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오
밤에 천둥이 쳤다. 도당록(都堂錄)086) 을 작성하여 이기진(李箕鎭)·신절(申晢)·신방(申昉)·김진상(金鎭商)·이중협(李重協)·조문명(趙文命)·이덕수(李德壽)·정석오(鄭錫五)·서종섭(徐宗燮)·홍현보(洪鉉輔)·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윤연(尹㝚) 등 13인을 선발하였다.
10월 4일 정유
좌승지(左承旨) 유중무(柳重茂)·우승지 이정신(李正臣) 등이 천둥의 이변[雷異]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답하기를,
"재앙을 만나 근심하고 두려우하여 편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대들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6일 기해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전답(田畓)을 개량(改量)하였다. 경상도의 전세(田稅)는 총 26만 2천 결(結)이고, 전라도는 24만 5천 5백 결이고, 충청도는 16만 3백 결이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된 이후로 부민(富民)이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있어 온 지가 대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때 삼남의 전답을 개량하여 전세(田稅)를 정하였으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는 다만 균전(均田)의 명칭만 사모하고 균전의 실상은 구하지 아니하여 관찰사(觀察使)·군수(郡守)·현령(縣令)은 적임자를 얻지 못해서 간악한 좌수(座首)·별감(別監)과 교활한 아전들로 하여금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하였습니다. 세도 있는 집안의 전답은 하등(下等)에 배치하고, 곤궁한 백성의 전답은 상등(上等)에 배치해서 허위(虛僞)로 서로 속이고, 간교한 폐단이 백방으로 발생하여 결부(結負)의 수량은 옛날에 비해서 약간 증가되었는데도 백성들의 원망은 도리어 심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삼남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전지의 개량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10월 7일 경자
정언(正言) 조최수(趙最壽)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무엇 때문에 스스로 의구심을 내어 자기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날로 심각해져서 무릇 주상(主上)을 조절(操切)할 수 있는 것은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윤지술(尹志述)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이휘에 진실로 사친(私親)을 위해서 지나치게 높인 일이 있었다면 신하가 된 사람이 비록 목숨을 걸고 간쟁한다 하더라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전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일찍이 털끝만큼도 의논한 일이 없으셨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본래 말할 수 있는 단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지문(墓誌文) 한 사항에 있어서는 군부(君父)를 위하여 사친(私親)을 숨기는 것은 신자(臣子)의 지극히 당연한 의리입니다. 윤지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에 감히 갑자기 제기하여, 반드시 지나간 일을 들추어내서 우리 전하의 가슴아픈 사적인 심회를 증가시키려 하는 것은 이미 차마 못할 짓입니다. 그리고 ‘마치 숨길 만한 어버이가 있는 것처럼 한다.’는 등의 말은 억지로 군부(君父)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낳아 준 은혜를 끊도록 하여 군부에게 비리(非理)를 가한 것이니, 이와 같이 무엄한 일은 어찌 한없이 절통(絶痛)하지 않겠습니까? 아! 사람이 자기를 낳아 준 사친에 대해서 불행히 변고(變故)를 만난 사람은 정(情)은 비록 펴지 못하더라도 은혜는 바로 단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바꿀 수 없는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윤지술이 이 일을 제창하였을 때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의 윤지술과 기미(氣味)를 같이하는 자들도 다 서로 돌아보고 경악(驚愕)하며 모조리 달아나 흩어졌던 것이니, 인심(人心)은 똑같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술이 팔을 걷어 올리고 홀로 담당한 것은 또 무슨 생각에서입니까? 유독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다 사라져 없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인륜의 중대한 것도 이로 인해 무너지고 단절될까 두렵습니다. 형률의 적용이 편배(編配)에 그친 것도 이미 관대한 은전인데, 일시(一時)의 사람들이 어지럽게 나서서 구원하고 해명하여, 끝내 성상으로 하여금 혼자서 여러 사람의 입을 당해낼 수 없어서 도로 성명(成命)을 중지시킨 뒤에 그만두게 하니, 이는 의리가 잠깐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진 것이고 주상의 위엄이 조금 실행되다가 오히려 빼앗긴 것입니다. 신은 윤지술에게는 마땅히 절도(絶島)에 찬배(竄配)시키는 형률을 적용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장주(章奏)를 올려 변명 비호하여 조금도 돌아보거나 기탄함이 없는 것은 그 분의(分義)에 있어 어찌 감히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국자 당상(國子堂上)의 들어가라고 권유하는 것을 빙자해서 자기의 견해를 덧붙여 진술하여 위협하고 조절한 것은 유생(儒生)의 소회(所懷)보다 더 나쁜 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조(擧措)는 몹시 무엄한 것이니 양사와 국자 당상을 모두 마땅히 파직(罷職)시켜야 합니다. 신은 또 들으니, 본원(本院)에서 전 승지 송성명(宋成明)을 삭탈 관직(削奪官職)하라는 계(啓)가 있었다 합니다. 아! 그것도 또한 방자함이 심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삭탈 관작하라는 청을 엄정한 말로 물리치실 뿐만 아니라, 일전에 내리셨던 특별히 파직시키라는 분부 또한 마땅히 조속히 도로 중지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大臣)을 침노해 비난하였고, 말에 화평(和平)이 결여되었으니, 그것이 타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0월 8일 신축
정언(正言) 조최수(趙最壽)를 파직시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정언(正言) 조최수는 반유(泮儒)의 일을 빙자해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실현하려 하여 한 통의 상소를 투진(投進)하였는데, 말뜻이 음험(陰險)합니다. 관유(館儒)가 처벌받는 것은 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이 무리들도 어찌 그것이 지나친 일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에 감히 몰래 서로 기회를 엿보아, 함부로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겨 주상을 공동(恐動)시키고 조신(朝紳)을 모함하여 막중한 습의(習儀)087) 를 정일(正日)에 거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죄상을 논한다면 통분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조최수는 파직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을사
조태구(趙泰耉)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임금이 처음에 가복(加卜)088) 을 명하여 정호(鄭澔)를 추천해 올렸다가, 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여 이에 조태구를 임명하였다.
10월 15일 무신
민진원(閔鎭遠)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10월 20일 계축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상(喪)을 발인(發引)하였다. 임금이 모시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곡하고 하직한 뒤 돌아왔다.
10월 21일 갑인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명릉(明陵)에 장사하였다. 새벽에 영가(靈駕)가 능(陵) 위에 이르니,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수건을 받들어 재궁(梓宮)을 닦았다. 그런 뒤 내시(內侍)가 구의(柩衣)를 세 겹으로 덮었고 구의 위에 명정(銘旌)을 펼쳐놓았다. 금루관(禁漏官)089) 이 시간이 되었음을 아뢰니, 총호사(摠護使)가 여관(舁官)090) 을 인솔하고 재궁을 받들어 묘도[羡道] 안에 안치하였다. 공조 판서가 손을 들어서 밀치는 모양을 하니, 내외(內外)의 액례(掖隷) 등이 나란히 서서 커다란 붉은 융단 동아줄을 잡고 재궁의 아래쪽을 얽어 고정시켜 경필(警蹕) 소리가 한 번 날 적마다 곧 한 번씩 천천히 끌어당겨 점차 현문(玄門) 안으로 들여보내 탑(榻) 위에 올려놓았다. 왕자(王子) 이하 여러 신하들이 광(壙)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곡(哭)하였으며 곡이 끝나자 사배(四拜)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영의정이 현문(玄門) 밖에 나아가 애책(哀冊)을 받들어 묘도(墓道)의 서쪽에 놓았으며 옥백(玉帛)을 애책의 남쪽에 놓았다. 내시가 유의(遺衣)를 넣었고,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삽(翣)을 올리고 명기(明器)·악구(樂具)·목노비(木奴婢)·복완(服玩)·부신(符信) 등을 현문 밖에 넣은 뒤 드디어 현궁(玄宮)을 닫았다. 집의(執義)가 삼가 서명하게 굳게 잠그고 우의정이 흙 아홉 삽(鍤)을 위에 덮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영결하는 자리로 나아가 절하고 곡한 뒤 왕자 및 총호사·예조 판서·도감 당상·승지·사관(史官) 등이 모두 길유궁(吉帷官)에 나아가 제주(題主)의 예(禮)를 행하였다.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고 나와 탁자 위에 눕혀 놓으니, 제주관(題主官)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서쪽을 향하여 신주를 썼다. 사자관(寫字官)이 칠(漆)을 덧칠하기를 마치니, 대축이 영좌(靈座) 위에 모셔 놓고 입주전(立主奠)을 행하였으며, 마침내 반우(返虞)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 뒤따라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임금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통례(通禮)가 신연(神輦)의 앞에 나아가 잠깐 머무시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곡하여 절하고 난 뒤 드디어 모시고 효령전(孝寧殿)091) 에 이르러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제주(濟州)·정의(旌義)·대정(大靜) 세 고을 백성 백여 명이 바다를 건너와서 인산(因山)에 부역을 거들기를 청하고, 또 4종의 토산품을 바쳤는데, 그 청은 허락하고 그 바친 토산품은 되돌려 주었으며, 이어서 돌아갈 때 먹을 양식을 넉넉히 주도록 명하였다.
10월 22일 을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반우(返虞)를 따라서 서교(西郊)에 이르러 상소문을 남겨 두고 시골로 돌아가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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