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7권, 영조 52년 1776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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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유

왕세손(王世孫)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을 접견(接見)하였다.

 

왕세손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하였다. 판위(板位)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봉심(奉審)한 뒤에 서협문(西挾門)을 거쳐 바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의례(儀禮)대로 하였으며,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하령하기를,
"홍수(紅袖)001)  가 위내(衛內)에 함부로 들어온 것은 기강에 관계되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가마를 멨던 궁노(宮奴)를 해궁(該宮)에서 사문(査問)하여 다스리라. 이 뒤에 다시 이런 폐단이 있거든 법사(法司)에서 곧바로 죄주게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경궤곡권(擎跪曲拳)002)  은 예(禮)에 어그러지니, 지영(祗迎)하는 반열(班列)에서는 부복(俯伏)을 하지 말고 단지 국궁(鞠躬)만 하라."
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바로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봉조하(奉朝賀)가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어제 성교(聖敎)가 측달(惻怛)하니, 신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읍(感泣)하였습니다. 물러가 함께 상의하였더니, 구환(舊還)을 10만 석(石)에 한하여 탕감하면 참으로 큰 실혜(實惠)가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어(臨御)한 지 50년이고 이제 83세가 되었으나 서울이나 시골에 대해 혜정(惠政)이 하나도 없으므로 오늘은 권정(權停)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윤허를 간청하므로 어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政事)를 할 수 있다면 내가 진하(陳賀)를 받겠다고 일렀다. 시임·원임이 과연 시골에 대하여 구포(舊逋)를 10만 석에 한하여 탕감하도록 하였으나, 어찌하여 서울에 대해서는 빠뜨렸는가? 공시인(貢市人)의 묵은 요역(徭役)을 하교(下敎)에 따라 탕감하여 내가 백성과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보이고 팔도(八道)·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여 탕감을 친히 집행한다고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진하(陳賀)를 받았다.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진찬(進饌)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지고 들어오라."
하고, 김효대(金孝大)·윤동석(尹東晳)에게 명하여 진작(進酌)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경현당(景賢堂)에 앉아 백관(百官)의 진하를 받았다. 승지(承旨)를 시켜 영지(令旨)를 쓰게 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백성을 사랑하는 방도는 반드시 농사를 힘쓰는 것을 앞세웠다. 우리 대조(大朝)께서 50년 동안 백성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여 보호하신 은혜가 사람들의 마음에 두루 미쳤고, 번번이 사륜(絲綸)이 내려진 것을 받들어 보면 마음이 백성에게 있다고 하교하시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듯이 지극한 정성으로 측달(惻怛)하셨다. 그러나 덕화(德化)를 펴고 근심을 나누어 하는 신하가 명명(明命)을 받들어 덕의(德意)를 선양(宣揚)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여 실혜(實惠)가 미치지 못하고 성심(聖心)만 괴로우시게 하였으니, 슬픈 우리 백성이 어찌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지 않겠는가?
아! 수령(守令)이 청렴하지 못하여 가혹하게 거두어 들이는 정사(政事)가 번번이 많고 부역(賦役)을 매기는 것이 끝이 없어서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폐단도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징수하는 것은 근심스러워 마음이 답답함을 금할 수 없고 어린아이를 등적(登籍)하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여운데, 홀아비·홀어미가 의지할 데 없고 어려서 부모를 잃은 자와 늙어서 자식이 없는 자가 외로운 것은 더욱이 왕정(王政)이 먼저 보살펴야 할 것이다. 겨우 얼마 안되는 곡식을 거두어 들였는데 조세(租稅)의 독촉에 다하여 없어지게 되고, 갑자기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 즐거움이 없게 되어 심하면 처자를 팔게 되며, 묵은 환곡(還穀)을 탕감한 은혜는 죄다 축낸 서리(胥吏)에게 돌아가고 재결(災結)을 고루 나누어 준 혜택은 도리어 탐관(貪官)에게 들어간다. 큰물과 가뭄의 재해가 잇달게 되면 산택(山澤)에서 나는 이익이 적은데 놀고 먹는 자가 매우 많고 빈 땅이 일구어지지 않으니, 둑을 쌓으라는 신칙(申飭)은 겉치레가 될 뿐이고 소의 힘을 빌리라는 하유(下諭)도 보람이 없다. 아! 저 진휼(賑恤)을 설시한 고을에서 바닷가에 사는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산골짜기에 사는 백성이 몹시 곤궁하니, 가만히 생각하면 내 몸이 아픈 듯하다. 더구나 이제 봄 기운이 바야흐로 형통하여 태평 세대에 화락하게 잘 지내겠지마는, 저 백성을 생각하면 혹 곤궁을 호소하는 탄식이 없겠는가? 정월 초하룻날이 또 이르러 만물이 바야흐로 소생할 것인데, 아! 너희 백성들이 어찌 봄을 같이하는 기쁨이 있겠는가? 서명(西銘)에 ‘백성은 내 형제 자매들이고 만물은 내 벗들이다.’ 하였다. 인인(仁人)의 마음은 물건에 대해서도 서로 사랑하는 도리가 있는데, 더구나 형제 자매와 같은 백성이겠는가? 대청(代聽)한 이래로 줄곧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오직 한 지아비나 한 지어미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할세라 염려하였다. 모든 구제하는 방도에 관계되는 것은 오로지 묘당(廟堂)의 신하들에게 달려 있으나, 어루만지는 방도로 말하면 이것은 방백(方伯)·수령(守令)의 일이니, 아! 너희 방백·수령은 이 뜻을 본받아 더욱 힘쓰고 더욱 힘쓰라고 관찰사(觀察使)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하노라."
하였다.

 

승지 정창순(鄭昌順)이 말하기를,
"고취(鼓吹)를 대령할 때에 헌가(軒架)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제조(提調)는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은 추치(推治)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낭청은 뒷날에 사문(査問)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다."
하였다. 겸사서(兼司書)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신이 장악 제조(掌樂提調)와 예조 판서(禮曹判書) 사이에 오고간 글을 보았는데, ‘경현당(景賢堂)의 헌현(軒懸)003)  은 접때 대조(大朝)·소조(小朝)께서 같이 진하를 받으실 때이기 때문에 하였으나, 이번에는 절목(節目)이 마련한 것이 있지 않아서 곧 거행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조항은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여 작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헌현이 중하기는 하나 대청(代聽)도 중하니,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그렇다면 해원(該院)의 제조는 우선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건원릉(健元陵)·순강원(順康園)의 제관(祭官) 중에 나아가지 않은 자가 있으므로 승지가 제관과 잘 차출하여 보내지 못한 전랑(銓郞)을 죄주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잡아다 처리하라."
하였다. 승지가 또 헌관(獻官)이 곧 치달(馳達)하지 않았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1월 2일 갑술

부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상서(上書)하여 예지(睿志)를 세우고 치모(治謨)를 강구하여 즙희(緝熙)의 공부를 힘쓰고 진대(賑貸)의 정사(政事)를 급히 하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심상운(沈翔雲)은 한낱 세상에서 버림받은 흉얼(凶孼)일 뿐이니, 국가의 제방(隄防)과 사대부의 명검(名檢)이 죄다 무너져 버리지 않았다면, 그가 요사한 마음을 품었더라도 어찌 감히 엿보고 날뛸 계획을 냈겠습니까? 빨리 원기(元氣)를 부지하고 대방(大防)을 더욱 엄하게 하여 간사한 싹을 잠잠히 사라지게 하고 태평한 기운을 길이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춘추(春秋)》 한 경전은 성필(聖筆)로부터 나와서 충역(忠逆)의 구분을 엄히 하고 오랑캐와 중국의 분변을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명(明)나라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한 대의(大義)는 참으로 이 경전을 근본 삼은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앞으로는 서연(書筵)에서 진강(進講)하고 시장(試場)에서 출제(出題)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말이 다 절실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춘추》를 시장에서 출제하는 일은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마는, 당초에 폐지한 것이 이미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시려는 성념(聖念)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일이 변경하는 데에 관계되어 마음대로 결단하기 어렵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학생(太學生)을 시험하고 윤행리(尹行履)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임금이 각 고을에서 정조(正朝)에 진하(陳賀)하러 온 호장(戶長)을 소견(召見)하고 하유(下諭)하기를,
"너희들은 본관(本官)에 돌아가서 묵은 환곡(還穀)의 탕감을 낱낱이 잘 나누어서 실효(實效)가 있게 하라고 말하라."
하매, 호장들이 천세(千歲)를 불렀다.

 

왕세손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갔다.

 

수찬(修撰) 이병모(李秉模)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을 돌이켜보면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세도(世道)가 괴리(乖離)하여, 조정에는 노성(老成)한 선비가 없고 초야에는 유일(遺逸)한 어진 이가 있으며, 군자는 의지할 바가 없고 소인은 꺼리는 바가 없어서 오직 작록(爵祿)이 귀한 줄만 알고 염치가 소중한 줄은 알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빨리 나아가니, 유식한 자가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깝습니다. 재신(宰臣) 윤심형(尹心衡) 같은 자가 있었다면 어찌 사림(士林)에 본보기가 되어 만분의 일이라도 유지하지 않겠습니까? 아! 저 재신은 집에 있으면 청검(淸儉)한 절조가 있고 조정에 들어서면 의리의 바른 것을 지켰으며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가난한 집에서 일생을 마쳐도 높은 벼슬을 헌신짝만도 못하게 여겼으므로 유풍 여운(流風餘韻)이 이제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때를 같이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남모르게 탄상(歎賞)한 까닭입니다.
그 아들 윤양후(尹養厚)는 아버지의 이름에 힘입어 지위가 재상 반열에 오르고 세상에서 청관(淸官)·요직(要職)이라는 것을 쉽사리 독차지하였으니, 그의 도리로서는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힘쓰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여 그 아버지의 유업을 지켜야 워낙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도리를 모두 어겨서 아버지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따랐는데 아들은 탐욕하고 사치한 것을 따르고, 아버지는 의리를 따랐는데 아들은 세리(勢利)를 따랐습니다. 세력이 돌아간 곳이면 아침에 동으로 갔다가 저녁에 서로 가고 이익이 있는 곳이면 이리 구하고 저리 엿보므로 간사한 정상과 아첨하는 태도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으며, 유지양(柳知養)이 근년에 상소하고 구상(具庠) 등이 접때 주무(綢繆)하였을 때에는 혹 처음에 관여하였다가 나중에 배반하기도 하고 먼저는 친밀하였다가 뒤에는 저버리기도 하여 외형만 달라진 것처럼 꾸미고 노비(奴婢)같이 알랑거리는 태도로 수없이 변신하면서 인가(人家)에 출입하여 시론(時論)을 주장하였으므로, 온 나라 안에 시끄러이 전하고 허다한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없게 되니, 공론에 버림받은 것을 스스로 알고는 붕당을 남몰래 감싼다는 말을 만들어 염연(厭然)004)  히 악을 엄폐하고 거짓말을 꾸며서 남의 뜻을 맞추었습니다.
신은 본디 그 경영하는 것이 무슨 일이고 참여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일종의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가 아니라면 사대부라는 자가 도리어 어찌 그 사이에서 유속(流俗)과 같이하고 오세(汚世)에 맞추겠습니까? 그러나 미속(迷俗)은 쉽게 속고 소혜(小慧)는 몰래 팔리므로 갖은 계책으로 농단(壠斷)하여 작위(爵位)가 갈수록 현달(顯達)하였으니, 아! 마음 아픕니다. 예전부터 소인의 자취는 똑같아서 그 자신을 위하여 꾀하는 것은 참으로 공교하거니와, 국가와 세도는 어찌합니까? 아! 현사(賢邪)의 진퇴(進退)는 참으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니, 위에 있는 사람이 또한 어찌 어진 사람을 등용해야 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저 소인은 자신을 도모하는 데에 능하므로 바라보고 엿보다가 틈을 타서 이익이 대신(大臣)에게 있으면 대신에게 붙고 이익이 척리(戚里)에게 있으면 척리에게 붙고 이익이 적국(敵國)에 있으면 적국에 붙으니, 이익만 보면 갑자기 변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흑백을 어지럽히고 시비를 거꾸러뜨리어 반드시 임금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어지럽히고서야 마음에 품은 것을 멋대로 행하여 나라에 화(禍)를 끼치되 그의 작록은 여전히 편안하게 누리니, 이것이 소인이 늘 다행한 까닭이고 군자가 늘 불행한 까닭입니다.
아! 임금과 어버이는 마찬가지이니,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반드시 임금에게 충성합니다. 이 때문에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았으니, 이것은 분명한 이치입니다. 이제 윤 양후는 그 어진 아버지의 지사(志事)를 일체 파리(芭籬) 가에 버려두고서 한갓 끼친 음덕(蔭德) 때문에 갑자기 많은 이익을 얻을 뿐입니다. 세상에 수치(羞恥)라는 것이 있는 줄 전혀 모르니, 강가에 있는 유명한 정자를 방자하게 옮겨 짓고 성밖에 가까이 있는 좋은 밭을 낭자하게 꾀를 써서 차지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하거니와, 신은 죄다 말하여 충후(忠厚)한 풍속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사람이 어질지 않기가 이토록 극도에까지 이르렀는데, 우선 그 아버지 잊은 것은 용서하더라도 다시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을 조정에 하루 있게 하면 하루의 근심이 있을 것이고 조정에 이틀 있게 하면 이틀의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국가의 심복(心腹)의 우환이 되어 장차 어떤 계략이 어떤 곳에서 나올는지 모를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세도가 근심스러운 것을 깊이 생각하고 호오(好惡)의 바른 것을 명백히 보이시어 빨리 유사(有司)를 시켜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여 조야(朝野)의 사람들로 하여금 소인은 등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환히 알게 한 뒤에 더욱 학문에 힘쓰고 더욱 서정(庶政)에 힘쓰며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여 의리를 더욱 밝히고 유현(儒賢)을 예우하여 치모(治謨)를 강구하소서. 그러면 사기(士氣)를 북돋을 수 있고 추향(趨向)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기강을 세울 수 있고 방본(邦本)을 굳힐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사직(副司直) 홍양한(洪良漢)은 행적에 허물이 있는 사람으로서 연줄을 따라 아부하여 함부로 청현직(淸顯職)에 통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랍고 한탄스러워하는 것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습니다.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경연의 직임을 모두 삭제하여 바로잡으면 명절(名節)을 격려하고 관방(官方)을 중시하는 방도에 더욱 어찌 빛나는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윤양후가 이익을 좋아한다는 것은 관직(官職)을 낙점(落點)하지 않을 때에 이미 알았다. 청한 것은 그대로 시행하라. 홍양한의 일은 당초에 선발한 것이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니, 대조(大朝)005)  께 여쭈어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왕세손이 윤양후(尹養厚)를 해남(海南)에 귀양보내라고 하령하였다. 윤양후는 어진 아버지의 아들로서 염치를 잊고 무릅써 공(功)을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며 권문(權門)에 아부하여 갑자기 명환(名宦)을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뱉고 더러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병모(李秉模)가 상서(上書)하였다. 그러므로 왕세손이 가납하여 멀리 귀양보내도록 특별히 하령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원하게 여겼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남강로(南絳老)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박성원(朴盛源)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강로가 이담(李潭)을 탄핵한 것은 온 세상의 공론인데 형륙(刑戮)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세월이 오래 갈수록 더욱 슬퍼하였고, 박성원은 홀로 상소하여 그 억울한 죄를 풀어 주기를 청하다가 또 섬에 귀양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렇게 명하였다. 대성인(大聖人)이 해와 달처럼 누구나 볼 수 있게 허물을 고친 것이 사책(史冊)에 빛난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2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강로가 이담(李潭)을 탄핵한 것은 온 세상의 공론인데 형륙(刑戮)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세월이 오래 갈수록 더욱 슬퍼하였고, 박성원은 홀로 상소하여 그 억울한 죄를 풀어 주기를 청하다가 또 섬에 귀양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렇게 명하였다. 대성인(大聖人)이 해와 달처럼 누구나 볼 수 있게 허물을 고친 것이 사책(史冊)에 빛난다 하겠다."

 

임금이 대사헌(大司憲) 이계(李溎)를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 도헌(都憲)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만사를 제쳐놓은 채 이번의 거조가 있어서 거의 원춘(元春)에 마른 버드나무에서 움이 틀 수 있도록 하였으니, 83세인 임금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수십 년 동안 임어(臨御)한 보람을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니, 대사헌 이계에게 특별히 가자하여 내 뜻을 나타내라."
하고, 또 특별히 도총관(都摠管)을 제수(除授)하고 곧 사은(謝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이미 뉘우치고 깨달은 뜻이 있어 입시(入侍)한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에게 하문하였는데, 이계가 한 해를 넘기며 쟁집(爭執)하여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임금이 칭찬하였다.

 

도총관(都摠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예전에 당(唐)나라 장손 황후(長孫皇后)는 위징(魏徵)이 곧다는 말006)  을 듣고 정의(正衣)하고서 경하하였다. 오늘 조참(朝參) 때에 세손(世孫)이 진하(陳賀)하는 치사(致詞)의 첫머리 말에 ‘충직한 사람이 조정에 있으니 워낙 경하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오늘 차대(次對) 때의 큰 처분은 도헌(都憲)의 힘이 아니라 성덕(聖德)이 미친 것이다."
하고, 하령하기를,
"접때 조의(朝儀)가 정제(整齊)되지 않기 때문에 고(故) 상신(相臣) 윤동도(尹東度)가 아뢴 바에 따라 처음으로 목패(木牌)를 썼으나 이리저리 전도(顚倒)되어 보기에 놀라웠다. 이것은 오로지 압반(押班)하는 감찰(監察)이 마땅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인데, 감찰을 가려서 차출하는 것은 이조(吏曹)에 달려 있으며 이조에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은 대신(大臣)에게 달려 있고 대신의 근본은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모두 스스로 반성할 곳이다."
하였다.

 

왕세손이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명선(徐命善)에게 명하여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서명선에게 이르기를,
"특별히 병판(兵判)을 제수(除授)한 것은 성의(聖意)가 있는 바이다. 접때 상소한 것을 나는 변함 없는 충심(忠心)이라고 생각하거니와, 이 마음을 미루어 나라에 보답하면 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1월 3일 을해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이제 내리신 비망기(備忘記)007)  에 진하(陳賀)하라는 명이 있으니, 밤에 갑작스럽기는 하나 의문(儀文)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예판(禮判)을 입대하게 하여 하령하기를,
"하례(賀禮)가 앞으로 있게 되어 성심(聖心)에 기쁘실 것이다. 치사(致詞)와 반교(頒敎)는 그만둘 수 없을 듯한데, 치사는 어제(御製) 여덟 자로 첫머리 말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부제학 이병정(李秉鼎) 등이 말하기를,
"아까 내리신 전교(傳敎)는 성의(聖意)가 있는 줄 신들이 본디 압니다마는, 대계(臺啓)를 계속하거나 정지하는 것은 상교(上敎)를 받들 수 없는데, 더구나 죄인 심상운(沈翔雲)이 죄진 것은 지극히 중대한 것에 관계되니, 오늘날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문득 정계(停啓)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거조(擧措)는 대각(臺閣)이 없어지고 국강(國綱)이 무너진 것이라 하여도 되겠습니다. 청컨대 정계한 대사간 심욱지(沈勗之)·집의 곽진순(郭鎭純)을 우선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병정이 말하기를,
"신이 아까 삼사(三司)의 반열(班列)에서 들으니, 심욱지·곽진순이 정계하자는 논의를 냈을 때에 모두 다 입을 다물고 이견을 세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죄주기를 청한 뒤에야 비로소 허둥지둥 나아가 엎드려 해명하려 하니, 그 머뭇거리고 돌아보는 버릇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양사(兩司)의 대간(臺諫)들을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도암(陶菴)만한 이가 없는데, 때를 같이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도암은 고 판서(判書) 이재(李縡)의 별호이다.

 

하령하기를,
"심상운(沈翔雲)이 승지가 된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하매,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행적에 허물이 있는 사람으로서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이므로 갑자기 등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또 더구나 아비로 할아비를 바꾸게 한 자008)  이겠습니까? 조정을 부추겨 명기(名器)를 훔친 것이 참으로 요사하고,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죄는 이미 고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의 상소에 상세히 언급되었는데, 더구나 심익운(沈翼雲)이 손가락을 자른 것은 더욱이 아주 요사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윤상을 바르게 하고 의리를 밝히는 때에 이처럼 날뛰지 말아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심상운의 상소는 어슴푸레하고 번득거려서 아주 교악(巧惡)하니, 어찌 이적보(李迪輔)·박성원(朴盛源)과 한가지로 볼 수 있겠는가? 부제학(副提學)이 말한 것이 특이하거니와, 제방(隄防) 두 자를 거듭 말한 것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1월 4일 병자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좌의정(左議政)·병조 판서(兵曹判書)·옥당(玉堂)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제도 찰민은사(諸道察民隱使)라 이름하여 유서(諭書)를 선포하고 두루 살피고 오게 하였는데, 기전(畿甸)은 유한경(兪漢敬)이고 관동(關東)은 이병모(李秉模)이고 해서(海西)는 임희우(任希雨)이고 관서(關西)는 안관제(安寬濟)이고 북관(北關)은 이회수(李會遂)이며, 삼남(三南)은 수의(繡衣)가 막 돌아왔으므로 그만두었다. 유서를 내려 도신(道臣)을 시켜 다섯 도(道)에 선포하되 유신이 유서를 가지고 가서 백성을 타이르며 농사를 보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오게 하였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으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존주 대의(尊周大義)는 곧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으로서 또한 명(明)나라를 존중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의리를 볼 수 있으나, 또 읽는 곳이 없다는 한탄이 있는데, 《춘추》를 응강(應講)하는 자가 있다면 신기할 듯하다."
하였다. 이때 승지가 오경(五經)을 가지고 품지(稟旨)를 의논하였기 때문이다.

 

1월 5일 정축

도총관(都摠管) 이계(李溎)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남강로(南絳老)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박성원(朴盛源)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신 것은 곧 우리 대조(大朝)께서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높고 두터움이 같은 것이니, 억만년 끝이 없는 복이 이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신은 송축(頌祝)하는 끝에 또한 두렵고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남강로의 일이 있고부터 신이 대각(臺閣)에 들어간 것이 무릇 여러 번이었습니다마는, 감히 한번 말하여 천심(天心)에 감통(感通)하지 못하였습니다. 박성원에 대한 계청(啓請)으로 말하면 신이 실로 맨 먼저 내었습니다마는, 그 연약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성은(聖恩)을 저버린 죄는 신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장 뒤에 구계(舊啓)를 멈춘 것은 전의 허물을 뒤미처 속죄할 수 없는데, 도리어 이 때문에 영예를 가져와 총명(寵命)과 은포(恩褒)가 상례(常例)를 멀리 벗어났고, 원정(元正)에 은택이 지극히 인자한 하늘에 충만하여 국가가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이 된 것으로 말하면 모두 성충(聖衷)에서 스스로 결단하신 것인데, 도리어 여러 번 은유(恩諭)를 내리시어 신이 한번 말한 것으로 인연하여 깨달으신 바가 있는 듯이 하시었으며, 어제 임문(臨門)하여 수하(受賀)하신 것은 더욱이 죄진 천신(賤臣)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굽어살피고 대조께 여쭈어 신에게 새로 제수된 자급(資級)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불고(不孤) 두 자는 이미 접때 경에 대한 비답(批答)에 하유(下諭)하셨거니와, 나는 일전의 연주(筵奏)도 불고 가운데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응교(應敎) 이상암(李商巖)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저 이적보(李迪輔)만이 장해(瘴海)에서 해를 넘기고 홀로 똑같이 사랑하는 은택을 입지 못하였으니, 어찌 소외된 한탄이 없겠습니까? 이제는 억울한 자가 다 죄를 씻고 죄를 지어 귀양간 자가 다 용서받아 은택이 전국에 넘치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찬배되어 있으니, 신은 특별히 은유(恩宥)를 내려 똑같이 사랑하는 뜻을 보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본받아 행하시는 방도로서 더욱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장임(將任)은 다른 것과 절로 다른데,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태연(尹泰淵)은 성질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며 하는 일이 외람되고 교활하여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장신(將臣) 집의 후예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발탁하는 은혜를 치우치게 입었는데,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여 힘을 다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군사의 기무(機務)를 쓸데없는 물건처럼 여기어 영달을 탐내고 이익을 꾀하는 것을 능사로 여깁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주책할 것도 못되거니와, 더구나 그 종적이 갑자기 변하곤 하여 세력만을 좇아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여 통색(通塞)을 함부로 논하기까지 하니, 그 위세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는 죄는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합니다. 이렇게 나라를 저버린 요사한 무리를 어찌 하루라도 서울에 둘 수 있겠습니까? 신은 빨리 멀리 원찬의 법을 시행하여 이러한 무리들이 조금은 징계되어 두려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호조 판서(戶曹判書)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호판(戶判)은 이미 친히 들었으니, 이 뒤로는 대내(大內)에서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은 정원(政院)을 통하여 하교하고 하령한 것이 아니면 일체 시행하지 말도록 하여 중사(中使)가 구전(口傳) 분부하는 폐단을 영구히 없애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이상암(李商巖)의 상서는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공론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나, 지금은 마땅한 때가 아니다. 어제는 윤양후(尹養厚)를 공박하고 오늘은 윤태연(尹泰淵)을 배척하니, 그 경상(景象)이 어떠한가? 순(舜)이 유방찬극(流放竄殛)009)  한 것에서는 대성인(大聖人)이 묵운(默運)하는 방도를 알 수 있다. 이 상소 때문에 종사(宗社)를 위한 청정(聽政)과 인명(人命)의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매,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인명의 생사가 어찌 참으로 중대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국가의 대계(大計)에 비하면 절로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신은 눈앞에 국가만 보고 있으므로 그 밖의 것은 당연히 논할 겨를이 없을 뿐입니다."
하니, 영지(令旨)를 쓰게 하기를,
"내 뜻을 이미 대신(大臣)에게 다 일렀는데, 대신이 상달(上達)한 것도 내 뜻과 같다. 이렇게 하여 마지 않는다면 조정의 경상이 급격하여져서 장차 편안할 기약이 없어 국가가 어떤 곳에 탈가(稅駕)010)  할지 모를 것이다. 성의(聖意)를 본받는 도리로서는 처분이 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응교(應敎) 이상암을 삭직(削職)하고 원서(原書)를 도로 주어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용동궁(龍洞宮)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도(徒) 3년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그 궁 소속이 방자하여 호조(戶曹)에서 공갈(恐喝)하였기 때문이다.

 

1월 6일 무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경기 어사(京畿御史) 유한경(兪漢敬)의 장계(狀啓)를 보고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왕명(王命)은 존중해야 한다 한 것은 군명(君命)을 중히 여긴 것이다. 임문(臨門)하여 결곤(決棍)하겠으니, 도감(都監)은 대령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30여 주(州)에 군강(君綱)을 세우려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이 사람은 부암(傅巖)을 꿈꾸고011)   행한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한 자이다. 현량 두 자를 아깝게 여겨야 할 것이니, 결곤은 보류하라."
하였다. 이때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진관(趙鎭寬)이 어사(御史)에게 피마(避馬)하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하고 특별히 이치중(李致中)을 부윤으로 제수하였다.

 

신대승(申大升)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가 입대하였다. 왕세손이 서유린(徐有隣)에게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거취를 들었는가?"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영상이 ‘명관(命官)012)  은 주문(主文)013)  과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므로 대계(臺啓)가 종결되기 전에는 결코 무릅쓰고 나갈 수 없다.’ 합니다마는, 도타이 이르고 재촉하면 고집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조최(趙崔)014)  를 과방(科榜)에서 빼어 이미 제방(隄防)을 보였는데, 이처럼 변함 없으면 대조(大朝)께서 복과(復科)하실 염려가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정달(停達)하는 것만 못하겠으나, 어찌 정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7일 기묘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김종수(金鍾秀)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혼미하고 무지하여 죄가 헤아릴 수 없는 데에 빠졌는데, 천지·부모 같은 임금의 은혜로 꼭 죽을 처지에서 빼내어 거의 죽을 목숨을 구하여 주셨습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돌아와 늙은 어미와 다시 만나 부둥켜안고 목메인 것이 꿈만 같으나, 나라의 은혜는 하늘 같은데 보답할 계제가 없으니, 서울을 돌아보면 가슴 속이 막히는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분수에 벗어나는 신의 벼슬을 갈도록 빨리 윤허하고 다시는 의망(擬望)하지 말아서, 신이 어미의 여생을 봉양하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 성은(聖恩)에 감축(感祝)할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말의(末擬)에 낙점(落點)한 것은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도승지(都承旨)가 입대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때에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젯밤 꿈이 이상하다. 선왕의 신명이 내려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효성과 곤전(坤殿)이 어진 것을 알거니와, 지금 대신이 오히려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이 매우 개탄스러우므로 이미 대신들에게 일렀다.’ 하셨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내가 나이 예순 여섯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그때에 곤전은 나이가 열 다섯이었으나 이제 서른 둘이 되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국가의 전에 없던 경사인데 오히려 친영(親迎)015)  하실 때에 예를 갖추어 경축하지 못하였으니, 신(臣)들이 억울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또 성인(聖人)의 꿈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참으로 신명께서 가리켜 이끄신 것입니다. 오늘은 윤음받기 전에 결코 감히 물러갈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하였다. 이사관이 말하기를,
"기로 당상(耆老堂上)들도 이미 와서 기다립니다. 전좌(殿座)하신 뒤에 진찬(進饌)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때에 시임·원임인 대신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청대(請對)하여 일제히 존호(尊號)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내전(內殿)이 열 다섯 살이었는데, 이제 친영한 지 벌써 열 여덟 해가 되어 내전의 나이도 서른 둘이 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마음이 또한 이상하다. 낮에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밤에 반드시 꿈꾸는 것이어서 그런 것인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오르내리시는 신명께서 깊이 살피셔서 그런 것인가? 어제 밤 꿈에 부덕(否德)을 용납하여 효성스럽다 하시고 내전을 현명하다고 하셨는데 깨어나매 부끄러워서 겸연쩍어 못 견디겠으나, 막중한 신명의 말씀인데 어찌 감히 잠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침에 대략 일렀는데, 이 때문에 크게 벌려서 이에 이른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받는 것은 마음에 민망하다. 상신(相臣)이 아뢴 것을 듣건대, 이것은 나에게 지극한 영광이니, 고집하던 것일지라도 어찌 감히 다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임진년016)  의 예(例)에 따라 존호를 추상(追上)하되, 먼저 명릉(明陵)께 하고 다음에 육상궁(毓祥宮)께 하라. 이제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신명께서 내려 주신 것이니, 먼저 의호(議號)해야 한다. 아! 내가 늘 고집하여 온 일에 대하여 이렇게 명하는 것은 선대를 위하여 그런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자신은 절로 부끄럽다. 이때에 문형(文衡)은 갖추어야 하니, 대제학(大提學)의 전망 단자(前望單子)를 먼저 들여오라. 의호한 뒤에 충자(沖子)를 시켜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아뢰고 다음에 육상궁에 나아가 고유(告由)하게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호숭(呼嵩)하고 기로 당상이 진찬하고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는데, 왕세손 이하는 다 잠화(簪花)017)  를 꽂았고 풍악이 울렸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으니,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과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입대(入對)하였는데, 하령하기를,
"명례궁(明禮宮)의 사패(賜牌)는 《속대전(續大典)》에 따라 본결(本結)을 주고 그 밖에 1천 5백 결(結)도 한결같이 도로 주어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조진관(趙鎭寬)을 양필(良弼)이라 하여 용서하셨는가? 신몽(宸夢)은 측석(測席)하여 어진 이를 구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꿈의 응험은 참으로 허황하였다. 그 아버지가 띠를 풀지 않는다고 아뢴 것과 네 번 시패(試牌)를 어긴 것은 과연 변변치 못하거니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과연 이처럼 성실하지 않은 것인가? 아들이 그 아버지와 같다면 공심(公心)으로 나라를 섬기는 것을 꼭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민백분(閔百奮)은 추고(推考)하고 범을 잡은 일에 관한 장달(狀達)은 내려보내어 사실을 살펴서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이보행(李普行)이 말하기를,
"의복(衣服)·궁실(宮室)의 사치는 몸에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절검(節儉)하는 방도를 몸소 행하여 본보기가 되어 이끄는 도리로 삼으소서. 신(臣)이 들으니, 연여(輦輿)를 새로 만들라는 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없었다."
하였다. 이보행이 말하기를,
"그러면 고치라는 영이 있었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우부승지는 궁관(宮官)이었을 때부터 좋은 말을 많이 아뢰었는데, 이번에 아뢴 것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선조(先朝)의 추호(追號)는 빨리 의정(議定)해야 하겠으니, 대제학(大提學)의 전망(前望)을 써서 들이라."
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왕세손이 창덕궁(昌德宮)의 진전(眞殿)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전(殿)에 올라 휘호(徽號)를 정한 것을 아뢰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와서 사배례를 행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존호(尊號)는 배천 합도 계휴 독경(配天合道啓休篤慶)이라 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는 혜성(惠聖)이라 하였으며,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는 장순(莊純)이라 하고,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존호는 휘정(徽靖)이라 하였으며, 육상궁의 존호는 수복(綏福)이라 하였으며, 대전(大殿)의 존호는 요명 순철 건건 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이라 하였으며 휘령전(徽寧殿)의 존호는 인휘(仁徽)라 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존호는 성철(聖哲)이라 하였다.

 

1월 8일 경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았다. 왕세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하고 왕세손이 전(殿)에 올라 시좌(侍坐)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이어서 정시합(正始閤)의 북정(北庭)에 나아가 중궁전 표리를 올리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의 이 일은 위로는 추모하는 마음을 펴고 아래로는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온 국민의 더없이 큰 경사이고 백성이 안정할 때이다. 이미 먼저 선포하였는데, 내가 어찌 묵묵히 있겠는가? 오늘날 경향(京鄕)의 우리 백성에게 대저 모든 백성을 번거롭히는 정사를 모두 탕척하라. 이미 10만 석(石)을 탕척한 것은 임진년018)  의 전례에 따른 것이거니와, 오늘 성덕(盛德)을 본받아 백성을 돌보아야 하겠으니, 5천 석을 더 특별히 탕척하여 예전에 우리 백성을 돌보신 것을 내가 본받는 뜻을 보이라. 오늘 밤은 특별히 야금(夜禁)을 풀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호남(湖南)·북관(北關) 두 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와 제주 독운 어사(濟州督運御史)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조심스럽게 살피도록 하였는데, 호남과 북관은 풍패(豊沛)이기 때문이고 강화(江華)는 보장(保障)이기 때문이며 송도(松都)는 구도(舊都)이기 때문이다.

 

하령하기를,
"연화(筵話)가 얼마나 엄밀(嚴密)한 것인데, 벼슬이 후설(喉舌)019)  에 있으면서 이와 같이 살피지 않는 잘못이 있는가? 승지(承旨) 이득종(李得宗)을 파직(罷職) 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1월 9일 신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도민(都民)을 소견(召見)하고서 공시인(貢市人)의 편부(便否)를 하문하였는데, 다들 폐단이 없다고 대답하고 이어서 손을 모아 호숭(呼嵩)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이번 막차(幕次)020)  는 소차(小次)로 거행하라."
하매, 호조 판서(戶曹判書) 구윤옥(具允鈺)이 말하기를,
"막차에 지급하는 것이 2만여 냥(兩)은 되어야 할 것인데, 소차로 하면 1천 6백여 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비용을 줄이시는 뜻을 신은 참으로 흠앙(欽仰)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도민을 소견한 것은 뜻이 대개 깊다. 80세인 사람을 이미 가자(加資)하였거니와, 가설 지중추부사(加設知中樞府事)를 계하(啓下)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영의정과 도승지(都承旨)가 입대(入對)하였을 때에 서유린(徐有隣)을 시켜 좌상(左相)의 서계(書啓)를 읽게 하고, 하령하기를,
"사리에 벗어난다는 말은 서명선(徐命善)의 상소 가운데에 있는 한 구절을 가리킨 듯하고, 한 번 옮기고 두 번 옮기곤 하여 반드시 섬멸하려 한다 한 것은 신응현(申應顯)의 글을 가리킨 듯한데, 대신이 반드시 갈등하여 일을 일으키고야 말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서유린이 말하기를,
"당초 신응현의 글을 앙달(仰達)하지 않고 곧바로 처분을 내리신 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여쭐 만하지 못하기에 온전히 보전하고 진정시키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이 서계가 이 일을 가리킨다면 대신이 예념(睿念)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신응현의 글은 이미 위에 아뢰지 않았거니와, 이제 이 글 가운데에 있는 한 번 옮기고 두 번 옮긴다는 말을 위에서 하문하시면 장차 어떻게 앙달할 것인가? 이른바 사리에 벗어난다는 것은 서명선의 상소 가운데에 있는 저군(儲君)이 할 수 없다는 구절을 가리킨 듯하나, 이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였으면 또한 질언(質言)이 아닐 것인데도 사리에 벗어났다고 한 것은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1월 10일 임오

김하재(金夏材)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유항주(兪恒柱)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행과(倖科)는 함부로 부거(赴擧)할 마음를 열고 외장(外場)은 서례(胥隷)의 손을 방자하게 하며 감별(鑑別)이 명백하지 않고 취사(取捨)가 공정하지 않으며,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는 것이 너무 잦고 정권(呈卷)021)  이 너무 급하고 과방(科榜)을 내는 것이 너무 빠릅니다. 참으로 3년마다 시행하는 대비(大比)022)  와 으레 설행할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 밖에는 명색 없는 과거를 설행하지 말고, 시사(試士)할 때에는 그 시간을 늦추어 탁방(坼榜)할 즈음에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한 달 동안 시장(試場)을 봉쇄하고 우리 조정의 김안국(金安國)·이수광(李晬光)이 15일 동안 시권을 고교(考校)한 것처럼 하면, 주사(主司)도 안목(眼目)이 미치는 바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년의 일경강(一經講)은 참으로 좋은 규례인데, 한스러운 것은 시행한 것이 오래지 않은 것입니다. 번번이 증광시·별시의 초시(初試) 뒤에 기묘년023)  의 별시에서 한 것과 같이 한 경서(經書)를 배강(背講)하면, 법은 몹시 잗달다는 한탄이 없고 선비는 경서에 통달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장수를 뽑는 방도는 더욱이 허술합니다. 등과(登科)한 뒤에는 기사(騎射)를 쓸데없는 것처럼 여기고 오직 청탁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며 권귀(權貴)를 잘 섬겨서 갑자기 재상(宰相) 줄에 오릅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신진(新進)인 무변(武弁)024)  에게 신칙(申飭)하여 군대에 관한 일을 명백히 익히는 여가에 고금(古今)의 성패(成敗)와 역대(歷代)의 병제(兵制)와 산천(山川)의 험이(險夷)와 관방(關防)의 편의(便宜)에 관한 제도를 닦게 하여 재주와 식견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각별히 발탁하여 써서 특이한 자를 우대한 법을 나타내어 보이소서."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상서 가운데에 조목조목 아뢴 말이 매우 옳으니, 유념하겠다. 과장(科場)의 일은 경장(更張)에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명선(徐命善)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인한(洪麟漢)의 서계(書啓)를 보니, ‘일단 사리에 벗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의 상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신의 상소에 무슨 사리에 벗어난 말이 있겠습니까마는, 막연히 말하였으므로 한 구절을 따내어 단정하기 쉬웠던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접때 상소한 것을 나는 사리를 밝히어 진술한 것으로 여긴다. 대신(大臣)이 사리에 벗어난다고 한 뜻을 나는 알 수 없다. 어찌 시일이 오래지 않아서 미처 용서하지 못한 탓이겠는가? 대신을 위하여 개탄스럽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곧 진연(診筵)에 진참(進參)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정후겸(鄭厚謙)을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구나."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묘모(廟謨)025)  를 연습하여 소조(小朝)026)  를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판부사(判府事) 한익모(韓翼謨)에게 전유(傳諭)하게 하기를,
"경이 접때 연주(筵奏)한 것은 말이 뜻을 창달하지 못한 탓이거니와, 더구나 병판(兵判)의 상소이겠는가? 그 경중(輕重)하는 것은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어제의 은유(恩諭)는 성명(聖明)이 굽어살피신 것이니, 내가 어찌 말을 많이 하겠는가? 경의 서계(書啓)를 보면 지의(旨意)가 순후(淳厚)하여 옛 대신의 풍도가 넉넉히 있으니, 내가 더욱 공경하는 것이 참으로 또한 많다. 이제는 대례(大禮)가 앞으로 있을 것이고 나라의 경사가 새로워질 것이니, 지금은 경이 줄곧 외방(外方)에 있을 때가 아니다. 내 진심을 자세히 나타내어 이 위로하는 유시가 있는 것이니, 경은 이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여 곧 입성(入城)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명선(徐命善)을 소견(召見)하여 말하기를,
"병판(兵判)의 인의(引義)는 참으로 옳다. 능히 생사를 떠나 종사(宗社)를 위하였으니, 이번의 처의(處義)는 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은 반드시 이 마음을 미루어 더욱더 힘써야 한다."
하였다.

 

1월 11일 계미

판부사(判府事) 한익모(韓翼謨)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나이가 늙고 정신이 시들었는데, 중임(重任)을 잘못 맡아서 여러 곳에서 혼란(昏亂)하였습니다. 접때의 일로 말하면 성지(聖旨)가 간절하여 둔감한 돼지나 물고기도 울릴 만하였고 방례(邦禮)는 해와 별처럼 분명한 것이 있는데, 처음에는 하교를 받을 때에 의혹하였고 나중에는 또 우러러 대답할 때에 망발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용서하지 못할 죄에 빠졌으니, 성은(聖恩)의 관용과 예도(睿度)의 포용이 아니었으면 신이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나의 은근한 뜻을 이미 어제 전유(傳諭)에 다하였거니와, 경이 입성(入城)하기를 바라는 것이 목마르는 듯할 뿐이 아닌데, 사양하는 글이 또 오고 아직도 외방(外方)에 있으니, 이 마음의 답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 당초에 경이 잘못한 것은 말이 통하지 못한 것일 뿐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심적(心迹)을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성유(聖諭)가 이미 도타우셨거니와 나도 석연(釋然)하니, 이번에 사양한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오늘은 이미 저물었으나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곧 입성하여 소자(小子)가 고대하는 뜻에 따르고 이어서 서추(西樞)027)  에 취임하여 내가 면유(面諭)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윤대관(輪對官)028)  이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사송(詞訟)을 맡은 극무(劇務)인 곳이 어찌 병을 요양하는 곳이겠는가? 해가 바뀐 뒤에 한번도 개좌(開坐)하지 않으니, 일이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판윤(判尹)이 요즈음에 거듭 정고(呈告)029)  하였는데, 그 밖의 병을 핑계하는 당상(堂上)들은 모두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봉조하(奉朝賀)030)  를 입시(入侍)하라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서 전유(傳諭)하게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당초에 나누어 달리하려 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곡진히 보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또 이러하니, 대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매,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예교(睿敎)가 지나치신 듯합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채제공(蔡濟恭)에게 말하기를,
"경이 서백(西伯)이었을 때에 쇄신한 것을 보면 경이 탐오(貪汚)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하다. 경과 같은 자라면 알 수 있는 가운데 마음에 기대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매, 채제공이 말하기를,
"삼가 보건대 근래 하령하시면 팔방(八方)에서 목을 늘여 기대하고 기꺼이 받드는 마음이 극진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저하(邸下)께서 과연 학문의 공(功)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처음에 착하지 않은 자가 없으나 능히 끝내 착한 자가 드물다.’ 하였습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시면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나는 대리(代理)하게 하신 성의(聖意)에 보답하여 마음을 다해서 정사를 행해야 하겠으나, 본디 지식이 없으니,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12일 갑신

하령하기를,
"화협 옹주(和協翁主)를 천장(遷葬)하는 날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겠으니, 제문(祭文)은 예문관(藝文館)을 시켜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흥태문(興泰門) 안에 앉아서 능마아강(能麽兒講)031)                  을 행하였다. 하령하기를,
"시위(侍衛)가 지영(祗迎)하지 않는 것은 곧 갑주(甲胄)를 입은 군사는 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으로 고례(古例)에 어그러지니, 이 뒤로는 지영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3일 을유

부제학(副提學) 김하재(金夏材)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질(睿質)은 영기(英氣)가 너무 드러나서 이따금 함축(涵蓄)에 부족한 것이 있고 사령(辭令)이 혹 갑작스러워서 너그럽게 성취시키지 못하시니, 신은 예학(睿學)032)  에 순연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럴세라 염려됩니다. 속박하고 세게 몰아대는 것을 엄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예(禮)로 부리는 도리를 생각하시며, 허리를 굽혀 빨리 걷고 순종하는 것을 공손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염치가 중하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김하재(金夏材)의 상서(上書)를 들여오게 하여 답을 내렸다.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상서 가운데에 있는 영기(英氣)가 너무 드러나신다는 등 몇 구절은 저하(邸下)의 병통에 맞는 약이 됩니다. 바라건대 더욱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고, 이보행(李普行)이 말하기를,
"부제학(副提學)이 아뢴 것은 성심(誠心)이라 할 수 있으니, 범연히 여기지 말고 유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춘방(春坊)의 관원이 아뢴 것을 들으니, 서연(書筵)을 직숙(直宿) 때문에 멈추었다 한다.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문왕(文王)이 세자(世子)이었을 때에 하루에 세 번 뵈어 문침(問寢)하고 문선(問膳)한 것이 이러한가? 이 뒤로는 규례대로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승지(承旨) 서유린(徐有隣)에게 말하기를,
"부제학(副提學)이 상서한 사연이 좋다. 내가 듣건대, 주자(朱子)가 장남헌(張南軒)033)  에게 보낸 글에 ‘장중(莊重)하고 침밀(沈密)함이 부족하다.’고 하였는데, 내 병통을 잘 말하였다 하겠다."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진언(進言)하는 자는 이렇게 해야 워낙 마땅합니다.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더욱더 깊이 생각하시는 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유신(儒臣) 엄사만(嚴思晩)이 지은 제문(祭文)을 보고 승지(承旨)에게 말하기를,
"근래 사신(詞臣)이 전혀 글을 숭상하지 않아서 모든 찬술(撰述)에 기복 변화(起伏變化)가 없으니, 이러고도 어찌 왕언(王言)을 대신 지을 수 있겠는가? 옛 문형(文衡)인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은 제문을 잘 짓는 것으로 이제까지 전해 오는 것을 나도 들었다. 예전에는 문장에 정해진 값어치가 있어서 재주를 감추고 쓰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은데, 글의 값이 없어졌기 때문이다.악비(岳飛)034)  가 말하기를, ‘문신(文臣)이 돈을 아끼지 않고 무신(武臣)이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의 일은 거의 잘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김익(金熠)은 행검(行檢)과 효우(孝友)가 있다 한다."
하매, 승지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집안에서 행동하는 것과 학문에서 얻은 지식이 무리에서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김하재(金夏材)는 가문이 매우 좋고 사람됨이 매우 훌륭하니, 어디엔들 쓸 수 없겠는가?"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밖에 나오지 않고 글만 읽으며 사람됨이 바르고 정(精)하니, 참으로 범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1월 15일 정해

이은(李溵)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제배(除拜)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정승 벼슬을 해면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아서 문신 전경강(文臣專經講)을 행하고, 시관(試官)·승지(承旨)·사관(史官)과 시위(侍衛)·강원(講員)에게 다 음식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저경궁(儲慶宮)은 육상궁(毓祥宮)과 다른 것이 없으므로 이제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시임(時任)·원임(原任)인 구경(九卿)·대제학(大提學)·문임(文任)이 함께 의호(議號)하여 아뢰라. 의호하여 봉입하면 고취(鼓吹)가 전정(殿庭)에 이르고 봉람(奉覽)한 뒤에 채여(彩轝)에 담아서 저경궁에 가되, 충자(沖子)가 따라가라."
하였다.

 

이경륜(李敬倫)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왕세손이 저경궁(儲慶宮)에 가서 서감실(西龕室)에 존호(尊號)를 봉안하고 예를 행한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1월 16일 무자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아서 문신 전경강(文臣專經講)을 행하였다.

 

1월 17일 기축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아서 무신 전경강(武臣專經講)을 행하였다.

 

왕세손이 위선당(爲善堂)에 나아가 별감(別監)들을 시켜 각각 한 기예(技藝)를 행하여 보게 하였다. 무신 전강(武臣殿講)에서 으뜸을 차지한 장현좌(張鉉佐)에게 통개(筒介)·궁시(弓矢)를 내려 주었다.

 

왕세손이 원유관(遠游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서계(誓戒)035)  를 받았다.

 

1월 18일 경인

봉조하(奉朝賀) 정실(鄭宲)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청정(聽政)하신 이래로 어떤 사람은 정무(政務)의 수응(酬應)이 학문을 방해한다고 합니다마는,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학문과 정사는 본디 두 가지가 아닌데, 삼대(三代) 이후로 습속(習俗)이 더러워져서 도학(道學)을 오활(迂闊)한 것으로 여기어 정치를 할 때에는 허황한 것을 끌어대고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문과 정사가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한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상서하여 아뢴 것에서 나를 아끼는 뜻을 볼 수 있으니, 내가 감탄한다."
하였다.

 

1월 19일 신묘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승지(承旨)를 시켜 공사(公事)를 읽어 아뢰게 하였다.

 

1월 20일 임진

전 충청 도사(忠淸都事) 김덕원(金德元)이 상서(上書)하여 어의(御醫)를 선택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몰래 도축(屠畜)하는 것을 금지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엄체된 것을 진작하기를 청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상서하여 아뢴 것을 유사(攸司)를 시켜 조목조목 벌여 적어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았는데,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청정(聽政)하신 뒤에는 사체(事體)가 절로 다른데, 대조(大朝)036)  의 연중(筵中)에 나는 감히 참여하여 들을 수 없다고 하신다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왕세손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종부 제조(宗簿提調)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이 말하기를,
"《보략(譜略)》037)  을 수정할 때에는 발문(跋文)을 만들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왕년의 발문은 고(故) 상신(相臣) 이관명(李觀命)이 지어 바친 것인데, 이제 《보략》을 수정할 때를 당하여 그 아들 이휘지(李徽之)가 또 문형(文衡)으로서 지어 바치게 되었으니, 일이 우연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희귀한 일이다. 지어 바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상로(朴相老)가 아뢰기를,
"해계군(海溪君) 이집(李㙫)은 육상궁에 고유(告由)038)  하는 예를 행할 때에 동궁(東宮)이 연(輦)에서 내리는 곳에서 지척인 곳의 말을 탔으니,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여염집을 산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을 엄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태연(尹泰淵)을 기장현(機張縣)에 귀양보내고 장지항(張志恒)을 어영 대장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며, 박상로에게 숙마(熟馬)를 면급(面給)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講)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이르기를,
"너는 신하들이 주대(奏對)할 때에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넉넉하게 수용하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서 우선 뒷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만일 취할 바가 있다면 천금(千金)을 얻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닐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뭇 신하를 예우하는 것은 임금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된 자는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번번이 뭇 신하를 낮추어 보는 마음이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반드시 네 할아비의 오늘 〈부탁한〉 마음을 생각해야 한다. 대개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하기를 좋아하지 않기가 쉬우니, 너는 힘쓰라."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경륜(李敬倫)·시독관(侍讀官) 홍상찬(洪相纘)을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의 아들과 홍치중(洪致中)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영사(領事)에게 표피(豹皮)를, 지경연(知經筵)과 특진관(特進官)에게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경조 당상(京兆堂上)을 인접(引接)하여 여염집을 빼앗는 일을 신칙(申飭)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지평(持平) 이정운(李鼎運)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서 윤양후(尹養厚) 한 사람을 제거하였으나 또 다른 윤양후가 있으니, 국가의 근심은 장차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저 이병정(李秉鼎)은 본디 윤리를 업신여기고 의리를 어기며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아비가 연전에 패악 무도[紾兄]하여 벼슬을 빼앗았다는 지목을 당한 것이 얼마만한 인륜의 변괴였으며, 또 일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가 그 아비에게 미친 것이니, 그가 어찌 감히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낯을 들고 다시 관작(官爵)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태연히 부끄러운 줄 모르고 더욱 흉억(胸臆)을 부리니, 복장(腹腸)에 가득 찬 것이 모두 화심(禍心)이며 말을 듣고 눈동자를 보면 결국 길인(吉人)이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책략을 펴며 권세 있는 집을 찾아 이리저리 붙좇으니, 물여우 같은 정태(情態)가 갑자기 변하고 번득이는 것을 여러 사람이 가리키고 뭇사람의 눈을 엄폐할 수 없습니다. 전후의 청관(淸官)·미직(美職)은 모두 남을 해치며 아첨하고 허세를 떠벌여서 얻은 것인데,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극진하였습니다. 그가 고 상신의 사위로서 그 은의(恩義)를 저버리고 도리어 원수가 되어 도리를 어기는 행동이 그지없으므로, 인척·친척이 모두 놀라워하고 개탄합니다. 신은 이병정의 청요직(淸要職)을 모두 삭탈하여 개정하고 한결같이 윤양후의 예(例)에 따라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영지(令旨)에 말하겠다."
하였다.

 

홍상찬(洪相纘)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21일 계사

임금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장오(李章吾)를 교동부(喬桐府)에 충군(充軍)039)  하라고 명하였다. 여염집을 빼앗았으므로 경조(京兆)040)  에서 아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헌(大司憲) 박상로(朴相老)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발계(發啓)하여 여염집을 빼앗는 것을 조사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구선복(具善復)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이한응(李漢膺)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상로(朴相老)가 주달(奏達)하기를,
"심익운(沈翼雲)은 덕(德)보다 나은 재주가 조금 있고 윤상(倫常)을 어긴 죄를 같이 졌으니, 그 요사하고 간악한 것을 논하면 형제가 같은 마음입니다. 대조(大朝)께서 처분하실 때에 이미 난형 난제(難兄難弟)라는 말씀을 내리셨고 어제 합계(合啓) 때에 또 그 물여우 같은 정상을 아뢰었습니다. 이처럼 흉악한 무리는 사방의 먼 곳에 귀양보내야 워낙 마땅한데, 잠시 귀양보냈다가 곧 용서하였으므로, 서울에 출입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으니, 너무 너그럽게 한 데 잘못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찌 뭇 백성을 뒤섞어 석방한다고 하여 드디어 지극히 엄한 제방(隄防)을 해이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심익운을 북쪽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상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주달하기를,
"경위가 밝고 행실이 닦였다는 것이 어떠한 제목(題目)이겠습니까? 산림(山林)에서 오래도록 쌓은 덕망으로서 일대(一代)의 중망(重望)을 떠맡은 자가 아니면 쉽사리 의의(擬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배인 유현(儒賢)으로서도 능히 이 이름을 떠맡고 이 천거를 받은 자는 대개 아주 드물게 있을 뿐입니다. 접때 한 상신(相臣)이 갑자기 경명수행(經名行修) 네 글자의 제목을 어리석고 무식하여 평소에 이름없는 사람에게 가하여 신청(宸聽)을 번거롭히고 문득 제명(除命)을 욕되게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진신(搢紳)이 전하여 웃고 사림(士林)이 서로 부끄러워하니,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 이충(李沖)을 파면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언(臺言)이 이미 이와 같다면 당자가 쭈그리고 있을 수 없는 형세일 것이니, 갈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학자가 마음을 닦는 것과 같으니, 먼저 바른 길을 찾고 나서야 점진하는 보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니, 만약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빠르고 일을 하는 데에 점진이 없다면 마침내 다스려지지는 못하고 드디어 어지러워질 것이다. 평범한 임금에게 갖추기를 바라는 것은 워낙 어렵다마는, 송(宋) 신종(神宗)으로 말하면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질 않았으나 정치가 그 길을 찾지 못하여 마침내 소인이 틈타게 하여 송나라가 쇠퇴하였다."
하고, 하령하기를,
"접때 유신(儒臣)이 윤양후(尹養厚)를 논한 것은 사리(辭理)가 모두 격하여 몹시 몰아댄 것이 조금도 없었으니, 내가 들어준 까닭은 그것이 공론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정운(李鼎運)이 상서한 것을 보면 종이에 가득히 장황한 것이 억지로 만든 말이니, 이렇게 남을 탄핵하면 남이 과연 스스로 승복하겠는가? 관원들이 서로 바로잡는 것은 어찌 안될 것이 있으랴마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미는 것이 극진하고 거짓말을 만드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은 이미 청조(淸朝)의 충후(忠厚)한 풍습이 아니기에 종전에 이 버릇을 하는 자를 내가 일찍이 통탄하였는데, 더구나 이제 시작하는 때에 이런 한심한 행동이 있으니, 세도(世道)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정병(李鼎秉)이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것은 절로 공론의 시비가 있을 것인데, 넌지시 윤 양후와 같은 예(例)로 돌린 것은 무슨 꼬투리가 있어서인가? 또 부부 사이에는 남이 알 바가 아닌 것이 있으니, 이정운이 그 인척·친척일지라도 결코 감히 구설(口舌)에 내거나 장주(章奏)에 쓸 수 없는데, 이제 길 가는 사람으로서 규문(閨門)의 일을 질언(質言)하였으니, 그 마음이 급히 꾸미려는 데에서 나왔더라도 그 자취는 절로 불인(不忍)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세(末世)의 풍속을 진정시키고 대풍(臺風)을 세우는 도리로서 대조(大朝)께 여쭈어 처분을 청하고 싶으나, 바야흐로 조제(調劑)가 혹 전만 못하여 사교(辭敎)가 비상하신데, 이런 때에 번거롭혀드리는 것은 또한 내 본의가 아니므로 우선 가벼운 경책(警責)을 보인다. 지평 이정운을 우선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았으니, 부제학(副提學) 김하재(金夏材)가 아뢰기를,
"이병정(李秉鼎) 부자(父子)는 지론(持論)이 본디 공평하며 이병정이 근년에 차자를 올린 것은 참으로 도(道)를 지키는 데에 관계되고 근일 장주한 것도 엄히 막으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신은 그가 공이 있는 줄 알 뿐이고 그가 죄가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설사 관원들이 서로 바로잡을 일이 있더라도 오직 그 일에 따라 일을 논해야 할 것인데, 인리(人理)에 그럴 듯하지 않은 말을 억지로 씌워서 헐뜯었습니다. 더구나 규문(閨門) 안의 일은 실로 일로서 외부 사람이 알 바가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처분하시는 영지(令旨) 가운데에 ‘그 자취는 절로 불인(不忍)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이미 남김없이 통촉하신 것입니다. 아! 한 사람이 논박당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합니다마는, 아마도 이로부터 선을 행하는 자는 권장될 바가 없고 악을 행하는 자는 징계될 바가 없을 것이니, 신은 다시 더 엄히 처분하여 조정의 조용하지 못한 버릇을 진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것이 참으로 논사(論思)의 체례(體例)에 맞으니, 내가 부학(副學)에 대하여 지망(地望)으로 기대한 것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이정운(李鼎運)이 복장(腹腸)에 가득 찬 화심(禍心)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그가 자신을 말한 것인데, 이러하여도 버려두고 논하지 않으면 어떠한 책략이 어두운 곳에서 나올는지 모르니, 내가 통탄하고 근심하는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더구나 방황하며 총애를 탐냈다는 말은 내가 전 부제학이 상서하여 아뢴 것에 대해서 잘못 돌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조정을 비게 하려는 계책일 것이니, 청한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전 지평 이정운에게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3일 을미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왕세손이 흥태문(興泰門) 밖에 나아가 친압(親押)하였다.

 

1월 24일 병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왕세손이 시립(侍立)하고 여러 집사(執事)가 책보(冊寶)·책인(冊印)을 받들고 서계(西階)를 거쳐 올라가서 바치자 임금이 용정(龍亭)041)  에 봉안(奉安)하니, 풍악이 울렸다. 임금이 부궁(俯躬)하여 지영(祗迎)하고 왕세손이 향축(香祝)·책보를 배종(陪從)하여 태묘(太廟)에 나아갔다.

 

1월 25일 정유

왕세손이 태묘(太廟)에 책보(冊寶)를 올리고,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책보를 올렸으며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책보를 올리고 환궁(還宮)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았다. 임금이 원유관(遠游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자리에 나아가 앉으니, 왕세손이 원유관·강사포를 갖추고 계하(階下)에 나아가 서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백관(百官)이 곧 사배하니, 풍악이 울렸다. 전상(殿上)에 있는 탁상(卓床)에 책보(冊寶)를 바치자, 독책관(讀冊官)이 옥책(玉冊)을 읽어 아뢰고 독보관(讀寶官)이 옥보(玉寶)를 읽어 아뢰매, 왕세손이 사배하고 백관이 또 사배하니, 풍악이 울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교(宣敎)만을 아뢰라."
하니, 선교관(宣敎官)이 동계(東階)에 올라가 읽었다. 끝나고서 왕세손이 사배하고 백관이 또 사배하였다. 왕세손 이하가 꿇어앉아 홀(笏)을 들고 일제히 천세(千歲)를 세 번 부른 다음 왕세손이 사배하고 백관이 또 사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방민(坊民) 가운데 늙은 자는 내정(內庭)에 들어와 하반(賀班)에 참여하게 하고 태학생(太學生)도 와서 기다리게 하였는가? 늙은 백성 가운데에서 계유년042)  에 태어난 세 사람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임금이 도감(都監)의 당상(堂上)·도청(都廳)과 태실(太室)의 독책관(讀冊官)·독인관(讀印官)과 예모관(禮貌官)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하령하기를,
"대사헌(大司憲) 박상로(朴相老)는 주대(奏對)할 때에 전혀 공경하고 삼감이 없으니, 파직(罷職)하라. 대사간(大司諫) 남현로(南玄老)는 체모를 손상하였다 하겠으니, 체차(遞差)하라. 시임(時任)인 대간(臺諫)이 한마디도 말이 없으니,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정경인(鄭景仁)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27일 기해

이상암(李商巖)·홍낙임(洪樂任)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80세 이상인 사서인(士庶人)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민종렬(閔鍾烈)·이덕사(李德師)·이연상(李衍祥)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번 예(禮)가 끝난 뒤에는 효장궁(孝章宮)에도 호(號)가 있고서야 종통(宗統)이 바르게 되고 사면(事面)이 곧바르게 될 것이다. 지금 효장(孝章)·효순(孝純) 두 자로 종통이 바르게 되겠는가?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것이 아니다. 효장은 효장 승통 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고 효순은 효순 승통 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여 옥인(玉印)과 죽책(竹冊)을 만들어 주라. 그 또한 경사를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는 도리이니, 종통을 바룬 일을 위에 고하되 삭제(朔祭) 때에 아울러 고유(告由)하고 팔방에 선포하라. 책인 도감(冊印都監)은 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이 거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전(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아야 하겠으나, 이것은 크게 벌일 것이 아니니, 물선(物膳)은 그만두라. 육상궁(毓祥宮)·저경궁(儲慶宮)에도 마찬가지로 고유하라."
하였다.

 

1월 28일 경자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월 29일 신축

조재준(趙載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한태(李漢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오재순(吳載純)·채홍리(蔡弘履)에게 승지(承旨)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흥태문(興泰門)에 앉아서 친압(親押)하였다.

 

정만순(鄭晩淳)·김문순(金文淳)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30일 임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국기(國忌)일지라도 종통(宗統)이 중대하니, 격례(格例)대로 풍악을 울리라."
하였다.

 

왕세손이 효장묘(孝章廟)에 나아가 책인(冊印)을 올렸다. 왕세손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책인(冊印)을 받고 효장묘에 따라가서 자리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으며, 이어서 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고 도로 재실(齋室)에 나아갔다. 3경(三更)에 왕세손이 원유관(遠游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효장묘에 나아가 자리에 나아가서 예를 행하고 동계(東階)를 거쳐 올라가서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책보(冊寶)를 올리고 내려와 자리에 돌아가 재배(再拜)하고 소차(小次)에 들어가 다시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서 제례(祭禮)를 행하고 다시 재실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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