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오
헌납(獻納) 이기진(李箕鎭)이 상소(上疏)하기를,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을 정밀하게 선택하여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선비에게도 혹 진선(進善)과 자의(諮議), 또는 계방(桂坊)143) 배위(陪衞)의 직을 맡기게 하여 격례(格例)에 구애되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출입하게 해서 훈도(薰陶)와 계옥(啓沃)144) 의 유익함이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3일 경신
왕세제(王世弟)와 세제빈(世弟嬪)의 책례 도감(冊禮都監)의 도제조(都提調)이하 원역(員役)145) 과 공장(工匠)에게 상을 내렸는데, 상격(賞格)이 차등이 있었다.
10월 6일 계해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임금이 친히 효령전(孝寧殿)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지냈는데, 왕세제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10월 8일 을축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과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이 천둥의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정령(政令)이 혹시 유완(悠緩)한 바가 있거나 형법(刑法)이 혹시 해이한 바가 있거나 충량(忠良)이 혹시 원한을 품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경연(經筵)에서 강론하고 토론함은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인데, 강학(講學)을 하다 말다 하고, 날짜의 차례대로 연접(延接)146) 함은 치무(治務)를 헤아려 결정하기 위한 것인데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치시고, 결역(結役)과 양정(良丁)은 변통(變通)의 큰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행할 수 있는 것인지 행할 수 없는 것인지 하는 단서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의 사이에 자세히 헤아리지 않으시어, 필경에는 소각(銷刻)147) 하여 몹시 사체(事體)를 손상하게 하였습니다. 한만(閑漫)한 비지(批旨)나 일상적인 공안(公案)에 이르러서도 간혹 시일을 끌고 시간을 지체하여 대부분 엄체(淹滯)되기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재앙의 징조가 정령(政令)이 유완(悠緩)한 데서 나온 것이 이것입니다.
춘추(春秋)의 법(法)은 장심(將心)을 가지면 반드시 죽이는데, 유봉휘(柳鳳輝)의 죄를 춘추의 법으로 적용해 보면 반드시 죽여야 할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아마 유망(謬妄)한 것이라 하여 용서하셨겠으나, 국본(國本)을 동요시키고 흉역(凶逆)을 몰래 꾸민 자를 오히려 ‘유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혹시 길사(吉事)에 장애가 있을까 염려하여 그러셨다면, 거의 부인(婦人)들의 고식적인 인(仁)과 여항(閭巷)의 자질구레한 말에 가까운 것으로, 성인(聖人)의 법을 밝히는 의리가 아닙니다. 흉역에게 형벌을 시행하지 않으므로 신인(神人)이 서로 분개하니, 오늘날 재앙의 징조는 형법(刑法)이 해이해진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이명(李頣命)이 독대(獨對)한 충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하고, ‘《회전(會典)》’, ‘은화(銀貨)’ 등의 말은 이미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전하께서는 대신(大臣)에게 무엇을 의심하시어 개석(開釋)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있지 않으십니까? 고충(孤忠)이 답답하게 응어리져 백수(白首)로 방황하고 있으니, 오늘날 재앙의 징조는 충량(忠良)이 원한을 품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욱 수성(修省)에 힘쓰시고, 성지(聖志)를 분발하셔서 정령(政令)이 혹시라도 유완(悠緩)하지 않게 하시며, 즉시 대언(臺言)을 따라서 형헌(刑憲)을 과감하게 시행하여, 형법으로 하여금 혹시라도 해이함이 없게 하시며, 조속히 별유(別諭)를 내려 반드시 기덕(耆德)148) 을 돌아오게 하시며, 충량으로 하여금 혹시라도 원한을 품음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10일 정묘
임금이 왕세제에게 나라 일을 재단(裁斷)하도록 명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였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전하께서 위로는 선왕의 뜻을 본받으시고 안으로는 자성(慈聖)의 뜻을 품의하시어 조속히 국본(國本)을 정하시고, 진실로 원량(元良)에게 맡겼으니, 전하의 이 조처는 진실로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이며, 옛날의 기록에도 보기 드문 것입니다. 다만 세제(世弟)에게 권강(勸講)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이니, 마땅히 춘궁(春宮)을 면려(勉勵)하여 서연(書筵)의 법강(法講)을 혹시 잠시라도 그치지 말고, 비록 재계(齋戒)를 만나더라도 바로 요속(僚屬)을 이끌어 서사(書史)를 토론(討論)하여 열흘 춥고 하루 햇볕을 쬐는 우려가 없게 해야 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정축년149) 무렵에 정신(廷臣)이 ‘신린(臣隣)을 인대(引對)할 즈음에 전하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고 참여하여 듣고 나라 일을 교습(敎習)하게 하시라.’는 뜻으로 상소하여 진청(陳請)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은 이 말을 한 자는 진실로 저군(儲君)을 훈적(訓迪)150) 하는 방법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그때 아직 충년(沖年)이셨지만 그래도 또 이와 같이 말하였는데, 오늘날 동궁(東宮)의 나이와 용모의 장성함은 전하의 그 당시보다 몇 갑절 이상일 뿐이 아니니, 서정(庶政)을 밝게 익히게 하는 것이 더욱 어찌 시급한 당무(當務)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혹시 신료(臣僚)들을 인접(引接)하실 때나 정령(政令)을 재결(裁決)하시는 사이에 곧 세제를 이끌어 곁에서 모시고 참청(參聽)하여 옳고 그름을 상량(商量)하고 이를 따라 훈습(訓習)하게 하신다면, 반드시 서무(庶務)를 밝게 연마해서 나라 일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에 깊이 유의하시고, 자지(慈旨)에 앙품(仰稟)하시어 결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이윽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이상한 질병이 있어서 10여 년 이래로 나아서 회복될 기약이 없으니, 바로 선조(先朝)의 진념(軫念)하시던 바로서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지난 정유년에 청정(聽政)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것은 선왕(先王)께서 조섭하던 중에 그 조섭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나의 몸에 이르러서는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급기야 등극(登極)한 후로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요즘에는 증세가 더욱 침고(沈痼)하므로, 수응이 또한 어려워 정사가 지체됨이 많다. 이제 세제가 장성한데다 영민(英敏)하고 총명하니, 만약 그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나는 안심하고 조양(調養)할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나라 일을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이기익(李箕翊)·남도규(南道揆)와 응교(應敎) 신절(申晢)·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등이 곧바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이기익 등이 모두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40여 년에 여러 해를 위예(違豫)하셨고, 또 눈병이 있으시어 드디어 대리(代理)의 명을 내리셨으니,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고 춘추(春秋)가 이제 한창이시며, 또 질환도 없으시어 기무(機務)가 정체되지 않고 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교지(敎旨)를 내리십니까? 신 등은 비록 죽더라도 감히 봉승(奉承)하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답이 없고, 다만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기익·남도규·신절·이중협 등이 다시 나아가 번갈아 간(諫)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곧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기익 등이 말하기를,
"밤 기운이 점점 차가워져서 옥체(玉體)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신 등은 우선 물러가겠습니다만, 병침(丙枕)151) 의 중에 다시 깊이 더 생각을 하시어 특별히 환수하신다면, 인심(人心)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대궐 문이 이미 닫혔기 때문에 이처럼 조용하고 잠잠하지만 조정(朝廷)에서 장차 반드시 모두 나와서 극력 간쟁할 것이니, 이와 같이 되면 온 나라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비록 물러가오나 결코 봉승(奉承)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신절이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신료(臣僚)들의 동궁(東宮)께 바라는 바는 단지 효도와 우애를 두텁게 하고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니, 참여하여 듣는 것이나 재단(裁斷)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늘날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정축년152) 의 일은 그때 전하께서 충년(沖年)으로 선왕(先王)의 슬하(膝下)에 계셨으니, 곁에 있으면서 참문(參聞)하게 하신 것은 실로 ‘사물을 당하여 바로 가르치는[遇物則誨]’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옳고 그름을 상량하여 결정하라’는 말은 무식하고 유망(謬妄)함이 심합니다. 청컨대 조성복을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다. 이중협과 남도규가 서로 잇따라 극력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예궐(詣闕)했는데,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이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홀로 먼저 대궐문 밖에 나아가 유문(留門)하고 입대(入對)를 청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계품(啓稟)하였다. 임금이 유문하고 들어올 것을 명하여 최석항을 인견(引見)하니, 승지와 옥당(玉堂) 또한 최석항을 따라서 입시(入侍)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이와 같은 처분(處分)이 있었던 것은 모두 군주(君主)의 춘추(春秋)가 높다거나 혹은 재위(在位)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몹시 지친 나머지 질병이 들었거나 혹은 몸에 독질(篤疾)이 있어서 여러 해를 침고(沈痼)함으로 말미암아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춘추 겨우 서른이시고 재위한 지 1년이 안되었습니다. 만약 질병 때문이라면 신이 약원(藥院)153) 에서 대죄(待罪)할 때 매양 문안(問安)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면, ‘아무일 없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른바 불안(不安)하시다는 대목이란 단지 담화 인음(痰火引飮)154) 과 소변이 잦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침고(沈痼)의 질병이 되겠습니까? 이러한 세 가지의 일이 없는데도 즉위하신 원년(元年)에 갑자기 이런 하교를 내리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선왕(先王)께서 전하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여 한정이 없는 휴휼(休恤)의 대업(大業)을 부여하신 것은 나라 일에 부지런히 힘써서 지치(至治)를 이룩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세제(世弟)에게 부여하신다면 어찌 선왕이 남기신 뜻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질병이 선왕과 같으시고 춘추가 선왕과 같으시다면 오늘날의 조처는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지만, 이제 한창 왕성한 나이로 겉으로 드러난 질병도 없으시면서 이런 조처를 하시니, 이에 신 등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망극(罔極)해 하는 까닭입니다. 청컨대 세 번 더 생각하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고, 이기익(李箕翊)·남도규(南道揆)·신절(申晢)·이중협(李重協) 등도 다시 각각 진청(陳請)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일찍이 을유년155) 겨울에 선왕(先王)께서 ‘전선(傳禪)하겠다’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그때 백료(百僚)들이 모두 나와 조정에서 간절히 여러 날 간쟁하였습니다. 신도 대간(大諫)으로 입시(入侍)해 합사(合辭)하여 쟁집(爭執)해 마침내 선왕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왕의 받아들이신 아름다운 덕은 지금도 칭송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한 번 마음을 바꾸어 옮기는 사이에 일만 가지 일이 사리에 순응하게 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이 일은 다시 생각해 볼 만한 도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과감히 따르셔야 합니다."
하고, 이중협이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생각해 볼 만한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새로이 보위(寶位)를 계승하셨으니, 오직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셔야 하고, 세제는 부지런히 강학(講學)하는 것이 옳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짐을 벗고 한가롭게 지내시려 하지만, 어찌 마음대로 스스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이중협의 말이 참으로 지극히 간절합니다. 전하께서 비록 한가롭게 지내시려 하시지만, 유독 선대왕(先大王)께서 부탁하신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일에는 간혹 한 번 생각해서 결정할 것이 있고, 또는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생각한 뒤에 결정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일은 한 번 생각하여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세 번 생각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신은 선조(先朝)의 망극(罔極)하신 은혜를 받아 벼슬에 오름이 이에 이르렀으니, ‘선제(先帝)를 추모하고 폐하(陛下)에게 보답하는 의리156) 는 오직 전하께 있을 뿐인데, 늙어서도 죽지 않고 다시 이런 일을 보게 되었으니, 다만 지금껏 한 번 죽음이 늦어져 천하(泉下)에서 욕의(褥蟻)157) 할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큰 처분(處分)에 있어 반드시 모름지기 신중히 하였습니다.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의논을 네 마음에 미치며 의논을 시귀(蓍龜)에 미치며 의논을 경사(卿士)에 미치며 의논을 서인(庶人)에 미치라.’고 하였습니다. 신중히 하는 도리가 이와 같은데, 이제 저런 보잘것없는 조성복(趙聖復)의 말로 인해 경솔하게 막대한 일을 조처하셨으니, 오늘날의 나라 일은 다시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이 누누이 진달(陳達)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최석항이 또 말하기를,
"조성복의 죄가 중대하여 파직(罷職)에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왕세제(王世弟)가 처음에 하교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궁료(宮僚)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래 본분(本分)을 지키는 데에 편안하니, 태백(泰伯)·중옹(仲雍)의 일158) 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자성(慈聖)의 하교 가운데, ‘효종(孝宗)의 혈맥(血脈)이요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이라.’는 말씀을 차마 어기어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억지로 명령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외람되게 있게 되었는데, 또 이런 천만 뜻밖의 하교를 받들게 되니, 비록 죽더라도 장차 선왕(先王)을 뵈올 면목(面目)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장차 상소(上疏)하여 극력 사양하려 하였는데, 후에 최석항이 입대(入對)하여 명령을 중지하게 되니, 그제야 그쳤다.
10월 11일 무진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지난 밤에 비상(非常)한 명이 있어 중신(重臣)이 청대(請對)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는데, 신은 집이 성(城) 밖에 있어서 늦게서야 비로소 듣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이 지난 뒤지만 중대한 데 관계된 것이니, 신은 욕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있으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을유년159) 무렵에 선왕(先王)께서 질병이 있어서 전선(傳禪)의 명령을 내리셨을 적에 전하께서 여러 번 진소(陳疏)하시어 간절히 사양하여 눈 내리는 밤에 한데서 서 계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지금 듣건대 동궁(東宮)이 재차 궁료(宮僚)를 접견하여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다 하니, 이는 바로 전하의 을유년의 심사(心事)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선왕께서 을유년부터 전하에게 부탁하시려는 뜻이 있어서 정유년160) 에 드디어 청정(聽政)의 명을 내리셨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끝이 없는 왕위[曆服]를 이으시고 춘추(春秋)가 이제 한창이시니, 이는 근무에 싫증이 날 시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보잘것없는 일개 소신(小臣)의 말로 인해 갑자기 뜻밖의 하교(下敎)가 있어 처분(處分)이 경솔하시니, 사방(四方)에서 의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환수(還收)하셨지만, 이 뒤로는 원컨대 성심(聖心)을 굳게 갖고 다시는 이와 같은 경솔한 조처를 하지 마시어 춘궁(春宮)의 마음을 편안케 하시고, 온 나라의 희망에 보답하소서.
비망기(備忘記) 중의, ‘크고 작은 나라 일을 모두 세제(世弟)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는 하교는 다만 참결(參決)일 뿐만이 아닙니다. 후사(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청을 얻지 못하자 그대로 곧장 물러났으니, 만약 중신(重臣)의 청대가 없었다면 장차 성명(成命)을 봉행(奉行)하려 했던 것입니까? 이조(李肇)가 뒤좇아 이르러 중신이 입대(入對)한 뒤 연석(筵席)이 파하기 이전에 청대(請對)하였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막아 그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뒷날의 폐단이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후사의 신하를 책벌(責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전하의 이 조처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대신(大臣)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물러앉아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가 성명(成命)이 환수된 뒤에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재로(金在魯)가 비로소 대궐 밖에 이르른 뒤 곧바로 물러나 돌아갔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道理)입니까?
신이 합문(閤門) 밖에 와서 앉아 또 이건명의 차본(箚本)을 보매,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심야(深夜)에 계품(啓稟)했다 하여 승지(承旨)를 공척(攻斥)하였습니다. 나라에 사변(事變)이 나자 심야에 허둥지둥한 나머지 이미 상소(上疏)할 수 없으므로, 대궐로 달려와 청대하는 것이 누군들 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오히려 막으니, 언로(言路)가 이로부터 막힐 것입니다.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는 비록 곧바로 청정(聽政)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실로 무장(無將)161) 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앞으로 닥쳐올 한없는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전형(典刑)을 명백히 보이지 않는다면 무군(無君)·부도(不道)한 말이 장차 날로 앞에 진달될 것입니다. 마땅히 멀리 유배(流配)를 명하여 인심(人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옥당(玉堂)에서는 다만 파직(罷職)만을 청하였으니, 조성복의 죄가 어찌 경미한 처벌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나라에 큰일에 있는 시기에 서울에 있는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한 사람도 대궐에 나아가 쟁청(爭請)하는 이가 없었으니, 윤상(倫常)이 끊어졌고 분의(分義)가 없어졌습니다. 대신과 삼사에게 모두 견벌(譴罰)을 더한 후에야 바야흐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도승지(都承旨) 홍계적(洪啓迪)은 말하기를,
"신은 병으로 사진(仕進)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성복의 상소를 보지 못했다가 어제 비답(批答)이 내린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상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상(罪狀)을 논한다면 마땅히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大臣)이 최석항과 대궐에 나아간 것은 선후(先後)가 있을 뿐이고, 마침 이미 성명(成命)을 환수하였기 때문에 다시 청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누가 이 일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 죄는 조성복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어찌 신자(臣子)의 의리가 있겠습니까? 조태억도 또한 동일한 신하이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터인데, 이와 같이 사람을 논하니 또한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조태억이 삼사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르다 하였으나 양사(兩司)에서는 바야흐로 피혐(避嫌)하는 중에 있었고, 또 어제의 처분(處分)은 깊은 밤중에 있었으니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옥당에서 파직을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논죄(論罪)한 예(例)가 없었으나 조태억의 말은 사실(事實)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둘러대어 당(黨)을 비호하는 말입니다. 조성복의 상소에 대해 백성의 말이 떠들썩하고 여론(輿論)이 함께 통분해 하고 있으니, 삼사(三司)에서 청토(請討)를 하지 않은 것이 어찌 파연(罷軟)162) 하여 직책을 다하지 않은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大臣)도 어찌 밖에 있다가 곧바로 돌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홍계적이 말하기를,
"성명(成命)이 이미 환수되었으니, 대신이 무슨 다시 청대(請對)할 일이 있겠습니까? 조태억의 말은 모두 협잡(挾雜)으로서 대신과 삼사로 하여금 다 불안(不安)한 지경에 이르게 하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조태억이 말하기를,
"신은 대신과 삼사에 대하여 다만 규경(規警)하고자 한 것일 뿐인데, 홍계적이 몹시 신을 물고 늘어짐이 이에 이르니,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 가깝지 않습니까?"
하며, 홍계적과 조태억이 서로 다투기를 마지 않았다. 홍계적이 말하기를,
"조태억이 조성복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는 신과 다름이 없으니, 조성복에게는 반드시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여야만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결정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감히 물러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홍계적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너무 지나치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조성복(趙聖復)을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고 조태억(趙泰億)을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김창집에게 내린 치사(致仕)의 명(命)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10월 12일 기사
사과(司果) 한세량(韓世良)이 상소하기를,
"삼가 승정원(承政院)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크고 작은 나라 일을 모두 세제(世弟)로 하여금 재단(裁斷)토록 한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보니, ‘정무(政務)를 재결(裁決)하는 즈음에 언제나 세제(世弟)를 이끌어 참청(參聽)토록 하여 가부(可否)를 상의해 확정하시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전하께 북면(北面)하여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러한 말을 마음에 싹틔우고 입으로 발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세제로 하여금 조정에 임하게 하라는 것을 직접 청한 말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언제나 이끌어 참청(參聽)하도록 하여 가부를 상의해 확정하라.’고 한 것은 조정에 임하기를 청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자(臣子)가 되어서 감히 천위(天位)를 몰래 옮기려는 계획을 품었으니, 그 죄가 어찌 하루인들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음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저위(儲位)를 세우기를 청할 때 공정왕(恭靖王)163) 때의 일을 가리킨 것 같다고 한 것은 대개 아우를 저사(儲嗣)로 삼은 뜻을 인용한 것인데, 말후(末後)의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면치 못합니다. 신은 이런 자에 대하여 나라의 형벌을 바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대의(大義)가 없어지고 강상(綱常)이 무너져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장차 뒤를 이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박태항(朴泰恒) 등 28인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모든 신료(臣僚)들이 누군들 전하의 신자(臣子)가 아니겠습니까? 한밤중에 금중(禁中)에서 척지(尺紙)가 별안간 내려졌는데도, 대신(大臣)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삼사(三司)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었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대신(大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심지어 중신(重臣)이 심야(深夜)에 청대(請對)한 것을 가지고 승선(承宣)을 꾸짖었다 합니다. 아! 명색이 대신이 되어 국가의 비상(非常)한 사태를 당하여 하나는 베개를 높이 베고서 방관(傍觀)이나 하고 【김창집(金昌集)을 가리킨다.】 하나는 장주(章奏)를 올려 반격을 하니, 【이건명(李健命)을 가리킨다.】 대신이 이와 같다면 그 나머지는 알 만합니다. 청컨대 두 정승과 삼사에게 모두 견벌(譴罰)을 내리소서. 조성복에 대해서는 비록 위리 안치시키라는 분부가 계셨으나, 그의 죄는 마땅히 여기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조속히 현륙(顯戮)을 가하여 상헌(常憲)을 바르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두 상소를 물리칠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치사(致仕)의 명(命)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치사한 이후로부터 군흉(群凶)들이 크게 기뻐하여 조정에 두려워할 만한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건명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적어서 올리도록 하였다. 이건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도 수상(首相)이 또한 수차에 걸쳐 휴치(休致)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예절(禮節)을 소홀히 하고자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가 어제(御製) 화상찬(畫像贊)을 보건대 그 권주(眷注)·장허(奬許)의 융숭함은 실로 천고(千古) 군신(君臣) 중에 드물게 있는 바였습니다. 이제 왕위(王位)를 계승하신 초기에 갑자기 퇴직을 허락하시니, 어찌 선지(先志)를 따르고 구인(舊人)을 임용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수상의 휴치의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영상(領相)이 나이가 많아서 늙고 병이 많으므로 혹시 손상(損傷)을 받을까 염려하여 한가로이 있으면서 조섭(調攝)하게 하려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경솔한 처사를 면치 못하였기에 이미 환수(還收)하였다."
하였다. 이윽고 김창집의 휴치하겠다는 상소를 도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비지(批旨)를 고쳐서 내렸다.
조성복(趙聖復)을 진도군(珍島郡)에 안치(安置)하였다.
10월 13일 경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불러서 빈청(賓廳)에 모이도록 명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나의 병근(病根)이 날로 점차 증가되어 병이 나을 시기가 없을 듯하다. 일찍이 저사(儲嗣)를 결정하여 실제 대리(代理)하게 하고자 하여 이것을 자성(慈聖)께 아뢴 지 오래 되었는데, 책례(冊禮)를 이제 막 거쳤기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나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마치 대소(臺疏)로 인해 발단이 된 것처럼 여기는 자가 있어 쟁론(爭論)이 분운(紛紜)하기 때문에 우선 환수(還收)하여 나의 의사를 표시하고, 조성복(趙聖復)의 망솔(妄率)한 죄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공사(公事)가 적체(積滯)되어 수응(酬應)이 절박(切迫)하니 한결같이 그저께의 비망기에 따라 거행하여 조섭(調攝)의 도리를 온전히 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과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적어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다시 세 차례에 걸쳐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춘추(春秋)가 한창이시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선치(善治)를 도모하는 것이 바로 전하께서 오늘에 있어 힘써야 할 바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런 한가로이 정양이나 하겠다는 하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질양(疾恙)이 오래 되고 수응(酬應)이 곤란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전하와 같이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정무(政務)를 익숙하게 재처(裁處)하는 즈음에 어찌 어려운 일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기(神氣)가 조금 피곤한 때가 있으면 굳이 계속 근로(勤勞)하실 필요가 없고 가혹 편리한 대로 휴식을 취하여 이양(頤養)하는 방도로 삼으셔도 조금도 방해로운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계책을 세우지 않으시고 곧바로 이와 같은 비상(非常)한 조처를 하시어 스스로 비자(丕子)164) 의 책임을 가벼이 하시고 억지로 많은 백성들의 심정(心情)을 거스르며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정유년165) 의 일은 오늘날과 전혀 다릅니다. 선왕(先王)의 성후(聖候)가 병이 낫지 않고 오래 끌어서 비록 만부득이한 조처가 있었지만, 이것이 어찌 오늘날 비의(比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죽음이 있을 뿐이며 결단코 감히 봉행(奉行)할 수 없기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삼가 이에 도로 되돌려 보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병에 대해서는 이미 전후(前後)의 비답에서 상세히 말하였다. 만일 지금에 와서 치료하지 않는다면 실로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대리(代理)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이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경(卿) 등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다시 번독(煩瀆)하지 말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젊으시고 신기(神氣)가 바야흐로 왕성하십니다. 비록 질환(疾患)이 있다고 하교하셨지만 이미 밖으로 드러난 증상이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더욱 분려(奮勵)를 가하시어 지치(至治)를 넓힐 것을 기약하여 선대왕(先大王)의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되는데, 단지 편안할 방도만 염두에 두시어 이처럼 정무(政務)를 그만두실 생각을 하시니, 신 등은 실로 전대(前代)의 사첩(史牒)에도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속히 성상의 마음을 돌리시어 비망기(備忘記)를 환수하소서."
하고, 여러 승지(承旨)들 또한 두 번에 걸쳐 비망기를 도로 회수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모두 답하기를,
"이미 정신(廷臣)의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삼사(三司)와 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아뢰었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들이 재차 아뢰었는데, 대락 이르기를,
"성상의 비답 가운데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라는 것은 세종조(世宗朝)의 일을 가리킨 듯한데, 그때 영묘(英廟)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여러 해였고, 또 숙환(宿患)이 있었으니, 문종(文宗)께서 저사(儲嗣)로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한 것은 실로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일분(一分)이라도 오늘날의 일에 근사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병근(病根)이 내상(內傷)을 초래하고 심화(心火)가 자만(滋漫)하여, 화열(火熱)이 오르내리는 즈음에 정신(精神)이 까마득하여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혼미상태에 빠진다. 권태스러움이 이와 같으니, 어찌 슬프고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국본(國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나의 화열(火熱)이 점차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대로 강행(强行)한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고, 조리하여 치료하는 데만 마음을 쓴다면 공무(公務)에 방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서 세제(世弟)로 하여금 근심을 나누어 갖도록 하게 하는 이외에 다시 다른 방도가 없다. 이것은 다만 나의 일신(一身)만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국가(國家)를 위한 것이다. 경(卿) 등은 나를 사랑하여 생각을 움직여 주기 바란다."
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어제 천만 뜻밖에도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갑자기 내리시니, 신은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기에 장차 진심(眞心)을 토로하여 장주(章奏)를 진달하려 하던 즈음에 성상의 마음이 회오(回悟)하시어 곧바로 내리신 분부를 다시 거두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삼가 송축(頌祝)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두근거림이 아직도 남아 안정되지 않는 가운데 또 삼가 빈청(賓廳)에 내린 하교를 보니, 신은 심담(心膽)이 모두 두렵고 떨려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나 어쩌지를 못하였습니다. 아! 오늘날은 정유년166) 의 일과는 아주 같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젊으시니 바로 정성을 다해 정치에 힘쓸 시기입니다. 비록 건강이 다소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더라도 신명(神明)이 도와주시어 회복되는 데 이를 수 있을 터인데, 갑자기 막중하고 막대한 일을 신처럼 불초(不肖)한 사람에게 시키려 하십니다. 신은 이미 학문(學問)에 어둡고 또한 지식(知識)도 없는데, 어찌 감히 그 만분의 일이나마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전하의 오늘의 하교는 비록 수고를 대신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왔지마는, 도리어 성상의 마음에 근심을 끼쳐 드릴까 두렵습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며 인자하신 전하의 앞에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종사(宗社)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군정(群情)을 따르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은 앞서 이미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니, 실로 가식으로 사양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 지금 이렇게 국사(國事)가 파탕(波蕩)하고 간우(艱虞)가 눈앞에 가득한 시기에 나의 병고(病痼)로 인하여 기무(機務)가 적체되는 것이 많으니, 걱정스럽고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못해서 그대에게 대리(代理)를 명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인 것이다. 어찌 사양할 수 있으랴? 아! 부탁(付託)이 지극히 무겁도 또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조심하여, 경건히 하고 신중히 해서 분부를 잘 받들고, 다시 사양하지 말아서 온 나라 신민(臣民)의 여망(輿望)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승지를 보내어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10월 14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여 의약(議藥)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의 병근(病根)은 다만 일시적인 증세일 뿐이 아니니, 만일 나의 소원을 따라서 마음을 편히 갖고 조섭해 치료한다면 혹시 일분(一分)의 효험이라도 있을 것이나,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심려(心慮)를 허비하여 밤낮으로 근로(勤勞)한다면 아무리 기약(奇藥)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지금 약(藥)을 쓰지 않고도 병을 낫게 할 방도가 있는데, 경(卿) 등은 입에 쓴 약을 시험하고자 하니, 또한 곤란하지 않겠는가? 나의 소원을 빨리 따르는 것이 바로 병을 치료하는 만전(萬全)의 방도이니, 입진하여 의약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진심(眞心)을 토로하는 장주(章奏)를 올리고 우러러 성상의 마음이 회오(回悟)하기를 바랐는데, 비지(批旨)를 받음에 있어 사의(辭意)는 더욱 간절하고 계회(戒誨)는 더욱 지극하니, 신은 더욱 황송한 마음 가눌 길 없고 이어서 마음이 우울합니다. 아! 신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저위(儲位)도 진실로 이미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오늘에 있어 또 이러한 감당할 수 없는 분부를 내리니, 하늘을 쳐다보고 체읍(涕泣)하고 벽(壁)을 돌며 방황하면서 차라리 자진(自盡)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싶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결단코 감당할 수 있는 형세가 없기에 이에 감히 부월(鈇鉞)을 피하지 않고 다시 전하께 번독(煩瀆)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국사(國事)가 천만 다행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의 비지(批旨) 가운데 이미 마음속에 있는 간곡한 사연을 상세히 이야기하였으니, 다시 무슨 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는 또한 이미 나의 병세를 알고 있는데, 어찌 양해하지 못하겠는가? 나의 뜻은 확고하게 결정되었으니, 결단코 윤종(允從)할 이치가 없다."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세제(世弟)가 나의 훈계(訓戒)한 바를 거행하지 않으니, 근심하고 번민하여 마음이 무척 슬프다.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이 함께 가서 위로(慰勞)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세제부(世弟傅) 이건명(李健命), 빈객(賓客) 송상기(宋相琦)·최석항(崔錫恒)·이만성(李晩成)·이관명(李觀命) 등이 궁료(宮僚) 유척기(兪拓基)·윤순(尹淳)·서명균(徐命均)·조현명(趙顯命)과 함께 들어가 만나보고, ‘성의(誠意)를 기울여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에 노력하고 지나치게 우려하고 상심하여 양전(兩殿)의 걱정을 끼치지 말 것’을 청하였다. 세제가 드디어 다시 상소하기를,
"간혈(肝血)을 다 쏟아서 재차 신엄(宸嚴)을 번독(煩瀆)하였으나, 미미한 정성이 도달하지 못해서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니, 신은 여기에서 더욱 다시 놀라고 두려워 마음이 조여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이미 끝내 자기 본분(本分)을 지키지 못하고 외람되이 저사(儲奢)의 지위에 있었는데 또 능히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갑자기 비상(非常)한 분부를 받게 된다면, 신이 뒷날에 장차 무슨 낯으로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혼령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조속히 분부를 다시 거두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우와 형 사이에 고통을 나누어 갖는 의리를 깊이 생각하여 나로 하여금 병든 가운데 정신을 수양하고 몸을 보(補)하는 방도를 실현하게 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나의 의지가 확고하게 결정되었으니, 비록 하루에 열 번의 장소(章疏)를 올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윤종(允從)할 이치가 없다. 다시 번거롭게 진달하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청대(請對)하기를 3차에 걸쳐서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신 등이 서로 이끌고 합문(閤門)을 향하여 부르짖었으나 성상의 비답은 매양 질병으로써 하교를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화열(火熱)이 상승(上升)하는 증후는 반드시 모름지기 사람을 상대하고 사물을 접하여 울적한 기분을 풀어버린 뒤에야 화기(火氣)가 내려가고 몸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만기(萬機)가 비록 번거롭지만 순리(順理)로 응접(應接)한다면 바로 소도(疏導)하고 절선(節宣)하는 방도에 적합할 터인데, 무슨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으시기에 이러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젊으시고 만화(萬化)가 유신(維新)되었는데, 즉위하신 원년(元年)에 갑자기 짐을 벗어버리고 한가한 데로 나아가려 하시니, 신자(臣子)된 이로서 여기에 조금이라도 봉승(奉承)할 마음이 생겨 서로 이끌어 물러간다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모조리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 그 죄를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병증(病症)을 조섭하려 하신다면 천박한 견해를 이미 위에서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노고(勞苦)를 덜고자 하신다면 곧바로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군정(群情)이 진정되고 중외(中外)가 기뻐 날뛰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 등은 번거롭게 떠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전하의 노고에 대한 근심은 덜어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덜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것을 생가하지 않으시고 자기 주장을 굳게 지키시고 신하들의 요청을 굳이 거절하심이 이처럼 민망스럽게 하십니까? 신 등은 비록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더라도 청을 이루지 못한다면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쾌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혼령을 위로하고 춘궁(春宮)의 민박(悶迫)한 심정을 안심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前後)의 비지(批旨)에서 이미 나의 뜻을 상세히 말하였으니, 다시 무슨 많은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대리(代理)시키는 것은 정유년에 이미 행한 일에 의거한 것이고, 고통(苦痛)을 나누어 갖는 것은 바로 형제간의 우애(友愛)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번거로운 정무(政務)를 나누어서 다소나마 병든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위로는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대(輿儓)에 이르기까지 연일 대궐을 지키어 우리 군생(群生)들로 하여금 들끓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모양인가? 그리고 또 나의 병세가 조금 낫게 되면 다시 친히 서정(庶政)을 맡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경(卿) 등은 다시는 번독(煩瀆)하지 말고 즉시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또한 재차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아뢰기를,
"전하의 춘추는 30세가 채 안되셨으니 권태가 드실 나이가 아니고, 사위(嗣位)한 지 이제 겨우 1주기가 되었으니 바로 정성을 다해 정치를 힘쓰실 시기입니다. 비록 질병이 고질(痼疾)이 되었다는 하교를 하시었으나 나타난 증상은 대단한 데 이르지 않았으며, 수응(酬應)은 서무(庶務)에 지체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어찌 일시적으로 병환이 있다고 하여 종사(宗社)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 하교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어제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진 후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하시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이에 재차 이런 하교를 받으면 그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망극(罔極)하게 될 것은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조속히 재삼 신중히 생각해보시고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도문(都門) 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조속히 성명(成命)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주청 부사(奏請副使) 조태억(趙泰億)이 대간(臺諫)의 논핵을 당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개차(改差)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윤양래(尹陽來)를 그 대신 임명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심수현(沈壽賢) 등 32인, 판중추(判中樞) 김우항(金宇抗)·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 사직(司直) 이태귀(李泰龜)·목사(牧使) 유술(柳述) 등 8인, 전 군수(郡守) 정중만(鄭重萬) 등 9인, 전 목사(牧使) 이형좌(李衡佐)등 47인, 관학 유생(館學儒生) 임선(任選) 등 1백 70인, 신방(新榜) 생원(生員) 민통수(閔通洙) 등 53인, 생원 이현모(李顯謨) 등 2백 9인, 생원 이만승(李萬升) 등 2백 97인, 생원 이장춘(李長春) 등 1백 15인이 전후에 걸쳐 각기 상소(上疏)하여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 또한 상소하여 성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다.
사직(司直) 권규(權珪) 등 30인이 상소하기를,
"아! 마음이 아픕니다. 황천(皇天)이 어찌 우리 국가를 난망(亂亡)케 하고자 하시며, 조종(祖宗)이 어찌 우리 종사(宗社)를 권우(眷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고, 어찌하여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 춘궁(春宮)이 어찌 편안히 이 분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있고 재적(載籍)이 있은 이래로 어찌 오늘날과 같은 거조(擧措)가 있었겠습니까? 과거에 있어서도 대리(代理)하여 청저(聽政)한 일이 비록 간혹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 군주의 춘추(春秋)가 점차 많아지고 질병이 억지로 하기 곤란하여 만부득이한 뒤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상께서 새로 대위(大位)에 올라 정성을 다해 정치를 힘쓰시어 청명(淸明)한 덕화(德化)를 사방(四方)에서 눈을 씻고 자세히 보면서 기다리는데, 한 명의 적신(賊臣)의 말로 인하여 이와 같은 절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시니, 이것이 어찌 여러 백성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질병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전하께서 질병이 없다는 것은 신민(臣民)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이것이 나의 본뜻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전하의 본뜻이 아니라는 것을 신민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격뇌(激惱)의 하교를 내리시어 적신(賊臣)의 말을 사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오늘의 사태는 누구가 초래한 것입니까? 신 등은 조성복(趙聖復)의 무리가 초래한 것으로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조성복의 머리를 베어서 춘궁(春宮)의 마음을 편안케 하시고, 조속히 어제 내리신 분부를 환수하시어 온 나라 사람의 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권규 등이 어떻게 전하의 본뜻이 아닌 것을 알고서 방자하게 이러한 임금을 무함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 무리들이 성상의 이번 일을 가지고 마치 전하께서 격뇌(激惱)한 바 있어서 발생한 것처럼 하였으니, 성궁(聖躬)을 무함한 죄는 한세량(韓世良)보다 심하고 국본(國本)을 위핍(危逼)하는 계책은 유봉휘(柳鳳輝)보다 더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10월 15일 임신
천둥이 치고 우박(雨雹)이 내렸다.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회수(回收)할 것을 정청(庭請)하고, 승정원(承政院)과 양사(兩司)에서도 각각 계(啓)를 올려 거듭 청하고,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이 여러 종친(宗親)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으니, 고통(苦痛)을 나누어 갖는다는 뜻으로 끌어대어 개유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은 봉독(奉讀)하기를 절반이 되기 전에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뒤섞어 흘렀습니다. 성상의 체후(體候)가 비록 혹시 다소 불편하신 점이 있다 하더라도 조용히 조섭(調攝)하신다면 건강을 멀지 않아 회복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비상(非常)한 하교를 내리시어 끝내 내리신 분부를 취소하는 윤음을 아끼시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쾌히 회오(悔悟)하는 단서를 보이시어 조속히 환수(還收)하는 분부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前後)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개유하였다."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이 감히 위고(危苦)의 심정을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곡히 진달하기를 지금 벌써 몇 차례 하였는데도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유음(兪音)은 오히려 내리지 않고 있으니, 신은 황송하고 우울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인심(人心)의 있는 바에 천의(天意)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비록 신의 가슴이 무너지는 절박한 심정은 살피시지 못한다 하더라도 홀로 온 나라 신서(臣庶)의 희망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필부(匹夫)가 소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여기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성상의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써 어찌하여 여기에 조촉(照燭)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신은 매양 비지(批旨)를 받을 적마다 삼가 스스로 비통하여 용납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지 부모(天地父母)께서는 다시 성찰(省察)을 더하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연일(連日)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일전에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삼사(三司)·승정원·종실(宗室)이 각각 진계(陳啓)하였다.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정유년167) 에 이미 거행한 일을 가지고 하교를 하십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바야흐로 젊으시니 이미 선조(先祖)의 노년(老年)의 시기가 아니며, 전하께서는 기거(起居)가 손상이 없으시니 또 선조(先朝)의 병이 깊어 오래 낫지 않은 때와는 다릅니다. 정유년의 일이 어찌 오늘날 끌어다 시행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전하께서는 별로 대단치 않으신 질병으로써 이런 비상(非常)한 거조(擧措)가 있으시니, 어찌 여러 신민(臣民)의 기대하는 바에 매우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춘궁(春宮) 저하(邸下)께서는 비망기(備忘記)가 있은 이래로부터 근심하고 고민하고 애태우며 울면서 몸둘 바를 모르는 듯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심지어 사부(師傅)를 보내 위유(慰諭)하는 조처까지 있으셨는데, 전하께서 이미 춘궁의 불안해 하는 마음을 살피고 계시면서 이에 막대한 일을 억지로 맡기시니, 전하께서 춘궁을 우애(友愛)하시는 것은 단지 춘궁의 걱정스럽고 절박한 심정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전하께서 설혹 불평(不平)하신 증후가 있으시더라도 곧바로 신 등을 와내(臥內)로 들어오게 하여 전하의 앞에서 할 말을 다 끝내도록 하여야 합니다. 바라건대 유난(留難)168) 하지 마시고 일전에 내리신 하교를 쾌히 도로 거두시어 온 나라 신민(臣民)의 소원에 부응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 등의 정성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나의 병세가 만약 수응(酬應)할 수 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근래에 화열(火熱)의 증상이 점차 상승하여 정신을 차리어 정무를 살필 수가 없는데 하루 동안에도 누차 발작을 하니, 장차 좌우(左右)로 하여금 준례를 사고하여 거행하게 하는 데 이를 지경이다. 이와 같이 되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진심에서 하는 말이니, 좌우(左右)에게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제(世弟)에게 거행하는 것이 옳겠는가? 경 등은 깊이 생각해 보고 일전에 내린 비망기(備忘記)대로 거행하라. 내 형제와 고통을 나누어 갖게 되면, 한편으로는 나의 병을 조섭(調攝)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장차 멸망해 가는 나라를 붙들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날 정청(庭請)하여 올린 계사(啓辭)가 이미 들어갔는데 비답은 밤중이 되어도 내리지 않으니,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 나가서 비답을 기다렸다. 밤이 깊어서야 비답이 그제야 내려오니, 대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가 이미 비답을 받고 나서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불러 앞에 이르게 하여 묻기를,
"지금 주상의 비답에 ‘좌우(左右)에게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자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는 하교까지 있으셨다. 이와 같은데도 다시 간쟁하는 것이 옳겠는가? 정청(庭請)을 이제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였는데,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사직(司直) 이광좌(李光佐) 등이 유독 불가하다는 태도를 지켰다. 이광좌가 언성(言聲)을 높여 대신(大臣)을 책망하니, 이건명(李健命)이 노기를 띠며 이광좌를 질책하여 물러가도록 하므로, 이광좌는 다투기를 더욱 힘차게 하였다.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이 바야흐로 이유(李瑜)와 박태항(朴泰恒)의 형률을 적용하는 일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 인피(引避)하여 미처 비답을 받지 못했는데, 역시 여러 대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나아가 분연(奮然)히 정청(庭請)을 정지하는 것이 부당함을 말하였다. 김창집 등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의논하자."
하고 여러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각각 조방(朝房)에서 자고 기다리게 하였다.
10월 17일 갑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리(代理) 절목(節目)을 진달하였는데, 그 차자에 이르기를,
"근일에 갑자기 비상(非常)한 조처가 있으므로, 합문(閤門)에서 나흘을 부복(俯伏)하였으나 윤유(允兪)를 내리지 않으셨고, 6, 7차례에 걸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굳이 거절하시기를 더욱 심하게 하여 끝내 한 번도 청광(淸光)을 뵐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다만 성의(誠意)가 천박하여 능히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므로, 신 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하겠습니다. 지난밤에 내리신 비지(批旨)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받들어 읽기를 절반도 되기 전에 심담(心膽)이 모두 떨어져서 경황(驚惶)·진계(震悸)한 나머지 앙대(仰對)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당초 비망기(備忘記) 중의 ‘대소(大小) 국사(國事)를 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는 교지(敎旨)는 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이니, 신 등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습니다. 정유년의 일에 이르러서는 바로 선조(先朝)에서 재정(裁定)한 것이며, 또 절목(節目)의 구별(區別)도 있으니, 그것이 ‘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는 분부와 비교해 볼때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성상의 하교는 지성(至誠) 측달(惻怛)한 데서 나왔으니,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또한 어찌 감히 경솔하고 성급한 것에 구애를 받아 모조리 어기고 거절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다만 정유년의 절목(節目)에 따라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차자가 들어간 뒤 정청을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날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약방(藥房) 문안(問安)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지난밤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고 여러 대신(大臣)들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청하여 모여 앉혀 놓고 묻기에, 신이 ‘이 일은 비록 한 해가 지나고 세월이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로 승순(承順)할 이치가 없다.’며 누누이 쟁집(爭執)하였더니, 여러 대신들이 ‘우선 진차(陳箚)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진달(陳達)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신의 차자 내용을 삼가 들으니, 정유년의 절목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했다 합니다. 아! 한밤중에 갑자기 소견(所見)을 변경하여 의논하지 않은 채 국사를 같이 처리할 신하들이 이와 같은 종전에 없던 해괴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후에 걸친 성상의 하교는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비답에 지나지 않는데, 몸이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힘을 다해 광구(匡救)할 의리는 생각지 않고 조급히 서둘러 봉행(奉行)하기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하였으니, 그 마음의 있는 바는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쾌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신인(神人)의 희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이 상소를 물리치고 임금에게 올리려 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이조(李肇)·김연(金演) 등이 조방(朝房)에 있으면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간쟁할 것을 함께 의논하였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사약방(司鑰房)에 들어가 앉아서 사람을 승정원(承政院)에 보내 청대하고, 이광좌 등은 금호문(金虎門)을 통해서 들어가 또한 각각 청대하였다. 승지 홍계적(洪啓迪) 등이, ‘조태구가 바야흐로 대간(臺諫)의 논핵을 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청대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물리치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왕복(往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양사(兩司)의 관원이 막 대각(臺閣)에 나왔다가 조태구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우선 그를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계사(啓辭)가 미처 임금에게 올라가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합문(閤門)으로부터 승정원으로 허둥지둥 달려나와 조태구를 인견(引見)한다는 것을 전교(傳敎)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전(殿)에 나와 계십니다."
하니, 승지 등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물끓듯 진동(震動)하였다. 김창집 등은 이미 차자(箚子)를 올렸고 조태채는 질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김창집이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 등과 비변사(備邊司)에 있으면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조태구가 장차 입대(入對)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허둥지둥 지름길로 빠른 걸음으로 합문으로 나아갔는데, 조금 후에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뒤좇아 당도하여 모두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좌의정 이건명(李健命)·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인견(引見)하였으며,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돈녕(判敦寧) 송상기(宋相琦), 행 좌참찬(行左參贊) 최석항(崔錫恒), 공조 판서(工曺判書) 이관명(李觀命),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의현(李宜顯), 행 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조(李肇),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집(李㙫),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재로(金在魯),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병상(李秉常), 행 사직(行司直) 이정신(李正臣),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한중희(韓重熙)·안중필(安重弼)·유숭(兪崇)·조영복(趙榮福)·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 응교(應敎) 신절(申晢),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비상(非常)한 하교(下敎)를 받고서 신 등은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정쟁(庭爭)하였으나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밤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고 보니 한결같이 억지로 떠들어댄다는 것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아침에 차자를 올려 앙품(仰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우상(右相)의 입대(入對)로 인하여 같이 들어와 뵙게 되니, 신 등의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오늘 천안(天顔)을 뵙게 된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은 비망기가 갑자기 내려져 중외(中外)가 경황(驚惶)한다는 것을 듣고 감히 스스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은 입장에 있다고 해서 물러나 향려(鄕廬)에 있을 수만은 없기에, 성(城) 밖에 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진달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갑자기 대신(大臣)이 이미 정청(庭請)을 정지시켰다는 것을 듣고서 신은 가슴이 무너지는 절박함과 놀라움을 견딜 수 없기에 사생결단하고 반드시 간쟁하고자 감히 와서 청대(請對)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니, 이것은 신(臣)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나라 사람들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열(火熱)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인해 기무(機務)를 그만두려고 하시지만, 화열이 올라올 때에는 잠시 재결(裁決)을 중지하셨다가, 화열이 내리기를 기다려 마음이 안정되고 뜻이 편안해지면 저절로 화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지려(志慮)가 청명(淸明)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사물이 닥쳐와서 거기 순응(順應)하게 된다면 사무(事務)가 지체됨이 없을 것이니, 질병을 다스리는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병행되어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국가(國家)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고 바로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영고(寧考)께서 전하께 부탁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전하께 의귀(依歸)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대보(大寶)의 위(位)는 군주가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군주(君主)가 한갓 자기 한 사람의 사정(私情)을 따라서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실행하는 것이 전하께서 오늘날 하는 바처럼 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백수(白首)의 노신(老臣)이 선대왕(先大王)께서 승하하신 날 죽지 못하고 차마 오늘의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신이 이 일에 있어 능히 광구(匡救)하지 못한다면, 비단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先王)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신이 산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감히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었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차례대로 되풀이하면서 진청(陳請)하였고, 이광좌·유복명이 더욱 극력 간쟁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어제의 비지(批旨)에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라 문자(文字)로 다시 진달하기가 어려웠고, 또 절차(節次)가 점차 증가하여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절목(節目)을 거행하자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었던 것이니, 실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내리신 분부를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반드시 환수하게 하려는 뜻이야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들과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일 일전에 내리신 비지를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사피(辭避)하겠습니까?"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날마다 청대(請對)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소견을 아뢴 계사(啓辭)는 아침에 들어갔는데 저녁에야 비답(批答)이 내려왔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 내리신 전교(傳敎)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던 일이라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의 관원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더니, 말하는 바가 각자 같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거듭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들으니, 을유년169)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셨을 때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서신(書信)을 보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더라도 만일 혹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우선 승순(承順)하여 사무(事務)에 참결(參決)하기를 청하는 것이 이득(利得)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여러 대신들과 서로 의논하여 차자(箚子)로써 진달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회수 할 것을 명하신다면, 어찌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최석항이 부연하여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 을유년의 전선(傳禪)하려 한 일 또한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움으로 인해서 곧바로 도로 중지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계술(繼述)의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바로 대리(代理)하는 것인데, 최석항이 부연하여 이에 을유년의 일에 비교하니, 인심(人心)이 어찌 더욱 놀라고 의혹스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비망기를 환수하기를 청할 마음이야 어찌 여러 사람들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서로 잇따라 극력 간쟁하여 수작(酬酢)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억지로 떠들어댄 것이 몹시 황공스러운 일인 줄 알지만, 신이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를 먼저 다스린 후에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신 등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누차 청대(請對)하였으나 한 번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두 신 등이 성의가 천박한 죄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전후의 비망기를 쾌히 환수할 것을 허락한 후에야 온 나라의 파탕(波蕩)된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와 성상 앞에 올려놓도록 하소서."
하고,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제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이러한 환수하라는 분부가 있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물러나 구학(丘壑)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창집·이이명·조태구가 잇따라 ‘자주 의관(醫官)의 입진(入診)을 허락하여 증상에 따라 약(藥)을 의논할 것’을 청하고, 민진원 또한 ‘자주 신료(臣憭)를 접견하여 가부(可否)를 상제(相濟)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간 뒤에 승지(承旨)와 삼사(三司)에서는 남아서 일을 아뢰었다. 홍계적 등이 나와 말하기를,
"본원(本院)에서 바야흐로 우상(右相)이 함부로 들어와 청대(請對)한 잘못을 배척하여 계품(啓稟)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인견(引見)하신다는 분부를 갑자기 내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왔다는 것을 들으셨는지요? 군주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내외(內外)로 하여금 방비가 없도록 하고 곁으로 사경(私逕)을 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고(入告)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구히 막아서 군정(群情)의 의혹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어유룡·박치원·신무일·황재 등이 아뢰기를,
"조태구는 대각(臺閣)에서 죄를 성토하는 시기에 당하여 이에 감히 궐문(闕門)으로 함부로 들어와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비록 여지(餘地)가 없다 하지만 하루라도 나라가 있는 이상 그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태구가 선인문(宣仁門)을 통해서 들어와 청대(請對)하였으나, 승정원에서는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품달(稟達)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입시(入侍)하라는 일을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저 신린(臣隣)을 접견함에 있어서 후사(喉司)를 경유하는 것은 바로 3백 년 동안 시행해 온 정규(定規)입니다. 이제 대신(大臣)이 어떤 사경(私徑)을 통해서 미품(微稟)하여 들어왔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으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린다면 비록 북문(北門)의 변(變)170) 이 있다 하더라도 방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승전색(承傳色)과 사알을 잡아다 문책하여 엄중하게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박치원이 아뢰기를,
"최석항이 연중(筵中)에서 진달(陳達)하면서 곧바로 오늘날 대리(代理)의 명(命)을 을유년 전선(傳禪)의 일로 지적하여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의혹스럽게 만들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당초 비망기가 깊은 밤중에 내려졌을 때 최석항은 혹시나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갈까 염려하였는데, 대신이 막 나아가자 곧바로 스스로 독대(獨對)하여 여려 신하들이 극력 간쟁할 수 있는 길을 미리 막았고, 자기 혼자서 처리하려는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정태(情態)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병을 숨길 수 있는가? 성인(聖人)도 또한 질병이 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고명편(顧命篇)에 이르기를, ‘이제 하늘이 나에게 질병을 내려 장차 일어나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왕(成王)이 그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임금이 질병이 있으면 신하가 숨길 수 있겠는가? 늘 있는 병은 실덕(失德)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경》의 금등편(金縢篇)에 이르기를, ‘너희 원손(元孫) 모(某)가 나쁜 병을 만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대저 임금에게 불행히 병이 있는데, 좌우(左右)에서 나라의 주권을 도둑질하여 사직(社稷)이 장차 망하게 되었다면, 비록 즉위(卽位)한 원년(元年)일지라도 저사(儲嗣)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이고, 저사를 이미 세웠다면 어찌 국정(國政)을 섭정(攝政)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가 병이 있는데도 동궁(東宮)이 섭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난신(亂臣)이고, 군주가 병이 없는데도 동궁이 섭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난신이다. 아! 임금께서 병이 있는가, 병이 없는가? 최석항이 전상(殿上)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국문하라 명하시고 신치운(申致雲)이 전상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가두라고 명하신 후에야 저들의 무리가 비로소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질병을 끝내 숨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사대신(四大臣)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어찌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대신들은 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보고도 오히려 일조(一朝)의 화(禍)를 고려하여 능히 왕세제(王世弟)를 높여서 떠받들어 국정(國政)을 섭정하기를 청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불충(不忠)한 죄가 저들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태구 등이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들어옴에 미쳐서 위기(危機)가 위로 동궁(東宮)에게 닥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김창집 등이 이에 창황히 따라 들어가 같은 목소리로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니, 또한 그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이 멋대로 장살(狀殺)을 행함에 있어서 오로지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죄안(罪案)으로 삼았고, 을사년171) 이후에 이르고 나서는 스스로 연명 차자에 위배한 자가 도리어 그들의 역안(逆案)이 될 줄을 알았기 때문에 드디어 삼변(三變)의 설을 만들어내어 처벌하였다. 삼변은 바로 정청(庭請)·연차(聯箚)·수환(收還)이다. 이른바 ‘삼변’이란 것은 그것이 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충성을 하는 데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54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169] 을유년 : 1705 숙종 31년.[註 170] 북문(北門)의 변(變)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하게 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한 것.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註 17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논한다. "병을 숨길 수 있는가? 성인(聖人)도 또한 질병이 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고명편(顧命篇)에 이르기를, ‘이제 하늘이 나에게 질병을 내려 장차 일어나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왕(成王)이 그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임금이 질병이 있으면 신하가 숨길 수 있겠는가? 늘 있는 병은 실덕(失德)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경》의 금등편(金縢篇)에 이르기를, ‘너희 원손(元孫) 모(某)가 나쁜 병을 만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대저 임금에게 불행히 병이 있는데, 좌우(左右)에서 나라의 주권을 도둑질하여 사직(社稷)이 장차 망하게 되었다면, 비록 즉위(卽位)한 원년(元年)일지라도 저사(儲嗣)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이고, 저사를 이미 세웠다면 어찌 국정(國政)을 섭정(攝政)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가 병이 있는데도 동궁(東宮)이 섭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난신(亂臣)이고, 군주가 병이 없는데도 동궁이 섭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난신이다. 아! 임금께서 병이 있는가, 병이 없는가? 최석항이 전상(殿上)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국문하라 명하시고 신치운(申致雲)이 전상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가두라고 명하신 후에야 저들의 무리가 비로소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질병을 끝내 숨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사대신(四大臣)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어찌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대신들은 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보고도 오히려 일조(一朝)의 화(禍)를 고려하여 능히 왕세제(王世弟)를 높여서 떠받들어 국정(國政)을 섭정하기를 청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불충(不忠)한 죄가 저들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태구 등이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들어옴에 미쳐서 위기(危機)가 위로 동궁(東宮)에게 닥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김창집 등이 이에 창황히 따라 들어가 같은 목소리로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니, 또한 그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이 멋대로 장살(狀殺)을 행함에 있어서 오로지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죄안(罪案)으로 삼았고, 을사년171) 이후에 이르고 나서는 스스로 연명 차자에 위배한 자가 도리어 그들의 역안(逆案)이 될 줄을 알았기 때문에 드디어 삼변(三變)의 설을 만들어내어 처벌하였다. 삼변은 바로 정청(庭請)·연차(聯箚)·수환(收還)이다. 이른바 ‘삼변’이란 것은 그것이 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충성을 하는 데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다.".
10월 18일 을해
환관(宦官) 최홍(崔泓)·사알(司謁) 김천석(金天錫)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켰다. 최홍은 공칭(供稱)하기를,
"17일에 신이 당번 승전색(承傳色)으로서 입직(入直)하였습니다. 별감(別監)의 무리가 와서 대신(大臣)의 입시(入侍)하는 일에 대해 전달하였는데, 우상(右相)의 거취(去就)에 대해서는 본래 아는 바 없었으므로 또한 진품(陳稟)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고, 김천석은 공칭하기를,
"17일에 입직 내관(入直內官) 김경표(金景杓)가 와서 우상·승정원·삼사(三司)를 인견(引見)한다는 분부를 전달하였는데, 재삼 독촉하였기 때문에 창황히 승정원에 명령을 전달하였을 뿐이며, 다른 것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니, 의금부에서 김경표를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신(廷臣)이 정청(庭請)을 시작한 이후에 연이어 진수당(進修堂)에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합문(閤門)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앞에서 인도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물었더니 우상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내가 비로소 그 연유를 알고서 하교한 것이며, 본래 아래에서 은밀히 아뢴 일이 아니다. 내관과 사알은 원래 논죄(論罪)할 단서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
하였다.
10월 20일 정축
김창흡(金昌翕)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10월 24일 신사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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