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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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경신

사은사(謝恩使) 조태채(趙泰采)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8월 6일 갑자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8월 20일 무인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윤(判尹) 이홍술(李弘述), 공조 판서(工曺判書)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우참찬(右參贊) 임방(任埅),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현(李宜顯), 대사헌(大司憲) 홍계적(洪啓迪), 대사간(大司諫) 홍석보(洪錫輔), 좌부 승지(左副承旨) 조영복(趙榮福),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 등이 저사(儲嗣)를 세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처음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기를,
"전하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시니,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커다란 슬픔으로 애구(哀疚)하시는 중에도 반드시 근심하는 생각이 더하실 것이고, 우리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도 반드시 정성스럽게 돌아보며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이미 행하신 영전(令典)이 있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준용(遵用)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방금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인심(人心)이 흩어졌으니, 더욱 마땅히 국가의 대본(大本)을 생각하여 종사(宗社)의 지극한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도, 대신(大臣)들이 오히려 세자 세우기를 청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속히 이것을 위로는 자성(慈聖)께 품하시고, 아래로는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즉시 사직(社稷)의 큰 계책을 결정해서 많은 백성들의 큰 기대를 잡아매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육경(六卿), 의정부(議政府)의 서벽(西壁)090)  과 판윤(判尹),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명초(命招)하여 회의(曾議)해서 품정(稟定)하기를 청하였는데, 판중추(判中樞)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은 부름을 어기고 이르지 아니하였다. 김창집 등이 드디어 모두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까지 저사(儲嗣)가 없으니, 신은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우려하였으나, 다만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까닭에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간(臺諫)의 말이 지극히 마땅하니, 누군들 다른 의논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태채는 말하기를,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두 황자(皇子)를 잃었을 때 춘추가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간신(諫臣) 범진(范鎭)이 ‘태자(太子)를 세울 것’을 소청(疏請)하였고, 대신(大臣) 문언박(文彦博) 등은 정책(定策)을 극력 도왔습니다. 지금 대간의 말이 이미 나왔으니, 지연시킬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실 적에 매양 ‘국사(國事)를 우려하여 억지로 죽음(粥飮)을 마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비록 애구(哀疚)하는 중에 있지마는 그 종사(宗社)를 위한 염려가 깊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일각인들 조금도 늦출 수 없기에,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청대(請對)하였으니, 원컨대 성사(聖思)를 가하여 조속히 대계(大計)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진청(陳請)하기를 마치자, 김창집·이건명·조태채가 다시 거듭 청하여 마지 않았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이니, 청컨대 빨리 윤허하여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따를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종사의 무강(無彊)한 복(福)입니다."
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이른바 ‘조종(祖宗)의 영전(令典)’이란 공정 대왕(恭靖大王) 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들고 계시니 들어가서 자전께 품하여 수필(手筆)을 얻은 후에 봉행(奉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은 청컨대 물러나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불러서 구두(口頭)로 아뢰어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니, 먼 동이 튼 뒤에 임금이 낙선당(樂善堂)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것을 이미 자성(慈聖)께 품계(稟啓)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반드시 자전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봉서(封書)가 여기에 있다."
하였다. 김창집이 받아서 뜯어보니, 봉서(封書) 안에 두 통의 종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서(楷書)로 ‘연잉군(延礽君)’이란 세 글자를 써 놓았고, 하나는 언찰(彦札)로 하교하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단지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에게 하교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해자(楷字)로써 언교(諺敎)를 번역하여 써서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영복(趙榮福)이 탑전(榻前)에서 전교(傳敎)를 쓰기를,
"연잉군  【휘(諱).】 을 저사(儲嗣)로 삼는다."
하였다. 이어서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을 명초(命招)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고, 여러 신하들이 이에 물러나왔다. 뒤에 영조[英宗] 계축년091)  에 민진원(閔鎭遠)이 영조에게 고하기를,
"경자년092)   국휼(國恤) 후에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만나면 번번이 머리를 맞대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사왕(嗣王)의 성후(聖候)가 불예(不豫)하시고, 더욱 후사를 두실 희망이 끊어졌으니, 국사(國事)를 장차 어찌 하겠는가?’ 하여, 이에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비록 급하지만 즉위(卽位)한 지 한 해를 넘기지도 않았는데, 바로 건저한다면 중외(中外)에서 성후(聖候)의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에 반드시 의혹이 있을 것이다. 힘을 다해 곁에서 보좌하여 3년이 지난 뒤에 마땅히 건저를 의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여러 분 계시다면 마땅히 일찍 건저를 의논하여 인심(人心)을 붙잡아 매어야 하겠지만,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단지 한 분이 계실 뿐이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가겠는가? 「3년 뒤에 해야 한다.」는 말이 진실로 옳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의 신하들이 건저(建儲)를 급하게 여겼으나, 김창집은 끝내 종전의 견해를 고집하였고, 고(故) 판서(判書) 이만성(李晩成)은 신을 꾸짖기를, ‘종사(宗社)의 계책이 시급하니,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축년093)  에 이르러 대소(臺疏)가 갑자기 나오자 신은 ‘이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일개 대관(臺官)이 갑자기 상소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습니다. 비답(批答)이 내려진 뒤에 김창집이 신을 빈청(賓廳)으로 나가는 길에 지나다가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3년의 뒤를 기다리려 하였는데 지금 대소가 나왔습니다.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 논의가 이미 나온 뒤에는 경각도 지연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밤 정성을 다하여 극력 진달해서 꼭 정책(定策)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지연된다면 종사(宗社)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하니, 김창집이 그렇게 여기고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들을 부르기를 청하여, 유문(留門)094)  한 다음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청대(請對)하여 ‘동조(東朝)에 입품(入稟)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한 뒤 다시 신 등을 불러서 하교하실 것’을 진달하고, 합문(閤門) 밖으로 물러나와 기다렸습니다. 3, 4경이 되도록 소명(召命)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각이 매우 급하니, 지금 다시 청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군부(君父)에게 재촉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파루(罷漏) 뒤 신이 말하기를, ‘일이 재촉하는 것 같은 것은 소절(小節)이고,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는 것은 대사(大事)이니, 곧바로 조속히 청대함이 마땅하다.’ 하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습니다. 즉시 승전색(承傳色)에게 구대를 청하여 날이 밝아지려 할 때 입시하니, 어좌(御座)의 곁에 서안(書案)이 있었고, 서안 위에는 글이 있었습니다. 경묘(景廟)께서 서안을 돌아보며 가리키시기에, 대신(大臣)이 가져다가 받들어 보니, 자전(慈殿)의 언교(諺敎)와 경묘의 친필(親筆)이었습니다. 좌상(左相) 이건명(李健命)이 받들어 읽으니,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실성(失聲)하여 눈물을 흘려 울고 물러나왔습니다."
하였다.

 

8월 21일 기묘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어질지 못하여 현재의 작위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분수[涯分]를 넘었으므로, 평소에 항상 부끄럽고 두려워한 나머지 연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았는데, 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명이 내려질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이 명이 듣고서 심담(心膽)이 함께 떨어지고,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내려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성정(性情)은 본래부터 소활(疏闊)하기 때문에 다만 자기 본분(本分)만 지키며 성세(聖世)에 편안히 사는 일을 마음속으로 항상 다짐해 왔습니다. 신의 간절한 속마음은 비단 천지 신명께 질정(質正)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대왕(先大王)의 척강(陟降)하시는 혼령께서도 밝게 통촉하실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미리 저사(儲嗣)를 세움은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불곡(不穀)095)  한 몸으로 이미 30세를 지냈는데 아직도 사속(嗣續)이 없고, 또 이상한 질병이 있으니, 국사(國事)를 생각할 때마다 한 가지 계획도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고, 군하(群下)의 청을 따라 저이(儲貳)의 중책을 맡겼으니, 마음을 경건하게 갖고 부지런히 하여 국인(國人)의 큰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선전(宣傳)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연잉군(延礽君)을 이미 저사(儲嗣)로 정하였습니다. 그대로 사제(私第)에 거처하게 하는 것은 미안(未安)하니, 청컨대 조속히 궐내(闕內)에 들어와 거처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연잉군은 윤서(倫序)로 말한다면 비록 개제(介弟)096)  이지만 지위로 말한다면 바로 저사(儲嗣)입니다. 그런데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정종(定宗)께서 태종(太宗)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으셨으니, 어찌 제왕(帝王)의 집안에서는 계서(繼序)를 중히 여기고, 윤서(倫序)를 도리어 가볍게 여겨서 그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때에 태조(太祖)께서 상왕(上王)의 지위에 계시어 지존(至尊)에 압박받는 바 되어 세자의 호칭에 혐의가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오늘날의 형편은 이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옛부터 역대(歷代)의 군주가 그 아우를 세워 후사로 삼을 적에는 모두 태제(太弟)로 책봉하였습니다. 이번의 명호(名號)를 ‘세제(世弟)’로 결정하시는 것이 명의(名義)와 예절(禮節)에 모두 진실로 합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논의해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형편은 정종 때와는 구별됨이 있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이, 인종(仁宗)께서 위예(違豫)하실 때 명종(明宗)께서 바야흐로 대군(大君)이 되었는데, ‘세제(世弟)로 책봉하여 국본(國本)을 결정해야 한다.’는 의논을 내었습니다. 연잉군의 위호(位號)는 마땅히 ‘왕세제(王世弟)’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김창집의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적에 송(宋)나라의 한기(韓琦)가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함에 있어서 일찍이 장승(張昇)과 더불어 평소에 의논하지 않았으므로 장승이 한기를 힐난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나와 평소에 의논하지 않았는가?’ 하니, 한기가 응답하지 않다가 장승이 물러가자 한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만약 평소에 의논했다면 어찌 사직(社稷)의 일을 무너뜨리지 않았겠는가?’ 하였습니다. 김 충헌공(金忠獻公)097)  이 조급하게 서둘러서 밤중에 정책(定策)한 일이 너무 성급한 것 같았지만, 또 조태구(趙泰耉)와 평소에 의논하지 않았으니, 그도 한기의 지혜가 있었다 할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처음에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이이명(李頤命)이 와내(臥內)에서 독대(獨對)하니, 사람들이 혹 ‘이이명이 연잉군(延礽君)을 익대(翼戴)하려 한다.’고 의심하였는데, 오직 임금만은 이이명의 독대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영의정 김창집 등이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흔연하게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고, 마치 독대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같이 하여 일찍이 추호(秋毫)도 꺼림칙하게 여김이 있지 않았으니, 천하의 지극히 인자(仁慈)하고 크나큰 도량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4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註 096] 개제(介弟) : 남의 아우의 높임말.[註 097] 김 충헌공(金忠獻公) : 김창집(金昌集)의 시호(諡號).
사신은 논한다. "처음에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이이명(李頤命)이 와내(臥內)에서 독대(獨對)하니, 사람들이 혹 ‘이이명이 연잉군(延礽君)을 익대(翼戴)하려 한다.’고 의심하였는데, 오직 임금만은 이이명의 독대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영의정 김창집 등이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흔연하게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고, 마치 독대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같이 하여 일찍이 추호(秋毫)도 꺼림칙하게 여김이 있지 않았으니, 천하의 지극히 인자(仁慈)하고 크나큰 도량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8월 22일 경진

왕세제(王世弟)가 재차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보잘것없고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게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명을 받았으므로, 신의 마음은 놀랍고 두려워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기에, 감히 한 통의 상소를 진달하여 천일(天日)의 돌이켜 통촉하심을 바랐는데, 엎드려 비지(批旨)를 받들매 말씀의 뜻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더욱 신이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신의 재력(才力)이 비록 감당할 형편이 있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 함부로 있음은 결코 부당합니다. 더구나 신은 본래 어리석고 미련하며 게다가 아무런 재주와 식견도 없는데 성명(成命)에 핍박되어 억지로 마지못해 나아간다면 신 한 몸의 낭패는 진실로 걱정할 것이 없지만, 종사(宗社)와 국사(國事)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갖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절대로 함부로 나아갈 형세(形勢)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종사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에 부응하여 조속히 자성(慈聖)께 품의하여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 하유(下諭)하기를,
"이미 어제의 비지(批旨)에서 상세히 말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많이 이르겠는가? 다시 사양하지 말고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유봉휘(柳鳳輝)가 왕세제의 정책(定策)에 대한 일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세제가 상소하여 사위(辭位)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유봉휘를 하옥(下獄)시켰다. 조태구(趙泰耉)가 용서해 주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유봉휘가 상소하기를,
"나라에 건저(建儲)하는 일이 있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시임 대신(時任大臣)으로서 밖에 있는 자들은 까마득히 알지도 못하고, 원임 경재(原任卿宰)로서 처음의 명초(命招)에 나오지 않은 자들도 다시 부르지 않고서 성급하고 다급하게 하여 조금도 국체(國體)를 돌아보는 뜻이 없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재차 중곤(中壼)098)                  을 맞이하고, 상약(嘗藥)에 근심하고 경황없으시다가 이어서 양암(諒闇)099)                  에 거하셨으니, 사속(嗣續)의 있고 없음은 아직 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보령(寶齡)이 이제 한창이시며 중곤의 나이도 겨우 15세를 넘었으니, 이 다음에 종사(螽斯)100)                  의 경사가 있는 것은 진실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혹시라도 양궁(兩宮)101)                  께서 질환이 있으시어 탄육(誕育)102)                  에 해롭다면, 보호(保護)하는 처지에서 진실로 마땅히 의약(醫藥)에 정성을 다하여 온갖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에 생각을 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고, 즉위하신 첫해에 별안간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지요? 신민(臣民)이 바야흐로 눈을 닦고 새로운 덕화를 기대하고 있는데, 대간(臺諫)이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인심(人心)이 흩어졌다.’고 말하였으니,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정(國政)을 맡고 있는 대신(大臣)들은 마땅히 조정의 의논을 널리 묻고, 조용히 진백(陳白)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그것이 어떤 연유와 어떤 이유 때문인지를 환하게 알도록 해야 할 것인데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정소(李廷熽)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자로 하여금 허둥지둥 소청(疏請)하게 하여 짐짓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는 것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품처(稟處)하라.’는 하교를 얻게 되어서는 경고(更鼓)가 이미 깊어진 뒤에 등대(登對)해서 극력 청하여 반드시 인준을 얻고서야 말았으니, 이정소(李廷熽)와 화응(和應)한 정상이 분명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품정(稟定)하시라.’는 뜻을 우러러 진달하고, 물러나와 하교를 기다리는 것이 사리(事理)에 당연한데, 이미 입품(入稟)하기를 청하고, 곧바로 출선(出宣)하기를 청하여 마치 사령(使令)하는 것 같았고 거의 독촉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은 신하의 예절이 없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무진년103)                  에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적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오랫동안 사속(嗣續)이 없으셨는데, 그때 주사(主嗣)가 시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전석(前席)에서 하순(下詢)하실 즈음에 여러 신하들이, ‘우선 몇 해 더 두고 보아서 정궁(正宮)께 득남(得男)하는 경사가 없고, 왕자(王子)가 장성한다면 유사(有司)가 마땅히 세우기를 청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국본(國本)을 중히 여기고, 국체(國體)를 존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하가 되어 군주를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인데, 지금은 바쁘고 다급하게 하여 마치 시각을 넘겨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여 한밤중에 엄려(嚴廬)104)                  에서 한 번 청하고, 재차 청하여 막중 막대한 일을 마침내 거칠고 엉성한 결과에 이르게 하였으니, 인심(人心)의 의혹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진실로 그 일이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져 다시 의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이제부터 모든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신충(宸衷)으로부터 결단하시고 행하셔서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짐이 없게 하시고, 이어서 대신(大臣) 이하의 부범(負犯)을 바로잡아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승정원(承政院)에 이르자, 승지(承旨)        한중희(韓重熙)가 청대(請對)하여 상소를 가지고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한중희에게 유봉휘의 상소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한중회가 말하기를,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지고 저위(儲位)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감히 의논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유봉휘가 이에 이런 상소를 하였으니, 성상께서 관례에 따라 비답(批答)을 내리실 수 없습니다. 마땅히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를 불러서 순문(詢問)하여 처분(處分)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마땅히 자성(慈聖)께 품의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한중희로 하여금 상소문을 놓아두고 나가도록 하였다. 한중희가 대신 이하를 명초(命招)하기를 굳이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합문(閤門) 밖에 이르렀으나, 오랫동안 사대(賜對)하지 않다가 밤중에 이르러 비로소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월(日月) 같은 밝으심으로써 나에게 후사가 없음을 깊이 염려하셨는데, 지금 와서 나의 병이 점점 더하여 아들을 두어 부탁(付託)의 중대함을 공경히 받들 희망이 없으니,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대간(臺諫)의 상소에 ‘종사(宗社)를 위해서 국본(國本)을 정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선왕(先王)의 거룩하신 생각과 나의 근심스럽고 한탄스러운 뜻에 부합되었기에,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였더니, ‘효종(孝宗)의 혈맥(血脈)과 선왕의 골육(骨肉)으로는 단지 주상과 연잉군(延礽君)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교(慈敎)가 지극히 간절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내게 조금이라도 사속(嗣續)의 희망이 있다면 어찌 이런 하교를 하겠는가? 이미 저사(儲嗣)를 결정하였으니, 실로 이는 종사(宗社)의 한없는 복(福)이며 또한 내가 크게 바라던 바이다. 유봉휘의 상소가 천만 뜻밖에 나와 말이 광망(狂妄)한 바 있으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 그냥 둘 수 없으니, 경(卿) 등이 의논하여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대사헌        홍계적(洪啓迪)·대사간        유숭(兪崇)·사간        신절(申晢)·장령        송도함(宋道涵)·부교리        신방(申昉)·정언        이성룡(李聖龍)이 아뢰기를,
"전하의 사속(嗣續)에 대한 근심은 비단 전하께서 근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성지(聖旨)를 받들매 선왕(先王)이 깊이 염려하시던 것이고, 자성(慈聖)의 하교하신 바이니, 오늘날 대소(臺疏)의 세자 세우기를 청한 것과 여러 신하들의 힘써 찬동한 것도 늦은 감이 있다 하겠습니다. 무슨 바쁘고 다급하게 한 실수가 있기에 유봉휘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 ‘우롱하고 협박했다.’는 등의 말은 아마도 여러 신하들을 성죄(聲罪)하려는 계략에서 나왔겠지만, 군주(君主)의 존엄함으로써 군하(群下)에게 우롱당하고 협박받았다고 한다면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지고 신인(神人)이 의탁함이 있는데도 만약 말하기를, ‘우롱하고 협박하여 이 대계(大計)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춘저(春邸)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성명(成命)이 한 번 내려지니 만백성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며 온 나라의 함생(含生)105)                  이 기뻐서 경하하고 손뼉치지 않음이 없는데, 저 유봉휘만은 되레 무슨 심장(心腸)을 가졌길래 유독 스스로 놀라고 당황하고 근심하고 의혹하여, 손으로 불만을 품고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려는 의도를 뚜렷이 드러내는 것입니까? 그의 무장(無將)106)                  ·부도(不道)한 죄를 만약 엄하게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반드시 장차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니, 청컨대 국청(鞫廳)을 설치해서 엄하게 문초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이 진실된 속마음을 지난번 상소에다 죄다 진달하였지만 그래도 오히려 마음에 쌓인 것이 있으니, 어찌 한 번 주광(黈纊) 아래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이 불초하고 보잘것없는 몸으로 차마 붕천(崩天)의 애통함을 보고 구차하게 시식(視息)107)                  을 연명하고 있으니, 이미 매우 사리에 어둡고 완고한 것인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서 연사(練事)가 어느덧 지났습니다. 추모(追慕)하고 부르짖어 울며 세상에 살고 싶은 생각이 영원히 없는데, 뜻밖에도 신자(臣子)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갑자기 내리셨습니다. 신은 놀라고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라 차라리 땅을 파고 들어가려 하나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타고난 성품은 용렬하고 노둔하여 백 가지 중에 한 가지의 재능도 없습니다. 저사(儲嗣)의 지위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절대로 당치 않은 신의 몸에 주어졌으니, 어찌 다만 신의 마음만 두렵고 떨릴 뿐이겠습니까? 또한 우리 성상께서 적합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선대왕(先大王)의 큰 것을 남겨 주시고 어려움은 넘겨 주신 거룩한 뜻을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즉시 삼가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신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요 선대왕의 골육(骨肉)이라는 말씀을 보고 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실성(失聲)하여 부르짖어 울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비록 신이 몸을 선왕(先王)께 의탁했다 하여 특별히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행하였던 전례(典禮)로써 주셨지마는, 돌아보건대 신의 부재(不才)가 어찌 감히 함부로 분수가 아닌 직임을 탐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죽지 못한 목숨이 이미 선왕을 지하(地下)에 따르지 못하고 오늘날 도리어 이런 하교를 받들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통곡(痛哭)하기를 날마다 낮에서 밤까지 계속합니다. 어찌 감히 말을 꾸며 거짓으로 사양하여 이렇게 번독(煩瀆)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산야(山野)에 도망하여 숨어 여생을 마치기를 바랄 뿐인데, 또 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을 살피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온 다음날 답하기를,
"이미 전후의 비지(批旨) 가운데 상세히 말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타이르겠는가? 자성(慈聖)의 하교가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간절하며, 일찍이 이미 행하였던 영전(令典)이 있으니,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받들어서 부디 연달아 상소하지 말라."
하고, 승지(承旨)로 하여금 가서 선시(宣示)하게 하였다.

 

유봉휘(柳鳳輝)가 국청(鞫廳)에 나아가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하교(下敎)하기를,
"반복해서 생각해 보니, 유봉휘가 망령되게 소장(疏章)을 올린 것은 몹시 사리에 어긋났다. 따라서 마땅히 엄중하게 처단해야 할 듯하지만 국문(鞫問)은 정도에 지나치다."
하고, 참작해서 아주 먼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논쟁하자, 임금이 종전의 하교대로 국문하도록 하였다.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처분(處分)이 이미 정하여진 뒤에 유봉휘가 이런 진언(進言)을 하였으니, 어긋나고 망령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마음은 바로 나라를 위하는 진심(眞心)으로서 성실(誠實)하여 다른 뜻이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효종께서 승저(升儲)하신 날 극력 상도를 지킬 것을 주장하다가 비록 찬축(竄逐)당했지만, 효종께서 즉위하시자 맨먼저 등용하여 마침내 명상(名相)이 되었습니다. 무진년108)  의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님이 없었는데, 어찌 일찍이 한때의 쟁론(爭論) 때문에 국문(鞫問)한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전하께 충성하는 자가 후일에는 반드시 저군(儲君)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니, 설령 말한 바가 광망(狂妄)하다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이니, 성급하게 국문하여 다스리라 명하신다면 어찌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손상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진언(進言)한 사람을 박살하도록 군주(君主)를 인도하는 것은 성세(聖世)의 복(福)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세 번 생각을 더하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경(卿)의 차자를 보니, 비로소 국청(鞫廳) 설치의 지나침을 알겠다."
하고, 다시 대신(大臣)에게 의논해서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 저군(儲君)이 지위가 결정되었으니, 신자(臣子)된 자가 감히 의논해서는 안되는데도, 유봉휘의 상소와 조태구의 차자가 기탄(忌憚)이 없음이 여기에 이르고, 다시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써 계속되었으니, 영종 대왕(英宗大王)이 갑진년109)  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천운(天運)이다 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4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註 108] 무진년 : 1688 숙종 14년.[註 109]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사신은 논한다. "아! 저군(儲君)이 지위가 결정되었으니, 신자(臣子)된 자가 감히 의논해서는 안되는데도, 유봉휘의 상소와 조태구의 차자가 기탄(忌憚)이 없음이 여기에 이르고, 다시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써 계속되었으니, 영종 대왕(英宗大王)이 갑진년109)  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천운(天運)이다 할 것이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등이다.】 에서 아뢰기를,
"건저(建儲)하는 날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부름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새로 제수된 궁관(宮官)110)  은 세제(世弟)의 사저(私邸)에 사은(謝恩)하고, 1원(員)은 사저의 문 밖에 숙직(宿直)하며,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은 입궁(入宮)하기를 기다려 이에 사은하도록 명하였으니, 예조(禮曹)에서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8월 25일 계미

세제(世弟)의 책봉(冊封)을 장차 연중(燕中)에 주청(奏請)하려고 김창집(金昌集)을 정사(正使)로 삼고, 조태억(趙泰億)을 승진시켜 부사(副使)로, 유척기(兪拓基)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우의정 조태구(趙泰耉)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 때문에 헌의(獻議)하기를,
"유봉휘(柳鳳輝)가 국본(國本)을 동요시켜서 악역(惡逆)에 관계되는데도, 조태구의 차자에 혹은 ‘그 마음은 나라를 위하는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실(誠實)하여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고, 혹은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였는데, 성급하게 국문하여 다스리라 하는 것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손상됨이 있다.’고 하였으며, 혹은 ‘진언(進言)한 사람을 박살(撲殺)하도록 군주(君主)를 인도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말인지요?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자를 ‘충성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유봉휘를 지적하여 역(逆)으로 여겨 반드시 부도(不道)로써 토죄(討罪)하려고 하는데, 대신(大臣)은 유봉휘를 ‘충성한다.’고 하여 ‘다른 의도가 없다.’고 권장하였으니, 피차(彼此)의 의견에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인용한 을유년111)  ·무진년112)  의 일은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바가 모두 위에서 순문(詢問)하실 즈음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져서 신인(神人)의 의탁함이 있으니, 진실로 타고난 천성의 마음이 있다면 누군들 그 사이에 다른 소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봉휘가 감히 흉패(凶悖)한 말로써 저지하고 실패시킬 계획을 하고자 하였으니, 꾀를 부린 것이 너무나도 절통(絶痛)합니다.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는 것이 바로 흉역(凶逆)을 다스리는 것인데, 또한 진언한 자를 박살하는 것으로 돌리려고 하니, 사체(事體)와 의리(義理)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혹시라도 비호(庇護)하는 말에 흔들리지 마시고 국본(國本)이 견고해지고 왕법(王法)이 행해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봉휘의 말은 단지 광망(狂妄)할 뿐으로, 원래 국문할 일이 없다. 그러나 동궁(東宮)에게 또 불안한 요소가 있으니, 먼 곳으로 찬축(竄逐)하여 인심(人心)을 안정시킴이 마땅하다."
하고, 전의 판부(判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유봉휘(柳鳳輝)를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處斷)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홍계적(洪啓迪)·대사간(大司諫) 유숭(兪崇)·교리(校理) 신방(申昉) 등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논의하기를,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목욕(沐浴)하고 청토(請討)하는 의리113)  는 생각하지 않고 한갓 사당(私黨)을 용납하고 비호하려는 계책만을 품어서 한 통의 상소를 투진(投進)하여 성총(聖聰)을 기만하고 흉역(凶逆)을 비호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의 상소 가운데, ‘혐의를 무릅쓴다[冒嫌]’고 한 두 글자가 이미 몹시 비상(非常)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흉적(凶賊)을 변명 구제하여 간담(肝膽)이 죄다 드러났으니, 청컨대 삭출(削黜)하소서."
하고, 양사(兩司)에서 합계하기를,
"판부사(判府事) 김우항(金宇杭)은 건저(建儲)하는 날 소명(召命)에 나오지 아니하고,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뒤에도 전연 칭송하고 기뻐하는 말이 없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유봉휘(柳鳳輝)를 국문하도록 명할 때 임금이 곧바로 전지(傳旨)를 내리지 않았으므로, 유봉휘가 미처 취수(就囚)114)  되지 않았는데, 조태구(趙泰耉)의 차자(箚子)가 들어오자, 드디어 국문을 면하게 되었다. 당시 삼사(三司)에서 날마다 복합(伏閤)115)  하고, 대신(大臣)이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엄중히 국문할 것을 계청(啓請)하며, 종실(宗室)과 관학생(館學生)들이 상소하여 논핵하자, 유봉휘가 금오(金吾)의 길거리 위에서 석고 대명(席藁待命)하였으나, 전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보았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재주 없는 몸으로 함부로 이 직임을 탐한다면, 조만간에 낭패하리라는 것을 이미 스스로 예상하였는데, 어제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를 보게 되매 말이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신의 모골이 송연하고 심간(心肝)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이것이 또 신이 함부로 책임을 맡기 어려운 한 단서입니다. 아무리 미관 말직(微官末職)이라 하더라도 이미 사람들이 비평하는 말이 있으면 그 스스로 안정을 취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그대로 주춤거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저부(儲副)의 지위는 진실로 방국(邦國)의 중대한 근본인데, 여러 사람의 언의(言議)가 준엄하게 일어남을 돌보지 않고 주상의 엄명(嚴命)을 두려워한 나머지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받들어 떠맡는다면 신 한 몸의 수치스러움은 진실로 애석히 여길 것이 없으나, 국가(國家)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천 번 생각하고 만 번 헤아려 보아도 결단코 명을 받들 길이 없으므로, 감히 위험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종사(宗社)의 중대함을 생각하시고, 신의 불안한 실정을 굽어살피셔서 그 모든 호위하는 무리들을 조속히 파하시어 돌려보낼 것을 명하소서. 이어서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그 본분(本分)을 지키게 하신다면, 살아서는 마땅히 성세(聖世)의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또한 눈을 감고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막중한 큰 일을 이미 품정(稟定)하였고, 유봉휘의 죄상(罪狀)을 밝혔으니, 광망(狂妄)한 말에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으니,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큰 기대에 부응하여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조속히 올리는 장주(章奏)를 끊어서 내 마음을 편안케 하라. 호위하는 무리도 또한 의례와 같이 하라."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선시(宣示)하게 하였다.

 

8월 30일 무자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이 전번의 상소에 유봉휘의 상소를 가지고 대략 우러러 진달한 바가 있으나, 그 상소가 마침 신이 두려워 움츠리고 민망하고 답답해 하던 중에 나왔기 때문에 ‘마침내 함부로 받들기 어렵다.’는 뜻으로 인자하신 전하께 부르짖어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인데, ‘위험’이란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지나가는 말로 진달한 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의 한 마디 말이 유봉휘의 죄안(罪案)에 첨가되어 진신(縉紳)과 장보(章甫)들이 서로 잇따라 극력 간쟁하여 연일 그치지 않으니, 신의 불안한 단서가 더욱 많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살피시어 마침내 유봉휘로 하여금 큰 허물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면, 어찌 다만 신의 마음이 조금 편안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조(聖朝)의 관대한 은전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난번 상소 중의 ‘위험’이라는 두 글자는 반드시 유봉휘의 일에 깊이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이미 알았기 때문에 빈청(賓廳)과 삼사(三司)의 계사(啓辭)가 있었음에도 끝내 윤종(允從)하지 않았다. 이제 상소의 내용을 보니,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으므로 바로 나의 뜻과 부합되고, 또한 호생(好生)의 도리에서 나왔으니 유의(留意)하여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승지(承旨)로 하여금 가서 선시(宣示)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수상(首相) 김창집(金昌集)은 기질(耆耋)116)  의 나이로 나라의 원보(元輔)117)  가 되었으니, 출강(出疆)118)  의 행차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차자를 올려 자신이 대신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뒤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라에 큰 일이 있으니, 대신(大臣)은 출강(出疆)할 수 없다."
하여 체직(遞職)할 것을 명하고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종신(宗臣)을 차견(差遣)하는 것은 그 일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이건명이 거듭 스스로 가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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