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기미
납일(臘日)에 임금이 친히 효령전(孝寧殿)에 향사(享祀)하였다.
12월 6일 임술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이때 김일경이 전(前) 참의(參議)로서 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과 함께 상소하기를,
"강(綱)에는 삼강(三綱)이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삼강에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오륜(五倫)이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오륜의 으뜸이 됩니다. 이것은 하늘의 떳떳한 이치요 백성의 떳떳한 법칙입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여 대강(大綱)을 바로잡고 인륜(人倫)을 밝혀서 군주를 섬기는 의리를 엄정히 하고 신하된 직분을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은미한 데 삼가고 싹이 틀때 살펴서 배반하면 역적이 되고 모해(謀害)하려 하면 반드시 주살(誅殺)됩니다. 몇 마디의 붓대를 움직여 삼척(三尺)의 율(律)173) 을 게시(揭示)하였으므로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니, 진실로 천하 만세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입니다. 아! 《춘추》를 이 세상에서 강론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은미할 때 방지 하지 않고 싹이 터서 또 자라나 기강(紀綱)을 무너뜨리고 윤리(倫理)를 타락시킨 것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조성복(趙聖復)이 앞에서 느닷없이 머리를 쑥 내밀었는데도 현륙(顯戮)의 형벌을 오히려 시행하지 않았고, 사흉(四凶)이 뒤에 방자하게 굴었으나 목욕(沐浴)하고 토벌을 청하였다는 것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주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도(凶徒)는 실로 번성하여 다시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지 않으니, 사직(社稷)이 폐허가 되는 것은 단지 다음 차례가 되는 일일 뿐입니다.
지난번 일은 종묘(宗廟)·사직의 망극(罔極)한 일로서 천고를 거슬러 올라가도 듣지 못한 바요 국승(國乘)을 상고하여도 보지 못한 바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된 이들이 진실로 전하를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 대궐 뜰에 엎드려 목숨을 걸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비록 해가 바뀐다 하더라도 차마 성급히 물러나지 않는 것이 바로 천상(天常) 민이(民彝)의 그만둘 수가 없는 바입니다. 그런데 복합(伏閤)·정청(庭請)하여 마지못해 색책(塞責)한 뒤 3일 만에 이르러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임의로 스스로 재정(裁定)하며, 이에 말하기를, ‘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경거(輕遽)로써 구애하여 모조리 어기어 거절하겠습니까?’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속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속에 싹틔워 입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조성복과 앞과 뒤에서 화응(和應)하여 서로 표리(表裏)가 된 형상을 환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시각(時刻)의 사이에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이 되었으니, 만일 밖으로부터 새로 들어온 대신(大臣)의 ‘목숨을 내던지고 사직(社稷)을 위하여 먼저 천폐(天陛)에 배알(拜謁)하고 옥음(玉音)을 직접 받듦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지 못할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갑술년174) 에 양사(兩司)에서 기사년175) 에 대신(大臣)들이 반일(半日) 동안 정청(庭請)한 죄를 논하여 말하기를, ‘정조(鄭造)·윤인(尹訒)·정인홍(鄭仁弘)도 이보다 다시 더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기사년의 여러 재상들도 오히려 정조·윤인과 정인홍의 죄과로써 배척하였으니, 오늘날 저들은 진실로 양기(梁冀)·염현(閻顯)·왕망(王莽)·조조(曹操)176) 에 대한 주벌(誅罰)을 도피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사년에는 유독 차자(箚子)를 올려 청하기를 저들과 같이 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다.
아!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일은 시대마다 항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간혹 어쩌다가 있는 일인데, 대부분 군주가 임어(臨御)한 지 수십 년에 춘추(春秋)는 높고 병환은 고질(痼疾)이 된 뒤에 하였으니, 이것은 일이 매우 급박하여 말려고 하여도 말 수가 없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초년으로 보령(寶齡)이 바야흐로 젊으시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증상도 있지 않으십니다. 무릇 우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전하에게 복종하여 섬긴 지 세월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오히려 차마 오늘에 있어 전하를 버린다는 것은 모르긴 하지만 저들의 마음엔들 편안하겠습니까? 중외(中外)의 여론이 파도처럼 놀라고 가마솥처럼 들끓어 모두 저 재상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역적이다. 어찌하여 우리 임금을 버리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하늘이 조종(祖宗)을 생각하여 은밀한 가운데 묵묵히 도우셨기 때문에 저들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한 것입니다.
천의(天宜)와 인심(人心)은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으로서, 사흉(四凶)의 죄는 진실로 천지의 사이에서 머리를 들고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신 등이 저들의 당(黨)이 조성복을 논한 상소를 가져다 보았더니, 거기 말하기를, ‘안으로 우리 임금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었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들의 정상(情狀)에 대해 족히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의 무리가 ‘우리 임금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어디에서 초래된 것입니까? 신 등은 망령되이 전하께서 ‘인(仁)’·‘명(明)’·‘무(武)’ 세 글자에서 ‘무(武)’자에 부족함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여깁니다. 진실로 또한 권강(權綱)을 다 휘어잡지 못하고 단지 인순(因循)만을 일삼는 병폐가 있으므로, 저들의 무리가 그 점을 엿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어 침모(侵侮)하는 습관과 협제(脅制)하는 계획이 달마다 점차 커지고 평상시에 지극히 깊어져 권병(權柄)은 이미 아래로 옮겨지고 위복(威福)이 위에 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오히려 만족하지 않고 안으로 임금을 모해(謀害)하려는 마음을 품고 역적의 상소를 통해 먼저 전하(殿下)의 속마음을 떠보고 사흉의 차자를 잇따라 올린 것이니, 이것은, ‘우리 임금은 일을 할 수 없으니, 나에게 누가 감히 힐문(詰問)하겠는가?’ 하는 뜻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이사명(李師命)·이상(李翔)이 처음 복관(復官)되었을 때 박태상(朴泰尙)이 장소(章疏)를 올려, ‘권강(權綱)을 휘어잡지 않고 단지 인순(因循)만을 일삼는다.’고 우리 선대왕(先大王)께 규간(規諫)하니, 선왕(先王)께서 가납(嘉納)하여 나의 병통을 맞혔다고 칭찬하시고는, 이어서 복관(復官)하라는 분부를 거두었습니다. 신 등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지난날 어진이의 당직(讜直)함에 비해서 부끄러우나,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왕의 분발(奮發)하신 위엄과 전환(轉圜)하신 덕을 따르시고 다시 인순하지 마시어 조속히 안치(按治)를 행하소서. 그리하여 사흉으로 하여금 창궐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로 하여금 징계되어 두려워할 바가 있도록 하소서.
전하께서는 선왕께서 물려주신 중대한 책임을 받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주재(主宰)가 되셨으니, 이제 전하께 불충(不忠)한 것은 바로 선왕께 불충한 것입니다. 저들 네 사람은 선왕을 망각하고 전하를 저버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죄악이 가득 차서 나라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시어 오히려 암랑(巖廊)의 위에 두시는 것입니까? 지난날 우리 선대왕께서 갑술년177) 초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강신(强臣)·흉얼(凶孽)이 국본(國本)을 동요시킬 경우 중률(重律)로 다스리겠다 하셨습니다. 선대왕의 밝고 지혜로운 조감(照鑑)은 대개 원량(元良)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을 경우 세월이 오래 흐르게 되면 후환(後患)이 경계될 것이 염려되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또 한두 원로(元老)가 있어서 고심(苦心)·장려(長慮)하여 극력 조호(調護)하니, 저들의 무리가 원수처럼 보며 신사년178) 이래 지척(指斥)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습니다. 임창(任敞)·박규서(朴奎瑞)·성규헌(成揆憲)·박상초(朴尙初) 등이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왔고, 이정익(李禎翊)의 상소가 나오매 핍박하고 뒤흔들음이 낭자할 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무리들의 우리 임금께 무례(無禮)한 행동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정유년179) 에 이르러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것은 전석(前席)에서 취지(取旨)한 것이 이미 이필(李泌)180) 의 청과 같지 않았으며, 여러 재상(宰相)을 불러서 가부(可否)를 물으려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 정상을 추구해 보면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천직(天職)을 섭행(攝行)하매 태묘(太廟)에 고유하는 것은 당(唐)·우(虞)의 고사(故事)로서 분명히 의거할 만한 것이 있는데, 김창집이 극력 저지하였던 것은 혹시라도 사체(事體)가 점차 엄중(嚴重)한 데로 나아가게 되면 그 형세가 움직이기 어렵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계승하여 보위(寶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요적(妖賊) 윤지술(尹志述)이 성궁(聖躬)을 핍욕(逼辱)하여 다시 인간의 도리가 없었는데, 김창집의 무리가 전하를 겁박(劫迫)하여 경미한 형벌도 오히려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창집이 소인(召引)할 것을 청하여, 여러 신하들을 물러나게 해놓고는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족히 정치를 할 수가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른바 속으로 ‘우리 임금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또한 다만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무리는 이미 군부(君夫)로 전하를 대우하지 아니하고 또한 신자(臣子)로 자처(自處)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저 조성복은 바로 저들이 무리가 지휘(指揮)·사령(使令)한 중의 한 사람입니다. 기회를 엿보고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림이 진실로 이미 난숙(爛熟)하였으니, 극력 간쟁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원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외면(外面)의 사체(事體)로 말한다면 몸은 대신(大臣)의 반열(班列)에 있고 나라는 망극(罔極)한 거조가 있었는데도, 김창집은 왼쪽 발이 대문밖을 나서지 않았고 이건명은 느린 몸뚱이가 겨우 대궐 아래에 그쳤습니다. 간혹 휴치(休致)의 청을 가탁(假托)하여 거만스럽게 차자(箚子)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국가의 처분(處分)에 대해선 한 토막 말도 없었고, 혹 성교(聖敎)를 회수할 것을 청한 것에 성내어 원한을 품고 장주(章奏)를 올려 드러내놓고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조성복의 죄상에 대해서는 일찍이 반사(半辭)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고도 오히려 그 심적(心迹)을 엄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김창집의 면직을 허락함에 미쳐서는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및 양사(兩司)의 여러 추악한 무리들이 분주(奔走)·황망(慌忙)하여, 혹은 차자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소장(疏章)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건명은 또 방자하게 청대(請對)하여 대궐에서 밤을 새우고 생각하는 바를 적어 올려 반드시 당괴(黨魁)의 지위를 회복시켜 놓고야 말았습니다. 노적(老賊)이 늙어서 관직을 물러나 권병(權柄)을 내놓으니, 어찌 그다지도 민박(悶迫)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명주(明主)가 즉위한 시초에 정사를 사양하니 어찌 그다지도 괄시(恝視)하기를 저와 같이 한 것입니까? 지난해에 시골 구석의 한 천민(賤民)이 상소하여 선왕(先王)더러 정무(政務)를 내놓으실 것을 청하니, 국문(鞫問)하여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이제 조성복은 직책이 대원(臺垣)을 더럽히고 사흉(四凶)은 지위가 정석(鼎席)에 나열하여 상소로써 시험하고 차자로써 끝맺었는데, 전에는 사형에 처하고 지금은 버젓이 살아 있으니, 전형(典刑)의 엄정함이 어찌 다만 한미한 사람에게만 베풀어지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는 폐지될 수가 있겠습니까?
김창집은 고(故)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입니다. 김수항이 기사년에 죽으면서 그 자식들에게 권요(權要)를 극력 피하라고 경계하였는데, 김창집은 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이 말을 버리고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탐권(貪權)·낙세(樂勢)하고 방종(放縱)·자사(恣肆)하였습니다. 자식이 되어 불효(不孝)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하가 되어 불충(不忠)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이이명은 이사명(李師命)의 아우로 화심(禍心)을 속에 감추어 온 지 여러 해 되었고, 조태채는 벼슬을 얻지 못해서는 얻기 위해 근심하고 벼슬을 얻으면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비루한 사람으로서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채 다만 이익만 추구하였습니다. 이건명은 이사명의 요사(妖邪)에게 전법(傳法)하고 이명의 흉활(凶猾)에게 호법(護法)하여 김창집의 악함을 도와서 성취시켰고, 조태채의 간사함을 본받아 보조로 삼았습니다. 사흉의 세력이 형성되니 온갖 간사한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추종하여 좌우·전후가 상국(相國)의 사람 아닌 사람이 없었고, 그들이 임금을 보기를 거의 마치 변모(弁髦)처럼 하였습니다. ‘오늘의 나라 형세가 위태롭고 또 급박하다.’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은 바로서 전하께서도 진실로 이미 염려하신 것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네 사람을 처벌하자 천하(天下)가 다 복종하였다.’181)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대순(大舜)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이광좌 등 여러 사람이 정청(庭請)의 반열에 있다가 갑자기 정의(停議)하였다는 것을 듣고 항사(抗辭)로 간쟁하니, 이건명은 사기(辭氣)로 서로 모멸(侮蔑)하였고, 조태채는 곁에서 속임수로 달래었으며, 김창집은 내일 정청하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내리고는 머리를 맞대고 차자를 지어서 새벽에 달려가 투정(投呈)하였습니다. 마음씀의 음교(陰巧)함과 계획을 세움의 허위(虛僞)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조태구가 정청을 철회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대궐문 밖에 이르러 녹사(錄事)를 보내어 성급하게 철회할 수 없음을 말하니, 저들이 차본(箚本)으로써 투시(投示)하면서, ‘우리들은 이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태구가 금경(禁扃)의 안으로 나아가서 승정원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구대(求對)하도록 하니, 승지와 양사(兩司)에서는 사흉의 지시(指示)를 받들어 한편으로는 저지하고 한편으로는 공격하였습니다. 성상께서 궁궐에서 특별히 부르시어 명단(明斷)을 보이시니, 김창집과 이건명이 그때 합문(閤門) 밖에 있었습니다. 한 재신(宰臣)이 정청(停請)이 잘못되었음을 말하니, 김창집은 말하기를, ‘내가 불충(不忠)하다.’ 하였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내가 무상(無狀)하다.’ 하였습니다. 불충하고 무상한 것은 저들도 스스로 아는 터인데, 처음에 우상(右相)을 거절한 것은 조집(操執)한 바가 있었던 듯하고, 이에 이르러 죄에 복종한 것은 애걸(哀乞)한 듯하니, 정상(情狀)의 절통(絶痛)함이 더욱 어떠합니까? 재유(齋籲)의 길이 이미 막히니, 차청(箚請)의 일을 장차 행하려 하였습니다. 몸에 나라의 안위(安危)가 걸린 대신(大臣)이 단지 죽음을 향해 한 걸음을 나아가려고 하였으니, 저들의 무리인들 홀로 얼굴에 땀이 나고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다시 경광(耿光)182) 을 지척(咫尺)의 하늘에서 한번 가까이하여 유음(兪音)을 붕박(崩迫)의 즈음에 다행히 받았는데도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감히 ‘어떤 음기(陰機)가 있다.’는 등의 말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곧바로 귀양보내고 국문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우리 명철하신 성상에게 권면하여 다시 만기(萬機)를 총괄하시도록 한 것이 얼마나 정대(正大)하고 얼마나 광명(光明)한 일인데, ‘음기(陰機)’라는 두 글자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 ‘어찌 감히 어기어 거부하겠는가?’ 하는 말은 사흉(四凶)이 제창하였고, ‘어떤 음기가 있다.’는 말은 군간(群奸)이 거기에 화답한 것입니다. 이는 큰 자라가 울면 작은 자라가 거기 따라 울고 올빼미가 소리 내면 수리부엉이가 거기 화답하는 격입니다. 뜻은 윗사람을 원망하고 아랫사람을 막는 데 있었고, 계획은 허공에 건너지르고 공중을 뚫는 데서 나왔으며, 체결(締結)과 교통(交通)으로써 지목하여 공공연히 무함하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서참(舒慘)과 신축(伸縮)이 모두 사흉의 손아귀에 있었고 조종(操縱)과 합벽(闔闢)이 또한 사흉의 의지(意指)에서 나왔습니다. 사인(私人)을 끌어들여 요로(要路)에 죽 앉혔고 진퇴(進退)와 출척(黜陟)을 오직 그들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홍계적(洪啓迪)에 있어서는 참으로 바로 진(晉)나라 왕돈(王敦)의 심충(沈充)·전봉(錢鳳)183) 입니다. 간사한 마음과 간악한 태도로 번쩍하다 없어지면서 교묘하게 농락하였습니다. 전하의 고굉(股肱)은 베어서 잘라버렸고 전하의 우익(羽翼)은 잘라서 제거하였습니다. 지난밤에 내리신 분부를 도로 거두신 것은 중신(重臣)에게 힘입은 것이고, 그날의 반한(反汗)하신 것은 우상(右相)에게 연유한 것이므로, 전하가 의지하여 믿는 바는 오직 이 한두 신하들일 뿐인데, 귀양보낼 것을 청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할 것을 청하며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무릇 전하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 바쳐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모조리 처벌할 것을 청해서 전하를 옹호해 지킬 수 없도록 하여, 전하를 고립되게 하고야 말려 하였습니다.
신은 저들의 무리가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지극히 엄하고 또 중대하여 호홀(毫忽)의 사이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악역(惡逆)의 이름과 찬시(簒弑)의 주륙(誅戮)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혹 당세(當世)에 멸족(滅族)의 화(禍)를 당하기도 하고 혹 사후(死後)에 참시(斬尸)를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죄가 점차 쌓여온 지 이미 오래이고, 능범(凌犯)한 것도 또 중대합니다. 신하로서 자처하지 않는 뜻이 한 통의 차자(箚子)에 의해 밝게 드러났고, 임금을 무시(無視)한 죄악은 많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삼강(三綱)의 으뜸이요 오륜(五倫)의 으뜸인 군신(君臣)의 의리는 남김없이 멸절(滅絶)된 것입니다. 《춘추》의 무장(無將)으로는 족히 그 죄를 다스릴 수가 없고 한법(漢法)의 부도(不道)로는 족히 그 형률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天地)의 용납하지 못할 바요 신인(神人)의 함께 분개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하께서 인서(仁恕) 관대(寬大)하다 하더라도 또한 시종 사사로이 비호할 수만도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리시고 조속히 상형(常刑)을 시행하시어 적신(賊臣) 조성복과 사흉(四凶)의 수악(首惡)을 한결같이 법(法)으로써 처단하여 조금도 용서해 주지 마시고, 후사(喉司)와 삼사(三司)의 무군(無君)·무엄(無嚴)한 죄는 모두 징토(懲討)를 가하여 군신(君臣)의 대강(大綱)을 세우고, 이 백성들의 상륜(常倫)을 세워서 흉적(凶賊)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충지(忠志)로 하여금 스스로 힘쓸 수 있도록 하소서.
신 등이 상소문을 이미 만들어 놓고 미처 올리지 않았는데, 삼가 전하께서 특별히 덕음(德音)을 베풀어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뇌전(雷電)이 순음(純陰)의 달에 요란스럽게 번쩍이고 무지개가 몹시 추운 계절에 어지럽게 떠 오릅니다. 음우(淫雨)와 독무(毒霧)로 시후(時侯)는 번번이 고르지 못하고, 월미(月微)와 성요(星妖)로 건문(乾文)은 착오가 많습니다. 한(漢)의 신하 매복(梅福)184) 이 말하기를, ‘그 형상을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피기를 원하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 그림자를 살피지 않고서 그 형상을 구하시는 것입니까?
적괴(賊魁) 김창집은 감히 원보(元輔)의 자리를 차지하여 기염(氣焰)은 하늘을 찌르고 세력은 사람을 구사(驅使)하였습니다. 좌우(左右)의 멋대로 공격함은 다만 그가 시키는 대로 이루어졌고, 조석(朝夕)의 천제(遷除)는 대부분 혈당(血黨)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입에는 천헌(天憲)을 머금고 손에는 왕작(王爵)을 움켜쥔 자로서 염치(廉恥)의 한 사항은 마땅히 이런 사람에게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성상이 면직을 허락하셨으니 바로 이미 물러난 몸인데, 사당(私黨)이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홀로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비록 가사도(賈似道)185) 의 거짓으로 물러나고 빗대어 머무른 것으로써도 오히려 호상(湖上)에서 10일 동안 누워 있었는데, 이 자는 쭈그리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반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조조(曹操)의 이른바, ‘진실로 내가 군대를 떠나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화(禍)를 당할까 두렵다.’는 것이 본디 바로 김창집의 실정입니다. 아! 한(漢)나라 왕실(王室)이 기울어져 위태로운 것은 조조가 군대를 떠나버리는 데 있지 않고 조조가 군대를 떠나버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니,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져 위태로운 것은 바로 김창집이 권세를 버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이고 김창집이 권세를 버리는 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저들의 무리가 전하에게 있어서 진실로 군신(君臣)이 양전(兩全)하는 형세가 없습니다. 저들이 편안하면 이쪽이 위태롭고 이쪽이 편안하면 저들이 위태롭습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 어찌 저들의 무리를 신하로 부리어 함께 국사(國事)를 도모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주(周)나라가 쇠약한 이후로 날씨가 추운 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왕강(王綱)이 진작되지 않고 윤이(倫彝)가 거의 폐지되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면 윗사람의 권위(權威)가 점차 쇠퇴해진 것이 동주(東周)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에 이런 감응(感應)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근심하시며 위에서 고민하고 계시고, 억조(億兆)의 백성들은 인심이 술렁술렁하여 아래에서 실망하고 있는데, 적신(賊臣)은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처리하여 보위(寶位)가 편치 못하니, 윤리와 기강의 타락됨이 거의 쇠약한 주나라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요사이 대한(大寒)이 어느덧 지났으니, 절후(節候)가 마땅히 몹시 추워야 하는데도 땅에는 한 점(點)의 눈이 없고 강에는 두꺼운 얼음이 얼지 않았습니다. 엄숙(嚴肅)한 기운과 정고(貞固)의 도리가 일찍이 천지(天地)의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대개 그것을 초래한 바가 있는 것이며, 다른 사고에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전하께서 건강(乾剛)의 덕을 떨치고 뇌발(雷發)의 형상을 본받아서 천토(天討)를 통쾌하게 행하시고 예악(穢惡)을 숙청(肅淸)하시어, 요망하고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감히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지 못하고 적신(賊臣) 악자(惡子)가 기강을 범할 수 없게 된다면, 사방(四方)의 충의(忠義)의 선비가 어찌 다만 눈을 씻고 목을 길게 빼어 태평 시대를 상망(想望)할 뿐이겠습니까? 협종(脅從)·반측(反側)의 무리들도 안정되어 저절로 편안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상하(上下)가 서로 수정(修整)하여 정화(政化)가 소명(昭明)해진다면, 하늘은 맑고 땅은 편안하며 인도(人道)는 정고(貞固)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하니, 내가 매우 가납(嘉納)하노라."
하였다. 이때 김일경이 환관(宦官)과 내외(內外)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승지(承旨) 신사철(申思喆)·이교악(李喬岳)·조영복(趙榮福)·조명겸(趙鳴謙) 등이 아뢰기를,
"김일경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 흉참(凶慘)한 것은 다만 사대신(四大臣)을 살해하려는 데 있을 뿐이 아닙니다. 한번 한세량(韓世良)의 상소가 나온 이후로부터 이미 이 무리들의 악역(惡逆)의 마음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김일경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그 마음의 소재는 불을 보는 듯이 환하게 살필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차자를 올린 대신을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눈에 노기를 띠고 바라보고 어금니를 깨물며 미워하는 바가 과연 다만 진차(陳箚)의 한 가지 사항에만 있겠습니까? 청컨대 엄하게 통척(痛斥)을 가하여 간악한 싹을 끊고 쾌하게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국사(國事)를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니, 이윽고 하교하기를,
"나의 천심(淺深)186) 을 규견(窺見)하였다."
하고, 여러 승지를 파직시켰다. 이날 김일경을 특별히 임명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은 간흉(奸凶)하고 패륜(悖倫)하여 은밀히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장임(將任)에 둘 수가 없다.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특별히 임명하여 박필몽(朴弼夢)을 지평(持平)으로, 윤연(尹㝚)을 교리(校理)로, 이명의(李明誼)를 헌납(獻納)으로, 이진유(李眞儒)를 정언(正言)으로, 심단(沈檀)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정신(李正臣)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제(李濟)를 장령(掌令)으로, 양성규(梁聖揆)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최석항(崔錫恒)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광좌(李光佐)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조(李肇)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연(金演)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세근(李世瑾)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이세근은 외직(外職)에 있기 때문에 서명균(徐命均)으로 대신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명하여 훈국(訓局)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적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12월 7일 계해
특별히 임명하여, 윤취상(尹就商)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김동필(金東弼)을 수찬(修撰)으로, 윤순(尹淳)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이날 총융사(摠戎使) 윤각(尹慤)은 ‘간사한 무리의 응견(鷹犬)이 되어 권세에 추종하고 의리가 없었으며, 부제학(副提學) 홍계적(洪啓迪)은 은밀히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고 붕당을 결성해서 나의 천심(淺深)을 엿보았다.’ 하여, 윤각은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홍계적은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에 안치(安置)하였다.
12월 8일 갑자
어유룡(魚有龍)·박치원(朴致遠)·이중협(李重協)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시키고, 이의천(李倚天)을 영암군(靈巖郡)에 유배(流配)시켰다.
12월 9일 을축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을 면직시켰다.
이광좌(李光佐)를 수어사(守禦使)로, 이삼(李森)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12월 10일 병인
하교하기를,
"작년에 윤지술(尹志述)이 지문(誌文)을 개찬(改撰)하는 것을 빙자하여 사친(私親)을 무욕(誣辱)하였고, 소회(所懷)를 적어 올려 흉악한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조속히 방형(邦刑)을 바르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봉휘(柳鳳輝)의 정배(定配)를 중지시켰다.
특별히 임명하여 홍만조(洪萬朝)를 판의금(判義禁)으로, 한배하(韓配夏)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이태좌(李台佐)·조태억(趙泰億)을 동의금(東義禁)으로 삼았다. 승정원에서 한배하의 품계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이므로 관직과 품계(品階)가 서로 맞지 않다고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려서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의 죄상(罪狀)은 너무나도 절통(絶痛)하지만, 다만 지금은 성화(聖化)를 경신(更新)하여 덕의(德意)를 마땅히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주륙(誅戮)의 분부를 갑자기 내리시니, 보잘것없는 윤지술의 죽음은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인성(仁聖)의 조정에서 사람의 목숨을 중하게 여겨 아끼는 것이 호생(好生)의 덕(德)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죽음을 면해주어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12월 11일 정묘
특별히 임명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원휘(元徽)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이뢰기를,
"이광좌는 바야흐로 찬수 당상(纂修堂上)의 임무를 맡았으며, 또 수어(守禦)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은 경중이 절로 다르니, 마땅히 그대로 찬수(纂修)와 수어(守禦)의 직임을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은 말이 몹시 패망하였으니 죄를 진실로 용서할 수 없으나, 당초에 전하께서 다만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신 것은 어찌 그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정은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워 3백 년 이래로 일찍이 사죄(私罪)로 선비를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의 정범(情犯)은 이미 반역(叛逆)과는 다름이 있고, 더구나 바로 관학 유생이니, 바로 정형(正刑)을 내리라는 분부는 군정(群情)의 밖에서 나왔습니다.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어 머리를 맞대고 놀라고 의혹스러워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만일 감사(減死)하는 형률을 따라서 호생의 덕을 보이신다면, 어찌 계술(繼述)하는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중비(中批)187) 로 제배(除拜)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조정이 텅 비어서 개정(開政)할 사람이 없으면 간혹 그런 일이 있지만, 지금은 묘당(廟堂)에 공무를 집행하는 대신(大臣)이 있고 전조(銓曹)에도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마땅히 위임(委任)·책성(責成)하셔야 하며, 하필 벼슬자리마다 친히 임명하여 응당 행해야 할 은전(恩典)같이 하십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12일 무진
원임 영의정(原任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을 거제부(居濟府)에 안치(安置)시키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을 남해현(南海縣)에 안치시키고,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를 진도군(珍島郡)에 안치시켰다.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정언(正言) 서종하(徐宗廈)가 아뢰기를,
"《춘추(春秋)》의 법(法)에 이심(貳心)을 가지면 역적이 되고, 임금을 모해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처형합니다. 저 사대신(四大臣)은 속으로 임금을 모해하려는 마음을 품고 우리 임금에게 두 마음을 가졌습니다. 신하로서 자처하지 않은 뜻은 한 통의 차자(箚子)에서 환하게 드러났고, 임금을 무시(無視)한 죄악은 여러 사람의 눈을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죄가 하늘에 달하였으니,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저들 사흉(四凶)은 임금의 권력을 도둑질해 희롱하며 임금의 지위를 변모(弁髦)처럼 여겼습니다. 좌우 전후에 그들의 사인(私人) 아니 사람이 없고 우롱(愚弄)과 협박(脅迫)이 끝이 없어서 우리 전하로 하여금 손을 쓸 수가 없이 위태롭고 급박하게 만들어 차라리 천승(千乘)의 지위를 헌시짝처럼 내던지고 싶게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 정상(情狀)을 논하다면 바닷물을 다 써서 마르게 하고 대나무를 다 써서 없어지게 하더라도 다 기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시험삼아 현저히 드러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김창집은 고묘(告廟)의 의논을 저알(沮遏)하고 윤지술(尹志述)의 죄악을 영구(營救)하였습니다. 이이명은 독대(獨對)하여 여러 정승들을 불러 가부(可否)를 물어볼 것을 청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었던가는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건명은 전지(前旨)의 회수(回收)를 청한 것에 원한을 갖고 칼날을 옮겨 급격히 공격하였고, 장독(章牘)이 올려지는 것을 혐오하여 언로(言路)를 막기를 청하였습니다. 조태채는 기회를 이용해 부앙(俯仰)하고 수미(首尾)로 화응(和應)하여, 밖으로는 여러 재신(宰臣)을 기만하여 정청(庭請)을 다시 마련한다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였고, 안으로는 삼흉(三凶)을 도와서 절목(節目)의 강정(講定)을 차자(箚子)로 청하였으니, 그 정상이 너무나도 흉참(凶慘)합니다. 저들의 무리는 은밀히 이지(異志)를 품은 지 무릇 몇 해 되었습니다. 조석(朝夕)으로 모획(謀劃)하고 밤낮으로 경영한 것이 상궁(上躬)을 조절하고 천위(天位)를 동요시키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식자(識者)들 간에는 지난번에 있었던 일이 벌어질 줄 안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이 무리들이 하루를 궐하(闕下)에 있게 되면 반드시 종사(宗社)에 하루의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離安置)시키시고, 이건명(李健命)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일체 형률을 적용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홍술(李弘述)을 하옥(下獄)시켰다. 이진유(李眞儒) 등이 또 아뢰기를,
"이홍술이 육현(陸玄)을 살해하고 도감(都監)의 각색(各色) 미(米)·전(錢)을 그의 집으로 실어갔으니, 청컨대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제겸(金濟謙)·황선(黃璿)은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을 성주목(星州牧)으로, 이우항(李宇恒)·서종급(徐宗伋)을 강진(康津) 고금도(古今島)로, 홍석보(洪錫輔)를 영암군(靈巖郡)으로, 김제겸(金濟謙)을 울산부(蔚山府)로 황선(黃璿)를 무장현(茂長縣)으로 귀양보냈다.
12월 15일 신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재(李縡)는 지난번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렸을 때 시종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고, 윤각(尹慤)은 권문(權門)에 붙어 정상(情狀)이 간악하였으며, 이유민(李裕民)은 외람되이 장천(將薦)에 올랐으니, 청컨대 이재는 삭출(削黜)하고, 윤각은 멀리 귀양보내고, 이유민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고,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정익(李禎翊)은 원로(元老)를 침욕(侵辱)하였고, 서명균(徐命均)은 상소를 올려 윤지술(尹志述)을 논핵하면서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었다고 말하였고, 유학(幼學) 이희지(李喜之), 진사(進士) 유택기(兪宅基), 좌랑(佐郞) 심상길(沈尙吉)은 이리저리 결탁하였으므로 국중(國中)의 비방하는 말이 매우 시끄러우니, 청컨대 이정익은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서명균은 파직시키고, 이희지 등은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였다.
12월 16일 임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이만성(李晩成)은 당동 벌이(黨同伐異)를 주장하여 조성복(趙聖復)을 자송(資送)하였고, 정반(庭班)이 바야흐로 마련되자 곧바로 파회(罷會)할 것을 맨먼저 발설하였습니다. 김진상(金鎭商)은 감히 백어(伯魚)의 일188) 을 인용하여 사친(私親)의 면례(緬禮)에 망곡(望哭)할 때 극력 다투었습니다. 청컨대 이만성은 멀리 귀양보내고 김진상은 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윤각(尹慤)을 삼화부(三和府)로, 이정익(李禎翊)을 삼수부(三水府)로 귀양보냈다.
12월 17일 계유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을 죽였다. 윤지술은 체모(體貌)는 몹시 인약(仁弱)하였으나 강개(慷慨)하여 의리를 좋아하였다. 체포당하는 날에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의연히 두려워하지 않았고, 세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결안(結案)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형할 때 이르러 신기(神氣)가 어지럽지 않았고 기색이 태연하여 평상시와 같았다. 윤지술의 문객(門客)에 장한사(張漢師)라는 이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탁월하여 의기(義氣)를 좋아하였다. 윤지술이 이미 죽으니 가서 곡(哭)하고 그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자, 사람들이 그 의로움을 칭찬하였다.
조태구(趙泰耉)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최규서(崔奎瑞)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최석항(崔錫恒)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송상기(宋相琦)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김창집(金昌集) 등이 저사(儲嗣)를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송상기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이 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됨에 이르러 송상기가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2월 22일 무인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고봉헌(高鳳獻)·송상욱(宋尙郁)을 먼 변방으로 유배(流配)시켰다. 하교하기를,
"내관(內官) 장세상·고봉헌·송상욱은 사람됨이 간사하여 가까이 모시게 할 수가 없으니, 원지(遠地)로 정배(定配)시키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박상검(朴尙儉)이 미워하는 사람들이다.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이 청휘문(淸暉門)을 폐쇄하고 왕세제(王世弟)를 살해하려고 하므로, 왕대비(王大妃)가 박상검의 간악함을 적발하고 그 도당인 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필정(必貞)까지 모두 하옥(下獄)시켜 국문하였다. 이때 박상검이 안팎으로 서로 결탁하여 왕세제를 해치려고 도모하여 대궐 안에 여우가 있다고 핑계하고 기정(機穽)189) 을 설치한 뒤 청휘문을 폐쇄하였는데, 청휘문은 바로 왕세제가 문침(問寢)하는 길이다. 이에 양궁(兩宮)이 저격(阻隔)되어 위기가 더욱 급박하였다. 이날 밤 왕세제가 입직(入直)한 궁관(宮官) 김동필(金東弼)·권익관(權益寬)과 익위사(翊衞司)의 관원 홍우현(洪禹賢)·이세환(李世瑍)을 불렀다. 왕세자가 궁관에게 말하기를,
"한두 명의 환관이 나를 제거하려고 하므로, 자성(慈聖)께서 나로 하여금 대조(大朝)께 입고(入告)하도록 하였다. 내가 체읍(涕泣)하면서 대조께 청하였더니, 처음에는 잡아다가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셨다가 곧바로 또 환수하셨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마는 이미 일어난 이후에는 임금 곁의 악당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겠기에 다시 진달하였더니, 쾌히 윤종(允從)해 주시어 마음에 몹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물러나 나의 거처에 돌아와 보니, 앞에 내린 분부를 곧바로 환수하였고,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다. 내가 장차 합문(閤門)을 나가 석고 대죄(席藁待罪)하여 사위(辭位)하려 하는데,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나의 거취(去就)를 알게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일조 일석의 사고가 아니며, 점차 쌓여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이미 주상 앞에 고한 이후에는 비록 잡아다 추고하라는 분부를 회수하였더라도 저들의 무리가 마땅히 쭈그려 엎드려 대죄(待罪)하여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의기양양하게 금중(禁中)에 출입하고 있다. 오늘에 있어서는 문안(問安)·시선(視膳)까지도 이 무리들로 인하여 저지되었으니, 내가 만일 이 지위를 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 무리들의 독수(毒手)를 만나게 될 것이므로, 지위를 피하여 대죄(待罪)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곡(哭)하여 혼전(魂殿)을 하직하고 이내 사제(私第)로 나가야 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것은 성상의 하교를 받들지 못하였으니 감히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동필·권익관 등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대조께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미안한 하교가 있다 하더라도 다만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과 효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따름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내(大內)로부터 명백하게 진청(陳請)해서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지 마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양전(兩殿)께서 몸이 편안하지 않으시므로, 깊은 밤중에 수선스럽게 할 수가 없으니, 조금 기다려 내일쯤 가서 조정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제가 듣지 않고 사위소(辭位疏)의 초본(草本)을 꺼내보였다. 김동필·권익관 등이 앞서와 같이 진달하기를 여러 천마디의 말을 하고, 또 말하기를,
"신 등은 마땅히 물러가 사부(師傅)·빈객(賓客)과 외정(外廷)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여 죄인(罪人)을 성토하기를 청할 것입니다. 그들이 법에 의해 처단된 뒤에는 저하께서 어찌 불안한 단서가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제가 비로소 내일 사부(師傅)와 여려 궁료(宮僚)와 서로 만나서 이에 자기의 뜻을 시행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그 이튿날 기묘(己卯)에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李肇),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단(沈檀), 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태항(朴泰恒), 훈련 대장(訓鍊大將) 윤취상(尹就商), 승지(承旨) 이정신(李正臣)·유중무(柳重茂)·박휘등(朴彙登), 대사간(大司諫) 양성규(梁聖揆),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 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윤성시(尹聖時), 교리(校理) 윤연(尹㝚)·윤순(尹淳), 정언(正言) 서종하(徐宗廈) 등이 이태좌(李台佐)·조태억(趙泰億)·이인복(李仁復)·심탱(沈樘)·심공(沈珙) 등과 더불어 진수당(進修堂)에 같이 입대(入對)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어제 밤에 동궁(東宮)께서 궁료(宮僚)에 하령(下令)하시기를, ‘한두 명의 환관(宦官)이 중간에서 나쁜 짓을 처음 시작하여 문안(問安)과 시선(視膳)까지도 저지되었다. 그러므로 체읍(涕泣)하며 진달(陳達)하였더니, 처음에는 잡아다가 추고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곧바로 환수(還收)하였고,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렸다. 장차 합문(閤門)을 나가 진소(陳疏)하고 대죄(待罪)하여 사위(辭位)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모르긴 하지만 무슨 연고로 인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또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잡아다 추고하라는 분부를 중단시키신 것입니까? 옛사람은 환관을 가노(家奴)에 비하였습니다. 시험삼아 사가(私家)로써 말한다면, 복례(僕隷)의 말을 듣고 믿어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가정이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한 명의 가동(家僮)만을 사랑하여, 곧바로 엄하게 국문해서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최석항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효우(孝友)로써 근본을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으로는 다만 전하와 춘궁(春宮)만이 계실 뿐입니다.
새로 저사(儲嗣)를 세워서 국본(國本)이 아주 정해졌는데, 한두 명의 환관이 감히 이간질하여 춘궁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춘궁의 마음이 불안하다면 선대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어찌 몹시 서러워하지 않겠으며, 자전(慈殿)의 자애로운 생각도 또한 어찌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의 기틀이 호흡(呼吸)에 닥쳐 있으니, 청컨대 조속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하게 신문한 뒤 실정을 알아내어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하소서."
하고, 여러 신하들도 차례대로 극력 청하였다. 심단은 말하기를,
"세제(世弟)께서 ‘내 몸을 제거하려 한다.’는 하교까지 있으셨으니, 이 무리들은 바로 대역(大逆)입니다. 신은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으며 마땅히 조속히 방형(邦刑)을 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심단의 말을 옳게 여겼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도 또한 합사(合辭)하여 계청(啓請)하기를,
"엄명(嚴明)하게 구핵(究覈)하여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사형(死刑)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나아가 번갈아 청하기를 또 각각 여러 천백 마디를 하였다. 윤순은 말하기를,
"한(漢)·당(唐)·황명(皇明)의 멸망은 모두 환시(宦寺)들이 국병(國柄)을 마음대로 쓴 것에 연유하였으나, 우리 조정의 제도는 궁실(宮室)의 사이를 쇄소(灑掃)하는 임무에 대비하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이러한 일이 환첩(宦妾)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몸에 이르러서 이러한 막대한 변고가 있으니 앞으로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화란의 싹을 단절하고 조종(祖宗)의 성덕(盛德)을 소술(紹述)하지 않으십니까? 일전에 세 명의 환관을 찬배(竄配)시킨 것은 어떤 일로 연좌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상께서 그들을 병축(迸逐)하면서 조금도 난처하게 여기지 않으셨는데, 지금 두 환관의 죄역(罪逆)은 세 명의 환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전하의 처분이 저들에게는 통쾌하게 내려지고 이들에게는 시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조태구는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소 동기간의 우애(友愛)의 정을 다하셨다면 저 환관의 무리들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엿보고서 이러한 망측(罔測)한 변고를 만들어내겠습니까? 세제가 편안한 후에야 전하께서도 편안하실 수 있고, 전하께서 편안하신 후에야 종사(宗社)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저 환관들이 춘궁께 불순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전하에게 충성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늙어도 죽지 않고,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서 은혜의 만분의 일에 보답도 못 한 채 불행히 오늘에 또 이러한 변고를 만나게 되니, 신은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을 따름입니다. 또한 어찌 감히 의리에 어긋난 일로 전하를 인도하여 스스로 망측한 주륙에 빠지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안위와 존망이 나누어지는 것인데도 전하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실로 억울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이조가 나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극력 간청함이 이와 같으니,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는 것을 하교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수답(酬答)한 말이 있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분명하지가 않았다. 조태구가 재차 청하여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였습니다. 옥음(玉音)을 상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
하였다. 조태구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여 사례(謝禮)하고, 이어서 동궁을 위안하여 화락(和樂)을 엄하게 신칙하여 이간을 단절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미 물러나와 합문(閤門) 밖에 가서 문안(問安)하니, 대비(大妃)가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혈속(血屬)으로는 다만 대전(大戰)과 춘궁(春宮)이 있을 뿐이며, 책건(冊建)한 이후에 양궁(兩宮)이 화협(和協)하였는데, 중인(中人)과 나인(內人)들이 서로 이간시킴으로 인하여 세제가 장차 불측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선왕의 내려 주신 작호(爵號)에 의해서 세제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구가 자지(慈旨)를 봉환(封還)하여 중관(中官)에게 맡기고 구두로 전달하기를,
"동궁께서 저위(儲位)에 오르신 것은 실로 종사(宗社)의 무강(無彊)한 경사(慶事)로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떠받들어 모시기를 원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중인들이 서로 이간하여 진저(震邸)께서 불안해 하시는 결과를 초래하여 어젯밤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할 때에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휘교(徽敎)를 내렸습니다. 신 등이 서로 인솔하고 청대(請對)하여 이미,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신인(神人)의 분한 마음을 거의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방금 진저(震邸)를 뵙기를 청하여 위안의 뜻을 다하였는데, 이제 뜻밖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선왕의 후사(後嗣)의 부탁은 다만 우리 전하와 동궁께 있을 뿐이므로 신 등은 죽음이 있을 따름이며,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처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언교(諺敎)로 굳이 이목(耳目)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기에 삼가 이같이 봉환(封還)합니다. 신 등이 항상 대조와 동궁에 진면(陳勉)하는 바는 단지 우애(友愛)를 돈독히 하고 효경(孝敬)을 극진히 하는 뜻일 뿐인데, 또한 대내(大內)로부터도 이를 권면(勸勉)하여 화평(和平)의 복(福)을 다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인(內人)들의 범죄한 사실에 대해선 외인(外人)들의 알 바가 아니니, 대내(大內)로부터 유사(攸司)에게 회부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 하는 것이 아마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대비가 또 언교로써 답하기를,
"저사의 결정은 곧 선왕(先王)의 유교(遺敎)를 받았고, 대전이 친히 작호를 썼으며, 내가 또 언서로 대신(大臣)에게 하교하여 결정하였다. 불행히도 궁인과 환시가 양궁(兩宮)을 서로 이간시켜 성총(聖聰)을 기폐(欺蔽)하므로, 내가 일찍이 개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궁인을 불러서 화동(和同)의 도리를 개유(開諭)하였더니, 감히 흉패(凶悖)한 말을 대전(大殿)과 내가 앉아 있는 앞에서 방자하게 늘어놓았다. 그 죄상은 반드시 해당되는 형률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의 궁인은 바로 환시와 체결(締結)한 자이므로 마땅히 형률에 따라 처치하여야 할 것인데, 경 등도 마땅히 우리 주상과 동궁을 조호(調護)해서 우리 3백 년 종사(宗社)를 보호하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뒷면에 ‘석렬(石烈)’·‘필정(必貞)’ 두 궁인의 이름을 써 놓았다. 조태구가 재차 아뢰기를,
"두 궁인에 대해서는 방금 진계(陳啓)하여, ‘유사(攸司)에게 회부하여 일체 사형(死刑)에 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상께서는 지인(至仁)·지효(至孝)하시고 저궁(儲宮)께서도 또한 효경(孝敬)의 도리를 다하시며, 종사(宗社)는 선왕의 혼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묵묵히 도와주시니,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볼모양이 없지마는 감히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우러러 선왕의 유교를 받들어 더욱 동궁을 보호하는 도리를 다해서 우리 대비의 간곡하신 자교(慈敎)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린 계(啓)는 잘 알았노라."
하였다.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 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모두 합문(閤門)에 부복(俯伏)하여, ‘자교(慈敎)에 써서 내린 석렬과 필정을 유사(攸司)에게 회부할 것을 조속히 분부하여 역엄(逆閹)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함께 일체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상검과 문유도는 바로 왕세제를 대전(大殿)과 이간시킨 자들이다. 박상검은 젊어서 심익창(沈益昌)에게 배웠고 집이 담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 항상 왕래하였는데, 본래 영변(寧邊) 사람이다. 김일경(金一鏡)과 원휘(元徽)는 일찍이 이곳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인연(因緣)이 친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익창·김일경·원휘 등이 박상검과 난만(瀾漫)하게 밀의(密議)하여 한쪽편의 사람들을 진출시키려고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저위(儲位)가 이미 결정됨에 이르러서는 의구(疑懼)가 더욱 깊어져 드디어 이간시키고 동요시킬 계획을 내어서 쇄문(鎖門)과 교지(矯旨)의 변고가 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영조(英祖) 을사년190) 에 이르러 환관(宦官) 손형좌(孫荊佐)의 국초(鞫招)에 말하기를,
"박상검이 요악(妖惡)한 나인(內人) 필정과 결탁하여 말을 지어내어 대궐 안에 여우가 왕래한다고 하였으며, 여우를 잡는다고 핑계하고는 기계와 그물을 많이 설치하였습니다. 청휘문(淸暉門)은 바로 동궁(東宮)이 문안(問安)하는 길이므로, 박상검이 그것을 저지하고 막아서 음흉한 일을 꾸미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에 매양 박상검을 만나보면 양두필(兩頭筆)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혹은 진서(眞書)로 쓰기도 하고 언서(諺書)로 쓰기도 하다가 사람을 보면 놀라서 그 종이를 말아 깊이 감추었고, 친밀한 나인(內人)을 만나면 글을 주면서 서로 내통하는 자취가 현저히 있었는데, 그 내인이 바로 필정이었습니다. 그의 은비(隱祕)한 정상은 여러 환관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박상검이 아이 때부터 심익창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김일경이 심익창의 집에 왕래한다는 것을 듣고 박상검과 때때로 항상 모였습니다. 신축년191) 겨울의 소비(疏批) 및 제수(除授) 비망기(備忘記)가 대내(大內)로부터 써 나올 즈음에 집필(執筆)한 내관(內官)이 어떤 글자를 써야 할지 알지 못하면 박상검이 곁에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심익창의 아들 심정옥(沈廷玉)의 국초(鞫招)에 말하기를,
"박상검이 아이 때 신(臣)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박상검은 바로 영변(寧邊) 사람입니다. 김일경과 원휘가 다 그곳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박상검과 다정하고 친밀하게 지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신축년 7월 그믐 무렵의 밤중 3경(三更)에 박상검의 집에 갑자기 화광(火光)이 있는 뒤 대문(大門)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따라가서 그 사유를 물어보았더니, 김일경이 온 것이었습니다. 신이 박상검에게 묻기를, ‘김 참의(金參議)가 무슨 일로 왔는가?’ 하였더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김 참의의 말이 「내가 바야흐로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하려 하는데, 비답(批答)이 만일 더디게 내려진다면 일에는 도움이 없게 될것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만일 미리 상소가 들어갈 시기를 안다면 출납(出納)할 즈음에 마땅히 주선(周旋)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원휘는 평안 병사로써 하직(下直)할 때 신이 ‘전에 하고자 하였던 바를 지금 하게 되니 과연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원휘가 말하기를,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김일경의 무리가 정국(政局)을 맡게 되면 천하(天下)를 탕평(蕩平)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탕평’이란 것은 노론(老論)을 모조리 살해하고 남인(南人)과 소론(少論)만을 전적으로 임용하려는 것입니다. 원휘의 아들 원일서(元日瑞)가 박상검과 서로 결탁하고 왕래한 상황은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신이 삼가 그 당시의 일을 살펴보건대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박상검이 왕세제를 해치고자 하여 교지(矯旨)를 소매 속에 넣고 장차 승정원에 내리려하여 위기가 호흡(呼吸)의 사이에 닥쳐 있을 때 왕세제께서 인원 왕대비(仁元王大妃)께 울면서 고하시니, 왕대비께서 하교하시기를, ‘종사(宗社) 위망(危亡)의 기틀이 목전에 있는데 세제가 어찌 피혐(避嫌)하여 대조(大朝)께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히 대전의 침실(寢室)로 가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왕세제께서 이에 대전으로 가서 박상검의 교지한 죄를 주달하고, 대비전(大妃殿)에서는 또 재차 언서(諺書)로 하교하시어 환첩(宦妾)의 죄를 처형하니, 궁위(宮闈)가 깨끗이 맑아지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성상의 우애(友愛)하는 마음에서 연유된 것이나,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침착한 기지(機智)와 은밀한 계획이 양궁(兩宮)을 지교(指敎)하여 위험을 전환시켜 안정되게 만든 것입니다. 옛적의 이른바 ‘여중(女中)의 요순(堯舜)’이라는 말이 인원 왕후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12월 24일 경진
양사(兩司)에서 물론(物論)이 두 환관(宦官)과 두 궁인(宮人)의 국문(鞫問)을 청하지 않고 곧바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청한 것을 비난한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이어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실정을 밝혀내어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석렬(石烈)이 자살(自殺)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이졸(吏卒)을 내어 체포하게 하였으나, 석렬이 이미 죽은 뒤였다. 의금부에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석렬의 치폐(致斃)한 상황을 검핵(檢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필정(必貞)이 자살(自殺)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의금부의 관리(官吏)가 방호(防護)를 잘하지 못하여 죄인이 자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청컨대 입직(入直)했던 도사(都事)를 잡아다 신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5일 신사
박상검(朴尙儉)의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의 신하들이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고 국문할 것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재로(金在魯), 사직(司直) 이기익(李箕翊), 호군(護軍) 심택현(沈宅賢), 전(前) 참의(參議) 조상경(趙尙絅), 사과(司果) 유복명(柳復明)이 각각 상소하여 진론(陳論)하였다. 그리고 좌윤(左尹) 황일하(黃一夏)는 상소하기를,
"춘궁(春宮)께서 궁료(宮僚)들에게 하령(下令)하시고 자전(慈殿)께서 약방(藥房)에 서찰(書札)을 내린 것은 대개 착수(着手)할 곳이 없고 위축(危蹙)되고 절박한 뜻에서 연유된 것인데, 궁관(宮官)은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대신(大臣)은 그 내린 봉서(封書)를 비밀에 붙였습니다. 그간의 거조(擧措)는 상식적인 생각으로써는 헤아릴 수가 없는 점이 있습니다. 환첩(宦妾)을 국문하고 동당(同黨)을 밝혀내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인데도 직책이 삼사(三司)에 있는 자가 곧바로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가, 그 요망한 궁비[妖婢]가 자살하여 진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옥사(獄事)를 살피는 책임을 맡은 관원은 삼사의 계사(啓辭)를 윤종(允從)할 적에 마땅히 즉시 역비를 잡아다 놓고 전지(傳旨)가 내려지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제멋대로 하도록 맡겨두어 서로 잇따라 자살하였으니, 이는 단서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의도가 엄호(掩護)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말이 춘궁에게 핍박(逼迫)한 자에 있어서는 혹은 승진시켜 본병(本兵)의 장관(長官)으로 삼으려 하기도 하고 혹은 발탁하여 웅번(雄蕃)의 직임을 임명하기도 하면서 전혀 조금도 자중(自重)하는 뜻이 없었으니, 저 환첩(宦妾)들이 중간에서 방해를 한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빈청(賓廳)의 계달(啓達)에 참여하였으나 창졸간에 사실(事實)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출(罷黜)한 뒤에 듣건대 ‘자지(慈旨) 가운데 궁인(宮人) 및 환시(宦寺)와 체결(締結)한 자는 형률에 따라 처단(處斷)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빈청의 계사(啓辭)에는 ‘한 명의 궁인이 환시와 체결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자교(慈敎)의 본지(本旨)와 다름이 있다.’고 합니다. 신의 들은 바가 과연 빈말이 아닌데도 이러한 서로 틀린 점이 있다면 그것이 도리(道理)에 있어서 과연 어찌되겠습니까? 두 궁인은 한 시각도 편안히 누워서 지낼 수가 없는데 해가 지고 밤이 새도록 버젓이 집에 있었고, 계사(啓辭)는 어제 윤허를 받았는데 잡아 가두는 일은 그 이튿날에나 있게 되어 한 명의 역적 궁인으로 하여금 곧바로 자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후사(喉司)와 금오(金吾)에서 지체시킨 의도가 현저히 있었으니, 신은 삼가 해괴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12월 27일 계미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송상기(宋相琦)의 상소로 인해 차자(箚子)를 올려 전후의 자교(慈敎)를 낱낱이 열거한 뒤 스스로 변명하기를,
"자교의 수찰(手札)이야말로 얼마나 엄경(嚴敬)하고 이 일의 관계된 것이야말로 또 얼마나 중대합니까?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한글자라도 보태고 빼서 지의(旨意)를 변환(變幻)시켜 스스로 부도(不道)의 죄에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함께 본 것이며 여러 신하들이 참여하여 본 것입니다. 자천(慈天)이 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사초(史草)가 분명히 있으니, 고신(考信)할 수 있습니다. 중신(重臣)이 어디에서 듣고 갑자기 근거없는 유언 비어를 선동하여 곧바로 ‘자교의 본지(本旨)와 다름이 있다.’고 말을 하여 마치 입증(立證)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명의 궁인이 환시와 체결했다.’는 하교로 인하여 거짓 뒤집고 공교롭게 꾸며서 은연중에 마치 외부(外部) 사람이 참으로 환시와 체결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하여 의란(疑亂)·현혹(眩惑)시킬 계획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스스로 그것이 자지(慈旨)를 속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아! 또한 비통한 일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문침(問寢)할 즈음에 신의 말을 동조(東朝)께 앙품(仰稟)하신다면 그간의 사실을 환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속임이 있다면 상형(常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자성(慈聖)께서 처음에 내린 언교(諺敎)는 궁인이 환시와 체결했다는 내용이고, 재차 내리신 언교는 궁인의 성명(姓名)을 써서 내릴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환관과 체결하였다는 일이다. 중신의 상소는 원래 이 일을 알지 못하고 한 것으로서 인구(引咎)하는 것은 부당하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9일 을유
문유도(文有道)와 박상검(朴尙儉)을 국문하였다. 문유도가 공칭(供稱)하기를,
"승전색(承傳色)은 항상 내반원(內班院)에 거처하면서 승정원에서 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문서(文書)나 계사(啓辭)를 올리는데, 시녀(侍女)를 불러서 전달합니다. 혹 전좌(殿坐)를 만나게 되면 곧바로 입납(入納)하고 비답을 받들어 나와 전달할 뿐입니다. 동궁(東宮)의 문안(問安)에 대해서는 원래 알지도 못하는 일이니, 어찌 격색(隔塞)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내 몸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하교는 더욱 매우 애매합니다."
하고, 박상검은 공칭하기를,
"21일에 입직(入直)하여 동료(同僚)의 전하는 말을 들으니, ‘20일 밤에 왕세제(王世弟)께서 문안(問安)으로 인하여 대전(大殿)에 아뢰기를, 「내관(內官)이 정사(政事)에 간여하여 이번의 처분(處分)에는 내관이 범한 바가 많이 있으니 청컨대 조사해 내어 죄를 바르게 처단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셨다. 대전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번의 처분은 내가 스스로 한 것이니, 어찌 내관이 간여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동궁의 말이 만일 그러하다면 사실을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시어, 세제(世弟)가 나와 청음정(淸陰亭)에 앉아서 여러 내관들을 불러서 조사해 내게 하셨고, 여러 내관들은 말하기를, 「그와 같은 일은 신 등이 아는 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제께서 하령(下令)하시기를, 「문유도와 박상검이 죄를 범한 바가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나게 되면 안색(顔色)이 달라짐이 있다. 이른바 마음속에 있으면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니, 내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하시고, 인하여 두 환관의 죄목을 비망기(備忘記)에 써서 승전 내관(承傳內官)으로 하여금 계품(啓稟)한 뒤에 승정원에 전달하도록 하셨다. 내관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이미 사실을 조사해 내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대전(大殿)께 친히 스스로 계품(啓稟)하신 뒤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니, 세제께서 친히 스스로 가지고 들어가셨으며, 한참 있다가 나와서 하령하시기를, 「이미 계품하였으니 승정원에 전할 수 있다.」 하셨다. 내관이 바야흐로 나가서 전달하려고 하는데, 대전(大殿)에서 급히 환수(還收)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이내 그것을 찢어버렸다. 비망기는 비록 이미 환수되었으나 세제께서 이미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니, 당사자 처지의 도리로서는 그대로 버젓이 있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몹시 망극(罔極)하였습니다. 내관의 책임이란 무슨 공사(公事)에 있어서 계자(啓字)를 찍고 비답(批答)을 쓸 따름이니, 어찌 간범(干犯)할 이치가 있겠습니까만, 옥(獄)에 갇힌 이래로 공사(公事)를 간범했다는 것을 죄로 삼을 줄 생각했는데, 이제 전지(傳旨)를 들으니 실로 뜻밖입니다. 문침(問寢)과 시선(視膳)에 이르러서는 본디 내간(內間)의 일이니, 내관이 어찌 저지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동떨어져 있으니, 어찌 동궁(東宮)을 제거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금부 당상(禁府堂上)·대관(臺官)·간관(諫官)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죄인이 올린 공사(供辭)가 거칠게 말하고 난잡하게 설명하면서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언급하여, 위로는 성궁(聖躬)을 속이고 아래로는 동궁을 무함하였습니다. 청컨대 엄한 형벌로 죄를 바르게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30일 병술
송상기(宋相琦)를 강진현(康津縣)에 귀양보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2월 (0) | 2025.10.19 |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11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10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9월 (0) | 2025.10.19 |