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계묘
왕세손이 환궁(還宮)하였다.
하교하기를,
"교검(校檢)한 세 당상(堂上)과 독책관(讀冊官)·독인관(讀印官)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낭청(郞廳)은 벼슬을 올려 주어라."
하고, 제술관(製述官)·서사관(書寫官)에게는 모두 명하여 말을 내려 주게 하였다.
이문원(李文源)·조경(趙瓊)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두 차례 대거(對擧)한 승지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임금이 일한재(日閑齋)에 나아가 동민(洞民)을 소견(召見)하고 쌀과 고기를 내려 주었으며, 70세 이상인 자에게는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2월 2일 갑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았다. 왕세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자리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니, 풍악이 울리고 백관도 사배하였다. 치사관(致詞官)이 전(殿)에 올라가 왕세손의 치사(致詞)를 읽어 아뢰자, 왕세손이 사배하고 백관도 사배하였다. 치사관이 전에 올라가 백관의 치사를 읽어 아뢰자, 백관이 사배하였다. 왕세손이 꿇어앉고 백관도 꿇어앉아 세 번 고두(叩頭)하고 세 번 호숭(呼嵩)한 다음 왕세손이 사배하고 백관도 사배하였으며, 선전관(宣箋官)이 왕세손의 전문(箋文)을 읽어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의 전문은 그만두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선교(宣敎)할 것을 아뢰자, 선교관(宣敎官)이 교문(敎文)을 읽어 선포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의호(懿號)에 특별히 더하여 두 글자를 명백히 나타내고 성대한 의례를 거행하여 팔방에 고하노니, 떳떳한 법을 준수함이요 의문(儀文)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효장(孝章)의 사당을 돌아보면 번번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한다. 영예(令譽)가 날로 나타나서 일찍부터 주창(主鬯)043) 의 중책을 맡았고, 덕성(德性)은 하늘이 열어 주었으므로 압뉴(壓紐)044) 의 상서를 증험하기를 바랐다. 아! 희망은 문득 사라지고 세월은 오래 지났으나, 다행히 하늘이 복록과 자손을 내림에 힘입어 기쁘게도 문손(文孫)이 훌륭히 이어받게 됨을 본다. 부탁은 어진 사람을 얻어 열조(列祖)에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고 종묘(宗廟)는 자리를 바르게 하여 저궁(儲宮)에게 큰 책임을 지워서, 반석(磐石)·태산(泰山)처럼 영구히 안정시켰으니, 자손에게 계책을 끼쳐서 도울 것이고, 본종(本宗)·지손(支孫)이 영원히 이를 계승하여 잊지 않을 것이다. 대개 총사(冢嗣)의 효성을 몸받아 종자(宗子)의 휴호(休號)를 꾸몄다. 떳떳한 전례(典禮)를 짐작하여 의물(儀物)을 크게 더하는 일을 다하고 휘칭(徽稱)을 높여서 통서(統緖)를 잘 이은 것을 나타내며, 청묘(淸廟)에 책인(冊印)을 바치는 일을 끝내자 나라의 경사가 더욱 커지고 대정(大庭)에서 교명(敎命)을 선포하여 성대한 의례가 거행되었으니, 아마도 기업이 길이 튼튼하고 이 때문에 경사(卿士)가 협력하여 따를 것이다. 중외(中外)는 기뻐하여 큰 계책을 더욱 천명하기를 기대하고 상하(上下)에 알려 선포하여 자손을 위하는 계책을 공경히 이어받았음을 보인다. 아! 국운(國運)이 새로워지고 열조의 기업을 크게 이으니, 정문(情文)은 알맞아서 백성이 목을 늘이고 기대하는 정성을 위로하고 전례는 잘 지켜져서 만대(萬代)에 근본을 굳힐 계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노니 모두들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휘지(李徽之)가 지어 바쳤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학(太學)에서는 치사(致詞)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열흘 안에 패초(牌招)045) 를 어긴 사람을 모두 서용(敍用)하고 오늘 밤은 야금(夜禁)을 풀라고 명하였다.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백성이 기뻐하느냐 슬퍼하느냐는 참으로 수령(守令)이 착하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 또 더구나 백 리 안의 백성을 이 백 리의 책임을 맡은 자에게 맡겼으니, 백성과 근심을 나누는 벼슬이 워낙 중하지 않은가? 오늘 수령의 천단(薦單)에 대해 달하(達下)하였는데 고적(考績)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음은 책임이 도신(道臣)에게 있고 천거한 것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죄가 천주(薦主)에 관계된다. 이미 지난 것은 뒤쫓아서 죄를 감단하기 어렵더라도 앞으로는 오히려 징려(懲勵)해야 할 것이니, 이 뒤로는 수령을 잘못 천거한 데에 대한 규제를 더욱 밝히라."
하였다.
2월 3일 을사
오재소(吳載紹)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2월 4일 병오
장령(掌令) 신흔(申昕)이 아뢰기를,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집의 호노(豪奴)가 빙자하여 폐단을 짓는 것은 이미 매우 통탄스러운데, 교동(喬桐)에 귀양간 죄인 이장오(李章吾)의 종 후남(厚男)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였습니다. 훈련 도감의 포보 가포(砲保價布)046) 는 다른 것과 절로 다른데 중간에서 농간하여 짧고 거친 것으로 바꾸고, 부적(簿籍)에 적는 전화(錢貨)는 법의(法意)가 매우 엄한데, 빌려 내어 빚을 놓아 갑변(甲邊)으로 이익을 늘리며, 군병(軍兵)의 차대(差代)에는 각각 정가(定價)가 있고 도고(都庫)의 갖은 물건은 이익을 독차지하여 먹습니다. 그 밖에 집이 참람(僭濫)하고 옷이 외람한 것과 여염에서 세력을 믿고 군민(軍民)에게 폐해를 끼친 죄는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합니다. 삼군(三軍)이 모두 이를 갈고 만민(萬民)이 다 죽여야 한다 하므로 신이 과연 사람을 보내어 찾아 잡아다가 법에 비추어 엄히 다스리려 하였는데, 뜻밖에 전 병사(兵使) 이득제(李得濟)가 제 집에 숨겨 두고 끝내 내어 주지 않으므로 부례(府隷)가 여러 번 갔으나 잡을 길이 없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호노를 감추고 법부(法府)와 다투어 이처럼 꺼리는 것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방자하고 법을 업신여기는 버릇을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 병사 이득제에게는 빨리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고 그의 종 후남은 두 포청(捕廳)을 시켜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게 하고 추조(秋曹)로 옮겨 보내어 명백히 당률(當律)을 시행하여 삼군이 쌓인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게 하고 만민이 국법이 있는 줄 알게 하소서."
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수은묘(垂恩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세손이 환궁(還宮)한 뒤에 흑포립(黑布笠)·백포(白袍)·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서 한데에 앉아 대신들을 소견하여 소매 안에서 소초(疏草)를 내어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읽게 하고, 하령하기를,
"일이 성취되고 안 되는 것은 오직 대조의 지극히 인자한 은혜를 믿을 뿐이거니와, 내 도리로서는 또한 힘써 성의를 쌓아 천심(天心)에 사무치기를 바라야 할 따름이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계교(計較)하겠는가?"
하였다. 곧 일산(日傘)을 치우게 하고 뜰 가운데에 몸을 드러내고 엎드려 궁관(宮官)을 시켜 소(疏)를 도승지에게 주고 이어서 중관(中官)을 청해서 주게 하였다. 상소에 이르기를,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곧 하늘이십니다. 정수리에서 발끝에 이르는 모발까지 모두가 내려 주신 것이고 덮어 길러 키우신 것도 모두 은덕이며, 신이 25년 동안 산 것도 다 전하께서 관용하신 가운데에서 얻은 것입니다. 신은 큰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받들어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고서 오직 문침(問寢)하고 시선(視膳)047) 하는 것으로 구구히 보답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우리 전하께서 신이 불초하여 능히 부담할 수 없는 줄 모르고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펴야 하는 번다한 것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그 일은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중하며 그 책임은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큽니다. 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무릅써 감당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사양하기를 두번 세번 하여도 윤허받지 못하고는 분의(分義)에 몰려 애써 따른 지 이제 두어 달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나무 위에 머물러 있는 듯하였는데, 근일 성상께서 종통(宗統)이 중대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길이 근본이 되는 계책을 세우시어 드디어 상책(上冊)한 끝에 특별히 사호(賜號)하는 예(禮)를 거행하였으니, 신은 영화롭고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도록 힘쓴들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갚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에게는 아 주 박절한 사정(私情)이 있습니다. 이제 일의 기회가 생김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더욱 격렬하여 스스로 누르지 못하니, 말하려 하여도 소리가 먼저 삼켜지고 글을 쓰려 하여도 눈물이 먼저 쏟아집니다. 아! 이것은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실 일이고 소자가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애(仁愛)하고 복육(覆育)하시는 천은(天恩)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고 신의 사정은 영구히 드러낼 날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소리내어 외치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을 아뢰니, 전하께서는 가엾이 여겨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임오년048) 의 처분은 우리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하여 마지못하신 일입니다. 대성(大聖)의 마음으로 달권(達權)의 도리를 행하셨으니, 온 동토(東土)의 신민이 누구인들 감히 그 사이에서 이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죽을 뻔한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하의 큰 은혜입니다.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과 큰 산과 깊은 바다도 이 감격을 견줄 만하지 못하니, 신이 보답하고 힘을 다하는 도리로서는 오직 사시(四時)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서 만세에 이르러도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괴귀(怪鬼) 같은 방자한 무리가 감히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방자히 추숭(追崇)하려는 논의를 내더라도 신이 그 부추김을 받아 함부로 의리를 바꾸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전하의 죄인이 되는 것이고, 전하의 죄인이 될 뿐더러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만고(萬古)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제(上帝)가 위에서 굽어보고 종묘(宗廟)의 신령(神靈)이 옆에서 질증(質證)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후원일기(喉院日記)049) 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니, 신의 사심(私心)이 애통하여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어리석더라도 이 한 가지 없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는데, 지금은 이극(貳極)050) 에 높이 있어 엄연히 백료(百僚)를 대하니, 어찌 마음에 아픈 것이 없겠으며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신이 애통하게 여기는 것이 전하의 처분에 대하여 방해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한 것은 애통한 것이기 때문이니, 참으로 이른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고 양존(兩存)하여도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일기가 없으면 처분에 대하여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국조(國朝)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려 있는데,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감추어서 천추 만대(千秋萬代)가 지나도 옮길 수 없으니, 또한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신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저위(儲位)를 손피(遜避)하고 종신토록 숨어 살며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뿐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절로 창자가 꺾이고 마음이 터지며 하늘에 호소하여도 방법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슬피 여기고 가엾이 여기며 헤아리고 살피시어 빨리 신에게 청정(聽政)하라 하신 명을 거두고 이어서 신의 저이(儲貳)의 지위를 제거하여 끝내 인자하게 덮어 길러 주시는 은혜를 온전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못내 큰 소원이며 못 견디게 바라고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삼가 상소하여 아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다 일렀는데 다시 무엇을 이르겠는가? 이 상소는 아까 하교한 것과 함께 사고(史庫)에 간직해 두어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051) 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052) 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 하교는 뜻이 어찌 작겠는가?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고 내일 아침에 세손이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전작(奠酌)하라."
하였다.
이동태(李東泰)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5일 정미
왕세손이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배례(拜禮)를 행하고 묘상(墓上)과 정자각(丁字閣)을 봉심(奉審)하고 목메어 눈물을 흘리니, 슬픔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하령하기를,
"홍 봉조하(洪奉朝賀)·홍낙인(洪樂仁)·정후겸(鄭厚謙)·은언군(恩彦君)·은전군(恩全君)은 함께 들어오라."
하고, 정자각으로 돌아가서 전작례(奠酌禮)053) 를 행하였다.
임금이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에게 말하기를,
"누워서 세손의 오늘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가 스스로 안정할 수 없다."
하고, 궁위관(宮衛官) 두 사람을 특별히 승자(陞資)하고 배제(陪祭)한 춘방(春坊)의 관원에게 각각 말[馬]을 내려 주고 대축(大祝)054) 을 준직(準職)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칙교(飭敎)를 내려 팔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면유(勉諭)하였다.
2월 6일 무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약방(藥房)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왕세손의 상소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질구나! 어질구나! 내 손자로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았다. 세초(洗草)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리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사배(四拜)하였다. 도승지(都承旨)가 유서(諭書)를 선독(宣讀)하고 이어서 명을 받아 왕세손에게 전하니, 왕세손이 꿇어앉아 받고 사배하고 백관(百官)도 사배하였다. 왕세손이 사배하고 왕세손이 치사(致詞)하고 백관이 치사하고 반교(頒敎)하고 산호(山呼)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저궁(儲宮)이 상소하매 의리를 지키는 것을 아릅답게 여기고 새벽 전정(殿庭)에서 기쁨을 꾸미매 내 마음을 크게 펴니, 윤음(綸音)을 선포하여 큰 복을 맞이한다. 생각하건대 나 과궁(寡躬)이 외람되게 성신(聖神)을 이어받아 국가의 어렵고 큰 기업(基業)을 맡았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종사(宗社)의 부탁이 중대함을 생각하니 편히 살 겨를이 없다. 아! 지난일을 생각하면 번번이 문손(文孫)의 지극한 아픔을 생각한다. 시운(時運)이 불행한데, 아! 내 마음이 어찌 좋아서 하였겠는가? 달권(達權)을 혹 행하는 것은 성인(聖人)도 대개 마지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사의 큰 근본을 정하고 효장(孝章)의 휴호(休號)를 특별히 더하니, 은장(銀章)이 빛나서 통서(統緖)가 바루어졌음을 보이고 신폐(宸陛)에서 진하(陳賀)하여 기업이 길이 안정됨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총사(冢嗣)가 짧은 상소를 특별히 올리니 또한 과궁의 감회 더욱 절실하였다. 차마 볼 수 없는 것임은 네 효심(孝心)이 워낙 그러하리라는 것을 살펴 알겠으니, 어찌 윤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일기(日記)를 씻어 없애라고 명하였다. 과연 이것은 의리가 정대(正大)한 것이니 경사스러운 일이 더 커진 것을 더욱 기뻐한다. 아! 예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내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옛일을 보고 추감(追感)하여 내 지극한 마음을 헤아리며 새 천명(天命)을 밝히고 영원히 이어져 이 국세(國勢)를 안정시키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노니, 모두들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휘지(李徽之)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2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왕세손이 광달문(廣達門) 밖에 나아가 중궁전(中宮殿)에 표리함(表裏函)을 바치는 예(禮)를 행하였다.
2월 7일 기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고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친히 효손(孝孫) 두 자를 써서 보(寶)를 주조(鑄造)하여 세손에게 주어 그 효성을 나타내려 한다."
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참으로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을 시켜 주조를 끝낸 뒤에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내가 누워서 친히 주려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 손자의 지극한 효도를 어찌 팔방에 보일 뿐이겠는가? 만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응제(應製)에서 으뜸을 차지한 한림(翰林) 이홍재(李洪載)를 특별히 승륙(陞六)055) 하라고 명하고 그 아래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2월 8일 경술
행 부사직(行副司直) 구선복(具善復)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각도의 속오군(束伍軍)056) 을 설치한 당초에는 양천(良賤)을 물론하고 모두 충정(充定)하였으므로 군(軍)에 공액(空額)이 없고 고을에 허부(虛簿)가 없었는데, 양역(良役)을 변통한 뒤로는 겸역(兼役)이 조금 괴로운 것을 염려하여 사노(私奴)를 구차하게 충정하여 속오를 만들므로 아침에 편성하면 저녁에 흩어져 열 사람 가운데에서 일여덟 사람이 도망하여 혹 습조(習操)057) 할 때를 당하면 사람을 품을 사서 대립(代立)하여 눈앞의 죄를 면하니, 군이 이러하면 급한 일이 있더라도 무엇을 믿겠습니까? 군기(軍器)로 말하면 각도·각읍(各邑)에서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핑계로 예전대로 버려두고 전혀 수습하지 않으므로 나무를 베어다 병기를 만들고 장대를 세워 기(旗)로 삼는 것과 불행히도 닮았으니, 이것은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속오군의 충정은 한결같이 고례(古例)를 따라 양정(良丁)·사천(私賤)은 모두 속오에 편입시키되 어린작대(魚鱗作隊)하는 법을 만들어 액수가 모자라고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되어 썩고 손상된 군기는 한 수령(守令)에게 모두 요구할 수 없고 일조 일석에 장만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으므로 이제 다섯으로 나누어 한 해마다 5분의 1씩을 수개(修改)하고 5년이 되면 두루 돌아서 다시 시작한다면 죄다 쓸 수 있는 군기가 될 것입니다. 해마다 수개한 뒤에는 수령과 감색(監色)의 성명을 병영(兵營)에 신보(申報)하고 순심(巡審)할 때에 근만(勤慢)을 살펴서 상벌(賞罰)하게 한다면, 훼손되는 대로 보수하게 되어 전처럼 버려두는 폐단이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을 시켜 각도의 수신(帥臣)에게 엄히 신칙(申飭)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서하여 아뢴 것은 융정(戎政)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헌납(獻納) 신대년(申大年)이 상달(上達)하기를,
"면시(面試)하는 규례는 사체(事體)의 득실(得失)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일경강(一經講)을 잠시 행하다가 중도에 폐지한 것으로 말하면 참으로 아깝다는 의논이 많으니, 이번 대비과(大比科)를 당하여 이미 행하였던 규례를 다시 밝혀 행해야 하겠습니다. 고관(考官)을 마땅한 사람으로 선택하는 것은 더욱이 신중히 해야 하니, 해조(該曹)를 시켜 크고 작은 모든 시망(試望)은 반드시 평소에 간결하고 엄숙함이 나타나고 오래 문망(文望)이 있는 자를 각별히 가려서 비의(備擬)하게 하며, 각도의 장시관(掌試官)도 모두 더 신칙(申飭)하여 일러서 공도(公道)를 넓히고 간사를 막는 방도를 다하게 하되, 조금이라도 정미(精微)하게 가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사정을 쓴 율(律)로 논하고 비의한 사람도 중한 견벌(譴罰)을 주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옳다. 상달한 대로 하라. 과강(科講)의 일은 과규(科規)에 관계되는 일이니,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대조(大朝)께 여쭈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음관(蔭官)의 초사(初仕)의 연한(年限)은 구제(舊制)가 점점 무너져서 요행의 문로(門路)가 여러 가지입니다. 선음(先蔭)이 있으면 나이가 스무 살을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오르니, 이들에게 어찌 백성과 나라를 위한 직임을 주어 치적(治績)의 효과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한결같이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예(例)에 따라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검의(檢擬)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상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국가가 기강을 세우고 분의(分義)를 바르게 하는 방도는 반드시 근신(近臣)부터 먼저 해야 바로 궁중(宮中)과 관부(官府)가 일체(一體)라는 뜻에 맞습니다. 근래 외람한 것이 버릇되고 그릇된 폐단이 많아져서, 궁인(宮人)이 방자하게 가마를 타고 불쑥 종반(從班)을 지나간 일이 원조(元朝)의 동가(動駕) 때에 일어났는데, 처분이 엄절하셨기 때문에 군정(群情)이 흠앙(欽仰)하고 용동(聳動)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관(中官)이 추종(騶從)을 많이 거느리고 길에서 외쳐서 조정의 고관이 하는 일과 비슷한 것으로 말하면 오히려 다시 전과 같아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으며, 액례(掖隷)가 뜻대로 각사(各司)와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궁속(宮屬)이 방자하여 외읍(外邑)의 이민(吏民)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한결같은 고질적 폐단이니,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금단(禁斷)하고 나타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상달한 것이 매우 옳다. 상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은 나라에서 먼저 힘쓸 일입니다. 원조(元朝)에 내리신 영지(令旨) 가운데에 있는 산림(山林)에 관한 일은 징소(徵召)가 혹 소홀한 것을 개탄하신 것이니, 치의(緇衣)058) 의 정성을 모두들 흠송(欽頌)합니다마는, 정초(旌招)의 일은 아직도 지연되니 혹 실정(實政)을 행하고 목마르듯이 구하는 뜻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예지(睿旨)를 내려 성례(誠禮)를 갖추어 징소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말한 것이 매우 옳다. 내가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니, 대조(大朝)께 여쭈겠다."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흑산도(黑山島)에 충군(充軍)한 죄인 조덕창(趙德昌)은 궁장(宮墻)을 넘어 들어갔으므로 본디 당률(當律)이 있으니, 청컨대 대조께 여쭈어 본율(本律)대로 처단하소서. 숙위(宿衛)의 매우 중요한 곳에 괴이한 변이 있었으니, 그날 입직(入直)한 기당(騎堂)059) 과 해소(該所)의 위장(衛將)에게 모두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따르지 않는다. 기당·위장의 일은 상달한 대로 하겠다."
하고, 하령하기를,
"홍수(紅袖)060) 가 불쑥 종반(從班)을 지나가고 자의(紫衣)061) 가 외간(外間)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도 이미 궁위(宮闈)의 기강에 관계되니, 환관(宦官)과 추졸(騶卒)이 사대부와 비슷하고 궁방(宮房)의 하속(下屬)이 외읍(外邑)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이 어떤 변괴이겠는가? 이 뒤로는 엄히 유사(攸司)에 신칙(申飭)하여 나타나는 대로 논죄(論罪)하게 하고 각도의 도신(道臣)도 듣고 보는 데에 따라 우선 엄히 다스리고 뒤에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여덟 구(句)를 지어 《효손록(孝孫錄)》에 써서 보이고 운각(芸閣)062) 을 시켜 간인(刊印)하게 하였다.
2월 9일 신해
대사헌(大司憲) 조재준(趙載俊)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판(戶判)이 남한(南漢)의 향태(餉太) 1천 석(石)을 빌려 쓰기를 청하고 그 대신에 관서(關西)의 곡물을 옮겨서 채울 것을 아뢰어 결정되었습니다. 대저 남한은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향곡(餉穀)은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인데, 근래 경비(經費)를 보충하기 위하여 많이 빌려 주었습니다. 전후에 옮겨 쓴 쌀은 근년에 1만여 석이고 지난해에도 수천 석인데, 문득 다 관서의 쌀로 획급(劃給)하였으나 여기에서 옮겨 저기를 채울 즈음에 절로 지연되기 쉬워서 곧 채우지 못합니다. 신은 일찍이 남성(南城)에 대죄(待罪)하였으므로 이 폐단을 대강 알고 늘 개탄스럽게 여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청(該廳)에 신칙(申飭)하여 추곡(秋穀)이 성숙하거든 액수대로 맞추어 도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향태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흥태문(興泰門) 밖에 나아가 친압(親押)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친히 왕세손에게 어사 은인(御賜銀印)과 어제 유서(御製諭書)를 주었다. 왕세손이 고취(鼓吹)하며 배진(陪進)하여 배례(拜禮)하고 받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하교하기를,
"이 인(印)은 세손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이 뒤로는 거동할 때에 이 인으로 전도(前導)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광달문(廣達門)에 앉아 은인(銀印)으로 안보(安寶)할 때에 배위(陪衛)하는 신하들이 모두 기뻐서 발을 구르며 춤추는데, 부총관(副摠管) 정후겸(鄭厚謙)만이 언짢은 빛이 뚜렷이 있었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아! 정후겸은 본디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063) 같은 흉악한 자로서 늘 저궁(儲宮)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홍인한(洪麟漢)과 체결하여 감히 위태롭게 하고 핍박할 생각을 일으키고, 심상운(沈翔雲)과 환출(幻出)하여 번복할 계책을 부렸다. 중신(重臣)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는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인데,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다시 나왔다는 말을 방자하게 입에 내고, 요사한 심상운을 잡아다 국문하던 날에는 수인(囚人) 남간(南間)의 말을 팔을 걷어 올리고 큰소리로 이야기하였다. 그 밖의 음모(陰謀)·역절(逆節)도 모두 지극히 흉악하여 부도(不道)한 역적인데, 아직도 배위하는 반열(班列)에 있어 태연히 금달(禁闥)에 출입하니, 생각하면 섬뜩하여 절로 마음이 싸늘하고 뼛골이 오싹해진다.
해서 찰민은 어사(海西察民隱御史) 임희우(任希雨)가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전 감사(監司) 홍술해(洪述海)는 쌀을 사들일 때에 남은 돈 1천 4백 냥을 훔쳐 먹어서 간 데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술해 형제는 홍인한(洪麟漢)이 천거한 자인데,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고, 홍술해에게 먼저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고 해부(該府)를 시켜 처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술해 형제는 홍인한의 혈당(血黨)으로서 그의 천거에 힘입어 모두 웅번(雄藩)을 차지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냐는 하교와 문생 좌주(門生座主)라고 한 명(命)은 성감(聖鑑)이 매우 밝아서 간사한 것을 남김없이 살피신 것이다. 해번(海藩)의 탐학(貪虐)한 정상은 일도(一道)에서 전하여 말하고 서민(西民)이 그 고기를 먹고자 하나, 임희우는 그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1천여 냥의 장오(贓汚)만을 간략히 논계(論啓)하였다. 홍술해의 죄는 워낙 이루 주벌(誅罰)할 수도 없거니와, 임희우의 봉사(奉使)가 변변치 못한 것은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쳤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0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금융-화폐(貨幣)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술해 형제는 홍인한의 혈당(血黨)으로서 그의 천거에 힘입어 모두 웅번(雄藩)을 차지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냐는 하교와 문생 좌주(門生座主)라고 한 명(命)은 성감(聖鑑)이 매우 밝아서 간사한 것을 남김없이 살피신 것이다. 해번(海藩)의 탐학(貪虐)한 정상은 일도(一道)에서 전하여 말하고 서민(西民)이 그 고기를 먹고자 하나, 임희우는 그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1천여 냥의 장오(贓汚)만을 간략히 논계(論啓)하였다. 홍술해의 죄는 워낙 이루 주벌(誅罰)할 수도 없거니와, 임희우의 봉사(奉使)가 변변치 못한 것은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쳤다."
2월 10일 임자
대사간(大司諫) 박상악(朴相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재용(財用)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입니다. 일찍이 기조(騎曹)와 군문(軍門)에도 따로 어사(御史)를 보낸 전례가 있으니, 신은 강명(剛明)하고 일에 익숙한 사람을 극진히 선택하여 여러 군문의 포흠(逋欠)064) 된 은화(銀貨)·전포(錢布)를 사실대로 명백히 살피게 하여 그 범한 것에 따라 당률(當律)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시(會試)에서 탁명(坼名)한 뒤에 참방(參榜)한 사람을 전정(殿庭)에 모아 다들 합격한 글을 가지고 각각 나뉘어 앉게 하여 면면(面面)이 시취(試取)하되, 그 왕래를 금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면, 교묘하고 졸렬한 것을 임금 앞에서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정식(程式)065) 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빨리 죄주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여러 군문을 번고(反庫)066) 하는 일은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면시(面試)하는 일은, 나는 법이 스스로 행해지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공정하게 고시(考試)하고 정당하게 과제(科第)를 매긴다면 회시·전시(殿試)는 하나의 면시이니 모두 구법(舊法)대로 하는 것이 지금 급히 힘쓸 일일 것이다. 다시 어찌 이전에 없던 법을 시작하여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를 손상하겠는가?"
하였다.
왕세손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박상악(朴相岳)의 상서 때문에 오재소(吳載紹)가 말하기를,
"면시(面試)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예(禮)로 하고 정성으로 해야 할 뿐이다. 어찌 먼저 의심하는 것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근년에 면시한 것을 보면 장막으로 두르고 군졸로 지켰으니, 예대(禮待)하는 뜻이 아주 없고 또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였다. 다만 고관(考官)을 가려서 맡겨 공도(公道)를 넓히고 행문(倖門)을 막아야 한다. 위에서는 정성으로 아래를 대우하고 아래에서는 성실하게 위에 응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주시(主試)하는 신하가 혹 사정(私情)을 따른 것이 나타나면, 이것은 엄히 징계해야 할 것이다. 회시(會試)067) ·전시(殿試)068) 로 말하면 또한 어찌 면시가 아니겠는가? 임헌(臨軒)하여 책사(策士)할 때에 역서(易書)069) 에 압보(押寶)하는 당초의 법의(法意)는 엄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데, 점점 세월이 오래 갈수록 해이해져서 겉치레만 남았을 뿐이니, 오직 모두 구법(舊法)대로 거듭 밝혀서 실행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2월 11일 계축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박상악(朴相岳)이 말하기를,
"근래 세도(世道)가 무너져 어지럽고 조정의 기상이 흩어지고 인심이 함닉되고 풍속이 시끄러이 영달을 다투는데, 그 시초가 된 우두머리로 말하면 곧 구상(具庠)입니다. 구상은 본디 못된 기운을 부린 사람으로서 게다가 음사(陰邪)를 더하였습니다. 집에 있으면 도리에 어그러지는 행실을 하고 벼슬살이에는 탐욕하고 외람한 버릇을 방자하게 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입니다. 그 처지로서 분수를 지키려고 생각하지 않고 감히 동서로 날뛰고 좌우로 숨바꼭질하며 암지(暗地)에서 배포(排布)하는 것은 사람과 물건을 해치는 것이 아닌 것이 없고, 반생(半生) 동안 헤아린 것은 나라를 해치고 집을 해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무릇 그의 죄악은 차마 입을 더럽혀 말을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년 동안 그 마음대로 하였다면 국가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을는지 모를 것인데, 다행히 정상이 죄다 드러나서 남방으로 귀양보내니, 처분이 엄정하여 나라 사람이 다 시원하게 여겼습니다. 얼마 안 지나서 용서하여 돌아오게 한 것도 이미 너그러운 은전(恩典)인데, 저궁(儲宮)께서 대리(代理)하시고 백관(百官)이 바른 데로 인도하는 이때에 그는 오히려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생각이 지극히 외람한 데에서 나옵니다. 처음에 이미 거실(巨室)에 버림받았는데 도리어 스스로 공로가 있다 하고, 요즈음에는 또 흉얼(凶孼)과 굳게 맺었는데 또한 스스로 소견이 있다 합니다. 밤낮으로 주무(綢繆)하여 서로 창화(唱和)하며 속으로는 화심(禍心)을 감추고 겉으로는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하니, 또한 어떤 책략이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가에서 간사한 싹을 꺾고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는 도리로서 어찌 하루라도 성문(城門) 아래에 둘 수 있겠습니까? 전 참판(參判) 구상에게 빨리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풍문이 아니고 과연 공론에서 나온 것이라면, 내가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김낙수(金樂洙)가 말하기를,
"추조(秋曹)에서 잡아 가둔 죄인 후남(厚男)은 국중(國中)의 큰 도적입니다. 포보 가포(砲保價布)는 양끝에 도장을 찍은 것인데 제 마음대로 농간하고, 기부전(記簿錢)은 영고(營庫)에 감추어 둔 것인데 마음대로 훔쳐내어 영고의 저축이 비게 되고 나라 사람의 말이 낭자하게 되었으니, 일전에 대간(臺諫)이 상달(上達)한 것은 참으로 공분(公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좀도둑과 같은 것이 아니니,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장오(李章吾)의 종 후남을 포청(捕廳)에 옮겨 보내어 적률(賊律)로 다스리고 각별히 더 사핵(査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상달한 대로 하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고 윤대관(輪對官)도 함께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사유(赦宥)는 소인(小人)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니, 본디 쉽사리 석방할 수 없는데, 살옥 죄인(殺獄罪人)을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한 것으로 말하면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을지라도, 잠시 정배하였다가 곧 석방하면 죽은 자의 원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뿐더러 안법(按法)하는 신하가 문득 사유하기를 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순안현(順安縣)에 정배(定配)한 죄인 홍치인(洪致寅)은 살옥(殺獄)을 범하고 겨우 수년을 지냈는데 품질(稟秩)에 넣은 것은 아주 심신(審愼)이 부족하니,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지해(洪趾海)를 함사(緘辭)070) 로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문신 제술(文臣製述)의 고관(考官)에 홍인한(洪麟漢)을 의망(擬望)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홍인한은 저궁(儲宮)의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으로서 대조(大朝)께 고굉(股肱)의 부탁을 받았는데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후겸(鄭厚謙)과 체결하고 흉도(凶徒)를 불러 모아 이극(貳極)을 위태롭게 핍박하고 청정(聽政)을 저지하며 감히 세 가지는 반드시 알 것 없다는 말을 방자하게 연중(筵中)에서 아뢰고, 또 대청(代聽)을 명한 날에 성상이 근신(近臣)을 시켜 쓰게 하자 감히 손을 휘둘러 말렸으니, 그 발호(跋扈)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도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아직도 삼공(三公) 줄에 끼어 있어 관례에 따라 고관의 망(望)에 검의(檢擬)되었으므로 인심이 분개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해졌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홍인한은 저궁(儲宮)의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으로서 대조(大朝)께 고굉(股肱)의 부탁을 받았는데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후겸(鄭厚謙)과 체결하고 흉도(凶徒)를 불러 모아 이극(貳極)을 위태롭게 핍박하고 청정(聽政)을 저지하며 감히 세 가지는 반드시 알 것 없다는 말을 방자하게 연중(筵中)에서 아뢰고, 또 대청(代聽)을 명한 날에 성상이 근신(近臣)을 시켜 쓰게 하자 감히 손을 휘둘러 말렸으니, 그 발호(跋扈)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도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아직도 삼공(三公) 줄에 끼어 있어 관례에 따라 고관의 망(望)에 검의(檢擬)되었으므로 인심이 분개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해졌다."
2월 12일 갑인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아서 문신 제술(文臣製述)을 행하였다.
2월 13일 을묘
조명정(趙明鼎)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김한기(金漢耆)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장지항(張志恒)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조준(趙㻐)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기구강(耆耉講)을 행하였다. 《대학(大學)》을 강독(講讀)하고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는데, 기구 제신(耆耉諸臣)이 곧 와서 기다리지 않으므로 모두 부첨(付籤)하고 이어서 주강(晝講)을 행하니, 이름하여 소년강(少年講)이라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문무 기구과(文武耆耉科)를 설행(設行)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강세황(姜世晃)·김상무(金相戊) 두 사람을 뽑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그날로 방방(放榜)071) 하니, 왕세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서 진하(陳賀)하였다. 임금이 친히 치사 전문(致詞箋文)을 지었는데 ‘수성(壽星)이 이제 비추니 황발(黃髮)이 등용되었다.’라고 하였다.
2월 14일 병진
임금이 문무 장원(文武狀元)에게 호조(戶曹)에서 옥권(玉圈)072) 을 장만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한기(金漢耆)를 면직(免職)시켜 주고 장지항(張志恒)으로 대임하였으며, 이한응(李漢膺)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이주국(李柱國)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신은(新恩) 김상무(金相戊)를 소견(召見)하고 특별히 승지(承旨)를 제배(除拜)하였다.
2월 15일 정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상신(相臣)·장신(將臣)·호판(戶判)을 인접(引接)하였다. 하령하기를,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는 본디 어렵다마는, 국가에서 장수를 임용하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오직 정일(精一)하게 가리고 믿음으로 맡겨야 하고, 그가 죄가 있게 되어도 상세히 살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수가 된 도리는 오직 저축을 넓히고 사심(士心)을 얻으며 거조(擧措)가 마땅하고 상벌(賞罰)이 공명해야 한다. 그러면 될 것이니, 경들은 반드시 유의하여 거행하고 보람을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전좌(殿坐)는 뜻이 대개 깊다. 순청 당상(巡廳堂上)을 이미 보았으니, 뜻이 또한 용동(聳動)한다."
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김인채(金麟采)·홍광일(洪光一)에게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는데, 김인채는 아뢴 것이 놀라웠기 때문에 정거(停擧)073) 를 명하였다.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명하여 삼청(三廳)의 권무 군관(勸武軍官) 및 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을 시사(試射)하고, 으뜸을 차지한 두 사람에게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2월 16일 무오
채홍리(蔡弘履)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방경(邦慶)·합경(合慶) 때에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어찌 이번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시감(試鑑)074) 에는 못 미쳤으나 오히려 공정하였다 할 수 있다. 혹 협잡하였으면 어찌 놀라움을 견디었겠는가? 삼무사(三無私)075) 의 뜻을 깊이 생각하였으니, 아주 공변되고 지극히 바르게 되었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았는데, 도승지(都承旨)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문체(文體)는 세도(世道)에 관계되니 그 격식을 일신(一新)해야 하겠다. 책문(策文)으로 말하면 첫머리를 헛되이 꾸민 것이 장황하여 전혀 구제하고 설시(設施)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니, 이러한 글은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도장(導掌)이라는 자가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은 많은데, 관가에 바치는 것이 아주 적은 것은 본디 깊은 폐단이다. 어사(御史)가 말한 바 호조에서 받아들여서 준다는 것은 갑자기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을 끌어서 마땅한 데로 돌아가도록 힘쓴다면 좋을 것이고, 궁속(宮屬)들이 대조(大朝)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본받아 남상(濫觴)의 폐단이 없어진다면 좋겠으나, 뒷날의 폐단이 여전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매,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一體)라는 것은 제갈양(諸葛亮)의 말이고, 우리 조종의 법제(法制)는 조금 이와 달라서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이 매우 많고 추쇄관(推刷官)의 폐단도 적지 않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주례(周禮)》에는 나라의 내탕(內帑)을 총재(冢宰)에 붙였는데, 우리 조정은 따로 내수사를 두었으므로 말류(末流)의 폐단이 또한 많이 있다. 이번에 청정(聽政)한 당초에 달리 은혜를 베풀 단서가 없으므로 명례궁(明禮宮)에 바치는 것 가운데에서 아직 결수(結數)에 맞추지 못한 1천 결(結)을 호조(戶曹)에 도로 주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고 명하여 《서전(書傳)》 태갑편(太甲篇)·이훈편(伊訓篇)을 읽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사관(李思觀)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친히 제문(製文)을 지어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이 내가 아니면 지위가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접때 아뢴 것을 들었으나 어찌 이렇게 될 줄 생각하였겠는가? 아뢴 것을 듣고도 도리어 진실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는데, 잠깐 뒤에 죽었다. 월봉(月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주고 널 재목은 가려서 보내고 그 아들은 상복을 벗거든 등용하여 내 끝없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왕세손이 하령하기를,
"송(宋)나라의 재신(宰臣) 부필(富弼)의 모상(母喪) 때에 특별히 곡연(曲宴)을 철폐하였으니, 예대(禮待)한 뜻을 알 수 있다. 전강(殿講)이 비록 곡연과 같지 않을지라도, 시사(視事)를 이미 탈품(頉稟)076) 하였으니, 되도록 후하게 하는 도리로서 전례가 없다 하여 강행할 수 없다. 유생(儒生)의 전강을 20일로 물려 정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조(大朝)·소조(小朝)께서 죽은 신하에게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는 은전(恩典)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는데, 전강을 물려 행한 데에서 대신(大臣)을 예대하는 예념(睿念)을 알 수 있다. 이사관은 학식은 본디 있으나 지망(地望)이 본디 가벼우므로, 전후의 이력은 다 중비(中批)077) 에서 나왔다.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어서는 부침(浮沈)하여 남의 뜻을 맞추고 건백(建白)하는 것이 없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반식 재상(伴食宰相)078) 이었다." 삼가 살피건대, 이사관은 이기성(李基聖)의 아들로서 공론이 대간(臺諫)에 통망(通望)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므로 주가(主家)에 붙좇아 부윤(府尹)·감사(監司)를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수어사(守禦使)로 발탁되었다가 마침내 대관(大官)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은 대관으로 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註 076] 탈품(頉稟) : 어떤 사정에 의하여 다하기 어려운 책임을 면제해 달라고 상사(上司)에게 청하는 일.[註 077] 중비(中批) :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관원을 임명하는 일.[註 078] 반식 재상(伴食宰相) : 실권(實權)이나 실력이 없이 재상의 직(職)에 앉아서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무능한 재상을 놀려서 이르는 말.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조(大朝)·소조(小朝)께서 죽은 신하에게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는 은전(恩典)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는데, 전강을 물려 행한 데에서 대신(大臣)을 예대하는 예념(睿念)을 알 수 있다. 이사관은 학식은 본디 있으나 지망(地望)이 본디 가벼우므로, 전후의 이력은 다 중비(中批)077) 에서 나왔다.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어서는 부침(浮沈)하여 남의 뜻을 맞추고 건백(建白)하는 것이 없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반식 재상(伴食宰相)078) 이었다."
삼가 살피건대, 이사관은 이기성(李基聖)의 아들로서 공론이 대간(臺諫)에 통망(通望)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므로 주가(主家)에 붙좇아 부윤(府尹)·감사(監司)를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수어사(守禦使)로 발탁되었다가 마침내 대관(大官)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은 대관으로 셈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구윤옥(具允玉)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대제학(大提學) 이휘지(李徽之)를 시켜 응제문(應製文)을 고교(考校)하게 하여 으뜸을 차지한 유의양(柳義養)을 준직(準職)079) 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고 명하여 어제자성옹문답(御題自醒翁問答)을 읽게 하였다.
2월 19일 신유
서명선(徐命善)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서명선이 바야흐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대직(帶職)하였으므로 힘껏 사양하여 체차하였다.
〈이장오(李章吾)의 종〉 후남(厚男)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이장오(李章吾)가 10년 동안 장임(將任)에 있으면서 탐오(貪汚)가 가혹하고 영저(營儲)가 죄다 없어졌으므로 삼군(三軍)이 원통하여 호소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면 후남(厚男)이 당한 극형을 이장오가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31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이장오(李章吾)가 10년 동안 장임(將任)에 있으면서 탐오(貪汚)가 가혹하고 영저(營儲)가 죄다 없어졌으므로 삼군(三軍)이 원통하여 호소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면 후남(厚男)이 당한 극형을 이장오가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양정(李養鼎)을 승지(承旨)로, 채제공(蔡濟恭)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2월 20일 임술
왕세손이 흥정당(興政堂)에 앉아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전강(殿講)을 설행(設行)하고 아울러 제술(製述)을 행하여 으뜸을 차지한 심염조(沈念祖)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정홍순(鄭弘淳)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하령하기를,
"어제 이조(吏曹)의 달사(達辭)를 보니, 조재민(趙載敏)이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라 하여 가자(加資)하여 서용(敍用)하기를 청하였다. 이는 널리 탕척하는 은전(恩典)이기는 하나, 가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전 대장(大將) 이장오(李章吾)를 진도군(珍島郡)에 천극(栫棘)080) 하였다.
집의(執義) 김낙수(金樂洙)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훈국(訓局)을 설치한 것은 법의(法意)가 매우 엄합니다. 서울의 군사를 총괄하고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을 전관(專管)하니, 그 신임이 또한 어떠하였겠습니까마는, 이장오(李章吾)가 무릅써 차지하던 10년 동안에 탐오(貪汚)하고 법을 어겼습니다. 본디 정해진 규례에 따라 습진(習陣)하는 비용은 가져다 쓰는 것을 이롭게 여겨 조련(操鍊)하는 정사(政事)를 전폐(全廢)하고, 본영(本營)에 저축한 물건은 뜻대로 농간하여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밑거리로 삼았으며, 교외의 전토(田土)를 사고 저택을 영건(營建)한 것이 거의 30여 곳이 넘었는데, 군기(軍器)가 썩고 손상된 것은 예사로 여겼습니다. 군교(軍校)의 충대(充代)에는 정해진 값이 있는데, 후남(厚男)의 일로 말하더라도 악한 짓을 같이하여 서로 돕고 꺼리는 것이 없이 방자한 정상이 마디마디 드러났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근기(近畿)에 귀양보내고 말 수 없으니, 신은 교동부(喬桐府)에 충군(充軍)한 죄인 이장오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헌납(獻納) 신대년(申大年)이 상서(上書)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 이경륜(李敬倫)은 고 상신의 아들로서 그 아비가 근년에 아뢴 말을 생각한다면 그 개혁하려는 뜻을 뒤쫓아 계술(繼述)하여 그 예전에 물들었던 더러운 것을 더욱 씻고, 영구히 봄을 같이하고 만물을 기른 교화 안에 들어야 워낙 마땅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음로(蔭路)에 있으면서 약빠르고 교활하여 이미 세력에 아부하고 조급히 승진을 다툰다는 비방이 많았고, 급제하게 되어서는 들불에 다 시들지 않고 옛 뿌리가 몰래 싹트게 되어 흉얼(凶孼)과 체결하고는 밤낮으로 대단히 않고 남을 헐뜯어 종적(踪跡)이 궤비(詭祕)하고 심술(心術)이 음교(陰巧)하므로 전하는 말이 떠들썩하여 세상에서 지목받았습니다. 지난 겨울 최조(崔趙)081) 수인(數人)을 창제(唱第)082) 할 때에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고가(故家)에서 사람을 얻었으니 참으로 작은 경행(慶幸)이 아니다.’ 하여, 이미 그 아주 방자한 것을 보였습니다. 또 후원(喉院)에 수인을 불러와서 말하기를, ‘치제(致祭)가 있을 듯하고 내가 가야 할 것이다. 예폐(禮幣)는 공단(貢緞)으로 장만하여 기다려야 한다.’ 운운하였습니다. 그가 오늘날의 신하로서 국시(國是)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런 말이 마음에서 싹터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거리낌이 없는 것이 어찌 이토록 극진합니까? 혁혁(赫赫)한 향안(香案) 앞에 이런 마음을 품고 출입하며 받들었으니, 어찌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을 같이 얻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무사하고 태평한 세상에 오히려 이런 일종의 교화되지 않은 무리가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런데도 징계하지 않으면 아마도 점점 커져서 천하에 가득 차는 형세가 그치지 않을 것이니, 신은 행 사직(行司直) 이경륜에게 귀양보내는 법을 빨리 시행하여 서울에 같이 둘 수 없는 뜻을 쾌히 보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공진(趙公鎭)이 부당하게 사국(史局)의 벼슬을 차지하고서 감히 지극히 중한 죄를 범한 그 아비에게 관례에 따라 은혜를 미치게 하려 하므로 시행하지 말라는 영(令)을 내리시게 만든 것으로 말하면 신이 또한 놀라워 못견디겠습니다. 나라에 명의(名義)가 있고 사람이 돌아보고 꺼릴 줄 안다면, 이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무고한 사람들과 같이 여기고 전폐(殿陛) 사이를 배회하며 은영(恩榮)의 법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검열(檢閱) 조공진을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고 그 주권(主圈)한 사람에게 곧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경륜의 일은 제방(隄防)에 관계되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조공진의 일은 다른 일 때문이기는 하나 어제 이미 견파하였으니, 이제 논할 만한 것이 없다. 주권한 사람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가자(加資)하는 사체(事體)가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번에 조재민(趙載敏)의 추은(追恩)을 청한 초기(草記)는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재간(李在簡)이 애초에 판당(判堂)을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하리(下吏)에게 분부하여 황급히 올려서 관례에 따라 판하(判下)083) 하시게 된 것이니, 이것은 참으로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더구나 조재민이 지은 죄가 이미 중하므로 무고한 사람들과 같이 볼 수 없는데 방자하게 거론하였고, 또 이재간은 조재민과 외구(外舅)·생질(甥姪) 사이라 하니, 사혐(私嫌)을 돌아보지 않고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일의 이치를 헤아리면 더욱이 방자한 데에 관계되므로 문비(問備)084) 하여 가볍게 감죄(勘罪)하고 말 수 없습니다. 신은 이조 참의 이재간에게 빨리 견삭(譴削)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전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 의금부에 내려서 추고(推考)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2일 갑자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하였다. 하령하기를,
"어제 대간(臺諫)의 상서(上書) 가운데에 있는 이경륜(李敬倫)의 일을 대신에게 물었다. 내 뜻은 실로 대각(臺閣)에서 허실(虛實)을 핵사(覈査)하기를 기다리려는 데에 있었는데, 대신의 뜻도 다른 것이 없었다. 대저 이경륜이 그 아비의 아들로서 평소에 두렵게 여기고 삼가서 제방(隄防)에 엄하였다면, 대신(臺臣)의 말이 어찌하여 이르렀겠는가? 그 처분하는 바가 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부사직(副司直) 이경륜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고 기사(耆社)에서 찬선(饌膳)을 바쳤다. 풍악이 울리니, 왕세손이 전정(殿庭)에 내려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산호(山呼)한 다음 전(殿)에 올라가 잔을 바쳤으며, 기구 대신(耆耉大臣)이 차례로 전에 올라가 잔을 바쳤다. 명하여 어제(御題)를 쓰게 하고 입시(入侍)한 신하들을 시켜 화운(和韻)하여 바치게 하였다.
집의(執義) 김낙수(金樂洙)가 합계(合啓)하여 심상운(沈翔雲)의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운이 이제까지 살아 있다니, 참으로 질긴 목숨이다."
하였다.
2월 23일 을축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영상(領相)·좌상(左相)·추조 당상(秋曹堂上)이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막중한 살옥(殺獄)을 상세히 살피고 삼가는 도리로서는 하루 안에 황급히 끝낼 수 없으니, 내가 친히 본 뒤에 의심스러운 곳을 대신에게 다시 묻겠다."
하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삼복(三覆)085) 이 아니면 본디 입참(入參)하여 옥사(獄事)를 의논한 전례가 없으니, 이 뒤로는 회계(回啓)를 기다려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을 불러 옥사를 의논하는 일에 동참하려고 한 것은 중옥(重獄)은 독단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달한 바가 이와 같으니 이 뒤로는 회계를 기다려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각도에서 심리(審理)한 문안(文案)을 대신과 형조 당상(刑曹堂上)이 입대(入對)하여 품처(稟處)하라는 명은 내가 전례가 없는 것을 창시한 것이 아니다. 대리(代理)하는 처음인 이때를 당하여 실로 죄인을 신중히 살피고 불쌍히 여기는 성덕(聖德)을 우러러 본받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영상이 아뢴 것도 옳거니와, 예대(禮待)하는 도리에 있어 자주 인접할 수 없으니, 이 뒤로는 삼복이 아니면 이런 문안은 집에서 의논을 올리도록 하여 대신의 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역명(易名)086) 의 은전(恩典)은 고례(古例)이다. 명교(名敎)를 부식(扶植)하고 풍속을 진려(振勵)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은데, 증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창흡(金昌翕)의 인품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고 고(故) 우참찬(右參贊) 이재(李縡)가 임천(林泉)에서 수도(守道)한 것으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탄모(歎慕)한 바이니, 태상(太常)087) 에 분부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하라."
하고, 또 하령하기를,
"전례가 이미 이러하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대제학(大提學) 이휘지(李徽之)에게 말하기를,
"시호(諡號)의 일이 어떠한가?"
하매, 대답하기를,
"삼가 하령을 보오니, 사림(士林)이 흥기(興起)할 수 있을 것이고 예덕(睿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내가 문의할 것이 있으므로 불러서 묻는 것이다. 예전에는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의 장원(壯元)을 사람을 등용하는 계제(階梯)로 삼았는데, 근래 사대부가 행실을 파리(笆籬) 가의 물건으로 여기므로 배양하는 도리가 아주 없어져서 문풍(文風)이 사라져 버렸으니 매우 민망스럽다. 대청(代聽)하는 처음에 무슨 훈도(薰陶)하는 정사(政事)가 있으랴마는, 세도(勢道)를 위하고 사기(士氣)를 떨치는 일이라면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전부터 호당(湖堂)의 선발은 박학(博學)·박문(博文)이었으므로 문(文)을 숭상하는 정치를 볼 수 있었으나, 60여 년 동안 버려두었다. 접때 비로소 특별히 뽑으라는 명이 있었으니, 성의(聖意)를 두신 바를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으랴마는, 뽑은 사람 중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많다. 선발을 주장한 사람이 성의를 저버렸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무릇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찾는 것은 공평해야 하니, 경은 반드시 내 지극한 정성을 몸받아 뜻을 다하여 공정히 뽑아서 전일(前日)의 수치를 씻어야 한다."
하매, 대답하기를,
"신은 문견(聞見)이 매우 좁아서 학문의 장단(長短)·심천(深淺)을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예교(睿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봉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많이 뽑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니, 반드시 유의하여 소홀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기구강(耆耉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소학(小學)》을 읽고 기로(耆老)에게 명하여 윤독(輪讀)하게 하였다. 입시(入侍)한 기구에게 말[馬]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2월 24일 병인
홍검(洪檢)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국영(洪國榮)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명교(名敎)가 한번 무너지면 반드시 이적(夷狄)·금수(禽獸)가 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도리는 먼저 명교를 부식(扶植)하고 나서야 유위(有爲)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서유방(徐有防)이 말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예덕(睿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시장(諡狀)은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이 지은 것인데, 격식(格式)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면 감히 바칠 수 없고, 혹 특별한 하교가 있으면 거행할 일이 있다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금세(今世) 사람을 시켜 짓게 한다면 누가 단암(丹巖)088) 만 할 수 있겠는가? 옛것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2월 25일 정묘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판서로, 이휘지(李徽之)를 병조 판서로, 김익(金熤)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홍국영(洪國榮)을 훈련 정(訓鍊正)으로 삼고, 증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창흡(金昌翕)에게 문강(文康)이라 증시(贈諡)하고, 우참찬(右參贊) 이재(李縡)에게 문정(文正)이라 증시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박상악(朴相岳)·헌납(獻納) 신대년(申大年)·정언(正言) 조원진(曹遠振)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대조(大朝)의 전교(傳敎)가 내려진 것을 삼가 보건대 우리 저하(邸下)에게 명하여 무안왕(武安王)089) 의 사당에 전례(展禮)하게 하셨는데, 신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안왕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천고에 빛나므로 후세 사람이 사모하는 바가 되니, 성조(聖朝)에서 존례(尊禮)를 다하는 것은 참으로 부지런히 힘쓰게 하는 아름다운 정사(政事)입니다만 으레 행해야 할 전례(典禮)와는 다르므로,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해 온 예(禮)는 혹 거가(車駕)가 묘문(廟門)을 지나갈 때에 들러서 세상에 드문 느낌을 다한 일은 있으나, 특별히 전배(展拜)한 전례는 없었습니다. 또 더구나 저하의 오늘날의 동정 거조(動靜擧措)는 조금만 실의(失宜)가 있어도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조께 여쭈어 무안왕의 사당에 거동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시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번에 전작(奠酌)하라는 명은 성인(聖人)의 대의(大義)가 두 가지 있고 이것은 헛된 말이 아닌데, 대조의 성명(成命)을 나로 하여금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나는 그것이 온당한 줄 모르겠다."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가 말하기를,
"아까 전교(傳敎)를 보니, 군의(軍儀)가 매우 단약(單弱)합니다. 마군(馬軍)·보군(步軍)과 의장(儀仗)을 다 규례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초기(草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2월 26일 무진
서명응(徐命膺)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전 기백(箕伯)090) 이 염우(廉隅)를 한번 편 것은 뜻이 있거니와, 접때 날마다 그를 천거하는 것을 내가 익히 들었는데, 좌주(座主)는 어떠하며 문생(門生)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때 홍술해(洪述海)가 탐장(貪贓)으로써 바야흐로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그 형 홍지해(洪趾海)의 평안 감사 벼슬을 체차하였는데, 이에 앞서 역신(逆臣) 홍인한(洪麟漢)이 연중(筵中)에 들어갔을 때마다 홍지해를 천거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좌주·문생이란 하교를 하였다.
왕세손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가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대개 임금의 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2월 27일 기사
부제학(副提學) 김하재(金夏材)가 상서(上書)하여 걸양(乞養)091) 하였으나, 왕세손이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왕세손이 평안 감사(平安監司) 서명응(徐命膺)에게 말하기를,
"서관(西關)은 전화(錢貨)의 고장이므로 깨끗하고 공정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니, 성간(聖簡)에 있어서도 물정에 맞고 경이 보답하는 도리에서도 어렵거니와, 이제 내가 기대하는 것이 크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어사(御史)가 가요(歌謠)를 써 넣은 것은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매, 이양정(李養鼎)이 말하기를,
"언서(諺書)로 입계(入啓)하려 한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양사(兩司)에 통하지 못하였는가?"
하매, 이양정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손자와 혼인을 맺었으므로 통청(通淸)092) 하지 못하였을 뿐이 아니고 바로 국자 분관(國子分館)093) 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안관제(安寬濟)가 관서 어사(關西御史)이었는데, 백성의 가요를 언서로 서계(書啓) 가운데에 써 넣었다.
왕세손이 서호수(徐浩修)에게 말하기를,
"김상익(金相翊)은 잡아다 처리해야 하겠다. 소조(小朝)의 차대(次對)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고, 김두상(金斗象)은 대간(臺諫)과 이랑(吏郞)을 모두 행공(行公)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또한 알 만하다. 김상익이 광은(光恩)094) 의 아비임을 빙자하여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척신(戚臣)이라 하여 그 잘못을 용서할 수 없으며, 불평한 마음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김상익을 나처하게 하라."
하고, 하령하기를,
"김상익의 일은 대단히 무례하다. 차대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것은 그 분의(分義)로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예전에도 이재(李縡)·윤심형(尹心衡) 같은 벼슬하지 않은 신하가 있었으나 성명(聖明)의 세상에서 나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의리가 어두운 때인지라 나와서 벼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상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불만하고 불평한 마음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 부자가 이 조정에 서려 하지 않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하였다.
밤에 왕세손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황단(皇壇)의 제사를 위한 서계(誓戒)를 받는 일을 행하였다.
2월 28일 경오
채제공(蔡濟恭)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정지환(鄭趾煥)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신흔(申昕)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보옵건대, 무신년095) 의 흉역(凶逆) 이인좌(李麟佐)의 당질(堂姪)인 이경(李暻)이라는 자가 금천(金川) 땅에 살고 조금 문필(文筆)이 있는데, 송도(松都)의 부자 사람과 체결하여 대소(大小)의 과장을 막론하고 값을 바치고 무릎써 들어가서 스스로 여느 사람과 같은 것처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과장이 없었고 이번 과거(科擧)에도 왔다는 말이 자자하게 전파되었다 합니다. 역적 이인좌의 흉악은 이제까지도 생각하면 사람의 뼛골이 오싹하고 마음이 질리게 하는데, 그가 역적 이인좌의 지친(至親)으로서 어찌 감히 서울에 출몰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까? 이런 역종(逆種)은 엄히 다스려 다른 사람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의 부(府)에서 바야흐로 찾아 잡으려 하나 종적이 숨겨져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신은 서울에서는 포청(捕廳)에서, 외방(外方)에서는 그 도에서 기한을 놓고 추적하여 잡아서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청한 바를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입대하였을 때에 김상익(金相翊)을 경기 연읍(京畿沿邑)에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영지(令旨)를 쓰게 하기를,
"이 김상익의 초공(草供)을 보면, 그 납초(納招)한 것이 흐릿할 뿐이 아니라 ‘비국 당상(備局堂上)은 이미 행공(行公)하였으나 정세(情勢)가……’ 한 것으로 말하면 이미 거짓으로 돌아갔다. 정세로 말하더라도 이제 와서는 세월이 오래 지나고 일이 식었는데, 또 새로 대청(代聽)하는 때를 당하여 이미 조정(朝廷)에 나왔다가 도리어 문득 물러가서 마치 자신을 단속하는 양하니, 무슨 의지할 데를 잃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이런 사람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잡아다 문초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나문하였는데 공초(供招)가 또 이러하니, 어찌 심상하게 가벼이 경책(警責)하고 말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그 아들의 대함(臺銜)·낭서(郞署)에 대하여 일체 종적을 끊으니, 그 마음가짐을 캐어 보면 더욱이 알 수 없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상익을 경기 연읍에 정배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김상익은 전 좌상(左相)이 천거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 좌상과 거취를 같이하느라 그러는가?"
하매,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벼슬길에 나오지 않을 뿐이 아니라, 죄인으로 자처합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경과 참의(參議)가 서로 겨루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매, 김종정이 말하기를,
"참의가 한번 신에게 왕복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데, 곧바로 하리(下吏)에게 부탁하여 입달(入達)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조공진(趙公鎭)이 한림(翰林)으로 행공(行公)하는 것은 매우 그르다. 제방(隄防)이 엄하지 않더라도 그 아비의 이름이 아직 단서(丹書)096) 에 있으니, 그가 어찌 감히 방자하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9일 신미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수정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6월 (0) | 2025.10.18 |
|---|---|
| 영조실록127권, 영조 52년 1776년 3월 (0) | 2025.10.18 |
| 영조실록127권, 영조 52년 1776년 1월 (0) | 2025.10.18 |
| 영조실록126권, 영조 51년 1775년 12월 (1) | 2025.10.18 |
| 영조실록125권, 영조 51년 1775년 11월 (1) | 2025.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