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8. 11:20
반응형

9월 1일 을축

승지 송성명(宋成明)을 파직시켰다. 정언(正言) 김용경(金龍慶)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침정(沈靜)하고 관인(寬仁)하시어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우시지만, 이미 그 덕이 있으면 반드시 편중되는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침정한 경우는 간혹 분효(分曉)한 면이 결여되고 관인한 경우는 또 명단(明斷)이 부족하기에 종핵(綜核)·분발(奮發)하는 효험을 보지 못하고 점차 인순(因循)·위미(委靡)하는 습관을 형성해 갑니다. 인접(引接)하실 즈음에 여러 신하들이 진언(進言)을 하되 전하께서는 관심 있게 듣지 않는 듯하다가, 필경에 발락(發落)067)  하시는 것은 단지 ‘의윤(依允)’이라는 두 글자 이외에는 달리 문난(問難)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전하께서는 오늘의 신하들에 대해서 족히 더불어 정치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이치에 맞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머뭇거리고 위축되시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계속하신다면 삼가 품령(稟令)이 있지 않아서 국사(國事)가 장차 날로 잘못되어질까 두렵습니다. 신은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사오니 이제부터는 생각을 바꾸시어 일을 논의할 즈음에 자세히 묻고 상세히 분변해서 시비(是非)를 분간하고 가부(可否)를 논의하여 도유 우불(都兪吁咈)068)  의 좋은 일이 있고 우유(優游)069)  ·총좌(叢脞)070)  의 폐단이 없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송성명(宋成明)의 상소는 오로지 주워 모으기를 일삼아서 일편(一篇)의 정신(精神)이 모두 전지(銓地)를 배격하고 묘당(廟堂)을 뒤흔들려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조정을 텅 비게 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허물을 본받고 싶지는 않으나, 사령(辭令)과 시조(施措)의 광보(匡輔)할 수 있는 것을 대신(大臣)이 일에 따라서 진백(陳白)하는 것은 직무입니다. 이제 이에 주워 모아 죄안(罪案)을 만들어 망측(罔測)한 곳으로 몰아넣으니, 그 마음씀이 위험하고 두렵습니다. 송성명이 괴격(乖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처하면서도 그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당론(黨論)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병들게 함이 심한 편입니다. 마땅히 견벌(譴罰)을 내려서 남을 모함하는 것을 징계하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송성명의 상소는 몹시 잘못되었으니, 파직시키라."
하였다.

 

9월 2일 병인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이기중(李箕重) 등이 상소하여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071)  의 사우(祠宇)를 성균관 곁에 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서 숙종 9년(1683)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그럭저럭 거행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기중 등이 상소하여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9월 7일 신미

태학(太學)의 재생(齋生)072)  들이 권당(捲堂)073)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황귀하(黃龜河)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으니, 장의(掌議) 윤지술(尹志述)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적어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어제 세 사람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진청(陳請)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문(誌文) 가운데 있는 소소하고 경미한 내용도 이미 소론(疏論)을 하였으니, 중차대한 것에 대하여 감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사기(士氣)를 격려하신 거룩한 뜻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사년074)  ·병신년075)  의 일의 미진한 것들을 고치기를 정하자는 뜻으로 발론(發論)을 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외방(外方)의 사우(士友)들이 한 사람도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이미 몹시 놀랐는데, 동재(東齋)·서재(西齋), 사학(四學)의 재생(齋生)들도 대부분 불참하였습니다. 상재생(上齋生)들에 있어서는 대부분 피할 길을 도모하여 겨우 재(齋)에 남아 있는 7, 8명과 간신히 의사(議事)의 모임을 성립하였습니다. 부득이 거재생(居齋生) 안택인(安宅仁)을 소두(疏頭)로 삼았더니, 또 근거할 바가 없다는 설로써 혐의를 내세우며 도주하였습니다. 신이 재임(齋任)으로서 이 일을 주장하였으되 언행(言行)이 존중을 받지 못하여 이러한 낭패(狼狽)를 초래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당(堂)에 들어가 스스로 금신(衿紳)076)  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마음속에 담아 두고서 진달하려 했던 바를 거의 이 기회를 통해 진달하여 천하 후세로 하여금 한 가닥의 죽지 않은 공의(公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그것도 또한 불행중 다행일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재위하신 지 40여 년 동안 인애(仁愛)로 백성을 감싸는 것이 하늘과 같아 나약하던 나라의 형세로 하여금 태산(泰山)처럼 안정되게 하였으며, 함닉(陷溺)되었던 인심(人心)이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방(四方)의 생명(生命)을 간직한 무리들이 선대왕(先大王)이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거룩한 덕과 지극한 착함을 잊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아! 일월(日月)은 때가 있어 빈소(殯所)를 장차 계빈(啓殯)하려 합니다. 곡부(曲阜)의 신[履]077)  을 이미 남겼고 창잠(昌歜)078)  의 좋아하심을 따를 수가 없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만분의 일이나마 스스로 그 마음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평일의 뜻과 산업을 발휘(發揮)하여 그것을 통해서 만세(萬世)에 자손을 위한 계책을 전하고 온 나라의 부모(父母)를 잃은 듯한 슬픔을 위로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성신(誠信)의 도리에 유감이 없으신 바도 또한 오직 이에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여기에 조금이라도 미진함이 있다면 전하께서 무엇을 통해서 무궁한 효사(孝思)를 펼치겠으며, 신자(臣子)가 어찌 춘추(春秋)의 ‘신절(臣節)을 지키지 않는 처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 선대왕의 모훈(謨訓)과 정교(政敎)는 모두 규칙(規則)에 부합되고 전후의 사업은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훨씬 나으신데, 신사년·병신년의 일은 그 변사(變事)에 대처함이 도리에 합당한 것과 도(道)를 보위함의 정성을 다한 점이 실로 천만고(千萬古)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삼가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지어올린 묘지명(墓誌銘)을 보니,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빼버리고 쓰지 않았고 병신년의 일에 대해선 약간 그 말을 부드럽게 하여 시비(是非)로 서로 혼동되게 하였습니다. 신은 놀랍고 슬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저 신사년의 변(變)은 어둡고 은밀하여 예측하기 어렸웠는데, 우리 선대왕께서 기미를 살피는 데 밝고 환란을 방지하는 데 신중하여 쾌히 용단을 내리고 밝게 전장(典章)을 보여서 궁위(宮闈)를 엄숙하게 하고 백성들의 울분을 풀도록 하였습니다. 그 처분(處分)의 엄정하심과 지려(志慮)의 심원(深遠)하심은 간책(簡冊)에서 찾아보아도 보기가 드뭅니다. 그리고 병신년의 일은 변(變)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나서 백성의 윤리가 날로 무너져 그 유폐(流弊)는 장차 부자(父子)가 각박해지고 군신(君臣)이 단절되는 데 이르렀는데, 다행히 위로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시비(是非)를 환히 분변하심을 힘입어 이미 윤증(尹拯)의 스승을 배반한 죄를 밝혀서 바로 잡았고, 이어서 또 우리 전하께서 혹시라도 동요됨이 없도록 힘써 경계하였습니다. 그 인심(人心)을 착하게 하고 선비의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신 공로는 참으로 천지(天地)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을 만합니다. 이것이 사문(斯文)079)  이 길이 보전하여 실추(失墜)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아! 선대왕(先大王)이 이미 이러한 거룩한 덕의 일이 있는데도 이제 다시 뵈올 수 없으니, 선대왕의 신하된 이가 누군들 눈물을 삼키고 추모하며 다 내세(來世)에 표장(表章)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이명이 머리가 하얀 늙은 나이에도 오히려 또한 이해(利害)를 돌아보고 기교(機巧)를 다 허비하여 선왕의 제우(除愚)의 은혜를 망각하고 뒷날 참적(讒賊)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공론(公論)이 떠들고 일어나 끝내 죄에서 도망할 수 없음에 미쳐서는 감히 또 ‘휘친(諱親)’이라는 말을 의리(義理)로 삼아 마치 전하께서 참으로 숨길 만한 어버이가 계시고 신하들이 스스로 마땅히 숨겨야 될 의리가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왕께서 이미 조종(祖宗)이 부탁(付託)하신 무거운 책임을 받아 전하께 차례를 전하시고, 전하께서 이어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사직(社稷)과 생민(生民)의 주재(主宰)가 되셨으니, 전하께서 감히 다시 사친(私親)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의리가 지극히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사년의 처분(處分)은 바로 선대왕께서 국가 만세를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후의 장주(章奏)에 대한 비답에 성지(聖志)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서 밝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감히 다시 다른 뜻으로써 마음속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은 도리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이명이 이미 스스로 화복(禍福)에 겁내고 핍박되어 선대왕의 아름다운 덕으로 하여금 가리워져 드러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다시 경훈(經訓)을 부회(傅會)하고 간언(奸言)을 문식(文飾)하여, 스스로 그 심적(心迹)을 은폐하고 일세(一世)의 이목(耳目)을 속이려 하였습니다. 아! 선대왕께서 만일 오늘날 살아 계셨다면 이이명이 오히려 감히 이와 같은 말을 장주(章奏)의 사이에 멋대로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불충하고 버릇이 없는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속히 다른 대신에게 묘지명을 고쳐 짓도록 명하시고, 그 쓰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통쾌히 설명하여 성덕(盛德)·대업(大業)으로 하여금 끝내 박식(剝蝕)080)  에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면 실로 국가의 큰 다행일 것이며 선대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도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귀하(黃龜河)가 임금께 아뢰고, 따라서 들어가기를 권유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성묘(聖廟)에서 권당(捲堂)하는 것은 사체(事體)로 보아 미안한 일이니, 조속히 들어갈 것을 권고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이명이 명릉(明陵)081)  의 묘지(墓誌)를 찬술(撰述)하면서 신사년과 병신년의 일을 쓰지 않았는데, 윤지술이 민익수(閔翼洙)에게 묻기를, ‘능지(陵誌)에 두 가지 일을 쓰지 않은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민익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왕(先王)의 거룩한 덕이요 위대한 업적인데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윤지술이 당초에는 여러 유생(儒生)들을 인솔하고 항소(抗疏)하여 간(諫)하려 하였는데, 결국 올리지 못하였고, 소회(所懷)를 올림에 따라 부안(扶安)으로 귀양보냈다.

 

일본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조위 차왜(弔慰差倭)가 와서 접위관(接慰官)을 차송(差送)하였다. 국상(國喪)을 당하였을 때 일본에 통부(通訃)하는 규례는 없고 단지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왜관(倭館)에 전달하도록 하며, 관수(館守)는 대마도(對馬島)에 보고한다. 대마 도주가 차왜를 보내어 예조에 조위하는 글월을 바치고 우리 나라는 접위관을 차송(差送)하여 차왜를 접대하는 것이 바로 준례이다. 진하(進賀)하는 차왜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9월 11일 을해

천둥과 번개가 쳤다.

 

9월 13일 정축

인산(因山) 때 궐내[掖庭]에 보관한 유막(帷幕)을 사용할 것과 영휘전(永徽殿)082)   궁인(宮人)의 미찬(米饌)을 줄이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인산 때에 막차(幕次)는 마땅히 마면포(麻綿布) 2백 70여 동(同)을 사용해야 하니, 청컨대 새로 만든 유막은 사약방(司鑰房)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경비를 줄이소서. 영휘전에 소속된 궁인들에 대해서는 영소전(永昭殿)083)  과 경녕전(敬寧殿)084)  의 준례에 따라 참작하여 감하소서."
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9월 15일 기묘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조징(趙徵) 등이 상소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의 소회(所懷)는 의리가 분명하고 사기(辭氣)가 통쾌하여 족히 사기(士氣)를 감발(感發)시킬 만합니다. 우리 선왕(先王)의 거룩한 덕과 아름다운 공업(功業)은 만세(萬世)의 법정(法程)이 아님이 없는데, 그 대처분(大處分)과 대시비(大是非)에 있어서는 더욱 성려(聖慮)가 굉원(宏遠)하고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그 덕을 표현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근서(謹書)·특서(持書)하여 다만 그 혹시라도 없어질까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이제 도리어 빠뜨리고 호도(糊塗)하였으니, 여론(輿論)이 일제히 격분하고 사론(士論)이 떼 지어 일어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윤지술은 보잘것없는 한 소년(少年)으로서 개연(慨然)히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앞장서서 다사(多士)를 이끌고 곧바로 임금 앞에 항소(抗疏)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히려 또 소회를 써서 진달하여 격절(激切)·강개(慷慨)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타락한 풍속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조금 분발(奮發)시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왕의 선비를 배양(培養)하신 거룩한 뜻을 생각하시어 조속히 윤지술을 멀리 유배시키라는 분부를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 21일 을유

요인(妖人) 육현(陸玄)이 죄가 있어 장살(杖殺)되었다. 육현은 추수(推數)를 잘하고 또 환술(幻術)에 능하여 행동거지가 이상야릇했으므로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홍술(李弘述)이 장살(杖殺)시키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는데, 뒤에 목호룡(睦虎龍)이 이것을 가지고 이홍술의 죄를 구성(構成)하였다.

 

9월 26일 경인

천둥이 쳤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뇌변(雷變)으로 인해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할 것을 원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천둥의 변괴가 비상(非常)한 것은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8일 임진

홍문록(弘文錄)085)  을 작성하여 조문명(趙文命)·정석오(鄭錫五)·이기진(李箕鎭)·신절(申晢)·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 6인을 뽑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