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신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으니, 승지(承旨)가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과장(科場)을 철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애초에 과장을 설치하지 않았으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과장을 설치하였다가 곧 또 철폐한 것은 팔방의 많은 선비들을 속이는 것이니, 민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 하교를 반포하고 문득 과장을 철폐하였으니, 많은 선비들이 억울할 뿐더러 국가의 정령(政令)으로서는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령하기를,
"승지는 어찌하여 곧 청대(請對)하지 않았는가?"
하매, 승지 서유경(徐有慶)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청대하려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지체하였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승지는 나가서 대신과 함께 곧 청대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경과(慶科)를 철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삼일제(三日製)를 설행(設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근래 정신이 거의 다 이렇다. 오늘은 특히 심하므로 이 명이 있었는데, 영상(領相)·예판(禮判)이 청대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다가 이제야 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의 과장을 이미 설치하였기 때문인 줄 깨달았다. 어찌 믿음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삼일제를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왕세손이 여(輿)를 탈 때에 예대(詣臺)한 대신(臺臣)을 시켜 교전(轎前)에서 인피(引避)하게 하였다. 헌납(獻納) 이평(李坪)이 아뢰기를,
"홍술해(洪述海)가 지급할 것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칙수(勅需)인 전화(錢貨)를 흩어 내어다가 쌀을 사서 이익을 불리고 백성에게서 박탈하여 남은 것을 가졌고, 편비(褊裨)가 오로지 세가(勢家)를 위하여 어사(御史)를 속여 이미 내었던 장문(狀聞)을 집류(執留)하였다는 따위 말은 본디 이미 전파되었습니다마는, 그 쌀을 사서 판 수효와 장문이 흐릿한 정상을 신은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대평(臺評)은 풍문(風聞)으로 하는 것을 허용하기는 하나,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되도록 명백하기를 힘써야 하므로, 본도(本道)를 시켜 엄히 사핵(査覈)하게 하기를 먼저 청한 것은 대개 그가 분명히 드러나서 할 말이 없이 스스로 승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비(睿批)를 받자옵건대, 자못 두려워 움츠린 것이라고 답하셨으니, 부끄럽고 두려워 못 견디겠습니다. 청컨대 체척(遞斥)을 명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어제 상서(上書)에 대하여 비답(批答)한 것은 신칙(申飭)한 것에 지나지 않거니와, 이제 또 아뢴 말이 매우 대체(臺體)에 맞으니, 한때 살피지 못한 것이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하고, 하령하기를,
"이 헌납 이평의 피사(避辭)를 보면 탐오(貪汚)를 징계하는 도리로서는 결코 심상하게 처치할 수 없으니, 우선 본도를 시켜 끝까지 사핵하여 장문하게 하라. 이른바 장계(狀啓)를 어사가 이미 봉(封)하였다가 곧 멈추었으니,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워낙 말할 것도 없고, 편비가 〈어사를〉 속여 집류(執留)한 것은 국법으로 헤아리면 더욱이 매우 무례하니, 어사 임희우(任希雨)는 나처(拿處)하고 편비는 해부(該府)를 시켜 잡아다 가둔 뒤에 초기(草記)하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휘지(李徽之)가 아뢰기를,
"이번 황단(皇壇)097) 친제(親祭) 때의 군병(軍兵)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전례를 상고하니, 금군(禁軍)은 재실(齋室) 밖을 둘러서 호위(扈衛)하며 전패(前牌)·후패(後牌)의 군병 각각 8초(哨)를 마련하여 황단에 나아간 뒤에 공북문(拱北門) 밖은 8초로 작문(作門)하여 호위하고 8초는 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내영(內營)·외영(外營)을 나누어 지키며 마군(馬軍)은 남영(南營)에 들어가 지키며 중군(中軍)은 북영(北營)에 유주(留住)하였습니다. 이 절목(節目)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향시(鄕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임주(兪任柱)·경시(京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장지현(張志顯)을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왕세손이 출궁(出宮)·환궁(還宮)할 때에는 으레 당상(堂上)·낭관(郞官) 1원(員)으로 거행하였는데, 이 뒤로는 백관(百官)이 규례대로 수가(隨駕)하라고 명하였다.
이번 왕세손 친제 망료의(王世孫親祭望燎儀) 때의 지위 봉출관(紙位捧出官)은 승지(承旨)로 하라고 명하였다.
3월 2일 계유
하교하기를,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기면 의심하지 않는 것은 여느 신하에 대해서도 그래야 하는데, 더구나 대관(大官)이겠는가? 자주 체차하는 것이 근일과 같은 때가 없으니, 어찌 개탄스러움을 견디겠는가? 시임(時任)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영상(領相)은 그대로 맡고 신 판부사(申判府事)를 좌상(左相)으로 삼고 좌상을 우상(右相)으로 삼으라."
하였다.
정이환(鄭履煥)을 부응교(副應敎)로, 박천형(朴天衡)을 부교리(副校理)로, 오대익(吳大益)을 수찬(修撰)으로, 권도(權噵)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직부인(直赴人)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3일 갑술
약방(藥房)에서 계귤다(桂橘茶) 한 첩을 봉입(封入)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계귤다(桂橘茶)에 부자(附子) 한 돈을 더하여 달여 들였는데, 또 건공탕(建功湯)에 부자 한 돈을 더하여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은(李溵)이 아뢰기를,
"접때 해서 어사(海西御史) 임희우(任希雨)가 돌아와 아룀에 따라 대흥 산성(大興山城)의 군향미(軍餉米)·군향태(軍餉太)를 여현(礪峴)에 옮겨 붙이는 일을 본도(本道)와 송도 유수(松都留守)에게 왕복하였는데, 다들 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흑산도(黑山島)에 천극(栫棘)한 죄인 이적보(李迪輔)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이은이 말하기를,
"호남 도신(湖南道臣)의 방미방 장문(放未放狀聞) 가운데에 흑산도에 천극한 죄인 이적보를 품질(稟秩)에 넣었거니와, 방경(邦慶)이 자주 거듭되어 여러 번 큰 은혜를 겪었으므로 그때 죄를 같이 받은 자도 은유(恩宥)를 입었는데, 이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석방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 앉아서 하직하는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고 따라서 칙려(飭勵)하기를,
"너는 새벽부터 밤까지 우근(憂勤)하는 뜻을 우러러 본받아 백성을 각별히 어루만져야 한다."
하였다.
왕세손이 흥태문(興泰門)에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하령하기를,
"문관(文官)이 학문이 없고 의리에 어두우면 나라가 망하지 않아도 절로 망할 것이므로, 내가 문풍(文風)을 떨치려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대개 호당(湖堂)098) 의 선발은 참으로 문사(文士)를 용동(聳動)시키기 위한 것인데 연전에 뽑은 것은 합당하지 않은 자가 많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격려하는 도리로서는 다시 극진히 뽑지 않을 수 없고, 예문 응교(藝文應敎)는 이것도 문(文)을 숭상하는 한 도움이 되는데 그 벼슬을 버려둔 지 이미 1백여 년이 되었으니, 호당을 뽑은 뒤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이환(鄭履煥)을 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또 증광시(增廣試)를 도로 정침하라는 하교를 하였으므로, 우의정(右議政) 이은(李溵)·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중회(趙重晦)가 구대(求對)하여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허다한 청금(靑衿)099) 은 그 마음을 위로해야 할 것이니 이번에는 친림(親臨)하겠다."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다. 미처 읽어 아뢰기 전에 임금이 어지러운 증후가 또 일어나 마치 잠든 듯하였는데, 한참 지나자 목구멍에서 가래 소리가 작게 나고 숨이 가쁘니, 왕세손이 울며 이은에게 말하기를,
"근일 성후(聖候)는 가래와 어지러움이 더 심하신데, 천식(喘息)이 또 나타나시고 헛소리 등의 증후가 있어, 아주 어쩔 줄 모르겠다. 헛소리의 증후가 조금 그치면 마치 잠드신 듯한 때가 혹 한나절 또는 두어 시각을 지나는데, 이러한 때에는 다음(茶飮)붙이일지라도 드시도록 권하기가 어렵다. 오늘은 경들이 입시(入侍)하였으니, 의관(醫官)을 시켜 진찰하라."
하였다. 이은이 진후(診候)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도승지(都承旨) 서유린(徐有隣)이 입시(入侍)하였다. 왕세손이 서유린에게 말하기를,
"오늘 성후는 날이 저문 뒤부터 어지러움이 더욱 심하시니, 애타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를 장차 어찌하는가? 이러한 때에는 반드시 말씀을 아뢰는 소리가 있고서야 현기가 조금 나아지시는 듯하니, 경이 초지(草紙)를 꺼내어 기다린다는 뜻으로 아뢰라."
하고, 왕세손이 또 옆에서 어수(御手)를 주무르며 한참 동안 경해(警咳)하고서 승지가 들어왔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였다. 서유린이 말하기를,
"초지를 꺼내어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으나 헛소리 같았다. 왕세손이 말하기를,
"신중히 하는 도리를 게을리할 수 없으니, 근일의 예(例)대로 탕제(湯劑)를 달여서 대령하도록 하라."
하였다.
술시(戌時)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상복(金相福)·제조(提調) 박상덕(朴相德)·부제조(副提調) 서유린(徐有隣)이 의관(醫官) 오도형(吳道炯)·정윤검(鄭允儉)·유광익(柳光翼)·서명위(徐命緯)를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왕세손이 서유린에게 말하기를,
"저녁 뒤부터 가래와 어지러운 증후가 더욱 심하고 눈꺼풀이 열렸다 감겼다 하며 손발의 온도가 여느때와 다르시다. 강귤다(薑橘茶) 두어 술을 드시게 하여 보았더니 온기(溫氣)가 있는 듯하다가 곧 다시 차지셨으니,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겠다. 탕제(湯劑)는 달여서 대령하였는가?"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달여서 대령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오도형을 시켜 진찰하게 하였는데, 오도형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가래가 막혀서 그럴 것입니다. 백비탕(百沸湯)을 먼저 드시고 계귤다(桂橘茶)에 곽향(藿香) 한 돈을 더하여 달여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임금을 부축하고 숟가락으로 백비탕을 떠서 드리니, 임금이 잠시 돌아누우려 하며 작은 옥음(玉音)에 떨리는 기가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음(茶飮)이 왔는가?"
하매, 왕세손이 서유린에게 말하기를,
"다음을 빨리 달여 오라."
하였다. 한참 있다가 임금이 돌아 움직이려는 뜻이 있으므로, 왕세손이 숟가락으로 다음을 떠서 드렸다. 두어 술에 이르러 혹 순하게 내려가기도 하고 토하여 내기도 하였는데, 왕세손이 박상덕을 시켜 한 첩을 다시 달여 오게 하였다. 왕세손이 임금을 부축하여 들게 하였는데, 임금이 가래침과 들었던 다음을 토하여 내니, 오도형이 말하기를,
"토하는 증세는 막힌 증세에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가래침을 토하였는데, 왕세손이 박상덕을 시켜 계귤다를 달여 들여오게 하였다. 왕세손이 어수(御手)를 받들어 오도형을 시켜 자주 진찰하여 보게 하고, 울며 말하기를,
"어제 이전에는 이러한 때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금 지나면 가래 증후가 조금 멈추셨는데, 오늘은 아직도 동정(動靜)이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는가?"
하고, 성체(聖體)를 주무르며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태우니, 보는 신하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박상덕이 탕제를 달여 바쳤는데, 왕세손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도형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제는 손발이 차가운 것이 더욱 심하시니, 어찌하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잠든 듯하여 오래 가래 소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문 밖에 물러가 엎드렸다. 조금 뒤에 왕세손이 울며 김상복 등에게 말하여 진찰하게 하였는데, 오도형이 진후(診候)한 뒤에 물러가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脈度)가 이미 가망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달리 쓸 약이 없습니다. 한 냥중의 좁쌀 미음을 달여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달여 들여오게 하고, 또 하령하여 궁관(宮官)과 승지들과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서유린이 청하여 유문 표신(留門標信)100) 을 냈다. 박상덕이 좁쌀 미음을 받들어 들어오니, 왕세손이 숟가락으로 떠서 드렸으나, 임금이 이미 들지 못하게 되었다. 왕세손이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좁쌀 미음도 효험이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는가?"
하고,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정후겸(鄭厚謙)·김효대(金孝大)·김한기(金漢耆)·김한로(金漢老) 등을 입시하게 하였다. 시임·원임인 대신이 입시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이러하시니, 애가 타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러나 저하(邸下)께서 예후(睿候)를 돌보지 않고 이처럼 지나치게 마음졸이시면 신들은 더욱이 몹시 민망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하령하기를,
"대신과 의관이 침내(寢內)에 들어가 성궁(聖躬)을 진찰하라."
하매, 김상철 등과 오도형 등이 침호(寢戶) 안에 들어가 살폈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아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기도하는 일을 빨리 거행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어수를 받들고 부복(俯伏)하여 슬피 울며 어탑(御榻)을 떠나지 않으니,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예정(睿情)이 어찌 그러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지금은 이러셔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어탑에서 조금 떨어지소서."
하였으나, 왕세손이 듣지 않고 부여잡고서 슬피 울기를 마지않았다. 서유린이 말하기를,
"궁성(宮城)의 호위(扈衛)를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며 답하지 않으니, 김상철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런 황급한 때에 호위하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승지는 어찌하여 써서 아뢰지 않습니까?"
하고, 영지(令旨)로 궁성의 호위를 규례에 따라 거행할 것을 써서 반포하였다. 김상철이 어탑 앞에 나아가 유교(遺敎)를 쓸 것을 청하자, 도승지 서유린이 유교를 썼는데, 이르기를,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하였다. 쓰기를 마치자, 김상철이 다시 어탑 앞에 나아가 유교를 선포할 것을 고하고 서유린을 시켜 침문(寢門) 밖에 서서 큰소리로 읽어 아뢰게 하였다. 김상철 등이 속광(屬纊)101) 을 청하니, 왕세손이 울며 말하기를,
"아직 조금 기다리라."
하였다. 이때 날이 밝기 전이었는데, 조금 뒤에 김상철 등이 또 속광을 청하니, 왕세손이 소리내어 슬피 울며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고, 하령하기를,
"내전(內殿)에서 드실 좁쌀 미음을 대령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속광할 때에는 집사(執事)가 같이 들어와야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금성위 박명원·창성위 황인점·공조 판서(工曹判書) 김한기·부사직(副司直) 정후겸·병조 참의(兵曹參議) 김한로로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상복이 좁쌀 미음을 바쳤으나, 왕세손이 부복하여 소리 내어 울며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세 제조와 여러 대신이 울며 아뢰기를,
"임금의 효도는 필서(匹庶)와 다릅니다. 종사(宗社)의 중한 부탁과 백성의 희망이 오직 저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저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지 않습니까?"
하였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기를 마지않고 끝내 들지 않았다. 집사들이 어상(御床) 옆에 나아가 속광하였다. 속광이 끝나고 하번(下番)인 한림(翰林) 이심연(李心淵)이 ‘상대점(上大漸)’ 석 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두루 보이니, 바로 묘시(卯時) 초 3각(三刻)이었다. 조정(朝廷)에서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였다. 왕세손이 울며 대신에게 유시하기를,
"열조(列朝)에서 예척(禮陟)102) 때에는 번번이 와내(臥內)에 계셨으므로 고복(皐復)103) 때에야 신하들이 비로소 입참(入參)하였는데, 이번에는 대점(大漸) 전부터 지금까지 경들이 입참하여 성덕(聖德)이 정종(正終)에 이르러 이처럼 뛰어나신 것을 우러러보았으나, 이제는 다시 우러러볼 데가 없어졌다."
하고 소리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으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아직 고복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효(睿孝)를 조금 억제하고 예제(禮制)를 따르소서."
하였다. 이때 대신과 여러 신하가 청사(廳事)에 서서 기다리는데, 정후겸이 집사로서 들어와 다리 병을 핑계하고 전정(殿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감히 지팡이를 짚고서 표독한 빛이 낯에 나타나고 조금도 슬픈 모습이 없었으니,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아! 또한 모질다.
3월 5일 병자
묘시(卯時)에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대점(大漸)하여 장차 고복[復]하려 할 때에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복의(復衣)는 곤룡포(袞龍袍)로 해야 하고, 고복한 뒤에는 왕세손이 침문(寢門) 밖에 나가 거애(擧哀)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황급한 때에는 모든 일이 전도되고 틀리게 되기 쉬우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해 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내시(內侍)가 복의를 받들고 동쪽 낙수받이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고복하였다. 끝나고서 협시(挾侍)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침문 밖에 나가 거애(擧哀)하였다. 이때 대신(大臣)은 북영(北楹) 밖의 서쪽 가까운 곳에 서고 승지(承旨)·사관(史官)은 동영(東楹) 안팎에 서고 궁관(宮官)은 북영 밖에 서서 마주 보고 집사관(執事官)은 어상(御床) 앞에 서고 예관(禮官)은 동계(東堦) 위에 서서 서쪽을 향하여 고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예방 승지가 복의를 받들어 어상 옆에 놓으니, 비로소 자리[位]를 설치하고 곡(哭)하였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청사에 점차(苫次)104) 를 설치하고 협시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점차로 갔다. 왕세손이 부복(俯伏)하고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고, 대신과 입참(入參)한 여러 신하와 내시 이하가 모두 곡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105) 은 53년 동안의 인수(仁壽)106) 한 정치와 희흡(熙洽)107) 한 교화가 넘치고 풍부하며,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善)이 백왕(百王)에 뛰어나고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두루 미쳤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천지(天地)와 같아서 한 사신(史臣)이 그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더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극히 우애로운 행실은 험난을 겪고서 더욱 나타나고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밝은 덕은 종사(宗社)를 더욱 굳게 하셨다. 구순(九旬)의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구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시어 우리 왕세손 저하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섭(代攝)하게 하여 인심을 일찍 붙이고 군흉(群凶)이 엿보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서 나라의 반석(磐石)·태산(泰山) 같은 큰 기업(基業)을 영구히 세우셨으니, 아! 아름답고 성대하다. 만년에 옥후(玉候)가 점점 더 깊어져 오래 끌다가 마침내 대점(大漸)에 이르러,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가 근심을 머금고 아픔을 품게 하시어, 울부짖는 슬픔과 부여잡고 가슴 치는 통곡이 신하들을 감동시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었으니, 아! 마음 아프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의생활(衣生活) / 역사-사학(史學)
[註 104] 점차(苫次) : 부모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거처.[註 105] 대행 대왕(大行大王) : 대행(大行)은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아직 받기 전에 그를 높이어 이르는 말. 여기에서는 승하한 영조를 가리킴.[註 106] 인수(仁壽) : 인덕(仁德)이 있고 수명이 긺.[註 107] 희흡(熙洽) : 명덕(明德)이 있고 화평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105) 은 53년 동안의 인수(仁壽)106) 한 정치와 희흡(熙洽)107) 한 교화가 넘치고 풍부하며,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善)이 백왕(百王)에 뛰어나고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두루 미쳤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천지(天地)와 같아서 한 사신(史臣)이 그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더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극히 우애로운 행실은 험난을 겪고서 더욱 나타나고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밝은 덕은 종사(宗社)를 더욱 굳게 하셨다. 구순(九旬)의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구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시어 우리 왕세손 저하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섭(代攝)하게 하여 인심을 일찍 붙이고 군흉(群凶)이 엿보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서 나라의 반석(磐石)·태산(泰山) 같은 큰 기업(基業)을 영구히 세우셨으니, 아! 아름답고 성대하다. 만년에 옥후(玉候)가 점점 더 깊어져 오래 끌다가 마침내 대점(大漸)에 이르러,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가 근심을 머금고 아픔을 품게 하시어, 울부짖는 슬픔과 부여잡고 가슴 치는 통곡이 신하들을 감동시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었으니, 아! 마음 아프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대행(大行)의 초상(初喪) 때에는 수상(首相)을 원상(院相)108) 이라 칭하고 본원(本院)에 참좌(參坐)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재처(裁處)하고 품달(稟達)합니다. 지금도 또한 전례에 따라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좌의정 신회(申晦)를 총호사(摠護使)로, 예조 판서 조중회(趙重晦)·공조 판서 김한기(金漢耆)·형조 판서 정존겸(鄭存謙)을 빈전 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으로 삼았다.
하령하기를,
"목욕(沐浴)하고 습렴(襲殮)109) 할 때에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봉조하(奉朝賀), 승지(承旨)·예조(禮曹)의 세 당상(堂上), 양사(兩司)의 장관(長官)과 옥당(玉堂)·춘방(春坊)들은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상달(上達)하기를,
"행 순무사 단자(行巡撫事單子) 이외에 대점 단자(代點單子)도 전례에 따라 그대로 쓰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보불(黼黻)을 경자년110) 과 갑진년111) 에 이미 행한 전례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는 바에 따라 염습할 때에 쓰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경자년·갑진년의 습구(襲具)는 다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썼고 《상례보편》 습구조(襲具條)에도 그렇게 적혀 있으니, 지금도 또한 이에 따라 상방(尙方)112) 에 분부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이번 국휼(國恤) 때에 백관(百官)의 최질(縗絰)에 드는 것은 전례에 따라 병조(兵曹)를 시켜 마련하여 제급(題給)하게 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초상(初喪)부터 졸곡(卒哭)까지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모두 멈출 것을 달하(達下)하였습니다. 이번 대보단(大報壇)의 제사도 예문(禮文)에 따라 정지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종묘(宗廟)와 각릉(各陵)·각전(各殿)은 졸곡 전에는 향제(享祭)를 폐지하더라도 삭망(朔望)의 분향(焚香)을 정지할 수는 없으니, 전례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아침·저녁의 상식(上食)이 있을 뿐입니다마는, 경자년 국휼 때에는 주다례(晝茶禮)도 아울러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전례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전부터 국휼 때에는 모든 공사(公事)에 관계되는 것은 전례에 따라 발마(撥馬)로 행회(行會)하였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상달하기를,
"이번 증광 문과(增廣文科)의 일소(一所)·이소(二所)의 시장(試場)은 이제 우선 철폐하고서 앞으로 있을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사위 절목(嗣位節目)을 바치니, 하령하기를,
"망극한 가운데에 어찌 이 초기(草記)를 듣겠는가? 도로 주라."
하였다.
왕세손이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에게 말하기를,
"수의대(壽衣襨)는 대내(大內)에서 장만하여 둔 지 이미 세월이 오래 되었다. 혹 문단(紋緞)도 있는데, 대행(大行) 때에 이미 문단을 금지하였으니, 습렴(襲殮)하는 제구에 쓸 수 없으므로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어지럽고 헷갈리어 앉아서 간검(看檢)하기가 어렵다. 집사(執事) 가운데에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사(喪事)에 대하여 평소에 잘 안다고 일컬어졌으니, 경이 함께 간검하고 곧 와서 여쭈도록 하라."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문단은 금하는 물건일 뿐더러 선조(先朝)의 평소의 검덕(儉德)을 우러러 본받아야 하니, 쓸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물러가서 금성위와 함께 간검하고 아뢰겠습니다."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운문단(雲紋緞)은 평소 곤포(袞袍)에 쓰던 것이고 금하는 물건이 아니므로 써야 하겠으나, 그 밖의 화문(花紋)은 모두 쓰지 말도록 하라."
하고, 하령하기를,
"주서(注書)는 나가서 도감 당상(都監堂上)에게 습렴할 제구를 극진히 가려서 봉입(捧入)하라고 말하라."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한기(金漢耆)가 앞으로 나아가니, 하령하기를,
"습구(襲具)가 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경이 원상과 금성위와 함께 조검(照檢)한 뒤에 그 모자라는 수를 내전(內殿)에 여쭈고 빨리 만들어 내어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신회(申晦)가 재궁 단자(梓宮單子)를 바치니, 왕세손이 소리 내어 울며 말하기를,
"이 단자를 어찌 차마 낙점(落點)하여 내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회 등이 말하기를,
"예효(睿孝)가 이러하시니 신들도 못 견디게 슬픕니다마는, 이 단자는 시급한 일에 관계되고 이미 조종조(祖宗朝)에서 행한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정(睿情)을 조금 억제하고 곧 낙점하소서."
하고, 여러 신하가 이어서 청하였으나, 왕세손이 끝내 허락하지 않고 울며 신회에게 말하기를,
"어찌 차마 낙점하여 내리겠는가?"
하였다. 신회 등이 다시 힘껏 청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운자 재궁(雲字梓宮)을 쓰는 것으로 승지(承旨)가 영지(令旨)를 받들어 써서 내라."
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얼음을 설치하는 예(禮)가 《예기(禮記)》에 실려 있는데, 지금은 방의 구들이 지나치게 따뜻하고 습렴할 시각도 아직 머니, 평상(平床)을 설치하고 얼음도 설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총호사(摠護使) 신회(申晦)에게 말하기를,
"태령전(泰寧殿)에 궤자(櫃子)가 있는데, 만세후(萬世後)113) 에 재궁(梓宮) 앞에 옮겨 놓으라고 유교(遺敎)하신 바가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망극한 마음이 절박하다. 총호사는 도승지(都承旨)와 함께 곧 가서 받들어 오라."
하였다. 신회 등이 태령전에 가서 궤자를 받들어 오니, 왕세손이 받들고 소리내어 울며 어상(御床) 북쪽에 놓았다. 이때 대신과 총호사가 상사(喪事)를 품달(稟達)할 때마다 왕세손이 문득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므로 차마 들을 수 없었고 일을 아뢰는 자도 다 느껴 울며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오시(午時)에 목욕례(沐浴禮)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어상(御床) 곁에 들어가 곡하며 극진히 애도하고 대신과 여러 신하가 호외(戶外)에서 모두 곡하였다. 협시(挾侍)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청사(廳事)로 나왔다. 약방(藥房)에서 좁쌀 미음을 바쳤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고 들지 않았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호내(戶內)에 평상(平床)을 설치하매 내시(內侍)가 각각 목욕할 제구를 받들고 집사(執事)가 어상 남쪽 머리를 받들었다. 평상 위에 문석(紋席)을 깔고 문석 위에 단욕(緞褥)을 깔고 단욕 위에 또 문석을 깔고 옥체(玉體) 위에 금(衾)을 덮고 금 위에 복의(復衣)를 얹었다. 왕세손이 머리를 풀고 단의(袒衣)114) 하고서 들어와 어상 북쪽에 임하고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총호사(摠護使) 신회(申晦)·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중회(趙重晦)·예방 승지(禮房承旨) 서유경(徐有慶)과 사관(史官) 2원(員)이 어상 앞에 서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화진(金華鎭)이 홀기(笏記)를 들고 영외(楹外)에 서고 대신(大臣) 이하 여러 신하가 청사 동서에 겹줄로 마주 보고 나뉘어 섰다. 내시가 향탕(香湯)을 올리니 받들어 씻었다. 목욕이 끝나고서 습례(襲禮)를 행하였다. 집사(執事)가 먼저 습상(襲床) 위에 침(枕)을 바치고 그 다음에 화옥대(畵玉帶)를 깔고 그 다음에 곤룡포(袞龍袍) 【다홍 운문 대단(多紅雲紋大緞).】 를 깔고 그 다음에 초록 금문 대단 답호(草綠金紋大緞褡𧞤) 【곧 반팔이니, 대개 소매가 없는 것이다.】 를 깔고 그 다음에 옥색 공단 장의(玉色貢緞長衣)·보라 공단 장의(甫羅貢緞長衣)를 깔고 그 다음에 운문 유청 대단 중치막(雲紋柳靑大緞中赤莫)·남공단 중치막(藍貢緞中赤莫)·자적 향직 중치막(紫的鄕織中赤莫)·초록 공단 중치막을 깔고 그 다음에 유문 백사 단삼(有紋白紗單衫)을 깔았는데, 모두 구칭(九稱)115) 이다. 또 운문 백사 단고(雲紋白紗單袴)·백공단 대고(白貢緞大袴)를 바치고 그 다음에 말(襪) 【백공단이다.】 을 바치고 그 다음에 요대(腰帶) 【남광직(藍廣織)이다.】 를 바치고 그 다음에 각대자(脚帶子) 【남광직이다.】 를 바치고 그 다음에 망건(網巾) 【흑초(黑綃)이다.】 을 바치고 그 다음에 조모(皁帽) 【모단(毛緞)이다.】 를 바치고 이어서 익선관(翼善冠) 【모단이다.】 을 씌우고 그 다음에 화(靴) 【흑모단(黑毛緞)이다.】 를 바치고 그 다음에 토수(吐手) 【남광직이다.】 를 바치고 그 다음에 악수(握手) 【모단이다.】 를 바치고 전조 급 낙치 발낭(剪爪及落齒髮囊)을 어상 위에 받들어 놓았다. 집사가 멱모(幎帽)116) 를 씌우려 하는데, 왕세손이 슬피 울며 말려서 씌우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예정(睿情)이 절박하기가 이러하시나, 습렴하는 시각이 지체되는 것도 송구하고 민망합니다. 바라건대 효사(孝思)를 조금 억제하소서."
하니,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이 멱모가 한번 씌워지면 이 세상에서는 천안(天顔)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니, 내 마음이 몹시 슬프기가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시각이 점점 늦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제(禮制)를 굽어 따르소서."
하니,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며 물러나 앉았다. 집사하는 자가 멱모를 씌웠다. 하령하기를,
"습렴할 때에 들어간 의대(衣襨)를 주서(注書)가 상세히 적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습렴한 뒤로 소렴(小殮)할 때까지는 한밤을 지내야 하니, 우선 견갑(肩胛) 위의 의대를 묶으면 염할 때에 느슨할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반함(飯含)117) 하는 절차를 장차 거행할 것인데, 예(禮)에는 반함 전에 설전(設奠)하고 위위곡(爲位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반함의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반함한 뒤에 설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습렴이 끝나고서 왕세손이 소리내어 곡하고 자리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곡하였다. 반함례(飯含禮)를 행하자, 왕세손이 부여잡고 소리내어 슬피 우니 좌우에서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는데, 또 목메임을 억제하고 동창(東窓)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창에 해가 비출 때가 죽수라(粥水剌)를 드실 때이다. 그 드시는 모습이 눈 안에 있는 듯한데, 이 뒤로는 어찌 우러러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실성(失聲)하여 통곡하니, 좌우도 다 실성하여 울음을 감추었다. 반함할 때가 되니, 왕세손이 손을 씻고 숟가락을 잡고서 쌀을 떠서 대행왕(大行王)의 입 오른쪽에 넣고 아울러 구슬[珠] 하나를 넣었으며, 왼쪽에 그렇게 하고 가운데에도 그렇게 하였다. 반함이 끝나고서 협시(挾侍)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청사로 돌아왔다.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승지(承旨)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순감군(巡監軍)과 군호(軍號)를 오늘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이런 일을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승지가 전례를 상고하여 하라."
하였다.
도감 낭청(都監郞廳)이 명정(銘旌)을 받들어 들어왔다. 우승지(右承旨) 서유경(徐有慶)이 말하기를,
"대[竹] 길이가 그대로 세울 수 없을 듯하니, 그 끝을 잘라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승지(承旨) 오재소(吳載紹)가 말하기를,
"갑진년118) 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명정이 설 곳은 승진(承塵) 【속칭 반자(盤子)라는 것이다.】 한 정간(井間)을 제거하고 세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편리한 대로 세우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승진을 제거하면 어상(御床) 위가 비어서 미안할 듯하니, 대 끝을 잘라서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환질(環絰)을 바치고 협시(挾侍)가 왕세손의 머리털을 수습하여 씌웠다.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기를 마지않으므로, 김상철이 말하기를,
"안색(顔色)이 근심스럽고 곡읍(哭泣)이 슬픈 것이 이처럼 절도를 지나치시면 장차 종사(宗社)를 어찌하시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절제하여 신민의 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내시(內侍)가 영궤(靈几)를 설치하고 설전(設奠)하였다. 대전관(代奠官) 학림군(鶴林君) 이육(李焴)이 향안(香案) 앞에 꿇어앉아 행례(行禮)하였다. 왕세손이 들어가 곡(哭)하고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하령하기를,
"조곡(朝哭)·포곡(晡哭)을 오늘은 수시로 하고 내일부터는 정축년119) 의 예(例)대로 하라."
하였다.
포곡(晡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3월 6일 정축
조곡(朝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옥당·약방에서 중궁전·혜빈궁·세손궁·빈궁에 정후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자년120)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저군(儲君)이 사위(嗣位)하는 뜻을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고하였습니다. 이제도 전례에 따라 이달 11일에 고문(告文)하고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휘령전(徽寧殿)에도 마찬가지로 거행하소서."
하고, 또 상달(上達)하기를,
"지금 사복시(司僕寺)의 첩보(牒報)를 받으니, 이번 국휼(國恤) 때 각전(各殿)의 연여(輦輿)와 교자(轎子)·어마(御馬)·장마(仗馬)·승마(乘馬) 등 제구는 백면포(白綿布)로 한 전례가 이미 있다 합니다. 이 전례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입대하였다. 하령하기를,
"어상(御床)을 자정전(資政殿)에 옮겨 모실 때에는 동가(動駕) 때의 예에 따라 시위(侍衛)·의장(儀仗)을 규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소렴(小殮) 때에는 강사포(絳紗袍)를 써야 하고 대렴(大殮) 때에는 면복(冕服)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이 예대로 써야 할 것인데, 강사포는 대행조(大行朝)에서 입으시던 어복(御服)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약방의 세 제조(提調)가 문후(問候)하였으나, 왕세손이 울고 답하지 않았다. 제조 박상덕(朴相德)이 말하기를,
"저하(邸下)의 한 몸은 위로 중궁전(中宮殿)과 혜빈궁(惠嬪宮)을 받들고 아래로 백관(百官)과 백성에 임하십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효(孝)로써 효를 손상하여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를 돌보지 않고 제도보다 지나치게 곡읍(哭泣)하십니까? 예안(睿顔)을 우러러보면 한기(汗氣)가 늘 흐르니, 이것으로 보면 기가 허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돈쭝의 인삼을 넣어 좁쌀 미음을 달여 드셔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왕세손이 울고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이처럼 지나치게 애훼(哀毁)하시므로 신들이 참으로 차마 우러러볼 수 없거니와, 날마다 애통(哀慟)하시는 가운데에 반드시 손상되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어찌 종사(宗社)의 중대한 부탁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하십니까?"
하였으나, 왕세손이 또 소리내어 울고 답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상달(上達)하기를,
"이에 감히 죽음(粥飮)을 바칩니다."
하고, 또 중궁전(中宮殿)과 혜빈궁(惠嬪宮)에 받들어 권하여 부호(扶護)하는 도리를 다하기를 청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모질게도 죽지 않고 병도 없으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올린 사위 절목(嗣位節目)의 초기(草記)를 도로 준 일 때문에, 정원(政院)과 삼사(三司)에서 목소리를 같이하여 잇달아 호소하고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여 세 번 아뢰기에 이르렀는데, 망극한 가운데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절박할 뿐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민의 억울함이 더욱이 어떠하였겠는가?
하령하기를,
"혼전(魂殿)의 처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총호사(摠護使)와 도청 낭청(都廳郞廳)이 승지(承旨)와 함께 계성당(啓星堂)을 간심(看審)하고 오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빈전(殯殿)의 은기(銀器) 세 가지 밖의 것은 다 대내(大內)에서 장만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는 상방(尙方)에서 대령하라."
하고, 또 하령하기를,
"세 가지 가운데에서 개대접(蓋大楪) 한 가지만을 대령하라."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신회(申晦)가 아뢰기를,
"홍릉(弘陵)의 우강(右崗)은 대행조(大行朝)에서 늘 칭찬하는 말씀이 있었으니, 대개 명릉(明陵)의 구례(舊例)에 따르려 하신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성의(聖意)는 오로지 우강에 두셨었다."
하였다.
하령하기를,
"여묘(廬墓) 살 곳은 초가 3간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지어 내리신 어제(御製)가 매우 많으니, 비록 짧은 글일지라도 편차(編次)하여 개간(開刊)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인산(因山) 전에 개간하기 어렵다면 한 본(本)을 베껴 내고 구본(舊本)은 퇴광(退壙)에 넣으려 한다. 이 뜻을 원상(院相)과 상의하여 아뢰라. 개간한다면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해야 할 것인데, 숙묘(肅廟)께서도 어제를 개간하신 전례가 있으니, 또한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신시(申時)에 소렴례(小殮禮)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침문(寢門) 밖에 부복(俯伏)하고 집사(執事) 박명원(朴明源)·김한기(金漢耆)·김효대(金孝大)가 소렴례를 행하였다. 하령하기를,
"모든 일은 헷갈리게 되기 쉬우니, 집사들이 각각 의대(衣襨)를 가지고 차례로 깔라."
하였다. 집사하는 자가 먼저 용문석(龍紋席)을 설치하고 그 다음에 욕(褥)을 깔고 그 다음에 교(絞)121) 를 깔고 그 다음에 유청 금선 금(柳靑金線衾)을 깔고 그 다음에 백운문 대단 고(白雲紋大緞袴)를 깔고 그 다음에 진홍 강사포(眞紅絳紗袍)를 깔고 그 다음에 옥색·자적·초록 광직 삼색 중치막(玉色紫的草綠廣織三色中赤莫)을 깔고 그 다음에 연록 운문 대단 협수(煙綠雲紋大緞狹袖)·연두색 희문단 협수(烟荳色稀紋緞狹袖)를 깔았다. 끝나고서 협시(挾侍)가 영상(靈床)을 염석(殮席)에 옮겨 모셨다. 집사하는 자가 우임(右袵)하고 빈 곳을 남광직 토수(藍廣織吐手)·백광직 행전(白廣織行纏)·다홍 대단 도포(多紅大緞道袍)·다홍 항라 조복(多紅杭羅朝服)으로 채웠다. 금(衾)을 여미려 하는데, 왕세손이 영상(靈床)을 잡고 반호(攀號)122) 하며 떨어지지 않으므로, 신하들이 교(絞)를 묶기를 청하였다. 교를 묶고 나자, 왕세손이 부복해서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고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협시(挾侍)와 집사가 어상(御床)에 도로 모시니, 왕세손이 영상 동쪽에 나아가 부복해서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고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별간역(別看役) 허규(許圭)가 어상곁에 들어가 견양(見樣)을 내었는데, 길이는 일곱 자이고 너비는 두 자 한 치이고 높이는 한 자 한 치였다. 종척(宗戚)과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갔다. 소렴할 때의 의대(衣襨)는 다홍 광직 공복(多紅廣織公服)·옥색 유문단 배자(玉色有紋緞背子)·강사포(絳紗袍)·남유문사 도포(藍有紋紗道袍)·보라 유문단 중치막(甫羅有紋緞中赤莫)·백초 횡교(白綃橫絞)·초록 유문사 답호(草綠有紋紗褡𧞤)·초록 유문단 장의(草綠有紋緞長衣)·백초 장교(白綃長絞)·다홍 광직 조복(多紅廣織朝服) 【상(裳)·폐슬(蔽膝)을 갖추었다.】 ·초록 유문 향직 중치막(草綠有紋鄕織中赤莫)·유록 금선 금(柳綠金線衾)·두록 유문단 중치막(豆綠有紋緞中赤莫)·보라 유문릉 중치막(甫羅有紋綾中赤莫)·
보라 향직 장의(甫羅鄕織長衣)·초록 광직 도포(草綠廣織道袍)·보라 유문릉 장의(甫羅有紋綾長衣)·남공단 협수의(藍貢緞狹袖衣)·남광직 도포(藍廣織道袍)·보라 유문 대단 장의(甫羅有紋大緞長衣)·보라 공단 협수의(甫羅貢緞狹袖衣)·초록 유문릉 장배자(草綠有紋綾長背子)·옥색 유문단 중치막(玉色有紋緞中赤莫)·남공단 중치막(藍貢緞中赤莫)·두록 유문단 중치막(豆綠有紋緞中赤莫)·두록 유문릉 장의(豆綠有紋綾長衣)·연남 공단 중치막(軟藍貢緞中赤莫)·옥색 유문릉 장의(玉色有紋綾長衣)·두록 무문주 장의(豆綠無紋紬長衣)·다홍 광직 도포(多紅廣織道袍)·자적 유문단 답호(紫的有紋褡𧞤)·난두색 답호(爛豆色褡𧞤)·남공단 중치막(藍貢緞中赤莫)·침향 희문단 장의(沈香稀紋緞長衣)·백운문 대단 고(白雲紋大緞袴)·연남 공단 중치막(軟藍貢緞中赤莫)·다홍 유문릉 답호(多紅有紋綾褡𧞤)·남광직 토수(藍廣織吐手)·자적 향직 중치막(紫的鄕織中赤莫)·옥색 광직 장의(玉色廣織長衣)·백광직 행전(白廣織行纏)·초록 광직 중치막(草綠廣織中赤莫)·옥색 향직 장의(玉色鄕織長衣)·옥색 광직 중치막(玉色廣織中赤莫)·남선단 도포(藍扇緞道袍)·보라 궁초 장의(甫羅宮綃長衣)·초록 광직 중치막(草綠廣織中赤莫)·초록 대단 답호(草綠大緞褡𧞤)·옥색 유문 광직 장의(玉色有紋廣織長衣)·자적 광직 장의(紫的廣織長衣)·유록 대단 답호(柳綠大緞褡𧞤)·옥색 유문사 배자(玉色有紋紗背子)·두록 광직 장의(豆綠廣織長衣)·초록 유문사 배자(草綠有紋紗背子)·보라 유문릉 장의(甫羅有紋綾長衣)·두록 유문단 배자(豆綠有紋緞背子)이었다. 소렴례가 끝나자,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포곡(晡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중궁전에 정후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3월 7일 무인
조곡(朝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중궁전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왕세손이 어상(御床)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 등이 어상 곁에 들어가 견양(見樣)을 다시 냈는데, 안 길이는 여섯 자이고 안 너비는 한 자 일곱 치 한 푼이고 높이는 한 자 여덟 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지장(誌狀)의 찬수(纂修)를 늦출 수 없으니, 당상(堂上)·낭청(郞廳)을 빨리 차출하라. 대행조(大行朝) 50년의 성덕(盛德)·지치(至治)는 이미 금궤(金櫃)·석실(石室)에 있으나, 건저(建儲) 전의 그윽이 숨은 덕(德)과 평소 집안에서 있었던 행실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면, 미처 나타나지 않은 것 중에도 사실을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 많이 있는데, 이제 내가 슬프고 황급한 가운데에 정신이 멍하여 적어 낼 수 없다. 더구나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히 인자하고 우애로우신 덕이 또한 신축년123) ·임인년124) 의 어려움을 겪던 때에 있었으니, 또한 그 만분의 일이라도 찬양하여 성덕(聖德)을 빛내야 할 것이다."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바삐 찬수하고서야 청시(請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부사(告訃使)를 들여보내기 전에 먼저 선전관(宣傳官) 한 사람을 보내어 사행(使行)이 들어간다는 뜻을 먼저 봉성(鳳城)에 알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종사(宗社)의 중대한 부탁을 줄곧 굳이 거절하셔서는 안 되므로 오늘 다시 청할 것이니,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고,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도 잇달아 아뢰었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고 답하지 않았다. 이날 정원(政院)·삼사(三司)와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목소리를 같이하여 잇달아 호소하여 다섯 번 아뢰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등이 종신(宗臣)들을 거느리고 또한 아뢰어 잇달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을 어제 교정 당상(御製校正堂上)으로,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서유방(徐有防)·이진형(李鎭衡)을 낭청(郞廳)으로 삼았다.
하령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행장(行狀)을 이제 찬수(纂修)해야 할 것인데, 《정원일기(政院日記)》 외에 기거(起居)·음식(飮食)하실 즈음과 동정(動靜)·사위(事爲)하실 동안일지라도 나타낼 만한 성덕(聖德)이 있거든 여러 신하들은 적어 내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내일 재궁(梓宮)의 봉안(奉安)은 문한(門限) 전에 하라. 밖에 배설(排設)할 처소는 숭정전(崇政殿) 안에 악차(幄次)를 설치해서 하고 낭청(郞廳) 한 사람이 수직(守直)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처음으로 입시(入侍)하는 신하들은 직배(直拜)·곡배(曲拜)하는 곳에서 부복(俯伏)하여 곡(哭)한 뒤에 입시하라. 3년 동안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포곡(晡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3월 8일 기묘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조곡(朝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신들의 성의가 천박하여 끝내 예념(睿念)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중궁전(中宮殿)께 독요(瀆擾)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기를 마지않았다. 이날 정원(政院)·삼사(三司)와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목소리를 같이하여 잇달아 호소하였으나, 왕세손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백관(百官)이 함께 합외(閤外)에 가서 중궁전에 아뢰기를,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으므로 다른 것은 돌볼 겨를이 없으니, 감히 번거롭게 독요합니다. 바라건대 종사의 중대한 부탁을 깊이 염려하시어 예청(睿聽)을 권하여 돌이키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중궁전에서 언서(諺書)로 답하기를,
"이 붕천(崩天)의 슬픔을 당하여 오늘의 계사(啓辭)를 보니 더욱이 망극하나, 종사(宗社)의 부탁이 더욱 급하다. 세손의 애훼(哀毁)가 도를 지나고 면종(勉從)하지 않는 것은 정리(情理)가 그렇기는 하겠으나, 열성조(列聖朝)를 계승하는 일은 어길 수 없으니, 대내(大內)에서 면유(面諭)하겠다."
하였다. 정원(政院)·삼사(三司)와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재삼 상달(上達)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자교(慈敎)를 우러러 받들고 군정(群情)을 굽어 따라서 마지못하여 면종한다. 망극하고 망극하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중회(趙重晦)가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칭호는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이라 해야 할 것입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전례(典禮)가 어떠한지 아직 모르겠으나, 이미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었으니, 효장묘(孝章廟)를 추숭(追崇)하기 전에는 왕대비전(王大妃殿)이라 칭호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조중회가 말하기를,
"효장묘를 추숭한 뒤에야 비로소 대왕 대비전이라 칭호해야 한다는 것은 헤아려서 품정(稟定)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일기(日記)》에서 상고하니, 인묘(仁廟)께서 등극하신 뒤에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칭호를 대왕 대비전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국가의 전례인데, 이번 칭호도 다를 것이 없을 듯합니다. 주청사(奏請使)를 오래지 않아 들여보내야 할 것인데, 대비전의 칭호를 미리 결정하고서야 거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런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한층 더 아프다. 이 슬프고 황급한 때를 당하여 전례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막중한 일을 널리 물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들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수의(收議)하여 아뢰라."
하였다. 원상(院相) 김상철이 수의한 뒤에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백관에게 수의하였더니, 다들 이제는 우선 왕대비전이라 칭하는 것이 예(禮)에 맞을 듯하다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품달(稟達)합니다마는, 마침 인묘 때의 고사(故事)를 보았으므로 가져와서 아뢰었습니다. 예교(睿敎)에 이미 정례(情禮)를 모두 갖춘다는 뜻이 있으니, 이것으로 결정하는 것은 본디 여러 신하에게 수의한 뜻에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장릉(長陵)의 고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추숭하기 전에는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은 뜻이 있으니, 우선 왕대비전이라 칭하고 추숭한 뒤에 대왕 대비전이라 고쳐 칭하여 대조(大朝)께서 가호(加號)하고 통서(統緖)를 정하신 뜻을 몸받으면, 정례가 모두 갖추어질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 억단(臆斷)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수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포곡(晡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3월 9일 경진
조곡(朝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진시(辰時)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영상(靈床)을 자정전(資政殿)에 옮겨 모셨다. 도감(都監)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이 소란상(小欄床)을 받들어 청방(廳房) 뒤 장자(障子)에 안치하고 내시(內侍)와 집사(執事)들이 영상을 소란상에 옮겨 모시고 내시가 받들어 청상문(淸商門) 밖으로 나가고 별감(別監)이 받아 모셨다. 시위(侍衛)·의장(儀仗)이 혹 앞서고 혹 뒤따랐으며, 왕세손이 영상을 따라 소리내어 울며 배위(陪衛)하고 신하들은 다 화복(華服) 차림으로 따라갔으며 그 나머지는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따라갔는데, 신하들은 다 곡하며 따랐다.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상달(上達)하기를,
"재궁(梓宮)에 옻 칠할 때에 고유(告由)하는 일이 없을 수 없는데, 여러 번 칠할 때마다 사유를 고하는 것은 참으로 번독(煩瀆)하는 것이 되니, 여러 번 칠하는 뜻을 첫번 고축(告祝) 가운데에 아울러 넣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도승지(都承旨) 서유린(徐有隣)에게 말하기를,
"어제 수의(收議)하게 한 것은 내 뜻에 어찌 까닭이 없었겠는가? 한편으로는 종통(宗統)이 크고 계서(繼序)가 중하니,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잇거나 아우로서 형을 잇더라도 할아버지와 형이 예(禰)125) 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禮)에 있어 오늘의 칭호는 이 예(例)를 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왕대비전(王大妃殿)을 받들지 않았는데 곧바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이라 칭하는 것이 미안할 뿐이 아니라, 이것은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잇는 뜻을 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예의(禮意)는 이러하더라도 이미 승통(承統)하라는 유교(遺敎)가 있었고 보면 앞으로 효장묘(孝章廟)는 절로 추숭(追崇)될 것이고 그때에 다시 의정(議定)하여도 무방할 것이니, 이것은 참으로 가호(加號)하신 성교(聖敎)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내 뜻은 이러하니, 백관(百官)에게 이 뜻을 알리고 헌의(獻議)할 때에 각각 가부의 소견을 아뢰게 하라. 어지럽고 헷갈리는 가운데에 영지(令旨)로 반포하기 어렵고 승지(承旨)가 이미 내 말을 들었으니, 이것이 비록 연화(筵話)일지라도 백관에게 알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대렴례(大殮禮)126) 를 행하였다. 1각(刻) 전에 왕세손이 여차(廬次)127) 에서 빈전(殯殿)으로 가서 부복(俯伏)하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봉조하(奉朝賀)와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차례로 배립(陪立)하였다. 집사(執事)하는 자가 대렴상(大殮床)을 어상(御床) 앞에 설치하고 상 위에 침욕(枕褥)을 깔고 그 다음에 교(絞)를 깔고 그 다음에 금(衾)을 깔고 그 다음에 면복(冕服)을 깔았다. 내시(內侍)가 어상을 대렴상에 모시고 먼저 족부(足部)를 가리고 그 다음에 두부(頭部)를 가리고 먼저 왼편을 여미고 그 다음에 오른편을 여미고 그 다음에 말(襪)을 깔고 빈 곳을 산의(散衣)128) 로 채웠다. 무릇 포설(鋪設)하고 염습(斂襲)할 때에 왕세손이 친히 살피고 가르쳐서 정제(整齊)되도록 힘썼다. 교를 묶는 일이 끝나자, 왕세손이 소리내어 곡하고 자리에 있던 신하들도 다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였다. 집사하는 자가 금(衾)으로 어상을 덮으니 왕세손이 여차로 돌아가고 신하들도 잠시 물러갔다.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대렴(大殮) 때의 의대(衣襨)는 백방사주 횡교(白方紗紬橫絞) 【셋이다.】 ·백방사주 장교(白方紗紬長絞) 【하나이다.】 ·다홍 금선 금(多紅金線衾) 【안감은 백운 문단(白雲紋緞)이다.】 ·자적 향직 욕(紫的鄕織褥) 【안감은 다홍 광직(多紅廣織)이다.】 ·다홍 운문단 곤룡포 조복(多紅雲紋緞袞龍袍朝服)·초록 운문단 답호(草綠雲紋緞褡𧞤)·보라 공단 장의(甫羅貢緞長衣)·두록 공단 장의(豆綠貢緞長衣)·옥색 공단 장의(玉色貢緞長衣)·구의(柩衣) 【다홍 광직(多紅廣織)이고 불(黻)을 그렸다.】 이었다. 신시(申時)에 재궁(梓宮)을 내렸다. 1각(刻) 전에 왕세손이 여차(廬次)에서 부축받아 빈전(殯殿)으로 가서 부복(俯伏)하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차례로 배립(陪立)하였다. 내시(內侍)가 재궁을 받들어 찬궁(欑宮)129) 안에 넣어 두었다. 집사(執事)하는 자가 엄회지(掩灰紙)를 깔고 출회(秫灰)130) 를 까는데,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출회는 경자년131) 의 전례대로 한 치 한 푼을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재[灰]를 까는 일이 끝나자 칠성판(七星板)을 안치하고 지욕(地褥)을 깔고 【《보편(補編)》과 유교(遺敎)에 따라 자리[席]를 쓰지 않았다.】 재궁 위에 두 개의 강(杠)을 가로놓았다. 내시가 어상(御床)을 받들어 가로놓은 강 위에 놓았다. 이어서 곧 재궁을 내렸다. 두 보[袱]에 싸서 봉(封)한 것을 재궁 안에 넣었다. 한 봉은 보 겉에 ‘입재궁(入梓宮)’ 석 자를 썼고, 한 봉은 ‘납우재궁내당중 친필야(納于梓宮內當中親筆也)’ 열 자를 썼는데, 모두 대행조(大行朝)의 어필(御筆)이다. 오색낭(五色囊)에 넣고 그 다음에 면(冕)을 놓고 그 다음에 석(舃)을 놓고 의대(衣襨)로 빈 곳을 채웠다.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옥규(玉圭)132) 는 퇴광(退壙) 가운데에 넣어야 한다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천금(天衾)을 덮으려 할 때에 왕세손이 재궁을 잡고 소리내어 울므로, 천금을 덮지 못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중대한 부탁을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지나치게 애훼(哀毁)하시니, 신들이 참으로 몹시 민망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또 시각이 이미 늦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예정(睿情)을 조금 억제하소서."
하니, 왕세손이 조금 물러나 소리내어 울고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천금을 덮었다. 장생전(長生殿)의 관원이 그 관속(官屬)을 거느리고 천판(天板)을 얹고 은정(銀釘)을 쳤다. 끝나고서 하령하기를,
"선(扇)·개(蓋)를 먼저 배립(排立)한 뒤에 성빈(成殯)해야 하는가?"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설전(設奠)한 뒤에 배립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낭청(郞廳) 홍원섭(洪元燮)이 상달(上達)하기를,
"설전하기 전에 배설(排設)한다 하므로 이미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 들여오라."
하였다. 내시가 찬궁의 문을 닫고 혼궁(魂宮)을 찬궁 앞에 배설하고 선·개를 좌우변에 설치하고 상탁(床卓)을 설치하였다. 하령하기를,
"영침(靈寢)의 처소를 서변(西邊)의 악내(幄內)에 옮겨 설치할 것이니, 화문석(花紋席)·지의(地衣)를 들여와 깔도록 하라."
하매, 낭청 홍원섭이 나가서 화문 등매석(花紋登每席) 2부(浮)를 받들어 들여오니, 내시가 받아서 깔았다. 하령하기를,
"자정문(資政門)은 잡인을 엄금하라.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대렴전(大殮奠)과 성빈전(成殯奠)을 아울러 설행(設行)하도록 하라."
하고, 하령하기를,
"옥등승(玉燈繩)이 매우 짧으니 다시 만들어 들이고, 제물 균죽(祭物均竹)이 약하고 또 자루가 짧으니 또한 다시 만들어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김문순(金文淳)이 말하기를,
"폐문(閉門)할 때가 이미 지났습니다마는, 이제는 다른 때와 달라서 백관(百官)이 미처 나가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이제 휘지(徽旨)로 유문(留門)할 수 없으나, 아직 그대로 유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중배설청(中排設廳)에 가서 찬선(饌膳)을 보살피고 여차(廬次)에 들어가 부복하고 곡하였다. 대전관(代奠官)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리고 잔을 올리고 그 다음에 저녁 상식(上食)을 지냈다. 끝나고서 하령하기를,
"상식도(上食圖)를 들여오라."
하매,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도식(圖式)을 상고할 만한 곳이 없다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니, 상고해 내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조석곡(朝夕哭)은 어느 때부터 있는가?"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통례원(通禮院)에 물으니, 성복(成服) 뒤부터 있다 합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외여차(外廬次)로 돌아가고 신하들도 드디어 물러나갔다.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재궁(梓宮)에 채워 넣은 의대(衣襨)를 치부(置簿)하였는데, 다홍 운문단 곤룡포(多紅雲紋緞袞龍袍) 【용금 흉배(龍金胸褙)이다.】 ·초록 유문 대단 협수(草綠有紋大緞狹袖)·침향단 전복(沈香緞戰服)·남 공단 중치막(藍貢緞中赤莫)·초록 공단 중치막(草綠貢緞中赤莫)·다홍 공단 도포(多紅貢緞道袍)·다홍 공단 도포·남공단 중치막·초록 공단 중치막·침향 유문단 전복(沈香有紋緞戰服)·초록 유문단 협수(草綠有紋緞狹袖)·자적 향직 중치막(紫的鄕織中赤莫)·초록 광직 중치막(草綠廣織中赤莫)·보라 향직 장의(甫羅鄕織長衣)·자적 공단 중치막(紫的貢緞中赤莫)·초록 공단 중치막·옥색 공단 중치막(玉色貢緞中赤莫)·옥색 광직 중치막(玉色廣織中赤莫)·초록 광직 중치막·다홍 광직 도포(多紅廣織道袍)·초록 광직 장의(草綠廣織長衣)·자적 향직 중치막·옥색 광직 중치막·초록 광직 중치막·다홍 공단 도포 【둘이다.】 ·옥색 향직 중치막(玉色鄕織中赤莫)·초록 광직 중치막·초록 유문대단 창의(草綠有紋大緞氅衣)·다홍 대단 철릭(多紅大緞帖裏)·남광직 중치막(藍廣織中赤莫)·자적 유문 향직 중치막(紫的有紋鄕織中赤莫)·초록 광직 중치막·남유문단 중치막(藍有紋緞中赤莫), 유록 운문단 단령 면복(柳綠雲紋緞團領冕服) 1습(襲), 유록 향직 장의(柳綠鄕織長衣)·초록 광직 장의·다홍 광직 도포·초록 유문단 중치막(草綠有紋緞中赤莫)·옥색 무문릉 중치막(玉色無紋綾中赤莫)·초록 공단 답호(草綠貢緞褡𧞤)·옥색릉 장의(玉色綾長衣)·보라 무문릉 장의(甫羅無紋綾長衣)·다홍 광직 도포·초록 광직 창의(草綠廣織氅衣)·보라 향직 장의·분홍 궁초 답호(粉紅宮綃褡𧞤)·유록 광직 장의(柳綠廣織長衣)·옥색 공단 중치막·남광직 중치막·초록 광직 장의·초록 궁초 장의(草綠宮綃長衣)·유록릉 중치막(柳綠綾中赤莫)·옥색릉 중치막(玉色綾中赤莫)·보라릉 장의(甫羅綾長衣)·다홍 공단 도포·분홍릉 장의(粉紅綾長衣)·초록 광직 장의·옥색릉 중치막·남릉 중치막(藍綾中赤莫)·분홍 광직 장의(粉紅廣織長衣)·남광직 중치막·옥색 광직 중치막·다홍 광직 도포·다홍 유문단 답호(多紅有紋緞褡𧞤)·남유문릉 장의(藍有紋綾長衣)·옥색 희문단 답호(玉色稀紋緞褡𧞤)·남희문단 장의(藍稀紋緞長衣)·남선주 장의(藍扇紬長衣)·회색 궁초 답호(灰色宮綃褡𧞤)·토색 유문단 장의(土色有紋緞長衣)·토색 유문단 답호(土色有紋緞褡𧞤)·남선주 장의·남선단 협수주의(藍扇緞狹袖周衣)·분홍 유문릉 답호(粉紅有紋綾褡𧞤)·남선단 장의(藍扇緞長衣)·남유문단 장의(藍有紋緞長衣)·초록 유문단 답호(草綠有紋緞褡𧞤)·연남 유문단 장의(軟藍有紋緞長衣)·분홍 유문단 답호(粉紅有紋緞褡𧞤)·토색 용문단 답호(土色龍紋緞褡𧞤)·남화화주 장의(藍禾花紬長衣)·자적 유문단 답호(紫的有紋緞褡𧞤)·남선단 장의·다홍 공단 단도포(多紅貢緞單道袍)·다홍 공단 습도포(多紅貢緞襲道袍) 【둘이다.】 ·다홍 화화주 습도포(多紅禾花紬襲道袍) 【열 넷이다.】 ·초록 화화주 답호(草綠禾花紬褡𧞤)·유록 유문단 배자(柳綠有紋緞背子)·남희문릉 장의·자적 유문단 답호·초록 유련사 장의(草綠有連紗長衣)·보라 대단 장의(甫羅大緞長衣)·남대단 답호(藍大緞褡𧞤)·초록 용문단 장의(草綠龍紋緞長衣)·남공단 장의(藍貢緞長衣)·남유문단 답호(藍有紋緞褡𧞤)·토색 선단 장의(土色扇緞長衣)·분홍 송금단 답호(粉紅宋錦緞褡𧞤)·분홍 유문단 답호·토색 유문단 답호·분홍 송금단 답호·연남 궁초 협수주의(軟藍宮綃狹袖周衣)·분홍 유문단 답호·침향색 궁초 답호(沈香色宮綃褡𧞤)·옥색 화화주 장의(玉色禾花紬長衣)·옥색 사초 중치막(玉色四綃中赤莫)·남사초 중치막(藍四綃中赤莫)·남화화주 중치막(藍禾花紬中赤莫)·옥색 화화주 중치막(玉色禾花紬中赤莫)·옥색 사초 중치막·남사초 중치막·토색 유문단 답호·남운문 대단 답호(藍雲紋大緞褡𧞤)·흑운문 대단 장의(黑雲紋大緞長衣)·유록 운문 대단 답호(柳綠雲紋大緞褡𧞤)·남유문단 답호·보라 운문단 답호(甫羅雲紋緞褡𧞤)·유록 운문단 장의(柳綠雲紋緞長衣)이었다.
포곡(晡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3월 10일 신사
조곡(朝哭) 뒤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사시(巳時)에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최복(衰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니,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춘방(春坊)의 신하들이 차례로 시립(侍立)하였다. 왕세손이 중배설청(中排設廳)에 나아가서 찬선(饌膳)을 보살피고 동협문(東挾門)으로 들어가 내시(內侍)를 시켜 진설(陳設)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서협문(西挾門)에서 나와 동변(東邊)의 판위(板位) 위에 가서 부복(俯伏)하고 관세위(盥洗位)에 가서 손을 씻고 향안(香案) 앞에 가서 세 번 향을 올리고 잔을 올리고 수저를 바로 놓고 차[茶]를 올리고서 판위 위에 가서 부복하여 곡하니,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왕세손이 곡을 그치고 외여차(外廬次)로 돌아왔다.
오시(午時)에 사왕(嗣王)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였다. 중외(中外)에 반교(頒敎)하고 대사(大赦)하였다. 예순 성철 왕비(睿順聖哲王妃) 김씨(金氏)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를 왕비(王妃)로 올렸다. 1각(一刻) 전에 도승지(都承旨) 서유린(徐有隣)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정원(政院)에서 유교(遺敎)를 받들어 먼저 빈전(殯殿) 밖에 가서 동변(東邊)의 탁자(卓子)에 받들어 놓았다. 승전색(承傳色)133) 이 대내(大內)에서 대보(大寶)를 받들어 와서 도승지에게 전하고 도승지가 꿇어앉아 받아서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에게 전하여 서변의 탁상(卓上)에 받들어 안치한 뒤에,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좌의정 신회(申晦)·우의정 이은(李溵)·좌승지(左承旨) 채홍리(蔡弘履)·우승지(右承旨) 서유경(徐有慶)·좌부승지(左副承旨) 김문순(金文淳)·우부승지(右副承旨) 오재소(吳載紹)·동부승지(同副承旨) 이양정(李養鼎)과 좌사(左史)·우사(右史)와 춘방관(春坊官)이 동계(東階)·서계(西階)에 나누어 서립(序立)하였다. 욕위(褥位)를 빈전(殯殿) 문밖에 설치하고 의식대로 판위(板位)를 동계 위에 설치하였다. 대향관(代香官)이 향안(香案) 앞에 가서 세 번 향을 올렸다. 끝나고서 김상철 등이 승언색(承言色)에게 청하여 구전(口傳)으로 사왕에게 상달(上達)하기를,
"시각이 되었으니, 면복을 갖추고 여차(廬次)에서 나오소서."
하니, 조금 뒤에 하령하기를,
"성복(成服)이 겨우 지나서 오내(五內)가 갈라질 듯하다. 내가 위로는 감히 자교(慈敎)를 어길 수 없고 아래로는 군정(群情)을 물리치지 못하여 마지못하여 복종하였으나, 이제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으려 하니 차마 못하겠다. 무너져 내리는 지극한 슬픔을 억제할 수 없으니, 경들은 잠시 강박하지 말라."
하였다. 김상철 등이 또 재삼 앙청하니, 사왕이 면복을 갖추고 여차에서 나왔다. 배시(陪侍)한 신하들이 국궁(鞠躬)하여 지영(祗迎)하였다. 좌통례(左通禮)가 사왕을 인도하여 판위 위에 나아가 사배(四拜)하였다. 끝나고서 좌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빈전 정문 밖에 있는 욕위에 가서 꿇어앉았다. 영의정 김상철이 유교를 받들고 좌의정 신회가 대보를 받들고서 앞으로 나아갔으나, 사왕이 울음을 머금고 목이 메어 차마 받지 못하였다. 김상철 등이 굳이 청하니, 사왕이 눈물을 뿌리며 억지로 받아서 도승지와 예방 승지(禮房承旨)에게 나누어 전하고 판위 위로 돌아가 예를 행하였다. 끝나고서 좌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자정문(資政門) 밖으로 나가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조금 뒤에 좌통례가 아뢰어 여(輿)를 타기를 청하니, 사왕이 여를 타고 숭정문에 나아가 여에서 내렸다. 승지(承旨)·사관(史官)과 궁관(宮官)이 좌우로 나뉘어 시립(侍立)하고 대신(大臣)과 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계하(階下)에 차례로 서서 시위(侍衛)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사왕이 목메어 울며 차마 어탑(御榻)에 오르지 못하니, 대신들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저하(邸下)의 정사(情事)가 이러하신 것을 신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오늘의 이 일은 예전부터 임금이 이미 행한 예(禮)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왕의 뜻을 생각하고 자성(慈聖)의 하교를 본받아 슬픔을 누르고 자리에 오르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이제 이곳에 오니, 가슴이 찢어지려 한다. 내가 어찌 차마 문득 이 자리에 오르겠는가?"
하고는 실성(失聲)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신하들이 다 울음을 머금고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것은 종사(宗社)의 막대한 일인데, 저하께서는 다만 사사로운 애통 때문에 어찌하여 중대한 계통(繼統)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또, 오늘은 대례(大禮)를 치르는 길일이니, 천지의 신기(神祇)와 조종(祖宗)·신민(臣民)이 모두 기대하고 축원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지극한 심정을 애써 누르고 빨리 보좌(寶座)에 오르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내 정사(情私)를 돌아보지 않고 이처럼 강박하는가?"
하고는 눈물을 흘려 마지않아서 슬픔이 전정(殿庭)에 있던 신하들을 감동시켰다. 김상철 등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간청하니, 하령하기를,
"이 자리는 선왕께서 임어(臨御)하시던 자리이다. 임어하실 때마다 내가 일찍이 어린 나이로 시좌(侍坐)하여 우러러보았거니와, 어찌 오늘 내가 이 자리를 맡을 줄 생각하였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갑자기 오를 수 있겠는가? 경들은 강박하지 말고 잠시 내 마음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이 애통하신 하교를 받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은 더욱이 억눌려 못 견디겠습니다마는, 시각이 이미 늦었고 신민이 바라고 기다리니, 예를 행하는 것은 잠시도 늦출 수 없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힘껏 청하니, 사왕이 드디어 어좌에 올랐다. 백관이 사배하고 산호(山呼)하고 또 사배를 행하였다. 끝나고서 전하(殿下)가 어좌에서 내려와 여를 타고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대단한 재앙을 내려 큰 슬픔을 당하매, 내가 보위(寶位)를 이어 뭇사람의 뜻을 좇았으나, 다만 상법(常法)에 따른 것이니, 어찌 왕좌에 앉는 것이 편안하겠는가? 열성(列聖)께서 전수하신 통서(統緖)는 거의 삼대(三代)에 견줄 융성(隆盛)한 것이니,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은 하늘에서 대명(大命)을 받고, 문모(文謨)·무열(武烈)은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끼쳤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참으로 잘 계술(繼述)하셨으니, 순임금 같은 총명이 사방에 사무쳐 만백성을 화락하게 하시고, 문장이 나타나고 사려가 심원하신 것은 삼왕(三王)의 도(道)를 아울러 행하여 참으로 팔방을 감화시키셨다. 임금은 얇은 얼음을 밟듯이 근심해야 함을 생각하여 삼가고 두려워하는 정성을 늘 힘쓰시고, 가난한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고 염려하여 인자하고 은혜로운 정치를 더욱 힘쓰셨으니, 근검(勤儉)이 국가에서 나타나게 하신 것은 참으로 일덕(一德)이 밝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효제(孝齊)가 신명(神明)에게 통하게 하신 것은 바로 백행(百行)의 근본이 된 것이다. 《춘추(春秋)》의 존왕(尊王)하는 의리를 높이 들어 황단(皇壇)에 향의(享儀)를 갖추시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극(極)에 모으는 공(功)을 힘써 만물을 교화가 미친 강역 안에 두셨으니, 아! 아름답다. 50년 동안 임어하신 세상에서 천년에 한 번 만나는 운이 비로소 돌아온 것을 보았다. 연세는 요(堯)가 순을 시켜 대신 다스리게 한 때를 지나서 백성이 모두 추대하였고, 덕(德)은 이미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에 부합하여 임금의 자리가 편안하셨다. 근래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에서 오직 만수(萬壽)를 빌었는데, 음악을 멈추는 슬픔이 문득 하루아침에 얽힐 줄 어찌 알았겠는가? 금등(金縢) 궤 안에 책축(冊祝)을 넣었으나 대신하기를 빈 보람이 없고,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명(顧命)을 내리시매 반염(攀髥)의 슬픔을 길이 품었다. 이미 찬선(饌膳)을 보살필 날이 없어졌다. 근심에 찬 상중(喪中)이므로 바로 흙덩이를 베고 거적을 깔고 있어야 할 때이니, 허둥지둥 찾아도 얻지 못한 듯한데 어찌 즉위하여 대보(大寶)를 받는 예(禮)를 편안히 치르겠는가? 지극한 아픔을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서 처음에 먹은 마음이 매우 굳기는 하였으나, 대위(大位)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되니 뭇사람의 마음을 막을 수 없는 것을 어찌하는가? 자지(慈旨)를 우러러 본받고 구의(舊儀)를 굽어 따라서, 이 해 3월 10일 신사(辛巳)에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고, 예순 성철 왕비(睿順聖哲王妃)를 왕대비(王大妃)로 높이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올렸다. 장막을 돌아보매 놀라며 슬픈 생각이 들고 채색한 자리의 가장자리에 임하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머금는다. 전에는 대로(代勞)하라는 성명(聖命)을 받고 만기(萬機)를 섭리(攝理)하는 데에 힘썼는데, 이제는 뒤를 잇는 상경(常經)을 따르고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크고 어려운 기업(基業)을 끼치신 것을 생각하면 이어받아야 할 듯하나, 즉위하여 행례(行禮)할 때를 생각하면 부탁을 저버릴세라 염려되니, 오직 기업의 계승을 잘못하는 것을 경계할 따름인데, 어찌 선왕을 길이 앙모(仰慕)하는 일을 이루 다하겠는가? 이에 열 줄의 윤음(綸音)을 내려 사유(赦宥)하는 은전(恩典)을 보인다. 아! 이제 초복(初服) 때에는 관대한 인(仁)을 생각해야 하고 내 공(功)을 이루기를 꾀하면 태평이 이어지는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노니, 모두들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휘지(李徽之)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3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대신(大臣)과 정부 서벽(政府西壁)과 관각(館閣)과 육조 참판(六曹參判)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익(翼) 【백성을 사랑하고 태평한 것을 좋아함.】 문(文) 【도덕(道德)이 널리 알려짐.】 선(宣) 【성선(聖善)이 두루 알려짐.】 무(武) 【대위(大位)를 보전하고 공(功)을 정함.】 희(熙) 【주(註)가 없다.】 경(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경계함.】 현(顯) 【행실이 중외(中外)에 나타남.】 효(孝) 【뜻을 이어 문채를 이룸.】 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이라 올리고, 전호(殿號)를 효명(孝明)이라 올리고, 능호(陵號)를 원릉(元陵)이라 올렸다.
감군(監軍)134) 의 순점(巡點)을 공제(公除)135) 때까지 잉번(仍番)하라고 명하였다.
신회(申晦)를 고부사(告訃使)로, 정창순(鄭昌順)을 부사(副使)로, 이진형(李鎭衡)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7월 27일 유시(酉時)에 원릉(元陵)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둘째 산등성이에 있다.】 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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