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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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경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卒)하였다. 권상하의 자(字)는 치도(致道)인데, 견확(堅確)하고 중후(重厚)하였으며 학문을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히 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宋時烈)을 사사(師事)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에 써주기를, ‘한수재(寒水齋)’라 하였다. 송시열이 초산(楚山)에서 화(禍)를 입었을 때 세도(世道)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이어서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 주었는데, 옷은 바로 주자(朱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바로 이이(李珥)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草本)으로, 김장생(金長生)이 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의 의리에 따라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는데,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에 건립하고, ‘만동묘(萬東廟)’라 이름하고, 사변(四籩)·사두(四豆)119)  로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皇帝)를 제사하였다. 갑신년120)  에 이르러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121)  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122)  에 숙묘가 온천(溫泉)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召命)을 받아 행궁(行宮)에 입견(入見)하였다가, 회란(回鑾)123)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124)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門人)으로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9월 5일 계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이 주원(廚院)125)  에서 농간을 부리고 폐단을 일으키는 한 명의 환관(宦官)을 규정(糾正)하지 못하여, 공물(貢物)을 바치는 사람들이 환시(宦侍)가 뇌물을 요구하는 데 시달리게 되어 응역(應役)126)  할 수 없는데도, 앉아서 보고만 있으니, 그들이 장차 환산(渙散)127)  에 이를 지경입니다. 원컨대 신의 주원과 선혜청(宣惠廳) 두 직임을 체직(遞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그를 체직시킬 수 없음을 극력 진달하니, 임금이 다시 이건명의 말을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이 설리(薛里)128)  와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고 무거움을 논하지 말고 책벌(責罰)이 있은 후에야 신이 행공(行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건명도 먼저 설리를 체직시키고 이어서 죄책(罪責)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민진원과 이건명이 잇따라 말하기를,
"이미 책벌을 허락하셨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와 양사(兩司)에서 거듭 유봉휘(柳鳳輝) 등의 일을 탑전(榻前)에서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를 말감(末減)129)  하여 멀리 귀양보내신다면 인심(人心)을 진정시킬 수 없을 것이니, 성상께서 만약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써 극형(極刑)에 처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마땅히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천극(荐棘)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9월 6일 갑오

왕세제(王世弟)와 세제빈(世弟嬪) 서씨(徐氏)가 궁궐로 들어왔다. 사저(私邸)에서 포익선관(布翼善冠)과 백포포(白布袍)를 갖추고 여(輿)를 탐에 있어서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다가 궁관(宮官)이 강력하게 청하자, 그제야 탔다. 홍화문(弘化門)의 서쪽 협문(夾門)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물리치고 걸어 가려 하자, 궁관이 또 여(輿)에 타기를 극력 청하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명정전(明政殿)의 문 밖에서 여(輿)에서 내려 전정(殿庭)으로 들어가서 대비전(大妃殿)과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에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보내 문안(問安)드릴 것을 청하고, 이어서 효령전(孝寧殿)의 재실(齋室)에 들어가 최질(衰絰)로 갈아입고 전전(殿前)에 나아가 전배(展拜)를 마쳤다. 세제가 궁관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곡례(哭禮)가 없는가?"
하니, 궁관이 대답하기를,
"해조(該曹)의 절목(節目)이 소루하고 창졸간에 마련한 듯하나, 지금은 대조(大朝)에 품정(稟定)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우선 의주(儀註)에 의거하여 예를 거행하소서."
하였다. 세제가 또 효령전의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자 하니, 궁관이 또한 말하기를,
"예관(禮官)의 마련(磨鍊)을 거치지 못하였으니, 행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세제가 그대로 따랐다. 나와서 시사복(視事服)으로 갈아입고 빈양문(賓陽門)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이근(李頤根)을 세제 시강원 자의(世弟侍講院諮議)로 삼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9월 26일 갑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제(王世弟)와 세제빈(世弟嬪) 서씨(徐氏)를 책봉(冊封)하였다. 승룡(升龍)130)  이 동방(東方)에 나타나보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승룡(升龍)의 상서로움에서 족히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 등은 천명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동요하고자 하여, 박상검(朴尙儉)의 괴변(怪變)을 먼저 제기하고 목호룡(睦虎龍)의 무함을 뒤에 계속하여 일으켜 화기(禍機)가 위급하였는데도, 왕세제가 마침내 보전(保全)되어 나라가 50년 동안 승평(升平)을 누렸으니, 저 역신(逆臣)들이 비록 동요하고자 했지만 그들이 천명(天命)에야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9월 27일 을묘

임금이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에게 교지(敎旨)를 반포(頒布)하고 왕세제(王世弟)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조하(朝賀)를 받으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금중(禁中)에서 계책을 결정하매 경사(卿士)가 따르고 서민(庶民)이 따랐으며, 저이(儲貳)가 이름이 정해지매 국본(國本)이 안정되고 만물이 안정되었다. 이에 마음을 펼치는 고문(誥文)을 가지고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는 백성의 희망에 답하노라. 생각건대 지난날 선왕(先王)께서는 하늘의 경명(景命)131)  을 받아, 조공 종덕(祖功宗德)132)  의 높은 빛남은 삼대(三代)133)  의 융성보다 뛰어났고, 문소(文昭)·무목(武穆)134)  의 계승은 백세(百世)에 경사를 펼쳤다. 내가 외롭게 지내는 날에 미쳐서 항상 조용히 걱정했다. 주창(主鬯)135)  의 지위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니, 누구와 함께 종묘(宗朝)의 일을 받들 것인가? 나라를 보살필 책임을 부탁할 데가 없으니 만백성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돌아보건대 어진 아우가 있어서 다행히 횡경(橫庚)136)  의 길(吉)함에 부합하였다. 총명(聰明)하고 효우(孝友)하여 착한 소문이 일찍 나타났으며, 검약(儉約)하고 온공(溫恭)하여 아조(雅操)를 더욱 삼갔다. 자달(紫闥)137)  에 주선하면서 몇 년 동안 상약(嘗藥)의 근심을 같이하였고, 청위(靑闈)138)  에 아주 가까이 하면서 동년(童年)엔 서로 삭엽(削葉)139)  의 희롱도 하였다. 친(親)으로는 영고(寧考)의 친애(親愛)하시던 바이고, 명(命)으로는 자성(慈聖)의 명선(命宣)하신 바이다. 이에 나의 뜻이 진실로 흡족하고 또한 여러 사람의 모의(謀議)도 모두 부합되었다. 중리(重離)140)  가 빛남을 드러내니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우신 아름다움을 힘입은 것이요, 보록(寶籙)이 상서로움을 연장하니, 또한 사직(社稷)이 영장(靈長)하는 기회이다. 이미 욕의(縟儀)를 갖추어 거행함을 지났으니, 어찌 큰 은택을 널리 전함을 늦출 수 있겠는가? 본월(本月) 27일 매상(昧爽) 이전으로부터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조리 사면하여 석방토록 하고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 올려 주도록 하며, 자궁(資窮)141)  한 자는 대가(代加)142)  토록 하라. 아! 하늘과 사람이 귀향(歸向)하니 만백성의 향대(嚮戴)가 다 간절하고, 별은 빛나고 바다는 광활하니 팔역(八域)의 가영(歌泳)이 바야흐로 일어난다. 마땅히 동경(同慶)의 은혜를 미루어 무강(無彊)의 복(福)을 모두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관명(李觀命)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5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131] 경명(景命) : 큰 명(命).[註 132] 조공 종덕(祖功宗德) : 조유공 종유덕(祖有功宗有德)의 준말로, 묘호(廟號)를 정함에 있어서 공(功)이 있는 이를 조(祖), 덕(德)이 있는 이를 종(宗)이라 함을 이른 것임.[註 133]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세 왕조(王朝).[註 134] 문소(文昭)·무목(武穆) :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즉 좌소(左昭)·우목(右穆)을 이른 말.[註 135]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는다는 뜻으로, 세자(世子)를 말함.[註 136] 횡경(橫庚) : 한(漢)나라 대왕(代王)이 "점괘(占卦)에서 거북 등에 크게 가로놓인 무늬[大橫庚庚]가 있었으니, 내가 천자가 될 것이다." 한 고사(故事)를 인용한 말임. 문제기(文帝紀)에 보임.[註 137] 자달(紫闥) : 궁궐.[註 138] 청위(靑闈) : 세자의 궁(官).[註 139] 삭엽(削葉) : 주(周)의 성왕(成王)이 어려서 임금이 되어 희롱으로 오동나무잎을 잘라서 규(珪)를 만들어 아우 숙우(叔虞)에게 주면서 ‘너를 이것으로써 봉한다.’ 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우연히 이를 보고 ‘왕자는 희롱이 없는 법이오.’ 하고, 숙우를 당후(唐侯)로 봉하게 하였다는 고사(故事).[註 140] 중리(重離) : 《역경(易經)》의 이괘(離卦)는 해[日]를 겹친 것을 상징함. 곧 형제가 왕위(王位)를 상속함을 이름.[註 141]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가 다시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됨을 말함.[註 142] 대가(代加) : 경우에 따라 품계(品階)을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자·서·제·질(子婿弟姪)에게 품계를 올려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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