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인
일식이 있었다.
7월 4일 기사
공제(公除)하였다.
원상(院相)이 여러 승지를 인솔하고 아뢰기를,
"예전부터 국휼(國恤) 때 원상은 본래 성복(成服) 때까지를 한정으로 하였으니, 공제(公除)까지로 한정하여 그대로 입직(入直)하는 것은 원래 예규(例規)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미 공제가 지났으니, 마땅히 신(臣) 등을 파출(罷黜)하도록 허락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신절(申晢)이 아뢰기를,
"일전에 사위(嗣位)를 정청(庭請)할 때 좌윤(左尹) 윤취상(尹就商)은 자신이 대궐 안에 있었지만 정반(庭班)에 나가지 않았고, 대감(臺監)이 나올 것을 재촉하자 도리어 욕설을 하며 꾸짖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5일 경오
좨주(祭酒)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해 편찬한 《동현주의(東賢奏議)》를 올렸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의 《구경연의(九經衍義)》 가운데 말한 것을 아울러 기록하였습니다. 이어서 조만간에 진강(進講)하실 것을 청하였는데 《구경연의》 본서(本書)는 대행 대왕이 정밀하고 절실하다고 포양(褒揚)하셨습니다. 듣건대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두 조정에서는 대상(大喪)의 졸곡(卒哭) 전에도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합니다. 오늘날 비록 예를 갖추어 경연을 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여 이 책을 강론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7월 6일 신미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석(誌石)의 덮개 위에는 마땅히 큰 글자를 새겨야 하는데, 산릉(山陵)의 등록(謄錄)이 각기 다릅니다. 기해년034) 에는 단지 묘호(廟號)만 썼고 능(陵)을 옮길 때와 갑인년035) 봄에는 시호(諡號)를 아울러 썼으며, 가을의 국휼(國恤) 때는 묘호를 아울러 썼습니다. 경신년036) ·계해년037) ·신사년038) 에는 시호와 휘호(徽號)를 아울러 썼습니다. 지금 외방의 의논은 모두들 말하기를, ‘글자 수가 많고 획이 작으면 만멸(漫滅)을 초래하기 쉬우니 시호와 휘호를 굳이 다 쓸 것이 없으며, 단지 묘호와 시호만 쓰고 자획(字畫)을 크게 해서 간략한 것을 따랐으면 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8일 계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소대(召對)039) 때 《강목(綱目)》을 강(講)하는데, 치도(治道)의 오륭(汚隆)과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이 모두 이 책에 기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고인(古人)은 상중(喪中)에 반드시 상례(喪禮)를 읽었습니다. 《예기(禮記)》의 상례에 관계된 것들을 초출(抄出)하여 졸곡(卒哭) 이전에 진강(進講)하면, 상례(喪禮)를 행하는 도리에 유익할 듯합니다. 청컨대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영사(領事)에게 문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이번의 상복(喪服) 의절(儀節)은 누차 고쳐 일이 전도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졸곡 뒤 상하(上下)의 복색을 다 백포(白布)·백모(白帽)로 계하(啓下)040) 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 뒤 상하가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의(白衣)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 민순(閔純)이 백포와 백모를 고칠 것을 청하여 지금까지 준용해 성식(成式)을 삼아 왔으나, 이번에는 군신(群臣)이 이미 최복(縗服)을 입었으니 연제(練祭)를 지낼 때는 마땅히 그 최복을 빨아야 합니다. 최복과 시사복(視事服)은 비록 차이가 있긴 하지만, 최복을 빨지 않았는데 시사복은 곧바로 백포를 사용한다면 미안할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졸곡 뒤 상하의 시사복은 그대로 포모 의대(布帽衣帶)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내기를 기다려 백포모(白袍帽)를 착용하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국휼(國恤)의 졸곡 전에 사대부(士大夫) 집의 기제(忌祭)를 혹은 간략하게 지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은 지내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묘제(墓祭)는 간혹 폐지하는 이가 있기도 하고 삭망(朔望)의 참배(參拜)는 어떤 이는 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행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록 국가의 전례(典禮)에는 관계가 없지만, 마땅히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작정(酌定)하여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주달(奏達)한 복색에 관한 일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오늘날 상제(喪制)가 이미 결정되어 상하가 최복(縗服)을 착용하여 연제(練祭)를 지낼 때에 마땅히 빨아야 하니, 시사복(視事服)이 마땅히 다른 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국휼(國恤)의 졸곡(卒哭) 전에 사대부 집의 기제(忌祭)·묘제(墓祭)·삭망참(朔望參)에 대하여 여러 현인(賢人)들의 의논이 또한 동일하지 않은 점이 많은데,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사사로이 기록한 바에는, ‘기제와 묘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다 마땅히 행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은 또 말하기를, ‘스승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매번 국휼을 당하면 묘제는 폐지하였으나, 기제는 단헌(單獻)으로 거행하면서 「참작 변통의 마땅함을 얻었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예가(禮家)가 예절(禮節)에 대하여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니, 조정에서 굳이 일정한 제도를 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깊이 생각하여 그 마음에 편안한 것을 찾아서 하도록 허락한다면 모두 선정(先正)의 의논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제와 묘제를 지내는 자는 인(仁)에 가깝고 그것을 폐지하는 자는 의(義)에 가까울 것이니, 처리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아마도 혹시나마 실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의논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홍문관(弘文講)에서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책자(冊子)에 대해 영사(領事) 김창집(金昌集)에게 문의하였더니, 말하기를, ‘거상(居喪) 때 예서(禮書)를 읽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것이나, 《예기(禮記)》는 편질(篇秩)이 호다(浩多)하고 악기(樂器) 등과 같은 편(篇)은 또 오늘날 마땅히 강론해야 할 것이 못되니, 진강에 적합한 편목(篇目)을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상의해 초출(抄出)하도록 하여 진강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논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7월 11일 병자
이광좌(李光佐)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이광좌는 숙종(肅宗)병신년041) 처분(處分)이 있고 난 이후로 다시 조정에 나오지 않았는데, 대점(大漸)042) 했을 즈음이나 승하(昇遐)한 뒤에 한번도 정반(庭班)에 참여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7월 13일 무인
또 소대(召對) 때 진강(進講)할 책자(冊子)에 대해 여러 경연관(經筵官)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여러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주서(朱書)》는 명목(名目)이 가장 많기에 일찍이 선조(先朝) 때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취하여 매양 소대 때마다 진강하였습니다. 지금도 또한 이 책을 진강하되, 이 책을 한꺼번에 섭렵(涉獵)할 수는 없으니 매양 강할 때마다 6, 7판(板)을 넘지 않고 의리(義理)를 강구하는 것에 힘쓴다면 성학(聖學)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도록 명하였다.
7월 14일 기묘
교리(校理) 홍정필(洪廷弼)이 상소하기를,
"아! 《시경(詩經)》의 방락편(訪落篇) 등은 또한 모두 성왕(成王)이 태묘(太廟)에 가 뵙고서 지은 시(時)인데, 그 수장(首章)에 이르기를, ‘공경할지어다. 공경할지어다. 천도(天道)는 몹시 밝은지라 천명(天命)을 보전하기가 쉽지 않다.’ 하였고 그 하장(下章)에는, ‘날마다 전진하고 달마다 진취하니, 학문이 계속 밝혀져서 광명(光明)에 이름이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소대(召對)하시는 일은 또한 이미 공경하고 또 학문을 닦는다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유신(儒臣)의 상소 끝에 명종(明宗)·선조(宣祖) 두 조정의 일을 인용하였는데, 진실로 그 사이에 차별(差別)의 단서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대저 명종이 왕위(王位)를 계승할 때에는 춘추가 12세로서, 그 당시에 ‘왕이 바야흐로 나이 어리므로 학문을 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졸곡(卒哭) 전에 강연(講筵)을 열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당시에는 겨우 16세였으니, 오늘날에 끌어대어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학(聖學)은 진실로 마땅히 시종 노력해야 하지만 어린 나이의 하루가 시급한 것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겨우 공제(公除)를 지났는데 곧바로 강석(講席)을 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함을 그치지 않았는데 강독(講讀)을 병행한다는 것은 정리나 예문(禮文)으로 볼 때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효종(孝宗)이 상중(喪中)에 계실 때에 예조(禮曹)에서 저궁(儲宮)043) 의 졸곡 전 서연(書筵)의 복색(服色)에 대해 계의(啓議)하니, 하교하기를, ‘경(經)이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이니 일시의 연고로 인해 곧바로 권도(權道)를 쓸 수가 없다. 더구나 효제(孝悌)의 도리이겠는가? 나는 말세(末世)의 순전히 권도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경연에 나아가 진강하는 것을 비록 ‘순전히 권도를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또한 상례(喪禮)의 상경(常經)에는 어긋납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라 졸곡이 지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경연을 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7월 15일 경진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보건대 주자(朱子)가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상(喪) 뒤에 영종(寧宗)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군신(君臣)의 복제(服制)에 대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면서 군민(軍民) 남녀(男女)의 방상(方喪)044) 의 예(禮)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이미 도성(都城)을 떠난 뒤에는 그 문인(門人) 여정보(余正甫)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반복해 의논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연거복(燕居服)은 백견건(白絹巾)·백량삼(白涼衫)으로 하고, 선인(選人)045) ·소사신(小使臣)은 이미 부제(祔祭)를 지내고 나면 최복(衰服)을 벗는데, 조건(皂巾)·백량삼(白涼衫)·청대(靑帶)를 착용하고 3년을 마친다. 서인(庶人)·이졸(吏卒)은 홍(紅)·자(紫)를 착용하지 않고 3년을 이와 같이 한다 면체(綿蕝)046) 를 하는 것도 또한 윤당(允當)할 듯하다. 초상(初喪)에는 곧바로 마땅히 고상복(古喪服)을 만들어 임곡(臨哭)해야 하고, 따로 포복두(布幞頭)·공복(公服)·포혁대(布革帶)를 만들어 조회하는 것이 이에 예(禮)에 부합하게 된다.’ 하셨습니다.
신의 망령된 견해로는 국가(國家)에서 만일 이 의논을 적용하며 신하들이 다 최복(縗服)으로 성복(成服)을 한다면 연거복도 또한 마땅히 여기에 의거하여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제 절목(服制節目)을 받아 보니, 선대왕(先大王)의 유교(遺敎)를 받들고 주자(朱子)의 의논을 준용해 천고(千古)의 비루한 풍습을 말끔히 씻었으나, 유독 연거복 한 사항만은 끝내 거론한 바가 없습니다. 곡반(哭班)에서 성복(成服)을 하고, 물러나 돌아온 때는 이미 그대로 최질(縗絰)을 착용하지 못하게 되니, 연거복을 입고 출입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미 어떤 방식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각자 행하였습니다. 신의 견해로는 ‘다른 대(帶)를 처음으로 만들어 쓰는 것보다 이에는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드디어 백생포대(白生布帶)를 만들어 착용하였습니다. 뒤에 들으니 조사(朝士)·대부(大夫)로부터 유생(儒生)·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연거(燕居)하거나 출입할 때 으레 마대(麻帶)를 착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 포대를 착용했던 이들도 가끔 또한 마대로 바꾸어 착용하였고, 또 신이 포대를 착용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 합니다. 대개 신이 만일 주자(朱子)를 믿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마대를 착용하였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어 생각해 보니 이 일은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다면 어지럽고 뒤죽박죽이 되어 하나로 귀착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주자(朱子)의 여러 설(說)을 참고하여 연거 때의 복색을 마련해 반포하도록 명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환히 알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종전에는 국휼 때 신하로서 부모(父母)의 상중(喪中)에 있는 자는 그 복(服)과 평상시 착용하는 옷에 대하여 논의가 하나로 귀착되지 않았습니다. 사가(私家)의 크고 작은 제사(祭祀)에 대해서도 선현(先賢)이 논한 바가 또한 다른 것이 많았는데, 지난 신사년047) 무렵에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로 인해 사가의 우제(虞祭)·졸곡(卒哭)·연제(練祭)·상제(祥祭)·탈복(脫服) 등의 일에 대하여 조정에서 이미 정식(定式)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일체 강정(講定)하여 지휘(指揮)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대신(大臣)과 예(禮)을 아는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논한 복제(服制)가 3건(件) 있는데, 하나는 바로 고상복(古喪服)으로 지금의 최복(衰服)과 같고, 하나는 바로 포복 두건(布幞頭巾)으로 지금의 시사복(視事服)과 같고, 하나는 바로 백견건(白絹巾)·백대(白帶)로 이른바 연거복(燕居服)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련할 때는 연복(燕服) 일절(一節)에 대해서는 애당초 거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신(朝紳)과 사서(士庶)들이 모두 그대로 마대(麻帶)를 착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복은 본래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흑최(黑縗)는 어찌 주자(朱子)가 착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예가(禮家)에서 일찍이 그것을 착용한 경우가 있지 않으며, 비단 백견건(白絹巾)을 준행(遵行)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마대는 백대에 비하여 경중이 없지 않으나 가벼운 쪽을 버리고 무거운 쪽으로 복(服)을 입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상중에 있는 자의 경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입었으면 감히 사사로이 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으나, 상고(上古) 시대의 의리(義理)로 은혜를 단절한 제도를 갑자기 다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복(成服)하는 날 한결같이 직품(職品) 때문에 준례대로 최복(衰服)을 받게 되니, 삭망(朔望)·인장(靷葬)·연상(練祥) 등의 날 국상(國喪)에 나아갈 때는 그 복(服)을 착용하고, 가정에 있거나 사사로이 출입할 때에는 사사로운 상복을 입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말한 백견건(白絹巾)·백량삼(白涼衫)·백대(白帶)는 그 당시의 상복 제도가 다 복고(復古)되지 않은 데 연유한 듯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상례(喪禮)가 대체로 결정된 이후에는, 조사(朝士)로서 최복(衰服)을 입는 이는 연거(燕居)때 비록 혹시 변경하여 백대를 착용하더라도 최질(縗絰)은 그대로 있지만, 유생은 최복을 입더라도 단지 마대(麻帶) 일절(一節)이 있을 뿐이니, 출입할 때나 연거할 때나 다 백대를 착용한다면, 장차 어디에 그 최복을 입는 제도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상중에 있는 사람의 성복(成服)과 평소 착용하는 옷에 대해서는 수상(首相)의 의논이 짐작하여 마땅함을 얻은 듯합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정제두(鄭齊斗)는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글에 있는 ‘백포·백대 및 포공복(布公服)·포혁대(布革帶)에 대해서는 여러 설(說)이 이와 같으며, 기해년048) ·갑인년049) 에도 연거 때 마대(麻帶)를 착용한다는 말이 없었고, 마침내 그대로 포대(布帶)를 착용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도헌(都憲)050) 이 소진(疏陳)한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유사(儒士) 이하는 모두 포립(布笠)·마대로 성복했고, 달리 연복(燕服)을 입는 절차가 없는데, 마대를 항상 착용하고 있다면 마침내 연거 때 착용하는 포대와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의 공복(公服) 또한 포모(布帽)·포과대(布裹帶)를 착용하고 있으니, 이것도 역시 주자(朱子)의 설(說)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이제 연거 때 착용하는 포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조정에서 착용하는 포과대는 유독 유생(儒生)·서인(庶人) 등의 마대와 도리어 거꾸로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융통성 있게 제도를 정해야만 대소(大小)가 서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인(喪人)의 성복(成服)의 경우 종전에는 전함(前銜)이나 사인(士人)은 최마(衰麻)가 없었기 때문에 상복에 대해 의심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법령으로 최마를 착용하도록 했으니, 그 성복할 때의 최마가 어찌 여러 사람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 평상시 착용하는 복(服)은, 고례(古禮)에는 대부(大夫)나 사(士)가 관작(官爵)에 있어서는 변경이 없었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말한, ‘임금의 상(喪)을 당하여 몸에 상복을 입었으면 감히 사사로운 상복을 입지 않으며, 그 빈장(殯葬)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임금이 계신 곳에 가야 한다.’ 한 것은 이런 때문입니다. 후세에는 공경(公卿)·대부(大夫)가 만일 어느 날 친상(親喪)이 나게되면 곧바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공가(公家)에 나가지 않으므로 사인(士人)과 동일하게 되니, 이 예는 다시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상중에 있게 되면 이미 그 직책을 떠나 가정에 있게 되니, 그 가정에 있어서의 사복(私服)은 사인(士人)과 동일할 듯합니다. 오늘날 전함(前銜)과 사서(士庶)들이 비록 최복(衰服)을 입는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증자문편에 기술한 관작에 있는 자와는 같지 않습니다. 만일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다 옛적 대부(大夫)의 관작에 있는 예(禮)와 같이 하여 감히 사사로운 복(服)을 입지 못하도록 한다면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의 그 예(禮)가 어찌 이와 같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영상(領相)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세자궁(世子宮)과 빈궁(嬪宮)의 시탄(柴炭)을 감(減)하였다. 공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거룩하신 덕은 오직 절검을 숭상하고 용도를 절약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모름지기 더 힘쓰신 연후에야 도탄(塗炭)에 빠진 이 백성들을 구제 할 수 있고,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진실로 부합될 것입니다. 선혜청(宣惠廳)의 공물(貢物) 가운데 이른바 기인(其人)이라는 것은 바로 각처(各處)의 제향(祭享)과 궐내(闕內) 각전(各殿)과 여러 상사(上司)에 진상(進上)하는 공물을 맡은 자입니다. 갑인년051) 선왕께서 즉위하신 뒤 세자궁과 빈궁에 진상하는 땔나무와 숯을 폐지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령하였던 것은 대개 그 당시에 대궐 안에서의 용도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이후에도 세자궁과 빈궁의 땔나무와 숯을 그대로 진상하니, 전후로 통틀어 진상한 대가(代價)가 많은 경우는 쌀 1만 1천 석(石)에 이르렀습니다. 그 형세로 보아 반드시 장차 백성에게 부세를 더 거두게 될 것이니, 세자궁과 빈궁에 진상하는 것은 비단 땔나무와 숯뿐만이 아니고 어떠한 물품을 물론하고 마땅히 수량의 전부를 감제(減除)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감제하도록 명하였다.
7월 18일 계미
예조에서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에 상하(上下)의 시사복(視事服)에 대해 대신(大臣)이 진달(陳達)한 바로 인하여 의견을 수렴해 판하(判下)052) 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개부표(改付標)053) 하여 들여보내야 할 것이나, 《오례의》에 왕비(王妃)·왕세자빈(王世子嬪)·친자처(親子妻)·여관(女官)과 문무 백관처(文武百官妻)의 복색도 또한 졸곡 후에는 다 백색의(白色衣)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상하(上項)의 복색(服色)을 따라서 생포(生布)로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액속(掖屬)과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前銜)과 성중관(成衆官)·녹사(錄事)·서리(書吏)·생진(生進)·생도(生徒)에 이르러서도 졸곡 후에 백의(白衣)를 착용하는 것을 또한 연제(練祭) 이후에 착용하도록 고쳤습니다. 액속 이하로부터 조례(皁隷)·나장(邏將)들에 이르기까지 졸곡 이후에 흑포(黑布)·흑대(黑帶)·오모(烏帽)·오대(烏帶)·흑평정 두건(黑平頂頭巾)을 착용하여 《오례의》의 제도를 준용하면 선조조(宣祖朝)의 백의 관대(白衣冠帶)로 제도를 바꾼 의미와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절(禮節)을 아주 바로잡는 시기를 당하여 종전의 인습에 따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백색으로 바꾸었습니다. 갑사(甲士)·정병(正兵)·서인(庶人)의 복(服) 및 백관 복제(百官服制) 별단(別單) 중의 장조(杖條)는 의견을 수렴해 판하하신 것에 따라 개부표하여 들여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李光佐)를 파직시켰다. 처음에 정언(正言) 서종섭(徐宗燮)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지난번 청정(聽政)하신 이후로부터 다만 연묵(淵默)을 위주로 하시고 사단(事端)의 의문스럽거나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번번이 문난(問難)하지 않으십니다. 무릇 진백(陳白)하는 것이 있으면 단지 ‘알았노라.’, ‘유의하겠노라.’ 할 뿐이며, 말씀을 하여 발언(發言)하실 즈음에 신중하심이 너무 지나쳐서 마치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처럼 하시니, 가까이서 모시는 신료(臣僚)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근심이 흔히 있습니다. 신은 덕음(德音)을 환발(渙發)하시고 의문이 있으시면 반드시 질문하시어 명백하게 분부를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전(前) 참판(參判) 이광좌는 작년 이래로 대행 대왕의 병환이 위독하여 문후를 살피는 반열이 연이어 마련되었는데도, 몸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한 번도 진참(進參)하지 않았고, 시약청(侍藥廳)이 설치되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정세(情勢)로 핑계를 대기는 하였으나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에 돈장(敦匠)054) 의 분부에 나와 응하였습니다. 출처(出處)의 의리가 근거가 없으니, 책벌(責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매우 가탄(嘉歎)하는 바이다.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광좌는 출처의 의리가 근거가 없으니, 특별히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구(趙泰耉)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에서 음양(陰陽)·굴신(屈伸)의 이치와 군자(君子)·소인(小人)의 진퇴(進退)의 기미를 밝혀서 후세를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괘(泰卦)의 육사(六四)에 말하기를, ‘훌쩍 날아 부(富)하지 않아도 그 이웃으로써 따르고, 계고(戒告)하지 않아도 성의로 합한다.’고 한 것이니, 이는 삼양(三陽)이 이미 중(中)에 지나니 삼음(三陰)이 훌쩍 날아옴을 말한 것입니다. 숙종께서 나라를 다스린 지 40년, 승평(升平)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신축년055) ·임인년056) 의 큰 화(禍)가 장차 일어나려 할 무렵에 조태구가 들어와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니, 또한 《주역》에 말한 ‘훌쩍 날아 부(富)하지 않아도 그 이웃으로써 하는’ 형상인 것입니다. 삼양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삼음이 장차 아래에 회복하려 하니, 어찌 천도(天道)가 아니겠습니까?
예조에서 아뢰기를,
"국상(國喪)이 나서 성복(成服)한 뒤에 새로 직명(職名)을 제수한 자들에 대하여 당시에 추복(追服)의 여부를 정탈(定奪)한 일이 없었습니다. 의논하는 이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서사인(士庶人)은 포립(布笠)과 마대(麻帶)로 상복(喪服)을 입었으니 벼슬을 제수한 뒤에 비록 최복을 입더라도 실로 추복하는 혐의가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예종조(睿宗朝)에, 「상복(喪服)을 추가로 제조할 수 없으니 새로 직명을 제수한 자는 소의(素衣) 차림으로 취사(就仕)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주자(朱子)는 상복을 고쳐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례(古禮)에는 또 「상복을 보완하지 않는다.」는 조문이 있으니, 이미 성복한 뒤에는 계속해서 추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청컨대 대신(大臣)과 예(禮)를 아는 신하에게 의논했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사서인(士庶人)은 이미 포의(布衣)와 마대(麻帶)를 착용하였으니 실은 참최(斬衰)와 다름이 없습니다. 새로 입사(入仕)한 자는 따라서 최복을 입더라도 또한 추복(追服)의 혐의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미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도 마땅히 입사(入仕)라는 자가 있을 것이니, 이들이 똑같이 최복을 입는다면, 아마 너무 늦어질 듯합니다. 만일 연제의 전후를 가지고 구분을 둔다면 또한 서로 뒤섞일 것 같습니다. 새로 입사(入仕)한 사람은 비록 최복을 입지 않더라도 그것이 대단한 흠결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고, 사직(司直) 정제두(鄭齊斗)는 의논하기를,
"국휼(國恤)의 졸곡(卒哭) 전에 전함(前銜)의 복직(復職)된 자와 처음 벼슬을 얻어 초계(初階)인 자가 다 백포(白布)로써 모(帽)와 공복(公服)을 만들고 숙마(熟麻)로 대(帶)를 만들었습니다. 대개 무릇 상복(喪服)을 재차 제조할 수 없다는 것은 애초에 최마(衰麻)를 하지 않은 자가 상황이 상(喪)을 들을 때보다 다르게 되면 추복(追服)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까? 모두 이미 최마를 착용한 까닭입니다. 다만 사인(士人)은 정복(正服)의 관상(冠裳)이 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관상을 재차 제조하기 어려움은 달관(達官)의 추복(追服)할 수 없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득이 구복(舊服)을 그대로 입고 단지 상용의 공복만 추가하면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영상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조중우(趙重愚)를 삼수부(三水府)로 유배(流配)시켰다. 조중우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덕은 효도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명훈(明訓)이고, 어머니가 자식으로 인하여 존귀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재자(主宰者)가 되시었는데, 전하를 탄생하신 사친(私親)께서는 아직 명호(名號)조차 없이 적막한 시골에 사우(祠宇)는 초라하고 한 덩이 무덤에 묵은 풀만 황량합니다. 문무(文武) 조신(朝臣)은 관직이 2품만 되어도 오히려 증직(贈職)하는 영광스런 은전(恩典)이 있는데, 전하께서 당당하신 천승(千乘)의 존귀하신 몸으로서 유독 낳고 기르신 사친에게 작호(爵號)를 추가함이 없대서야 어떻게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지극한 정리를 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기억하건대 지난날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전하의 심정을 살피시어 특별히 천장(遷葬)을 허락하셨고, 전하의 뜻을 이해하시어 다시 망곡(望哭)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선대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은 반드시 오늘의 거행하는 일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 책을 보건대 전후의 찬집(纂輯)에 모두 숙종의 재가를 받았는데도 ‘희빈(禧嬪)’이라는 두 글자를 일찍이 삭제해 버리지 않았으니, 또한 어찌 선대왕의 은미한 뜻이 그 사이에 존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시어 조속히 명호(名號)를 결정하도록 하여 지극한 정리를 펴시고 나라의 체모를 높이소서."
하였다. 행 도승지(行都承旨) 홍치중(洪致中)·좌승지 권엽(權熀)·우승지 한중희(韓重熙)·우부승지 홍계적(洪啓迪)·동부승지 윤양래(尹陽來) 등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조중우가 와서 상소 한 통을 올렸습니다. 신 등이 그 소본(疏本)을 보니, 위로는 자성(慈聖)의 복선(復膳)의 청을 진달하고 아래 사항은 ‘어머니는 자식으로 인해 존귀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히 말하기를, ‘선대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반드시 오늘날 거행하는 일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의 은미한 뜻이 그 중간에 있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차마 입에서 발설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선대왕의 당초 처분(處分)이 있고 난 이후에 전후의 하교가 엄하고 맺고 끊은 듯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날 병술년057) 비망기(備忘記)에는 이르기를,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서계(書啓) 가운데 감히 작호(爵號)를 썼으니, 일의 해괴스러움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시면서 이내 파직(罷職)을 명하시었습니다. 또 정유년058)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함에 있어서 감히 작호를 쓴 것을 가지고 또한 ‘몹시 절통하다.’고 하교하셨었습니다. 선대왕의 뜻이 있는 바는 분명하기가 일월(日月)과 같으며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무릇 우리 신하와 백성들은 누가 감히 거기에 비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재궁(梓宮)이 빈소(殯所)에 있고 선침(仙寢)에 냉기도 들지 않은 시기에 이미 이와 같이 음사(陰邪)한 무리들이 있어 성상의 총명을 현혹(眩惑)시키고 짐짓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려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여 선대왕의 교지(敎旨)를 속이고 있으니, 마음을 쓰는 바가 음흉하고 사특합니다. 만일 이런 무리들이 참으로 선대왕의 교지를 추념(追念)하고 선왕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속이는 말로 제멋대로 감히 모멸(侮蔑)할 수 없는 곳에 모멸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귀역(鬼蜮)059) 의 무리를 만일 엄하게 징계하고 엄격히 배척하지 않는다면 다만 이 다음에 제방(隄防)이 점차 해이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성상의 선대왕의 뜻을 준행하여 고침이 없는 도리에도 부족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놀라움과 통탄스러움이 몹시 지극한 나머지 감히 준례에 따라 봉입(捧入)하지 못하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서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제 조중우의 소본을 보니, 일편(一篇)의 주된 내용은 오로지 조속히 명호를 결정하라는 데 있으며, 그 아래의 사항은 ‘어머니가 자식으로 인하여 존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감히 말하기를, ‘선대왕의 오르내리시는 혼령이 반드시 오늘날 거행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또 감히 말하기를, ‘선대왕의 은미한 뜻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가 차마 입에서 낼 수 있는 소리이며 또한 처분(處分)의 뜻에도 위배됨이 있다. 더구나 지금은 선침(仙寢)에 냉기도 들지 않은 시기이니, 어찌 감히 기만하는 말을 이와 같이 멋대로 지껄일 수 있겠는가? 엄격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중우를 변방의 먼 곳으로 정배(定配)토록 하라."
하였다.
조중우(趙重遇)를 하옥(下獄)시켰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아뢰기를,
"조중우의 상소는 자성(慈聖)의 복선(復膳)의 청을 거짓으로 핑계한 것이며 일편(一篇)의 정신(精神)은 전적으로 아래 사항에 있습니다. 하나는 ‘춘추 대의(春秋大義)’라 하였고, 하나는 ‘선왕(銑王)의 은미한 뜻’이라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가 자식으로 인하여 존귀하게 된다.’는 것은 《춘추공양전》에 나오는 말인데, 호안국(胡安國)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극단적으로 논하였고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설명도 또한 몹시 엄정합니다. 선왕의 은미한 뜻이라든가 오늘날의 거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등의 말에 있어서는 더욱 절통(絶痛)하게 여겨집니다. 앞에는 박만정(朴萬鼎)·박정(朴涏)에게 비답(批答)한 것이 있고 뒤에는 어사(御史)를 특별히 파직시킨 것과 함일해(咸一海)을 엄하게 배척하신 하교가 있습니다. 처분(處分)이 엄정하여 견고하기가 금석(金石) 같고 지의(旨意)가 환히 드러나 밝기가 일성(日星) 같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속이는 말을 제멋대로 입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일종의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몰래 서로 췌마(揣摩)060) 하고 기회를 엿보아 일어나 머뭇거리며 이에 선침(仙寢)에 냉기도 들지 않은 시기에 차마 속이는 말로써 감히 모멸(侮蔑)할 수 없는 곳에 감히 모멸하여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따라 변경함이 없는 효도를 더럽히고자 하고 사당(邪黨)이 임금을 현혹하여 짐짓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려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상의 밝으신 마음이 간교한 정상을 통촉하심으로 인해서 다만 변방으로 내쫓으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다만 이 음흉하고 사특한 상소는 결코 쓸모가 없는 조중우 한 사람이 혼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조중우를 엄한 형벌로 구문(究問)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다가 기축일(己丑日)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7월 27일 임진
형조(刑曹)에서 조중우를 문초하니, 조중우가 공초(供招)하기를,
"이달 보름 무렵에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문을 지어서 이현(泥峴)의 본가(本家)에 와 있었습니다. 사인(士人) 박경수(朴景洙)가 마침 방문하였기에 초고(草稿)를 보였더니, 박경수가 말하기를, ‘이 상소는 매우 좋은 뜻이나 이 초고는 쓸 수가 없으니, 내가 마땅히 고쳐서 지어야만 되겠다.’ 하였습니다. 전후에 걸쳐 오고가기를 무릇 세 차례 하였는데, 박경수가 말하기를, ‘모일(某日)에는 상소를 올릴 수 있다.’ 하였습니다. 처음에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에 매부(妹夫) 이수점(李受漸)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시골에 있는 사람은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는데,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문초하니, 공초하기를,
"당초에 사주한 것은 주자동(注子洞)에 사는 윤천운(尹天運)으로서 일찍이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진소(陳疏)를 하려고 한다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하였습니다. 답하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다.’ 하였더니, 그 뒤에 박경수가 와서 진소(陳疏)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필시 윤천운이 전하여 알려준 것일 터인데도 처음에는 동정(同情)하는 일이 없었으니, 함부로 남의 말을 듣고 이같은 망측(罔測)한 일에 빠졌던 것입니다. 만일 박경수와 면질(面質)시킨다면 모의(謀議)한 사람을 스스로 가리켜 고발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박경수 등을 붙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경수가 자백하기를,
"이달 보름 무렵에 이수점(李受漸)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처남(妻娚)인 용인(龍仁) 사는 조중우가 장씨(張氏)의 작호(爵號)를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상소를 하려고 하는데 모르긴 하지만 어떻겠는가?’ 하길래, ‘상소의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은 그만두더라도 국장(國葬)도 지내기 전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적합한 시기가 아니니 그대가 만류하도록 하라.’라고 대답했더니, 이수점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습니다. 며칠 지난 뒤 조중우가 만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장씨(張氏)는 바로 우리 성상(聖上)을 낳아서 기르신 사친(私親)이신데, 성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 서인(庶人)의 지위에 있으므로, 내가 상소를 하려고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초야(草野)에 묻혀 있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개탄스럽게 생각하는데, 그대처럼 번화한 서울에 사는 유식한 선비가 어찌하여 이런 나약한 의논을 펴면서 만류하는가?’ 하고, 이내 옷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지은 상소문인데, 청컨대 상세히 보고서 뺄 것은 빼고 다듬을 곳은 다듬어 주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나는 문사(文士)가 아니니, 어찌 손을 댈 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으며, ‘어느 날 올릴 수 있다.’는 일은 애당초 발설한 적이 없습니다. 과연 모의(謀議)한 곳이 있다면 어찌 오늘의 화(禍)를 미리 알아차리고서 조중우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윤천운이 공초하기를,
"이수점이 이현(泥峴)의 조중우의 집에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일전에 가서 만났더니, 이수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의 처남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뒤에 또 이수점의 집에 가서 만났을 때 조중우가 과연 찾아왔으나 그 집은 손님을 접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문간에서 읍(揖)만 하고 말았을 뿐이며, 원래 상소에 대해서는 의논한 일이 없었습니다. 박경수는 어렸을 때 얼굴을 알고 지내는 처지였으나 상(喪)을 당하여 조문(弔問)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절교(絶交)하였습니다.……."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박경수는 죄가 조중우와 동일하니, 청컨대 똑같이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시키고, 윤천운과 이수점은 감등(減等)하여 정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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