠는가? 지난번의 하교는 이러한 갈등(葛藤)이 있었으나, 이번의 하교가 청정(聽政)하라는 것인가, 대리(代理)하라는 것인가? 이 이후로 나는 마음을 편히 하여 잠자고 때로 좋은 음식을 잘 먹어야 능히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번의 이 하교에 대하여 비록 청정(聽政)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백관의 조참(朝參)이 없고, 또한 대리(代理)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장문(狀聞) 몇 장에 불과한데, 네가 어찌 동요하는가, 네가 어찌 동요하는가? 국초(國初)에 이런 예(例)에 의거하여 승지로 하여금 동궁(東宮)에서 품결(稟決)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고는, 기뻐하며 하교하기를,
"이는 내가 이곳에서 목격한 것인데, 이번의 하교가 바로 이것이다. 네가 과연 받들어 행한 연후에야 저녁밥을 먹을 수 있고, 오늘밤에 잠을 잘 수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상소하는가? 나를 생각하고, 내 뜻을 본받으라."
하였다.
왕세손이 재소(再疏)하기를,
"삼가 신이 무릅쓰고 충간(衷懇)을 진달하여 굽어살펴 주시기를 바랐었는데, 비지(批旨)를 받들고 보니 윤허를 내리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누이 하신 말씀의 뜻이 정령하고 간측하였으며, 또 저녁밥을 드실 수 있고 밤에 잠을 잘 수 있겠다는 하교가 계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우리 성상의 애연(藹然)하신 지극한 뜻을 본받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감당해 받들 가망이 전혀 없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다시 이처럼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소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조선이 할아비와 손자에게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어찌 네 할아비를 곤란하게 하느냐? 어제 밤에는 잠을 잘 잤는데, 오늘밤은 네가 곤란하게 하니, 어찌 눈을 붙이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도승지에게 명하여 비답을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삼소(三疏)하기를,
"삼가 신이 재차 타는 듯한 간절한 마음을 진달하였으나, 천청(天聽)이 더욱 막막하고 말의 뜻이 더욱 간절하시어 신은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우리 성상께서 고심하시는 지성(至誠)을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재주가 노둔하고 식견이 없으니, 어찌 반푼(半分)이나마 받들 가망이 있겠습니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도 오히려 예사로운 정성에 속하므로 급히 몇 줄을 얽어서 우러러 성청(聖聽)에 아뢰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천지 부모께서는 굽어살피시어 빨리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네 삼소(三疏)를 살펴보았는데, 어찌 한결같이 나를 곤란하게 하느냐, 어찌 한결같이 나를 곤란하게 하느냐? 이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우리 나라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충자는 참으로 3백 년 종사(宗社)를 본받고 열조(列朝)의 성덕(聖德)을 저버리지 말라. 아! 할아비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여 장차 당(堂)에 임하여 조참(朝參)을 받게 된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만분의 다행이 되고, 너에게 있어서는 할아비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히 서무(庶務)를 살펴서 감히 소홀히 하지 말고 우리 나라의 3백 년 된 종국(宗國)을 부지(扶持)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도승지는 하교를 가지고 전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구저(舊邸)로 가겠으니 의주(儀注)는 잠시 보류하고, 시각은 하교를 기다리되, 다만 정시(正時)에 들이라. 세손의 수가(隧駕)는 잠시 보류하라."
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상철(金尙喆), 제조 채제공(蔡濟恭), 부제조 이택진(李宅鎭)이 구대(求對)하니, 하교하기를,
"구저에 가서 불러 보겠다."
하였다. 옥당(玉堂)의 상번·하번이 구대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전례(前例)가 없었다고 여기는 까닭에 성급하게 굴지만, 전례가 있는 청정(聽政)으로 거행할 것 같으면, 나는 마땅히 조용히 처신하겠다."
하고, 전교하기를,
"만약 이 하교를 따르지 않을라치면 대소 공사(公事)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 마땅히 전위(傳位)하는 하교를 내리겠다."
하였다.
서유경(徐有慶)·이경륜(李敬倫)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명분을 바르게 한 연후에야 말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아! 복정(復政)한 후에 내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어제의 하교는 전례가 없다고 하였는데, 청정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전례가 분명하게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예에 의거하여 잘 알게 하라. 잘 알게 한 연후에 내가 내국(內局)에 수응(酬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서정(庶政)을 대리 청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서야 겨우 순조롭게 결말이 났다. 83세가 다 되어 충자(沖子)가 나에게 효도함을 보게 되니 천만 다행이다. 구저로 가겠다는 하교는 잠시 보류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처분은 일시 참작할 만한 것이 있어서였다. 때문에 대신(臺臣)이 어제 〈가율(加律)을〉 청하였으나, 모름지기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삭판(削版)하는 법은 너무 가볍다. 삭출(削黜)하는 법을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위(依違)277) ’ 두 자가 지금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대신(大臣)의 몸으로 이미 함께 입시하였었는데도 충자가 들은 바를 대신이 어찌 듣지 못하였겠는가? 개탄스럽다. 송형중(宋瑩中)은 바로 지금의 부당한 일을 지난해에 아뢴 것에 견주면서 흐지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런 등등의 도헌(都憲)을 장차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송형중의 지난번 거조에 대해서는 어찌 한심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두 신하에게 이미 가율(加律)하였으니, 거짓 모른 체한 대신과 흐지부지하면서 모면하고자 한 도헌에 대해서 어찌 이미 처분하였다 하여 묵묵히 있을 수 있겠는가? 어제의 대신(臺臣)에 대해서도 어찌 한심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유신(儒臣)이 청한 바는 체모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 청을 또한 따를 뿐이다."
하였다.
영상과 좌상이 입시하였다. 이택진(李宅鎭)이 왕세손의 상소를 다 읽자,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금일의 하교는 실로 성궁(聖躬)의 노고를 나누고자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신은 대단히 흠앙(欽仰)합니다. 그러나 체모가 어떻겠습니까? 왕세손이 상소한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은 말하기를,
"신들도 성궁의 노고를 나누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이번에 진달한 것은 체모가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古例)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는데, 경들은 모르는가?"
하고는, 왕세손의 상소에 비답을 쓰도록 명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번에 이 장문(狀聞)을 동궁(東宮)에 들여서 그 답(答)을 보고자 한다고 하교하셨는데, 체모가 끝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세손의 상소 가운데도 ‘할 만한가 시험한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감히 받들지 못하는 것이 사체에 있어서 진실로 당연합니다."
하였다.
술시(戌時)에 영상과 좌상이 다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일이 순조롭지 못하게 된다. 당초의 하교는 과연 명분이 없었고, 이번 하교는 경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번의 하교는 바로 정유년278) 의 고사인데, 돌아보건대 지금은 만사가 유유(悠悠)하여 모두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군(人君)이 만년에 정사에 부지런함은 성대한 신들이 매양 오랫동안 수응(酬應)하시는 것을 신들이 보니 아랫사람으로 마음이 민박(悶迫)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왕세손이 청정(聽政)하게 하신 명은 실로 성상의 노고를 나누는 방도이지만, 무릇 국사의 대강(大綱)에 관계된 것은 전하께서 총괄하시고 대소 공사(公事)는 동궁께서 재결하시게 한다면, 상하가 모두 그 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니, 신들이 어찌 받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이 하교 후에도 승후(承候)하는 등의 절차는 마땅히 전과 같을 것이니, 신들이 전하를 모시는 것이 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차대(次對)를 동궁이 하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 대강(大綱)을 살펴보겠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제 이 하교를 받들건대, 신들은 참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만세를 누리소서."
하고, 이사관이 말하기를,
"이번 하교는 모두 종국(宗國)을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니, 신들은 흠앙(欽仰)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충자(沖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조참(朝參) 받는 것을 본다면, 나에게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고례(古例)를 상고해 보건대, 용병(用兵)·용형(用刑)·용인(用人)은 마땅히 전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도정(都政)은 내가 하겠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미 하교를 들은 후이니, 마땅히 즉시 거행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밤이 깊었지만 원임 대신 및 예관(禮官)을 명초(命招)하여 즉시 절목(節目)을 정해서 계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야 사면(事面)이 원만하게 되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청정은 경현당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이 이후부터는 체모를 존중해야 하므로 첫날과 다름이 있어야 한다. 평상시의 차대(次對)는 존현각(尊賢閣)에서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마땅히 위에 아뢰고 아래에 반포하여, 반사(頒赦)·설과(設科)하는 예(禮)가 있어야 할 것이니, 예조 당상은 상세히 상고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12월 8일 신해
하교하기를,
"세손이 만약 상소할 것 같으면 대소 공사(公事)를 원(院)에 머물러 두고, 내국(內局)의 문후(問候)를 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감선(減膳)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네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신이 어제 내린 비망(備忘)을 보건대, 청정하라는 명이 계셨고, 이어서 또 세 번째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82세란 말씀이 계셨습니다. 정령 간측하여 돈어(豚魚)를 감동시키고 신명(神明)을 믿게 하기에 족하였습니다. 받들어 읽다가 절반에도 못미쳐서 황송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격한 눈물이 얼굴을 덮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 신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천박하며, 식견이 없고 재주가 성기어, 저위(儲位)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오히려 두렵고, 오로지 무릎을 맴도는 것만 기쁘고 무채(舞綵)하는 것을 즐거워할 뿐입니다. 비록 예사로운 자구(字句) 사이에도 끝내 감히 지극한 교화의 다스림을 우러러 돕지 못할 것은 성명께서도 통촉하신 바인데, 또 어찌하여 이러한 막중한 하교를 하십니까? 장문(狀聞)을 품청하라는 일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두번 세번 상소하면서 그칠 줄 모르는 것은 진실로 좌우로 생각해 보아도 받들 가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더구나 중대한 민국(民國)과 번잡한 기무(機務)를 갑자기 맡기심에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으심은 어찌해서입니까? 또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있어서 하늘이며 아버지이신데 감싸주고 덮어주시는 지극한 인자(仁慈)로서 어찌 소자의 타는 듯한 정성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비상(非常)한 일을 명하십니까? 밤새도록 불안(不安)하여 마음에 있는 경건한 정성으로 대략 충곤(衷悃)을 나타내어 존엄(尊嚴)을 번거롭게 하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작은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중지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네 상소를 약간 살펴보았다. 충자(沖子)는 어찌 이리 심하게 할아비를 곤란하게 하는가? 아! 복정(復政)한 후 몇 년 동안 가슴이 막혀서 답답했던 것은 그 세리(勢理)로 인해서였으나 하루 저녁에 명쾌하게 풀렸거늘, 손자가 어찌 할아비를 이처럼 곤란하게 하는가? 과연 이럴라치면 수라(水剌)를 어찌 들겠으며 탕제(湯劑)를 어찌 마시겠는가? 이보다 더 큰 것을 비유하자면, 어떤 중관(中官)이 권해서 이렇게 하는가? 이는 조선의 십상시(十常侍)로구나. 만약 할아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청(廳)에 앉았다가 조용해진 후에 방으로 들어가겠다. 소자여, 소자여! 나는 답답하도다. 나는 답답하도다."
하였다.
의정부에서 왕세손의 청정 절목(聽政節目)의 별단(別單)을 입계하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1. 청정 절목은 전교에 의거하여 정유년279) 의 사례(事例)로써 마련한다.
1. 청정의 처소(處所)는 경현당(景賢堂)으로 하고, 평상시의 인접(引接)은 존현각(尊賢閣)에서 한다.
1. 청정할 때의 좌향(坐向)은 역대(歷代) 및 본조(本朝)의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서향(西向)으로 한다.
1. 처음 청정(聽政)할 때에는 조참(朝參)을 한 차례 하고, 상참(常參)은 일이 없을 때에 간간이 한다.
1. 빈청(賓廳)의 일차(日次)는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시할 때 및 서연(書筵) 이외에 인접할 때로 하는데, 승지 1원(員)과 한림·주서 각 1원이 진참(進參)하고, 춘방관(春坊官)·겸춘추(兼春秋)는 당직인(堂直人)이 따라들어가 기사(記事)한다.
1. 종친 및 문무 군신(群臣) 1품 이하는 뜰 아래에서 재배(再拜)하고, 왕세손은 답배(答拜)하지 않는다. 다만 종실(宗室)의 백숙(伯叔) 및 사부(師傅)가 먼저 당(堂)에 올라 재배하면 왕세손이 답배하며, 대신(大臣)의 경우는 사체(事體)가 자별하니 사부일체로 먼저 당에 올라가 재배한다. 빈객은 조하(朝賀) 때에 뜰 아래에서 절하고 서연 때에는 구례(舊例)에 따라 행한다.
1. 종묘(宗廟)·사직(社稷)·능원(陵園)·전궁(殿宮)의 제향(祭享)은 왕세손이 모두 품지(稟旨)하여 대행(代行)하고, 행제(行祭) 때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친히 제사하는 예(例)에 따르며, 축문(祝文)은 섭행(攝行)하는 의례에 의거하여 ‘근견(謹遣)’이라고 쓴다.
1. 용인(用人)·용형(用刑)·용병(用兵) 세 가지 건(件)의 일은 모두 고례(古例)에 의거한다. 양전(兩銓)280) 의 제배(除拜)와 대소 관원의 체직과 파직, 의금부와 형조의 대벽(大辟)281) 처결 및 병조 경외(京外) 군병(軍兵)의 상번(上番) 습조(習操), 경외의 전최(殿最), 양전의 세초(歲抄), 숙위(宿衛)의 체대(遞代), 군호(軍號)와 생기(省記), 궁문(宮門)과 도성문(都城門)의 개폐(開閉) 등의 일은 모두 입계한다.
1. 모든 대소의 소장(疏章), 삼사(三司)의 차자(箚子)와 계사(啓辭), 번곤(藩閫)의 장문(狀聞), 각사의 초기(草記)는 모두 동궁에게 들이되, 변경(邊境)의 중대한 일로 상문(上聞)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곧바로 입계한다. 기타 경외의 신문(申聞)·신목(申目) 가운데 중대한 일에 관계되어 재단(裁斷)하기 어려운 것은 성상께 앙품하라는 뜻을 정원에 하령(下令)하여 거행한다.
1. 명령의 출납은 고례에 의거하고, 청정하는 날부터 왕세손의 명령은 정원에서 주관한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전부터 거행하던 것은 본원(本院)에서 거행한다. 전지(傳旨)는 휘지(徽旨)라 칭하고, 계의윤(啓依允)은 의준(依準)이라 칭하고, 계사(啓辭)는 달사(達辭)라 칭하고, 장계(狀啓)는 장달(狀達)이라 칭하고, 계본(啓本)은 신본(申本)이라 칭하고, 계목(啓目)은 신목(申目)이라 칭하고, 상소(上疏)는 상서(上書)라 칭하고, 백배(百拜)는 재배(再拜)라 칭하고, 상전 개탁(上前開坼)은 세손궁 개탁(世孫宮開坼)이라 칭하고, 근계(謹啓)는 근달(謹達)이라 칭하고, 계문(啓聞)은 신문(申聞)이라 칭하고, 복후 교지(伏候敎旨)는 복후 휘지(伏候徽旨)라 칭하고, 품지(稟旨)는 품령(稟令)이라 칭하고, 상재(上裁)는 휘재(徽裁)라 칭하고, 소차(疏箚) 말단(末端)의 규식(規式)은 구례를 따른다.
1. 모든 문서를 입달(入達)하여 거행한 일은 정원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초록(抄錄)하여 계문(啓聞)한다. 연례(年例)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을 한결같이 다 써서 들이면 어람(御覽)하기에 번거로움이 있으니, 이는 잠시 보류한다.
1. 영패(令牌)는 청패(靑牌)를 사용한다.
1.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는 예조로 하여금 정유년의 전례를 빙거(憑據)하여 참작하여 법식을 정하게 한다. 의장(儀仗) 및 숙위 군사(宿衛軍士)는 병조로 하여금 정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숫자를 보태서 거행하게 한다.
1. 조참(朝參) 및 수하(受賀) 때의 동악(動樂)은 바야흐로 직숙(直宿) 중에 있으니, 정유년의 예에 의거하여 정지한다.
1. 미진한 조건은 추후에 마련한다. 건륭(乾隆) 40년 12월 초8일."
하였다. 아뢴 대로 윤허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과 지금에 대조 하례(大朝賀禮) 때 헌가(軒架)를 설치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이와 같으니 문무과(文武科)의 창방(唱榜)에 진열하고 연주는 하지 않겠는가? 아! 복정(復政)한 몇 년 동안, 가슴이 막혀 답답했던 심정은 형용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세손이 옛날 복정 때의 〈맺혔던 마음을〉 씻어 주니, 효라고 할 수 있다. 능히 할아비를 대리(代理)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해 주니, 이보다 더 큰 효는 없을 것이다. 어찌 이뿐이랴! 아! 83세가 다 되어 청정하는 것이 예전에 어찌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이러한 복정(復政)임에랴? 실로 우리 나라의 막대한 경사이다.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세손의 하례만 받겠으며 나 또한 어찌 사양하겠는가? 그날 경현당(景賢堂) 앞에서 어찌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정유년에 나 역시 우러러보았었는데, 어찌 그 예(例)를 따르겠는가? 그때와는 다름이 있으니, 헌현(軒懸)하는 일을 의주(儀註)에 첨가하고,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은 정유년의 예에 의거하여 그만두라. 조손(祖孫)이 이미 배성(拜聖)하고 입학(入學)하였으니, 정시(庭試)를 간략하게 택일하여 설행하라. 아! 50년 동안 임어한 팔순 노인의 청정(聽政)이 예전에 어찌 있었겠는가? 백성들과 함께 경하해야 한다. 아! 이날에 분의(分義)가 크게 정해졌으니, 어찌 절만 받으랴? 반교(頒敎)와 백관에 대한 가비(加批)는 예(例)에 의해서 하도록 하라. 사문(赦文)은 어찌 지어 올리는 것을 기다리랴? 마땅히 내가 지어 내리겠으니, 중외로 하여금 나라의 경사를 모두 알게 하라. 그러나 어찌 크게 벌이겠는가? 이미 봉전(封箋)이 없으니,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판부사 신회(申晦), 좌의정 이사관(李思觀), 예조 판서 조엄(趙曮)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루 이틀의 만기(萬機)를 내가 어찌 감히 고례(古例)라 하겠는가? 차대(次對)는 이제 충자(沖子)에게 맡겼으니, 한 달 중에 보름 이전의 세 번 차대는 내가 맡겠으며, 한 달 중에 보름 이후의 세 번 차대는 마땅히 충자로 하여금 맡게 하라. 이를 절목(節目)에 첨가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미 기쁨을 나타내셨으니, 진찬(進饌)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사관은 말하기를,
"진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禮)를 귀하게 여겨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내 손자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로 의지한 지 몇 년이었던가? 내가 마땅히 한 번 위로해야 할 것이다. 이번의 이 일은 만고에 어찌 있었겠는가? 내 기쁨을 어찌 이기랴? 대신들 또한 우러러 청하니, 보감(寶鑑)에 의하면 조손(祖孫)이 비록 경현당에서 춤을 추는 것도 가할 것이다.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같은 진연(進宴)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15일에 세손이 소찬(小饌)을 마련해 오면 나도 소찬을 마련해서 전정(殿庭)에서 기다렸다가 쌍적(雙笛)을 연주하면서 전중(殿中)에서 조손(祖孫)이 함께 먹겠다. 내가 받은 것은 정원(政院)에 주고, 충자가 받은 것은 춘방(春坊)에 주는 것이 또한 이날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니, 여러 신하들 모두 알라."
하였다.
12월 9일 임자
하교하기를,
"내일 세손이 조참을 받을 때에 사부(師傅)와 대신(大臣)은 일체로 당(堂)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계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왕세손의 청정 하례(聽政賀禮)를 받았다.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기쁨을 나타내는 노래를 지으니, 악공이 노래로 불렀다. 또 시 한 구(句)를 짓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선교관 서유방(徐有防)이 반사문(頒赦文)을 읽었는데,
"왕은 말하노라. 열조(列朝)의 부탁을 받아 50년 동안 임어하였는데, 그 임금의 나이를 물으면 이미 83세로서 밤늦도록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못가에 서고 얼음을 밟듯하였다. 복정(復政) 때의 일을 생각하니 오장(五臟)이 찢어지는데, 어찌 다만 자신만을 위해서이겠는가? 실로 종국(宗國)을 위해서이다. 몇 차례의 하교가 한갓 갈등만 있었는데, 다행히 이제 광명 정대해져 할아비는 이제 거의 편안히 조섭(調攝)할 수가 있게 되고, 나라에는 반석처럼 굳건함이 있게 되었다. 매양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한다고 일컬었었는데, 이제 손자에게는 할아비를 기쁘게 한 효도가 있고, 할아비에게는 부탁하는 경사가 있게 되었다. 뜰 가운데 특별히 헌현(軒懸)을 베풀고 충자가 경현당에서 조참을 받으니, 나라에는 백대까지 안정됨이 있고 우리 백성에게는 만세의 경사가 있게 되었다. 이에 직접 글을 지어서 먼저 종묘 사직에 고한다. 아! 훌륭하다. 충자가 먼저 당에 올라가 조참(朝參)하고, 그 할아비는 힘겹게 자리에 올라가 하례를 받으니, 오늘의 이 예(禮)를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치사(致詞)한 유생(儒生)과 백관에게 가비(加批)하며, 특별히 차례대로 잡범(雜犯)을 사유(赦宥)하도록 명하니, 이는 구례를 따른 것이다. 아! 오늘 상서로운 구름이 당(堂) 앞에 어리고 만민이 온 나라에서 모두 기뻐하기에 이와 같이 지어 보이노니, 모두 모름지기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사배례를 행하고, 백관 역시 사배하고 산호(山呼)하였다. 인의(引儀)가 당에 올라 앞으로 나가 치사문(致詞文)을 읽고, 예(禮)를 마쳤음을 고하였다. 왕세손이 시좌하니, 하교하기를,
"오늘의 이러한 나라의 경사는 고금에 어찌 있었던 것인가? 공인(貢人)의 묵은 나머지 1년의 조(條)와 시민(市民)282) 의 요역(徭役) 금년 조를 특별히 탕감하여 백성들과 함께 경하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호방 승지에게 명하여 흥화문(興化門)에 자리하여 지난날의 예(例)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사물(賜物)을〉 내려 준 후 아뢰라 하고, 예방 승지 정호인(鄭好仁)과 보덕(輔德) 이상건(李商建)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명하기를,
"감옥을 활짝 열어 죄인을 은사하고, 오늘은 야금(夜禁)을 늦출 것이며 어의동(於義洞) 계민(契民)과 창의궁(昌義宮), 사재감(司宰監)의 계민들에게는 이달을 한정해서 역을 면제하고, 뜰에 들어온 악공(樂工)들에게는 해조에서 쌀과 포(布)를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경현당에 앉아 청정(聽政) 조참(朝參)을 하였다. 봉조하와 시임·원임 대신 등이 당에 올라 재배하니, 왕세손이 자리에서 내려가 재배로 답하였다. 대신들이 물러가고 왕세손이 다시 자리에 올라가니, 백관들이 뜰 아래에서 재배하였다. 예를 마친 후, 보덕 이상건(李商建) 등이 나아가 엎드려 면계(勉戒)하는 말을 진달하니, 왕세손이 가납(嘉納)하였다. 백관이 먼저 물러가고 왕세손은 소여(小輿)를 타고 숭현문(崇賢門)으로 나가 막차(幕次)로 나아갔다. 오시(午時)에 왕세손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숭현문으로 들어가 경현당에 앉아 하례를 받았다. 백관이 흑단령(黑團領)으로 뜰에 들어왔다. 봉조하와 시임·원임 대신이 당에 올라가 재배하자, 왕세손이 자리에서 내려와 재배로 답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당에서 내려오고 왕세손이 다시 자리로 올라가자 백관들이 재배하였다. 예를 마치고 승지 서호수(徐浩修)가 조의(朝儀)를 잘 정제(整齊)하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압반 감찰(押班監察)과 통례원(通禮院)의 관원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서호수가, 또 예모관(禮貌官) 송재중(宋載中)이 실의(失儀)했다는 것으로써 추고하기를 청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령하였다.
왕세손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경현당에 앉아서 승지(承旨)·한림(翰林)과 주서(注書)·옥당(玉堂)·춘방(春坊)·계방(桂坊)·총부 당랑(摠府堂郞)·병조 당랑(兵曹堂郞)·오위 장(五衛將)에게 사찬(賜饌)하고, 이어서 선온(宣醞)하였다. 이택진(李宅鎭)이 당하(堂下)에서 모시는 자로서 혼동해서 당에 올랐던 자들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추고하지 말도록 하령하였다.
왕세손이 경현당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품(稟)을 거친 후 들여야 옳다."
하였다.
보덕 오재소(吳載紹)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저하께서 대조(大朝)의 대리 청정하라는 명에 응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시고 힘써 이어받으시니, 종사(宗社)는 반석처럼 안정되고, 신민(臣民)은 춤을 추는 간절한 정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시종 배우기를 힘쓴다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덕이 닦이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삼태기로 공이 쉽게 무너지고283) , 백척 간두(百尺竿頭)에서는 한 걸음을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니, 마땅히 경홀(儆忽)의 경계를 진념하고 더욱 계속하여 빛나는 방도에 힘써서 순수하고 또한 그지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시고, 능하지 못한 탄식이 있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번거로운 기무(機務)에 이르러서는 부탁하심이 이미 중하니, 참으로 마땅히 척연(惕然)하게 경계하고 조심하시며 새벽부터 밤중까지 부지런하시어 감히 스스로 총명함을 믿거나 쉽게 태만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소서. 혹시라도 스스로 겸손함이 지나쳐 미루어 의탁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의 호령(號令)과 한 번의 동작(動作)이라도 성찰(省察)하여 면려(勉勵)하지 않음이 없게 하시어 대조(大朝)께서 걱정하시는 마음을 풀어 드리고, 억만 생령(生靈)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이 대리 청정하는 명에 응하여 두렵고 삼가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하다. 좋은 잠계(箴戒)가 또 이처럼 진지하니, 마땅히 네 자[四字]를 부신(符信)으로 삼아 궁료(宮僚)가 나에게 보인 정성에 부응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이사관(李思觀)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 8순에 노고를 나누시는 도리를 생각하시고, 열조(列祖)에서 이미 행한 예(例)를 따르시어 방례(邦禮)를 이미 거행하고 정하(庭賀)를 비로소 행하셨습니다. 열성(列聖)께서 우리 저하(邸下)를 돌보시고, 온 나라가 우리 저하께 바라는 것이 오로지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그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위로는 성상께서 부탁하신 뜻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간절히 바라는 군정(群情)에 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거든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훌륭하신 우리 대조 전하의 성덕(聖德)·신공(神功)은 역사에 다 쓰지 못할 정도인데도, 하늘에 국운이 영원하기를 빌고 자손에게 모책(謨策)을 남겨 주는 요점은 하늘을 경(敬)으로써 섬기고 선대를 효(孝)로써 받든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백 년 동안의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건극(建極)의 교화를 이루었으며, 팔도 백성들의 역(役)을 고르게 하여 근본을 공고히 하는 방도를 삼았습니다. 자성(自省) 두 편(篇)은 바로 심법(心法)의 전(傳)이고, 또 저하께서 명을 받들어 강(講)할 것이니, 우리 저하께서 본받아 행하시는 방도가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아! 저하께서는 명예(明睿)의 자질(姿質)로서 계속하여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장중(莊重)·정밀(靜密)하심은 도(道)를 이루는 기반으로 하시고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제를 힘쓰시어 진덕(進德)의 요체로 삼으소서. 그윽이 홀로 있을 때에는 반드시 취함과 버림을 삼가서 하고, 거조(擧措)하는 즈음에는 표리를 다 바르게 하소서. 이것은 천덕(天德)·왕도(王道)의 근본입니다.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시는 데 이르러서는 문조(文藻)의 번화함을 숭상함이 없어야 합니다. 곧은 사람을 용납하면 합하여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질 것이며, 완물 상지(玩物喪志)284) 의 경계를 마음에 두어 검소한 덕을 밝히시고, 좌우의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아 궁금(宮禁)을 엄히 하셔야 합니다. 이를 생각하시고 이에 마음을 두시어 혹시라도 감히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근심이 없다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며 뜻을 계술(繼述)하는 예효(睿孝)를 더욱 힘쓰시는 것은 오로지 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생각건대, 재주 없는 내가 대조(大朝)께서 지성으로 측달(惻怛)하시는 뜻을 본받아 부지런히 힘써 이어받음에 두렵고 경계함이 더욱 간절하다. 정문 일침(頂門一針)의 가르침이 마침 이때에 이르렀는데, 말의 뜻이 진지하여 세 번이나 감탄하였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조목으로 진달한 것은 바로 우리 대조께서 50년 동안 이룬 성덕(盛德)·대업(大業)이다. 소자가 밤낮으로 조심하면서 절반이나마 우러러 이어갈 도리가 오직 이에 달려 있도다. 그러므로 더욱 명심하고 마음에 두어 면려한 성의(盛意)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어 하령하기를,
"사관(史官)은 가서 유시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나라 경사는 삼대(三代)와 한당(漢唐) 때에도 없던 바이다. 당국자(當局者)285) 가 미혹하면 어떻게 온전히 잘 할 수 있겠는가? 한익모(韓翼謨)·홍인한(洪麟漢)·김상복(金相福)·이은(李溵)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
하였다.
12월 11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경과(慶科)를 설시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시제(試題)를 내건 후에 금상문(金商門) 무시소(武試所)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시관(試官)을 따라가 숙배(肅拜)한 후에 임금이 환내(還內)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박상집(朴相集)의 《일기(日記)》는 한림(翰林)이 입시했을 때 들은 것과 어떠한가?"
하니, 성정진(成鼎鎭)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그날의 《일기》를 잘 알고 있는데, 과연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신이 하번(下番) 한림으로서 그날 입시하였었는데, 성교가 지극히 간절하고 자상하였으나 대신(大臣)이 ‘세 가지는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등의 말로써 앙대한 것을 신이 과연 들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사필(史筆)을 잡은 신하가 이처럼 진달하는데, 박상집은 기주관(記注官)인 몸으로 막중한 성교(聖敎)를 뜻대로 쓰지 않았으니, 이날의 《일기》가 어찌 말이 되겠는가? 성교를 낱낱이 써서 내일 안으로 고쳐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령하기를,
"그날 성교 가운데, ‘「세제(世弟)가 옳은가, 좌우(左右)가 옳은가?」라고 하신 황형(皇兄)의 이 말씀을 내가 지금까지 외고 있다.’라고 하셨다. 내가 그때 시측(侍測)하고 있어 이 하교를 들었는데, 박상집의 《일기》에는 이 하교 또한 어찌 감히 쓰지 않았는가? 내일 동가(動駕)하기 전까지 고쳐 써서 들이게 해야 한다. 만약 성교를 《일기》에 쓰지 않으면, 마땅히 잡아다 문초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시관(試官) 김상철(金尙喆)·이복원(李福源) 등이 입시하여 과차(科次)를 매겨 임도호(林道浩) 등 15인을 뽑았다.
12월 12일 을묘
부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저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자질로서 시민(時敏)286) 의 학문에 힘쓰시고, 연석(筵席)에 나아가 토론하여 식견이 탁월하시며 옛날을 사모하고 분발하시어 조예(造詣)가 높고 깊으십니다. 이는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흠앙(欽仰)하였던 바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시탕(侍湯)287) 으로 인하여 뜻을 전일(專一)하게 강독(講讀)에 두지 못하고, 지금은 또 거기다가 대리 청정하는 책임을 맡아 평일의 빛나는 공부가 대부분 기무(機務) 처리에 빼앗기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비록 저하의 독실한 전학(典學)으로도 어찌 한폭(寒曝)288) 의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유자징(劉子澄)289) 은 일찍이 벼슬에 있는 것이 학문을 닦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깨우치기를, ‘성문(聖門)의 덕업(德業)은 처음부터 일용(日用)의 밖에 있지 않다. 하물며 문자(文字)에 있어서이겠는가? 곧 이것이 진덕(進德)과 수업(修業)의 바탕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저하 또한 일찍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서 배우신 바입니다. 오늘 신료(臣僚)를 인대(引對)하여 사무를 수작하심에 또한 정의(精義)로 힘을 쓰지 않아야 할 것이 없으며, 장차 더 진수(進修)함을 그 가운데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문에 혹시라도 강학(講學)하는 공부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원하옵건대 저하께서는 응접(應接)하시는 여가에도 더욱 부지런히 온습(溫習)290) 하시어서, 정사와 학문이 함께 닦이도록 하시고, 이(理)와 사(事)가 서로 통하여 내외가 일치되고 본말이 아울러 갖춰질 수 있도록 하소서. 지난번 이른바 번갈아 용(用)이 되어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기에서 징험하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아! 건극(建極)하고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것은 바로 성상께서 50년 동안 다스린 모책(謨策)이었으니, 제방(隄防)이 늦추어지는 것을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하는 것 역시 성상께서 서로 전수한 가법(家法)이니,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면 배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저하께 있어서는 부탁하신 중함을 본받아 계술(繼述)하는 효(孝)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대각(臺閣)을 너그러이 용납하시는 것은 송(宋)나라 때의 인후한 풍도를 본받으시고,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화미(華靡)를 배척해 끊는 것은 우(禹)임금의 비악(菲惡)291) 의 덕을 따르시며, 당폐(堂陛)가 엄하지 않아 기강이 점차 무너지게 되면 떨쳐 쇄신하기를 생각하시고, 부옥(蔀屋)292) 이 멀리 떨어져서 질고(疾苦)가 들리지 않으면 은밀하게 돌볼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역시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서 가운데 진달한 내용에서 나를 사랑하는 정성을 보겠으니, 마땅히 기무(機務)의 여가에 깊이 생각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는데, 배왕(陪往)하는 여러 신하들이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따라갔다. 승지·사관과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에게 사찬(賜饌)하였다.
왕세손이 창덕궁에 나아갔다. 하령하기를,
"정후겸(鄭厚謙)은 의열궁(義烈宮)에 와서 기다리라."
하고는,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의열궁(義烈宮)·효장궁(孝章宮)·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갔다. 하령하기를,
"그저께의 하교에 의하여 궁문(宮門)에서 궐문(闕門)에 이르기까지 상언(上言)을 받아들이라."
하였다.
환궁한 후에 수가(隨駕)한 군병에게 고기를 내렸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좌정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박상집(朴相集)이 《일기(日記)》에다 막중한 성교(聖敎)를 쓰지 않아 누차 칙교(飭敎)한 것이 이미 여러 날이 지났다. 반드시 쓰지 않고자 하는 것이니, 아주 그릇된 것이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감죄(勘罪)함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지난달 20일 연중(筵中)에서의 성상의 하교는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였는데도, 그날의 기주(記註)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소루하여 신이 들은 바와 큰 차이가 납니다. 국체에 있어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그때의 주서(注書) 박상집을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13일 병진
이의철(李宜哲)·오재순(吳載純)·최태형(崔台衡)·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조엄(趙曮)을 이조 판서로,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김치공(金致恭)을 대사간으로, 서명선(徐命善)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교리 박상래(朴相來)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이 종사(宗社)를 도와서 경복(景福)이 무강(無彊)합니다. 우리 대조 전하(大朝殿下)께서는 요(堯)임금처럼 정사에 피곤할 연령으로 선조(先朝)의 막중한 예(例)를 본받아 만기(萬機)를 대리하게 하시니 국세가 반석처럼 굳건해지고, 백료(百僚)가 뛰면서 하례하니 천안(天顔)에 기쁜 기색이 넘치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저하의 타고난 성효(誠孝)와 위에까지 다다른 영예(令譽)가 중화(重華)293) 의 협화를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일이 이미 전에 빛났고, 경사 또한 옛날에 드문 바여서 신들이 실로 뛰며 기뻐하는 정성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저하께서는 정일(精一)의 가르침을 이어받으셨으나, 기무(機務)를 대리하는 것이 중하고 성심(聖心)의 기대가 더욱 간절하며 여러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이 더욱 은근하니, 저하께서 장차 어떻게 우러러 성심을 본받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의 마음에 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학문은 정사의 체(體)요, 정사는 학문의 용(用)인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평소 성심(誠心)으로 전학(典學)하여 성현의 경전(經傳)을 꿰뚫지 않은 바가 없으며 말씀하실 때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모훈(謨訓)을 일컬으시니, 이는 신들이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요, 행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배움을 정사에 시행하지 않으면 무익한 학문에 불과하고, 정사를 하면서 학문에 의지하지 않으면 일체가 때에 따른 편의적인 정사가 됩니다. 천고의 임금치고 그 누가 경전을 읽지 않았겠습니까만, 입으로는 요순 시대를 말하면서도 그 정령(政令)과 시책(施策)을 살펴보면 모두 인욕(人欲) 때문에 무너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경전과 요순을 한갓 겉치레의 도구로 삼았을 뿐, 참으로 알아서 실천하는 공부를 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예로부터 선치(善治)가 없는 것은 참으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은 곧 저하께서 배우고 그것을 모든 정사에 시행할 때이니, 행동하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과연 인욕(人欲)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신다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할 것이고, 경전과 모훈의 뜻에 하나라도 맞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의 성상의 기대하는 마음과 여러 사람의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지난날 꿰뚫은 경전을 무익한 학문과 때에 따른 편의적인 정사로 귀결시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경계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경연(經筵)의 직책에 있었으면서 생각은 간절하지만, 학문의 바탕이 허술해 계옥(啓沃)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기 진달한 바는 비록 예사로운 말과 진부한 이야기에 가까우나 저하께서 만약 묘리(妙理)·활법(活法)으로 보신다면 실로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부합되며,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강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서유린(徐有隣)·정만순(鄭晩淳)·홍수보(洪秀輔)·오재소(吳載紹)를 승지로 삼았다.
홍검(洪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교동부(喬桐府)에 부처(付處)하였다가 곧 삭직(削職)을 명하였는데, 개정(開政)294)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연이어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도총관 서명선(徐命善)이 사직을 상소하였기 때문이다. 왕세손이 서호수(徐浩修)에게 말하기를,
"승선(承宣)295) 의 숙부296) 가 초3일 입시하여 진달한 바는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당시에 홀로 거실(巨室)297) 을 꺼리지 않았고,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강개(慷慨)하여 눈물까지 흘린 충직(忠直)한 마음을 대조께서 이미 통촉하셨고, 나 또한 감탄했었다."
하였다.
중일청(中日廳)298) 에서 시사(試射)·시방(試放)하여 합격한 군병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을 나누어 주도록 승지에게 명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청정(聽政) 후 막차(幕次)에서 차하[上下]299) 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없었습니다. 한번 이런 길이 열리면 후일의 폐단과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지금 아뢴 것이 참으로 유사(有司)의 체모를 얻었으니, 사약(司鑰)은 수본(手本)을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유신(儒臣) 이득영(李得永)이 써서 올린 춘첩(春帖)의 첫머리에 수묵(水墨)으로 ‘대전 춘첩자(大殿春帖子)’라고 쓰여 있었다. 하령하기를,
"불경스럽다. 이득영 및 과차(科次)한 조엄(趙曮)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정사
교리 박상래(朴相來)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청정하는 날에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이 각기 헌언(獻言)하였었는데, 그때 옥서(玉署)300) 의 여러 신하들 또한 차자를 진달하자는 의논이 있어서 신 역시 따라서 응하였습니다. 차자를 미처 올리지 못하였었는데, 마침 승지에 대한 처분으로 인하여 황송하고 두려워 의논이 마침내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에 갑자기 소보(小報)를 보니 차자가 이미 입달(入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이 우료(右僚)라는 이유로 차수(箚首)가 되어 있으니, 신은 참으로 의아스러워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 맨 처음 여정(勵精)할 때를 당하고 천년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났으니, 그 누군들 생각을 다하고 마음을 열어 조금이나마 반짝이는 작은 정성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들의 직책이 바로 논사(論思)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구구히 충간을 바치고자 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합니다. 한번 차자를 올려 면려하기를 진달함은 마땅히 먼저 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같은데도 요행히 도피함은 실로 염치와 관계되는데 동관(同官)이 이미 체직되었으니, 차자를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차(堂箚)의 규정은 직(直)에 있는 자가 발간(發簡)하고 출직(出直)한 자들이 일제히 모여 합좌(合坐)하여 의논하고, 모두 가서 올리는 것입니다. 혹시 사고가 있어 모이지 못해도 역시 반드시 기일에 임하여 통지하고 그 후에 올리는 것이 예(例)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그끄저께 발간한 것은 정세(情勢)가 없던 전이었고 그저께 의논을 중지한 것은 엄교(嚴敎)를 받든 후였는데, 어제 와서는 간통(簡通)도 의논도 하지 않은 채 경솔하게 올렸습니다. 그끄저께의 간통(簡通)을 어제에 옮겨 써서는 안 되었으며, 어저께의 정세는 처음부터 그저께와 다름이 없었는데, 무릅쓰고 있기가 결코 어려운 직책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면서, 진달해서는 안 될 때에 차자를 올렸습니다. 신은 비록 알지 못했으나 이름이 이미 함께 참여되었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해명하고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손이 예사로운 답을 내렸다.
부교리 이유경(李儒慶), 수찬 오대익(吳大益)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교리 박상래의 서본(書本)을 보건대, 어제의 진차(陳箚)를 연명(聯名)으로 한 일로써 신들을 침척(侵斥)하였는데, 말이 매우 심각하여 신들은 실로 그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신들은 하반(賀班)이 파한 후에 여러 동료들과 함께 번소(番所)에서 일제히 모여 차자를 진달하는 일을 상의하였었습니다. 여러 동료들의 의견이 모두 다름이 없었으며, 박상래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후에 또 발간(發簡)하여 여러 동료들에게서 ‘근실(謹悉)’을 받았으니, 대개 관(館)의 규정이 그러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써서 진달하려는 즈음에 마침 시역(試役)이 있어서 가져다 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대조(大朝)께서 승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별달리 인의(引義)해야 할 단서가 없었고 때마침 저물어서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뜻을 먼저 여러 동료들에게 알렸는데 모두 다른 의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박상래는 무슨 의견이 있어서 혐의하는 단서로 삼아 홀로 이런 뜻밖의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니, 왕세손이 예사로운 답을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이 대리 청정하는 것은 고금에 드문 일로서 그저께 배위(排衛)하는 군병들이 산호(山呼)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인심을 볼 수 있었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는 전하께서 인덕(仁德)이 깊고 두터우신 소치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는 마땅히 외정(外廷)에서 표양(表揚)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회는 비록 무방하나 나에게 있어서는 태강(太康)하다. 경들의 마음은 단지 연회만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판부사 이은(李溵)·좌의정 이사관(李思觀) 등이 말하기를,
"예효(睿孝)와 군정(群情)을 굽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성(大成)이란 존호 이외에 무엇을 더 받겠는가?"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형용(形容)하는 도리에 있어서 또한 미진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듣지 않겠다."
하였다.
차비 대령(差備待令) 의관(醫官)의 윤회 직숙(輪回直宿)을 명하였다.
영상과 좌상이 입대하니, 하령하기를,
"성상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나의 도리이다. 진연(進宴)하고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내가 마땅히 품청(稟請)할 것이니, 대신(大臣)들 또한 간청해야 좋을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하령(下令)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승지 오재소(吳載紹)가 얼굴에 홍조(紅潮)를 띠니, 추고하라고 하령하였다.
12월 15일 무오
밤에 월식(月食)이 있었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좌정하여 원임·시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처음 빈대(賓對)라는 것으로써 더욱 면려(勉勵)하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선혜청 당상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환곡(還穀)의 폐단에 대해 대신(大臣)이 이미 말머리를 꺼냈습니다마는 환곡은 본디 궁한 백성들의 종자와 양식의 밑천인데, 근래에는 궁한 백성들이 봄에 받아가는 것은 적고 가을에 바치는 것은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전환(錢還)’이라 칭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호남 어사(湖南御史)의 서계(書啓)에서 비로소 발론되었는 바 이를 논한 것은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만, 그 서계 가운데 이미 ‘탐관 오리들이 예사롭게 본다.’라고 하였고, 또 이후에는 엄금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 말의 뜻을 살펴보건대, 마치 알고도 명백하게 말하지 않은 듯하여 아주 핵실(核實)하는 뜻을 잃었습니다. 기왕의 일은 논하지 않고 단지 앞으로의 일만 신칙한다면 어찌 금법(禁法)을 베푼 뜻이 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大臣)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의 아뢴 바가 참으로 의견이 되기는 하나 어사의 서계에는 단지 그 폐단만 논하였을 뿐, 그 사람은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날짜가 오래 된 후이니 안렴(按廉)한 신하를 함문(緘問)301) 하고자 한다면, 국체를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중신이 이미 이로써 아뢰었으니, 어사가 소략히 한 잘못에 대해서는 마땅히 파직하는 법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중신의 말이 과연 엄정하지만, 함문의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만약 이런 길을 열어 놓으신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도승지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50년 동안 몸소 태평(太平)을 이루시고 정사에 피곤하실 나이에 조종(祖宗)의 고사를 따라 이처럼 서정(庶政)을 대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의 무한한 경사이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목을 빼고 눈을 씻으며 기다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은 바로 저하의 첫 정사이므로 신이 감히 경의(經義)로써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보면〉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어진 명을 남겨야 하니, 모두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고, 또 이어서 말하기를, ‘덕(德)을 공경하기에 빨라야 하니, 하늘에 영명(永命)을 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명(命)의 밝음 여부는 스스로 남기는 데 있고, 스스로 남기는 기초는 더욱 그 처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서 기천 영명(祈天永命)의 도(道)까지는 ‘덕을 공경하기에 빨리한다.[疾敬德]’라는 세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해석하기를, ‘경(敬)하면 시청(視聽)·언동(言動)이 한결같이 이치를 따르고 호오(好惡)와 용사(用捨)가 천리에 어긋나지 않아 능히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그 이치가 환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용공(用工)은 요컨대 역시 하나의 ‘질(疾)’ 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심발(沈墢)이 말하기를,
"저하께서는 정일(精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시민(時敏)의 학문에 힘쓰시어 학식이 고명하고 조예가 뛰어나십니다. 다만 기무(機務)에 수응하는 즈음에 경전을 공부하여 익히는 데 방해가 되기 쉬우니, 원하옵건대 저하께서는 시종 전학(典學)에 힘쓰시어 창졸간에 폐하는 탄식이 없게 하소서. 기강(紀綱)을 진작하여 퇴미(頹靡)한 습속을 경계하시고, 염치를 격려하여 조경(躁競)302) 하는 습성을 꺾고, 언로(言路)를 열어서 숨김 없이 말하는 풍습을 장려하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어 보호하는 뜻을 미루어 주신다면, 치모(治謨)와 정법(政法)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채홍리(蔡弘履)가 말하기를,
"오늘은 곧 천지가 만물을 발육하는 처음이요, 오늘의 빈대(賓對)는 바로 우리 저하가 처음으로 베푸시는 정사입니다. 시민(時敏)의 학문과 정일(精一)한 마음으로 대조(大朝)의 중한 부탁을 받으셨으니, 천지가 크게 함육(涵育)하는 것을 본받으시어 더욱 스스로 면려하소서. 덕에 힘쓰고 덕에 나아가시기를 마치 대조께서 마음을 쓰시어 백성들에게 인혜(仁惠)를 베푼 것처럼 하시고 천지가 만물을 함육하는 것처럼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절실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채홍리가 말하기를,
"곧음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문학(文學) 송재중(宋載中)은 서연에서 주대(奏對)한 것이 매우 무엄하였고, 또 향리에 있다는 것을 핑계하였으니, 사체와 분의(分義)에 있어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신은 문학 송재중에게 빨리 삭판(削版)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채홍리가 말하기를,
"납언은 통망(通望)하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어제 삼전(三銓)303) 이 홀로 정사(政事)하면서 지평·정언과 관직(館職)을 거치지 않은 자를 곧바로 납언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이러한 정격(政格)은 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신은 이조 참의 홍검(洪檢)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16일 기미
이조 참의 홍검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미 영선(瀛選)304) 에 오른 사람은 대간(臺諫)의 통망(通望)에 구애받지 않고 곧바로 헌납에 의망하는 것이 본래의 정격(政格)이어서, 전후의 전관(銓官)이 이런 예에 따라서 행하였습니다. 또 전 이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이 지난달 정사(政事)에서 이 사람을 이미 헌납의 수망(首望)으로 넣었으니, 통청(通淸) 여부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예사로운 답을 내렸다.
장령 윤밀(尹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감히 육잠(六箴)의 말로써 대략 하루의 책임을 바치고자 합니다. 첫째 예학(睿學)에 힘쓰시고, 둘째 할아버지의 덕(德)을 본받으시고, 셋째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시고, 넷째 인재(人才)를 구하시고, 다섯째 언로(言路)를 여시고, 여섯째 황극(皇極)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서하여 진달한 것을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이제 차대(次對)에서 거론된 조목을 보았는데, 만약 모두 대조(大朝)에 여쭌다면 어찌 청정하는 뜻이 있겠는가? 하교하고자 하나, 답(答)한 바가 모두 조리(條理)가 있어서 내가 기뻐하고 있다. 대신(臺臣)의 소장을 나에게 아뢰면 어찌 노고를 나누는 뜻이 있겠는가? 충자(沖子)로 하여금 이런 뜻을 알게 하여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모두 대조에 여쭌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대저 근래의 이런 소장들은 혹은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 있기도 하고, 그른 듯하면서 옳은 것이 있으며 혹은 희미하여 동서(東西)를 모르는 것도 있다. 이런 부분들은 할아비도 오히려 어지러운데 하물며 처음으로 청정하는 충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이런 부분들을 충자로 하여금 특별히 잘 살피게 하고, 만약 수상한 곳이 있으면 승지로 하여금 나에게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방방(放榜)하였다. 왕세손이 판위(版位)에 나가 사배(四拜)를 마치고 당에 올라가 시좌(侍坐)하였다. 문무(文武)의 신방(新榜)이 전정(殿庭)에 서서 방방(放榜)·반화(頒花)를 마치고, 음악을 연주하자 백관(百官)과 신은(新恩)이 사배(四拜)하고 산호(山呼)하였다. 60세 된 문과(文科) 신은(新恩) 차언보(車彦輔)에게 고기와 비단을 내리라 명하고, 무과(武科)로 62세인 두 사람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대사간이 송재중(宋載中)에 대해 죄주기를 청한 것은 비록 잘못을 바로 잡는 뜻이나, 서연(書筵)에서의 수작은 밖의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본사(本事)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본디 이보다 더 큰 바가 있었는데도 위축되어 발론하지 않다가 이에 이처럼 시험해 보는 계책을 삼았으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직무를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신칙하는 뜻을 보이고 대사간 채홍리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50년 동안 도견(陶甄)305) 의 다스림은 실로 대조(大朝)의 성덕(盛德)·대업(大業)에서 나왔는데, 나는 재주가 소활하니 어찌 일푼(一分)이라도 계승해 본받을 방도가 있겠는가? 남북(南北)의 근심이 있어 온 이후 서로 싸움만 해 왔는데, 이는 실로 소장(蕭墻)306) 의 근심으로 내가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한쪽 모퉁이의 치우친 나라에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여러 갈래이니, 이렇게 하고도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함께 경하하는 뜻을 본받아 화기(和氣)를 도솔(導率)하면 거의 인재를 나오게 하는 방도가 됩니다. 오직 저하께서 가려 뽑는 예감(睿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대조께서 50년 동안 이룬 치평(治平)은 ‘건극 대성(建極大成)’이란 네 글자를 넘지 못하며 저하께서 체념(體念)하는 방도는 오로지 묵운(默運)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하였다.
부수찬 이이상(李頤祥)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제방(隄防)이 엄하지 못하여 이번 경과(慶科)에 최수원(崔守元)·조영의(趙榮毅)·조우규(趙羽逵) 세 사람은 일찍이 추탈(追奪)된 자의 손자와 조카로서 멋대로 시지(試紙)를 끼고 시장(試場)에 들어가 외람되이 높은 선발에 들고는 의기 양양하게 서로 축하하면서 전혀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이상(履霜)의 근심307) 은 지혜 있는 자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세도(世道)의 한심함이 이처럼 극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사람들을 모두 운관(芸館)308) 의 소속으로 분관(分館)시켜 조금이나마309) 의 조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분관(分館)은 본디 분관하는 사(司)가 있다."
하였다.
12월 17일 경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예조 당상을 불러 보았다. 여러 대신들이 일제히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은 우선 그만두고 단지 연례(宴禮)만 청하기로 한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존호(尊號)를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에 연례 행하는 것을 다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한 하교는 내가 억지로 한번 해본 말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희언(戱言)이 없는 법입니다."
하고, 김상철이 말하기를,
"신들이 빈대(賓對)에서 왕세손을 뵈오니, 예효(睿孝)를 펴지 못하여 슬퍼하고 불안한 기색이 있어서, 그 정성이 간절하고 순독(純篤)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고, 영부사 이은(李溵)은 말하기를,
"이는 왕세손이 청정한 후 처음으로 청하는 것이니, 어찌 면종(勉從)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정청(庭請)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전석(前席)에서 유음(兪音)을 입지 못하면 물러가 정청하는 것이 신들의 직책입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여 진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너의 뜻이 가상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여 날짜를 18일로 정한다."
하였다. 이때 시임·원임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연하기를 정청(庭請)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의 거조는 천만 놀라우니, 김상철·이사관을 모두 상직(相職)에서 면직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9작(九爵)·6기(六器)의 음식을 을유년310) 의 수작례(受爵禮)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신유
윤시동(尹蓍東)을 대사헌으로, 이택진(李宅鎭)을 대사간으로, 김화택(金和澤)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왕세손이 청정할 때에 정유년311) 의 예(例)에 의거하여 추가한 절목(節目)은 다음과 같다.
"1. 능전(陵殿)의 제문(祭文)에 있어서 계(啓)는 ‘봉교경의장함(奉敎敬依長銜)’이라 하고, 달(達)은 ‘봉령경의장함(奉令敬依長銜)’이라 한다. 묘묘(廟墓)의 제문에 있어서 계(啓)는 ‘봉교가장함(奉敎可長銜)’이라 하고, 달(達)은 ‘봉령가장함(奉令可長銜)’이라 한다.
1. 계목(啓目)을 신목(申目)이라 칭한다. ‘유계목하여(有啓目何如)’는 ‘계의윤단함(啓依允短銜)’이라 하고, ‘유신목하여(有申目何如)’는 ‘달의준단함(達依準短銜)’이라 한다. ‘무계목하여(無啓目何如)’는 ‘계의소계시행(啓依所啓施行)’이라 하며, ‘무신목하여(無申目何如)’는 ‘달의소달시행(達依所達施行)’이라 한다.
1. ‘장계(狀啓)’는 장달(狀達), ‘계본(啓本)’은 신본(申本), 회계(回啓)는 회달(回達)이라 칭한다.
1. ‘계사(啓辭)’는 ‘달사(達辭)’라 칭하고, 계사에는 ‘전왈(傳曰)’·‘의계(依啓)’라 하며, 달사에는 ‘영왈(令曰)’·‘의달(依達)’이라 한다.
1. ‘장달 상재(狀達上裁)’는 ‘복후 휘재(伏候徽裁)’라 칭하고, 상재에는 ‘봉교장함(奉敎長銜)’으로 하며, 휘재는 ‘봉령 장함(奉令長銜)’으로 한다.
1. ‘상소(上疏)’는 ‘상서(上書)’라 칭하고, 소(疏)에는 ‘근백배상언(謹百拜上言)’이라 하고, 서(書)에는 ‘근재배상언(謹再拜上言)’이라 한다.
1. ‘전왈윤(傳曰允)’은 ‘영왈의(令曰依)’, ‘전왈불윤(傳曰不允)’은 ‘영왈부종(令曰不從)’이라 칭하며, 혹은 ‘물번(勿煩)’이라 칭한다. ‘전왈지도(傳曰知道)’는 ‘영왈지실(令曰知悉)’이라 칭한다.
1. ‘비답(批答)’은 ‘하답(下答)’이라 칭하고, 상소에는 ‘성소구실(省疏具悉)’이라 하며, 상서에는 ‘남서구실(覽書具悉)’이라 한다. 2품 이상에는 ‘답왈(答曰)’이 있고, 3품 이하에는 ‘답왈’이 없다.
1. ‘승지전유(承旨傳諭)’는 ‘승지왕유(承旨往諭)’라 칭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는 것[遣史官傳諭]은 ‘사관왕유(史官往諭)’라 칭한다.
1. ‘중엄(中嚴)’은 ‘내엄(內嚴)’이라 칭하고, ‘외판(外辦)’은 ‘외비(外備)’라 칭하여, ‘제사 예비(諸司預備)’는 ‘제사 예대(諸司預待)’라 칭한다.
1. ‘교지(敎旨)’는 ‘휘지(徽旨)’라 칭하며, ‘교서(敎書)’는 ‘영서(令書)’라 칭한다.
1. 대신(大臣)의 정사(呈辭)는 세 번째 이전의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불허하답(不許下答)’이라 칭하며, 세 번째 이후에는 혹은 ‘돈유(敦諭)’, 혹은 ‘별유(別諭)’, 혹은 ‘안심조리(安心調理)’라고 한다.
1. 대신 및 일찍이 수릉관(守陵官)을 지낸, 숭품 종신(崇品宗臣)·숭품 도위(崇品都尉)의 소분 정사(掃墳呈辭), 가토 정사(加土呈辭)에는 급유마(給由馬)와 요전상(澆奠床)312) 을 갖추어 지급한다.
1. ‘전(傳)’은 ‘영(令)’이라 칭하고, ‘전지(傳旨)’는 ‘휘지(徽旨)’라 칭한다. 체파(遞罷) 이상은 영지(令旨)를 받들고, 나추(拿推) 이하는 휘지(徽旨)를 받든다.
1. 조신(朝臣)의 위패(違牌)는 봉지(捧旨)하며, 특교(特敎) 및 정패(政牌)와 같은 경우에 파직(罷職)은 전지(傳旨)를 받들며 추고(推考)는 휘지(徽旨)를 받든다. 하령(下令) 및 예(例)에 따른 패초(牌招)인 경우, 체파(遞罷) 이상 모두 영지(令旨)를 받든다.
1. 번곤(藩閫)의 장문(狀聞) 가운데 사안이 시급한 변정(邊情) 및 용병(用兵)에 관계된 것은 한결같이 다 입계(入啓)한다.
1. 경외(京外)의 전최(殿最), 양전(兩銓)의 정망(政望) 및 세초(歲抄)·각도(各道) 군병의 세초, 삼군문(三軍門)의 습조 단자(習操單子)·각도의 습조(習操)는 취품(取稟)·장문(狀聞)을 한다. 형조의 복계 문안(覆啓文案)은 모두 입계(入啓)한다.
1. 여러 신하들의 ‘입시(入侍)’는 ‘입대(入對)’라고 고쳐 칭한다. 대신과 비국 당상의 ‘인견(引見)’은 ‘인접(引接)’이라고 고쳐 칭한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흑원령(黑圓領)을 갖추고 집경당에 나아가 진연(進宴)하니, 왕세손이 판위(板位)에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여러 신하들 역시 사배하였다. 왕세손이 1작(爵)을 올리고 판위로 도로 나아가 사배를 행하니, 인의(引儀)가 임금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치사(致詞)를 읽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9작(爵)을 올렸다. 임금이 판윤 김효대(金孝大)의 부자(父子)에게 잔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잔을 올린 대신(大臣)과 봉조하에게는 구마(廐馬)와 안구(鞍具)를 면급(面給)하고,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에게는 숙마(熟馬)를 면급하라. 호조의 감조관(監造官), 수령(守令)·승전(承傳), 주원 감조관(廚院監造官)은 승륙(陞六)시키고, 집사(執事)와 전악(典樂)은 가자(加資)하고,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에게는 표피(豹皮)를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사민(士民)으로서 나이가 90세, 80세인 자에게는 예조의 뜰에서 주찬(酒饌)을 대접하고, 예방 승지와 춘방(春坊)의 예모관(禮貌官)에게는 가자하고, 한림과 주서는 승륙시키며 야금(夜禁)을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이미 청정(聽政)하여 충자(沖子)의 부담이 무겁게 되었으나, 나는 이 당(堂)에서 편히 보양(保養)하는 방도를 얻게 되고, 종국(宗國)에는 태산(泰山)처럼 공고함이 있게 되었다. 오늘 지팡이를 짚고 전정(殿庭)에 임하여 충자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받았다. 80세에 청정한 충자가 예전에 어찌 있었겠으며, 지팡이를 짚고 그 손자의 연회에 참여한 일 또한 어찌 있었던가? 이제 나랏일이 안정되고 조손(祖孫)이 다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라의 막대한 경사이다. 나는 이렇지만 팔도의 우리 백성들은 어떠한가? 문왕(文王)의 사민(四民)313) 으로 불쌍한 백성들이다. 그래서 팔도의 구포(舊逋)를 비록 정봉(停捧)하였으나, 새 포흠(逋欠)을 이제 받아들이려 기찰함에 관리가 문전(門前)에서 독촉하니, 우리 백성들이 감히 다리를 뻗고 눕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또한 어찌 사민(四民)과 다르겠는가? 비포(婢布)를 바칠 때에 머리가 희고 지팡이를 짚은 자들도 실가(室家)의 즐거움을 모르고 있다. 이제 이미 비공(婢貢)을 감한 것은 조금의 혜택이라고 거의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기(史記)에 오르게 되었으니, 나의 한 정사(政事)이다. 남공(男貢) 역시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 역시 하나의 양산박(梁山泊)314) 을 얻은 연후에야 거의 폐단을 줄일 수 있다. 균역(均役)을 1필 감한 것을 내가 참으로 겸연쩍게 여기어 화락한 세상에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여부를 물었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겸연쩍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나라 경사는 참으로 3백 년 이래에 처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충자의 말을 따른 것이니, 이는 충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여러 신하들의 뜻을 펴게 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팔도의 우리 백성들은 초가집에서 곤란을 겪느라 이 해[歲]의 즐거움을 모르는데도, 음악 소리는 구름 사이에서 울리고, 뜰 가운데는 잔치 술에 취한 사람이 가득하여, 이 마음이 겸연쩍은 것을 충자는 아는가, 모르는가? 아! 이러할 때에 우리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쉬게 된다면 팔순의 그 임금이 달게 밥을 먹고 편히 잠을 자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슨 마음으로 저 하늘을 우러러보겠으며, 또한 무슨 마음으로 신령(神靈)을 뵙겠는가? 팔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는 백성들에게 임할 때 밤낮으로 조심하여 한 백성을 대하면서도 임금이 뒤에 있는 것처럼 하고, 한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도 혹 임금을 속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한다면 우리 백성들이 잘 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백성들이 잘 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9일 임술
정언 유한신(柳翰申)이 상서하여, 전조(銓曹)에서 초사 수령(初仕守令)을 특별히 가려 뽑도록 신칙할 것을 청하였다. 또 ‘청정한 후 말을 하지 않은 여러 대신(臺臣)들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근래에 대신들이 그래도 한두 가지 일을 조목조목 아뢴 적이 있었으니, 청한 바가 지나치다. 초사하는 수령은 매번 도정(都政)에 성교가 누누하신데, 어찌 네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하였다.
정후겸(鄭厚謙)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봄 사이에 이적보(李迪輔)의 한 상소는, 신(臣)과 작고한 중신(重臣) 이담(李潭)을 논한 것에 불과한데도 합사(合辭)하여 청죄하기를 여러 달이 되도록 그치지 않으니, 신이 과연 이 적보에게 애석해 할 것은 없지만, 신 또한 어찌 스스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이 어찌 이렇게 하는가? 한 말이 천만 지나치니, 사직하지 말고 즉시 사명(謝命)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불러서 보고 이익정(李益炡)에게 특별히 숙마(熟馬)를 하사하였으니, 밀창군(密昌君)315) 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황준(黃晙)이 이미 회혼례(回婚禮)를 지냈다고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미포(米布)를 하사하였다. 이익정이 말하기를,
"오늘 입시한 기신(耆臣) 13인의 나이를 합치면 1천 16세가 됩니다. 이것을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기이하구나."
하였다.
부사직 서유녕(徐有寧)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삼가 이번 과거(科擧)에서 지어서 제출한 것을 보건대, 최수원(崔守元)·조우규(趙羽逵)·조영의(趙榮毅) 세 사람이 지은 것은 뇌동(雷同)함이 많아 혹 수십 구(句) 혹은 7, 8구가 같습니다. 아! 과장(科場)이 그 얼마나 지엄(至嚴)하며, 고시(考試)가 그 얼마나 지중(至重)합니까? 그런데도 이처럼 뇌동한 글을 뒤섞어서 합격시킨 것이 세 사람이나 될 정도로 많을 수 있습니까? 시문(試文)을 뇌동함은 본디 정제(定制)가 있어 비록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생각건대 신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살피지 못한 잘못이 이에 이르러서 드러났습니다. 이 일은 신이 시험을 맡은 것과도 관계됩니다. 방방(放榜)의 날짜가 오래 되었다는 것으로써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용서하여 그대로 덮어버려서는 안 되니, 빨리 위벌(威罰)을 내려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권면해 시사(試事)를 엄히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거두어 들이라는 일을 예조(禮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12월 20일 계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니,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이미(李瀰)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삼가 원(院)에 이른 부사직 서유녕의 글을 보건대, 이번 정시(庭試)에서 합격한 조우규(趙羽逵)·조영의(趙榮毅)·최수원(崔守元)이 과작(科作)한 글에 뇌동함이 많은 것으로써 인혐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이에 대해 참으로 천만 부끄럽고 황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갑작스레 급히 임함으로써 소루함이 많아서 여러 글의 구어(句語)가 같고 다름을 전혀 대조 조사하지 못하여 인죄(引罪)하는 상소가 과시(科試)에 참여한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시험을 주관한 사람으로서 그 부끄럽고 불안함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비옵건대 이명(离明)께서는 빨리 신에게 시험을 잘 살피지 못한 죄를 내려 주소서. 이어서 생각하건대 시사(試事)는 매우 엄중한데도 구어(句語)를 서로 같게 지은 것이 이미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즉석에서 고준(考準)하여 방방(放榜)하기 전에 빼어버리기를 청하지 못하였으니, 과장(科場)을 중히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는 방도에 있어서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신은 대조(大朝)께 앙품하여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원방(原榜)에서 빼어버릴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대조께 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충자(沖子)의 간청 때문에 억지로 연례(宴禮)를 받았으니 방국(邦國)에 한 번 다행한 일이고, 조손(祖孫)이 한 방에서 친정(親政)하니 방국의 두 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밤낮으로 생각하는 이런 마음은 오직 백성들에게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응제(應製)에 합격한 윤광소(尹光紹)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조 판서 조엄(趙曮)이 정사(呈辭)하니, 처음으로 답인(踏印)하여 내려 보냈다.
12월 21일 갑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신의 차자로 인하여 해조로 하여금 차자에 의거하여 일을 수정(修正)하여 청하도록 하명하셨습니다. 이번 정시에서 합격한 사람 최수원(崔守元)·조영의(趙榮毅)·조우규(趙羽逵)는 원방(原榜) 가운데서 빼내어 표지(標紙)를 붙여서 들이며, 홍패(紅牌) 및 시권(試券)은 홍첨(紅籤)에서 빼는 일을 정원 및 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하교하였다.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붕당(朋黨)이 사람과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동서(東西)의 당(黨)도 처음에는 감릉(甘陵)의 두 집안316) 이 사사로이 서로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였었는데, 시비가 한번 나뉘자 호리(毫釐)가 천리(千里)가 되었습니다. 동인(東人)이 뜻을 얻자 기사년317) 의 일이 생겼고, 서인(西人)이 된 자는 실로 원우(元祐)의 군자(君子)318) 였으나 서인 가운데서 또 노론(老論)·소론(少論)이 있게 되어 시비가 바뀌어 충(忠)과 역(逆)이 되었습니다. 이에 저 소론인 자들이 한번 뜻을 얻자 신축년319) 의 일을 벌였고, 재차 뜻을 얻자 무신년320) 의 일을 벌여 종사(宗社)가 거의 무너지게 되고 세도(世道)가 드디어 궤열(潰裂)되게 되었으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대조 전하(大朝殿下)의 50년 고심이 오직 음붕(淫朋)을 깨뜨리고 황극(皇極)을 세우는 데 있었으니, 지성이 미치는 곳에는 돈어(豚魚)도 감격하였습니다. 을해년321) 처분이 있은 이후에 천토(天討)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뜻이 크게 정하여졌으니, 지금의 신하 된 자라면 그 누구인들 감히 정백(精白)하게 우러러 받들어서 혜지(徯志)322) 의 다스림을 이루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시일(時日)이 점차 오래 되어 제방(隄防)이 혹 느슨해져 구차하게 면종(面從)만 하는 무리가 있고 진심으로 마음을 고치지 않은 자들이 몰래 숨어서 엿보고 틈을 노리고 있으니, 이는 장돈(章惇)과 채변(蔡卞)323) 이 장차 뜻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외척(外戚)은 국가에 있어서 은혜와 의리가 겸비되어 그러니 화복(禍福)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반드시 전부 어진 자들만은 아니어서, 부귀가 가득 차면 곧 재앙을 부르기에 족합니다. 이는 먼 역사에서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 왕조로 말하더라도 척리(戚里)의 집안으로 패망하지 않은 자가 드물고, 패망이 그 가문에만 그친다고 또한 말할 수 없으니, 해가 국가에 미침을 오히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는 현재(賢才)를 널리 얻는 길이요, 대중에게 열린 정문(正門)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차히 한갓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몰래 서로 이끌어 들인 형적이 현저하여 흉악한 나머지 무리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몰래 사당(私黨)을 심어 조정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사환(仕宦)이란 한 세대의 인재를 모아 서관(庶官)의 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이 명기(名器)를 아끼고 요행을 막은 것은 그 생각함이 깊었고 그 조심함이 신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중화(重華)324) 가 정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벼슬을 구하는 선비가 없었으니, 성주(成周)325) 의 평화로운 정사를 하는 날에 어찌 총애를 받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어떤 사람이 바라고 엿보는 뜻을 품는다면, 조정에 경탈(傾奪)하는 습성이 있어 이시(羸豕)가 날뛰게 될 조짐이 있게 되고, 고양(羔羊)326) 은 의젓한 절도가 없게 됩니다. 서리를 밟으면 곧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되는 것은 필지(必至)의 형세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짐은 참소하는 말과 잔악한 행동을 미워한다.’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에는 이르기를, ‘저 참소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시호(豺虎)에게 던져 주라.’ 하였는데, 대저 순(舜)임금의 조정에 어찌 참소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히려 이처럼 근심했는지 두렵지 않습니까? 공(公)이란 무엇입니까? 순수하게 한결같이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을 공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공정한 후에야 인(仁)하고, 인한데도 불공정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무릇 현사(賢邪)를 진퇴하는 즈음에 친소(親疎)·후박(厚薄) 사이에도 권도(權度)가 중(中)을 얻어 그 공평함을 잃지 않는다면, 어찌 붕당을 걱정하고 어찌 척리(戚里)를 근심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총명하면 원후(元后)를 삼는다.’라 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밝게 땅 위에 계시며 빛나게 하늘에도 계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일의 정위(情僞)와 말의 피둔(詖遁)을 감별함에 어긋남이 없고 의회(疑晦)함이 없으면 아래에 있는 자는 감히 지나친 관작과 요행히 벼슬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인데, 또 어찌 교언(巧言)하는 공임(孔壬)327) 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대저 공(公)과 명(明)은 실로 ‘인(仁)’ 자와 ‘성(誠)’ 자와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며, 이는 실로 성공(聖工)의 극치이고, 치도(治道)의 지극한 요체인데, 그 근본은 학문에 있으며, 학문의 요체는 또 반드시 절차(切磋)·강마(講磨)하는 도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저하께서는 예질(睿質)이 천부적이고 예덕(睿德)이 날로 새로워져서, 뜻이 삼대(三代)를 사모하고 학문은 천고(千古)를 덮습니다. 무릇 덕성을 함양하고 이런 마음을 조존(操存)한 것은 실로 독실하게 끊임없이 공부에 힘써 마지않았기 때문입니다. 학문에 있어 저하의 부지런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절차하고 강마하는 도움은 또 반드시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합니다만, 저하의 사부 중에는 존경할 만한 자가 있어서 과연 경서를 가지고 어려운 곳을 묻고 수레에서 내려 질고(疾苦)를 물을 만합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저하의 빈료가 과연 모조리 질박 정직하고 꾸밈이 적고 충성스러웁니까? 혹 부화(浮華)하고 실(實)이 없이 망령됩니까? 서연(書筵)에 출입하는 신하가 과연 모두 침묵(沈默)·외신(畏愼)하여 온실(溫室)의 나무328) 를 말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저하께서는 진실을 알고 실천하는 선비와 단량(端良)·돈중(敦重)한 사람을 널리 구하여 좌우와 전후에 두시고 계옥(啓沃)의 밑천으로 삼아 보도(輔導)를 책임지우신다면, 학문이 진보하는데 있어 거의 일조(一助)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금일의 급선무입니다.
무릇 이 여덟 가지는 비록 오활하고 진부한 듯하나, 앞의 다섯 가지는 비유하자면 병에 걸리는 근본이며, 뒤의 세 가지는 비유하자면 증세에 대처하는 약제(藥劑)인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대성(大成)이란 존호를 올린 후에 ‘당(黨)’이란 한 글자는 논할 바가 아니다. 심상운(沈翔雲)이 이번에 조목으로 나열한 것은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해방(該房)에서 받아들인 것은 잘못이다. 이로써 보건대,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는 어찌 한결같이 굳은 혈충(血忠)이 아니겠는가? 그때는 성상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였으나 앞장서서 이 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다. 사서(司書)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심상운은 그가 죄를 진 사람의 종자로서 상소하여 조목으로 진달한 바가 이처럼 교악(巧惡)하니,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였다. 보덕(輔德) 이진형(李鎭衡)이 말하기를,
"화심(禍心)이 싹터 움직인 것은 오로지 엿보고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알 것이다."
하였다. 홍국영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이와 같이 위험하오니, 신들이 성의를 다하여 우러러 도울 것입니다. 저하 역시 ‘진안(鎭安)’이란 두 글자를 유념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오로지 미미할 때 막는 데 달려 있도다. 사서가 아뢴 바를 마땅히 체념하겠다."
하였다.
보덕 이진형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이 삼가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의 상서를 보건대, 빈료(賓僚)를 언급해 논한 것이 있었는데 일의 전말(顚末)에 대한 설명이 흐릿하고 많은 말을 허비하였습니다. 아! 저 심상운의 말을 신들이 어찌 더불어 변명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한 말이 암참(黯慘)하고 기관(機關)이 매우 긴밀합니다. 신들은 지식이 노둔하고 학문이 허술하여 실로 보도하는 직임으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평일의 언행이 이런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았더라면 남이 하는 말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미 논척(論斥)이 있었으니, 궁문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상운의 지목하는 뜻을 내가 묵묵히 이해하고 있으니, 너희들에게 빛이 날 것이다."
하였다.
부사직 이복원(李福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전 조참(朝參)에 진참(進參)할 때에 삼가 경과(慶科) 고관(考官)의 명을 받았습니다. 이미 시임(時任)의 두 제학(提學)이 있었으니, 신이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되었으나, 몸이 궐내(闕內)에 있어서 도피할 길이 없어 마침내 외람되이 시사(試事)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방(榜)이 나오기에 미쳐서 합격한 시권(試券)에 뇌동(雷同)한 것이 3인이나 될 정도로 많아서 고권(考券)에 참여한 재신(宰臣)과 시험을 주관한 대료(大僚)가 서로 잇달아 인혐(引嫌)하여 마침내 성상께서 번거로이 처분하시고 방목(榜目)을 고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참여하여 듣고 취사(取捨)한 사람으로서 어찌 몽롱하여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먼저 신의 잘못한 죄를 다스리고 이어 유사로 하여금 다시는 신을 고관(考官)에 의망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예사로운 답을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이동직(李東稷)·한영운(韓永運)·권빈(權儐) 등 세 사람을 뽑았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승지가 입대할 때에 시임·원임 대신이 나와 엎드렸다. 하령하기를,
"이번 일은 일이 충(忠)·역(逆)에 관계된다. 사양하고 받는 즈음에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광명 정대하지 않다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전 좌상이 아뢴 색목(色目)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며, 조정의 일을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긴요한 것이다. 상후(上候)가 작년부터 어떠하였으며,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탄식함이 어떠하였던가? 이미 정유년329) 의 고사가 있었고, 또 대조께서 지공 지성(至公至誠)의 마음으로 부탁하신 성의(聖意)의 소재(所在)가 반드시 사양하기만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나누어 간절한 성의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었다. 전 좌상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구별이 있고 나의 기대 또한 다른 사람과 달랐었다. 그런데 20일 하교에 답하기를, ‘조정의 일을 알게 할 필요가 없으며, 잠덕(潛德)의 지위에 있어서는 알더라도 무익할 듯하다.’라고 하였었다. 내가 어린 것도 아닌데,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것은 과연 어떠한가? 서명선의 상소는 한결같이 굳은 단성(丹誠)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바라고 엿보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대저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진 후에 이내 이러한 심상운의 일이 있게 되었다. 그가 죄지은 자의 자식으로 어찌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그 말이 해괴하고 관계된 바가 작지 않다. 이는 번지게 해서 미봉(彌縫)할 일이 아니요, 이는 바로 대신(大臣)이 같은 소리로 죄를 성토할 때인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조선의 신하된 자에게는 위로 전하가 계시고 아래에 저하가 계십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다른 뜻을 둔다면, 이는 역(逆)인 것입니다. 심상운의 글은 미처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승지로 하여금 심상운의 글을 읽게 하였다.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명위가 이미 정해진 후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신들이 마땅히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청하겠습니다."
하고, 판부사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명위가 이미 정해진 후인데, 어찌 다른 마음을 두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이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은 의리(義理)이다. 여러 대신들이 만약 이 일을 분명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사소(辭疏)를 올리겠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저하께서 어찌 이와 같은 영을 내리십니까?"
하고, 김상철이 말하기를,
"‘당(黨)’이란 한 글자를 그에게 국문(鞫問)하면 반드시 격식이 갖추어져, 대벽(大辟)330) 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대조에 품하여 처리해야 한다."
하니,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엎드렸다. 하령하기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不必知]’라는 세 글자가 대신의 입에서 나왔고,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진 후에 ‘온실수(溫室樹)’ 등의 말이 오늘날 나왔으니, 그가 거실(巨室)과 다리를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대사헌 윤양후(尹養厚)가 말하기를,
"신은 심상운의 글을 보지 못하였으나 조금전 합문 밖에서 궁관(宮官)의 말을 듣건대, ‘온실수’ 등의 말이 있었다고 하니, 이것은 청토해야 할 역적입니다."
하고, 대사간 이택진(李宅鎭)이 말하기를,
"헌신(憲臣)이 이미 아뢴 바처럼 심상운은 곧 역적입니다."
하고, 부제학 이미(李瀰)가 말하기를,
"심상운의 뜻이 아주 흉참하니, 그 마음을 따져보면 역적인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왔는가?"
하니, 윤양후·이택진·이미 등이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반드시 근본을 바로잡도록 청하고, 홍인한(洪麟漢)을 청토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였다. 윤양후·이택진·이미·유언수(兪彦脩)·임제원(林濟遠)·김익휴(金翊休), 교리 박상래(朴相來)·윤행수(尹行修), 부교리 이유경(李儒慶)·송문로(宋文輅), 정언 이상진(李商進), 부수찬 오대익(吳大益)이 아뢰기를,
"판부사 홍인한은 감히 ‘조정의 일을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함부로 연석에서 진달하였었으니, 천만 무엄합니다. 비록 대조(大朝)의 특사의 은전으로 인하여, 곧 서용되기는 했으나, 서추(西樞)의 직임에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판부사 홍인한을 우선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대조에 품하라."
하였다. 이택진·유언수·이상진이 아뢰기를,
"전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은 지난날 입시에서 하문하실 때에 일찍이 홍문관에 재직시 아뢴 색목(色目) 등의 말로써 흐려서 말해 아주 무엄하였습니다. 청컨대 송형중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양후·이택진·이미·유언수·임제원·김익휴·박상래·윤행수·이유경·송문로·이상진·오대익이 아뢰기를,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은 본래 흉역의 후예로 그 할아비를 고쳐 바꿔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니, 그 처사의 흉패함과 남을 모함하는 사악함은 온 세상이 침을 뱉았습니다. 지난번 올린 상서는 가리키는 뜻이 음휼하고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니, 청컨대 대조에 앙품하여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심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대조에 품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승지로 하여금 춘방(春坊)의 연명서(聯名書)에 답을 내리게 했는데, 이르기를,
"심상운의 글은 빈료(賓僚)를 건드려 언급해 가리키는 뜻의 소재가 명약 관화하니, 어찌 이런 사람의 이런 말을 가지고 인의(引義)하는 것처럼 하여 서로 이끌고 지레 먼저 나갈 수 있겠는가? 글을 진달한 여러 궁료(宮僚)들을 하나같이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이는 관계된 바가 작지 않은데, 어찌 이로써 혐의하여 토죄(討罪)하는 의(義)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령하기를,
"내가 궁관(宮官)에 대하여 우도(友道)로 대우하고 예경(禮敬)하기에 힘써 진력한 것은 본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조례(朝禮)에 이르러서는 이로써 기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그 직책은 궁관이요 당하 시종(堂下侍從)에 불과한데 일일 삼패(一日三牌)에 패초(牌招)마다 문득 어기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아주 온당치 못하니 한결같이 모두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삼사가 입대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조선의 신자(臣子)에게는 위로 대조(大朝)가 계시고 아래로는 저하가 계신데, 이런 때를 당해서 만약 다른 뜻이 있다면, 이는 바로 역적의 마음인 것입니다.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진 후에 심상운의 이런 해괴하고 패악한 상서가 있어 당명(黨名)을 조목으로 나열하였는데, 말이 음휼하므로 신들이 목욕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이것은 내 생각에는 관계된 바가 작지 않다고 여긴다. ‘온실수(溫室樹)’라는 말이 아주 흉참한데, 여러 신하들은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여러 대신(大臣)들이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국문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대조에 품해야 한다."
하였다. 승지로 하여금 영지(令旨)를 쓰게 하기를,
"의(義)가 중함은 목욕하고 청토할 만하고, 일은 충역(忠逆)에 관계된다."
하였다. 승지 오재소(吳載紹)가 말하기를,
"‘충역(忠逆)’ 두 글자는 우선 끝을 살펴보아야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승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내 뜻 밖이다."
하였다. 홍국영(洪國榮)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다른 승지를 입대시키라 명하였다.
12월 22일 을축
부제학 이미(李瀰)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젯밤 입대할 때에 삼가 듣건대, 예교(睿敎)를 여러 차례 영부사(領府事) 김상복(金相福)에게 내리셨는데, 말의 뜻이 엄절(嚴截)하여 옆에서 보기에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저 김상복은 버티고서 나오지 않다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라는 하교를 들은 연후에야 비로소 물러갔으니, 비단 나라의 기강 뿐만 아니라 서연(書筵)의 체모를 무너뜨려 이미 한심함을 금할 수 없는데, 오늘 진연(診筵)에 또 아무렇지 않게 문안하러 들어왔습니다. 청정(聽政)한 후의 체모와 분의(分義)가 전과는 자별한데, 어찌 감히 방자하여 돌아보지 않고 전석(前席)에 무릎쓰고 올라 거짓으로 예교가 처음부터 진퇴와 무관한 체하겠습니까? 3백 년의 기강이 김상복에게서 쓸어버린 듯 없어졌으니, 신은 김상복에게 우선 삭출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질박하고 정직한 성품이 아니면 어찌 이런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대신의 일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부사직 이계(李溎)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우리 대조께서는 임어하신 지 이미 50년이 지나고 성수(聖壽)가 90이 되셨습니다. 성상의 지기(志氣)가 비록 혈기(血氣)와 더불어 함께 쇠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하루의 만기(萬幾)를 처리하다보면 끝내 섭양(攝養)하는데 방해가 됨을 면치 못하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저하께서는 예질(睿質)이 하늘이 이룬 바이며 온문(溫文)이 날로 성취되고 인효(仁孝)·성경(誠敬)의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이 드러나 우리 대조께서 아름답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성심으로 반드시 기무(機務)를 섭청(攝聽)하게 하여 조금이나마 소간(宵旰)을 늦추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한 나라의 신민(臣民)이 함께 원하던 바이니, 우리 저하의 양지(養志)하시는 성심으로 어찌 그 책임을 사양하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천지에 어긋나지 않은 대경(大經)·대의(大義)를 세우는 것으로 비록 요·순·우임금의 성대한 주고받음도 이를 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는 성교(聖敎)를 들으면 다만 경근(敬謹)의 뜻을 앙달하는 데서 그칠 뿐이지, 어찌 감히 다른 말을 췌언(贅言)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홍인한(洪麟漢)은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감히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방자하게도 간절한 성교가 내릴 때에 발설하였으니, 이미 아주 놀라웠습니다. 더군다나 그후의 전교를 승지가 마땅히 받들어야 하는 것인데, 손을 내저어 중지시켰으니, 이것은 또한 어찌 전도되고 혼란됨이 이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그는 한갓 사체(事體)가 지중(至重)함만 알고 의리(義理)가 지정(至正)함을 생각하지 않고서 스스로 이런 큰 죄에 빠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내쳤다가 곧 서용했으니, 마땅히 사직(司直)의 논박이 있어야 했는데, 날이 지나도록 들리지 않아 신의 마음 속으로 의아해 했습니다. 오늘 삼사(三司)의 합달(合達)에서 비로소 일단(一端)의 공의(公議)를 볼 수 있었으나 오히려 준허(準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우리 대조의 지극히 인자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 부범(負犯)을 논한다면 어찌 예사로이 서추(西樞)에 부쳐 문득 작은 허물이나 흠으로 가볍게 감죄하였다가 곧 서용하는 자와 같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대조에 앙품하여 빨리 삼사의 청을 따라야 한다고 여깁니다. 심상운(沈翔雲)은 천지 사이의 한 죄인입니다. 그는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사람으로서 또 불령(不逞)한 마음을 품고서 글을 올렸는데, 가리키는 뜻이 교휼(巧譎)하여 거의 똑바로 보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형신(刑訊)하여 변방으로 내친 처분이 비록 엄하지만, 그 정상을 따져서 명쾌하게 해당되는 율(律)을 바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대조께서 나라의 큰 일을 위탁한 신하인데, 이처럼 자세히 글을 진달하니 성간(聖簡)을 등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대신(大臣)들은 성상께서 윤허를 아끼신 것이 원정(原情)331) 하게 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라 하니, 이제 다시 더 시끄럽게 하지 않아도 크게 손상될 것은 없을 듯하다. 심상운에게 형전을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성조(聖朝)의 윤리(倫理)를 정명(正明)하게 하는 다스림에 흠이 될 듯하니, 내가 대조께 한 번 진달하고자 한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다.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왕세손이 두 가지 건(件)의 일에 대하여 품달(稟達)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하나는, 홍인한(洪麟漢)에 대한 삼사의 합달(合達)이요, 하나는, 심상운(沈翔雲)의 상서에 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좌상은 무슨 일로 인해서 그런가?"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지난날의 일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운은 무슨 일인가?"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상서 가운데 있는 조목(條目)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소본(疏本)을 들이라 명하여 승지로 하여금 읽어 아뢰게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주 그르다. 그가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는가?"
하고는, 신계(新啓)332) 의 초(草)를 들이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 역시 모두 분노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누군들 다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뜻이 매우 괴이하고 악하다. 사람됨이 경솔하고 영리하면 일마다 모두 이렇게 되는데, 그는 반드시 망분(妄憤)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윤양후(尹養厚), 대사간 이택진(李宅鎭), 부제학 이미(李瀰) 등이 심상운을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문초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그 소장을 보건대, 심골(心骨)이 다 시리다. 그에게 만약 인심(人心)이 있다면, 이제 청정(聽政)하는 때를 맞아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그 마음이 이미 판명되었는데, 어찌 다시 묻겠는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하여 그에게 마땅한 율을 시행해야 하지만, 아! 저 여주(驪州)333) 를 바라보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 소장이 그의 결안(結案)이 되는데, 무엇을 묻겠는가? 특별히 일률(一律)334) 을 감하고, 함께 국중(國中)에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 흑산도(黑山島)에 천극(栫棘)하는 율을 시행하되, 길을 배로 재촉해 압송하여 엄히 천극하라."
하였다. 또 홍인한을 삭출하도록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당국자(當局者)는 미혹된다.’라고 하였고, ‘사람마다 요순(堯舜)이 아닌데, 매사에 어찌 모조리 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나는 이 두 말이 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 여긴다. 이미 서용(敍用)하였고, 이제 나라의 경사를 맞았는데, 어찌 다시 제기해 유시하겠는가? 더구나 청정하는 초두(初頭)에 이번 이 계사는 결단코 그 지나침을 알겠으니,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심상운의 상서를 보건대, 천만 해괴하고 분하다. 이런 소인으로 하여금 만약 청평위(靑平尉)335) 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여주(驪州)에 절하겠는가? 심상운 형제는 아울러 그의 아비와 함께 본가(本家)로 돌아가게 하고, 해조(該曺)로 하여금 입후 문서(立後文書)를 지워버리게 하며, 청평위 집의 봉사(奉祀)는 무고(無故)한 자를 별택(別擇)하라."
하고, 인하여 김상복(金相福)에게 말하기를,
"이 하교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엄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주를 바라보니,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택진, 부제조 이미가 말하기를,
"본종(本宗)으로 돌려보낸 후에는 굳이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택진(李宅鎭)·이경륜(李敬倫)·김문순(金文淳)·이동우(李東遇)·채홍리(蔡弘履)·서유원(徐有元)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영상·좌상과 승지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조금 전 성교로 인하여 본부(本府)에서 발배(發配)336) 를 거행하였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신들이 비록 감히 품주(稟奏)하지는 못하였으나, 처분하신 바가 좋습니다."
하였다. 승지로 하여금 이미의 차자를 읽으라 하고, 하령하기를,
"이번 일은 신축년337) 과 다르니, 이렇게 하여 갈등이 생기게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김상철·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양사의 제신(諸臣)으로 청정(廳政)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한결같이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여 의리와 분수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엄히 하라."
하였다. 삼사가 입대하여 전달(傳達)하였는데, 이택진(李宅鎭)이 말하기를,
"이미 삼사의 합사가 있었는데 옥당(玉堂)이 따라서 들어오지 않았으니, 청컨대 추고하소서. 옥당이 미처 들어오지 않았는데 삼사의 합사를 지레 먼저 진달하였으니, 양사의 여러 신하들 역시 추고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동궁(東宮)이 판의금 구윤옥(具允鈺)에게 말하기를,
"심상운은 반드시 죽일 생각은 없으니, 잘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조금 전 이미 하령하였지만, 청정 조참에 양사의 제신이 어찌 참석하지 않은 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하의 분수가 없음을 알만 하니, 먼 변방으로 정배하는 것으로 그칠 수는 없다. 심이지(沈履之)는 처음에는 외방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원래 외방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날짜를 계산해 보면 올 수가 있었다. 그날 불참한 자는 연계(聯啓)함이 있었는데, 비록 대신(大臣)의 세염(勢焰)이 치열하다 하나 어찌 머뭇거리며 대신을 관망하면서 대공회(大公會)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으니, 군신의 대의(大義)를 피할 수 없다. 양사의 제신으로 청정 조참에 참여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그 의도를 따져보건대, 시일이 조금 오래 되었다고 해서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가 밝지 않기 때문에 성교(聖敎)에서 말한 소소(宵小)한 무리들이 발자취를 이어 일어나고 있으니, 엄히 징토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예사롭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북면(北面)한 신하로서 차라리 조참에 참여하지 않고 신하의 분의(分義)가 없는 죄과(罪科)에 빠질지언정 감히 대단(臺端)에 나오지 못하고, 이미 정지(停止)한 계사가 나올까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하고 앞뒤로 살피기만 하는 형상이 분명해 덮어둘 수 없다. 청정 조참에 불참한 여러 대신(臺臣)들을 먼저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고 내일 아침을 기다려 죄인의 진술을 받아 아뢰라."
하였다.
12월 23일 병인
집의 신응현(申應顯)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연전에 이적보(李迪輔)에게서 더러운 욕을 당했었는데, 이적보를 바야흐로 양사가 합계하는 중이라 신이 만약 다리를 내밀어 계사에 참여한다면, 이는 기회를 틈타 보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가, 우리 저하께서는 춘추가 정성(鼎盛)하시고 예지(睿智)가 고명(高明)하시어 진궁(震宮)338) 의 주창(主鬯)339) 이 되신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셨고, 우리 대조께서는 요(堯)임금의 정사에 피곤할 연세로 순(舜)임금의 섭정(攝政)하는 일을 본받으셨으니, 그 광명 정대함은 백 년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니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날 신하된 자라면 그 누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만, 저 상신(相臣) 홍인한(洪麟漢)은 이에 감히 ‘세 가지는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솔선하여 연석에서 진달하였으니, 아! 이는 무슨 심보입니까? 그 이른바 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저하께서 바야흐로 나이가 어려서 알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예학(睿學)의 진취함이 없어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국가의 일은 처음부터 저하께서 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저하께서 국가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면, 누가 마땅히 알아야 하겠습니까? 그 마음을 따져보면 참으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저 상신인 자가 친히 폐부(肺腑)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는데도 공을 갚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감히 불만스런 마음을 품어 국가의 대계(大計)를 막고자 하였으니,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는 진실로 그 죄상을 나열하여 엄한 말로 청토(請討)해야 그것이 곧 상도(常道)를 지키는 양심이고 당연한 신하의 분의(分義)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로지 저 상신은 형세가 부형(父兄)을 누르고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할 만합니다. 위세의 기염을 가하면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여론(餘論)을 부호(扶護)하여 문득 의리를 만들어 차라리 나라에 죄를 입을지언정 감히 권문(權門)을 거슬리지 못하며 오히려 난만(爛漫)하게 함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조께서 대리하라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도 상신(相臣)이 손을 흔들어 중지시키자 승지가 감히 쓰지 못하였습니다. 대조께서 재신(宰臣)의 상소에 대해 물으시자 도헌(都憲)이 ‘심각한 글이다.’라고 하였고, 원임 대신 역시 감히 부화뇌동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승지는 단지 상신(相臣)이 있는 것만 알았을 뿐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도헌과 원임 대신 역시 상신이 있는 줄만 알았을 뿐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의리가 어두워져 막히고 인심이 함닉(陷溺)됨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징토(懲討)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음이 심상운(沈翔雲)에 이르러서 극에 달했습니다. 그 전편(全篇)의 어의(語意)는 음휼하게 농락함이 엿보이고 화심(禍心)을 품고서 궁료(宮僚)를 드러내어 배척하였으며, ‘온실수(溫室樹)를 말하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말은 가리킨 뜻의 소재를 천만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모두 그 소굴이 깨뜨려지지 않음으로써 근저(根柢)가 서리서리 얽히고 이시(羸豕)가 〈군자를 해하려는 마음을 품고〉 뛰어 다니는 꼴이니, 장차 쉴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후일의 근심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상신이 나라를 등진 죄는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나머지 붙쫓아 부호(扶護)한 자들 역시 차례로 뽑아서 다스려 각기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판부사가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연석에서 아뢴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그 마음은 오로지 한갓 일의 체면이 중함만 알고 의리가 엄함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이른바 ‘대신의 당일 일은 실언이라고 하면 가하지만, 무엄하다고 논하는 것은 실로 본심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으니, 글에서 운운한 말은 혹여 너무 지나치지는 않은가? 승지가 감히 쓰지 못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앉은 자리가 조금 멀어서 듣지 못한 것을 내가 목도(目覩)한 바이니, 더욱이 어찌 반드시 매우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 세도가 함닉된 지 오래이다. 말이 사직(司直)에게서 나왔는데도 그 말의 당·부당(當否當)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위의 뜻이 어떠한지를 엿보니, 이것이 금일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원임 대신과 도헌의 그날 아룀은 혹 이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시비가 이미 정해지고 처분이 크게 밝아졌는데 지금에 이르러 다시 공격하기를 일삼는 것은 아주 너무 심하다는 경계를 범한 것이다. 더군다나 또 대조의 50년 성덕 대업(盛德大業)은 오직 세신(世臣)을 온전히 보존하여 평탕(平蕩)의 교화(敎化)를 선도(善導)하여 이룬 것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어린 내가 우러러 본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작금 이래로 대직(臺職)·군함(軍銜)의 상소가 공거(公車)를 메우고 있으나, 이것은 우리 대조께서 세신을 보전하는 본의가 아니어서 내가 이 때문에 탄식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하였다.
구익(具㢞)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경륜(李敬倫)을 대사간으로, 이병정(李秉鼎)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사면(辭免)하는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소소(宵小)한 무리가 성감(聖鑑) 아래에서 도피하지 못해 대의(大義)가 이미 밝아지고 처분 또한 엄하였으니, 경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인의(引義)해야 할 단서가 있겠는가? 더는 사직하지 말고 때의 어려움을 구하라는 것이 원보(元輔)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팔순에 청정하는 것이 예전에 어찌 있었던가? 충자(沖子)가 대리(代理)의 명을 받고 친정(親政)하니 내 마음이 펴졌는데, 이번에 심상운의 일은 꿈 속에서라도 어찌 헤아렸겠는가? 이미 심익운(沈翼雲)의 잔인한 마음을 알아서 어제 처분한 후에 형제가 자결(自決)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들리지 않고 있으니, 이는 흑산도(黑山島)에다 호랑이를 기르는 셈이다. 《주역》에 말하기를,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되니, 군자는 기미를 보아서 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단지 나라의 흥망에만 관계되겠는가? 이 섬에 천극(栫棘)한 〈죄인〉 가운데 황택인(黃宅仁)은 비록 말할 것이 없지만 박성원(朴盛源)과 이적보(李迪輔)에 대한 마음이 아직도 늦추어지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제 심상운을 더하겠는가? 특별히 시임·원임을 불러 나의 두려워하는 뜻을 유시하라. 이 무리들이 이 하교를 들으면 자결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그렇게 하면 흥(興)할 조짐이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는가? 해도(該島)에 엄히 신칙하여 그가 만약 물고(物故)하면 즉시 장문(狀聞)하게 하라. 사마의(司馬懿)와 환온(桓溫)340) 이 지금 있고,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죽이는 것이 아까울 것이 무엇인가? 집의 방에서 죽는 것만도 그에게 있어서는 다행이다. 임금의 마음이 이와 같은데 자결을 꺼릴 게 무엇인가? 예사롭게 보니, 이것이 이인좌·정희량의 마음인 것이다."
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을 승지로 삼았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유의양(柳義養)이 복명하였는데, 상주 목사(尙州牧使) 정석달(鄭錫達),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양수(李養遂)는 포계(褒啓)에 들고, 순흥 부사(順興府使) 한광재(韓光載), 인동 부사(仁同府使) 김시구(金耆耉)는 파직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신들이 매번 소조(小朝)에 입대할 때를 당하여 왕세손이 일어나시는 절차가 있는데, 만약 서연(書筵)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신들에게 겸함(兼銜)이 있기 때문에 예(例)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으나, 만약 본직(本職)으로 입대하는 것이라면 청정한 후에는 일의 체면이 아주 달라서 마땅히 일어나시는 절차가 없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심상운(沈翔雲)이 번거롭게 소란을 피운 죄는 실로 만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어제의 처분은 실로 대조(大朝)께서 살리시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의 죄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지금 이후에 조정에 분분하게 파급될까 염려된다."
하니,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예교(睿敎)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아! 조손(祖孫)이 서로 의지하니 마땅히 편안하여야 하는데, 손자의 청정하는 처음 모습이 어떠한가? 더군다나 역적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이 제자(弟子)가 되어 신축년341) 초의 환국(換局)은 거의 나라가 망할 뻔하였고, 여파(餘波)가 무신년342) 을 양성(釀成)하였다. 이제 그 손자 심상운(沈翔雲)이 청정하는 처음에 대직(臺職)도 아닌 군직(軍職)으로서 당명(黨名)을 나열해 써서 구습(舊習)을 달가운 마음으로 행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은 그에게 있어서 단안이었다. 그에게 자결하게 했으나 달가운 마음으로 섬으로 갔으니, 이는 사마소(司馬昭)343) 의 마음인 것이다. 엄히 문초하여 법을 바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목(問目)을 써서 내려 해부로 하여금 즉시 국청을 설치하여 발문(發問)하고 즉시 형추(刑推)하여 결안을 아뢰도록 하라. 하물며 심상운은 박상검의 가면(假面)을 둘러쓴 자가 아니겠는가? 엄히 문초함이 마땅하니, 즉시 분부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평안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영진곡(營賑穀) 5천 석(石)을 더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 김해 부사(金海府使) 남순철(南舜喆)은 부잣집 한정(閑丁)을 모집하여 향임첩(鄕任帖)을 만들어 준 것이 15장(張)에 이르렀습니다. 전 남해 현감(南海縣監) 이동식(李東植)은 마땅히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해야 할 사람에게 완문(完文)344) 을 주어 영원히 빠지게 하고 그 돈을 약간의 군기(軍器)를 수리하는 데 거두어 쓰고는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 일컬었으며, 이전의 원[倅]이 세운 공해(公廨)를 자기 공으로 빼앗아 거짓으로 병영(兵營)에 보고하여 포상(褒賞)까지 받았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술을 받아서 아뢰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좌직(坐直) 승지가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곤장(棍杖)으로 형추(刑推)하는 자가 있으니, 제도에 신칙하여 주문(奏聞)하게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12월 24일 정묘
이보행(李普行)을 승지로 삼았다.
집의 신응현(申應顯)이 피혐(避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군신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 대조께서 지인 지성(至仁至聖) 하심으로 50년 동안 하시던 노고를 우리 저하에게 부탁하셨으니, 이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이 요임금의 섭정을 한 것이어서 그 명위(名位)가 바르며 그 말이 순(順)한데,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저 상신(相臣)의 이른바, ‘세 가지는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어찌하여 나왔습니까? 아! 그 처지를 물으면 폐부(肺腑)의 신하요, 그 벼슬을 물으면 고굉(股肱)의 신하입니다. 이처럼 국가의 큰 처분을 당하여 종사(宗社)의 중대한 일이 이처럼 광명 정대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순순히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에 감히 불만의 마음을 품고 이처럼 뜻밖의 말을 하였으니, 비록 저지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누가 믿겠습니까? 저하께서는 한갓 사면(事面)이 중대한 것만 아시고 의리가 엄중함을 헤아리지 않으신 채 하교하셨는데, 신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사면의 중대함은 오로지 의리가 엄한 데에 관계되는데, 이미 의리에 어긋났다면 어찌 사면의 중함이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이로써 상신(相臣)을 변명하실 줄 신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원임 대신과 도헌(都憲)이 아뢴 것에 이르러서는 과연 미리 성상의 뜻을 엿보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정도(正道)로써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습니까? 승지가 감히 쓰지 못한 것을 자리가 멀어서 잘 듣지 못한 것이라고 핑계하지만, 상신이 손을 내저을 때 승지가 그것이 무슨 뜻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고서 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일인데, 대신이 감히 손을 내저어 중지시키며 승지는 감히 손을 내저은 것을 받아들여 쓰지 않는단 말입니까? 손을 내저은 형상은 재신(宰臣) 이계(李溎)의 글에서도 역시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 혼자만의 말이겠습니까? 신이 이때에 마침 언관(言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한 세상이 권세가에게 쏠리는 것을 깊이 개탄했으나 능히 명백하게 성토(聲討)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마디 말을 내어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고 삼가 스스로 새매가 참새를 쫓듯 〈간사한 자를 주륙(誅戮)하려는〉 의(義)를 따른 것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공격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것이다.’라는 등의 하교에 이르러서는 마치 신이 한 말이 얽으려는 데서 나온 것처럼 여기시니, 더욱 두렵고 지극히 황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이 없었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어제 집의 신응현(申應顯)의 비답에 이미 내 뜻을 알렸는데, 내가 피혐하는 글을 살펴보건대, 그 조목으로 나열한 것이 아주 모가 났으니, 대신(臺臣)의 뜻이 과연 지극히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내 생각에는 대조께서 나에게 부탁한 것은 나 소자(小子)로 하여금 탕탕 평평(蕩蕩平平)한 교화를 우러러 받들어 대소 신료와 함께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우리 대조께서 밝게 명하신 바에 우러러 답(答)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대저 미미한 데에서부터 삼가고 조짐을 막는 것으로써 마땅히 그 지극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가벼이 죄주도록 재가한 것은 그 말이 지나친 것을 규정(糾正)하기에는 부족하니, 전 집의 신응현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심상운(沈翔雲)을 국문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이 즉시 죄를 자복하였는가?"
하니, 영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문목(問目)을 반복한 후에야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신들이 이미 결안(結案)을 받아 올렸으니, 오직 상께서 처분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차례로 진달하여 아뢰라."
하니, 여러 원임 대신들이 말하기를,
"그가 불충(不忠)·불효(不孝)로 이미 죄를 자복하였으니, 오직 법대로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하고, 의금부 당상과 대신(臺臣)들은 모두 말하기를,
"해당되는 율을 써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문(禁門) 밖에서 죄인의 처자 가운데 소란을 피운 자가 있는가?"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그 어미 뿐만 아니라, 팔순의 조모(祖母)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감동한 바가 있으니, 하교한 후에야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불충·불효의 죄는 그자에 있어서 미리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당(黨)’이란 한 글자를 엄칙하는 때에 그가 감히 당목(黨目)을 조목으로 나열함으로써 말이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음참(陰慘)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거기에는 또한 해당되는 율이 있지만 안법(按法)하는 규례는 그 마음을 따져서 그 법을 참고하는 것이라서 나는 또한 그에게 해당되는 율을 알지 못하겠다. 아! 만년에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면서 밤낮으로 경계할 것을 생각하는데, 누워서 심상운을 추국(推鞫)할 때 그 처의 모습을 생각하고서 이미 좌상에게 유시하였었다. 듣건대 또 그의 조모와 어미가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러한 점에 마음이 먼저 움직여 매양 소강절(邵康節)345) 의 ‘착한 사람이 선(善)을 함에 있어, 오직 날짜가 부족[日不足]한 듯이 하였다.’라는 말을 외워 세 글자의 부신[三字符]으로 삼았다. 저 심상운은 이처럼 천만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하였으니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하며, 이처럼 나라의 경사를 맞아 충자(沖子)가 청정하는 처음에 이런 일을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그의 조모와 어미가 아직껏 사동(社洞)에 있고 그의 처와 동생이 어떤 지경에 이를 지 알 수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이 먼저 슬퍼진다. 나라의 경사가 이러할 때에 어찌 종국(宗國)을 위해서 이런 잔인한 일을 행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신축년346) 과 임인년347) 의 난리의 근본은 바로 심익창(沈益昌)이었는데, 지금 심상운은 심 익창과 같은 심장(心腸)이다. 심익창은 이미 죽어서 지금 논할 수가 없지만, 심상운은 동생과 함께 종신토록 서민(庶民)을 만들어 사류(士類)에 끼지 못하게 하라. 아! 지금 나의 이런 거조는 충자의 영원함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물러나가려 할 때, 다시 입시를 명하여 하교하기를,
"역종(逆種) 심상운을 해부로 하여금 한 차례 엄형한 후 발배(發配)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낱낱이 엄히 심문하여 도성 문을 닫기 전에 발배하라. 그리고 모름지기 이렇게 했는데도 양사(兩司)가 묵묵히 나갔으니, 이렇게 한다면 어찌 국문에 참여한 것인가? 국법을 없이 한 것이니, 입시한 양사에게는 빨리 삭직하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12월 25일 무진
심욱지(沈勗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장령 채정하(蔡廷夏)·신기(申昕), 지평 이정운(李鼎雲)이 상서하기를,
"신들이 삼가 죄인 심상운을 참작하여 처리하신 하교를 보고 서로 놀라 바라보면서 모르는 사이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저 심상운은 본디 윤리를 어지럽힌 종자로서 몰래 불령(不逞)한 마음을 품고 한 글을 올려 음휼하게 농락하였으니, 흉악한 정상과 교묘한 태도는 열 사람의 눈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당목(黨目)을 조목으로 나열하고 궁료(宮僚)들을 공척(攻斥)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부도(不道)의 율(律)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온 나라가 일제히 분노하는 뜻을 풀기에는 부족할 것인데 이제 이 너그럽게 용서하는 법을 어찌하여 갑자기 내리십니까? 이것이 비록 우리 대조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큰 덕(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다만 생각하건대 징토함이 엄하지 못해 정적(情跡)을 따지지 않는다면 나라에 삼척(三尺)348) 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이명(离明)께서는 대조에 앙품하여 빨리 성명(成命)을 중지시키고 다시 엄국(嚴鞫)을 가하여 쾌히 왕법(王法)을 펴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상운을 참작하여 처리한 명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다시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대사간 심욱지(沈勗之)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다행히 성대한 때를 만나 삼가 요순(堯舜)의 도(道)로써 우러러 저하에게 면려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도란 바로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이니, 이것이 어찌 만화(萬化)의 근원과 지치(至治)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존(操存)·성찰(省察)의 공부는 역시 학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명(說命)349) 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배움에 힘쓰라’라고 하였으니, 힘쓰소서, 힘쓰소서. 우리 저하께서 청정한 이래로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글을 올린 것이 이런 등등의 말에 불과하였는데, 겉으로 보건대 비록 신기(新奇)하지는 않으나 지금 저하에게 우러러 면려하는 것은 바로 요순의 도입니다. 서인(庶人) 죄인(罪人) 심상운은 본래 흉역(凶逆)의 후예로 항상 은밀히 숨겨 둔 마음을 품고서 감히 놀라운 상소를 올려 시험해 볼 계책을 삼았다가 할 말이 없다고 죄를 자복하였으니,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일률(一律)을 용서함이 비록 우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왕법으로 헤아려 보면 실형(失刑)함이 큽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조에 앙품(仰稟)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쾌히 왕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글로 아뢴 것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심상운의 일은 이미 헌신(憲臣)의 상서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부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상운의 죄는 어찌 주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본디 윤리가 없는 요사한 종자로서 스스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음을 알고 감히 청정하는 처음에 한 글을 올렸는데 뜻이 교특(巧慝)하고 정상이 음참(陰慘)하였으니, 당목(黨目)을 조목으로 나열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추국(推鞫)이 바야흐로 한참이어서 단서가 다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이내 이처럼 관대한 형전(刑典)이 있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본디 우리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과 후손을 넉넉하게 해 주시려는 모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의 죄범를 따져보면 관계됨이 매우 중합니다. 나라에 법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참으로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요흉(妖凶)에게 시행하지 않고 누구에게 시행하겠습니까? 삼가 비옵건대 이명(离明)께서는 대조에 품하여 빨리 성명(成命)을 중지하고 이어서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엄국을 가해 쾌히 왕법을 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이처럼 법을 논집하는 청을 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심상운에게 특별히 일률(一律)을 용서한 것은 실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의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부응교 홍국영(洪國榮)이 상서하기를,
"신과 판부사 신 홍인한(洪麟漢)과는 동성(同姓)의 지친으로 10촌 족조(族祖)가 됩니다. 방금 삼사가 일제히 일어나 죄를 성토함이 지엄한데, 신은 사의(私義) 때문에 감히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참여하여 마치 남인 것처럼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패(召牌)가 내려도 어기는 것을 면치 못하였는데, 신이 면직을 비는 글에서 어찌 감히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 대조의 지극히 자애하신 덕으로 저하께 3백 년의 중한 종사(宗社)를 부탁하셨으니, 저하의 오늘날 급선무는 우리 대조께서 50년 동안 조제(調劑)해 오신 고심(苦心)을 우러러 본받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일 이래로 풍색(風色)이 격렬해지고 상소가 빗발치듯 하며 혹은 중도를 지나침이 있어서 재택(裁擇)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칠 기약이 없고 편안하고 조용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아! 팔도의 백성들이 우러러 받드는 것은 오로지 대조(大朝)와 저하(邸下)일 뿐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라면 어찌 다른 마음을 갖겠습니까? 만약 오늘날의 신하로서 혹 그런 죄를 짓는 자가 있다면 주벌(誅罰)해야 하며, 오늘날 말하는 자 가운데 혹 그 실정에 지나친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살펴 헤아려야 합니다. 하물며 저하의 처음 하시는 정사가 지극히 공정(公正)한 도리에 힘쓰시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탄식이 있겠습니까? 신이 여러 해 동안 강독(講讀)을 하여 치우치게 지우(知遇)해 주신 은혜를 입어서 매양 주연(胄筵)에 올라서 구구하게 앙달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세신(世臣)을 보전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저하께서도 역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의 한결같이 굳은 적성(赤誠)은 곧 나라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침 논사(論思)하는 직임을 맡아서 저하를 위해서 다시 한마디 올리지 않는다면 신이 은혜를 저버린 죄를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가 너와 지우(知遇)하고 너와 뜻이 맞은 것은 서연(書筵)에서부터였는데, 잠경(箴警)과 자익(資益)이 어느 것 하나 지우와 뜻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허여한 것은 별도로 있었다. 너의 성의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에 감동하였고, 너의 공심(公心)이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을 가상(嘉尙)히 여겼다. 바야흐로 이제 조정의 기상이 분분할 때에 이처럼 대증(對症)할 좋은 경계의 말을 올렸으니, 촛불을 밝히고 읽으면서 더욱 참으로 감탄하였다. 세신을 보전하고 세도를 안정시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비단 시무(時務)의 절요(切要)일 뿐만이 아니니, 내가 이로써 지켜나갈 자료로 삼겠다. 그리고 상서 중 인의(引義)한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내가 옛날 한 일문(逸文)을 보았는데, ‘방해(蚌蟹)는 전신이 갑주(甲胄)이나 간성(干城)에 무슨 도움이 되며, 지주(蜘蛛)350) 의 배에는 경륜(經綸)이 가득하나 어찌 사무(事務)에 능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덕이 재능을 이기면 군자라 할 수 있고, 재능이 덕을 이기면 소인이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격언이며, 그 또한 심상운을 위해서 준비된 말이다. 그가 옛날 모두 두세살배기 어린아이로 형제가 그의 조모(祖母)를 따라서 예궐했을 때 나 역시 모시고 보았었는데, 할아버지 청평위(靑平尉)의 손자다웠었다. 만약 그런 마음을 지켰더라면 어찌 어저께의 일이 있었겠는가? 내가 평일 힘을 얻은 것은 바로 자양(紫陽)351) 의 《소학(小學)》 한 권인데, 가언편(嘉言篇)의 범질(范質)과 마원(馬援)이 자제를 경계한 글과 소강절(邵康節)의 경계하는 글을 매양 외고 있다. 아! 어젯밤 처분은 소 선생(邵先生)을 배우고, 또한 유선주(劉先主)352) 의 ‘선(善)이 작다고 하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생각한 것이었다. 대궐 안에 당(堂) 하나가 있는데, 예전에 목릉(穆陵)353) 의 대자(大字)를 모사(模寫)해서 당의 이름을 선(善)이라 하였으니, 유 선주와 소강절의 말을 취한 것으로 사자관(寫字官) 이익신(李翊臣)에게 명하여 써붙였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러러보았었는데, 이는 바로 요순(堯舜)을 본받으려거든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 어젯밤 처분할 때에 소강절의 ‘길인(吉人)은 선을 하되, 시일이 부족할 것처럼 한다.’라는 말을 외워 특별히 국청의 설치를 명하고, 또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으라 명하였는데, 누가 내 마음을 알겠는가?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도(世道)를 엄히 하기 위한 고심이었다. 비록 그러하나 엄히 해야 할 것은 엄히 해야 하고 헤아려야 할 것은 헤아려야 한다. 아! 한 사람에게 법을 쓰면 몇 사람이 운명(殞命)하게 되는가? 내 마음이 결코 이렇게 되지 않도다. 하물며 충자(沖子)와 후손을 위한 일임에랴. 심상운의 조모와 어미가 서로 붙잡고 울고, 아내는 문 아래에서 뒹굴고, 동생과 아들은 부문(府門)에서 석고(席藁)하였으니, 아! 청정(聽政)한 처음의 일이 없는 세상에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소소(宵小)한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나라를 위해서였다. 관전(寬典)이 내리자, 그의 아내는 문 아래에서 머리를 가다듬고, 동생과 아들은 황홀하게 마치 재생(再生)한 듯하였으니, 어젯밤의 처분은 거의 기천 영명(祈天永命)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옛날 계복(啓覆)할 때에 자성(慈聖)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작처(酌處)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기뻤다’라고 하셨으니, 이번의 처분도 또한 이를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처분한 대신(臺臣) 역시 3백 년의 법을 위해 한번 합사(合辭)에 가한 것이니, 어찌 민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민망함은 작고 관계됨은 크다. 심상운은 감옥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해부에 신칙하여 지체하지 말게 하라. 대소 신료들은 이를 귀감(龜鑑)으로 삼아 무릇 사람을 쓰는 데 있어 개국한 이래 집에 전해오는 ‘소인을 쓰지 말라’는 가르침을 깊이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어제의 일은 온 세상이 일제히 분개하였는데, 위에서의 처분이 처음에는 지엄하다가 마침내는 특별히 관대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지와 같은 인(仁)이십니다. 그리고 대신(臺臣)을 처분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지당하여 흠앙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자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왕세손이 정조(正朝) 전배(展拜) 후에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고 전정(殿庭)에서 산호(山呼)하는 것은 전례(典禮)에 있는 바입니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응당 행해야 할 예(例)를 권정(權停)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시측(侍測)하다가 아뢰기를,
"금년 봄에는 척강(陟降)의 하교로써 앙주(仰奏)하였는데, 명년에는 무슨 말로 앙주함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정한 후이니, 과연 전과 다르다. 이렇게 예효(睿孝)를 드러내게 해도 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이제 하교를 받드니, 뛸듯한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서민(庶民) 죄인 심상운은 본래 윤리를 그르친 요사한 무리로서 소조(小朝)께서 청정하시는 처음에 한 글을 올렸는데,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분노하였습니다. 왕부(王府)에서 재심(再審)하였으나, 정절(情節)을 다 캐지 못했는데, 갑자기 참작하여 처리하신 명이 내렸습니다. 이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지극히 인자하신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처럼 소소(宵小)하고 불령(不逞)한 무리에게 형전(刑典)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간사한 자를 눌러 후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흑산도의 서민 죄인 심상운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시고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 왕법을 쾌히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청하는 바가 대체(臺體)에 있어서는 그러하나 어젯밤의 처분과 오늘 아침의 하교는 심상운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나라의 경사를 당해서 충자를 위해 기천 영명(祈天永命)하는 도리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을 소접(召接)하고 하령하기를,
"이처럼 국용(國用)이 소모되어 줄어든 때를 당했으니, 경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는 내수사(內需司)의 수용 단자(需用單子)를 승정원으로 들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구윤옥이 대답하기를,
"한번 진품(陳稟)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하령(下令)을 받드니, 참으로 지당하여 삼가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지난번 배설방(排設房)354) 의 일에서 호조 판서가 나라 일을 위하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음을 알았다. 대저 재물이란 민간에 있지 않으면 관아에 있기 마련이다. 재물을 생기게 하는 방도에는 특별히 다른 방법이 없고 본디 그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지출하는 것이 좋다."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국용은 번다하고 전곡(錢穀)은 부족한 것이 큰 걱정입니다. 안에서 쓰는 황촉(黃燭)의 일로 말하더라도 편리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금년을 통틀어서 말하더라도 안에서 쓰는 초는 위에서 한 자루도 쓰지 않았다. 일이 이와 같은 경우가 많은데, 계사년355) 이후에 말하기를, ‘내수사(內需司) 공사(公事)의 계하 단자를 모두 아래에서 거짓으로 「계(啓)」 자를 찍는다.’라고 하니, 아주 통분하고 놀랍다. 내가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궁가(宮家)의 결수(結數)이다."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하령이 지당하십니다. 그렇지만, ‘계(啓)’ 자를 믿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신이 어떻게 알겠으며, 또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병술년356) 이후에 거짓으로 ‘계’ 자를 찍은 것이 많았고, 임진년357) 이후에 더욱 심하였다. 호조에서 내린 단자가 만약 정원으로 들어오면 거의 이런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받들어 행하겠으나, 신 같은 자는 별로 재능이 없으니 오직 조심해 지켜나갈 뿐입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궁가(宮家)에서 이른바 ‘결수(結數)에 채워주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내 생각에는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오직 경이 헤아려서 하라."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구궁방(舊宮房)에 어찌 결수에 채워주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하령을 받드니 참으로 좋습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이처럼 국계(國計)가 탕갈될 때를 당하였는데, 재물이 모두 궁임(宮任) 무리들의 미려(尾閭)358) 가 되니, 참으로 놀랍다. 해자(亥子)의 예화(曳火) 때 횃불 하나의 일로 말하더라도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나 경비와 관계되는 일인데, 역시 허실(虛實)이 뒤섞이고 있다. 이런 폐단을 자세히 살펴서 차대(次對)에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삼가 마땅히 하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여 좌직(坐直) 승지를 소접(召接)하였다. 이보행(李普行)이 말하기를,
"지난번 영교(令敎) 가운데 하문하신 것은 모두 나무꾼에게도 묻는 뜻359) 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당(至當)한 데로 돌아가게 하기를 힘쓰면 아래 사람은 반드시 좋은 말을 바치게 되며, 또 간언(諫言)을 따르고 선언(善言)을 진달하는 뜻에도 해롭지 않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일에 시행하면 좋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좋다."
하였다.
교리 유한경(兪漢敬)·이득영(李得永), 수찬 이병모(李秉謨)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 심상운의 죄는 어찌 주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요사하고 패륜한 종자로서 감히 음휼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글을 올려서 흉악한 정상을 가리기가 어려워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분노하였습니다. 다행히 추국하라는 명이 계시어 왕법이 장차 펴지게 되었는데, 어찌 국문하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관전(寬典)이 내릴 줄 뜻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우리 대조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지극히 어진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 죄범을 돌아보면 관계된 바가 예사롭지 않으니, 정적(情跡)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고, 징토(懲討)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차자로 진달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이명(离明)께서는 빨리 대조(大朝)에 품하시어 참작하여 처리한 명을 환수하고 다시 엄국을 가하여 왕법을 쾌히 바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부제학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12월 26일 기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문신 정시(文臣庭試)를 베풀어 5인을 뽑았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좌정하여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을 소접(召接)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의 동생이 큰 죄를 졌는데, 특유(特宥)를 입어 신의 집안에서 황공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날 연석에서의 주달은 실언(失言)일 뿐이니, 봉조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령하기를,
"심이지(沈履之)의 공초(供招)에 근거가 없지 않으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12월 27일 경오
영부사 김상복(金相福)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죄가 매우 큽니다. 예교(睿敎)로 책망한 이 하교에 입은 은혜와 잘못을 반성하니, 두렵습니다. 신은 혼매(昏昧)하여 하는 일마다 어긋났습니다. 처음에는 주대(奏對)가 잘못되어 신 스스로도 죄를 알고 있으며 끝에는 또 감히 올리지 못할 때에 진달하였습니다. 뜻이 비록 징토(懲討)에 있었으나 자취는 방자하게 되었으니, 첫째도 신의 죄요,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사람들의 말이 번갈아서 나와 죄를 성토함이 지엄하지만 죄얼(罪孼)이 스스로 지은 데서 말미암았으니, 어찌 말하는 자들이 헤아려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이 천만 위태로워 심골(心骨)이 모두 떨림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를 짓고서 어찌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하의(賀儀)가 멀지 않아 경의 성례(誠禮)에 있어 축하하는 반열에 참여하고자 할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가까운 때에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講)하고 친히 1장(章) 및 보망장(補亡章)을 외고, 왕세손에게 명하여 계속해서 읽게 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묻기를,
"어째서 입덕(入德)하는 문(門)이라 하는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공부(工夫)의 차례로써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덕(德)에 들어갈 문이 있는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대학(大學)》의〉 격치 성정(格致誠正)에서부터 수제 치평(修齊治平)에 이르기까지 각기 계급(階級)이 있는데, 비유하자면 문로(門路)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대학》의 도를 행할 수 있는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만약 《대학》에서 힘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삼을 뿐이며, 물욕(物欲)이 모조리 깨끗해진 연후에야 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물욕은 어찌하여 이처럼 없애기가 어려운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물욕은 형기(形氣)에서 나오기 때문에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약 활연(豁然) 관통(貫通)한다면, 어찌 초목(草木)과 함께 썩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네가 만약 이 뜻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는 나를 등지는 것이요, 조정을 등지는 것이며, 저 하늘을 등지는 것이다. 나라의 흥망과 백성들의 휴척(休戚)이 네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어찌 마음에 두지 않겠는가?"
하고, 영감(領監) 이하로 하여금 각기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였다. 임금이 또 한문공(韓文公)360) 의 동소남서(董邵南序)를 외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가 말하기를, ‘악이 작다고 하여 행하지 말 것이며 선이 작다고 하여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탄상(歎賞)해 마지 않았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을 왕세손이 아주 기뻐하니, 마땅히 연석(筵席)에서 산호(山呼)해야 합니다."
하고는, 이어 산호하였다.
참찬관 한광계(韓光綮)에게 가자할 것을 명하였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어제의 일로 말하더라도 홍문 제학이 시험에 참여하는 일로 연상시(延祥詩)361) 를 상고하지 못해 모든 진품(陳稟)하는 절차가 어려웠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승전색(承傳色)·사알(司謁)의 구전 하교(口傳下敎) 및 승언색(承言色)·사약(司鑰)의 구전 하령(口傳下令)을 좌직(坐直) 승지가 한결같이 써서 들이되, 신시(申時) 전에 내린 것은 신시 이후에 써서 들이고, 신시 이후에 내린 것은 이튿날 아침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12월 28일 신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편차인(編次人)을 불러 보고, ‘조손 동강 대학문(祖孫同講大學文)’을 어제(御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문자는 바로 보망장(補亡章)인데, 충자(沖子)로 하여금 반드시 격물 치지(格物致知)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음식이 비록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먹어 본 후에라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송형중(宋瑩中)의 부범(負犯)이 가볍지 않아서 잠깐 파직시켰다가 갑자기 서용할 수는 없으니, 휘지(徽旨) 가운데에 표지(標紙)를 붙여 두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20일의 연석에서의 대화를 이미 상세하게 기주(記注)하라는 영이 있었는데, 날짜가 오래 지난 후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리하여 바쳤으니, 아주 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미(頭尾)가 없고 본래의 뜻을 전부 잃었다. 생소해서 그렇게 된 듯하기도 하나 두루 가로막으려는 뜻 또한 없지 않으니, 사체에 있어 칙려(飭勵)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 가주서 김두상(金斗象)을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며 대궐 밖 공해(公廨)에서 다시 정리하여 올리게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주서(注書)가 기주(記注)하여 올린 것이 자세히 갖추어져 가상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만(閑漫)하다.’는 등의 말 및 통창(通暢)하게 되지 못한 이야기는 다시 참작하여 써야 한다. 무릇 사령(辭令)을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살피고 삼가서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2월 29일 임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봉조하를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이제 영상이 아뢴 바를 듣건대, 시종(侍從) 가운데 먹으로 이름이 지워진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뿐이겠는가? 역시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이 지워져 서민(庶民)이 된 자도 있으니, 일체로 탕척(蕩滌)하여 나의 광탕(曠蕩)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병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에게 병(病)으로 인한 체직을 허락하고, 예조 판서 서명선(徐命善)을 병조 판서에 특제(特除)하고, 조중회(趙重晦)를 예조 판서로 특제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니, 봉조하와 원임 대신 역시 함께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에게 월봉(越俸)362) 3등을 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조련(操鍊)을 오래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시사(市肆)를 벌여 놓고 유무(有無) 간에 팔고 사며 교역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기강(紀綱)이 엄하지 않아서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어물(魚物)과 약재(藥材) 등의 물종은 물론이고 도고(都庫)라 이름하면서 중앙에서 이익을 독점하는 폐단이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후하여 대조(大朝)께서 여러 차례 번거롭게 엄칙하였으나, 근래에는 이 법이 점차 더욱 해이해져 백 가지 물건이 등귀한 것이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평시서(平市書)와 집법사(執法司)363) 에서 참으로 적발하여 통렬하게 다스린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다시 각별히 엄금을 가하시되, 이것들에 대해 들은 것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능히 금칙하지 못한 관원은 중죄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조목을 만들어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엄칙해야 한다."
하였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제왕(帝王)이 다스리는 도(道)는 오직 학문(學問)에 달려 있습니다. 요순(堯舜)·우탕(禹湯)·문무(文武)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배워서 이 도를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당(漢唐)의 임금 가운데 자질(資質)이 뛰어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겨우 소강(小康)의 중간 임금이 되고 만 것은 학문의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저하께서는 대성인(大聖人)의 자질로 시민(時敏)의 공부가 돈독하시며, 실천하시는 실제와 탁월한 조예(造詣)가 이미 아주 심상치 않으십니다. 다만 청정(廳政)하는 처음에 당하시어 기무(機務)가 날로 번거로워 참으로 뜻을 붙이려는 마음을 두지 않으면 혹 중간에서 끊어질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더욱 전학(典學)의 공부를 돈독히 하시어 지치(至治)를 이루는 근본을 삼으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위로는 대신(大臣)에서부터 아래로 말직(末職)의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물러갈 뜻을 두어도 국사(國事)는 오히려 할 수가 있지만, 선비로서 조정에 선 자가 모두 물러나고자 하면 국사를 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정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염절(廉節)을 중히 여기고 작록(爵祿)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은 연후에야 자신을 바로 세우고 임금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지론(至論)입니다. 근래에 벼슬에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기는 사람은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없고 교환(巧宦)·조경(躁競)하는 습성은 날로 달로 점차 자라서 조정의 기상이 어긋나고 인심이 함닉(陷溺)되는 것이 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세도(世道)의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저하께서는 대조(大朝)의 중한 부탁을 받으셨으니, 처음의 청명한 정치와 격양(激揚)·여도(勵圖)의 정치가 더욱 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조경(躁競)하는 습성을 누르고 요행(僥倖)의 문을 막아서 염치의 절조를 격려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도(儒道)를 높이고 존중하는 것은 곧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가법(家法)이니, 그 배양하여 성취한 공은 주(周)나라의 성시(盛時)에 비교할 만합니다. 우리 대조께서 임어한 이후에 이르러서는 문명(文明)의 교화가 크게 나타났으니, 역시 부지런히 불러서 오게 한 정성이셨습니다. 다만 산림(山林)에서 도를 지키고 있는 선비들은 매양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쉽게 물러가려는 뜻을 두어 지금의 조정에는 무사안일하게 지내는 무리만 있습니다. 모두가 과거로 뽑힌 사람들뿐이어서 독서하고 궁리(窮理)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청정하는 처음을 당하였으니, 어진 선비를 맞아들이는 것이 실로 급선무입니다. 산야(山野)에서 덕을 숨기고 있는 선비를 불러들여 보도(輔導)의 공(功)을 돕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아주 급한 일이라 하겠으니, 마땅히 대조(大朝)에 품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하의 직언(直言)은 의원(醫員)의 독약(毒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비록 병에 좋더라도 입에 쓰면 물리치게 되며, 직언이 비록 나라에 이롭더라도 귀에 거슬리면 거절하게 되니, 이것이 예로부터 인군(人君)들이 간언(諫言)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까닭입니다. 이윤(伊尹)364) 이 임금에게 고한 말에 한마디의 청언(聽言)하는 요도(要道)에 대해 지은 것이 있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당신의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맞는 말인가 알아보고, 당신의 뜻에 맞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에 어긋나는가를 알아보시오’라고 하였으니, 혹시 뜻에 맞고 마음에 거슬리는 사이에 도에 맞는가와 도에 어긋나는가를 따져 보시면 어찌 감별(鑑別)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신은 본디 우리 저하께서 살펴보심이 밝아 연치(姸媸)365) 가 도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성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훈계를 하는 일에 따라서 더욱 경계하고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공정하게 감별하는 마음을 두어 널리 청납(聽納)하는 요점을 열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심욱지(沈勗之)가 아뢰기를,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는 하순(下詢)하는 즈음에 대답한 바가 아주 흐릿하였습니다.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미안(未安)하니 문비(問備)하고 월봉(越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이장오를 파직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부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근일 백성들이 곤란을 받고 있는 것은 실로 탐욕을 부리는 풍습이 날로 치열해지는 것에서 연유합니다. 탐욕을 징계하는 방도는 청렴을 장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병인년366) 사이에 우리 대조께서 염근(廉謹)한 사람을 가려 뽑으라는 명은 뜻이 매우 성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인순(因循)하면서 세도를 격려하려는 성지(聖旨)를 빠뜨리고 행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즉시 초계(抄啓)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이미 성상의 하교가 계셨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심상운(沈翔雲)에게 특별히 일률(一律)을 용서하신 것이 비록 우리 대조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아울러 천극(拵棘)하라 했다가 다시 중지시켰으며, 근일의 대달(臺達)에서는 이적보(李迪輔)·박성원(朴盛源)과 나란히 써서 함께 일컬으니, 여정(輿情)이 이미 아주 놀라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여러 서민(庶民)을 탕척하는 가운데에 섞어 넣어야 하겠습니까? 대조께 앙품하여 처음의 전교대로 천극해야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으니, 마땅히 대조에 품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종신(宗臣)·조신(朝臣)·사서인(士庶人)으로 83세 된 노인을 불러 보았는데, 사찬(賜饌)하고 고취(鼓吹)·무동(舞童)을 들이라 명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고 봉조하와 시임·원임 대신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임금이 대풍가(大豐歌)367) 를 본받아 노래를 지어 악공에게 노래하도록 명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라 명하였다. 여러 노인들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기를 명하니, 노인 모두가 춤을 추고 천세(千歲)를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임어한 몇 년 동안 백성들에게 하나도 혜택을 주지 못하여 내일 하례(賀禮)를 받기가 실로 부끄럽다. 내가 권정(權停)하고자 한다."
하니,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 하교는 실로 받들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을 위해 은혜를 베푼 일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하례를 받을 것이다."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한 일에 극력 힘써 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만, 갑자기 앙대하지 못하겠으니, 신들이 마땅히 물러가 생각해서 내일 앙주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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